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과
간증과 변론 (1): 주제 선언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1:11-12약 20분 분량
제 3과: 주제 선언
3
간증과 변론 (1):
주제 선언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1:11상)
<갈라디아서> 서신은 그 형식이나 구조에 있어 크게 네 개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1) 인사(1:1-5)
(2) 책망(1:6-4:11)
(3) 권면(4:12-6:10)
(4) 추신(追伸)(6:11-18)
이중 두 번째, “책망”이 서신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양식(樣式)은 자기 변론을 위한 “해설” 내지는 “이야기”(narrtio) 정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망”의 첫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제 2 과는(1:6-10) 그 양식에 있어 일종의 “머리말” 또는 “서두”(書頭; exordium)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 서두을 끝낸 후, 변론을 위한 자전적(自傳的) 이야기, 즉 간증(干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먼저 밝혀두고 있습니다: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절)
이 두 절이 문학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일종의 주제 선언으로서, 제 3 과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도 사도는 통상적인 서신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로 시작하는 주제 선언으로서(1:11), 이곳에서 사도는 그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과 그 기원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너희가 들었나니”로 시작하고 있는 자서전적인 간증이 그것인데(1:13), 이는 주제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지지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1:13-2:14 사이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가 이 주제 선언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질문의 요지인 즉은 “바울의 복음”과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 사이에 공통점은 무엇이며,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대부분의 주석서에서 단 두 절로 이루어진 이 부분을 별도의 단락으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앞 단락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면(1:6-12) 또 다른 학자는 다음 단락에 포함시키고 있기도 합니다(1:11-2:14). 그만큼 이 두 절의 문학적인 기능이 분명치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11절을 과연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앞 단락에 이어지는 종속 구절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용하는 접속사의 종류 여하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두 문장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앞 단락에 이어져야 마땅할 것인데, 이 접속사가 기능하는 바는 앞의 내용을(1:6-10) 설명하고 보충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후자의 경우는 분명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접속사가 기능하는 바는 서론에서 서술한 내용을 반박하고 부정하면서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내용이란 “인사”부분에서 밝힌 바 있는 내용으로서(1:1상), 이 단락에서 그 주제를 보다 확대해 갈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로만으로 단락 구분을 결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불행하게도 모든 사본이 다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J. Jeremias)는 <갈라디아서> 전체가 교차대구의 형식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 단락을 그 첫 시작으로 별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11절과 12절에서 각각 “사람의 뜻을 따라”(kata; a[nqrwpon; human)와 “사람에게서”(para; ajnqrwvpou; from any man)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두 표현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순서가 뒤바뀌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1:13-2:21에서 복음과 관련한 핵심 주제는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펼쳐지다가, 이어지는 3:1-6:10에서는 그것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레미야“의 주장에 따르면, 사도는 이처럼 그의 복음을 변론함에 있어,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을 통한 변론에서는(1:13-2:21) 그 복음이 “사람에게서”(12절) 나온 것이 아님을 강조하다가, 이어서 성경에 입각한 변론을 펼칠 때에는(3:1-6:10) 자기의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11절) 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F. Mussner):
A. 선언: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1)
B. 선언: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1:12)
B. 해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바울의 복음(1:13-2:21)
A. 해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닌 바울의 복음(3:1-6:10)
이런 구조 분석은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허술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Longenecker): (1) 전체 교차대구를 완성시켜 줄 수 있는 대응되는 세부 짝들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점; (2) 전체 구조를 조화롭게 구성하기 어렵다는 점; (3) 한 주제가 어디서 끝나며 새로운 주제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점. 이 외에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사도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두 표현을 교차대구적으로 사용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예레미야’가 관찰한 바대로, 사도는 1:13-2:14에서 그의 복음의 유래와 기원에 대해서 자서전적인 간증을 통해서 변호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그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 설명이 2:15-21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1:11-2:21의 본문에는 공통적인 주제들이 담겨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단락의 구조는, 당시 전형적인 서신의 패턴이었던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11절)와 “너희가 들었거니와”(13절)의 표현을 통해서 오히려 더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으며, 이 두 절로 시작되는 각 단락은 수사적 형태에 있어 “해설”(1:11-2:14)과 “제안”(2:15-21)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두절의 문학적 기능은 1:13-2:14에서 볼 수 있는 자전적인 변론에 앞선 주제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사도는 “나의 복음”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변론을 전개함에 있어, “서론”에서 그의 독자들의 과거 체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시작한 바 있습니다(1:6-10). 이어지는 단락은 일종의 주제 선언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여기서 그는 변론의 주제를 도입하면서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을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서 그들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11절상)
이런 표현은 당시 ‘헬라’ 서신에서 상투적인 것으로서, 사도가 그의 독자들에게 엄숙한 경고나 확신을 주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기도 합니다(고전 12:3; 15:1; 고후 8:1).
사도가 “형제”로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동료 유대․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배교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입니다. 흔히 “형제”는 유대인들이 동료 유대인들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거나(레 19:17; 신 1:16; 행 7:2; 롬 9:3), 또는 ‘헬라’ 세계에서 종교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향해서 부르던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을 “형제”로 불렀듯이(참고, 마 23:8; 막 3:31-35), 초대 교회 내에서도 예수님과의 관계나 그분의 뜻을 함께 수행하는 동료라는 인식에서 서로를 향해서 “형제”로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인식 하에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롬 8:29). 이렇게 함으로써 상호 의존적인 존재로서의 동료애와 형제애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롬 14:10, 13, 15, 고전 5:11; 6:5-8; 8:11-13; 15:58; 고후 1:1; 2:13). 더 나아가 사도는 지금 배교에 빠져 이런 관계나 형제 의식을 상실해 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도 “형제”로 부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3:15; 4:12, 28, 31; 5:11, 13; 6:1, 18).
이처럼 극진한 형제애로 이들에게 간청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절하)
“내가 전한 복음”은 보다 간단하게는 “나의 복음”이자(롬 2:16; 16:25), “그리스도의 복음” 또는 “하나님의 복음”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복음과 관련해서 사도가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말합니다(3:1). 그러나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나 생활 방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유대인들이 그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한 번에 이루어진, 이미 성취된, 그래서 되돌리거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더할 수 없는 사건을 말합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관련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사도 또한 그 점을 계속 강조한 바 있습니다(참고. 고전 15:1-11).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에게도 이 점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나의 복음” 또는 “내가 전한 복음”이라고 말할 때, 한 가지 분명하게 차별을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실 때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주장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 내용에 있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결 같다고 말입니다. 이 점은 11절의 헬라어 문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서 그 의미는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I want you to know, brothers, that the gospel I preached is not something that man made up”(v 11; NIV). 즉 밑줄 친 두 동사는 그 시제가 각각 과거 분사와 현재 형으로서, 복음의 일관성을 드러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처음 전한 복음은 지금도 사람으로부터 말미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서신의 인사말에서 강조했던(1절상) 바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두 번에 걸친 부정을 통해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11절에 이어 12절에서 재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도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12절상)
이 구절은 11절하에서 강조한 내용에 대한 일종의 부연 설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장은 원문에서 “왜냐하면(for)...”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그 기원에 있어서나 수단에 있어, 오직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서 얻어진 것임을, 두 번의 부정에 이은 긍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절하)
이렇게 해서 11-12절은 전체적으로 그 수사적 기법에 있어, 1절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객체 즉 계시의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16절상).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은 율법과는 무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계시는 하나의 수단이거나 또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후자(後者)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듯한데, ‘헬라’어 문장이 이를 지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안인사에서 밝히고 있는 자신의 선언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으신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1b). “계시로 말미암다”의 ‘헬라’어 표현은 “di jajpokaluvyew"”(through revelation)으로서(12절) 분명 수단의 의미가 드러나고 있으며, 1:1b에서도 동일한 헬라어 전치사 di 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가 ‘갈라디아’에서 직면하고 있는 근원적인 질문은 과연 그가 전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의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로 말미암아”(12절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는 주격 소유 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가 이 주제 선언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문안 인사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할 수 있는 자격과 권위는 계시를 통해서 얻은 것이며, 그 계시의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목에서 직접적으로 만난 ‘예수’라는 인물이며, 그가 접한 계시 속에는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갈라디아와 예루살렘. ‘갈라디아’와 ‘예루살렘’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두 지역이 갖는 기후나 사회∙문화적이거나 또는 인종적인 차이에 관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것으로서, ‘바울’이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다니던 그의 “계시”(apocalypse)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나 “선포” 즉 “케리그마”(kerygma)와는 어떤 상관이 있었는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인가 아니면 상호 포괄적인가? 그리고 두 교회는 각기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아니면 최소한의 공통점은 지니고 있었을까?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으로부터 배웠거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관심과 논란을 야기하는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두 교회가 상호간에 끼친 영향과 관련해서 혹자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혹자는 ‘바울’이 어떤 형태로든 당시 초대교회의 전승이나 신앙고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처럼 두 교회의 상호의존성과 관련해서 논란이 많은 것은, 사도 자신이 일견 상충되는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11-12절)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도,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도 아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받은”(παρέλαβον) 것임을 개인적인 간증을 통해서 강변하고 있습니다(1:13-2:14).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성찬식”이나 “부활” 등과 관련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과 ‘케리그마’를 그대로 “받아들이는”(παρέλαβον)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 11:23-26);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15:3-11).
그러나 이들 서로 다른 메시지는 그 상황과 배경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각 메시지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그가 받은 계시는 초대교회의 선포 내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과 관련해서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더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낫습니다. 그 새로운 것들이란 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관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유대 식 종교 의식과 상관없는 이방인 선교에 관 것이라든지, 둘째 유대 식 생활 방식을 뛰어넘는 진정한 기독교적 생활 방식이라든지, 셋째 교회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차별이나 등급 등을 말합니다. 이들 문제를 제외하고 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근본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방인 문제에 관한 한, 그는 궤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의 구원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은 ‘모세’의 율법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방인 선교의 당위성이 있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사도는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의 “신비”(μυστήριον; mystery)로 보았으며, <구약>에서 수수께끼 같은 예언으로 남아 있던 것이 때가 이르러 자기에게 계시를 통해서 알려진 것이라고 말합니다(참고, 롬 16:25-26; 엡 3:2-10; 골 1:26-27). 바로 이점에서 그의 복음이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 주의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아닙니다.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바울의 복음” 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믿기로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는 이방인에 관한 계획은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있다고 하드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유대’적 관습과 전통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과 “할례”가 그 속에 포함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바울’은 열두 사도의 자격 요건은 갖추지 못했습니다(요 15:27; 행 1:21-22). 따라서 그 자신도 솔직히 인정하고 있듯이, 그의 복음은 전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과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 이후 그의 복음은 단순히 교회의 전승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고, 그분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교회의 전승과 가르침을 완성시켜주는 기능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결국 “전승(교회의 케리그마)과 계시의 통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가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이방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가 찰 때까지 숨겨놓은 신비였습니다. 이제 핵심 정리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봅시다. “케리그마와 계시는 동일합니까?” 그렇습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도 ‘바울’도 “케리그마와 계시는 동일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복음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드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반면, ‘바울’은 그 복음은 이방인을 새로운 족속, 즉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현대판 할례. 오늘날에도 교회 안팎으로 현대판 유대주의자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인이 되기 위해서나 또는 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일련의 조건이나 행동 지침 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술이나 담배를 우선 끊어야 한다든지,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든지, 십일조를 해야 한다든지, 기도나 금식을 해야 한다든지, 심지어 방언을 해야 하다든지, <구약>의 절기 헌금을 해야 한다든지, 교회 예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든지, 모든 교회는 교단에 가입해야 한다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제 조건이나 행동 수칙이 있습니다. 일종의 현대판 “할례”인 셈이지요. 이들이 과연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복음이란 것이 이처럼 많은 사선(射線)을 넘고 또 넘어 마침내 승리의 제물로 쟁취하는 그 무엇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은 과연 무엇이며, 왜 복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자유에 공짜란 없다”고 말입니다(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도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노년에 경제적 자유를 위해서 젊었을 때 힘들게 일하고 저축합니다. 신체적 자유를 위해서 매일처럼 열심히 운동하고 체력을 단련합니다. 정치적 자유를 위해서 독재와 맞서 싸웁니다. 왜 이처럼 자유의 대가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아무도 자신이 가진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희생시켜서라도 더 행복하고 더 많이 가질 자유를 원합니다. 절대 권력을 지닌 독재자 역시 자유를 원한다는 역설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도 이런 것입니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힘들게 싸워야 합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그 대가로 쟁취하는 그 무엇입니까? 사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유”란 실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은 무가치 한 것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The gospel is priceless). 가치를 매길 수 없으니까 그것을 살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 외에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 즉 “하나님의 자유”의 역설이지요. 그러니까 자유는 그저 주든지 아니면 누군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누가 그 대가를 치렀습니까?
하나님 자신 즉 ‘그리스도’입니다.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ey)는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묻는 것이다.” ‘피터슨’(E. Peterson) 목사도 “자유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 생각하는 곳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우리가 돈을 주고 사는 것도,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나, 설교나, 기도나, 금식이나, 선교나, 교육이나, 훈련이나, 자선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부흥회 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는 이 모든 종교적 행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는 구속이며 거짓이며 위선일 뿐입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그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일 뿐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누구든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나는 진정 자유롭습니까? 어떠한 인습이나, 제도나, 조직이나, 이념이나, 가치관으로부터 말입니다.
세상과 그리스도인. 이 마지막 질문은 자유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수없이 많은 책에서 단골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저서로 ‘쟈크 엘룰’의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쟈크 엘룰.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이문장 역. 서울: 대장간, 1992.
자유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날 수는 없습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해방에 이어 독립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자유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로 지칭하고 있습니다(고후 5:17). “새로운 창조”는 돌이킬 수 없는 혁명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완성을 향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궁극적 완성을 향한 새로운 구속” 하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쟈크 엘룰’은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과 천국 사이에 윤리, 혹은 문화라는 다리를 놓고 그 한 가운데 안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윤리나 문화와 같은 인위적인 노력으로써 신앙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이 노력은 선택 가능한 여러 방법 중 가장 반 기독교적인 태도다. ‘쟈크 엘룰’, ibid.
무슨 말입니까? “새로운 피조물”은 그의 삶의 방식을 위해서 단순히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제반 사상이나 이념, 인습이나 전통, 윤리나 문화 중에서 택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 가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일은 상당히 고통스럽고 힘들며 현대판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배척과 경멸을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나라 즉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끼어 살아가야만 하는 이중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진정 자유인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토의 문제
1. 1:11-12의 두 절은 책이나 논문으로 치면 제목과도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갈라디아서> 전체의 형식과 구조를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2. “바울의 복음”과 “초대 교회의 복음”(흔히 케리그마로 불림)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바울’이 말하는 “신비”(또는 비밀)란 무엇입니까?
4. 현대판 ‘할례’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서도 나누어 봅시다. 그 근거는 무엇이며, 없다면 왜 그러한지...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