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7과
사라-하갈 알레고리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4:21-31약 26분 분량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절).
오늘날 <성경> 해석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라-하갈’에 관한 본문의 해석은 “우화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백미(白眉)로 꼽을 만합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은 해석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것은 분명하지만, ‘유대’적 전통과 배경을 가진 자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항상 바깥으로 드러난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랍비’의 전통에 따르면 <성경>에는 적어도 네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문자적 의미입니다(Peshat). 두 번째는 (성경 기자가) 의도한 의미입니다(Remaz). 세 번째는 탐구와 연구를 통해서 유추될 수 있는 의미입니다(Derush). 그리고 마지막이 우화적 의미입니다(Sod). 이들 네 의미의 첫 글자를 따면 PRDS가 되는데, 이것은 “파라다이스”(Paradise)의 자음만을 묶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이 네 의미를 모두 획득한 사람은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즉 우화적 의미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랍비’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이끌어내려 했던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의 어떤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면의 숨은 뜻, 즉 우화적 의미를 이끌어내려 시도했고, <아브라함 순환>의 일부로서 익히 알려져 있는 “사라-하갈” 이야기도 ‘랍비’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 우화적 의미가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며, ‘바울’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이곳에서 그 동일한 이야기를 다시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익히 알려져 있는 의미를 단순히 인용하기 위함입니까? 나름대로 독창적인 재해석을 하려 함입니까?
그는 이곳에서 유대주의자들을 향해서 “대인입증”(對人立證, argumentum ad hominem) 방식이라는 논증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대인입증” 방식이라 함은 상대방의 성격이나 지위, 처지, 사상 등을 끌어들여 자기 논리를 정당화하는 논쟁 방식을 말합니다. 사도는 앞에서도 이 방식을 사용해서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만, 참고: 3:15-18에 대한 주석.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해서도 기존의 우화적 해석을 뒤집어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가 바라보는 이 이야기의 우화적 의미는 무엇이며, 사도는 이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습니까? 바로 이점이 본문을 읽는 독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의 기능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다양한 논란이나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새롭게 시작된 권면과 호소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지배적인 듯합니다. 이와는 달리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라-하갈 이야기>는 사도가 논쟁을 전개하는 중에 하나의 예로써 나중에 추가로 도입한 것이라는 입장이 널리 펴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본문은 제 3부가 아니라 제 2부에 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본문 속에는 “(내게) 말하라”는 문장을 포함해서 모두 네 번의 명령문과 두 번의 호칭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네 번의 동사는 모두 사도 자신의 명령이 아니라 <구약> 본문에서 인용한 것들로서, “즐거워하라”, “소리 질러라”, “외치라”, 그리고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입니다. 그리고 두 번의 호칭은 “형제들아”입니다. 본 서신의 제 3부에서 본문의 위치나 형식 등은 앞부분에서 이미 이와 유사한 사례를 관찰한바 있습니다:

이 도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사도는 두 번의 경우에서 모두 소위 “대인입증” 논증법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성경 해석 방식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방식은 그것이 두 단계에 걸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가 초보적이며 원시적인 단계라고 한다면, 두 번째가 보다 발전되고 심화된 단계라는 이해가 그것입니다. 예컨대,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이들의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첫 아들이긴 하지만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아들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삭’의 계열을 따라 법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유대’민족과 ‘유대’ 국가를 대표하는 자들이며, ‘이스마엘’은 ‘유대’민족이 아니며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 “유대주의자”들의 판단 근거는 누가 진정한 ‘유대’인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바울’의 복음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먼저 소개되고 선포되긴 했지만 그 질적 수준에 있어서는 초보적이고 원시적인 것으로서, 비유로 하자면 첫 아들 ‘이스마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들의 가르침은 비록 ‘바울’보다는 뒤늦게 소개되긴 했지만 진정한 계시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둘째 아들 ‘이삭’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대인입증” 방식은 이들의 알레고리를 그대로 채택하면서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즉 그는 일단 전통 “유대주의”적 해석에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노예와 육체적 출산을 따라 난 자들로, 그리고 ‘사라’와 ‘이삭’을 자유와 약속을 대표하는 자들로 일단 받아들입니다. 그런 다음 비유를 더욱 확대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은 ‘시내’ 산과 ‘예루살렘’을 대표하고 있고, ‘사라’와 ‘이삭’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시온’ 산을 의미하는 것 같음)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고자 바는 그가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유대주의”야말로 ‘이스마엘’과 ‘하갈’의 계열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현재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사도가 앞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믿음과 칭의의 성경적인 사례로 채택하였다면(3:6-9), 이곳에서는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자유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하면서 교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호소(21절)
사도는 그 유명한 <사라-하갈 알레고리>를 “내게 말하라”고 명령하고 호소함으로써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2절)
이 구절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앞 단락과도 적절한 연결을 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단순히 일단의 “유대주의자”들만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 모두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3:1). 이들 교인들은 지금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이지 완전히 율법의 삶으로 아직 돌아간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 아래에” 산다는 것은 “율법주의”와는 다르다고 거듭 밝힌 바 있습니다. 즉 이것은 “명목주의”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바 제반 의식이나 절기들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율법”은 앞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구절이 이어지는 22절의 “기록된바”와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넓게는 <구약> 전체를 지칭하거나 또는 좁게는 <오경>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성경을 듣지 못하였느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음” 즉 “성경을 들음”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라> 즉 율법을 크게 낭송하는 것을 듣습니다(행 15:2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것을 내면화 하고, 묵상하고, 이해하며, 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에서도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그리고 “회개하는 것” 등을 모두 동의어로 처리하고 있습니다(사 1:10; 6:9-10). ‘이스라엘’의 가장 으뜸가는 신앙고백 즉 “쉐마”도 이 “들음”의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던지는 질문, “네가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인즉, 이들 교인들이 진정으로 율법의 말씀을 이해했다면 “명목주의”의 삶으로 되돌아갈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호소이자 주장인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앞서 그가 밝힌 대로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몽학선생” 즉 초등 교사의 역할을 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2. 성경(22-23절)
그가 들려주는 <율법>의 말씀은 그 유명한 <사라-하갈 이야기>입니다: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2-23절)
사도가 <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바로 “기록된 바”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단순히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아브라함 이야기> 일부를 요약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일탈(逸脫)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가 바야흐로 “대인입증”의 논쟁을 시작하겠다는 암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사라-하갈 이야기> 이야기와 관련해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바를 먼저 드러내어 설명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논점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상대방의 입장을 근거로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펼쳐 보이겠다는 의도인 것이지요. 그는 이곳에서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 그리고 “육체”와 “약속”을 뚜렷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만,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의 해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들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해서는 “유대주의자”들을 통해서 익히 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요? 누가 ‘이스마엘’이며 누가 ‘이삭’이라는 말입니까? “유대주의자”들은 강변합니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따라 살지 않는 모든 이방 기독교인들은 비록 ‘이스마엘’의 후손은 될지언정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즉 ‘이삭’의 후손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사라-하갈 이야기>는 “율법주의”나 “명목주의”를 위한 우화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사도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사도 역시 이들과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즉 ‘하갈’은 여종이고 ‘이스마엘’은 육체의 자식이며, ‘사라’는 자유 있는 여자이며 ‘이삭’은 약속의 씨앗이라는 사실 말입니다(23절).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해석, 즉 “대인입증”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일 뿐입니다.
3. 풍유(24-27절)
과연 그는 이어지는 네 절에서 <사라-하갈 이야기>를 풍유(諷諭)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확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4-27절)
우선 그는 25절에서 <사라-하갈 이야기>를 “비유”(ἀλληϒορία, 알레고리아)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3-24절에서 언급한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밝히면서, 동시에 이들에 대한 사도 자신의 풍유적 해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25절에 대한 해석은 만만치 않은 것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과연 “하갈”이 처음부터 25 절의 일부였을까?; (2) 만일 그렇다면 25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마소라 사본>을 비롯해서 초대교회 교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본이나 번역본에서도 “하갈”을 본문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또는 생략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거의 모든 영어 번역본이나 한글 성경에서는 “하갈”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하갈”을 생략한다면 25절은 다음처럼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내’는 ‘아라비아’에 있는 산으로서...” 또는 “‘시내’ 산은 ‘아라비아’에 있으니....” 지금 이곳에서 지리에 관한 이 정보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까? 왜 사도는 이처럼 중요한 논쟁에서 별로 중요할 것 같지도 않은 지질학적 정보를 느닷없이 삽입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사도는 지금 ‘시내’ 산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이방의 땅 ‘아라비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성경>에서 유사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그 기원을 약속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행 7:2-36).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구속의 역사를 약속의 땅이 아닌 먼 이방의 땅에서 시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데 있는 듯합니다.
다소 무리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갈”을 집어넣은 것이 후대 편집자의 의도적인 본문 변조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본문 내에 있는 것이 없는 편보다는 훨씬 더 나아보입니다. 사도의 논리 전개에 있어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갈’을 ‘시내’ 산에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아무리 그럴 듯한 대답을 한다 하드라도, ‘하갈’을 ‘시내’ 산에 비유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다양한 설명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예컨대, ‘아랍’어로 ‘하갈’은 “바위” 또는 “절벽”을 의미하므로 이 단어를 산과 연계해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랍’어로 ‘하갈’의 첫 자음 “ㅎ”(h)는 ‘히브리’어의 “ה”(h)와는 그 발음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상호 대응관계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식의 설명은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앞에서처럼 이 두 사이의 관계를 언어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바울’ 자신의 지적∙사상적 배경에서 찾으려 하소 있습니다. 즉 ‘바울’과 같은 ‘유대 랍비’에게는 <성경> 구절들에 대한 풍유적 해석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으로서,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피상적인 관계에 있는 것들도 상호 연계시키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아라비아’ 사막은 ‘유대’ 전승에서도 ‘이스라엘’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한데,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라든지, ‘시내’ 산 율법 전수 등이 그러합니다. ‘바울’도 개인적으로 ‘아라비아’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으로서, 그가 회심 이후 수년을 혼자서 복음이나 율법의 의미를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보낸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가 ‘아라비아’의 ‘시내’ 산을 율법과 연관 짓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며, 더 나아가 그가 지금 다루고 있는 자유와 종의 주제와 관련해서도 <사라-하갈 이야기>의 풍유를 더욱 확대해서 여종 ‘하갈’을 ‘시내’ 산으로까지 비약시키고 있는 것도 사도의 독창적인 상상력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R. N. Longernecker).
궁극적으로 사도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하갈’을 “지금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풍유의 범위를 비약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사도의 이해와 해석이 전통적인 ‘유대’ 식의 그것과 정면으로 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갖는 의미는 실로 중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사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사라와 이삭 이야기>로 이어지고, 다시 ‘시내’ 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거쳐,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서 그 정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장차 올 ‘이스라엘’의 모형이자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바라보는 ‘예루살렘’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사도의 핵심어는 “자유”와 “종”입니다. 그에게 있어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과 “유대주의자”들을 자녀로 가지고 있는 그 어머니 ‘하갈’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사라’는 당연히 장차 올 ‘예루살렘’을 상징해야 함이 당연할 것입니다. 사도는 이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26절). 사도는 이 관계를 25-26절에서 교차대구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두 절은 각각 전체 구조의 절반을 이루고 있기는 합니다만, 완벽한 대칭 구조에서는 다소 벗어나고 있습니다:
A ‘하갈’
B ‘시내’산
C 종
D 지금 있는 ‘예루살렘’
D1 위에 있는 ‘예루살렘’
C1 자유
B1 (‘시온’ 산)
A1 우리 어머니
‘유대’ 전승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또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개념은 아주 다양하면서도 풍성한 배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인류 역사의 완성 내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절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말의 날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도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또는 하나님의 성)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서 이미 그 씨앗을 배태하고 있기는 합니다만(시 87:3; 사 54), 이후 ‘유대’ 지혜문학이나 묵시문학 등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의 종말론적인 소망과 관련해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R. N. Longernecker, 214쪽.
그러나 <신약>에서는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기독교적 소망과 관련해서 “새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히 11:10, 14-16; 12:22; 13:14; 계 3:12; 21:2). 이들 <신약>의 구절들에 따르면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바라던 “새 예루살렘”은 지금 현재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성취와 시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자유자”,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어머니”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어머니”가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사라’를 암시하고 있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 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인 ‘사라’가 누리던 지위(22-23절)는 ‘갈라디아’의 기독교인들의 것이 될 것이며, 이점에서 ‘사라’ ‘갈라디아’ 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25-26절의 교차대구는 완벽한 대칭 구조는 아닙니다. 예로써, 25절의 ‘시내’ 산과 대칭을 이룰 다른 산(山)이 26절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약의 다른 곳에서 두 산에 대한 대조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히 12:18-22). 이처럼 ‘시내’ 산을 하나님의 계시의 산으로, 그리고 ‘시온’ 산을 종말론적 구속의 산으로 대조시키게 된 것은 제 2 성전 시대 이후 비롯된 민족적 ‘유대교’의 발흥에서 그 발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사도는 이곳에서 그러한 대조를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만일 그가 ‘시온’ 산을 ‘시내’ 산에 대조되는 개념으로 소개한다면 오히려 독자들이 더 혼란스러워하고, 결국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시온’ 산은 실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시내’ 산이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 “역사적인 산”이라면, ‘시온’ 산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의 나라를 세우실 “종말의 산”으로서 다름 아닌 지금의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해를 가진 교인들에게 ‘시온’ 산을 지금의 ‘예루살렘’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대조시키게 되면 혼란만 더 가중시키는 것이라고 사도는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사도는 27절에서 ‘시온’ 산의 영광과 관련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경적 근거를 <이사야서>로부터 인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사 54:1). <헬라어 성경>에서 27절이 접속사 “왜냐하면”(γάρ)으로 시작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는 종말론적 예언으로서 장차 도래할 “시온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라’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면, 이 둘은 모두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가릴 것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사라’를 “잉태하지 못한 자”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칠십인 역>에서 <창세기>(11:30)나 <이사야서>(54:1) 모두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때문일 것입니다. 당연히 “잉태하지 못한 자”는 “예루살렘”이며,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내”이기도 합니다(사 54:11-12). 이 여인 즉 ‘예루살렘은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야훼’께서 다시 그녀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며(사 54:11-12), 그분께서 직접 그녀의 자식들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54:13).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사도의 우화적 해석에 따르면, ‘사라’는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 교인들뿐만 아니라 ‘유대’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어머니입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자유인 아내로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자유로운 약속의 자녀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도의 해석에 따르면 ‘사라’의 자녀들이 남편 있는 ‘하갈’의 자녀들보다 더 많게 될 것입니다. ‘사라’가 우리 어머니가 되는 이유는 그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서 종의 자식들을 데리고 있는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대립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에게 있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말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경험하게 될 현실이며,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말론적 상황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4. 적용(28-31절)
자신의 해석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한 사도는 이제 그의 논리의 당연한 귀결 즉 적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절)
즉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사라’와 ‘아브라함’의 자유인 자녀들이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으로 대표되는 자들이며, 당연히 모두 한 형제로 불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다름 아닌 ‘갈라디아’ 교인들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29절).
그 체험이란 이전에 ‘이삭’이 ‘이스마엘’로부터 받았던 박해와 조롱과 같은 체험을 말합니다. 참고로, <창세기>에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주었다는 박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만, <탈굼 성경>이나 기타 여러 랍비 전승에서는 이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이 겪고 있는 체험에 대한 일종의 “모형”(type)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는 각기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마지막 두 절의 권면을 통해서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우화적 해석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0-31절)
그가 현재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에 적용시키며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창세기>에서 ‘사라’의 무자비한 요구 사항입니다(창 21:10). 다만 ‘사라’의 이런 요구 사항을 ‘사라’가 했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본문 변조를 꾀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 아들”이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 아마도 이러한 요구 사항은 이전에 “유대주의”들이 반대로 ‘바울’ 사도를 내쫓으라고 하면서 동일한 성경 본문을 인용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대인입증” 식의 논증을 통해서 동일한 이야기를 권면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권면의 핵심 요지인 즉은, 율법의 구속과 복음의 자유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몰래 숨어들어 온 “유대주의자”들과 “명목주의자”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31절은 <사라-하갈 알레고리>의 결론이자 3:10-4:11 사이에서 사도가 전개한 모든 논의의 대 결론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누구나 인정할 수 있듯이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수사적 방법에 있어 <갈라디아서> 내에서 가장 어려운 곳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첫째로,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구약> 본문에 대한 우화적 해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이스마엘’, ‘사라’, ‘하갈’, ‘시내’ 산 ‘예루살렘’ 등이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사도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특별한 논쟁 방식 즉 “대인입증”으로 불리는 논쟁 방식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 랍비’들 사이에서는 흔한 것이었습니다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방식입니다.
호소. 그렇지만 본문의 핵심 주제는 정당하며 분명합니다. 사도는 지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향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나 “유대주의자”들이 아니라, 율법적 종교인들로서 특정한 일련의 규칙들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는 자들(이들을 명목론자라고 한 바 있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사도는 지금 이들에게 “대인입증” 방식의 논쟁을 적용하면서 그들의 견해가 얼마나 부조리하며 모순적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논증은 세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역사의 인용 단계이고, 둘째가 비유(즉 풍유) 단계이며, 셋째가 적용 단계입니다.
역사.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역사는 그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가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유대교 특유의 우화적 해석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은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새로운 하나님의 도성이자 교회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구든 이 공동체가 인정하는 일련의 규정들을 준수하지 않으면 약속의 후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대주의”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 <아브라함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인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한 우화적 해석이 깔려 있습니다.
이들이 <아브라함 이야기>를 이해하는 일차적인 방식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즉 ‘사라’는 자유자이고 ‘하갈’은 노예이며, ‘이삭’은 자유자의 후손이며 ‘이스마엘’은 여종의 아들로서 그 또한 노예입니다. 따라서 약속은 ‘이스마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성경>에 대한 일차적 이해이며, ‘바울’도 “유대주의자”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일차적 의미에 그칠 수 없고, 가장 심오한 부분 즉 우화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즉 과연 이들 주인공들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아브라함’-‘사라’-‘이삭’의 계열이 상징하고 있는 대상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사라’와 ‘이삭’과 ‘유대’인과 ‘모세’의 율법과 ‘시내’ 산과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모교회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한편, ‘바울’과 그가 전하는 복음은 비록 ‘아브라함’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스마엘’처럼 첫 아들이긴 하지만 진정한 약속의 후손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이스마엘 복음”으로서, ‘사라’가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고 요구했던 것처럼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풍유. 그러나 우화적 해석에 대한 사도의 이해는 정반대입니다. “대인입증” 방식의 수사를 통해서 그들의 해석을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모든 믿는 자들의 진정한 어머니이며, 자유자 ‘사라’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의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자유자의 아들 ‘이삭’이며 약속의 후손입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사도는 <이사야서>의 예언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사 54:1). ‘이사야’는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아기를 낳지 못하는 상태에 있고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의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회복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자녀들을 낳게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은 훗날 ‘예루살렘’에 다시 ‘유대’ 공동체가 건설됨으로써 일부 성취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사도의 해석 역시 우화적 해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여기서 “잉태하지 못하는 자”, “산고를 모르는 자”, “홀로 사는 자”가 일차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사라’이며, “남편 있는 자”는 ‘하갈’입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라’를 ‘갈라디아’의 기독교인들로, 그리고 ‘하갈’을 “유대주의자”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하갈’로서 “유대주의자”들의 어머니이며, ‘사라’는 기독교인들의 어머니로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적용. 사도의 우화적 해석의 절정은 마지막 결론이자 교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이 결론으로부터 얻어지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은 교훈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29절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젖을 뗄 때 즈음하여 종의 아들 ‘이스마엘’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았다면 오늘날 우리 또한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오는 이런저런 형태의 핍박이나 조롱은 세상 즉 이방인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이복형제인 종교인들 즉 외형적 교회로부터 온다는 것이 우리의 체험입니다. 예수께서도 멸시와 조롱을 받은 것이 그의 고향과 그의 가족 친지들로부터였습니다. ‘바울’의 가장 극렬한 반대자들도 이방인이 아니라 그의 동료라는 사실이 본 서신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당시 ‘이삭’과 같은 어린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고 핍박한 것은 다름 아닌 중세 교황 체제 하의 ‘로마 카톨릭’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들에 대한 교훈은 항상 부정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밝은 약속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것이 두 번째 교훈으로 30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처음에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내가 이삭과 내 언약을 세우리라”고 답하셨습니다(창 17:18-21). 이 약속에 근거하여 ‘사라’는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이스마엘’과 같지 않고 ‘이삭’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은 혈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에 의해서입니다.
결국 ‘이삭’의 운명은 이처럼 양면성을 갖습니다. 핍박과 고통이 있다면 상속과 특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후사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존재 양식에 대한 역설입니다. 사도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내용과 수사에 있어 가장 특징적인 두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과 관련한 역설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