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3과
명목주의 반박(2)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3:26-29약 22분 분량
그리스도안에서 새 관계들
(3:26-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7절)
법률이나 시행령은 원래 제정한 목적이 그것을 잘 지키는 자들에게 무슨 상이나 표창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어기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함입니다.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상을 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잘 지키지 못해서 벌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교통법규 하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교통질서 아무리 잘 지켜보아야 상 받을 일 없습니다. 잘 지키다가도 어쩌다 한 번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범칙금 고지서가 집으로 날아듭니다.
율법도 이와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한 번도 빠짐없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항상, 율법의 모든 규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고, 나아가서는 죄를 더 짓게 만듭니다. “명목주의”의 허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는 율법 아래에 있기 때문에 결코 완벽한 신앙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난 단락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다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쫓아 살 수 없는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단락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불과 네 개의 절로 이루어진 본문은 구조적으로 꽤나 복잡하다 할 것입니다. 우선 첫 구절은 형식 상 일종의 “선언”에 해당됩니다: “너희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절). 그리고 이어지는 두 절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문”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내용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7-28절). 그리고 마지막 절은 하나의 결론적인 선언으로서, 이방 기독교인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에 대해서 “유대주의자”들이 제기한 바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29절). 각 구절의 기원이나 출처와 관련해서 볼 때, 26절이나 27-28절 등은 초대교회부터 익히 알려져 있는 내용들을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 29절은 26-28절의 내용을 토대로, 당면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구조 및 출처와 관련된 이러한 가정은 본문의 구문(構文)이나 그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어휘들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선 본문의 구문(構文) 상의 특징은 세 개의 접속사(“왜냐하면...왜냐하면...그렇다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세 접속사는 각기 26절과 27절 및 29절의 첫머리에 등장하여 세 개의 단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 각각은 별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일관된 논리를 전개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핵심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여러 다양한 어휘들을 구사하고 있어, 이들이 상호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의 핵심 표현은 ‘그리스도’와 관련한 네 가지 유사한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26, 28절);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27절); “그리스도로 옷 입은”(27절); “그리스도의 것”(29절).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두 단어는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시키고 있는 “(너희) 모두”와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이로 미루어 사도에게 있어 ‘아브라함’과 ‘이방인’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다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왜 사람을 의롭게 하지도 못하며, 또 의롭게 된 자가 완벽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것일까요? 앞 단락에서는(3:19-25) 그 이유에 대해서 보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바 있습니다. 그 이유란 율법의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목적이나 기능 때문이었습니다. 즉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며, 죄를 더 짓게 만들며, 감독하고 관찰하는 한시적인 기능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 단락에서는(3:26-29) 보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왜 기독교적 삶이 율법적인 삶과 상관이 없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부터 율법중심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하나님의 아들(26절)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의 원래 신분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가릴 것 없이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쫓아 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극적으로는 그들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3:19-25). 그러나 그보다 더 발전적이고 적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된 새로운 체험,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절)
<헬라어 성경>은 이 구절을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접속사가 기능하는 바는, 앞에서 전개한 논지를 이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적절한 번역도 “왜냐하면 여러분도 알다시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용례를 <신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롬 7:2; 마 12:40; 23:3; 24:38; 막 7:3; 눅 9:14; 요 3:16; 4:8, 9; 히 3:4; 벧후 2:8.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상은 “(너희) 모두”(πάντες, 판테스)입니다. 사도는 이 단어를 단락의 첫 머리에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27-28절에서도, “누구든지”라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등의 표현을 통해서 이 단어의 보편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마지막 29절에서 “아브라함 자손”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갈라디아 서> 전체를 통해서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4:6-7에서 다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소 까다로운 표현은 이인칭 복수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단어 “너희”인데, 23-25절 사이에 등장하고 있는 “우리”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26절에 이르러 그 대상이 다소 좁아진 느낌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소 이상한 표현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여기서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23-25절 사이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믿음”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믿음”은 문맥 상 “너희의 믿음”이 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믿음”의 결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도가 즐겨 사용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바울’의 서신 전체를 통해서 이 표현은 대략 164회 정도 나타나고 있습니다(Longnecker).
동시에 초대 교회에서 사용하던 신앙고백의 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표현이 전달해주는 바가 다소 신비주의적인 느낌이 들게 하지만, 체험적이고, 인격적이며, 더할 수 없이 친밀한 교제와 관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27-28절)
이 두 절이 기능하는 바는 앞선 26절의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는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을 차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27(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왜냐하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7-28절)
<헬라어 성경>에서 이 구절이 다시 한 번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기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아마도 27-28절은 초대 교회에서 침례 의식에서 사용하던 신앙고백으로서, 사도가 26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재확인하기 위해서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H. Schlier). 그래서 구조적으로 볼 때, 이 두 구절이 없어도 26절의 내용은 본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29절에 무리 없이 연결될 수 있음을 봅니다(26절에서 곧바로 29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28절의 끝 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표현은 26절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7절의 “누구든지”는 26절의 “(너희) 모두”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의 “누구든지”(ὃσοι, 호소이)는 남성 복수형으로서, 26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남성 복수형 “모두”(πάντες, 판테스)와는 동등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율법과 약속”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볼 때, 28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세 쌍의 등위 구(等位句)-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중에서 첫 번째 쌍만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서신의 후반에서 “자유와 종”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서> 4-5장에서 다루고 있는 “자유와 종”에 관한 주제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부분에 관한 것으로서, 이곳에서 말하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에 관한 언급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사도가 주장하는 바는 기독교 복음이 이런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를 철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쌍으로 등장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도 “유대주의”나 “명목론”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습니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性)의 차별 또한 사라졌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세 쌍의 표현은 사도의 다른 서신에서도 다소간 축약된 형태로든 또는 확장된 형태로든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순서는 변하지 않고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들 표현이 사도 자신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내에서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사용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고린도 전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골로새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마찬가지로 <고린도 전서> 7:17-28절 사이에서도 “할례파나 무할례파”에 대해서(17-19절), “종이나 자유인”에 대해서(21-23절),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25-28절) 동일한 순서로 다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2:13이나 <골로새서> 3:11에서는 이들 표현을 침례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 28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 군데 모두 이들 표현을 침례에 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이 원래 사용되던 배경은 초대교회 내에서 침례 시에 신앙고백의 한 형태로 회자되던 표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구가 원래 의도했던 바도, 침례를 통해서 공동체의 새로운 회원이 된 자들의 신분과 지위에 관한 간략한 정보를 제공해주고자 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의미하는 바는, 회원 모두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신분의 차이 없이 동등하게 그 책임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사도가 이곳에서 이 표현을 언급하는 이유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켜줌과 동시에 자신의 논지를 증명하려 함일 것입니다. 사도가 앞에서 이들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이미 듣고 보았다”고 쓰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침례”란 당연히 기독교 침례를 말하는 것으로서, 항상 “침수 침례” 즉 물속에 잠기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참고: 롬 6:3; 고전 1:13-17; 12:13; 15:29.
이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타인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 또는 ‘그리스도’(엡 5:26)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침례는 “그리스도 안에서(또는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거나(27절; 롬 6:3; 고전 1:13, 15; 10:2),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마 28:19; 행 8:16; 19:5).
또 한 가지 침례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사실은 침례와 믿음과의 관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침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관계를 본문의 문맥 안에서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26절과 27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26절과 27절에서 각기 등장하고 있는 두 단어, “모두”와 “누구든지”가 동일한 의미를 가지며 상호 병행 관계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는(26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는”(27절) 자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믿음과 침례가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이처럼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동일하거나 상보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믿음이 있다고 해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든지, 반대로 침례가 믿음을 대신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침례는 내적인 믿음에 대한 외적인 증거(표징)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며, 그분의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침례는 할례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할례와 침례 모두 어차피 외적인 의식이니만큼, 사도는 단순히 할례를 침례로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사도가 침례를 믿음을 대체할 수 있는 종교적 의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기독교 침례는 ‘유대’교의 할례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주의”와의 힘든 싸움을 회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침례에 대한 인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침례와 믿음은 기독교인이 됨에 있어 각기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이 둘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고 작동하는 것입니다.
침례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언급은, 침례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사실입니다. 이러한 은유가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덕성을 갖추며, 그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의”나 “구원”이나 “영광”의 옷을 입는다는 표현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하 6:41; 욥 29:14; 시 131:9, 16, 18; 잠 31:25; 사 51:9; 52:1; 61:10; 슥 3:3-5. 이와 반대로 “수치”의 옷을 입는다는 표현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 8:22; 시 131:18; 막카비 1서 1:28.
이러한 상징은 사도의 다른 서신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자들로 하여금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골 3:12; 살전 5:8),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하는가 하며(롬 13:12),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모든 신자는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고전 15:53).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침례 후보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상징들로써, 침례 전과 이후의 삶에 대해서 강조하고 권면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26-27절의 사건들이 있은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26절),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27절) 결과가 무엇인가? 28절은 이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대답인 즉은 “옛 관계들이 사라지고, 새 관계들이 왔다”입니다. 사라진 옛 관계들이 무엇인지 <헬라어 성경>은 세 번의 반복되는 부정문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분도)없으며”; “종이나 자유인의 (구분도) 없으며”; “남자나 여자의 (구분도) 없나니”(28절상).
이들 세 가지 구분은 나름대로 독특한 영역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구분은 서신의 주제와 가장 잘 일치하는 “유대주의”나 “명목론”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주제는 서신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만, 그 자체로서 기독교 윤리와는 결코 무관할 수 없고 오히려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왜 하필 이들 세 가지 관계에 대한 언급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속에 포함되었을까요? 정확히 가름하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유대’인들의 기도문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즉 이들이 아침에 드리는 기도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이방인이 아닌 자여 복 되도다; 노예가 아닌 자여 복 되도다; 여자가 아닌 자여 복 되도다.” 이방인과 노예와 여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바로 이런 ‘유대’적 편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쉽게 가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침례 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적이고, 사회적이며, 성적인 옛 관계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들이 시작되었다는 신앙고백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된 관계들이란 28절 후반에서 긍정문으로 드러내고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너희는... (왜냐하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절하). 사도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접속사 “왜냐하면”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논리가 앞의 것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접속사는 26절상과 27절상에서 같은 이유로 한 번씩 등장한 바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너희”, “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등과 같은 표현은 26절에서 이미 친숙하게 된 것들입니다. 즉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표현은 결국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방식과 관련해서 26절과 28절에서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믿음으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비해, 후자는 “침례를 통해서”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3. 아브라함의 후손(29절)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사도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절)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약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도는 다른 어떠한 새로운 논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26절과 27-2절에서 각기 초대교회의 선언과 신앙고백을 인용한 터라, 29절은 그 바탕 위에서 내려지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의 조건절도 이러한 바탕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들 전제는 신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결론으로 “유대주의”의 주장은 다시 한 번 그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의 당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의 아들. 야구의 투수나 축구의 골키퍼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잘 해 보아야 점수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역할이 수비이므로 기껏해야 무실점으로 상대를 막아내는 것뿐입니다. 법률이나 시행령도 이와 비슷합니다. 원래 이들을 제정한 목적이 그것을 잘 지키는 자에게 무슨 상이나 표창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어기는 자를 처벌하기 위함입니다.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잘 지키지 못해서 벌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교통법규 하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교통질서 아무리 잘 지켜보아야 상 받을 일 없습니다. 잘 지키다가도 어쩌다 한 번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범칙금 고지서가 집으로 날아듭니다.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지 않고, 죽이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인식하게 하거나, 또는 죄를 더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절망하게 하고 절망 가운데서 절규하게 만듭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바로 이것이 그나마 율법의 순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도저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규범을 지킬 수 없다는 절망 가운데서 그분의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고 간구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목적은 역설적으로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닫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 모두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롬 7:4상). 무슨 법이나 계약은 그 당사자가 살아 있을 동안에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따라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죽는 것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점을 혼인관계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그에게 매인 바 되어, 만일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않습니다(롬 7:1-3).
‘갈라디아’ 교인들도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쫓아 살 필요도, 또 그렇게 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 모두는 “율법 아래에” 살면서 모두 죽었기 때문에 “율법 아래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 단락에서 내린 결론입니다(3:19-25).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주의”를 반박하는 소극적인 이유가 될 뿐입니다. 그보다는 더 발전적이고 적극적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음부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사람의 목적은 죽는데 있지 않고 사는데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7:4하). 이곳 <갈라디아서>에서 그의 표현은 더욱 강력하고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런 신분의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절)
이 새로운 관계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단순히 “구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막연하고 무미건조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이들 그림을 “화목”, “구속”, “칭의”, “화해” 등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이들 각각의 단어조차도 전체 그림의 부분을 담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화목”은 성전에서의 의식을 보여주며, “구속”은 시장에서의 상거래를, 그리고 “칭의”는 법정에서의 절차를, 그리고 “화해”는 가정이나 가족에서의 경험을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들 각각의 그림들은 전체 그림의 고작 같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해가는 순서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화목”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구속”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유를, 그리고 “칭의”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화목”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인을 향한 진노를 푸셨으며,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으며, “칭의”를 통해서는 죄인인 우리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 단어 어디에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나 관계의 형성에 대한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화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용서 그 이상의 무엇입니다. 한 가족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로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가까워 질 수 없을 정도의 친밀한 교제와 관계, 그리고 특권이 이 표현이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입니다.
그러나 “화목”, “구속”, “칭의”, “화해” 등은 구원의 그림을 그려주는 상보적인 요소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속”이라고 부릅니다만, 사도는 이곳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행위” 때문입니다. 이 객관적 토대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서 나의 주관적인 체험이 되고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더더욱 율법의 요구에 따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나 체험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는 당연히 이전의 모든 관계를 불필요하게 하며 사라지게 만듭니다. 사도는 <고린도 후서>에서 이점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대 교회가 침례 의식에서 사용하던 신앙고백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7-28절)
새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써, 이전에 내가 맺고 있던 그 모든 관계들은 인종과 사회적인 신분과 성적 차이에서 오는 그 모든 편견과 차별들입니다. 이들 세 가지 구분은 나름대로 독특한 영역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구분은 서신의 주제와 가장 잘 일치하는 “유대주의”나 “명목론”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주제는 서신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만, 그 자체로서 기독교 윤리와는 결코 무관할 수 없고 오히려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왜 하필 이들 세 가지 관계만이 침례 시 신앙고백 속에 포함되었을까요? 아마도 ‘유대’인들의 기도문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즉 이들이 아침에 드리는 기도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이방인이 아닌 자여 복 되도다; 노예가 아닌 자여 복 되도다; 여자가 아닌 자여 복 되도다.” 이방인과 노예와 여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바로 이런 ‘유대’적 편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쉽게 가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침례 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적이고, 사회적이며, 성적인 옛 관계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들이 시작되었다는 신앙고백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침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26절) 있는 모든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는”(27절) 자입니다. 혹이나 믿음이 있다고 해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든지, 반대로 침례를 받았으니 믿음이 생기겠거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침례는 내적인 믿음에 대한 외적인 증거(표징)가 됩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며, 그분의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는 또한 침례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은유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덕성을 갖추며, 그처럼 행동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침례 후보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상징들로써, 침례 전과 이후의 삶에 대해서 강조하고 권면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사도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절)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약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그 모든 내용들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율법주의”는 물론 “명목론”도 그 터전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즉 “율법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의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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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과 토의
1. 본문은 “명목론”에 반박하는 두 번째 검증으로서, 첫 번째 것에 비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핵심 주제는 무엇인지 이를 토대로 설명해 봅시다.
2. 새로운 관계란 무엇이며, 그 토대는 무엇입니까?
3. 침례가 본문의 주제는 아니지만, 침례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