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상과 정신
김태정 목사약 111분 분량

기독교한국침례회
늘푸른 교회
머리 말
이 교재는 <늘푸른 교회>의 새 가족이 된 분들을 위하여 만든 소개서입니다(교회학교 교과번호: 100). 무릇 모든 단체나 기관이나 국가는 나름대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목표나 세부 실천 계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에 있어서는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 교회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적 차이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 소개한 내용들은 본 교회가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회원 상호간의 언약 하에 합의한 이상과 정신을 담은 것입니다.
그 내용은 주로 교회의 본질과 사역에 관한 것들입니다. 교회는 어떠한 곳이며, 교인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또 타인과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는지 등에 관한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우리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망라하였습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교인들조차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교회적으로도 하나님의 풍성한 계획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이 세상에서 구원으로 불러내실 때, 사막이나 광야나 학교나 개인 집이나 또는 시장으로 불러내지 않으시고, 항상 교회로 불러 모으십니다. 즉 그의 백성으로 불러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그분의 섭리를 이루어가십니다. 이처럼 중요한 교회에 대해서 성도가 잘 알고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이나 개인 경건 사역의 지나친 강조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이 부각되고 상대적으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화해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주어는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교재는 이점을 염두에 두고 꾸민 것입니다. 책의 구성은 아래 보는 바처럼 전체적으로 다섯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 1장 <교회는 새 삶의 방식이다>에서는 교회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시하셨던 인류의 유일한 삶의 대안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제 2장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다>에서는 교회의 본질과 사역을 다루고 있는데, 교회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밝혀놓았습니다.
제 3장 <교회는 가정이다>에서는 우리 교회의 꿈과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처음 두 장에서 일반적으로 다룬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 4장 <교회는 학교다>에서는 교회 학교를 통한 지적 훈련에 대한 제반 내용과 교과과정들을 요약하였습니다.
제 5장 <교회는 군대다>에서는 주님의 대위임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진보시키기 위한 방안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희망하건대, 이 책을 다 읽으신 후에 우리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어디로 지향해 가려고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본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시는 분은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숙지하시고 한 가족으로서의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됩니다. 부디 좋은 경험이 되시기 바랍니다.
<늘푸른 교회>
교회 회원이 되는 길
침례교회의 가장 특징적인 이상과 정신 중의 하나는 개인 영혼의 자유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신조나 믿음을 강요받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서 본 교회는 개개인의 자발적이고도 자의적인 결단에 따라 회원이 되기로 서약한 사람에 한해서, 사무 처리회의 의결을 거쳐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입니다. 본 교회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절차와 개인적 결의가 있으면 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는다.
2. 교회의 제반 회원 훈련을 받는다.
참고도서
아래 도서들은 <가정교회>나 우리교회의 <목장>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중요한 참고자료들이므로 꼭 읽어두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특히 전체 일곱 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삶> 시리즈는 목장의 훈련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누구든 목장에 소속된 자는 목장 내의 다른 목원이나 목자의 도움을 받아 이 과정을 마치도록 요구받게 될 것입니다.
1.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0): 준비』.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2.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1): 안내』.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3.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3): 실천』.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4.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4): 전도』.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5.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5): 후원자』.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6.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2): 셀인턴』.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7. 랄프 네이버, 『새로운 삶 시리즈(2): 셀리더』. 박영철 역. 서울: NCD, 2000.
8. 최영기, 『가정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서울: 두란노, 2008.
9. 이남하, 『별난 교회』.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6.
10. 이남하, 『교회 훈련 및 셀 목회』. 서울: 기독교한국침례회 교회진흥원, 1996.
11. Huttenlocker, K. 『하나님의 가정으로서의 교회』. 황을호 역. 생명의 말씀사, 1988.
12. MacArthur, J.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이춘이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6.
13 쟝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찬성 역. 서울: 성바오로, 1995.
14. Gilbert, L. 『팀 사역』. 채수범∙황석호 역. 서울: 도서출판 프리셒트, 1995.
15. Hull, B. 『모든 신자를 제자로 삼는 교회』. 박영철 역. 서울: 요단, 1993.
16. Hull, B. 『목회자가 제자삼아야 교회가 산다』. 박경환 역. 서울: 요단, 1994.
17. Hull, B. 『제자삼는 자 예수 그리스도』. 박경환 역. 서울: 요단, 1994.
18. Byrne, H. W. Huttenlocker, K. 『A Christian Approach to Education』. Mott Media: Milford, MI, 1981.
19. 정정숙, 『기독교 교육학』. 서울: 도서출판 베다니, 1997.
20.
목 차
머리 말......................................................................................................................................3
우리교회 회원이 되는 길.....................................................................................................5
참고도서 목록..........................................................................................................................6
1. 교회는 새 삶의 방식이다................................................................................................9
2.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다..................................................................................18
3. 교회는 가정이다...............................................................................................................29
4. 교회는 학교다...................................................................................................................58
부록...........................................................................................................................................78
개인헌신 카드........................................................................................................................79
서약서(목원 용).....................................................................................................................80
목자 추천서............................................................................................................................81
서약서(목자/부목자 용).......................................................................................................82
목자보고서..............................................................................................................................83
교회학교 수강 신청서.........................................................................................................84
목장 사역 활동 점검표.......................................................................................................85
1
교회: 새 삶의 방식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 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요즈음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개스 페달”(gas pedal)은 원래는 바닥에서 수직으로 올라와 있어 운전자들에게 매우 불편을 주었다고 합니다. 운전할 때마다 일어서서 페달 위에 발을 눌러대는 운전자의 모습을 상상한 해도 참으로 불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어느 자동차 회사의 설계사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비스듬하게 바꾸고 난 뒤부터 그 회사의 차가 폭발적으로 팔렸다고 합니다. 회사 측에서 운전자 중심의 “발상의 전환”을 한 것입니다. 이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라 합니다.
이 용어는 원래 ‘토마스 쿤’(Thomas Kuhn) 박사가 자신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 사용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과학의 분야에서도 정치나 사회 분야에서처럼 혁명이 일어나며, 그러한 혁명에 의해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쓰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정치나 사회적인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은 그 사회에 내부의 긴장과 갈등이 더 이상 어떤 해결점을 찾지 못할 때 일어나듯이, 과학의 영역에서도 어떤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서 기존의 과학적 이론이나 법칙으로 도저히 설명을 할 수 없을 때, 전혀 새롭고도 혁명적인 이론 체계가 도입된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천문학에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이나, 물리학에서 ‘뉴턴’의 고전 물리학에서 현대 양자물리학으로의 전환, 또는 ‘아인스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등이 바로 그러한 “패러다임 쉬프트”의 전형이 될 것입니다.
1. 낡은 술 부대-유대교
그러나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때로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충돌이나 마찰을 수반합니다. 기업의 경우라면 누군가 새로운 경영의 혁신을 꾀하고자 할 때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사장이나 기업 경영진의 반대일 수도 있고, 정치∙사회 분야라면 새로운 입법을 추진하려 할 때 기득권층의 저항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과학이나 역사를 통해서도 이러한 현상은 무수히도 많이 있어 왔습니다.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재판이나, ‘컬럼버스’에 대한 동 시대 사람들의 조롱이 다 그러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 과학이나 기술, 기업이나 정치 영역뿐이겠습니까?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도 당연히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존의 낡은 술 부대였던 ‘유대’교를 대신해서 새롭고도 혁명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하셨을 때, 그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저항과 갈등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새로운 존재 방식이란 무엇이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또는 천국), 곧 “교회”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이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삶의 대안은 당시 ‘유대’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혁명적인 대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은 이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기도 합니다. 이제 교회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을 알아보기 전에 당시 기존의 낡은 패러다임이었던 ‘유대’교의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혈연 공동체. ‘유대’교는 우선 ‘유대’민족 중심으로 이루어진 혈연 공동체였습니다. 기존의 가족 중심의 혈연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 공동체였습니다. 다른 인종이나 국가는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치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만일 다른 민족이 그들의 일원이 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일정한 의식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침례나 할례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차를 거친 후에는 그의 모든 과거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원론적 공동체. 그리고 ‘유대’교는 모든 것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 체계를 지닌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다 경계선을 그었습니다: 우주적 경계선; 민족적 경계선; 종교적 경계선; 종교 의식적 경계선; 신체적 경계선; 사회적 경계선. 이런 점에서 볼 때 유대교는 이슬람 종교와 대동소이하다 할 것입니다. 서로가 절대적인 선(善)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전쟁이 나지 않을 수 없나 봅니다.
계급 공동체. 그 결과 이들은 자연히 계급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거룩한 계층이 결국 지배 계급을 형성하게 되고,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존경받는 지배 계층이 되었습니다. 성전 예배를 담당하는 제사장 계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보수∙기득권층에 속하여 성전과 성전 예배를 자신들의 체제 유지를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악용했습니다. 성전에 들어오는 온갖 헌금이나 예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레위’ 족은 원래 땅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레위’ 인들은 실은 대지주 계층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땅에서 직접 노동은 하지 않고, 대신에 가난한 소작농들에게 땅을 임대해 주고 그 대가를 챙겨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약한 소작농들이 제대로 임대료 등을 체납하였을 때는 십일조나 기타 정결법 등을 발동하여 그 땅을 가로채 버립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엄청난 토지의 소유주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레위기> 해석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이들에 따르면, ‘레위’ 족은 땅을 갖지 못하도록 규정된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므로, 땅을 소유하면서 타임에게 임대 사업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도사(道士)같은 성경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니 이 사람들이 부활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잘 살고 잘 먹고 지내는데, 영생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이래서 이들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파는 그마나 신학적으로는 보수∙정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새 부대-교회
이처럼 낡은 질서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새롭고 혁명적인 대안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대안의 공동체. 교회는 기존의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대안의 공동체입니다. 새로운 혈연관계의 공동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마 12:46-50; 막 3:31-35; 눅 8:19-20)
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1-35; 마 12:46-50; 눅 8:19-21)
즉 교회는 새롭고도 혁명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무엇인 혁명적입니까? 한 마디로 교회는 “새로운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거부하는 그 어떠한 엣 질서나 관계도 무의해 질 것입니다(마 19:29-30; 막 10:29-30; 눅 18:29-30).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마 19:29-30; 눅 18:29-30)
자유, 평등, 사랑의 공동체. 교회는 또한 모든 차별(성과 계급과 인종)을 극복한 자유, 평등,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상)
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8-12)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7-28)
섬김과 희생의 공동체. 이 또한 너무나 교회에 대한 너무나 친숙한 가르침으로서, 예수님의 그 유명한 말씀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해방의 공동체. 교회는 또한 빼앗기고 억눌린 자를 위한 해방의 공동체입니다.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눅 10:25-37).
이상과 같은 것들이 예수님께서 당시 사회에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려 했던 공동체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당연히 이들 혁명적인 가르침은 즉각적으로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자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의 혈연의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했던 삶의 방식입니다.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큰 희생이 따를 것 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거부감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선택의 위기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3. 새 술은 새 부대에
‘베드로’ 역시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무슨 말입니까? “지금 네가 가진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 19:26). ‘니고데모’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요 3:3). ‘니고데모’는 옛 질서와 가치 체계를 상징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그가 진정으로 변화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즉 새로운 사고체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마 5:20). 낡은 ‘패러다임’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바울’ 사도만큼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경험했던 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순전히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만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역시 그동안 교회 안에서 배우고 들어왔던 그 낡은 ‘패러다임’의 속에서 머물기를 고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의 보다 넓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새로워 져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복음의 새 술을 담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새로운 술 부대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4. 기도와 성경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재주로 매일처럼 변화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새 술과 새 부대를 찾으러 나설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와 있고,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과 <신약>의 기자들이 어떻게 혁명적인 세계관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요? 과연 누구로부터 배웠을까요? 기도와 성경공부입니다.
이들은 이 두 가지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재해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구약>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신약>의 교훈들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양식 <신약>이 없이는 내 인생의 의미나 목표나 계획들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설령 알 수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일 뿐입니다. <잠언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 29:1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나 지혜가 없다면 결국 자신의 지혜와 지식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길을 가다가 잘 모를 때, 무작정 내 생각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도를 의지하거나, 그 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전문가에 물어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가 본적도 없고, 보지도 못한 미래나 내 인생에 대해서 누구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까? 당연히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주님에게 물어보는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어떻게요? 기도와 성경공부입니다. 이 두 도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입니다. 이 둘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도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어떠한 명령이나, 축복이나, 정보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는 하루의 얼마를 성경공부와 기도에 보내고 있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는 그야말로 핑계일 뿐입니다. 언제까지나 바쁘다는 이유로 하나님과의 교제나 대화를 끊고 지내실 요량입니까?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교회를 개척한 조용기 목사님은 자신의 성공의 비결에 대해서 매일 하루 3시간을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합니다. 그리고 나는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암송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은 과연 얼마나 됩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은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 제 삼자로부터 주어들은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직접 연구를 통해서 나의 살이 되고 뼈가 된 것입니까? 만일 직접적인 노력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면 그 지식이 옳든 그르든 나는 그 지식을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즉 행동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주워들은 것이라면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5. 결단과 헌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굳이 ‘존 스토트’ 목사님의 진단을 빌지 않더라도 (1) 비인간화와, (2) 다원화와, (3) 세속화로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병은 앞으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속화 되고 심화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좋아합니까? 그래서 더욱 투지를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후자의 입장이라면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그 대안을 교회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까?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그런 교회입니까? 주일 하루 나와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그리고는 뿔뿔이 흩어지는 지극히 비인간화 되고, 기계적이며, 피상적인 교회 말입니다. 이곳에서는 교회 사역은 교인들에 의해서 고용된 일부 전문적인 사역자들에 의해서 계획되고 처리됩니다. 교인들은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곳에서는 모두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나 만남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별도의 수평적인 관계 형성을 위한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다 잘 알아서 하기 때문에 특별히 훈계하고, 권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싫어합니다. 간섭받기 싫다는 것이지요. 그저 전문 사역자 몇 사람이 죽어라고 교인들 집을 돌아다니면서 유모 노릇만 해주면 됩니다. 이들 사역자 역시 자신의 이런 사역에 대해서 지극히 만족해합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성도들이 이처럼 많기 때문에 아주 흐뭇하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이런 곳에서는 성도들 간의 긴밀한 교제도 필요 없습니다. 인격과 신앙의 성숙이 성도 간의 만남과 교제와 훈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꿰차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하면 슬그머니 빠져버립니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만의 문제를 안고, 이를 해결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새벽 기도나 철야 기도회 등을 통해서 말입니다. 내 주변에 누가 무슨 일로 기도하며, 고함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고, 또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목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교회는 어느 날 하나의 거대한 유령의 집이 되어버립니다. 이 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동료 지체의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해결책도 대안도 제시해 주지 못한 채, 주일 하루 동안만 마치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처럼 모두들 나와 개미처럼 분주하게 돌아다닙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나는 솔직히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만족하십니까? 나의 예배 경험은 어떠합니까? 매 번 하나님을 만나는 역동적인 예배의 체험을 누리고 있습니까? 성도간의 교제는 어떻습니까? 그저 만나서 즐겁고, 안식이 있으며, 서로를 향한 관심이나 배려나 기도가 있습니까? 이런 경험을 토대로 공동체적인 사역에 적극적이고도 헌신적으로 동참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나의 직장이나 학교에서 성공적인 지도자적인 기독교인으로서 인정받고 있습니까? 일련의 훈련이 이들 질문들에 대해서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교회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의 본질이나 사역, 또는 이상적인 교회관 등등에 대해서 피력해 봅시다.
2. 이 장에서 교회와 관련하여 제시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는 무엇입니까?
3. 교회는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웠습니까?
4. 신약교회와 유대교회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5. 신약교회야말로 다음 세대에도 변함없이 인간의 제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6. 나의 각오와 결단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각오에 기도와 성경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2

교회의 사역: 관계의 사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
우리는 앞에서 교회는 새로운 삶의 방식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대안(代案)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공을 초월하는 인류의 영원한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아닌 여러 제도를 통해서 인류의 복지나 안녕을 추구해 보려고 시도해 왔습니다만, 그 때마다 결과는 제도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을 뿐입니다. 이는 마치 한 사람이 가정을 떠나 여행을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 여행 초기에는 집을 떠나는 즐거움이나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만, 점차 시일이 경과할수록 피로감이 쌓이고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생 전체로 확대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늘 불안하고, 피곤하며, 고달픈 것은 우리가 원해 있어야 할 그 집을 떠나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야곱’이 이십여 년의 세월을 보냈던 ‘하란’처럼 경쟁과 불신과 소외감과 고독이 왕 노릇 하는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가족끼리는 경쟁이 필요 없습니다. 절대 용납과 절대 비밀이 보장됩니다. 절대적인 지지와 위로와 후원이 있습니다. 눈물과 함께 아파함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바로 이러한 혁명적인 삶의 방식을 구현하라고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습니다.
이 과에서는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의 본질과 사역에 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라면, 교회의 사역은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둘을 혼돈하기도 하는데,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런 저런 교회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 먼저 말하려 합니다. 그러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사역에 대한 설명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과에서는 우선 교회의 본질이나 정의(定義)를 알아본 후에 교회의 사역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1.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교회란 과연 무엇입니까? 교회의 정의와 관련해서 교과서적인 설명이나 답변들을 이곳에서 다시 인용하기보다는 쉽고도 간단한 이해를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
우리는 여기서 두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교회”(ejkklhsiva, 에클레시아); (2) “천국”(basileiva, 바실레이아). “교회”와 “천국”에 대한 영어 번역은 각각 church와 kingdom of God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교회”와 “천국”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우선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알아보아야겠습니다.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가 미치는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그 영역 이란 사람의 마음일 수도 있고, 우주 전체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국회의원 개개인을 입법기관 즉 국회로 부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있고, 동시에 내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일부이거나 또는 하나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며, 또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유일한 통로라는 것입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교회를 창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부분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이었습니다.
우리가 가 보지도 않았고,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없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 방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가장 완벽한 대답은 “교회에 와보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예: 마 13, 22장). 예수님의 소위 “산상수훈”(山上垂訓)도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 방식에 관한 강의입니다(참고, 마 5-7장). 이 부분을 읽어보면 이 세상의 상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혁명적인 삶의 방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를 “혁명적인 삶의 방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한 교부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칼빈’(J. Calvin)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의 태도 또한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구원시키지 않고 교회에 들여보낸 적이 없으며, 반대로 교회에 들여보내지 않고 구원시킨 적이 없다.” 이 모든 발언들은 교회에 관한 통찰력 넘치는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세속화나 다원화나 그리고 상대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믿겠으나 교회는 나갈 수 없다는 태도나, 또는 교회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런 무지는 비단 이런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크게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예컨대, 지난 한 세대동안 개인 경건운동의 영향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를 배우게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나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서 “교회의 하나님”이나 또는 “우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크게 퇴조해 버렸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공동체 의식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고,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나, 또는 <시편>에서 개인적인 간구나 고백을 드릴 때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 외 모든 경우에서 하나님은 “아버지, 우리 하나님”입니다. “주기도문”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2. 교회의 이미지
<성경>은 이러한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어렵고도, 신학적인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나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여러 그림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
(2) 그리스도의 몸(또는 군대)
(3) 성령의 전(피조물)
(4) 믿음, 소망, 사랑의 교제 “교회론”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는 본 <우리 교회> 교육과정(교과과정 100) 속에 포함되어 따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들 각각은 교회의 모습에 대한 다른 표현들이긴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한 결 같이 일치와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들 표상들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더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 네 가지 표상들 중에서 처음 세 가지에 대해서만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교회에 대한 첫 번째 비유는 교회 즉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고후 6:16; 롬 9:25-26). 이 표상은 가장 초기의 것이며,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을 제외하면 이 표상은 <신약> 전체에 걸쳐 두루 나타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이스라엘간의 연속성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나 집회”(히브리어: 카할)를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의미의 “민족 또는 백성”(히브리어: 암)을 뜻합니다. <신약>의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른 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자신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동일시하려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를 통해서 떠올리게 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이방 지역 ‘갈대아’의 ‘우르’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한 이방인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그를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신 것이지, 기존에 있던 한 국가를 입양해서 그분의 백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교회에 대한 두 번째 비유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엡 1:22-23; 롬 12:3-5). 이 비유와 관련하여 보다 상세한 설명을 위하여 다음 교재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1) Hodgson, P. C. 「교회론의 새 지평」. 박근원 역. 서울: 도서출판 진흥, 1996; (2) 김태정. 「회중교회를 위한 요한복음의 이해」. 석사학위 논문. 침례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96.
이 비유가 그리고 있는 이미지는 교회는 단순한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고, 영광의 대표자가 되시며, 우리는 각 지체로서 한 머리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이 비유는 교회 내 지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개 교회 간의 일체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라톤 경주에서 영광의 면류관은 선수의 머리 위에 올려주는 것이지, 팔이나 다리에 걸쳐주지 않듯이, 우리 역시 교회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엡 6:10-17). 이 비유 또한 영적 전투와 성도 간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나가서 싸우는 군대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피조물. 우리는 또한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우리가 “성전”(聖殿)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성령님은 오순절 사건에서 보듯이 교회를 있게 한 장본인입니다. 사실 “공동체”(community)라는 단어도 “세우다” 또는 “강하게 하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뮤니오’(munio)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성령의 피조물에는 “성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세우신 것들 중에는 이 외에도 실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사역과 관련해서 떠올릴 수 있는 세 가지 핵심 피조물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가정(벧전 2:5; 엡 2:19, 22)
(2) 하나님의 학교(엡 4:10-12; 신 6:4-6; 마 28:19-20)
(3) 하나님의 군대(엡 6:10-17)
사실 가정과 학교와 군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국가와 민족을 지탱시켜주는 핵심적이고도 기본적인 기관이자 조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가정으로, 학교로 또는 군대로 부르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이들 세 호칭은 결국 하나님의 소명, 즉 교회의 사역을 규정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3. 교회와 사역
처음 교회를 세울 때 간여하셨던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교회에 생명력을 제공하고 계시며,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하십니다. 교회의 사역을 논하기 위하여 우선 다시 한 번 <마태복음> 본문(16:18-19)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또 한 쌍의 동사에 주목하게 됩니다: “메다”; “풀다”.
무엇을 메고 무엇을 풀 것인가? 이 두 동사는 불가분 동일한 한 단어를 목적어로 갖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관계”입니다.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마태복음> 16:18-19의 본문은 엄밀하게는 교회 내에서 치리(治理)와 관련한 문제로서, 선교적인 차원과는 다소 동떨어진 본문입니다만, 일반적인 차원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교회는 끊어져 있는 관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를 “관계의 사역”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이 관계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가치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공동체 안에서 이 관계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관계가 끊어진 사람을 “죽은 자”로 규정했으며, 평화 또는 평강으로 이해되고 있는 “샬롬”도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 관계가 제대로 된 사람을 “의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참고. 창 2:18). 직장이나 학교나 교회에서나 이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죽을 맛입니다. 외롭고 괴롭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교회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미국 이민사회에서도 한국 교민들은 미국인 교회에 잘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이 뿐만 아닙니다. 다른 피조물 특히 자연세계와의 관계도 있습니다. 남극 대륙 상공에 엄청난 양의 오존이 파괴되고, 유해한 자외선이 마구 유입되어 지상의 생명체와 한경에 큰 위협이 되고 있으며,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수십 년 안에 북극해가 열릴 것이라는 경고가 울려 퍼지게 된 것은 인간이 주변 세상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던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환경과 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환경 친화적인 정책과 비전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위 두 가지 관계 외에도 한 가지 남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만,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중요한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근본이자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역을 논할 때, 이 세 가지 관계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맺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관계로부터 세 가지 사역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배 사역
(2) 교제 사역
(3) 선교 사역
이 세 관계의 사역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십자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아래 그림 참고), 성공적인 사역이란 결국 교회가 이 세 가지 사역을 어떻게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수행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소위 “관계의 십자가”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 사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반드시 올바른 예배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함께 드리는 공적 예배, 침례, 주의 만찬, 찬양, 감사, 기도 등이 예배의 행위 속에 모두 포함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을 때에만 이런 사역들이 제대도 드러나게 됩니다. 예컨대, 예배가 별로 흥미가 없거나 즐겁지가 않다든지, 찬양이 하기 싫다든지, 별로 기도할 것이 없다든지, 간증이나 고백이 없다든지, 하는 등이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면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볼 일입니다.
교제 사역. 교회 내의 지체들과의 올바른 관계는 반드시 올바른 교제로 나타납니다. “교제”(코이노니아)란 “나누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나눌 것인가? 우리가 모일 때, 가장 우선적으로 나누어야 대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그분의 인격과 그분께서 나에게 행하신 일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나누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시간(time)이나 재물(treasure)이나 은사(talent) 등이 있을 것입니다.
선교 사역. 선교 사역은 세상을 향한 관계 맺기로 볼 수 볼 수 있습니다. “로잔 언약”에 따르면 선교는 봉사와 복음 전도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면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펼칠 수 있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위대한 두 명령, 즉 “지상 명령”(the Greatest Command)과 “지상 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지상 명령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 22:37-39; 막 12:29-31; 눅 10:27)
(2) 지상 위임령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분한 모근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마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들 명령들은 모두 하나 같이 “관계의 사역”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이란 결국 관계의 사역입니다. 참고로, “관계의 사역”에 대한 무지가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다음 구절을 통해서 리트머스 테스트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무엇을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까? 금방 떠오르는 생각은 대개 무슨 사역이나 전도나 봉사 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반드시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는 일에 죽도록 충성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요 13:3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점과 관련해서 오늘날의 교회를 위해서 좋은 역할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행 2:42-47). 우리는 이어지는 두 장에서 관계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시켜갈 수 있는 방안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마 16:18-19를 중심으로 토의해 봅시다.
2.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교회의 네 가지 표상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이들 표상들로부터 교회의 사역에 대해서도 논의해 봅시다.
4. 관계의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3
교회 목장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은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교회에 대한 일반적이고 총괄적인 이야기는 앞 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종합 계획 또는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엡 1:9-10). 그러므로 교회는 우주 만물과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하신 그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엡 1:3-6). 그리고 교회의 사역은 다름 아닌 관계로부터 비롯된다는 점도 살펴보았습니다. 즉 우리가 맺고 있는 전 인격적인 관계와 관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필자는 앞 과에서 이를 “관계의 십자가”로 나타낸 바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가 있다면 이 사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고, 성숙시킬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진리란 그저 급진적이고도, 과격하게 실천해야 하는 법입니다. 원래 급진적이라든지 과격이라든지 하는 단어들은 부정적인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들을 진리나 예수님과 연관해서 사용할 때에는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 바뀝니다(예. 요 8:32).
따라서 교회의 조직이나 기능도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알기 쉬운 이미지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는 가정이다
(2) 교회는 학교다
(3) 교회는 군대다
이를 다시 그림으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 장에서는 교회 <목장>에서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교회 성장에 관한 전문가들이 한 결 같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 모델이 다름 아닌 <가정교회>입니다. <가정교회>의 이상과 정신에 관해서는 여러 책에서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들 내용들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요점만 소개할 것입니다. <가정교회>의 사역과 방법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 서적들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참고. 도서 목록).
<가정교회>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지닌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방식을 취하셨고, 초대교회가 이 방식을 채택했습니다(행 2:42-47; 롬 16:2-16; 고전 16:19; 공 4;15). 이 모델은 또한 교회 성장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모델이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의 놀라운 성장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정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 성도 간의 “책임과 사랑”이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때로 <셀 교회>(cell church) 또는 <메타교회>(meta-church)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만, 그 추구하는바 이상과 정신은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교회> 또는 <교회 목장>이라고 할 때,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두 가지 특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셨던 새로운 가정으로서의 교회의 탁월성을 말합니다. 교회의 탁월성이라 함은 기존의 피상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끝까지 책임지는” 새롭고도 탁월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특징으로는 각 <가정교회>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하나의 부속 기관이나 구역 조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독립(개척) 교회로서 교회의 제반 사역 즉 예배와 교육과 선교를 담당하며, 전체 교회는 각 <가정교회>들이 동일한 이상과 정신 하에 모인 일종의 연합체를 이루고 있는 형식을 말합니다.
<가정교회>의 이상과 정신
먼저 <가정교회>의 이상과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정합시다. 교회가 하나님의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고전 3:16; 벧전 2:5; 엡 2:19, 22). 그것이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가정은 어떤 곳입니까?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편안함과 안식, 격려와 화해가 있습니다. 모든 고독과 소외감이 사라집니다. 서로 이기려는 경쟁이 없으므로 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용서가 있고, 비밀이 보장되며, 상호 협력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교회>의 <목장>이 이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두 목장을 역할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나오미 목장>과 <신약>에서 <예수님 목장>(또는 <사도 목장>)입니다. 이 두 목장은 각각 10년과 3년 씩 걸려 탁월한 관계의 사역에 모두 성공한 목장입니다. 이 두 목장의 특징을 말해 본다면 한 마디로 ‘헤세드’의 관계입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의 ‘헤세드’와 수평적으로는 목원 상호간의 ‘헤세드’로 충일했던 목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헤세드’의 특징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필자의 <룻기> 강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헤세드’란 한 마디로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말합니다(요 13:1). 우리의 <목장> 역시 이 ‘헤세드’를 모든 관계의 근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 간의 사이는 피상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탁월한 사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0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46-50; 막 3:30-35; 눅 8:19-21)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따르다 보면 이전의 관계는 소홀해 지고, 단절되며,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교회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해서 주님 안에서 새로운 가족의 관계로 맺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기존의 예수님의 혈연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가정으로부터 제외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한다면 말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완전히 성취되는 역사의 종말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오늘 이 땅에서도 매일처럼 다반사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요약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순간부터 새로운 가족관계가 이 땅에서도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말씀은 다분히 혁명적이고 이단적이기까지 하여 덜컹 겁이 납니다. 복음을 위하여 집이고, 부모 형제고 뭐고 할 것 없이 모두 버려야 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보다 더 심한 말씀도 하고 계십니다: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4-37)
예수님 때문에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가 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종교도 이 정도 되면 사회악으로 치부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과연 기독교가 그런 종교입니까? 교인들끼리 모여 세상 등지고, 기존의 혈연관계를 다 무시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래도 모든 것 다 버리고 따라갈 정도로 복음 즉 주님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내가 대답할 몫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예수님은 그분의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장의 한 목원(양)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실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장의 목자가 임종 시에 그의 가족을 자신의 목장의 양에게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장의 궁극적인 결과이자 본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마음에 일말의 거리낌이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가정교회> 즉 <하나님의 가정>과 <혈연의 가정>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붉은 색 원: 혈연의 가정; 푸른색 원: 하나님의 가정):

첫 번째 관계는 소위 “독립형”으로서, 교회와 가정은 각기 고유한 영역으로서 서로 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교회 일 때문에 가정이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되며, 마찬가지로 가정사 때문에 교회 일이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됩니다. 이 견해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불편부당하게 보이지만 실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그런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관계는 “종속형”으로서, 다시 그 입장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비해 우월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희생시켜서라도 나머지 한 쪽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두 가정을 서로 적대관계에 둠으로써,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견해는 “포괄형”으로서,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정>과 <혈연의 가정>은 서로 적대적이거나, 배척하지 않으면서, 전자(前者)가 후자(後者)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과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예수님 목장>은 이미 각자의 <혈연의 가정>을 포용하고 용해시킬 정도로 그 관계가 믿음과 사랑으로 충일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교회의 내용
<목장> 또는 <가정교회>가 이처럼 탁월한 하나님의 가정이라면, 마땅히 그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용서; (2) 비밀; (3) 후원.
1. 용서
우리는 어차피 피장파장의 죄인들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소위 공주병이나 왕자 병에 걸려 있으며, 피해의식이나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히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기보다는 참지 못하고, 비난하며, 돌아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목회자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하고 냉정합니다. 목회자의 잘못은 용서가 잘되지 않습니다. 필자가 처음 섬기던 <창조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수석 목자였던 본인이 양들을 비난하고 윽박질렀는가 하면, 본인의 양들은 돌아 서서 자기네들끼리 목자인 저를 비난하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수년 동안 이어갔습니다. 그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습니다.
이런 일은 어느 교회든 항상 시한폭탄처럼 내재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돌아서 버리면 혼자서 살아야 합니다. 혹시나 해서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 시도해 보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곳에서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제대로 관계를 맺는 것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혼자서 변하는 경우란 거의 없기 때문에, 한 번 피상적인 사람은 영원히 피상적인 사람으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저 꾹 참고, 기도하며, 용서하고, 이해하는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미운 사람도 가련해 보이기도 하고, 정도 들고, 그리고 그 정 때문에 이전에는 하기 싫었던 일도 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찾아가서 지난 감정 다 털어놓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 또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일흔에 일곱 번 씩 용서해 주라는 주님의 말씀도 우리의 인내심에 대한 충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상호 간에 충고나 질책이나 심지어 비난이 필요할 때조차도,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 속에서 상대방을 위한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 쉬운 일은 별로 성취감도 없습니다. <가정교회> 안에서 이런 기적이 가능해지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은혜와 훈련입니다. 은혜는 초자연적인 부분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항상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기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훈련은 우리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지속적인 사귐과 만남의 훈련을 통해서, 인격으로 형성되고, 인격은 체질이 되고 운명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책임지는 사랑에는 용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또한 질책과 훈계를 포함합니다. 예컨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개인적인 책임 사항들, 즉 111사역이나 기타 목자로부터의 지시사항을 번번이 태만히 하거나, 무시하는 가족은 분명히 질책과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질이겠거니 하며 적당히 덮어두면 절대로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잘못을 스스로 알아서 고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질책과 교정은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즉석에서 행하는 것이 당장은 피차 가슴이 아프지만, 훨씬 효과적입니다. 미루어 두었다가 나중에 잊을 만 했을 때 그 문제를 끄집어내면 오히려 반감은 더 커지게 마련이며, 그동안 <목장>에는 쓴 뿌리가 자리 잡고, 잡초가 무성하게 번지기 시작하여 감당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잘못을 지적 받은 당사자는 반성과 함께 새로운 각오와 헌신을 피력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지속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며 사는 것이 생활의 한 패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훈계가 싫어 무단가출할 수도 있습니다만,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요 8:3-11). 주님은 그 여자를 무조건 용서해 주셨지만, 이후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엄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그 여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만일 주님의 용서를 믿고 계속해서 창녀 생활을 계속했다면, 아직 진정한 주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비밀.
<가정교회>의 모임이 매번 어딘지 공허하고 피상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관계를 서먹서먹하게 하는 근본 요인은 결국 서로 간에 깊은 신뢰가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하는 성도가 자신의 고해가 신부의 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간다면 다시는 그 예배에 참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드러내기 싫은 상처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예수님 앞에서 완전히 해결 받지 못한다면, 가족은 물론 예수님마저 제대로 신뢰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적 치유의 기적이 <가정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나마 우리가 이 기적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성공적인 상담의 핵심이 상담 내용에 대한 비밀 보장에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목장> 안에서 드러난 일은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원칙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따라 <가정교회>의 질적 수준이 달려 있습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구역예배 정도의 수준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피상적인 모임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3. 후원
가족 구성원은 상호 후원과 격려를 먹고 삽니다. 여기서 말하는 후원이란 정신적, 물질적 후원 모두를 말합니다. 무조건 한 편이 되어 주고, 또 실질적인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는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 목장의 구성원을 모두 열 사람으로 잡는다면, 열 가정에서 한 사람 정도의 문제(경제적이든 무엇이든)를 해결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성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목장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교회 전체 차원에서 도움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혹시 <우리교회>에 너무 열성적으로 출석하느라 집에서 쫓겨나 학교에도 다니지 못할 처지에 빠진 학생이 있다면, 교회는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나는 이에 대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 한심이의 답변: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목장의 지체가 매주 아이 돌보는 문제로 예배에 참석하기 어려울 때 같은 목장의 목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교회>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학업 장애를 겪고 있을 때, 목장은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목장 모임이 너무 달콤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이 때 멀리 사는 지체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가정교회의 조직과 기능
<가정교회> 즉 <목장>의 구성은 일반적인 가정과 똑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와 그리고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상적인 가족의 수는 8-10 명 정도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함께 힘을 모아 사역을 함에 있어서나, 부실하지 않은 ‘헤세드’를 맛봄에 있어서나 적절한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한 목장의 상한선을 10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1. 조직
<가정교회>의 구성은 모두 교회 회원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그 구성원들은 아래처럼, 목자, 부목자, 그리고 목원들로 구성됩니다:

2. 목자
목자는 <가정교회>의 부모이지 성경 교사는 아닙니다. 성경 교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성경만 가르치면 되지만 목자는 자나 깨나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처럼 목원들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본능적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목자 자신이 직접 주 안에서 낳고 기른 양과 목자의 사이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다”(고전 5:15)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도 이런 까닭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아무나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남의 자식을 아무 보상도 없이 매일처럼 맡아 기를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의 자식에게는 사실 큰 소리 칠 이유도 없고, 세세한 관심도 기울여 지지도 않고, 또 함께 아파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 자식을 딴 부모에게 억지로 맡겨서도 안 됩니다. 억지로 맡겨 놓으면 좀 하다가 힘들면 집어치워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목장은 전체적으로 공중분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정말 성숙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 삼는 일을 자신의 평생의 소명으로 알고 헌신하는 자라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하는 자라야 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영혼에 대한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또한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는 하나님의 걱정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살아갑니다(요 4:35; 마 6:33). 즉 그는 누가 무어라 해도 <성경>의 원리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라야 합니다. 목자는 교회의 교사나, 행정 사역과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그런 사역들이 영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목자는 하나님의 양들을 맡은 자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어려움이나 시험 등은 거뜬히 견딜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보고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물어보며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막중한 목자의 사역을 잘 감당하려면, 말할 것도 없이 기도와 성경공부가 그의 취미이자 특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그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앙망하게 됩니다(합 3:17-19). 예컨대, 목자는 자기연민의 유혹에 빠지기보다는 양들에 대한 연민으로 함께 아파하며, 사랑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주고 싶어 하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철저히 순종의 본을 보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그의 목자에게 순종하지 못하면서 목원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자의 금과옥조(金科玉條)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소명. 이것은 비단 목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목자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관심사, 즉 제자 삼는 일입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 가르치는 은사가 있건 없건 상관없습니다(거듭 말하지만 목자는 교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목자 혼자서 끝도 한도 없이 죽어라 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제자가 또 다른 제자를 삼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즉 나와 같은 사역자를 양육하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일도 오래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상 위임령”(至上 委任令)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제자 삼는 일은 (1) 가서, (2) 침례를 주고, (3)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킬 때까지 계속 확인하고, 점검하고, 간섭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보다 더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제자가 간섭이 싫어 튀어 나간다면 할 수 없습니다만, 이 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기독교 선교 사역은 나와 나의 제자 당대에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목원과의 관계. 그러나 사람은 남의 말을 쉽게 듣거나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목자가 진짜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방관자처럼 지켜보기도 합니다. 그 진의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 목자와 경쟁을 하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목장의 다른 양들을 부추겨 목자에게 대항을 하려고도 합니다. 목자의 결함을 들추어내어 사기를 저하시키기도 합니다. 목자가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 지시도 하려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목자를 위해서 모든 좋은 것들을 나누지도 않습니다. 기도도 당연히 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 양의 종교 생활의 경력이 길면 길수록 더 심합니다. 그동안 인생과 교회 생활을 하면서 온갖 종류의 나름대로도 인생철학이라는 쓰레기가 가득 쌓여, 좀처럼 남의 말을 듣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우물 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슬프게도 나이마저 들었으니 생각이 아무리 뻔해도 몸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니 순종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래서 목자가 성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의 양은 자신이 직접 전도하여 양육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신에 대해서 너무 간섭이 심하다 싶으면 금방 저항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모자를 벗게 해야 하는데, 어렵더라도 목자가 먼저 모자를 벗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양이 따라 모자를 벗든 않든 계속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요 13:1; 벧전 5:2-4):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2-4)
목자와의 관계. 목자에게 요구되는 또 한 가지 수직적인 관계의 요소는 나의 목자에 대한 순종입니다. 내가 나의 목자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내 목원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목원들 중에서 나의 목자에 대한 불평이나 원성이 있을 때에도 부화뇌동(附和雷同)해서 당을 지어서는 안 됩니다. ‘아론’이 그렇게 하다가 혼쭐이 났습니다(출 32장). 그는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할 때 ‘모세’의 편에 서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백성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동생에게 돌을 던져댔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나의 목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처럼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동료 목자와의 관계. 대개 열심히 사역하는 목자들에게 약한 부분이 바로 이점입니다. 혼자서 열심히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동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고, 때로는 쓸데없는 오해와 시기마저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황야의 무법자” 또는 ‘람보’로 부릅니다. 목자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팀 사역을 원하는 것이지 ‘람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힘든 사역으로 인해서 쉽게 지치고 피곤해 집니다. 이럴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경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목장의 목원들로부터 어떤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 받았을 때도, 내가 직접 해결해 주려고 나서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그 목원이 속해 있는 목장의 목자에게로 가도록 조언해 주어야 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중간에 끼어들어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서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료 목자들과 ‘헤세드’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3. 부 목자
부 목자는 예비 목자 또는 인턴입니다. 그는 목자가 하는 모든 사역을 순종하고, 도우면서 목원의 수가 10명이 넘어설 때 새로운 목장을 담임하게 됩니다. 새로운 목장을 개척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는데, 첫째는 기존의 목자가 새로 들어온 목원들과 함께 새로운 목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부 목자가 나머지 목원들의 목자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방식은 이와는 반대되는 경우로서, 부 목자가 새로운 목원들을 데리고 나가 새 목장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두 방식 모두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우리교회>는 어느 한 방식을 고집하기 보다는 상황과 여건에 따라 절충방식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명심할 일은, 우리가 어느 방식을 택하든 부 목자는 목자가 하는 것을 열심히 따라 배워야 합니다. 새로 들어온 목원이 있을 경우, 목자의 승인 하에 그에게 이 교회의 기초 훈련 고재를 가르치는 것 등이 부목자의 사역 중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괜히 뒤에서 뒷짐 지고 휘파람 불며, 목자가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고소해 하거나, 자신은 더 잘 할 수 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때로 목자를 제쳐두고 목원들을 상담한담시고 그들의 마음을 도둑질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목자가 되면 필경 같은 지경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습 기간 중에 교만하게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목자가 되면 이전 목자보다 더 헤매다가, 힘들면 “에라, 때려치우자”하며 나자빠집니다. 한 마디로 부 목자는 목자의 그림자가 되어야 합니다. 괜히 목자의 약을 올린다든지 화를 내게 한다든지 등의 일도 물론 절대 삼가야 할 부분입니다. 만일 부 목자가 목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거나, 계속해서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면 그는 해당 목장으로부터 일정 기간 근신 내지는 제명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본인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까짓 것 제명당하면 대수랴, 교회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다른 교회와 새로운 지도자를 또 찾아 나서야 하는 수고를 겪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계획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늘 이렇게 살다가 그는 제대로 신앙의 발전이나 성숙을 경험하지도 못한 채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4. 목원(양)
목원은 <가정교회>의 자녀들이며, 동시에 보다 먼 내일의 목자 후보생입니다. 자녀들이 자라서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배운 것은 없어도 본 바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원은 자녀로서 두 가지 관계를 몸에 익혀야 할 것입니다. 목자와의 관계와 다른 지체들과의 관계입니다. 목원의 금과옥조도 위에서 말한 목자의 그것과 대동소이합니다만 각별히 다음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동료 목원과의 관계.. 목장 내의 다른 목원들에 대한 ‘헤세드’의 관계, 즉 절대 용납과, 절대 비밀 보장과, 그리고 상호 후원의 원리를 준수해야 합니다. 내가 속한 목장 말고 다른 교회나 다른 목장에 더 가까운 친구가 많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당시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목장 내 동료 목원과의 관계에 있어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컨대, 두 목원의 관계가 그들 자신의 목자보다 더 돈독할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상담자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해서는 안 되고 그저 함께 아파하거나 또한 함께 기뻐함이 마땅할 것입니다(롬 12:15).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상담자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피상담자의 문제에 아무런 대안 없이 함께 침잠해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상호 간에 상담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나누게 될 때, 궁극적인 대안이나 해결점에 도달하기 전에 반드시 그들의 목자와 상의를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두 사람만의 일로 묻어 두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런 경우 목장 내의 진정한 교제가 끊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목장 내의 진정한 교제가 끊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목자와의 관계. 순종과 신뢰의 관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목자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거나 의심이 가드라도, 절대로 같은 목장의 동료 지체들과 당을 지어 수군거리거나 중상모략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특별히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목원은 그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위에서 목자의 사역과 관련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목원은 단순히 목자로부터 교과서적인 지식만을 배우는 자가 아닙니다. 그가 시키는 바를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목자에게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더라도, 다른 목자에게 가서 상담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목자의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 당신의 사정을 잘 들어준다고 좋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일종의 마음 도둑질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목자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든 두 사람에 사이에 먼저 대화로 해결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의 목자가 알지 못하는 사역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소영웅주의입니다. 혹사 내가 속한 목장보다 더 가까운 교제나 사역이 있다면, 내가 속한 곳은 그곳이지 내 목장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목자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목자에게 서약이 필요하듯이, 목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목자에 대해서 순종의 서약을 받습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별도 서약서 양식을 첨부하였습니다. 이러한 서약이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서약서에 언급되어 있는 바처럼 반복적이고, 악의적인 불순종은 그를 목장에서 제명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교회의 사역
<가정교회>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언급할 내용은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가정교회>란 한 마디로 개척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관련해서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라는 점입니다. 그 관계에서 네 가지 기본적인 사역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배; 교제; 교육; 선교.
이 사역은 누가 행합니까? 그 주체는 개인도 아니고 전체 교회도 아닙니다. 그 주체는 목장입니다. 교제도 목장 중심으로, 선교도 목장 중심으로, 그리고 예배 사역(침례나 주의 만찬 등)도 원칙적으로 목장 내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치 각 교회가 매 년 사역을 위한 예산을 세우듯, 각 목장 역시 매년 사역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지 목장의 교육 사역과 관련해서는 일관성과 지속성을 위해서 교회학교에서 별도의 계획에 따라 전 교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할 것입니다. 단 그 때에도 목자의 승인과 위탁 하에서 할 것입니다. 교회학교의 교과과정은 별도의 <교회학교> 장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1. 교제
교제는 <가정교회>의 목장 모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사역일 뿐만 아니라, 목장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앞에서 다루어왔던 모든 내용들도 실은 이 부분을 위한 서론에 불과합니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아무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와 지체들 사이의 관계를 시험하는 잣대가 바로 목장 모임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입니다. 즉 내가 이 목장 모임을 얼마나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쓰는 가입니다.
목장 모임을 우습게 알면서, 교회와 지체를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속한 회원들의 헌신 정도는 바로 이 목장 모임의 참여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주일 예배와 성경공부에는 참석을 못하더라도 목장 모임에는 참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장 모임에 참석은 않고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관계는 제대로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교회 회원으로 인정되기는 어렵습니다. 본 교회 회원이라면 마땅히, 그가 목자나, 부 목자나, 또는 목원 증의 한 위치에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예배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교회의 무기력함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새벽 예배; 수요 저녁 예배; 금요 철야 예배; 주일 낮 예배; 주일 오후 예배; 성탄 이브 예배; 성탄 예배; 송구영신 예배; 신년 예배;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예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감격과 흥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해지는 체험을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예배의 참석이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 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성도 개개인의 수평적인 교제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제만 남게 되어, 성경 공부나 기타 교제의 시간에 적극적으로 토의에 참가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능력이 심각하게 결핍될 것입니다. 그저 묵묵부답 듣기만 하면 됩니다.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오로지 하나님과 대화하면 됩니다. 고민이 있어도 그저 혼자서 하나님하고만, 즐거움이 있어도 역시 하나님과만 대화하면 됩니다. 오직 예배, 그리고 예배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전인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목장의 교제 사역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한 개인은 실질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연마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고침을 받을 수 있으며, 사랑이 한낱 감상이나 낭만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아주 실질적인 사역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한 개인은 회원들끼리 때로는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며, 실망하기도 하면서 비로소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갑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단지 이렇게 착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나는 이 교회를 사랑해”; “나는 다른 성도를 사랑해”; “나는 언젠가는 멋진 사역을 할거야.”
이런 생각은 실은 자기기만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손에 물 한 방물 묻히지 않고 속세를 내려다보며 교회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하면서 탁상공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장이라고 하는 현실에 내려와서, 손에 물을 묻히고, 발을 담그고, 분노로 몸을 떨기도 하고, 실망으로 머리를 숙이기도 하며, 수치와 모욕으로 몸 둘 곳을 몰라 하기도 하는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조금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서 매일 상상 속의 사랑, 상상 속의 선교, 상상 속의 희생을 그리는 것은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목장의 사역에 동참해서 내가 가진 재물과 시간과 은사를 기꺼이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목장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제의 사역이 이처럼 중차대하므로, 교제와 관련하여 좀 더 언급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교제의 근거. 사람들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여러 종류의 모임이나 단체에 가입하여 위로받고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한 마디로 교제(코이노니아 즉 나눔)란 하나님을 나누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나누는 행위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교제가 다른 사이비 교제들과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복음은 선포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제를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9빌 2:1; 고후 13:14; 엡 4;4-6).
교제의 위험.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결코 깨어질 수는 없겠습니다만(요 10:28-29), 교제의 기쁨을 깨뜨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는 교제의 기쁨에 치명적인 위험 요소가 되므로 회원 모두가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16, 21)
죄는 사탄과 교제하는 것으로서, 주의 교제에 참예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모순이라는 점을 사도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순과 불합리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러므로 너의 중에 악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교회의 분명을 말할 것도 없고, 신자 개개인의 생명마저도 담보 받을 수 없다는 심각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위의 경고는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즉 매일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교제 속으로, 더욱 성숙한 인격적 관계 속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교제의 책임. 따라서 우리 모두의 책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약 5:16). 그렇지 않으면 목장 모임은 늘 위선과 거짓과 피상성의 유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가증스러운 것이지요. 우리가 위선자를 싫어하듯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특히 목자는 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목원 중에 누군가가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때, 반드시 지적하고 책망해 주어야 합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기를 두려워합니다. 다 같은 죄인들인데 꾸짖고 말고 할 것이 뭐 있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정죄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는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음식도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잘못하는 목원을 꾸짖고 나무라야 하는 성경적 근거는 많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딛 1:13)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목자가 바로 잡아주어야 할 범죄는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 등과 같은 소위 큰 죄악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소한 직무유기와 같은 것들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도나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한다든지, 목장 모임에 이유 없이 불참하는 것이라든지, 사소한 얌체 행위, 잦은 책임 회피와 이에 대해서 아무런 사후 설명이나 사과도 않는 행위, 목자에 대한 반복적인 불순종 행위 등을 일컬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행위들이 목장 내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데도 어느 누구도 아무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모일 때마다 희희낙락 하고 있다면, 그 목장은 없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 목장이 아니고 일종의 친목계 수준의 모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유념합시다. 통회하는 죄의 고백과,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한 고백이 없는 교회는 사탄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피차 죄를 고백하는 것은 순수한 교제를 유지하게 하며, 서로 필요와 근심, 시험과 환난을 이해하며,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롬 14:13, 19; 살전 4:18; 5:11; 히 3:13; 10:25.
교제의 빈도. 가족들이 만나는데 무슨 횟수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만(행 2:46), 모두가 가장 편리한 날과 시간을 정하되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야 합니다. 가능하면 모임 시간은 수시로 바꾸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고 “목장 모임과 경쟁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모임도 없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다른 모임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잡아두는 헌신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모임 시간에 늦거나 사정이 생겼다고 빠지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그리고 혹시 모임에 늦거나 빠지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목자나 동료 목원 중의 한 사람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 두어야 겠습니다. 내 한 사람 편리한대로 하다가 다른 지체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걸핏하면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 목장 모임 자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을 것인데, 이런 일을 절대 없어야 하겠습니다. 성령 목자가 하지 않으려 해도 목원들이 일치단결해서 반드시 모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지정된 날에 모임이 불가할 경우에는 그 주간 중의 다른 만나도록 해야지, 다음 주로 넘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제의 장소. <가정교회>이니만치 각 가정을 돌아가며 만나는 것을 원칙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의 특징적인 교제의 방식이었으니 말입니다(행 2:42-47; 롬 16:3-16; 고전 16:19; 골 4:15). 그러나 목장 모임이 정착되고, 안정될 때까지 목자의 가정에서 한동안 모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목자는 항상 앞서 보여주는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며, 어떻게 이끌어 가는 지는 보여주며, 헌신과 희생의 감동을 보여주어야 예비 목자가 나중에 그대로 보고 따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해진 원칙은 아닙니다만, 대략 1년 정도는 목자의 가정에서 모임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이 기간은 대체적으로 새로운 목장을 개척하는 기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목자는 새 목장이 분가해 갈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목장 모임을 갖도록 합시다.
우리가 목장 모임을 가정에서 갖는 것은 성경적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교회 예배당이 따라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으로 가정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이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크게 손해 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회원들이 예배나 교제를 위해서 자신의 집을 열어줄 수만 있다면, 그 여력으로 교회는 나머지 사역들을 아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회원이라면 즐거이 자신의 가정을 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목자 모임을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모인다면, 모임을 갖는 해당 가정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목장의 크기가 8명 정도 수준이라면 2개월에 한 번씩 돌아가며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니 큰 부담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목장 모임이 무슨 큰 잔치를 여는 행사가 아니니 식사는 되도록 간단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지나친 부담이 되는 것도 피해야 할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목장 가정에서 계속 만나야 하는 경우라면, 각 가정이 음식 한 가지 씩을 준비해 가는 것도 목자 가정의 부담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목장 모임 자체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때로 시내나 야외나 기타 적당한 장소를 택하여 즐거운 모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화나 연극도 함께 관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제의 범위. 모임은 교회 회원 중심을 원칙으로 합니다. 비회원들이 수시로 드나들게 되면 깊이 있는 교제가 어려워집니다. 회원들 상호간에도 깊이 있는 대화가 어려운 판에 낯선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목장 모임은 일종의 가족회의입니다. 가족회의를 가족이 아닌 이웃이 참여한 가운데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목장이 전도 사역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비회원들을 초청할 경우에는 회원들의 사전 준비와 기도를 충분히 한 다음에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다녀간 사람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관계 맺기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장 내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일대 일로 만나 성경공부나(목장 용 교재가 별도 있습니다) 기타 돌봄을 유지해 가야 할 것입니다. 목장의 전도나 선교 사역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습니다.
교제의 진행. 목장 모임은 무슨 특별한 형식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만나서 먹고, 마시고, 놀고, 웃다가, 울다가, 더러 싸움도 하다가, 돌아가기 전에 열심히 기도 한 번 하고, 그러다가 헤어지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매주 아무 형식이 없이 만나서도 곤란할 것입니다. 매일처럼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다 아무 목적도 없이, 의미도 없이 세상 사람들 친목회 하듯 만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대개 여러 교회들에서 제시하고 있는 다음의 방식을 따라 진행할 수 있도록 목자는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 형식이 없이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실은 목자의 사전 준비가 더욱 철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 부분에 관한 다른 예들은 <가정교회>나 <셀교회>에 관한 고전적인 책들을 통해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는 모임 시간을 대략 3-4 시간 정도 되도록 운영하면 됩니다. 그러나 목장 모임을 서둘러 마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필경 모임은 피상적으로 흘러갈 우려가 높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관례로 굳어지게 되면 만날 때마다 빨리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 생각으로 교제가 아주 산만해 집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나 근심, 그리고 두고 온 일에 대한 걱정으로 오늘의 모임이 피상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목장 모임이 3시간이 지나도록 헤어지기 싫다면 분명 성공적인 목장입니다. 이 경우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먼저 가도록 배려를 해주고, 남은 사람들끼리는 밤을 새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너무 이상적인가?) 매주 이렇게 되기가 어려우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만이라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훈련도 필요하지 않을까 희망도 해 봅니다. 현대인들은 늘 무엇인가에 쫓기며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임이 있는 날 저녁에 혹시 예수님께서 오실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함께 밤을 새워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목사의 희망 사항).
아무튼 교제의 진행은 고정된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날그날 성령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진행하면 될 것입니다(물론 무질서가 성령님의 임재나 충만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대략적인 순서는 여느 교회에서처럼 다음과 같이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배와 찬양(15-20분)
① 처음 만나 간단한 인사와 일상적 대화를 나눕니다.
② 그리고 찬양 인도자의 인도에 따라 간단한 기도에 이어,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너 곡 정도의 찬양을 함께 부릅니다.
③ 유의사항: 이 때 다소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열심히 불러야 다른 사람들도 힘을 내어 부르게 됩니다. 이 시간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과 다른 지체들에게 열어주는 시간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2) 지난 주 회고(30-40분)
① 각자 돌아가며 지난 한 주 동안의 개인적인 111사역이나 설교 내용 등을 중심으로 중요한 깨달음이나 체험들을 나눕니다: 감사 제목; 도전과 대응; 상처나 분노; 좌절과 실의; 실족과 범죄 등.
② 개인적인 회고를 할 때 경건 일기장을 중심으로 가볍게 읽는 기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되,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도록 목자는 잘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일 인당 5-10분 정도).
③ 유의사항: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때로 자신을 여는 문제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더러 있는데,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억지로 하도록 부담을 주기보다는 언젠가 자발적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배려가 필요할 것입니다.
(3) 주제 토의(1시간 정도)
① 112 사역과 관련된 주제들 중에서 목자나 또는 목원이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토의할 수 있습니다.
② 기독교 윤리나 시사성을 띤 사건이나 정보
③ 목원의 당면 신상 문제
④ 토의의 결론은 가급적 구체적인 적용이 가능한 영역으로 서로 메모를 해 두어 다음 주에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헌신과 결단(20-30분)
다음 한 주 동안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나눕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경건 일기장의 월별 사역 계획표에 기록해 두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목자에게는 이 점 필수적입니다.
① 반드시 측정이나 평가가 가능한 기도제목이나 계획을 기록해야 합니다: 전화하기; 독서; 만나기; 봉사; 방문; 초청 대상; 여행; 놀이; 문자 보내기; 연구; 등등.
② 유의사항: 기도 제목의 특징은, “내가 여차여차 행하겠사오니, 하나님 응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로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도를 드려야지, 다음과 같은 소극적이며 측정 불가능한 기도는 곤란합니다: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날로 새롭게 되도록 해 주십시오”; “더욱 헌신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③ 목자는 이들 기도 제목이나 계획들을 반드시 적어두었다가 다음 주 모임에서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5) 마침 기도(20분 정도)
① 계획에 대한 합심 기도
② 목장의 사역, 목자나 목원 상호 간이나, 초청 및 구원 대상자를 위한 중보의 기도.
2. 선교
목장은 교제 사역의 결과로서 기대되는 열매가 선교사역입니다. 목장의 선교사역과 관련해서 다른 장에서 다시 상세하게 논의하게 될 것이지만, 선교란 한 마디로 복음 전도와 봉사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선교가 우리 삶의 중심에 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 위임령” 또는 “지상위임령”으로 부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모른 채 헷갈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고 있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물고기 물을 떠나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왜 매일처럼 자기 자신의 일에 매달려 고민하고, 죽을 쑤며, 괴로워하고, 외로워할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있지 않으니, 하고 한 날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생기는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전도를 하지 않고 회원들끼리만 모이다 보면, 이 목장은 필경 시들해 집니다. 그뿐 아니라 서서히 내부적으로 갈등과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화끈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탄생이 없는 곳에서는 목장은 서서히 영적인 실버타운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였다 하면 하나님 나라 일보다는 신변 잡담이나 과거의 무용담이나 늘어놓다가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도 위로나 도전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자니 오히려 내적 갈등만 더해갑니다. 이런 증상이 더 오래 지속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더 이상 두렵거나 떨림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목장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선교의 사역을 목장의 궁극적인 목표로 인식하고 뭉쳐야 합니다. 우리의 적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목장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뭉치게 됩니다. 목장은 모일 때마다 초청과 전도에 관한 대화가 활기 있게 나누어져야 하고 대상자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목장은 어떤 방식으로 선교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듯이 관계 중심의 선교입니다. 어지간한 방법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다 써먹어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먹히지를 않습니다. 그저 주위에 친구나 친척들을 상대로 해서 범위를 서서히 확대해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복음의 제시이든, 개인적인 간증이든, 생활 속의 전도이든 시작이 반입니다.
다만 혼자서 이 모든 사역을 수행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즉 혼자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가 없으며,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특별히 발군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서 그 모든 것들을 수행해 가다 보면 금방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어차피 목장 중심의 선교 사역을 강조하고 있으니, 사역을 분담해서 각자 은사대로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서로 돌아가며 대상자를 향하여, “와보라” 사역만큼 더 강력한 수단도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구체적인 사역 방법에 대해서는 일곱 단계로 이루어진 <새 삶 시리즈 교재>가 있으므로 목장에서는 가르치는 은사를 지닌 목원이 대상자를 상대로 함께 공부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배
세 번째 사역인 예배는 목장 모임에서는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가장 뒷부분에 두었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목장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사역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침례와 주의 만찬이 그것입니다. 이 두 의식은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주님의 계명입니다. 침례가 일회적으로 입교 의식이라면, 주의 만찬은 계속되는 의식입니다. 이 두 의식의 상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다른 과목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그 절차만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침례.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침례를 받을 특권과 책임을 지닙니다. 그리고 침례자는 피 침례자의 목자이거나 또는 그를 전도하여 양육한 다른 지체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의 조화나 질서를 위해서나 교단 내에서의 다른 교회와의 형평성의 문제를 고려해서 교회의 담임 목사가 침례자가 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므로 목장 단독의 침례식은 삼가되, 꼭 필요한 경우라면 반드시 교회 담임 목사의 사전 승인을 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목자 중심으로 이를 목장용 교재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만찬. 교회 전체적으로 일 년에 서너 번 의식을 행하기는 하지만, 원한다면 각 목장에서 수시로 행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유의할 점은 반드시 목자의 인도에 따라, 그 의미와 절차를 충분히 숙지한 후에 엄숙하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은 물론 공동체적인 죄의 고백과 재 헌신의 결단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교회가 가정이라는 성경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2. <가정 교회> 또는 <목장>의 본질에 대해서 아는 바대로 논의해 봅시다. <구약>과 <신약>에서 각기 성공적인 목장을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3. <가정교회>의 구성원, 목자, 부목자, 및 목원의 자격과 책임 및 권리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목장>의 세 가지 사역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사역은 무엇입니까?
5. <목장> 모임에 수시로 결석을 하는 등 불성실한 목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함이 옳을까요?
6. <목장>의 효과적인 선교 사역의 방법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교회 학교

모든 창조 세계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소유다!”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구역은 없다(Abraham Kuyper)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교회의 조직 및 기능과 관련해서 앞 장에서 제시했던 세 가지 이미지를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회는 가정이다; (2) 교회는 학교다; (3) 교회는 군대다. 이제 이곳에서는 두 번째 이미지에 해당하는 학교에 대해서 논의해 볼 차례입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군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전인적인 훈련장이라는 데에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세 기관 모두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과 강조점을 가지고 전인적인 학습이나 훈련을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학교는 주로 지적인 학습을 담당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영성 훈련의 대가 ‘리차드 포스터’(R. J. Foster)가 지적한 바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학습 훈련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매여 있습니다. Richard J. Foster, <영적 훈련과 성장>, 권달천∙황을호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9.
‘포스터’의 말에 따르면,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또 종교적 의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하면서도 변화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데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인 학습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아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그냥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아는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학습을 통해서 비로소 얻어집니다. 교회학교의 목적과 기능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학습은 단순히 지적 학습만을 포함하지는 않습니다만, 교회학교는 이를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포스터’의 구분에 의하면 지적 학습은 크게 두 가지 대상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말과 글로 된 책에 대한 학습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말과 글이 아닌 대자연에 대한 학습이 있습니다. 후자(後者)에 대한 학습은 주의(主意)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포스터’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 때 필요한 자세나 태도는 세밀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찰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러한 학습 방식은 단순히 교실 안에서 주입식의 교육으로 단기간에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각자가 일생을 두고 이루어가야 할 과제인 만큼 개인적인 훈련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학교의 주된 학습 대상은 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독서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독서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으로서, 교회학교에 관한 제반 사항들을 다루기 전에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독서의 필요성에서부터 독서의 내용이나 방법 등에 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독서: 그리스도인의 지적 훈련
1. 왜 독서인가?
지도자와 독서. 왜 독서가 중요하며 독서를 위해서 따로 시간을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될까? 너무 진부한 질문이라 답변 역시 진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삼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글 중에서 현존하는 마지막 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금 순교 수주일 또는 며칠 전에 ‘로마’의 침침하고도 습한 지하 감옥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의 사도 사역을 이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표현대로 “전제와 같이 벌써 부어지고 떠날 시각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딤후 4:6).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책에 대한 주해서의 서문(序文)에서, “눈시울 적시지 않고는 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했던 ‘핸들리 모울’의 고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글에서 이전에 그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써내려가면서 보여주었던 위풍당당한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겨우 겉옷 나부랭이와 읽던 책 정도이니 말입니다.
사도 자신은 한 때 ‘디모데’에게 “읽는 일에 착념하라”고 권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물론 그가 교회에서 회중들 앞에서 <구약>을 읽어주라는 것이겠지만, 그의 권고는 다른 분야의 독서를 위해서도 아주 적절하게 적용해야 할 권면이기도 합니다. 사도가 ‘디모데’에게 가져오기를 바라는 책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사도 자신이 <구약>에 대한 주해서와 ‘유대’ 역사서 그리고 자신이 설교에 인용했던 몇몇 이교도 시집들 정도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 한 편으로는 “주님의 말씀이나 사역에 대한 초기의 공식자료”(흔히 Q자료로 알려져 있는 것)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무엇이든 간에 이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바울’은 죽는 날까지 배우고 읽기를 결코 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의 한 결 같은 공통점은 독서에 대한 열의와 습관이라는 사실입니다. <디모데 후서>에 관한 몇몇 주해서를 읽어보면, ‘바울’보다 훨씬 훗날 1536년 역시 감옥에서 순교했던 ‘틴달’(W. Tyndale)이 그의 총독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이 서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열 모자, 양초 한 개, 내 정강이 받이를 댄 옷 한 번...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은 나의 히브리어 성경과 히브리어 문법책과 히브리어 사전이며, 내가 이것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에 재촉해 주시며, 그래서 내가 그것으로 공부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바울’과 ‘틴달’ 모두 순교하기 전, 하루하루를 독서하며 공부하는데 몰두했습니다. 두 지도자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독서를 즐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떠했을까요?
자아의 발전. ‘바울’ 사도는 어떻게 그처럼 멋진 서신과 신학 논문을 쓸 수 있었을까? ‘샌더스’(Sanders)는 그의 책에서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책에 몰두해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베이컨’(Bacon)도 독서의 규율에 대해서 쓰면서 “반대하고 논박하거나 또는 믿고 동의하기 위해서, 또는 이야기 거리를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치를 알고 연구하기 위해서 독서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의 영감의 우물이 채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정길 목사님은 한 달에 꼭 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요한 웨슬러’는 적어도 수천 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에 그 유명한 <그리스도를 본받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설적인 침례교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찰스 스펄젼’(C. Spurgeon)은 <천로역정>을 통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 스토트’ 목사님의 독서에 대한 열의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분은 설교를 위해서 선택한 본문에 대해서 적어도 200회 정도는 반복해서 읽고 연구한다고 했습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본인은 부끄러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설교 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마주하고 있으면, 서재에 참고할 만 한 서적이 절대적으로 너무나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이점 성경공부 준비를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부분입니다. 본인의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잘 이해하는 교인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설교를 영혼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양식으로 보기보다는, 예배에서 필요한 하나의 요식 절차 정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필자에게 “목사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전체 성도들을 위해서 이 책을 읽고 설교에 참고하십시오.”하며 책을 선물하는 교인을 별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목사가 책을 선정해서 소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제대로 읽으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참고로, 오래 전에 제 생일에 한 제자가 선물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제 일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 중의 하나임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독서는 실로 정신적인 자극이나 설교나 또는 자신의 스타일의 개발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공의 조건. 독서는 영적인 자아 발전 내지 성숙 외에도 과연 세속적인 성공도 보장해 줄까? 그렇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자라면 독서는 그 첫 번째 요건이 될 것입니다. 나의 경우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해서 참고한 책이나 타인의 논문이 대략 140여 권에 이릅니다. 물론 학위 과정 중에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참고 서적이나 논문들을 읽었지만, 이 수는 직접적으로 본인의 논문 작성에 필요했던 것들입니다. 지난 이야기이지만 대학의 운동권 진영에서 후배 운동권 학생들에게 이념 관련 서적 400여 권을 읽힌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독서로 무장한 사람이라면 웬만한 논쟁에서 상대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묻는 자에게 항상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이들 운동권 학생들은 자신이 가진 소망에 대해서 이처럼 중무장을 하고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독서는 일종의 간접 체험입니다만,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정보,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위대한 지도자들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독서를 통해서 그들이 구사했던 훌륭한 표현, 정확한 어휘 구사력, 상대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표현, 정곡을 찌르는 논리 등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 지도자들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선배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려면 유명한 과학자의 논문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2. 무엇을 읽을까?
이 질문은 “왜 독서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버금가는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이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내가 가진 시간이 얼마나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대답은 “가장 좋은 책들만 골라 읽으라.”가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책이란 결국 인류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누군가 우스개로 고전에 대해서, “누구나 읽어야 된다고 말하지만 실은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책”이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만, 독서를 말할 때 고전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고전 중의 고전. 고전이란 시대를 두고 변치 않는 사랑을 받아 온 책들로서, 고전 중의 고전은 역시 <성경>일 것입니다. <성경>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터라,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치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선배 목사로서 후배 목사이자, 영적 아들이기도 한 ‘디모데’에게 강조하고 있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알다시피 목사의 가장 으뜸 되는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일 텐데, 이 구절에서 ‘바울’ 사도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다른 사도들 역시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으면, 그 외의 모든 사역들은 집사들을 따로 떼어 맡도록 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내 자식들에게나, 이웃에게나, 제자들에게나, 또는 직장 동료들에게 얼마나 이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 과연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이 구절을 실천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고 있습니까? 내 인생의 의미나 목표가 과연 “대 위임령” 즉 “제자 삼기”입니까? 더 나아가 내 제자가 다른 사람을 제자 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늘 앵무새처럼 말로써만, 기도로써만,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타인에게는 없고 자신에게만 있는 것을 자랑하기 마련입니다. 부자는 돈을, 정치가는 권력을, 운동선수는 재능을.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내가 가진 복음을 단 한 번이라도 자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성경> 지식을 자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변변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나는 정말 심각하게 내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왜 하나님께 열심을 품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혹시나 하나님이 나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있든지 말입니다.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피상적인 성경공부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늘 듣기는 하나 더 이상 내 가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거나 아프지 않습니다. 열심과 흥미를 가지고 절실하게 연구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 누구나 가르치면서 배우는 법입니다. 이번 주 설교할 일이 없다면 나는 성경연구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대학에서 강의할 책임이 없다면, 강의 준비를 위해서 연구하고 독서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공부 인도할 일이 없다면, <성경> 연구도 필요 없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누군가에게 <성경>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단 한 번이라도 치열하게 싸워본 적이 없다면, 말씀 연구에 별 흥미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배 시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건대, 그 이웃이 누구든 <성경>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요? 모르면 자랑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하게도 많은 성도들은 <성경>을 모르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고 다닙니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인 줄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겸손할 일이 따로 있지,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주일에 한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 일에 목숨을 거시기 바랍니다.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 후 결단의 시간에 나와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고전과 고전적 가치. 그런데 우리가 <성경>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걸기 위해서는 <성경>을 제대로 아는 일이 필요한데, 아쉽게도 <성경>은 그 자체로 읽기가 아주 힘듭니다. 오늘날 성도와는 문화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너무나 다른 상황에서 기록되고 편집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경> 외의 독서들에 대한 읽기가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 인류가 고전으로 꾸준히 읽어온 것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굳이 기독교 고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설교는 <성경>만 읽어서는 어렵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주해서만 읽을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 고전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일반 고전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일반 성도의 경우에는 신학서적들을 읽는 시간에 일반 기독교 고전이나 일반 고전들을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인 독서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전이라 해서 반드시 오래된 것일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고전적 가치를 지니는 현대의 책들도 아주 많습니다. 어떤 특정 주제에 대해서 아주 깊은 통찰력을 갖게 해주는 책들을 이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최근 내가 읽은 책 중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까? 한 번 소개해 봅시다.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읽어보셨습니까?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떻습니까? ‘유진 피터슨’의 네 권의 영성 시리즈, <현실, 하나님의 세계>, <이 책을 먹으라>, <그 길을 걸어라>, 그리고 <비유로 말하라>는 어떻습니까?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은 어떻습니까? ‘프란시스 쉐퍼’의 걸작들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필립 얀시’의 책들은 얼마나 읽어보았습니까? 이들 작가들은 모두 오늘날 베스트셀러 작가들로 알려져 있는 분들입니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이들 책들을 통해서 영성을 새롭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3. 어떻게 읽을까?
마지막으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서를 할 것인가에 관한 소고(小考)입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독서 계획이나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만, 필자가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원칙들이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 다양한 독서를 합니다. 다양함은 다양한 분야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역사, 철학, 문학 등이 여기에 포함될 것입니다. 심지어 영화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소설류도 꽤나 좋아했었는데, 목사가 된 후로는 시간에 쫓겨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가끔 읽는 소설이나 관람하는 영화는 필자의 설교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꿈과 용기를 심어줍니다. 그리고 <성경> 공부 교재를 만들 때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둘째, 쉽게 읽을 수 있거나 버릴 것은 읽지 않습니다. 이 중에 수필이나, 간증집, 기타 소위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손에 펜을 들고 읽습니다. 이 말은 독서 중에 생각난 여러 가지 생각이나 의문 또는 아이디어들을 여백에 적어가면서 정리와 묵상을 겸하여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한 권의 책에 대해서 두 번 이상은 꼭 읽습니다. 필자가 가진 책 중에서 어떤 책은 수십 번 읽은 것도 있습니다.
다섯째, <성경> 읽기는 조용한 새벽 시간에 묵상을 위해서 1-2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하며, 일반 독서는 저녁이나 쉬는 시간에 가볍게 합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여행은 주로 열차를 이용하려 하는데 독서를 위해서입니다.
여섯째, 좋은 책은 두 권을 삽니다. 독서 중에 펜을 가지고 책의 여백에 쓰거나 줄을 긋기도 하기 때문에, 고전적 가치를 지니는 좋은 책의 경우에는 한 권은 장서용으로 추가 구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비닐 등으로 겉표지를 싸둡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책 한 권은 성도 한 사람”이라는 말을 합니다. 책 한 권 읽을 때마다 성도 한 사람 는다는 농담 섞인 충고입니다만, 목회지가 책을 읽지 않고 목회를 할 수는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어찌 목사에게만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독서는 우리 모두에게 꿈과 이상을 제공해 줍니다. 가벼움과 피상성에서 탈피하여 신중함과 깊은 영성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독서는 우리를 지도자로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전문인과 성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래도 독서를 게을리 하시겠습니까? 필자가 만든 警句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Passion and Practice Promise Prosperity!”
기독교 교육과 교회학교
교회학교의 주된 교육의 대상은 책이며, 독서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남은 문제는 “교회학교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입니다. 전자(前者)가 기독교 교육의 내용에 관한 질문이라면, 후자(後者)는 그 방법에 관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이들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하기 전에 우선 기독교 교육의 정의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1. 정의
기독교 교육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인바,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기독교 교육은 그야말로 “기독교에 관한 교육”(Education of Christianity)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가르치는 내용은 성경 공부를 위시해서 신학이나 기타 기독교의 기본 진리 등에 관한 교육으로 한정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기독교 교육은 “기독교적 교육”(Christian Education),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적(또는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광의(廣義)의 정의에 따르면, 교회학교에서 교육하게 될 교과목들은 일반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문의 전 영역을 포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장의 서두(序頭)에서 인용하고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선언이나 <골로새서>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골 1:16),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을 것이므로, 교회학교의 교과과정은 기독교 교육에 관한 광의의 정의를 따라 구성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에 관한 고전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번’(Hebert W. Byrne)의 저서, <기독교 교육: A Christian Approach to Education>에서 제안하고 있는 방식을 다소 수정하여 가능한 분야들을 총괄해 보면 아래 그림에서처럼 크게 네 분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H. W. Byrne, <A Christian Approach to Education>. Mott Media: Milford, MI: 1981.

이 구분에 따르면, 교회학교는 단순히 성경공부나 기독교의 기본 지식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일반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거의 전 영역을 비록 개론적 수준에 머문다 할지라도 모두 포함시킴이 그리스도인의 전인적 훈련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2. 목적
우리교회 학교는 가정교회를 지향하는 이상과 정신에 따라, 교회 목장에 속한 모든 성도가 제사장과 사역자가 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기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충조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2-14)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세우려 함이니(골 1:28)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지적 훈련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면서 늘 의학백과 사전을 들여다보아야 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러한 사람에게 수술을 해 달라고 자신의 몸을 맡기는 환자는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의사라면 신체 각 부위의 위치나 기능에 대해서 달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의사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적 대안을 항상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야말로 가장 신학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 지식이나 믿음에 대해서 조리 있게 제시하지 못합니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식을 습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는 그나마 알고 있는 바도 제대로 표현하는 훈련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학교>의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목표는 <성경>과 기독교 진리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식을 쌓도록 하는데 두어야 할 것입니다.
3. 입학
자격 및 조건. 본 교회의 회원이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습니다. 단 목자의 확인 및 추천과 함께, 본인의 서약서를 제출하면 됩니다. 서약서 양식은 별첨과 같습니다. 교회 학교 입학 시에 서약서를 제시하도록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교회학교의 권위와 가치를 인식시키기 위함입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교회학교를 대하는 자세나 태도는 일반 교육기관을 대하는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실로 한심한 수준입니다. 일반 학교는 입학에서부터 졸업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제도화 및 법제화 되어 있어 학생 개개인이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학생 본인은 물론 학부모 중 어느 누구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경비로 전 교육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힘이 들어도 끝까지 견딜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학교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학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있다 해도 교회교육은 교회 사역의 우선순위에서 늘 최하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배, 찬양, 봉사, 선교, 기도, 교제 등에 의해서 늘 후순위로 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교육 예산 또는 교회학교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교회학교에 대한 인식이 이러할진대, 교육에 임하는 교인의 자세 또한 열성적이거나 진지하지 못합니다. 혹시 나는 교회학교에서 과제물을 내주는 교회가 있으며, 또한 과제물을 제출하는 성도를 본 적이 있습니까? 출석 점검하는 교회학교 보았습니까? 출석이나 성적이 좋지 못하여 이수(履修)에 실패하는 성도를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학교에 등록비를 요구하는 교회를 보았습니까? 일반 학교처럼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다양한 과목과 교사들이 교육하는 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저학년에서 고학년에 이르는 일련의 이수 연한을 갖추고 있는 교회학교를 본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교회에서 교회학교와 관련한 조직이나 체계가 없는 이유는 목회자는 물론 일반 성도에 이르기까지 교회학교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학교 입학 시에 본인의 서약서를 받는 일은 이 모든 잘못된 관행이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첫 걸음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둘째, 본인의 서약서를 통해서 본인의 교회교육 이력을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함입니다. 교회학교는 앞서 언급한 바대로, 횡적이고 종적인 체계나 편제가 필요합니다. 횡적인 체계라 함은 교회학교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이수 과목을 말하는 것이고, 종적인 체계라 함은 일종의 선수과목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의 서약서나 또는 성적 증명서에 그가 이수한 전체 과목에 대한 목록이 기재되어 있어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서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성경적 세계관을 갖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등록비. 등록비는 매년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등록비는 교재비 및 기타 비용에 충당될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하였으니, 이수하려는 과목에 등록비를 냄으로써 그 과목에 대한 관심과 열성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대학에서 돈 안내고 소위 청강(聽講)하는 사람치고 공부 잘 하는 사람 드뭅니다. 선물로 받은 <성경> 읽는 사람 제대로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기타 교육에 필요한 경비가 있다면 교회 예산에서 충당하게 될 것입니다.
입학 시기. 교회학교 입학은 매년 1월과 7월에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입학원서는 학기 개시 1주 전에 제출합니다. 단 학기 중에 새 가족이 된 회원에 대해서는 해당 목자의 확인에 의해 청강이 가능합니다만, 성정 처리는 되지 않습니다. 단 전체 수업일수 3/4 이상을 출성한 회원에 한하여 정상 등록한 것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4. 학사 관리
학사 일정. 학기는 1월과 7월에 시작하는 두 학기제로 운영합니다. 단 각 학기 중간에 특별 행사나 세미나 등으로 휴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적 관리. 성적처리는 다음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1) 성적은 합격 및 불합격으로 처리됩니다; (2) 해당 학기에 3회 이상 결석 시에는 실격 처리됩니다. 잦은 결석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침체시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3) 담당 교사가 요구하는 모든 숙제와 독서와 시험을 필해야 합니다.
이수 학점. 각 학년에 개설된 학점 총수는, 교과과정표에 보듯이 매 과목 당 3학점을 기준으로 할 때, 20 학점 전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매 학기 당 두 과목(6학점) 정도를 수강하여 짧은 시일 내에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교사 확보가 관건이니 만치 당분간은 한 과목 수강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두 과목 이상의 수강은 목장 모임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교사가 확보되면 과목 선택의 폭도 넓어질 것이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5. 교과 과정
기본 정신. 교과 편성의 정신은, 앞에서 천명한 기독교 교육 정신 즉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통합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이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크게 다섯 분야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1) 기독교(100); (2) 인문학(200); (3) 사회과학(300); (4) 자연과학(400); (5) 문화예술 및 언어(500). 교회가 이들 분야를 망라하여 교육하기 위해서는 교회학교는 일종의 평생교육기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림잡아 한 분야를 대학 4년 과정으로 본다면, 전체 다섯 분야 모두를 교육하는 데에는 적어도 20년은 족히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 과목의 괄호 안에 든 숫자는 분야별 대(大) 분류 번호에 해당하며, 이는 다시 중∙소분야로 나누어집니다: (예) 100 > 110 > 111 > 111-A. 예컨대, 기독교(100)의 경우 중∙대 분야만을 구분해 보면 아래 그림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기독교 100 교육 과정은 그 내용에 따라 네 개의 중(中) 분야로 나누어집니다: (1) 복음(110); (2) 성경(120); (3) 역사(130); 선교(140). 이들 각 분야는 신학적 주제에 따라 각기 조직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및 실천신학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바깥에서 두 번째 동심원 참고). 기독교 100 과정의 특징은 주로 <성경>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에 관한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지나치게 신학 일변도가 되지 않도록 유념하였습니다. 소(小) 분야와 그 이하는 별도 도표에 수록해 놓았습니다(아래 도표 참고). 동심원의 가장 바깥에는 교육의 대상자를 구분해 놓았는데, 교회회원으로 등록한 연륜에 따른 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자를 구분해 놓은 것은 나름대로 교육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체계를 고려한 것인데, 예컨대, 조직신학의 경우 기독교 기본 진리나 교리를 다룬 것으로서, 그 대상은 주로 신입 교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동심원의 가장 중심원 “초청”(101-109)은 신입회원 내지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100 과정>만으로도 적어도 4년의 교육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00 과정>에 포함될 수 있는 과목들을 주제에 따라 소(小) 분야와 각 학년 별 교과목을 정리해 보면 아래 도표와 같습니다. 이 표는 수강의 순서와는 상관없으며, 앞으로 교사가 확보되는 대로 전 학년의 과목들이 매 학기마다 동시에 개설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초청. <101-109> 과정은 교회 회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불신자를 위한 일종의 다리 놓기 사역으로서, 수시로 교회학교와는 별도로 회원 각자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또는 목장 별로 수행할 수 있는 초청, 전도 및 봉사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각 회원은 나름대로의 은사를 체험하고 활용할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교회 회원이 다양해질수록 이 영역의 과목은 더욱 다양해 질 것입니다.
참고로 본 책자의 <부록>에 교회의 사역에 관한 목록 중에서 선택하여 초청과 관련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복음. 이 주제는 주로 1년차 교과과정의 주제로서 교과번호 <110-119>가 이에 포함됩니다. 신학적 주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로 조직신학적인 것으로, 그 내용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 내지는 기본 소양에 관한 것들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본 교회의 <이상과 정신>에 관한 내용과 <영정 훈련과 성장>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재는 주로 <성경>에서 복음의 기본 진리를 다루고 있는 <신약>의 일부 책들이 될 것이며, 그 외에도 이와 연관된 부교재들을 함께 사용할 것입니다. 기타 필요에 따라 새로운 교과목들이 추가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복음>의 주 대상은 교회의 신입회원이 될 것입니다.
물론 신약 성경 전체가 복음에 관한 일관된 각 교과목에 대한 다양한 독서 읽기가 추가로 주어질 질 것이며, 특히 신입회원이 일반적으로 가장 궁금하게 여길 수 있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 등에 관한 다양한 질문과 답변들을 담고 있는 책들도 이 목록에 포함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경. 제 2학년 교과 과정의 신학적 주제는 성경 신학으로서 교과번호 <121-129>가 이에 포함됩니다. 다루게 될 내용은 <구약 개론> 및 <신약 개론> 등을 통해서 <성경>의 전반적인 골격과 구조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경> 해석의 원리와 방법론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구체적인 <성경 해석학>의 실례를 각 책의 해석을 통해서 실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역사. 제 3학년의 주제는 역사입니다. 교과번호는 <130-139>가 될 것이며, 다루게 될 내용은 <원 역사>, <족장사>, <이스라엘의 역사>, <신구약 중간사> 그리고 <기독교회사> 등이 될 것입니다. 제 3학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신자는 이미 성숙의 단계를 지났다고 사료되며, 따라서 이때부터 교회의 사역자 즉 적어도 목자로서의 부르심을 자각하고 이에 필요한 훈련도 아울러 거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선교. 제 4학년의 주제는 선교입니다. 고학년에 이를수록 점차 신학적 관심도 이론적인 것에서 실천신학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교과번호는 <140-149>에 이릅니다. 선교는 로잔언약의 정신을 그대로 따랐으며, 교수 내용으로는 선교의 원리에서부터 전도실습 및 봉사활동, 비전여행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교의 주체가 교회인 만큼 <교회론>과 관련한 일련의 주제들을 동시에 수강하게 될 것인데, 예컨대 <교회와 예배>, <기독교 윤리>, <교회와 종말론> 등에 관해서도 배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룬 교과목은 모두 100-140에 이르는 것들로서, 협의(狹義)의 기독교 교육 교과과정, 즉 <성경>과 기독교 진리에 관한 제반 교육 과정입니다(아래 그림 참조). 보다 광의(廣義)의 기독교 교육과 관련한 분야의 교과목들은 추후 교회 성장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추가하게 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교회가 가장 좋은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교회학교가 통합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과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3. 누군가 나에게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얼마나 잘 대답할 수 있습니까?
4. 기독교인의 지적 훈련은 무엇이며, 이것은 왜 필요합니까?
5. 이곳에서 제시한 지적 훈련의 내용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교회 학교의 이상과 정신에 입각해서 정리해 봅시다.
6. 우리교회 학교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6. 우리교회 학교는 교과목에 제시한 내용들을 가르칠 적절한 교사들이 학보되어 있습니까? 아니라면 이를 해결할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부 록 (2)
양 식
개인 헌신 카드
* 해당되는 곳에 표를 해주시면 됩니다.
서약자:
1.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삼고, 그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에 침례를 받고 본 교회의 회원이 되어 제반 권리와 책임을 다 하겠습니다 ( ).
2. 나는 본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침례를 받겠습니다( ).
3. 나는 다음 영역에서 새롭게 헌신하겠습니다(기존 회원에 국한합니다).
(1) 나는 목자로서 섬기겠습니다( ).
(2) 나는 부목자로 섬기겠습니다( ).
(3) 나는 교사로서 섬기겠습니다( ).
(4) 나는 다른 분야에서 은사를 드리겠습니다(예: 행정; 봉사; 찬양 등)
4. 새롭게 재 헌신하겠습니다(구체적인 헌신의 내용을 기술하십시오).
목원 서약서
서약자:
1. 본인은 목장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겠습니다.
2. 본인은 목장 모임에 관련된 제반 원칙들을 준수하겠습니다: 목자에 대한 순종; 목원들과의 관계(절대 용납; 비밀 보장; 상호 후원).
3. 본인은 교회의 제반 훈련과 선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예: 십일조 등).
4. 본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또 다른 제자를 삼아 나와 같은 동역자가 되게 하는 일이 나의 인생의 목표임을 알고 헌신하겠습니다.
목자 추천서
추천인:
나는 나의 목자로서 ( )를 추천하며, 이 사람과 함께 목장에서 성도의 필요한 훈련을 받겠습니다. 나는 또한 목장에서의 삶의 방식이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숙지하고 있으며, 이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따르겠습니다( ).
목자(부목자) 서약서
서약자:
본인은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사모하고 열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딤전 3:1), 본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정신을 나의 것으로 삼아, 목자(부목자)가 되기를 헌신하며 다음과 같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엄숙히 서약합니다:
1. 본인은 본인과, 본인의 목자와, 본인에게 맡겨진 목원들과, 그리고 교회의 영성을 위하여 111사역을 포함한 제반 훈련과 선교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겠습니다.
2. 본인은 목장의 목원들을 보살피고 인도하는 일을 나의 삶의 최우선으로 삼겠습니다.
3. 본인은 나의 목자에게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4. 본인은 동료 목자들과 하나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목자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으며, 동료 목자들이나 본인의 목자가 모르는 혼자만의 사역을 하지 않겠습니다.
5. 본인은 목장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겠습니다.
6. 본인은 나의 목자에게 행하는 공식적인 보고 사항 외는, 목장 내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비밀을 지킬 것입니다.
7. 본인은 다른 목장의 목원들을 위한 개인적인 상담에는 응하지 않겠습니다.
<표>
교회학교 수강 신청서
신청자:
목자 날인:
본인은 아래 과목에 대한 수강을 신청하면서, 교회학교에서 요구하는 제반 규칙(출석 및 과제물 제출)들을 준수하겠사오니 수강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표>
목장 사역 활동 점검표
아래 열거한 사역들은 본 교회가 현재 수행하고 있거나 또는 앞으로 수행 가능한사역의 일부입니다. 각 사역에 대하여 현재 수행 중인 것 (○표), 조만간 수행가능 한 것 (△표), 그리고 중기적인 목표로 수행할 것 (□표)로 구분해 보기 바랍니다.
1. 교제 및 예배 사역
1. 목장 모임( )2. 교회학교 수강( )
3. 목장 헌신 예배( ) 4. 주의 만찬( )
5. 교사 수련회( )
2. 선교(전도 및 봉사) 사역
1. 여름 성경학교( )2. 열린 예배( )
3. 비전 여행( ) 4. 선교 여행( )
5. 어학연수( ) 6. 컴퓨터 강의( )
7. 장학 사업( )8. 탁아소( )
9. 문맹자 국어 교육( )10. 부모의 날 행사( )
11. 가정교사 봉사( )12. 도서관 개방( )
13. 교통편의 제공( )14. 경로의 날 행사( )
15. 의류 지원( )16. 음식 지원( )
17. 상담(법률, 경제 등)( )18. 의료 봉사( )
19. 신혼부부 학교( )20. 낙태반대 운동( )
21. 결혼 상담( )22. 노인대학( )
23. 양로원( )24. 방송 선교( )
25. 청소년 범죄( )26. 진학 상담( )
27. 지역행사 장소 제공( )28. 직업 훈련( )
29. 직업 알선( )30. 농아 학교( )
31. 맹아 교육( )32. 정박아 교육( )
33. 정신병자 선교( )34. 알코홀 중독 치료( )
35. 감옥소 선교( )36. 전과자 지원( )
37. 결연 어린이 돕기( )38. 미혼모 상담 지원( )
39. 사회운동 단체 지원( )40. 사회사업 기관 봉사( )
41. 노동자 교육( )42. 낙도교회/해외선교( )
43. 여관/호텔 선교( )44. 유해출판물 고발( )
45. 이혼녀 경제 지원( )46. 공해 추방 운동( )
47. 다문화가정 선교( )48. 기타 윤리 회복 운동( )
기타 가능한 사역들(제안):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