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과
아담의 계보
김태정 목사창세기 5:1-6:8약 37분 분량
4
아담의 계보

(5:1-32)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5:1)
원래 한 집안의 족보(族譜)는 그 집안에 속한 사람조차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크게 관심도 없습니다. 읽는 사람의 관심을 유발시킬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라고는 하나 없고, 그저 사람 이름만 잔뜩 나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문(家門)에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이 있어 자랑하고 다니는 후손들을 보기는 합니다만, 어쩐지 그런 사람들은 대개 못난 사람 정도로 취급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옛 부터 못난 사람이 족보 자랑하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도 ‘디모데’나 ‘디도’를 향해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지 말라”고 충고까지 했겠습니까(딤전 1:4). 물론 여기서 말하는 족보는 그 사람의 집안 내력에 관한 족보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 신화 등에서 보는 소위 신들의 족보, 즉 신통기(神統記)를 말하는 것입니다만. 사실 그리스신화만 하드라도 이러한 신들의 족보가 난마(亂麻)처럼 얽혀있습니다. 이 같은 족보는 당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논쟁과 변론만 야기했을 것이 뻔합니다(참고. 딛 3:9). 예수가 누구의 아들인가를 놓고 많은 시비가 벌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족보도 재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큰마음 먹고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가도 이 족보에 이르면 흐지부지 중단하고 맙니다. 혹시 인내심을 가지고 읽는 경우에도 그저 이 부분에 이르면 대충대충 훑고 넘어갑니다. <창세기>만 하드라도 첫 열한 장을 읽는 동안 길고도 지루한 족보를 세 번이나 만나게 됩니다. <신약>에서도 가장 처음 만나는 것이 바로 이 족보입니다. 이래저래 <성경>은 재미도 없고, 많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이들 족보들은 마치 우리들의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기 위해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따분하고 재미없는 족보가 왜 필요합니까? 단순히 ‘이스라엘’이나 인류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함일까요? 대개 보수 진영의 신학자들은 <신구약>에 나타나는 이들 족보들을 인류나 지구의 역사를 계산하는데 이용하기도 합니다. ‘모리스’(H. Morris)나 ‘윗트콤’(J. Whitecomb)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입니다(참고 도서: 14). 물론 이들 학자들도 이들 족보가 인류의 계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바, 수십 내지는 수백만 년의 공백이 족보 사이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기에는 이들 족보들의 구성이나 짜임새가 너무나 인위적이고,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다음 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아담’에서 ‘가인’까지 7대; (2)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 (3) ‘아담’에서 ‘예수’까지 77대(눅 3:23-38); (4)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42대 (3x14 세대)(마 1:1-17)가 이를 증거합니다.
이들 숫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의미가 큰 숫자들, 즉 완전수입니다. 이들 숫자는 단순히 어떤 역사적이거나 사실적인 숫자의 의미를 넘어서, ‘유대’인들의 신학과 신앙을 반영하는 신학적인 숫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족보에도 신학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작업은 바로 이 점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족보는 “뱀의 계보”가 아닌 “여인의 계보”로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족보를 통해서 화자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문학과 역사
본문은 <창세기>에서 두 번째 ‘톨레돗’에 해당하는 곳입니다만, 실은 전체 범위는 5:1-6:8의 내용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6:9에서 세 번째 ‘톨레돗’이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창세기>의 두 번째 ‘톨레돗’을 5:1-6:8까지로 보아야 하는 다른 이유들도 있습니다. 첫째, 5장의 마지막 구절-“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햄과 야벳을 낳았더라”(5:32)-은 앞에서 계속 반복해 오던 표현-“그가 00세를 향유하고 죽었더라”-에 비해서 어딘지 마무리가 어색하며, 오히려 6:8의 표현-“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이 더 적절한 마무리에 해당됩니다. 둘째, 본문을 5:1-6:8까지 정했을 때만이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핵심 단어의 사용 빈도가 숫자 7이나 6의 배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1) ‘아담’과 사람(각 7회); 하나님 (30 회); (3) 창조하다와 짓다(도합 7회); (4) ‘야훼’(6회); (5) 아들과 딸(각 12회); (6) 낳다(30 회). 셋째, 이러한 범위는 <창세기>의 전형적인 이야기 진행 공식과도 잘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야기의 처음(5:1-3)과 끝(6:5-8)은 각각 앞선 단락과 다음 단락의 이야기 내용에 대한 간단한 요약, 즉 회고와 전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참고도서 1, 121쪽). 본문은 그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아담의 계보(5:1-32)
2)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6:1-4)
3) 멸망의 예고(6:5-8)
첫 번째 단락은 나머지 두 단락과는 그 내용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편의상 따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도 첫 번째 단락의 형식이 계보라고 한다면, 나머지 두 단락의 형식은 이야기입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처음 열한 장은 이 두 형식, 즉 이야기와 족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태초의 이야기(1:1-4:16)
2) 인류의 첫 계보(4:17-5:32)
3) 노아 이야기(6:1-9:28)
4) 민족들의 계보(10:1-32)
5) 바벨탑 이야기(11:1-9)
6) 노아의 세 아들들의 계보(11:10-32)
화자의 과학적이고도 예술적인 편집솜씨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러한 패턴은 ‘히브리’ 문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호머’의 서사시에서도 이야기와 족보를 예술적으로 잘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양식이 각기 다른 전승에서 취한 것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더 나아가서 족보를 기술하는 방식도 무미건조하지도 않습니다. 화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가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상에서부터 후손까지 이어 내려가면서 수직적으로 그리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이 계열 가운데 어느 한 특정인의 가계를 수평적으로 그리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인류의 첫 족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계보나(5:1-32), ‘셈’에서 ‘데라’까지의 계보(11:10-32)가 前者의 예가 될 것이고, 후자의 예로서는 ‘노아’의 세 아들의 계보(10:1), ‘이스마엘’의 계보(25:12), ‘에서’의 계보(36:1)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중에서 수직적인 계보가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계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아담’의 계보는 처음부터 ‘가인’의 계열과(4:17-22), ‘셋’의 계열로(5:1-32) 분리되어 ‘노아’까지 이르고 있습니다(우리는 이미 타락의 결과가 분리와 분열이라는 점을 배운 바 있습니다). 그리고 ‘가인’의 계열은 7대까지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셋’의 계열은 ‘노아’까지 10대에 걸쳐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들이 수직적인 가계입니다. 그리고 수평적인 가계는 각 족보의 끝에 가서 만나게 되는데, 흥미롭게도 각 족보의 마지막 인물은 각기 세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라멕’의 세 아들 ‘야발’과/‘유발’/‘두발 가인’(4:20-22); (2) ‘노아’의 세 아들 ‘셈’과/‘햄’/‘야벳’(5:32).
이 외에도 두 계보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아주 많습니다. 두 족보에서 같은 이름이 등장하고 있으며(‘에녹’과 ‘라멕’), 발음이 비슷한 사람도 여럿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이랏’/‘야렛’; (2) ‘므후야엘’/‘마할랄렐’; (3) ‘에녹’/‘에노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두 족보를 기록하는 순서입니다. <구약에>서 두 계열을 소개할 때, 항상 ‘가인’의 계열을 먼저 언급하고, 이어서 경건한 ‘셋’의 계열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두 가계를 다음과 같이 도표로 만들어보면 그 공통점들이 보다 확실하게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두 계보가 닮은 점이 많아서,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놓고 비평학자들은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견해는 ‘셋’의 족보(5장)는 소위 <사제문서>로서, 포로기 이후에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후대 편집설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후대의 편집 작업을 통해서 보다 오래된 <야훼 문서>에 속하는 ‘가인’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름이나 순서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가인’의 족보가 원전(原典)인 셈입니다. 이 주장에 반해, 두 족보 모두 편집적인 사본으로서 모두 동일한 원전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들 두 견해가 공통적으로 전제를 삼고 있는 가설은 4장의 기록과 5장의 편집자가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대안은 이 전제를 바탕으로 다른 견해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즉 두 족보는 원래 하나의 문서로서, 다만 다른 편집자가 서로 다른 신학적 강조점을 가지고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즉 ‘야훼’ 기자는 ‘가인’의 계보를 통해서 죄악이 발전하고 번성해 가는 것을 그리려 했는가 하면, 사제 기자는 ‘셋’ 계보를 통해서 그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전수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려 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라멕’이 한쪽에서는 일곱 번째에,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아홉 번째에 등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불가능 한 것도 사실입니다. 각 족보에서 ‘라멕’이 기능하는 바가 달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편집자의 기질 때문이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본문의 역사와 관련해서 한 가지 남은 질문이 있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과연 이 족보를 통해서 인류의 연대를 계산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는 배경에는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의 인류가 살았다는 전체적인 기간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족보를 그리면서 사용하고 있는 공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무개가 x세에 아무개를 낳고;
(2) 그를 낳은 후 y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3) 도합 (x+y)세를 살다가 죽었더라.
따라서 적어도 이 표현이 정확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인류의 연대를 아래 도표와 같이 산출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표에 기록된 숫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56세가 되는 해까지 살았으며, ‘므두셀라’는 홍수가 오는 그 해까지 살고 있었고, ‘아담’의 아들 ‘셋’은 ‘노아’가 탄생하기 불과 14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으니, 창조로부터 홍수까지 1656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도표를 이용해서 인류의 연대를 계산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것이 화자의 의도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무리가 많고 미심쩍은 부분도 많습니다. 몇 가지만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전체 족보의 구성이 너무나 도식적이며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과연 ‘아담’에서 ‘노아’까지 정확하게 10대 뿐이었을까? 혹시 중간에 빠진 세대들을 없을까? <신약>의 경우에도 예수님의 족보를 다룰 때 몇 세대가 빠진 것을 보면 이런 질문들은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은 과연 첫 번째 아들이었을까? ‘셋’의 경우만 하더라도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이 아닙니까?
셋째, 이 족보에 나타나는 숫자들이 왜 사본마다 차이가 나는가? 아래 도표에서 보듯이, <마소라>(MT), <칠십인역>(LXX), 및 <사마리아 오경>(SP) 등은 <구약>의 대표적인 사본들로서, 족장의 출생 시기나 수명, 홍수의 시기 등에 대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Wenham, 131쪽). 이중에서 과연 어떤 사본이 가장 원본에 가까울까?
넷째, 족장들의 긴 수명과 왕성한 생식능력이 현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을 빼고는 대부분 구백 살이 넘도록 장수했으며, 나이가 백 살이 넘도록 자식을 낳기도 합니다(예: 노아는 나이 500살이 넘도록 계속 자식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숫자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설명을 필요로 하는 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과연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에 관한 질문입니다. 물론 이 같은 질문에 대해서 합리적인 설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홍수 이전의 지구의 환경이 온난 다습한 소위 아열대성 기후로서 모든 생명체들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가설입니다. 이러한 가정은 비단 전통적인 창조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진화론자들조차도 받아들이고 있는 가설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가인’의 계보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아담’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온 범죄가 ‘가인’을 거쳐 점점 발전해 가다가 ‘라멕’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계보는 나름대로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달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인류의 죄악으로 오염되었을 뿐이라는 점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셋’ 계열의 족보, 즉 하나님의 축복받은 백성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계보를 통해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창조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은 이들 인간의 생식을 통해서 자손 대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야훼의 이름을 불렀더라”(4:26)는 선언은 ‘셋’ 계열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도 이런 희망을 피력하면서 아들 ‘노아’를 통해서 이런 축복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29).
아무 탈 없이 평화스럽게만 보이던 그 때에 ‘라멕’이 왜 이런 한숨 섞인 소망을 실토해 내고 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아버지의 이런 낙관론은 여지없이 깨어져 버리고 만다는 사실이 곧바로 이어지는 6장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6:1-8 사이의 본문에 잘 소개되어 있는데, 성(性)의 남용 때문입니다.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어야 할 존재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인 그 성을 혼합시키고 섞어버리는 일에 썼기 때문에 급기야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노아’를 통해서 인류가 구원을 얻기보다는, ‘노아’는 대 파멸 이후 인류를 이어갈 유일한 생존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5장의 족보가 기능하는 바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두 번째 ‘아담’ ‘노아’를 연결시켜주는 데 있습니다. 십대에 걸쳐 지속되던 인류의 오랜 평화와 번영도 마지막 단락에서 그리고 있는 반 창조의 행위로 말미암아 갑작스러운 저주와 파멸을 맞이하게 될 참이었습니다(6:1-8). 마치 아름답고 선한 창조가(1-2장) 갑자기 타락으로(3장) 얼룩지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요약(1-2절)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1-2절)
본문이 <창세기>에서 두 번째 ‘톨레돗’에 해당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다른 ‘톨레돗’에 비해 이곳에서만 표현 방식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5:1상). 즉 그냥 계보라고 하지 않고 계보를 적은 “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책이라 함은 일종의 법적 문서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 길이는 짧은 것에서부터(신 24:1) 비교적 긴 것에 이르기까지(신 31:24, 26) 다양한 종류들이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여호와의 전쟁기>(민 21:14)나 <야살의 책>(수 10:13; 삼하 1:18) 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담’의 계보 역시 어떤 기록된 형태의 책일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합니다. 물론 정확하게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만. 혹자는 이 책이 <사제 자료>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5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족보와 11:10-26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류의 족보 정도는 담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화자는 이어서 ‘아담’의 계보를 요약하면서 우리에게는 친숙한 내용과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1절하-2절). ‘아담’(םךא)은 일반적으로 ‘사람’(또는 인류) 전체를 통칭하는 단어로 쓰입니다만, 고유명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정관사(영어의 the에 해당함)를 붙여 “그 사람”이라는 의미의 םךאה(하 아담)을 사용합니다. 영어에서 ‘man’과 ‘the man’ 정도의 차이로 보면 될 것입니다.
화자는 여기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언약(또는 창조명령)(창 1:27-28)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언급 또한 이 창조 명령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본문은 그 구조나 형식 및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선택에서 볼 때 <창세기>의 두 번째 계보와 닮은 점이 많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참고 2:4). 형식 상 두 계보는 모두 교차대구(ABCCBA)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계보 공히 교차대구의 중심에 동일한 단어 “창조”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화자가 두 계보를 토대로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일지 추측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세 본문(1:27-28; 2:4; 5:1-2) 모두에 등장하는 핵심어들을 묶어 나름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내지는 “언약의 성취” 등을 연상해 낼 수 있다면 화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했다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형상인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을 주셨으며, ‘아담’의 창조적 행위 즉 “생식”(procreation)을 통해서 이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 셋(3-5절)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을 거쳐 그 아들 ‘셋’에게 전수되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비추어 볼 때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3-5절)
세 절로 이루어진 ‘셋’의 탄생에 관한 이 표현은, 한두 가지 정도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전형(典型)으로서 본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첫 아들이 태어날 때 그 아버지의 나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130세).
둘째 첫 아들과 이후 탄생하는 나머지 아이들의 탄생에 관해서 반복해서 동일한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셋째, 첫 아들을 낳은 후 몇 년을 더 살았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800세).
넷째, 나머지 자녀들의 탄생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이후 아버지가 몇 살에 죽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930세).
비록 “타락”이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는 없었다는 강조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모양’(tWmD, 데무트)과 ‘형상’(!l,x, 첼렘)은 서로 교환해서 사용될 수 있는 동일한 단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창세기> 1:26과는 달리 두 단어가 그 순서를 달리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화자가 타락을 모를 리가 없었겠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비한다면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은혜를 더욱 드러내게 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장치는 또 있습니다. ‘아담’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의 긴 수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담’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후손 특히 ‘셋’ 계열의 후손들의 수명이 대부분 무려 천여 년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긴 수명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는 사상은 전형적인 <신명기>적 세계관의 발로입니다(참고. 신 4:25; 5:16, 33; 11:9; 22:7; 30:20; 6:2). 홍수 이후 인간들의 수명이 급격하게 짧아졌다는 사실은 인류의 역사가 발전이 아니라 퇴보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3. 셋에서 야렛까지(6-20절)
‘셋’에서 ‘야렛’까지의 계보에는 모두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고, 이중 ‘게난’과 ‘마할랄렐’과 ‘야렛’ 세 사람은 구약 전체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에서 이들 이름이 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6-20절)
따라서 상대적으로 이들로부터 족보를 이어가는 연결 고리 역할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만, <성경>에 이름이 있는 이상 그 역할을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이들을 통해서 두 번째 ‘아담’인 ‘노아’가 태어났고, 다시 먼 훗날 모든 나라와 민족의 아버지가 될 ‘아브라함’이 태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축복을 내리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앞에서 미미한 존재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4. 에녹(21-24절)
족보에서 일곱 번째 등장하는 인물은 종종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에녹’이 그렇습니다. 그는 ‘아담’에서 시작하여 일곱 번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21-24절)
이 부분에서 ‘에녹’과 관련하여 아주 특기할 만 한 사실은 그가 족보 내의 다른 인물처럼 태어나서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하나님께로 갔다는 점입니다(24절). 여기서 궁금한 점은 왜 ‘에녹’일까하는 점입니다. 그의 생애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화자가 두 번에 걸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5:22, 24). 이와 같은 표현 역시 <성경>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컨대,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훗날 족장들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쓰고 있으며(17:1; 24:40; 48:15),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함께 걷기도 했습니다(3:8). 제사장들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요청받고 있으며(말 2:6), 선지자 ‘미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믹 6:8).
이와 같은 표현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에녹’과 관련하여 두 번씩이나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당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갈 때 그의 나이가 불과 365 살이었으니,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에 비하면 요절(夭折)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 바로 나아갔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에녹’과 같은 축복을 누린 사람은 ‘엘리야’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왕하 2:11). 예수님도 그 같은 축복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5. 메두셀라(25-27절)
이어지는 계보의 주인공은 ‘에녹’의 아들 ‘메두셀라’와 그의 아들 ‘라멕’입니다.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25-27절)
여기서 ‘메두셀라’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이라는 점입니다(969세). 그의 아버지가 가장 이른 나이에 죽은 것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흥미로운 대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의 생애가 천 년은 넘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 천년마저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단 하루에 불과하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시 90:4). 세상을 뒤흔드는 영웅호걸도 한낱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6. 라멕과 노아(28-32절)
‘셋’의 계보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두 인물은 ‘라멕’과 ‘노아’와 그리고 ‘노아’의 세 아들들입니다.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28-32절)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라멕’과는(4:28) 동명이인(同名異人)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등장하는 ‘라멕’은 그 아들에 관하여 화자가 설명을 덧붙여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하면서 덧붙이고 있는 설명은,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노아’라는 이름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지명이나 인명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음성학적 유사성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노아’(חנ)와 “안식”(םחנ) 역시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쉼” 또는 “안식”을 뜻하는 ‘노아’는 <대홍수 이야기>에서는 물론 <창세기> 전체에서 중심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지금 ‘라멕’의 독백 속에 등장하고 있는 땅이나 노동 그리고 안식 등과 같은 단어들은 한편으로는 “대홍수” 이후 두 번째 ‘아담’인 ‘노아’가 수행해야 할 새로운 창조의 명령을 전망해 줌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타락과 저주 이야기를 회상해 주고 있습니다(3:17).
‘라멕’의 독백이 과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豫言)인지 또는 단순히 그의 희망을 담은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실제 ‘노아’가 경험한 것은 안식이 아니라 저주와 멸망, 즉 대홍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안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자는 역사가 어찌해서 ‘라멕’이 기대했던 바와는 정 반대로 진행되었는지에 관해서 곧이어 설명할 것입니다(참고, 6:1-8).
‘노아’가 세 아들을 낳았다는 언급으로 ‘아담’ 계보는 끝을 맺고 있습니다만, 이 마지막 언급은 그동안 이어오던 전형에서 변형을 꾀하고 있습니다. 즉 수직적인 계보에서 수평적인 계보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세 아들을 동시에 계보에 포함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햄’과 ‘야벳’은 아버지를 따라 방주로 들어가 대홍수로부터 살아남아 이후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었습니다(10:1-32).
교훈과 적용
1. 父傳子傳(1): 하나님의 형상
대개 한 나라의 역사 기술은 나름대로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인도나 중국의 경우는 그보다 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도 주변 역사의 장구함에 기가 질렸던지 궁(窮)한 나머지, 어느 한 고고학자가 꾸며낸 역사 기록을 교과서에 실었다가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당하기까지 한 바 있습니다. 지금의 역사기록보다 더 오랜 기원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게지요.
고대 근동 ‘수메르’의 한 홍수설화는 이 왕국의 역사가 대략 30만년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설화의 편집 시기는 주전 이천년 경 당시 ‘수메르’의 해방자, ‘유투히갈’ 왕 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이 설화에 따르면, ‘수메르’ 왕국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홍수 이전까지 약 24만년에 걸쳐서 여덟 왕이 통치하였고, 홍수 이후에는 수명이 짧아져서 39명의 왕들이 대략 27,000년에 걸쳐 통치하면서 당시까지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정통성을 지닌 통일 왕국을 강조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계보>나 <노아의 계보>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고대인들은 인류의 역사가 까마득하게 오래되었으며, 옛날에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을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어떤 기록에 보면 사람들이 백 살이 넘도록 기저귀를 차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는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없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미로만 따진다면 차라리 그리스 신화의 족보 기록에 못 미친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족보 기록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면, 독자는 차라리 재미있는 쪽을 택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러나 <창세기> 화자는 이와 같은 합리적인 의문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이 점은 <성경>의 다른 화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성경>은 어떤 사실을 증명하거나 논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선포할 따름입니다. 이곳에서도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2천년에 걸쳐 사람들이 수 백 년씩이나 장수하고, 번성하며, 많은 자녀들을 생산하였는데,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축복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오경>, 특히 <신명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상이라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이러한 축복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계명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한 마디로 “언약사상”의 발로입니다.
당시 ‘셋’과 그의 후손들이 살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물질적인 풍요를 구가하던 시대였으며, 문화와 예술은 그러한 풍요를 즐기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죄라고 하는 물감으로 어둡게 채색되어있었습니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했고, 성도덕이 문란했으며, 아무도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구차하게 변명하고, 항변하던 일도 그나마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지금은 오히려 그러한 짓이 영웅시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라멕의 노래”가 바로 그러한 시대정신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 4:19-24는 이러한 시대와 시대정신을 짧지만 아주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시대에 ‘셋’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은 다른 문화를 창조하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곳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야훼 문화”를 창조하며 살았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5:24);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그들은 분명 구별된 자들이었습니다. 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야훼 문화”를 창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떻게 이처럼 어렵고도 별난 생활이 가능했을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5:1-2). 즉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별난 생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이 형상이 자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아담이...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5:3).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리라’(창 1:28)고 일찍부터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단순히 이 땅에서 오래 살게 하는 것으로만 제한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한 결 같은 소망이 있다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축복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바램 일 것입니다. 그만큼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대상이자, 최대의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의 아내의 외할머니께서 나이 90이 다 되어 주무시는 가운데 돌아가셨을 때 모두들 부러워했습니다. 평생을 남에게 해 안 끼치고 착하게 사신 당연한 보답이겠거니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정녕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에녹’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로 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5: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갈 때 그의 나이가 불과 365 살이었으니,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에 비하면 요절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 바로 나아갔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외에 오직 한 사람 ‘엘리야’만이 이 축복을 공유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왕하 2:11). 예수님도 아니었습니다.
왜 ‘에녹’입니까? 흥미로운 언급이 있습니다. 화자가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5:22, 24).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이 그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에녹’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 무슨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연속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왔으니, 참으로 기막힌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천국에 가는가? 그 속에 천국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신약>은 ‘에녹’의 삶과 관련해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유다서>는 ‘에녹’을 당대의 의로운 예언자 내지는 설교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담의 칠 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 14). 그는 세상을 피하여 조용한 은둔자(隱遁者)로 산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으며, 그 대상은 경건하지 못한 세상과 세상의 풍조였습니다.
여기서 심판이라 함은 “대홍수”를 뜻할 것인데, 계보의 연대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정작 ‘에녹’ 자신은 심판을 보지 못했습니다(문자적인 계산에 따르면 대홍수는 아직 천 년 이후의 일입니다). 그런대도 그가 어떻게 그 심판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여인의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참고. 3:15). 이처럼 <성경>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는 예언자(豫言者)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미리 알려주신 신탁(神託)을 선포하는 자들, 즉 예언자(預言者)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언(預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이 없이는 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알아야 선포를 하든 가르치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이 시대의 ‘에녹’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신탁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약속입니다. 언제일지 알 수는 없지만, 어느 날 그분께서 구름 가운데서 천사들과 함께 홀연히 나타나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임을 전하고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히브리서>는 ‘에녹’에 관하여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에녹’의 삶이 경이로운 것은 그가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렸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와 나누는 대화, 그가 살아가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즐거움이었습니다.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실 때 하셨을 말씀을 추측해 보았습니다: “에녹아, 우리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집으로 가자꾸나.”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2. 父傳子傳(2): 아담의 형상
우리 조상들은 옛 부터 화장실과 묘지는 가능한 한 멀리 두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도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 공원묘지나 화장터를 세우겠다고 하면 혐오시설이라 하여 기를 쓰고 반대합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다소 달랐던 것 같습니다. 공동묘지가 시내 한 곳에 마치 공원처럼 버젓이 위치하고 있는가 하면, 오래 된 교회에서는 아예 교회 뒷마당이나 지하 납골당에 있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중세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책상 위에 두개골을 올려놓고 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라틴’어로 이 “해골”을 memmento mori(죽음의 표지)라고 부릅니다. 인생이 길든 짧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그 이후에는 싫든 좋든 하나님을 대면해야 한다는 엄숙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담의 계보”에서 ‘에녹’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서, 이와 같은 해골 즉 memmento mori를 만날 수 있습니다. 즉 다음과 같은 선언입니다: “그가 oo세를 향유하고 죽었더라”(5:5, 8, 11, 14, 17, 20, 27, 31).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모양(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던 ‘셋’의 후손들이었으며, 대부분 거의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결국에는 죽고 말았습니다. 화자는 마치 조종(弔鐘)을 울리듯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 그렇습니다. 인생이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는 바, “우리는 필경에는 죽는다”입니다.
죄의 삯.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모두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memmento mori는 “죄”가 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계보는 그 첫머리에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형상이 ‘아담’을 통해서 자손대대로 이어져 갔으면 좋았겠는데, 유전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전해져 내려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형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아담의 형상”도 동시에 전해져 내려갔습니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만 지닌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 유전인자의 변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형상도 동시에 지니게 된 것입니다. 즉 “죄와 죽음”의 코드(code)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 또한 자손들에게 전수되어서 단 한 사람 에녹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결 같이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도 무려 930년을 살았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지고 분리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사실 족보를 살펴보면 아무리 오래 살았던 사람도 천년을 넘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세월이 거듭될수록 하나님의 약속의 씨조차도 ‘가인’의 씨의 영향력을 이기지 못하고 점차 그 힘을 상실해 갔습니다.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활기차고 역동적인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어느새 삶은 힘들고 고달픈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라멕’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야훼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5:29).
이 아들이 누구입니까? ‘노아’입니다. 이 이름이 뜻하는 바는 “안식” 또는 “위로”라고 하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그러나 ‘라멕’의 희망과 기대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오히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이전 세대가 대홍수로 멸망한 이후 새롭게 시작할 두 번째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류를 다 멸망시켰다는 사실은, ‘노아’를 통해서 그 세대를 새롭게 하거나 구원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있었던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를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 도시가 멸망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이 단 열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18:32).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평화스러웠던 천년 왕국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에는 충분히 긴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대가 모두 멸망하였다는 것은 ‘가인’의 후손은 물론 ‘셋’의 후손 중에서도 아무도 돌이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악화(惡貨)가 결국 양화(良貨)를 구축해버린 것입니다.
‘여호수아’ 당시 ‘가나안’ 땅도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족속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 땅은 더 이상 구원의 여지도 희망도 없는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아브라함’ 이후 그 때까지 400년이나 두고 보셨습니다. 그러나 희망은커녕 더 악해져 갈 뿐이었습니다. 이 땅은 ‘니느웨’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니느웨’는 ‘요나’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하면 회개하여 돌아올 여지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불가능의 땅이었습니다. 살려두면 모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이 공동체마저 여지없이 타락시키고 소멸시킬 것이 명명백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우리 세대 역시 그러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종은 누구를 위하여. 그렇다면 죽음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불행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최근 들어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바야흐로 결실을 거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영생의 희망에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보입니다. 멀리는 복제 양 둘리의 탄생에서부터 가깝게는 황 우석 교수의 복제 개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업적이 이러한 희망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제는 어디까지나 복제일 뿐입니다. 이들 복제품이 우리의 생명을 수 년 또는 수천 년 연장시켜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원한 해답은 될 수 없다는 우울한 소식을 접한 바 있습니다. 사실 복제 양 둘리의 수명이 기대했던 것보다 짧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은 후 조선일보 1999년 5월 23일자 참조.
, 얼마 안 되어 그 일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둘리 양의 죽음은 “수명의 유전자”도 복제와 함께 전수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반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헌 차를 아무리 수리해서 쓴다 해도 새 차의 수명을 따라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죽음은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더욱 우울한 소식은 내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심판까지 받아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러나 이 선고는 제한적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에게 다 해당되는 선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나는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 약속은 나의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육체적으로 죽을 것은 틀림없지만,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겪어야 할 그 모든 일을 이미 다 겪고 이루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전수된 새로운 생명의 코드에 관하여 기록해 놓은 신약의 위대한 두 구절이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1-8).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 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아담’ 이후 모든 인류에게 죽음이 왕 노릇 해왔습니다(롬 5:14). 그러나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롬 5:17).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연습과 토의
1. 창세기의 두 번째 <톨레돗>의 범위를 말하고, 그 구조와 내용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2. 약속의 씨를 통해서 전승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3. ‘에녹’의 생애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지 논의해 봅시다.
4. ‘라멕’이 그의 아들 ‘노아’에게 걸었던 희망은 과연 이루어졌습니까?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