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1과
율법주의 반박(3)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3:15-18약 20분 분량
신학을 통한 검증
(3:15-18)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제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15절)
“율법주의”에 대한 반박과 이에 대한 검증 작업은(3:1-18) 이 본문에서 세 번째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신자들의 경험을 통한 검증, 두 번째가 성경을 통한 검증, 그리고 세 번째는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변론을 통한 검증이 될 것입니다:
(1) 경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을 통한 검증(3:15-18)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가 자신의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은 다분히 일방적이고 독단적입니다. 이는 그가 두 번째 단락의 성경해석에서 보였던 무리한 본문 인용과 유사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곳에서 전개하는 논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독서의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사도가 이곳에서 전개하고 있는 논리의 근저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되돌릴 수 없는, 가장 으뜸 되는 약속이며, (2) 그 약속의 수혜자는 여러 사람이 아니라 단 한 사람, 즉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지인 즉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분의 약속은 다수(多數)의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국한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바울’이 율법을 모독한다고 비난받아야 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유업 즉 그리스도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성령이야말로 율법보다 훨씬 이전에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주어진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잇는 일에 있어서는 아무 상관도 역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새로운 차원의 논지를 전개함에 있어, 사도는 서신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관행적인 표현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표현은, “형제들아, 내가 말하노니”입니다(15절상). 이런 표현이 기능하는 바는, 새로운 논리의 전개가 있을 것임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이어 15하-16절에서 그 논점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련한 두 가지 논점으로서, 결코 폐할 수 없는 약속의 본질과 그 약속의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표현 역시, 17절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그러나)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입니다. 이와 함께 17-18절에서 이끌어 내고 있는 결론은 15-16절에서 다룬 내용에 대한 결론입니다.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처럼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신학적 논지는 이전에 성경 해석에 보여주었던 방식과 아주 흡사합니다. 즉 상대나 상대의 논점들을 직접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전제를 바탕으로 해서 그로부터 역공을 펼치는 방식입니다. 예컨대, “유대주의”의 가르침은 (1)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보충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2) 그 언약의 수혜자는 ‘아브라함’의 생물학적인 후손들인 유대 민족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도가 전개하고 있는 논리는 앞선 두 번의 검증에서 보여주었던 논지들에 반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이 갖는 의미를 자신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태도로 재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앞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서(14절하)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약속”을 언급하면서 이전의 모든 검증의 결론으로 삼았던 것처럼, 이 세 번째 검증에서 바로 그 “약속”이라는 단어를 다시 선택하여 그것이 “율법”과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풀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의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상세하게 밝히게 될 것이지만(3:19-4:7), 이곳에서는 단지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해서만 간략하게 요점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도, “아브라함 언약”에 포함된 약속을 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유언과 언약(15-16절)
사도는 새로운 검증을 시작하면서, “아브라함 언약”이 함의하고 있는바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기 위해서, 일상적인 실례를 들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15절상)
이런 식의 호칭은 <갈라디아서>에서는 늘 중요한 단락이 새롭게 시작되거나(1:11; 4:12; 5:13), 그 단락 안에서 다시 작은 단위가 새롭게 시작되거나(3:15; 6:1), 한 단락의 마무리를 지을 때나(4:31; 5:11), 또는 서신의 마지막 인사말을 전할 때(6:18)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기능적인 측면 외에도, 수신자들에 대한 사도 자신의 애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한편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이곳을 포함하여 ‘바울’의 서신에만 네 번 등장하고 있을 뿐(롬 3:5; 6:9; 고전 9:8), 신약이나, <칠십인 역>이나 기타 ‘헬라’ 문헌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히브리어’나 ‘아람어’에 이에 병행하는 어떤 표현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자면, “내가 한 인간으로서 이야기 하겠다”는 것인데, 문맥상으로는 “일상생활에서 한 예를 들어 말해 보겠다”가 될 것입니다. 그 예가 무엇이든 사도 자신의 일방적인 이해와 신학적 입장을 담은 것이 될 것임을 예고해 줍니다. 사도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유언(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15절하)
여기서 “언약”(διαθήκην, 디아테켄)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단어는 실은 “유언”으로 번역함이 더 마땅할 것입니다. Longenecker는 이 단어와 관련하여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28-130쪽.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유언을 통해서 한 번 토로된 소원이나 약속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로마법에서나 오늘날 영국 법에서도 그러한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유언을 바꾸려면 새로 유언을 하거나 유언 보족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로 미루어 아마 사도는 고대 ‘그리스’의 법을 예로 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법에 따르면 한 번 작성하여 확정한 유서는 다시 무효화 하거나 변개할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유언도 덜하거나 더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약속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입니다. 수사학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아 포르티오리(a fortiori)에 해당합니다. 즉 하위 개념을 가지고 상위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예컨대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것이라면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 논리에 따르면 지금 사도가 예로 들고 있는 15절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어지는 16절의 내용 또한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16절)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성경>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으며, 따라서 15-16절은 하나의 논지로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7-18절은 이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두 핵심어는 “약속들”과 “자손”(씨)입니다. 우선 “약속”과 관련해서 두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앞선 두 번의 검증이(3:1-5; 3:6-14) 그 마지막을 “성령의 약속”으로 마무리함으로써 논지의 절정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단어가 이후 상당 부분에 걸쳐(3:15-4:31) 핵심 단어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3:17, 18, 21, 22, 29; 4:28). 빈도수로 보자면 이후부터 이 단어는 그동안의 핵심 단어였던 “복음”이나(1:7-9, 11; 2:2, 5, 7, 14; 3:8) 또는 “축복”(3:8, 9, 14) 등을 대체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업”(유업)과 연관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3:18; 4:1-7, 21-31).
사도가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해서 “약속”을 언급할 때, 주로 단수형을 사용하고 있지만(갈 3:17, 18, 22, 29; 롬 4:13, 14, 16, 20), 간혹 복수형으로도 사용하고 있어(갈 3:16, 21; 롬 9:4)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 대한 “약속들”이나 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언급할 때 종종 복수형으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일반 ‘유대’ 문헌에서는 단수형과 복수형 사이에 특별한 구별을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약속”의 수혜자에 관한 언급으로서, 당연히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씨)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의 모든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이점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12:2-3, 7; 13:15-16; 15:4-6, 18; 17:4, 7-8; 22:17-19; 24:7).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핵심단어로 등장하고 있는 그 “자손”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입니다.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자손”은 단수형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민족도 이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의 후손도 여기에 포함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직 ‘이삭’을 통해서 태어난 자라야만 진정한 후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을 놓고 전통 ‘유대’인들과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시 이 단어가 단수형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손”을 인종적인 차원에서의 단수, 즉 한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반면, 사도는 이 단어가 한 특정 개인, 즉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주 기발한 해석이자 신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해석학적 입장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우화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한 부류인 “그리스도론적 해석”입니다. 이 해석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유대’민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2. 언약과 율법(17-18절)
이어지는 두 절(17-18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이 단락에 대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7절)
이 절이 <헬라어 성경>에서 “그러므로”(δέ, 데)로 시작하고 있으며, 15절에서처럼 “내가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 15-16절에서 사용한 것과 같거나 유사한 일단의 용어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언약”(15, 17절)과 “약속”(16, 17절)이 두드러집니다.
“언약”은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와 적용 범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넓게는 하나님과의 “언약”에서부터 좁게는 인간들 사이의 “유언”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15절에서는 “유언”의 의미로 사용된 바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약속”과 관련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그것이 단수형이든 복수형이든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을 가집니다. 이 외에도 두 단락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동사 “정하다”(προκυρόω, 푸로퀴로오)의 태와 시제가 수동태 완료형으로서,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언약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언약의 제정자(制定者)이자 동시에 수여자(授與者)임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17절과 관련해서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은 율법이 “아브라함 언약”이 있기 430년 전에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의 논의에 있어 이 기간이 400년이든 430년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만,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후 ‘모세’까지 이르는 기간을 430년으로 계산하고 있는가 하면(출 12:40), <창세기>는 동일한 기간을 400년으로 잡고 있습니다(창 15:13).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랍비’들도 당혹스러워 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대개 이러한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430년은 “아브라함 언약”의 수립에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기까지의 기간으로 보며, 400년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의 기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튼 ‘유대’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부터 이미 이를 지키고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가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창 17:10-14) 전체 ‘모세’ 율법을 받아들이고 준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진리는 점진적으로 발전되고 확장된다는 “유대주의”의 사고 체계는 ‘모세’의 율법을 “아브라함 언약”이 단순히 발전된 형태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5절에서 보여주었던 아 포르티오리(a fortiori)의 원리에 따라, “아브라함 언약”이 ‘모세’의 율법을 선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후자가 전자를 폐기하거나 첨가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에 대해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는 왜 율법이 약속을 폐기할 수 없는지 밝힘으로써, 17절에 대한 진짜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 주신 것이라(18절)
18절에 대한 <헬라어 성경>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어, 17절에 대한 이유 내지는 보충 설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과 약속”에 관한 이 결론 역시 그동안 사도가 전개해 왔던 “이분법적 논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2:15-16). 사도가 그동안 해왔던 논리 전개 방식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그는 우선 “명제 선언”에서(2:15-16)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를 대비시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첫 번째 “검증”에서 “율법의 행위”와 “듣고 믿음의 행위”를 신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제시한 바 있으며, 이어지는 두 번째 “검증”에서도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자”와 “믿음에 의존하는 자”를 구분하면서, 전자를 “율법과 저주”의 대상으로, 그리고 후자를 “의와 축복의 대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3:6-14). 그리고 <성경> 특히 <창세기>로부터 새로운 주제들을 이끌어 내면서 두 번째 “검증”의 결론이자 세 번째 “검증”을 위한 연결 고리로 삼고 있는데, 그 주제들이란 “성령의 약속”, “아브라함 언약”, “언약의 약속과 축복”, “그리스도와 모세의 율법” 등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단락에서(3:19-4:7)에서도 보게 되겠지만, 율법에 관한 주제는 “율법의 목적과 기능”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우선 “율법과 약속”의 문제에 대해서 쐐기를 박아두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사도에게 있어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은 결코 뒤섞일 수 없으며, 나란히 갈 수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18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유업”(κληρονόμος, 클레로노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이후 이어지는 논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 3:29; 4:1, 7, 30; 5:21.
사실 이전에도(16-17절) 언약이나 약속과 관련해서 비록 명시적은 아니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유업과 관련해서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땅”과 “후손”과 그리고 “(물질적인) 축복”일 것입니다(창 12:2-3; 13:14-17; 15:7, 18-21; 17:3-8). 그러나 이들 항목들은 <신약>의 여러 책들에서 볼 수 있듯이 영적인 의미로 쉽게 확장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5:21; 행 2:32; 고전 6:9-10; 엡 5:5; 골 3:24).
“유업”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주다”(χαρίζομαι, 카리조마이)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값없이 주다” 또는 “은혜를 베풀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유업”은 무슨 상거래의 결과나 또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점이 강하게 베여있습니다. 특히 18절에서 이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으로, 그 결과가 지금도 미치고 있는 것으로서 사도가 이 단락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원칙에 입각해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다루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을, ‘모세’에게는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와 <출애굽>에서 약속과 율법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루터’의 표현에 따르면, 이 둘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또 인격적으로나 구별되며,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만큼 떨어져 있습니다. 약속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하리니, 내가... 하리니, ...내가 하리니.” 그러나 율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 할지니, 너는 ...하지 말지니.” 약속은 하나님의 종교이며,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주도권을 말합니다. 한편 율법은 인간의 종교, 인간의 책임, 인간의 행위를 말합니다. 약속은 오직 믿어주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율법은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 “은혜”, 그리고 “믿음”의 범주 안에서 관계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와는 “율법”, “계명”, 그리고 “행위”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 둘 중 어느 쪽이 우선이며 먼저입니까? 이 둘은 모두 궁극적으로 “칭의”(justification) 즉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적어도 “칭의”와 관련해서 볼 때, 하나님과 우리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분은 법정에서 심판관의 자리에, 그리고 우리는 피고인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책에서 역사상 인류의 어떠한 문제도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문제의 원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의롭다 함” 즉 “무죄 방면”을 선고 받기 전에 선결 과제가 하나 있는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해소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그것을 “화목”(propitiatio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화목”이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에 대해서 진노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죄”에 대해서입니다. 어떻게 그분의 진노를 달랠 수 있을까? 이것은 “화목”의 주체, 즉 “누가 화목을 이루는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론상 두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그분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께서 스스로 진노를 거두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고, 실은 한 가지 길 즉 하나님 스스로 진노를 푸는 길 밖에 없습니다. 즉 그분께서 먼저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사는 범죄 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에 관한 지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들이 그렇게 했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족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나 문화에서 제사가 의미하는 바가 “진혼”(鎭魂) 즉 “달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그 기원이나 절차나 의미에 있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셨고, 그 시기와 방법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일례로, 그것이 감사의 제사이든, 헌신의 제사이든, 먼저 “화목의 번제”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화목에는 반드시 희생 제물이 필요한데, 이 역시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그 대상을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이처럼 희생 제사가 철저하고도 엄격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 완벽하시므로 그분 스스로 제정한 것이 아니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시사입니다. 우리는 <레위기>에서 대 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 멋대로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 일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아무도 달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그분의 진노를 풀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엄격하고도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화목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전제가 그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불완전함은 노력을 통해서 혹시 다소간 개선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완벽에 이르기는 불가능합니다. 흙이 물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율법주의”는 인간을 교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종교적 엘리트를 양산해 내며, 소위 거룩한 무리와 세속적인 무리,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 물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과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 미지근한 신자와 뜨거운 신자 등으로 사람을 가르고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는 질문에 대해 “두려움과 이익 추구와 명예 추구”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동기야말로 바로 이 세 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은 물론 인간들과도 적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완벽주의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정신 장애 현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이 전해주는 역설은 어느 누구도, 그 어떠한 노력도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진노를 스스로 누그러뜨리셨으며, 우리와 “화평” 즉 “화목”을 이루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노를 푸는 희생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죄를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훈련을 오래 받거나,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처럼 죄만 만나면 극렬한 반동을 보이도록 엄격한 훈련을 받는 것은 죄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를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거부한다면, 처벌하거나, 윤리 교육을 하거나, 죄를 부인하는 전략을 만들어 냄으로써 죄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중 어떤 것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죄의 유일한 구제책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받으려면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아무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부인도, 새해 결심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내가 고백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요한 사도도 다윗의 기도도 모두 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하다가 들키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거나 약속합니다. 그러나 결심이나 약속은 처음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습니다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는 실없는 사람, 의지가 없는 사람, 빈말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죄를 관리해 보겠다고 고집부리거나, 무슨 장치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은 그냥 하나님의 용서의 넓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신실함으로 둘러싸인 세상으로 말입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가 열어놓은 세상이며, 오래 전부터 “아브라함 언약” 속에 이미 약속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두 가지 사실, 즉 율법보다 더 오래 되었고, 또 나중에 변조시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율법보다 앞서며 율법이 약속을 폐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검증”의 세 번째 논지에 해당합니다. 본문의 기능과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은 어떤 것입니까?
2. 언약과 율법은 상호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율법이 언약을 무효화 하거나 폐기할 수 없는 이유를 사도의 논리를 따라 전개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