강해
애곡할 때와 기뻐할 때
김태정 목사데살로니가전서 50:1-3약 10분 분량
그동안 이런 저런 초청이나 소식을 많이 접하며 살아왔지만, 나이 들면서 부쩍 자주 접하는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주변 지인(知人)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싫던 좋던 장례식장 출입이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에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이전 젊었던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뭐라 할까 내 자신도 이제 죽음의 문턱에 아주 가까이 와있다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젊었던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입니다. 그 때야 고인(故人)이 된 분들과 나와의 나이 차이가 적어도 한두 세대는 넘어, 죽음이 그렇게 심각하게 와 닿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고인과 나이 차이가 이제 불과 십여 년 안팎이거나 때로는 나의 동료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굳이 잊으려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의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등등 온갖 상념(想念)에 빠져 있는 내 모습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과연 정상인지 아닌 지조차 헷갈리기도 합니다.
죽음을 잊음. 지난 시절 내 모습을 그려보면 이는 분명 정상이 아닙니다. 영국 가수 ‘메리 홉킨스’가 오래 전에 부른 유명한 노래 “Those were the days”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친구여, 그 때는 정말 좋았지. 우리는 그 시절이 끝도 한도 없을 줄 알았지. 영원히 노래하고 춤추며 살 수 있을 줄로 알았지.” 나도 지난 세월을 이런 자세로 살아왔다는 생각입니다. 머리로야 인생에 누구나 종말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가슴으로는 애써 거부하고 잊으려 했던 것이지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른 바 “탈현대 사회”(postmodern society)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라는 종교단체가 운명하는 신문,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에디’(M. B. Eddy)라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신문이야 설립자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더라도, 과연 누가 “생각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의 존재 자체를 아예 거부하려는 태도는 이와 같은 범신론 계열의 종교단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즉 종교나 세계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업주의에 물든 현대 사회와 문화도 그 공모자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우리의 가장 큰 원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문화는 오히려 죽음을 잊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온갖 종류의 신무기들을 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건강보조식품, 성형수술, 찜질과 목욕, 체육 시설 등. 이들 모두 활기차고 건강한 젊음을 유지하는데, 즉 죽음을 잊게 하는 필수적인 무기라고 선전하면서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 죽음을 잊게 하려고, 이를 대체할 만 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에도 가히 천재적입니다. 보험회사가 만들어낸 “생명보험”이라는 단어가 그 한 예입니다. 사실 이 보험의 이름은 “사망보험”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보험은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현실을 완화시키거나 축소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죽었다”는 말 대신에 “서거(逝去)하였다”, “영면(永眠)하였다”, “별세하였다”, 또는 “숨을 거두었다” 등으로 고쳐 말하는가 하면, 기독교인의 경우라면 “소천(所天)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에 대한 표현도 달라집니다. 죽은 자는 “고인”(故人)이나, “사랑하던 사람”으로 바뀌고, 그는 “시체 보관소”가 아닌 “영안실”(永安室)에 안치가 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광고도 “죽음 알림”이 아니라 “부음”(訃音)으로 전해집니다.
이처럼 많은 은유(隱喩)나 상징을 가진 단어가 죽음 말고 또 있을까? 왜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많은 수식어를 헌정(獻呈)하고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태도는 마치 죽은 자를 방부처리하고 얼굴에 화장(化粧)을 해놓아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는 역설적으로 죽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까?
우리의 이와 같은 모습 뒤에는 여러 요인들이 아주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 심리적인 요인이 가장 큰 것처럼 보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시그먼드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가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죽음은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가장 두려워하는 실재(實在)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더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더욱 부인하고 거부하고 싶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상 세계 즉 영화나 TV 드라마 등에서 죽음의 융단포격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죽음이 일상사가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려는 욕구 역시 비례해서 늘어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역설은 그것을 무시할수록 더 절망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 찾아왔을 때 나타나는 반응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놓고 대부분의 유족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죽음을 잊고 살다가 정작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이를 맞는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죽음을 잊으려 하다가 부활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죽음을 환영함. 이처럼 죽음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하려는 “탈현대 사회”의 모습과는 달리, 이를 운명처럼 즐겁게 수용하려했던 모습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보여주고 있었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당시 ‘아테네’ 사회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이단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죄목으로 당국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죽게 되자 제자들과 지인들이 몰려와 한사코 안 된다고 하면서 말렸습니다만, 그는 오히려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스스럼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독배(毒杯)를 마시고는 죽었습니다. 사라져 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지요.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죽는 일을 즐거운 일로 생각하게 했을까? ‘소피스트’(Sophist) 철학자로서의 자기 논리와 확신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는 영혼불멸설을 신봉하는 자로서, 선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유한하고 썩을 수밖에 없는 육체 속에 갇혀 있으므로, 죽음만이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혼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자 구원자가 되는 셈입니다. 지고(地高)의 자유는 결국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태도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결국 이것은 자살을 조장하거나 부추기는 그야말로 혹세무민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백번을 양보해서 그의 생각이 맞다 치더라도, 그 자신은 평화롭게 죽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은 유족이나 친지들이 겪어야 할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충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스타 제자 ‘플라톤’(Plato)은 그의 저서 <파이도(Phaedo)>에서 스승이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를 지켜보던 모두가 큰 슬픔에 잠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항거함. 이와 같이 죽음을 깡그리 잊고 사는 사회도, 그렇다고 죽음을 영혼의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대안으로 환영하는 사회도, 모두 건강한 사회라 보기 어렵습니다. 잊을 수도 없고 즐겁게 맞이할 수도 없는 상대라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것에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우리는 결코 죽음을 잊어버리거나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는 죄와 율법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소지한 채 우리를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를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거부하고 항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실재하지만, 이미 패배했고 무기력한 식물인간처럼 누워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죽었다”는 선포이자 실증(實證)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항상 인식하되, 또한 거부하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인 듯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에 항상 기억하라는 것일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부활하였고 또한 앞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거부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동시에 소망을 가지고 기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죽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말입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울었습니다(50:1). 하지만 소망 없는 자처럼 절망하거나 비탄에 빠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울어야 할 때이지만, 울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과 당부를 존중했으며, 자신이 했던 약속을 지키려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해(遺骸)를 ‘가나안’ 땅 조상의 매장지 ‘막벨라’ 동굴에 안치했습니다(13절).
그리고 훗날 자신이 죽을 때에도 그를 같은 곳에 묻어달라고 남은 자들에게 당부할 것이었습니다(25절).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와 같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소망 없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는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슬픔의 순간에도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고하고 있습니다(참고. 살전 4:18).
하지만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대우(待遇)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다고 해서 죽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그를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극진한 예를 다하여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말입니다. 지금 그는 온갖 예를 갖추어 아버지의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사십일에 걸친 방부처리, 칠십일 동안의 애도와 추모 기간, 그리고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장엄한 장례 행렬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예를 다 갖추어 죽은 자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추모식이 당시 이집트백성들에게 어떻게 비추었을까? 무슨 깨달음을 주었을까?
공동체가 함께. ‘프리센’ 목사님은 “장례식이 뜸할수록 찬된 영성을 형성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장례식이 마치 북극성 같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통해 현재 서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 목적지로 방향을 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은 “우리는 장례식에서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을 추스린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 “장례식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잣대를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말입니다. 장례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아버지였으며 사랑스러운 남편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잘 돌보았고, 교회에서 젊은 여성들의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테레사 라이소트’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홀로 죽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늘 함께 겪는 경험입니다. 계속되는 의식과 예배를 통해서 임종은 물론 그 이후까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마지막 두 죽음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슬퍼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 죽음이 궁극적으로 죽고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