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9과, 전체 원고
요셉과 야곱의 죽음
김태정 목사창세기 48:1-50:26약 243분 분량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49:33)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50:26)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창세기>의 마지막 세 장(48-50장)은 <요셉 이야기>의 절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反) 절정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절정은 주인공 ‘요셉’이 형들을 만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대목과(45장), 아버지와의 재회(46-47장)에서 이미 맞이한 바 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들려주는 ‘야곱’과 ‘요셉’의 죽음에 관한 기술은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거나, 아니면 진부한 멜로드라마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세 장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창세기> 화자의 의도나 목적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화자의 주 관심사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에 있고, 언약의 중심에는 삼중적인 약속, “땅”과 “후손”과 그리고 “축복”이 있습니다. 화자는 에피소드의 첫 장(48장)을 “축복”에 관한 이야기로 장식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주인공 ‘야곱’이 일생에 걸쳐 추구하고 있는 “축복”입니다. 이제 인생의 종말을 맞아 그가 추구해 왔던 그 모든 축복이 완결을 고하고 있는 듯합니다. 과거를 회고하며 선언적으로 뿜어내고 있는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48:3).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대했던 이상으로 복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48:11).
‘야곱’의 회고는 “그 땅”에 대한 약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와 그의 선조들은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이미 받은 바 있다고 말합니다(48:4). ‘막벨라’의 동굴 매장지하며(49:29-32; 50:13)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세겜’ 땅(48:21-23)도 모두 그 약속에 포함된 것이라는 언급도 덧붙이고 있습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은 어떻습니까? 그는 이미 열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두 명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양자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셉’도 많은 손자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48:12-20; 50:23).
이처럼 “아브라함 언약”은 ‘야곱’과 ‘요셉’에 이르러 대부분 성취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 두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바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맞이하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에 비하면 맛보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는 마치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 “약속의 성령”으로 인(印) 치심을 받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엡 1:13-14).
<족장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요셉’ 모두를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로 그리고 있습니다만, 이들 중 ‘야곱’만큼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상세하고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는 족장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에서 ‘야곱’을 능가하는 선지자는 ‘모세’가 유일하다 하겠습니다.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장래에 대해서도 이들이 큰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48:19). 그리고 4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미래 즉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각 지파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바, ‘유다’와 ‘요셉’ 지파는 크게 흥하게 될 것이고(49:8-12, 22-26), ‘르우벤’과 ‘시므온’ 지파는 쇠하게 될 것이며(49:3-7), ‘잇사갈’과 ‘단’과 ‘갓’의 세 지파는 압제 하에 지내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49:14-19). ‘야곱’의 긴 축복의 예언은 ‘요셉’ 지파가 훗날 어떻게 막강한 지파로 성장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예언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49:24-26).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그려준 ‘야곱’은 이제 다시 한 번 자신의 매장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묻힐 곳은 다름 아닌 선조들의 묘지입니다(참고. 49:29-32; 47:29-30). 그의 아들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을 위해서 왕의 장례식에 버금갈 정도로 ‘이집트’에서 가장 거창하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한 것이나, 온 ‘이집트’ 백성들로 하여금 ‘야곱’을 위하여 무려 칠십 일 동안을 애곡하게 한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후 ‘바로’ 왕의 허락을 받아 그의 시신(屍身)을 마차에 싣고, ‘야곱’의 모든 자손들은 물론 ‘바로’의 모든 신하와 궁전의 모든 원로들과 그 땅의 모든 원로들이 따르는 가운데, ‘요단’ 강 건너 편 ‘아닷’ 마당이라는 곳에 이르러 다시 칠일 동안을 모두 애곡하게 한 다음, ‘막벨라’ 밭 선조들의 매장지에 그를 장사지냅니다.
이처럼 ‘야곱’의 장례식과 관련해서 화자가 동원하고 있는 어휘나 표현들, 그리고 장례 행렬이 거쳐 지나갔을 경로 즉 홍해를 지나 ‘여리고’ 인근의 ‘가나안’ 남동쪽으로 향하는 경로는 훗날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택했던 경로를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결국 이 장례식은 직접적으로는 ‘야곱’ 자신이 기대했던 그 땅에 대한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 멀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성취를 예고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요셉’ 자신이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형제들에게 남긴 유언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50:24).
이렇게 해서 좁게는 <요셉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축복”과 “그 땅”과 그리고 “후손”에 대한 이야기 전개는 크게는 <창세기> 전체의 주제, 즉 “족장언약의 부분적인 성취”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족장들의 인간적인 결함이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 성취를 기대라며 살아갔던 “믿음의 용사”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21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1-22)
<요셉 이야기>는 이렇게 “족장 언약”에 관한 부분적인 성취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창세기>가 전체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전부는 아닙니다. 특히 <요셉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창세기>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큰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이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형제들 간의 갈등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봉합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요셉’의 관대함에 기인한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45장). 하지만 과거는 쉽게 잊혀 지지 않는 법,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요셉’ 형들의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요셉’이 행여나 복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형들은 처음으로 진심어린 회개와 용서를 구합니다(50:17). 그리고 이전에 했던 바처럼 다시 ‘요셉’ 앞에 엎드려 종이 되기를 자원하고 있습니다(50:18).
이에 ‘요셉’은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그 모든 고초에 대해서 형들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들어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적 진술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참고. 45:5-8).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한 계획마저도 선한 목적을 위해서 활용하신다는 사상은 실은 <성경>의 보편적인 전제이기도 합니다(예: 잠 16:9; 19:21). 과연 ‘요셉’은 악한 형들 때문에 고초를 당한 ‘요셉’을 통해서 세상은 구원을 얻고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참고. 12:3). 이는 좁게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만, 넓게는 이 또한 <성경>의 기본 전제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시편>의 많은 애가(哀歌)들이 의인의 고난을 통한 세상의 구원을 간구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시 22, 40, 140편).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그리고 부활만큼 이와 같은 구원의 원리를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없다 하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지만 이와 같은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은 ‘유다’ 지파를 향한 ‘야곱’의 축복 속에 이미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물론 이 예언은 ‘다윗’ 왕국의 출현으로 일차적으로 성취된 바 있습니다만, <시편>과 <예언서> 모두는 더 위대한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예언의 궁극적인 성취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 중 왕”이요, “만유의 주”이시며,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무릎 꿇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7:9);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신약>의 나머지 책들 모두는 한 결 같이 오늘날 우리에게 ‘메시아’의 비전을 더욱 심화시켰고 확대시켜준 바 있습니다. ‘요셉’은 그 옛날 그의 형들에게 유언으로 남겨주었던 약속을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50:24)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창세기>의 마지막 세 장(48-50장)에서 긴 <야곱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제 1부가 25장에서 시작되었다면, 제 2부는 흔히 <요셉 이야기>로도 불리고 있는데 37장에서 시작한 바 있습니다. 본문을 이야기의 대단원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하나의 새로운 에피소드로서 문학적 통일성을 갖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우선 이야기는 ‘에필로그’ 즉 대단원답게 그 출발을 “이 일 후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특유의 표현으로서 항상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의 기능을 해왔습니다(참고. 46-47장). 그리고 ‘요셉’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대단원의 결말로 적절한 진술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50:26). 특히 각각의 <족장 이야기>는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유언을 하나의 전형(典型) 장면으로 도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은 임종이 임박했을 때 자식들을 불러 그들을 축복해주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24장에서, <이삭 이야기>에서는 27장에서 이 장면을 볼 수 있고, 이제 이곳에서 ‘야곱’의 임종 장면은 48:1-49:32 사이에서, 그리고 ‘요셉’의 경우는 50:24-26 사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모든 장면에서 ‘야곱’의 임종 장면이 가장 특기할 만한데, 그것이 가장 길고 상세하다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로서 그의 유언은 앞으로 전개될 이스라엘 각 지파의 미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유언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자신을 ‘가나안’에 묻어달라는 것인데, 이는 이스라엘 전체의 미래가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에서 펼쳐질 것임을 예고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이 땅”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자, 내가 죽을 때 돌아갈 땅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화자는 ‘야곱’의 유언을 통해서 “이 땅”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 땅”은 미래 언젠가 이스라엘의 땅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긴 임종(臨終) 장면에 이어 두 개의 짧은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 역시 하나님의 언약이 미래 어느 날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즉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하며 용서를 구하려 하자, ‘요셉’은 이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인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가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요셉’의 고백은 결국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표현을 달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땅의 모든 족속이 그의 후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 말입니다(참고. 12:3; 22:18).
마지막으로, ‘요셉’의 죽음에 관한 간략한 언급을 읽게 되는데, 그 역시 아버지 ‘야곱’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야곱’과는 달리 이스라엘 모든 족속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될 때까지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체 이야기는 일곱 개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단락 구분에서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야곱’의 매장지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의 기법을 도입하여, ‘야곱’이 ‘가나안’에 있는 조상들의 묘지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48:7, 21; 49:29-32; 50:5-14). 둘째, ‘야곱’ 후손들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는 이번에는 이에 관한 내용을 두 개의 장면에 걸쳐 가장 길게 다룸으로써 그의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48:8-49:28).
본문의 또 다른 형식적 특징은 이곳에서 ‘야곱’에 의한 “임종 축복” 장면이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번은 ‘요셉’의 두 아들에 대한 것이고, 또 한 번은 ‘야곱’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소 기이한 서술 방식은 <족장 이야기>에서 전혀 낯선 것만은 아닙니다. 이와 유사한 장면을 ‘이삭’의 경우에도 볼 수 있는데(27:1-28:5), 이곳에서 ‘이삭’은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눈이 먼 상태에서 차남 ‘야곱’을 장남 ‘에서’보다 앞서 축복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야곱’을 저지하려 했던 것처럼, ‘에서’ 또한 아버지 ‘이삭’을 향해 항변했으나, ‘이삭’은 개의치 않고 장남을 향한 축복, 즉 두 번째 축복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은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임종” 장면이 이와 같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야곱’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간증이 그것입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48:3-4).
‘야곱’의 고백은 앞선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을 연상시켜주는 한 예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앞선 다른 에피소드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들을 모두 참고하고 있거나 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참고로 다음 본문들을 함께 비교함으로써, 이를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48:5와 41:50-52; 29:32-33; (2) 48:7과 35:9, 16-19; (3) 48:9와 41:50-52; (4) 48:11과 37:33-35; 45:28; (5) 48:14와 27:27-28; (6) 48:15와 13:17; 17:1; 26:3; 28:15, 20-21; (7) 48:22와 34:25-29; (8) 49:3과 29:32; (9) 49:4와 35:22; (10) 49:5와 29:33-34; (11) 40:5-7과 34:25-31; (12) 49:8과 29:35; (13) 49:13과 30:20; (14) 49:14와 30:18; (15) 49:16과 30:6; (16) 49:19와 30:11; (17) 49:20과 30:13; (18)49:21과 30:8; (19) 49:22와 30:24; (20) 49:27과 35:18; (21) 49:29-32와 23:2-20; (22) 49:31과 25:9; 35:29; (23) 50:1과 46:29; (24) 50:4와 47:1; (25) 50:5-6과 24:3, 37; 47:31; (26) 50:8과 45:10; 46:28, 34; 47:1, 4, 6; (27) 50:9와 41:43; (28) 50:13과 23:2-20; (29) 50:15와 27:41; 37:18-35; (30) 50:17과 31:36; (31) 50:18과 44:14, 16; (32) 50:20과 45:5, 7-9; (33) 50:21과 45:11; 47:12; 37:35; 34:3; (34) 50:24와 48:21; 50:5; 22:16; 26:3; 35:12; (35) 50:25와 24:3, 37; 47:31; 50:5-6.
이와 같은 유사 반복은 <창세기> 전체를 흐르는 주제의 일관성에서 찾아야 할 것인 즉, 언약과 그 성취를 보여주려는 화자의 의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그동안 등장했던 그 모든 에피소드들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대단원의 막을 내림에 있어 적절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완성과 성취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
자료와 편집. 일부 자료비평 학자들은 본문 속에 세 개의 전승이 혼재해 있다고 믿습니다: (1) 야훼 자료(49:1하-28절상; 50:1-11, 14); (2) 엘로힘 자료(48:1-2, 8-22; 50:15-26); (3) 사제 자료(48:3-7; 49:1상, 28하-33; 50:12-13). 그런데 48-50장 사이에서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으며, ‘야곱’(흔히 엘로힘 전승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이스라엘(흔히 야훼 전승에서 사용하는 이름)의 이름이나 하나님의 이름 또한 번갈아 나타나고 있는 점 등에 기초하여, 후대의 자료비평 학자들은 본문을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자료비평의 입장은 본문을 이루고 있는 세 장(48-50장)이 <요셉 이야기>와 <야곱 이야기>를 적절히 사제적 관점에서 재편집한 사제 전승이 혼성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웨스터만’(Westermann)은 48:1-2, 8-12, 및 50:1-14 등은 <요셉 이야기>의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는 반면, 48:3-6, 49:1하, 28-33, 50:12-13 등의 본문은 <사제 전승>에서 온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 외의 다른 구절들(48:7, 13-22; 50:15-26)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블룸’(Blum)은, 본문과 27 장과의 유사성에 기초하여, 48-50 장의 더 많은 부분이 <요셉 이야기>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예. 48:1-2, 8-14, 17-20; 50:1-11, 14-21). 그리고 여기에 일부 <사제 전승>과 다른 요소들이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코트’(Coats)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47:28-50:14 사이의 내용은 일관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속에 “야곱의 축복”(49:2-27)이나 <사제 전승>의 일부 자료(예. 48:3-7)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50:15-21의 본문이 일종의 요약으로, 그리고 마지막 단락 50:22-26은 색인(索引)으로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마 Coats는 이야기의 서사(敍事) 구조를 <야훼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Coats 주장은 각 <족장 이야기>들이 그 형식이나 구조에 있어 전체적으로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니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 외에는 크게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Coats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옳다는 점은 <창세기> 내에서 유사한 편집 작업을 보이고 있는 다른 병행 본문들을 비교 조사해 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삭 이야기>(27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임종 축복” 장면이 이들 본문 속에 공통적인 전형(典型) 장면으로 항상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삭 이야기>에서 유사한 구조는 또 있습니다. 즉 족장 ‘이삭’의 “임종 축복”이 ‘야곱’과 ‘에서’에게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인데(2727-28//28:2-6), ‘야곱’ 역시 한 번은 그의 두 손자에게, 그리고 또 한 번은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축복을 해주고 있습니다(48//49장). 그리고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야곱 이야기 I/II>와 유사한 편집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도표 참고).

‘요셉’과 관련된 마지막 두 개의 에피소드, 즉 ‘요셉’이 형제들을 안심시키는 장면과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50:14-26)를 단순히 편집적 삽입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슈바이처’(Schweizer)가 통찰력 있게 관찰한 바대로, 이 부분은 오히려 <요셉 이야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즉 아버지 ‘야곱’을 향한 ‘요셉’의 사랑이 그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연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자식들을 결속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인 것이지요.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들이 동생이 지난 일을 놓고 복수를 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은 이전에 ‘에서’가 그의 아버지 ‘이삭’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동생 ‘야곱’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참고. 27:41-45). 지금이야말로 ‘요셉’이 새로운 화해의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이 부분을 제거한다면 <창세기> 50장의 절정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다 해도 원래의 <요셉 이야기>를 없애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화해의 장면은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며, 동시에 “족장 언약”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마지막 단락에서, “요셉이...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라는 화자의 언급은 <야곱 이야기>의 결말로서 아주 적절한 진술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이삭 이야기>가 ‘이삭’의 아들 ‘에서’의 죽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도표 참고).

이 모든 형식적, 구조적 특징들을 통해서 볼 때, 48-50장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 단위로 취급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원래의 전승들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컨대, <사제 자료>(48:3-7; 49:28하-33; 50:12-13)로 분류할 수 있는 “야곱의 축복”은 원래 별도의 전승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자료를 <사제 전승>으로 분류한다면, 23장이나 25장에서 볼 수 있는 이와 유사한 자료들 역시 같은 전승에 포함시켜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들 자료가 처음부터 <사제 전승>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현재의 본문 역시 그 출처가 불분명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23:1-20이나 35:9-14의 본문들이 <사제 전승>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48-50장의 최종 편집자가 이들을 별도의 전승이 아닌 <사제 전승>으로부터 직접 가져왔을 수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유언. 지금까지 48-50장 전체에 대한 <문학과 역사>를 개괄해 보았습니다만, 흔히 “야곱의 유언” 또는 “야곱의 축복”으로 알려져 있는 본문 49:1-27은 보다 상세한 역사․문학적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히 족장의 “축복”만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저주”도 함께 포함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야곱의 유언”은 시적(詩的)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족장 이야기>의 유언에 비해 가장 길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부분의 출처나 배경 및 용도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대목은 48-50장 단락 전체적인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고 있어 오히려 없는 편이 더 나아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이 <창세기> 내에서 기능하는 바가 무엇이며, 다른 족장들의 “임종 유언”과 어떻게 다르며, 그리고 그 출처와 배경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현재의 본문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앞선 자료비평적 연구에서 지적한 바처럼, “야곱의 유언”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그것이 원래 다른 별도의 전승에 속해 있었으며, <창세기> 내에 들어오게 된 것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에 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예컨대, ‘롱에이커’(Longacre)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이 단락이야말로 <요셉 이야기>에서 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적으로 핵심이자 절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유언”은 이스라엘의 “계보”를 시와 노래로 들려주고 있으며, 그 속에는 미래 두 국가 즉 ‘요셉’ 지파로 이루어질 북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로 이루어질 남쪽 ‘유대’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잉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 25절로 된 유언 중에 열 개의 절이 ‘유다’와 ‘요셉’에 관한 내용이며(8-12, 22-26절), 이는 상대적으로 다른 열 지파에 비해 더 많은 분량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유다’ 지파는 ‘요셉’ 지파를 제외하고 나면 ‘야곱’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핵심 지파임에 분명합니다(참고. 37:26-27; 38:1-26; 43:3-10; 44:14-34; 46:28). 하지만 이와 같은 ‘롱에이커’(Longacre)의 주장에는 다소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즉 한 지파에 대해서 많이 그리고 상세하게 다룬다고 해서 그 지파가 다른 지파에 비해서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논리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지요. 만일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요셉 이야기>에서 단지 이름만 등장할 뿐인 ‘르우벤’과 ‘베냐민’(37:21-22, 29-30; 42:22, 37; 48:5; 42:24, 36; 43:23)에 대해서도 “야곱의 유언”은 다섯 절이나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마땅히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반면 <요셉 이야기>의 다른 곳에서 단지 계보 목록에만 등장할 뿐인 ‘스불론’과 ‘잇사갈’, ‘단’, ‘갓’, ‘아셀’, 그리고 ‘납달리’ 지파들은 이곳에서 여덟 절을 할애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설명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유언”이 <창세기>의 다른 내용들과 일정 부분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첫째, ‘르우벤’에서 ‘베냐민’에 이르는 유언의 순서는 대개 이들이 태어난 순서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참고. 29:32-30:24; 35:18). 물론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루게 될 것입니다.
둘째, ‘르우벤’과 ‘시므온’과 그리고 ‘레위’에 대한 ‘야곱’의 저주는(참고. 4-7절) 34장과 35:22에서 다룬 바 있는 에피소드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언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네 인물은 ‘르우벤’과 ‘시므온’, ‘유다’, 및 ‘요셉’으로서, 이들 이름은 출생 시에 거룩한 이름 ‘야훼’와 관련해서 설명이 있었던 이름들입니다(29:32-35; 30:24). 즉 화자는 이들 네 사람의 이름을 출생 시부터 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창세기> 29-50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은 화자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49장에 이르러서는 이 점을 간파할 수 있게 합니다.
“야곱의 유언”(49:1-27)이 48-50장 전체 내용과 일관성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즉 “야곱의 유언”은 “임종 유언”에 대한 일종의 전형으로서, 그 내용이나 그것이 나타나는 순서에 있어 <아브라함 순환>이나 <야곱 순환>에서 보는 바와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참고. 22:15-25:10; 35:9-14). 여기에 덧붙여, <야곱 이야기>에서 보는 두 족장 ‘이삭’과 ‘야곱’의 임종 축복 장면 역시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는 바가 있는데, 두 경우 모두 두 번에 걸친 축복 장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28:2-6). <창세기> 외의 책에서 보듯이, “야곱의 유언”과 유사한 유언 장면은 <사사기>의 “드보라의 노래”(삿 5:14-18)와 “모세의 축복”(신 33:2-29)을 들 수 있을 것인데, 특히 “모세의 노래”는 열두 지파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곱의 유언”과 아주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창세기> 내에서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곳을 찾는다면, “노아의 유언”(9:25-27)을 들 수 있을 것인데, 이곳에서 ‘노아’는 먼저 ‘함’에 대한 저주로 시작하여 다른, 두 아들에 대한 축복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야곱’ 역시 세 아들에 대한 저주에서 그들의 과거 행정을 문제 사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유언이 일치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어쨌든 두 경우 모두 죽어가는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서 예언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야곱의 유언”에서 각 지파를 향한 유언의 순서를 보면, 대략 자식들이 태어난 순서와 일치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첫째, ‘레아’의 자식들을 ‘르우벤’에서 ‘잇사갈’까지 언급한 다음, 두 몸종에서 태어난 자식들인 ‘단’에서 ‘납달리’까지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라헬’의 자식들 즉 ‘요셉’과 ‘베냐민’의 순서입니다(참고. 29:32-30:24; 35:18). 그러나 예외도 있는 것이, ‘레아’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의 경우 ‘스불론’을 ‘잇사갈’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이 순서는 30:17-20에서 보는 출생의 순서와는 다릅니다). ‘스불론’을 ‘잇사갈’보다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아마도 ‘스불론’의 운명이 ‘잇사갈’보다느 나을 것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참고. 49:13-15). 그리고 두 몸종의 자식들에 대한 순서 역시 출생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즉 이곳에서의 순서는 ‘단’에서 ‘갓’, ‘아셀’, 그리고 ‘납달리’로 이어지고 있는데 반해서, 이들이 실제 태어나기는 ‘단’, ‘납달리’(‘라헤’의 여종 ‘빌하’의 자식들), ‘갓’과 ‘아셀’(‘레아’의 여종 ‘실바’의 자식들)의 순서입니다(참고. 30:5-13). 이들의 순서와 관련해서 ‘사르나’(Sarna)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교차대구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A) ‘단’‘빌하’의 아들
(B) ‘갓’‘실바’의 아들
(B) ‘아셀’‘실바’의 아들
(A) ‘납달리’‘빌하’의 아들
하지만 ‘딜만’(Dillmann)은 다소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나타나는 순서는 이들 지파가 훗날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그들의 정착지를 순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1) ‘단’(수 19:40-48); (2) ‘갓’(민 32:33-36); (3) ‘아셀’(수 19:24-31); (4) ‘납달리’(수 19:29-39).
“야곱의 유언”에 대한 전승과 관련해서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것이 별도의 전승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만, 전통적인 견해는 그 반대의 상황 즉 이 단락은 처음부터 전체 본문에 속해있었던 하나의 시(詩)로서,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이지만, 유언의 내용과 분량은 지파에 따라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예컨대 ‘르우벤’과 ‘레위’와 ‘시므온’과 ‘유다’ 및 ‘요셉’ 지파에 대한 내용은 긴 반면, 나머지 지파들에 대한 유언의 분량은 비교적 짧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각 지파의 이름이나 동물의 이름에 빗대는 등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섯 주요 지파에 대한 긴 유언의 분량은 전체 분량의 2/3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좁게는 각 지파 간에 상호 연결 고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넓게는 <창세기> 전체의 문맥과도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언을 말하는 자는 ‘야곱’ 자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이며(참고. 49:3-4, 6, 8-9, 25-26), 그가 말하는 내용은 지파 간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이들 지파는 <야곱 이야기> 전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야곱의 유언”은 하나의 동일한 자료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각 지파 별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다른 지파들, 즉 ‘갓’과 ‘아셀’, 그리고 ‘납달리’에 대해서 적용해 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야곱의 유언”은 현재 본문에 있는 내용과 형태 그대로 바라볼 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본문 속에서 ‘야곱’의 주된 관심사는 그의 후손들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유언의 배경에 대해서는 확신하기가 어려운 것이, 예컨대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랑 상을 차리리로다”(20절)는 언급은 아마도 원래의 배경이나 상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게 어떤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추측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의 유언”은 처음부터 하나의 자료로서 상당 부분 통일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자료의 발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료의 편집과 관련해서 대체적인 인식은 “야곱의 유언”이 처음 본문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을 ‘야훼’ 기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편집의 시기는 언제 였으며, 그 이전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원래 전승의 용도와 관련한 ‘군네웨그’(Gunneweg)의 견해에 따르면, “야곱의 유언”은 <신명기> 33장에 보는 바처럼, 모든 지파들이 모여 모종의 언약 조인 행사를 주관할 때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49장보다는 <신명기> 33장이 더 잘 어울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49장은 <신명기> 33:2-5의 본문과는 달리,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며, 매번 국가적 행사가 열릴 때마다 세 지파들에 대한 저주(49:3-7)를 낭독한다는 사실을 상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족장 이야기>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전통, 즉 임종 시 족장이 유언을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모습을 통해서 볼 때, “임종 유언”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 아닌 ‘야곱’ 자신으로 비롯되었을 것 가능성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 즉 편집의 시기는 언제였을까? 유언의 내용 중에서 세 지파들에 대한 저주는 그들의 과거 행적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본문 속에 이들 내용이 포함된 것도 그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언의 내용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하는 편집의 시기는 사사 시대일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사사기>에 따르면, 이 시기는 지파들이 여전히 현존하고 있던 때로서, 예컨대 ‘스불론’ 지파나(13절) ‘잇사갈’ 지파(14-15절),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 지파들(5-7절)이 있었을 것이며, ‘유다’(8-12절)와 ‘요셉’(22-26절) 지파는 상대적으로 더 큰 세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이르는 동안 ‘레위’ 지파는 이미 제사장 지파가 되어 다른 지파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었을 것이며(<창세기>에서는 ‘레위’ 지파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이미 ‘유다’ 지파에 흡수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 따르면(19:10-16), ‘스불론’ 지파는 <창세기>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49:13), 해안 지역이 아닌 내륙 지역을 할당받았습니다. 그리고 ‘잇사갈’ 지파는 <사사기>에 의하면(참고. 삿 5:15), 약소한 지파 중의 하나였습니다. ‘유다’ 지파에 관한 예언 중,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겠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윗’ 왕국과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이 예언은 ‘다윗’이나 ‘솔로몬’ 왕의 재위 시에 그러한 의미로 본문 예언 속에 새롭게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축도(1)-에브라임과 므낫세(48장)
첫 장면의 핵심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불러 축도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의 두 손자가 어떻게 그들의 삼촌 격인 ‘야곱’의 나머지 아들들과 어깨를 나란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동생인 ‘에브라임’이 형인 ‘므낫세’보다 먼저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화자는 “이 일 후에”라는 표현으로 첫 장면을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족장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참고. 15:1; 22:1, 20; 39:7; 40: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1절)
‘야곱’은 이제 최후를 맞이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곳에서 그가 “병들었다” 함은 늙어 병이 든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서 회복의 가망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족장 이야기>에서 통상 그러하듯이 이제 모든 자식들이 모여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마지막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도 없지도 않았던 것이, ‘이삭’은 임종 시에 큰 아들 ‘에서’만 조용히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27:1-4).
‘이삭’이 죽음이 가까웠을 때 자식들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하고 눈이 멀었던 것처럼, ‘야곱’ 역시 늙고 병이 들어 일어나 앉는 것조차 힘이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삼상 4:9; 왕상 20:22). 누군가 그에게 와서 아들 ‘요셉’이 왔다고 일러줄 정도가 된 것도 그의 현재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2절)
죽어가는 족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듯 노인은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옛 기억을 더듬으며 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3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3-4절).
당연히 그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 성취에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가 되살려내고 있는 언약은 ‘벧엘’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루스’는 ‘벧엘’의 옛 이름입니다(28:19; 35:6). 그가 하나님을 ‘엘 샤다이’ 즉 “전능자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벧엘’에서의 경험을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35:9, 11).
이십여 년의 방랑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바로 그 언약을 말하는 것이지요(35:9-13).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마지막 남긴 유언(28:3-4)도 함께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 즉 “땅과 후손과 축복”입니다. 그가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들을 다시 요약하고 있는 이유는 결국 그 언약의 일관성과 영속성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를 바라보고자 함일 것입니다.
물론 ‘이집트’는 “그 땅” 속에 포함될 수 없으며, 이곳에 영원히 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두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불러 축복하고 있는 ‘야곱’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7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5-7절)
그는 이 두 손자가 자신의 두 아들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은 자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일종의 입양(入養)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같은 일은 고대 근동사회에서 흔히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유의해 볼 점은 ‘야곱’은 지금 둘째 아들 ‘에브라임’을 첫 아들 ‘므낫세’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서 ‘야곱’이 조금 후에 보여줄 행동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참고. 14-20절). 입양이 곧바로 ‘야곱’의 기업을 물려받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훗날 ‘유다’나 ‘베냐민’ 등과 같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반열에 포함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제 ‘야곱’의 눈길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향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8절)
그런데 이 질문은 정말 뜻밖이고,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에 ‘요셉’이 그들을 데리고 왔을 뿐만 아니라(2절), ‘야곱’ 자신도 이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5절). 그런데 지금 다시 이들이 누구냐고 물어보고 있다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불필요한 반복 내지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단락 속에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전승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3-7절의 본문은 <사제 전승>에서 취한 것이며, 1-2절과 8-12절의 본문은 <엘로힘 전승>나 <야훼 전승>에서 온 것이라는 설명이 그것입니다(8절을 2절에 곧바로 연결하여 읽어보면 이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은 부분적인 설명에 불과한 것으로서, 어떻게 3-7절의 <사제 전승>이 최종 편집과정에서 삽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7-9절의 내용은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참고. 22-24장, 35장), 이처럼 반복되는 유사병행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본문 7-9절이나 22-24장, 그리고 35장에서 유사병행의 관계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 아내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자식의 결혼에 대한 언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점에 대해서는 <문학과 역사>에서 도표를 통해서 비교한 바 있습니다.
혹자는 ‘야곱’의 불필요해 보이는 질문에 대해서 다른 설명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즉 입양에 필요한 재확인의 절차라는 설명이 그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것으로서, ‘야곱’은 이 때 이미 눈이 멀어 제대로 사물을 식별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 ‘이삭’도 마지막 순간에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구별하지 못하고 ‘야곱’에게 “네 아들아 네가 누구냐?”하고 물은 바 있습니다(27:8). 다시 한 번 <족장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라기보다 <족장 순환>으로 불러야 할 당위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질문에 대해서 ‘요셉’은 두 아들의 이름을 다시 거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손자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5절). 대신 ‘요셉’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9절)
<성경>에서 자식은 항상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요셉’의 이와 같은 설명은 다수 진부한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만,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족장들에게는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대 ‘요셉’의 설명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손자들을 확인한 다음 ‘야곱’은 그가 하려는 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축복하는 것인데, “축복”이라는 단어는 ‘야곱’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37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27:1-28:9; 48-49). 그 자신이 아버지의 임종 시에 축복을 받기 위해 그토록 안달했던 것처럼, 이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 축복을 손자들에게 전수해 주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야곱’이 두 손자를 향해 “이들이 누구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가 눈이 멀어 앞을 잘 보지 못해서 확인 차 물었던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습니다. 화자는 10절에서 보다 분명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10절)
‘야곱’의 눈이 어두웠다는 사실은 조금 후 ‘요셉’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될 것인데, 아버지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혼돈했을 때 이를 바로잡아주려고 했던 그의 반응이 바로 그것입니다(17-19절). 그는 분명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자기의 두 아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야곱’이 두 손자에게 입맞춤을 하는 장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족장 순환>의 유사병행을 만나고 있습니다. 다음 장면을 10절과 비교해 보면 이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6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27:1, 26-27상).
두 손자를 축복하는 ‘야곱’은 흥분과 감격으로 두 손이 떨리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들 ‘요셉’에게 들려주는 고백적 간증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11절)
그는 정말 아들이 죽었다고 확신했습니다(37:33-35; 42:36; 45:2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랄 수 있는 가장 터무니없는 소망까지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즉 아들을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자식들까지 보게 되었으니 이 어찌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아버지의 고백을 들은 ‘요셉’은 양손으로 두 아들을 이끌어 ‘야곱’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한 위치로 데려옵니다.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13-14절)
그런데 두 아들을 데리고 오는 ‘요셉’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양손에 잡은 두 아들을 ‘야곱’에게 데려다줄 때 두 팔이 서로 엇갈리게 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즉 큰 아들 ‘므낫세’가 더 큰 축복을 받아야 하겠기에 왼손으로는 그를 이끌어 ‘야곱’의 오른손을 향하도록 하고, 오른손으로는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이끌어 ‘야곱’의 왼손을 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 것이, 영예와 축복의 손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참고. 신 11:29; 시 110:1; 마 25:33; 히 1:3).
하지만 ‘요셉’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야곱’ 역시 그의 두 팔을 벌리되 서로 엇갈리게 하여 두 아들을 축복해주고 있습니다. 즉 그의 오른손은 작은 아들 ‘므낫세’를, 그리고 왼손은 큰아들 ‘에브라힘’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작은 아들이 큰아들의 축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야곱’의 이와 같은 행위는 그 자체로서 이미 ‘에브라임’의 미래의 위상을 예고해주는 것입니다. 즉 그는 ‘야곱’의 손자가 아니라 아들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가 ‘요셉’을 축복해 주고 있는 모습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5-16절)
지금 ‘야곱’은 마치 노래하듯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축복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그의 축복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제의에서 읊조리는 축도와도 같이 들립니다. 사실 그의 축복은 훗날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요셉’은 순간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 실수를 한 것으로 생각하여 이를 저지하여 고쳐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에서’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되돌리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참고. 27:34-36). 그러나 한 번 발한 축복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참고. 민 23:20; 롬 11:29). 그리고 ‘요셉’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이점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답변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7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17-18절)
즉 ‘야곱’은 축복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아들이 큰아들 제치고 축복의 자리에 든 예는 <성경>에 무수히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1) ‘가인’과 ‘아벨’(4:1-8); (2) ‘베레스’와 ‘셀라’(38:27-30); (3) ‘야곱’과 ‘에서’(27장). 이중 ‘야곱’과 ‘에서’의 경우가 가장 극적이고 대표적인 것이지만, 이번의 경우와 다소 다른 것은 ‘이삭’이 작은 아들 ‘야곱’을 축복한 것은 의도적이 아니라 ‘야곱’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실수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받은 축복이 합법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야곱’의 의도적인 축복에 대해서야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요셉’이 화를 내며 저항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요셉’이 매우 화가 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기뻐하지 아니 하여”(17절상). 하지만 ‘요셉’은 ‘에서’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에서’는 나중에 아버지에게 격렬하게 대들어(27:34-36) 자신을 향한 축복을 받아내긴 했습니다만, ‘요셉’의 시도는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19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19-20절)
‘요셉’의 시도를 비웃기라고 하듯 ‘야곱’은 두 아들의 엇갈린 운명에 대해서 더욱 단호하고 명확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큰아들은 한 민족을 이룰 것이나, 작은 아들은 큰아들보다 더 큰 자기 될 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화자 역시 독자들을 위하여 이점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20절하).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언약과 병행하는 것입니다(참고. 17:4-6).
‘야곱’은 비록 ‘이집트’에서 죽을 것이지만, 그는 이미 ‘요셉’에게 자신을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고 요청한 바 있습니다(47:29-31). 이제 다시 한 번 그 점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21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21-22절)
‘요셉’에게 주려는 그 땅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야곱’은 그 땅의 일부가 자신의 것임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땅에 대한 ‘야곱’의 이와 같은 언급은 그 땅에 대한 그의 집착을 암시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상당히 ‘이집트’화 되어있었을 아들 ‘요셉’에게 그가 살아야 곳은 ‘이집트’가 아니라 그 땅이라는 점을 재확인시켜주기 위함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2. 축도(2)-열두 지파(49장)
서론. 49장에서 등장하는 ‘야곱’의 축도는 그의 나머지 아들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두 절은 소위 “야곱의 언약”에 대한 서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1-2절)
서론의 기능은 ‘야곱’이 들려줄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을 것인지를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불러 이르다”는 표현이 이를 확인해주는 것으로서, ‘이삭’이 그의 임종 시에 ‘야곱’을 “불러 일렀으며”(28:1), 그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3:9; 22:11, 15; 출 19:3).
그리고 “후일에”라는 표현 역시 예언적 메시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서, 종종 종말론적인 의미 즉 “마지막 날에”라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사 2:2). 이곳에서는 그냥 단순히 “먼 장래에”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등과 같은 이스라엘의 미래 일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르우벤. 이어지는 두 절은 장남 ‘르우벤’에 관한 예언입니다.
3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3-4절)
위에서 보듯이 ‘르우벤’에 관한 예언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것입니다. 저주는 그가 행한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인데, ‘노아’ 역시 세 아들 중 ‘함’에 대해서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대신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9:25). <창세기>에서 장자가 자신의 잘못으로 장자권을 박탈당하는 경우를 여러 번에 걸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예: ‘가인’; ‘이스마엘’; ‘에서’; ‘엘’). ‘르우벤’의 죄악은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입니다(35:22). ‘야곱’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야곱’은 <창세기>에서 가장 강경한 어투로 아들의 비리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마치 생전에 이 아들에게 무엇인가 처벌을 내리고 싶었으나 두려워 못하고 있다가 임종이 가까워서야 그를 향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형국입니다(‘다윗’과 ‘요압’의 경우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왕상 2:5-6).
‘야곱’은 먼저 ‘르우벤’이 장자로서 지니고 있는 영예와 특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3절). 고대 근동에서 장자는 단순히 부모의 자랑이나 기쁨의 대상 그 이상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보듯이(25:31-32; 27장), 장자가 된다는 것은 부모의 유업을 이어받는 등 각종 특권과 지위를 지니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신명기>에서 보듯이, 장자는 나머지 아들들에 비해서 두 배의 재산을 상속받게 됩니다(신 21:15-17). 그뿐 아니라 장자의 유업은 첫 번째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두 번째 부인의 장남에게는 결코 양도할 수 없습니다. 장자가 이처럼 부모에게 중요한 존재라 마치 곡식의 첫 열매처럼 하나님에게 드리도록 되어있었습니다(참고. 축 13:2; 34:20). 나중에 이 독특한 지위는 ‘레위’ 지파가 갖도록 법으로 규정되기도 했습니다(민 3:45-51). <성경>은 여러 곳에서 “첫 열매”(tyvioar, 레쉬트)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으며(신 21:17; 시 78:51; 105:36),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핵심 단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레 2:12; 23:10; 민 15:20; 18:12; 신 18:4; 26:10).
이런 맥락에서 ‘르우벤’의 소명(召命)이나 지위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야곱’은 그를 향하여,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실은 <구약>에서 “전능자 하나님”(엘샤다이)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욥 13:11; 31:23; 출 15:2). 장자가 갖는 거의 신적인 지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가장 비열하고 비속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 지위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를 향한 또 다른 수식어, “물이 끓음 같다”는 표현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명사형 단어 “끓음”(zj'P, 파하즈)은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와 유사한 명사형 단어가 <예레미야서>에 등장하고 있으며(렘 23:32), 동일한 어근을 지니는 분사형 단어가 <사사기>(9:4)와 <스바냐>(3:4)에 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거짓 선지자, 즉 자신의 상상력으로 거짓 예언을 만들어내는 자를 지칭하며, <사사기>에서는 무지막지한 살인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여러 번역본에서 다양한 번역을 내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오만방자(傲慢放恣)하다”, <벌게이트>에서는 “내뿜다”, 그리고 <탈굼>에서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다”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의 행동은 물이 끓는 것처럼 예측과 예상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4절에서 언어의 유희를 볼 수 있는데, ‘르우벤’이 “월등하지만” 결코 “월등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 그것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세 번에 걸쳐 그의 “탁월함”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의 죄악에 대해서도 세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습니다: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침상에 올랐었도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단어는 “더럽히다”는 동사로서, 의미하는 바는 거룩한 대상을 불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이 동사를 사용하는 용례는, 안식일을 더럽히는 경우, 성소를 더럽히는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 희생 제물이나 제사장 직분을 더럽히는 경우 등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 출 31:14; 레 21:12; 19:12, 8; 21:9).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야곱’의 ‘빌하’와의 결혼은 거룩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레 19:29; 히 13:4).
‘르우벤’에 관한 이 예언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르우벤’은 요단 동쪽에 정착한 이후(민 32)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서 일찍 사라져버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파에서 어떠한 선지자나 왕이나 사사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시므온과 레위. 이들 두 지파에 대한 예언은 직전의 ‘르우벤’에 대한 것만큼이나 난해하고 까다로워서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도 사실입니다.
5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5-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내용을 <야곱 이야기>의 배경 내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해석의 폭이 제한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즉 ‘야곱’이 저주하고 있는 ‘시므온’과 ‘레위’의 행위가 무엇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시므온’과 ‘레위’가 주도했던 “세겜의 살육”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34장). 예컨대,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는 언급은 그 사건과 연계시키지 않고는 달리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사건이 없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형제”라는 언급 또한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야곱 이야기> 내내 열두 지파는 모두 한 아버지 ‘야곱’의 자식들로서 혈육의 “형제”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이들 두 사람을 형제로 칭하고 있는 구절은 오히려 문자적 해석을 자제해야 할 대목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시므온과 레위는 한 통속”이라는 암시가 아닐까요?
이들 형제에 대한 저주의 내용은 이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저주는 물론 ‘야곱’이 말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성격상 신탁(神託)에 가까운 것으로서 ‘야곱’의 선지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될 것인가? 흔히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 땅의 48개 성읍에 ‘레위’ 지파가 흩어져 살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참거. 수 21). 그 때 ‘시므온’ 지파도 ‘유다’ 지파의 구역 안에 일정 부분 거주지를 할당받은 바 있습니다(참고. 수 19:1-9; 15:32-42). 하지만 이런 식의 정착을 두고 이들이 지파들 사이에 흩어지고 나누어진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야곱’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형제가 더 이상 공모(共謀)하여 함께 일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분리될 것이라는 예언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예컨대, <민수기>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 ‘비느하스’가 ‘시므온’ 지파에 속한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5:7-14). 물론 이 같은 사건이 두 지파가 분리되는 한 예가 될 수는 있겠지만, 7절의 예언은 이보다 더 깊은 암시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이들 지파의 능력이나 영향력이 다른 지파들에 비해 일찍 쇠퇴하고 소멸해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여러 곳에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민 1:23; 26:14; 대상 4:38-43; 대하 15:9; 34:6). <신명기> 33장에는 ‘시므온’ 지파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단락의 보다 직접적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르우벤’으로부터 장자의 지위와 지도력을 박탈한 상황에서, ‘야곱’은 그 지휘권을 차남이나 삼남에게 전가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입니다.
유다. 당연히 “장자의 축복”은 넷째 아들 ‘유다’에게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다’에 관한 예언 역시 해석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유다’ 지파의 탁월성이나 지도력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 분명합니다만, 세세한 부분에 이르면 해석이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여타 지파들에 관한 예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다의 축복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8절‘유다’의 우월성에 대한 예고
9절사자와 같은 ‘유다’
10-12절유다의 지도력
불과 다섯 절에 지나지 않는 내용 속에 아주 다양한 상징이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자”; “당나귀”; “지팡이”; “포도나무”; “포도주”; “우유”. 이들 상징이 ‘유다’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혹자는 이들 이미지는 앞선 다른 형제들의 예언에서처럼, 실제 ‘유다’의 과거 행적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유다’는 이전에 “사자”처럼 동생 ‘요셉’을 물어뜯었으며(37:33), 며느리 ‘다말’에게 “지팡이”를 징표로 건네준 바 있고(38:18, 25), 그의 “(숫) 나귀”(ryI[, 아이르)는 그의 아들 ‘엘’((r[, 38:6-7)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빨겠다”(11절)는 것은 ‘요셉’의 옷이 피로 물들었음(37:31)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같은 해석은 참으로 천재적인 ‘알레고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확신을 주기에는 미흡합니다. 왜냐하면 이들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유다’에 대한 예언은 축복이 아니라 비난과 저주로 이해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야곱’의 칭찬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다(hd;Why,예후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hd:y,야다)이 될지라 네 손(dy, 야드)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8절)
따라서 ‘유다’에 대한 예언이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단락 전체를 여러 자료들의 복합물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지나친 독단은 금물인 것이, 다른 형제들에 대한 예언에서도 짐승을 포함하는 다양한 상징이나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유다’에 대한 예언과 관련해서 화자는 음성학적으로 유사한 일련의 단어들을 통해서 언어의 유희(遊戱)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 “찬송”; “손”. 유사한 언어의 유희가 11, 16, 19, 20, 및 22절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관련해서 “찬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지난 날 ‘레아’가 그를 낳았을 때 했던 말, “이번에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한 인간을 찬송하는 일이 <성경>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로서, <성경>에서 인간을 찬송하는 경우가 단 세 곳에 불과합니다: 욥 40:14; 시 45:17; 49:19.
아마도 지도자로서 그의 업적에 대한 칭송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는 예언은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한 것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참고. 37:7, 9; 42:6; 43:26; 43:28).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는 원수에 대한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서(참고. 출 23:27; 삼하 22:41), 혹자는 이 구절이 원래 다음과 같은 이행 시(二行 詩)로 이루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네 손은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발은 시체의 등을 밟을 것이로라
만일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12절에 등장하고 있는 “눈과 이”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생각해 볼 만한데, 이는 <출애굽>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발에는 발”(21:24)을 연상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에 대한 일련의 이미지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자”입니다. 그는 지금 먹이 감을 맹렬하게 낙아 채어, 그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서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그 누구라도 뚫어지게 노려보며 엎드려 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9절)
이와 유사한 이미지가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에 대해서나(민 23:24; 24:9), ‘갓’과 ‘단’ 지파들에 대해서나(신 33:20, 22), 이스라엘의 적들의 선지자들에 대해서(나훔 2:11-12)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만 하더라도 사자에 대한 언급은 백 회 이상 등장하고 있으며, <성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삿 14:5; 왕상 13:24-25), 고대 근동 지역에서 매우 친숙한 짐승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들은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서 사자를 사냥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비문(碑文)이나 또는 왕실 조각품 등에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중동 지역에서 사라진 것은 십자군 운동 이후부터였으며, 1950년 이후에는 아라비아 사막이나 ‘유프라데스’ 상류 지역에서 간혹 발견되기도 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윗’ 왕의 군사적 승리를 ‘유다’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유다의 사자”는 ‘메시아’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유다’에 대한 이미지는 약간 바뀌고 있습니다만,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
“규”과 “지팡이”는 권위의 상징입니다(참고. 민 24:17; 시 45:6; 슥 10:11; 민 21:18; 시 69:7). 이 구절 하나만 가지고 ‘유다’가 단순히 지파의 우두머리가 될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8절에 따르면, ‘유다’가 다른 모든 지파들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발 사이에서”라는 표현은 의미가 분명치 않아, 많은 논의가 있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그 기준에 사이에서”로 해석하는가 하면, 또 다른 자는 “지팡이를 두 발로 지팡이를 세워놓고 기대어 앉아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그럴 듯한 입장은 ‘유다’의 후손과 관련한 완곡어법이라는 것입니다. 즉 지도자가 ‘유다’의 후손들 중에서 계속 나올 것이라는 예언으로서, <성경>에서 “발”은 종종 신체의 은밀한 부분을 의미하는 완곡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참고. 신 28:57; 삿 3:24; 삼상 24:3; 사 7:20).
“실로(hloyv)가 오시기까지”는 <성경> 전체적으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분분했으면, ‘웨스터만’(Westermann)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서조차도 해석 상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 약 30마일 지점의 ‘에브라임’ 경내(境內)에 위치해 있던 성읍이며, 주로 종교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군사 작전기지는 부차적이었다. 그러나 ‘실로’가 여기서 이 성읍을 의미하는지 또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확정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 구절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라 할지라도 <신약> 어디에도 이에 대한 암시가 없습니다. 이 구절이 어차피 ‘유다’에 대한 예언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만치 오히려 ‘메시야’의 모형인 ‘다윗’에 관한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로’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네 가지 가능한 추론이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 ‘실로’의 자음(字音)이 ‘아카드’어 ‘셀루’(顧問, counselor)와 연관 지우려는 시도가 그것입니다.
둘째, ‘실로’를 지명(地名)으로 간주하여 “‘실로’가 올 때까지”(until shiloh comes)로 번역하는 것입니다(KJV, NASB 등). 또는 “그(유다-다윗)가 ‘실로’에 올 때까지”로 번역하는 것입니다(NIV). 이 경우 예언이 의미하는 바는, ‘유다’ 지파가 자신의 경내를 넘어 세력을 확장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셋째, 이 해석은 <칠십인 역>이나 <탈굼> 등과 같은 고대 역본들에서 보여주는 것으로서, <마소라> 본문에 이르러 일부 수정을 꾀하고 있습니다. 즉 ‘실로’가 의미하는 바를 “그것이 속하는 자에게”로 보고, “그가 자기 자신의 것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until he comes into his own) 또는 “그가 그것이 속한 자에게 올 때까지”(until he comes to whom it belongs)로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쿰란>에서는 이 구절을 장차 올 ‘다윗’의 후손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참고. 겔 21:27).
넷째, ‘쉴로’를 구성하고 있는 자음(字音)을 ‘쉐이’와 ‘로’로 양분(兩分)하여, “조공(朝貢)이 그에게 전해지기까지”라고 보는 입장입니다(NRSV 등).
이들 네 해석 중 어떤 입장을 받아들이든, 한 가지 어렴풋하게나마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사실은 ‘다윗’ 왕조의 출현과 이스라엘 제국의 성립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차적인 성취가 ‘다윗’ 왕국의 출현에서 이루어졌다면 궁극적인 성취는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백성이 그에게 순종하리로다”에서 “백성”이 복수형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를 뛰어넘는 모든 열방을 의미하는 표현일 것입니다(참고. 17:16; 출 15:16; 신 32:8).
‘유다’에 대한 이미지는 다시 한 번 바뀌고 있습니다. 처음 두 번의 것과는 다소 대조적인 느낌을 주는 “당나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11절)
“사사 시대”에 당나귀는 타는 말이나 노새 등을 의미합니다(참고. 삿 10:4; 12:14). <스가랴>는 예루살렘 왕의 행차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여기서 선지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왕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그 땅의 풍요로움입니다. 그 땅이 먹을 것으로 풍성한 나머지 그 땅의 지도자는 더 이상 자기 나귀에게 먹일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그 날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에서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첩자들이 보고한 바대로(민 13:22-24), ‘유다’ 지파가 차지하게 될 땅은 그처럼 포도를 재배하기에는 탁월한 곳이 될 것입니다.
11절 후반의 노래,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또한 그 땅의 풍요로움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그 땅의 소산 즉 포도 수확이 너무 많아 포도주를 짜기 위해 포도를 밟은 자들의 옷에 단순히 포도즙이 묻을 정도가 아니라(참고. 사 63:1-3), 그들의 옷이 포도즙으로 완전히 젖게 될 것이라는 상징인 것입니다. 혹은 포도주로 옷 씻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포도주의 소산이 넘치고 넘친다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 전체적으로 미래의 축복의 황금시대는 포도 등을 포함한 온갖 곡식의 풍성한 수확과 연결되고 있습니다(참고. 레 26:5; 시 72:16; 사 25:6; 욜 2:24; 암 9:13). 이 구절 또한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한 상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다’에 대한 예언은 그의 외모에 대한 이미지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12절)
지도자의 눈과 이를 각기 포도주와 우유로 그리고 있는데, 그의 준수함이나 아름다움과 관련한 이미지일 것입니다(참고. 삼상 9:2; 16:2). 하지만 이 구절 역시 왕의 통치 하에 누리게 될 풍요로움-많은 포도주와 우유-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예. 출 3:8, 17; 민 13:27; 신 6:3). ‘아랍’ 잠언에도, “포도주로 인하여 붉게 되다”를 부유함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우유와 포도나무로 풍요로웠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습니다(사 7:21-23).
스불론. <창세기>에서 ‘스불론’과 ‘잇사갈’를 언급할 때, ‘잇사갈’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스불론’이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13절)
‘스불론’에 대한 묘사 역시 다른 형제들의 경우처럼 짐승에 관한 상징을 동원해서 언어의 유희를 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불론’은 ‘자발’(lb'z;)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높은 거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30:20). 이 단어를 짐승에 대한 비유로 연결시키려 한다면, ‘딜만’(Dillmann)이 묘사한 바처럼, ‘스불론’의 모습은 사람이나 짐승이 높은 데로 내려 앉아 그 얼굴은 바다를 바라보며 등은 ‘시돈’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거주하다”(@k'v, 사칸)를 짐승이 거주하다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신 33:20; 욥 37:8; 사 13:21).
역사가들은 ‘스불론’에 관한 묘사 중에서, 그가 “해변에 거주한다”는 것이나 “그곳이 배 매는 해변”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어려움을 토로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에 따르면(수 19:10-16), 이 지파는 해변이 아니라 내륙 지역을 할당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도(신 33:19) ‘스불론’과 ‘잇사갈’이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라”고 언급함으로써, 이들 지파가 해변 가에 거주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스불론’ 지파는 바다로 진출했거나, 지파 중의 일부가 바다 무역을 통해서 ‘페니키아’ 족속에 고용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본문이나 <신명기>(33:18-20)에서 말하는 거주는 영구적인 정착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거주하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베두인 족속처럼) 천막 안에 거주하다”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예. 9:27; 16:12; 25:18), “구름이 장막이나 산 정상 위에 내려 앉다”는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예. 출 24:16; 사 8:18).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하는 거주는 영구적인 정착이 아니라 일시적인 거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시돈’은 한 지역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페니키아’ 전체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경계가 시돈까지”라는 말도 이 지파가 ‘시돈’도 차지했다기보다는 지파의 경계가 ‘시돈’까지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이 지파의 거주가 ‘페니키아’ 해안 근처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잇사갈. ‘잇사갈’에 대한 예언은 상대적으로 분명해 보입니다. ‘야곱’은 이 지파가 땅의 비옥한 곳에 거주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의 이웃 즉 ‘가나안’ 족속의 노예로 살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14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14-15절)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특히 구체적인 역사에서 이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이곳에서도 다른 지파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짐승에 대한 상징이 또 등장하고 있습니다. “건장한 당나귀”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강한 뼈(!r,G, 게렘)를 지닌 당나귀”란 뜻으로, 이 역시 지파의 이름에 대한 언어의 유희로 보입니다: 그의 어머니 ‘레아’는 ‘잇사갈’을 “보상” 또는 “댓가”를 뜻하는 단어 ‘사카르’(rk;c)에 연결시킨 바 있습니다(참고. 30:18). 하나님께서 그녀의 억울함을 보상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야곱’은 보다 경멸적인 태도로 ‘잇사갈’을 품군이 아닌 노예로 그리고 있습니다.
“양 우리”(tP;v]m, 미쉬파트)는 본문과 <사사기>(5:16)에서 단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로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자들은 “경계”, “울타리” 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당나귀가 양의 울타리 사이에 앉아 있는” 상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알 길은 없습니다.
이 지파가 거주하게 될 땅은 “보기 좋고 아름다운 토지와 쉴 곳”으로서, 추측건대 ‘갈릴리’ 호수 남서 지역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수 19:17-24). 그리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다”는 표현은 <출애굽>에서 ‘이집트’의 압제 아래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묘사하면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출 1:11; 2:11; 시 81:6).
과연 ‘잇사갈’ 지파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와 같은 노예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에 보낸 ‘메기도’ 왕의 한 서신에 따르면, “슈넨 지역에서 부역을 감당하고 있는 야부와 누립다 출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슈넨’은 ‘잇사갈’의 땅의 일부입니다(수 19:18). 그리고 ‘야부’는 인접한 ‘스불론’의 땅입니다(수 19:12).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에 근거해서, 혹자는 일단(一團)의 ‘스불론’ 사람들이 ‘이스르엘’ 평원의 동쪽 지역으로 와서 점령해 살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단. ‘단’은 ‘야곱’의 두 아내가 아닌 시녀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역시 다른 지파에서 보듯이, 그에 대한 예언도 지파의 이름과 관련한 언어의 유희를 포함하고 있으며(16절), 짐승에 대한 비유 또한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17절).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예언의 말미에 “주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하필 이곳에서 “주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으며, 과연 이것이 ‘단’을 향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16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6-18절)
‘단’(@D)의 이름은 “심판”을 뜻하는 단어 ‘딘’(@yD)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런 점에서 “그가 백성을 심판하리라”는 예언은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라헬’이 그의 출생 시에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시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30:6). 그렇다면 그가 심판할 “그의 백성”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혹자는 ‘단’ 지파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는 이스라엘로 간주합니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이는 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는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근거에서입니다(참고. 신 32:36; 시 135:14; 시 72:2). 다시 말하자면, ‘단’의 승리로 이스라엘 전체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단’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되”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힐 것이라는 언급이 다소 당혹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단’의 후손은 항상 이스라엘의 일부로 인정받아온 터에 굳이 ‘야곱’이 그 사실을 언급할 필요는 무엇인가? 혹시나 이 자파가 다른 지파들에 비해서 그 힘이나 세력이 약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사사기>는 이 지파가 자신의 원래 소유였던 ‘가나안’의 남서 지역을 떠나 북쪽으로 이주를 강요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단’ 지파의 승리는 다른 큰 지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전체에 큰 유익을 끼치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작지만 큰 힘을 지닌 ‘단’에 대한 비유로 “뱀과 독사”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치명적인 독을 지는 이들 앞에서는 아무리 큰 짐승이라 할지라도 맥없이 쓰러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의 다리를 물러 쓰러뜨리는 일쯤은 대수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필 ‘단’을 “독사”로 비유하고 있는 것일까? ‘야곱’의 예언은 거의 대부분 ‘가나안’ 정착 시기 즉 <사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때, ‘단’에 관한 예언 역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탈굼>은 “독사”가 곧 ‘삼손’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중세의 ‘유대’ 학자들도 대부분 <탈굼>의 이와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삼손’은 자신이 가진 힘과 이런 저런 계책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블레셋’을 쳐부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참고. 삿 13-16). 훗날 이 작은 지파는 북쪽으로 이주하여 ‘라이스’에 정착하게 됩니다(삿 17-18). <사사기>에서 ‘단’ 지파의 역할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학자들은 ‘단’에 관한 본문의 예언을 ‘삼손’과 그의 지파와 연계해서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 주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기는 합니다만, 본문의 예언을 <사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삼손’의 행적과 연계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는 ‘야곱’ 자신의 일인칭 예언이자 기대를 담은 기도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를 사용하고 있는 마지막 본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도문이 왜 느닷없이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바벨론 유수”나 그 이후 이후에 이루어진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보기도 합니다.
이 견해가 사실을 반영하든 그렇지 않든 과연 이 기도문이 현재의 본문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야곱’은 이 지파가 곧 겪게 될 어려운 시기를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이 지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15:11-12). ‘삼손’의 영웅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단’ 지파는 자신들이 부여받았던 기업을 떠나 북쪽으로 밀려날 운명을 곧 맞이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은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쇠락하고 타락해 가는 시대였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야곱’의 예언과 기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갓.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갓’에 관한 예언 역시 하나의 말장난입니다. 이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히브리 단어 중 네 개가 동일한 두 자음(子音) ‘가드’(dG)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갓(dG)은 군대(dWdG, 게두드)의 추격(dWG, 구드)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dWG, 구드)하리로다(19절)
지리적으로 ‘갓’이 차지할 지역은 ‘요단’ 동편 즉 ‘암만’과 ‘요단’ 강 사이로서(참고. 민 32; 수 13:24-28), 적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항상 최전방을 담당했던 지파가 될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은 바로 이점을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매 전쟁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것이라는 점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늘 승리로 끝나게 될 것임을 후반 절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기>에서도 ‘갓’ 지파의 군사적 위용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참고. 대상 5:18; 12:8).
아셀. ‘아셀’은 ‘실바’의 두 번째 아들로서,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레아’가 그의 탄생을 “기뻐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야곱’은 지파의 이름에 걸 맞는 예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20절)
이 지파가 누리게 될 풍요로운 삶을 예고해 주는 듯합니다. 이 지파가 거주하게 될 땅은 ‘갈멜’ 지역으로부터 북쪽 땅을 가로지르는 비옥한 토지가 될 것입니다(수 19:24-31; 신 33:24-25). 당연히 그들에게 먹을 것이 풍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파는 정착 초기부터 ‘가나안’ 족속이나 ‘블레셋’ 족속과 더불어 살았으며, 당연히 이들과는 무역을 통해서 왕래가 잦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의 수라상”이 의미하는 바도 이들 이방 왕들에게 이와 같은 진미들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아셋’을 향한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또는 질책으로 보아야 할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납달리. ‘납달리’는 ‘빌하’의 두 번째 아들입니다(30:7-8). 이 지파가 거주하게 될 땅은 ‘갈릴리’ 호수 주변의 ‘요르단’ 계곡 서북쪽 지역입니다.(수 19:32-39). 이 지파에 대한 예언은 그 자체로서 하등 복잡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만, 이 간단한 구절을 놓고 적어도 세 가지 다른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21절)
‘납달리’에 대한 예언에서 다시 짐승에 대한 비유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암사슴”이 그것입니다. “암사슴”(hl;Y;a, 아이얄라)은 목이나 발 등의 아름다운 자태로 익히 알려져 있으며, <성경>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잠 5:19; 삼하 22:34). 하지만 <칠십인역>이나 일부 번역본에서 이 단어를 “상수리나무”를 뜻하는 ‘엘로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하반절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21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는 Wenham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1).
우리가 <한글 성경>의 번역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이 구절의 전반부에 대한 가능한 해석은 ‘납달리’가 아름다운 새끼를 낳는 자유로운 암사슴이 정도가 될 것입니다. 나중에 이 암사슴은 자신의 자유를 보다 정착된 생활 스타일과 맞바꾸게 될 것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이 지파는 광야 유목 생활을 접고 ‘하솔’과 같은 마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이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편 가능한 해석은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이 지파가 ‘가나안’의 생활 방식에 순응해 갔다는 비난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참고 삿 1:33). 따라서 앞선 ‘앗셀’ 지파의 경우처럼(20절), 이 구절은 칭찬이거나 또는 가벼운 질책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 ‘요셉’에 대한 예언 또는 축복은 ‘야곱’의 예언 중 가장 길고 복잡합니다. 그래서인지 학자들에게 이 부분은 일종의 악몽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갖가지 기발하고 천재적인 해석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 대해서도 Wenham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예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2절‘요셉’을 포도나무 또는 당나귀로 비유함
23-24절‘요셉’의 성공적인 자기 방어
25-26절‘요셉’에 대한 포괄적인 축복
우선 22절은 번역본에 따라 다음 두 가지 다른 번역을 내놓고 있습니다. <탈굼>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은 ‘요셉’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는 번역을 채택하고 있으며, 다른 일부 번역본(JPS, NAB, NIVmg 등)은 ‘요셉’을 “당나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두 번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은 들 망아지, 샘 곁에 있는 들 망아지, 언덕 위에 있는 들 나귀다.
어느 쪽을 택하든 나름대로 해석상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前者)의 번역을 후자(後者)에 비해서 더 선호할 수 있는 근거를 알아 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의인을 “물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하는 일은 <구약>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관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예. 시 1:3; 92:13-15; 렘 17:7-8). 그리고 <창세기>는 ‘야곱’의 자식들 중에서 ‘요셉’을 가장 의로운 아들로 그리고 있으므로, 그를 포도나무로 비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후자의 번역을 선호하는 근거는 “무성한 가지”(또는 들 망아지)를 두 단어의 합성어 즉 ‘벤’(@B)(아이 또는 자손을 의미함) + ‘파라’(hr;P)(풍성하게 열매 맺음)로 해석하는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같은 구절의 마지막 문장도 이와 같은 이미지를 받아들여서,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또는 “들 나귀가 언덕 위에 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 예언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요셉’을 들 망아지로 비유한 것은 그의 아들 ‘에브라임’(!yIr"p]a)에 대한 언어의 유희이거나(참고로 ‘에프라임’은 충성한 결실을 뜻함), 또는 이와 유사한 발음 ‘파라오’에 대한 언어의 유희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파라오’의 후계자가 된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두 절(23-24절)은 ‘요셉’ 지파가 자신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3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23-24절)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학대”와 “적개심”이 <사사기>에서 다루고 있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만(삿 6:3), <구약> 어디에도 그 사건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구절에 대한 해석은 ‘유대’ 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요셉’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숱하게 겪어야 했던 질시나 배척에 관한 비유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중상비방”(重傷誹謗)은 때로 화살에 비유되기도 합니다(렘 9:3, 8; 잠 25:18; 26:18-19).
이와 관련해서 ‘요셉’의 생애에 대해서 다시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르우벤’이나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축복의 예언 속에서도 그들의 생애에 대해서 49장 벽두서부터 비교적 길게 다룰 필요가 있었다면(참고. 1-3절), 이곳 예언의 말미에 ‘요셉’에 관해서 긴 지면을 할애한다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적개심을 가지다”는 “복수하다”는 의미로서 이곳과 50:15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24절의 요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요셉’에 대한 공격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모호함이 있다 하겠는데, 이는 이 노래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그렇게 흔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활은 굳세며
그의 손과 팔은 민첩할 것이라
이와 같은 해석은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서, 드러내고 있는 이미지는 ‘요셉’이 그의 적들을 맞아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이미지가 그런대로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만, <창세기> 안에서 ‘요셉’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근거 없는 비난이나 공격에 대해서 이처럼 민첩하게 대응하고 있는 장면은 찾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 즉 ‘요셉’은 괴로움을 당하나 정작 그를 괴롭히는 자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자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다 적절한 이미지는 이 문장 속의 대명사 “그”가 ‘요셉’이 아니라 반대로 그를 공격하고 있는 궁수(弓手)들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활이 굳세다”는 그 궁수의 지치지 않는 용기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이 그 유연함을 잃다”로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즉 활이 그 탄력을 잃을 정도로 공격이 치열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초기 <칠십인역>에서도 활은 ‘요셉’의 활이 아니라 그의 대적자들의 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활은 단단해져 부러져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든, 이곳에서도 ‘요셉’의 이름에 대한 언어의 유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지파에서 이와 같은 단어의 유희를 발쉽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참고. 8, 13, 16, 19절), ‘요셉’에 대한 예언에서는 간과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민첩하다”의 발음이 ‘요셉’과 비슷하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24절 하반에 등장하는 “야곱의 전능자”는 오랜 전부터 사용해 왔던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참고. 시 132:2, 5; 사 49:26; 60:16), 이와 곧바로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호칭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는 다소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야곱의 전능자”에 대한 시적 유사반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개역성경>과 <개역개정성경>만 해도 번역이 전혀 다릅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개역>)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개역개정>)
우리가 어떤 번역을 취하든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는 서로 다른 두 호칭 즉 “이스라엘의 반석”(삼하 23:3; 사 30:29)과 “이스라엘의 목자”(시 80:1)를 합성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편으로는 이 표현은 ‘벧엘’에서 ‘야곱’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그가 ‘하란’으로부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를 인도하고 보호해주었던 하나님을 기념하여 ‘벧엘’에 세운 기념비를 세운 적이 있습니다(28:10-22; 35:1-15).
25-26절은 ‘요셉’에 관한 마지막 축복의 예언으로서, 내용상 앞선 두 절(23-24절)의 반복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25-26절)
25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두 호칭, “네 아버지의 하나님”과 “전능자”(yD'v, 샤다이)는 오래전부터 사용해오던 “전능자 하나님”(엘 샤다이)를 시적 유사반복을 위해서 두 행에 걸쳐서 분리해서 부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능자 하나님”을 두 행으로 분리해서 부르고 있는 곳은 본문 외에도 몇 번 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참고. 민 24:4, 16; 욥 8:3, 5).
<창세기>는 “전능자 하나님”을 ‘야곱’의 생애와 관련해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데(참고. 28:3; 35:11; 43:14; 48:3), 이곳에서 ‘야곱’의 축복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와 연계해서 사용하고 있는 점은 나름대로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축복”은 족장 언약의 핵심 단어로서, <창세기>에서만 무려 88여 회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두 절은 마치 불꽃놀이의 대미(大尾)를 보는 것처럼 “축복”과 관련한 단어의 어근을 여섯 번이나 펼쳐 드러내면서(동사 한 번, 명사 다섯 번), ‘야곱’의 축복은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축복은 그동안 ‘야곱’이 경험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고 초월하는 그런 것들이 될 것입니다.
축복의 내용은 인간의 그 모든 활동 영역를 망라하는 것으로서, 이 모두 하나님의 호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하늘”(!yIm'v, 샤마임)로부터 비가 내리고, “깊은 샘”(!/hT, 테훔)에서 솟아나는 물은 땅을 촉촉이 적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할 것이며(3:17-19), 여인의 “태”(!j'r, 라함)와 “가슴”(dv, 샤다임)은 다산(多産)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대조 3:16). 위에서 보듯이 흥미롭게도 25절에서 풍요와 다산의 축복과 관련해서 동원하고 있는 네 단어, “하늘”과 “깊은 샘”과 “태”(자궁)와 “젖먹이”(유방)는 모두 두운법(頭韻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서 화자는 남성과 여성의 활동 영역을 균형 있게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녀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완벽하고 총체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애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에 집착하며 살아온 ‘야곱’이 이제 이 장면에서 자신이 누렸던 그 축복에 대해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토록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제 아들 ‘요셉’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는 ‘요셉’을 “형제들 중 뛰어난 자”, 즉 구별된 자(ryzIn, 나시르)로 부르고 있습니다. 유사한 표현이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신 33:16; 애 4:7).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요셉’ 지파에서 왕이 배출된 적은 없으므로, 따라서 ‘요셉’을 “형제들 중 뛰어난 자”로 부르는 것은 ‘요셉’ 개인에 대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난 자였습니다. ‘이집트’에서만 하더라도 그는 분명 그 땅의 통치자였습니다.
베냐민. 이제 마지막으로, 간략하나마 막내아들 ‘베냐민’에 관한 예언입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27절)
하지만 그에 관한 예언은 그동안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알고 있는 ‘베냐민’에 관한 내용과 비교해 볼 때 놀라울 정도의 대조적인 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이복형들 틈에서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했던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그를 지금 이곳에서 “물어뜯는 이리”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사기>에서 그리고 있는 ‘베냐민’ 지파의 군사적 행동을 예견한 듯한 예언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기>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사 ‘예후’가 이스라엘을 ‘모압’족으로부터 구원하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으며(삿 3:15-30), 같은 책에서 ‘시세라’와의 전투에 ‘베냐민’ 지파가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가 하면(삿 5:14), ‘기브아’에서는 오히려 다른 지파들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이스라엘을 내전 상태로 몰아가기도 했습니다(삿 19-21).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베냐민’ 출신입니다(삼상 10-14). 하지만 이 구절에서 왕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이 구절의 전승은 아마도 이스라엘 왕국 출현보다 더 이전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화자 자신의 추가적인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야곱’의 언약으로서, 내용인 즉은 미래에 관한 ‘야곱’의 예언을 재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28절)
즉 ‘야곱’은 처음부터 자식들이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는 말로 임종 예언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1절). 축복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열두 지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임종과 유언. 49장의 나머지 다섯 절(29-33절)은 ‘야곱’의 임종과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입니다. 유언의 주된 관심사는 “그 땅”에 관한 것입니다.
29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29-32절)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서 예언했던 그가 이제 다시 한 번 자신의 매장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매장지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이로써 세 번째입니다(47:29-31; 48:21-22).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가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확신시켜주신 바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46:4). 이 약속의 절반은 이미 성취되었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 즉 ‘요셉’이 이제 곧 자신의 눈을 감길 것인 즉, 남은 관심사는 그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족장의 매장지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법적 권리를 강조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 23:17-20; 25:9-10; 50:13).
하지만 ‘야곱’이 그곳에 묻히고 싶은 것은 단순히 법적인 권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감상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즉 그곳에는 그의 아내 ‘레아’가 묻혀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31절하). ‘레아’는 여섯 아들의 어머니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이 이곳에 묻혀있다는 말은 앞 이야기를 통해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만, ‘레아’와 ‘리브가’도 함께 묻혀있다는 언급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리브가’와 ‘레아’는 그들 생전에 가족 구성원간의 불화를 조장했던 인물이었는데도, ‘야곱’은 죽어 그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소회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는 가족 구성원간의 용서와 화해가 없이는 불가능함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장지에 관한 유언을 끝으로 ‘야곱’은 숨을 거둡니다. 화자는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언어의 유희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 발을 침상에) 모으다”(#s'a, 아사프)는 ‘요셉’에 대한 언어의 유희입니다.
‘요셉’과 ‘야곱’의 이별 장면은 <구약> 그 어디에도 비견되지 않은 극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야곱 이야기>의 주된 흐름으로 일관해 왔던 두 사람의 간의 결속과 관계가 마침내 종말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이제 곧 열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보내면서 애곡하고 애통하는 장면은 단순히 이별을 슬퍼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약속, 즉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6:4)라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앞으로 다른 모든 약속들도 분명하게 성취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3. 장례와 애곡(50:2-3)
<구약>에서 죽은 자의 시신을 방부 처리를 하는 이야기는 ‘야곱’과 ‘요셉’의 경우뿐입니다(26절). 그만큼 이 두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가 각별하다 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길고 복잡했습니다. 뇌와 내장과 피를 모두 들어내고, 그 속에 향을 넣고, 시신을 말린 다음, 헝겊이나 세마포를 쌉니다. 통상 이 과정은 일주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2그 수종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2-3절)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 일이 사십일이나 걸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이후 칠십 일 동안 애곡 기간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백십 일이 걸린 셈인데, 연속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아론’과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이 삼십일을 애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민 20:29; 신 34:8), 사십일은 칠십일 속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4. 왕의 윤허(50:4-6)
‘이집트’의 장례 관례에 따른 모든 필요한 절차를 다 치른 후, ‘요셉’은 이제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47:29-31), 즉 그를 ‘가나안’에 장사지내기 위한 절차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4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4-6절)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흥미롭게도 ‘요셉’의 태도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전에 그의 가족이 ‘고센’ 땅에 정착하는 문제를 놓고 ‘바로’ 왕과 직접 대화하고 요청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매우 정중하게, 그것도 직소(直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혹시 상중(喪中)이라 왕에게 직접 나가지 못하고 대신 사람을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에게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하고 애원하는 모습에서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여나 왕의 심기를 다치게 할까 보아서 그에게 전하는 말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즉 ‘야곱’이 그에게 당부했던 내용 중에서, “나를 애굽에서 매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47:30)는 말은 의도적으로 슬쩍 빼버립니다. 행여나 ‘이집트’에 대한 ‘요셉’ 자신의 충성심이나 헌신도를 의심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신에 그는 ‘야곱’이 이전에 묘지를 이미 마련해두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장사지낸 후에 자신은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했던 그렇지 않던 그가 사용하고 용어, “올라가다”(hl;[, 알라)는 이곳 50장에서는 아주 핵심적인 단어로서(6, 7, 9, 14, 24-25절),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의 탈출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하겠습니다(예. 출 1:10). ‘야곱’이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에 묻히고 싶다고 고집한 것도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나안’으로 향으로 ‘야곱’의 장례 행렬은 이스라엘의 미래 “출애굽” 사건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50:24-25; 출 13:19).
5. 야곱의 매장지(50:7-14)
장례 행렬은 귀인의 장례답게 장엄하고 거창합니다. 마치 죽은 왕을 위한 국장(國葬)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장례식 중에서 가장 거창한 것입니다. 하기야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창세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로서의 그의 위상을 놓고 볼 때, 이와 같은 대우는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7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0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2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7-14절)
그를 위하여 동원되고 있는 사람들과 가축들과 그리고 군마와 마병들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의 모든 신하”; “바로 궁의 원로들”; “애굽의 모든 원로”; “요셉의 온 형제들과 그의 집”; “병거와 기병.” 흥미롭게도 이든 대부분의 단어들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예. 출 10:7; 11:3; 10:9-10, 24; 14:9, 17-20; 12:38). 다만 한 가지 지금과 그 때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온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렬을 돕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어린 아이들은 여전히 ‘고센’ 땅에 남아 ‘이집트’의 보호 아래 있지만, 그날에는 이 상황이 완전히 역전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온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탈출을 반대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녀들이 함께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요셉’은 약속대로 장례 후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옵니다.
6. 요셉의 용서(50:15-21)
이어지는 장면은 <요셉 이야기>의 ‘휘날레’라고 부르는데, 내용으로 볼 때 그렇게 불러도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야곱 이야기>를 일관되게 관통해 왔던 형제들의 갈등과 긴장이 마침내 이곳에서 완전히 해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15-21절)
이 대목은 <야곱 이야기>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였던 “용서”와 “대화합”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요셉’은 처음부터(45장 이후부터)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를 원했습니다만, 형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죄책감으로 늘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죽고 난 지금, 그들은 동생이 복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죄책감은 두려움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지난 날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아버지 ‘이삭’이 죽기를 기다렸던 것처럼(참고. 27:41), ‘요셉’ 역시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이곳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형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바 있기도 합니다(42:21-22).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가 죽고 난 지금 그들의 처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요셉’의 용서를 받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필사적이며 처절합니다. 우선 그들은 직접 동생에게 찾아가 자비를 구하기보다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자신들의 심정을 전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을 들먹입니다. 즉 아버지가 죽기 전에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을 용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용서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면서, <성경>에서 죄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핵심 단어들을 모두 동원하고 있습니다: “허물”; “죄”; “악.”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으로 하여금 그들 아버지의 하나님처럼 행동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형들의 간청에 대한 ‘요셉’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울었다”입니다. 그가 운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만(참고. 42:24; 43:30; 45:14-15), 지금 흘리는 눈물에 무슨 각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형들이 중간에 사람을 넣어 용서를 구하고 있기 때문일까? 형들이 가지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가 복수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버지의 유언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지난 시절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기억이 살아났기 때문일까? 그 형들이 지금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지나간 그 모진 세월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 눈물은 ‘요셉’이 아니라 이들 형들이 흘려야 할 눈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회오(悔悟)와 참회의 눈물 말입니다.
보냈던 사람이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형들은 이제 ‘요셉’ 앞에 직접 나아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왕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18절).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참고. 37:7, 9, 42:6; 43:26, 28). ‘유다’는 처음 ‘요셉’ 앞에 끌려 왔을 때,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44:16).
‘요셉’은 다시 한 번 이들을 안심시키며, 이전에 그가 처음 자신을 드러내면서 했던 말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참고. 45:5-11). 쓸데없는 걱정 말라는 것이지요. ‘야곱’이 ‘이집트’에 오기 전에 그들에게 했던 약속을 이번에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심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 말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까지 맡아 길러주겠다고 말합니다!
이제 마침내 이야기는 결말에 이릅니다. 내용은 ‘요셉’의 여생과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언급으로 <창세기>는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대단원의 결말이자, 미완의 결말이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서곡이기도 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22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22-26절)
7. 요셉의 최후(50:22-26)
<창세기>의 마지막 단락은 ‘요셉’의 여생에 관한 간략한 기록과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에 대한 언급으로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먼저 ‘요셉’의 일생에 관한 간략한 기술은 그 형식에 있어 ‘야곱’에 관한 기술과 짝을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22절)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37:1)
이렇게 볼 때 22절은 우연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아주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편집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나이 “백십 세”는 이집트에서는 이상적인 나이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라는 표현은 단순히 ‘요셉’에 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전체 족장 이야기의 마무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 장면은 모든 가족의 화해와 타협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불화 가운데 헤어져야 했으며,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역시 평생을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가족 간의 불화와 분열로 말할 것 같으면 앞의 두 경우보다 훨씬 더 심했을 텐데도, 결국에는 하나의 가족으로 연합하고 일치하여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제 삼자의 중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해자의 뉘우침과 피해자의 용서를 통해서 내적 변화가 이 모든 연합과 일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도 백십 세까지 살았습니다(수 24:29). 혹자는 ‘요셉’의 나이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즉 각 족장의 나이를 추적해 보면 흥미로운 한 가지 패턴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브라함’의 나이는 175세(= 7 x 52), ‘이삭’은 187세(= 5 x 62), ‘야곱’은 147세(= 3 x 72), 그리고 ‘요셉’은 110세(= 1 x (52 + 62 + 72))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은 (7, 5, 3, 1)로 이루어진 패턴의 계승자이자, (52 + 62 + 72)의 합에 해당하는 나이를 살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숫자가 어떤 의미를 갖든 손자와 증손자를 보면서 오래 살았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함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23절)
다만 여기서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가 의미하는 바는 ‘에브라임’을 포함한 3대, 그러니까 ‘요셉’에게는 증손자까지를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요셉’의 스라에서 양육되었다는 말은 ‘요셉’의 양자로 입양되었음을 의미합니다(참고. 30:3). ‘마길’은 ‘므낫세’ 지파의 일원으로서(대상 7:14-17), <사사기>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지파이기도 합니다(삿 5:14).
한 족장의 최후의 관심사는 항상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있었습니다. ‘요셉’ 역시 그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약속의 성취에 관한 언급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음을 봅니다(참고. 24:1-7; 28:1-4; 47:29-31)
24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4-25절)
이 두 구절의 기능은 이중적입니다. 한 편으로 <족장 이야기>의 주제를 마감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남은 후손이 그의 유해를 훗날 그 땅에 묻어달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있습니다(참고. 출 13:19). 여기서 “그의 형제들”이나 “이스라엘 자손”은 넓은 의미에서 ‘요셉’의 친척들이거나 후손들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형들이 그보다 더 오래 살 수는 없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최종 구절은 다른 <족장 이야기>의 마지막과 특이하게도 다른 장면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처럼 남은 자들이 유언대로 약속을 실천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후손들이 그의 유골을 이집트에서 입관하였다는 언급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26절)
여기서 관(棺)에 대한 언급은 <구약>을 통 털어 이곳이 유일한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야기는 이것으로 결말이자 동시에 미완(未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장면은 ‘요셉’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출 1:3).
교훈과 적용
1. 임종 유언(1)-위대한 유산
어느 새 내 나이 환갑도 훌쩍 지나 예순 셋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들어 부쩍 은퇴 후의 삶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한 번은 먼저 은퇴한 교수 한 분을 우연히 만나, 퇴직을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물었더니 지금부터 잘 노는 연습부터 하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다른 취미나 특기가 없는 나로서는 이분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장수(長壽)가 축복이라고 합니다만, 나로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장수하면 뭐합니까! 딱히 소일거리가 없고, 또 있다 해도 함께 할 가까운 친구가 없다면 장수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금부터 가볍게라도 만나 시간 보낼 수 있는 친구관계라도 많이 만들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만, 생각대로 될지 의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어왔습니다만, 친구로서 관계 맺은 경우는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대학교 교수라는 직업이 사람들을 만나고 상대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만, 주로 만나는 대상은 학생들로서 그들은 가르치는 대상이었지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집사로 지내던 시절, 남전도회 활동 등을 통해서 믿음의 친구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내 관심사는 항상 청년이나 학생이었고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동료 집사님들이나 장로님들과의 교제는 자연 소원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난 뒤에는 교회에서 나는 더욱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역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교인들과 친구로서 교제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점차 내 혼자만의 세계에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내가 은퇴 이후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요즘 들어 하루에 적어도 한 두 번은 꼭 이런 생각에 빠져 지내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무엇을 하며 여생을 보내야 하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성경>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사도가 처형당하기 전에 마지막 2년을 ‘로마’에 있는 한 집에 가택 연금 상태로 있으면서 어떻게 여생을 보냈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가 머무는 곳이 교회였고, 그 자신이 곧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 이거야! 여기에 길이 있었구나. 나도 여생을 이렇게 보내면 되겠구나.”
나는 지금 마음에도 없는 괜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거룩한 척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정말 이 두 구절에서 큰 감명과 위안을 받았습니다. 나는 휴대폰 메모 수첩 속에 기도 제목 네 가지를 입력해 두었습니다. 이 중 첫 번째가 <사도행전>의 마지막 두 구절로부터 영감(靈感)받은 것입니다. 즉 내가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내 집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교회가 되고, 내가 곧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일이 내 소명이자 내가 받은 은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야곱의 여생. ‘고센’에서 보낸 ‘야곱’의 여생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30 년 동안 ‘가나안’과 ‘하란’에서 살았던 그 치열했던 세월에 비교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속이고, 속고, 도망치고, 쫓고,... 경계심과 긴장을 한 번도 늦출 새도 없이 살아온 그가 이처럼 편안한 나날을 보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터이니까 말입니다. 주변에 그를 속이고 괴롭히는 자도 없고, 아들과 딸들, 손자와 손녀들이 한 마을에 모여 풍요롭고,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특별히 바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은퇴 이후의 삶이 모두 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주변에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없다는 것만 빼고 나면 완벽한 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인은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주님, 그저 이 행복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 만을 바랄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여생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면, 그를 “살아있는 교회”로 부르기에는 어딘가 미진(未盡)한 부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법! 그의 육체는 이제 몰라볼 정도로 수척하고 쇠약해져서 침상에서 앉고 서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병까지 얻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수도(首都) ‘라암셋’에 있는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소식을 전하기에 이릅니다. 이번에는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이전에 ‘야곱’이 이들 손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요셉’이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은 아마 이번 방문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맞이하는 이스라엘. 주변에 근심스런 눈빛으로 둘러 앉아 있는 자식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안간 힘을 쓰며 겨우 일어나 앉습니다. 일어나 앉기는 했지만 손과 발은 떨리고 있으며, 눈마저 쇠약해져 바로 앞에 있는 사물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더 이상 이 노인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물려줄 유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물려줄 유산은 대기업의 회장님이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회사가 아닙니다.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물려주는 파탄 직전의 나라도 아닙니다. 대형교회 목사님이 그의 아들 목사에게 물려주는 담임목회자 자리도 아닙니다. ‘야곱’이 남겨줄 유산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는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의 순서를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야곱의 유산. 왜 이 장면이 ‘야곱’의 생애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란 어떤 교회를 말하는 것일까? 교회는 실은 아무 수식어가 필요 없는 단어입니다. 그 모든 좋은 수식어를 다 함축하고 있는 존재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교회”를 굳이 정의해 보자면, 그 반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죽어서 말하지 못하는 교회”의 반대가 “살아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교회”란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야곱’이 마지막 안간 힘을 쏟으며 자식에게 남겨주려는 유산이 무엇이었을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죽으면서 영원히 남겨놓은 한 이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의 이름은 한 나라와 한 민족과 교회의 이름이 되어 그날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야곱’의 혈연의 후손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시 “새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기에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 아닙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래서일까? ‘야곱’은 지금 ‘이스라엘’보다 더 중요한 한 이름,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남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간증은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3절);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11절).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처음 하나님을 입에 올린 것은 앞을 잘 못 보는 아버지를 속일 때였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라”(27:20). ‘야곱’이 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벧엘’에서 꿈을 꾸고 난 후였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이렇게 회고 한 바 있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28:16-17). 그리고 그로부터 두 장(章) 뒤에 아내 ‘라헬’이 자식이 낳지 못하여 그에게 투정을 부리자 화를 불같이 내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30:2).
이처럼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한다 해서, 그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디를 가든 늘 함께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에 더 많이 의존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언제까지 이런 모습, 즉 ‘야곱’으로 살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마침내 변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식에게 들려주고 있는 마지막 고백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의 유산.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물려받은 가장 위대한 유산, 즉 보배는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식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유산인 것이지요.
내 휴대폰 메모 수첩 속에 입력해 둔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바로 이 유산과 관련된 것입니다. 내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남겨놓으신 유산 중에 일억 원의 장학 기금이 있습니다. 평생 정부 도정업(搗精業)을 하시면서 푼푼히 모아두신 것인데, 당신의 고향 출신 자녀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장학금으로 쓰라고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네 형제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지금까지 계속 그 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도 두 아들과 두 며느리와 마주 앉아 내 두 번째 기도제목을 나누려 합니다. 내 아버지 즉 그들의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무엇을 남기셨으며, 나는 또 그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그리고 그들은 또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특별히 물려줄 재산도 없고, 또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기에,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서 선교나 장학 재단을 설립하려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재단 이름도 하나 정해두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유산입니다. 덧붙여 자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기금을 계속 늘리면서 사업을 지속하고 확대해가라는 것입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내가 그들 앞에서 고백할 수 있는 간증은 무엇인가? 우리교회는 미래의 신입회원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으며, 어떻게 나를 본받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이 교회가 계속 존속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이 자랑할 만 한 전통이나 유산은 무엇일까?
2. 임종 유언(II)-위대한 예언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우스>에 ‘테베’(Thebes)의 눈먼 예언자 ‘테레시아스’(Tiresias)가 등장합니다. ‘트로이’에서 고향 ‘이타카’(Ithaca)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는 죽음의 땅에서 ‘테레시아스’를 만나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묻습니다. ‘테레시아스’는 그에게 몇 가지 예언을 들려줍니다. ‘포세이돈’이 ‘폴리페무스’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사실과,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지 말 것과, 태양의 신 ‘헬리오스’(Helios)의 섬에서 그의 짐승들을 먹지 말 것 등입니다.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은 선원들은 모두 전멸하고 오직 ‘오디세우스’만 살아남습니다. ‘테레시아스’의 예언은 적중했으며, 그의 다른 예언들도 모두 적중했습니다. 그는 비록 눈은 멀었지만 일반인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래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미래의 일을 어떻게 그처럼 정확하게 알아맞힐 수 있었을까? 역설적이긴 하지만, 모두가 볼 수 있는 그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전’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전’이란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나는 무엇을 봅니까? 나는 남이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오히려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마음이 너무 많은 일로 분산되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 신화>에 ‘테레시아스’가 있다면, <창세기> 48-49장에는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 역시 인생 만년에 이르렀고, 나이 147에 임종 직전에 와있습니다. 이제 시력(視力)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요셉’이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왔으나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48:10). 직역하자면 그가 두 손자를 알아보는데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 역시 그의 아버지 ‘이삭’의 만년과 너무나 흡사한 과정을 겪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야곱’은 시력은 잃었지만, 시력을 가진 자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미래였습니다. 그도 ‘테레시아스’처럼 미래를 볼 수 있었으며,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고 증거 할 수 있는 예지력(叡智力)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이야기는 ‘야곱’의 위대한 유산에 이어 위대한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의 미래에 관한 예언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야곱’의 예언은 두 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예언의 대상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야곱’의 열두 아들에 관한 긴 신탁(神託)이 49장에,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관한 짧은 신탁이 48장에 각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흔히 이스라엘의 지파 수를 열둘이라고 합니다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열세 지파입니다. ‘요셉’을 포함해서 ‘야곱’의 아들은 모두 열둘입니다만, ‘요셉’ 대신에 그의 두 아들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 자신은 열두 지파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두 아들을 통해서 사실상 모든 명예와 영광을 다 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땅을 기업으로 물러 받은 지파만을 놓고 볼 때는 ‘레위’ 지파가 제외되므로, 지파의 수는 열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할 것입니다. 참고로 ‘레위’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관한 ‘야곱’의 예언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다른 자식들을 위한 예언에 비해 아주 각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할까? 첫째, 그의 예언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축도”(祝禱)라는 점에서 아주 각별합니다. 그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위한 기도 중에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15절).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강력한 믿음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도 ‘야곱’이 믿음으로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11:21상).
둘째, ‘야곱’의 예언은 그 속에 공식 “입양”(入養) 절차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각별합니다: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16절). 여기서 입양이라 함은 아들로 입양한다는 의미이며, 이 절차를 통해서 이들은 정식 상속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절차는 이전에 ‘야곱’이 ‘요셉’에게 이미 약속했던 사항이기도 합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5-6절).
셋째, ‘야곱’의 예언은 축도 속에 “번성”(繁盛)에 관한 약속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합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6절). “번성”은 “족장 언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으며(12:2; 15:5; 17:2; 22:17), ‘아브라함’의 임종 시에 ‘이삭’에게 재확인하셨으며(26:4), 이후 ‘벧엘’에서 ‘야곱’에게 거듭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28:14).
이처럼 ‘요셉’의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축도”와 “입양”과 그리고 “번성”에 대한 약속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역대기>는 이 질문에 대해서 아주 흥미로운 답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역대기>가 선언하고 있는 바는, 즉 ‘요셉’의 두 아들이 ‘야곱’의 장자 ‘르우벤’을 제치고 “장자권”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선언과 부합하는 내용은 <창세기>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고 있는 장면은 ‘이삭’이 장자 ‘에서’를 제치고 둘째 아들 ‘야곱’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전수(傳受)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에브라임이 먼저. 하지만 두 아들 모두가 장자권을 물려받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부분이 ‘야곱’ 예언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요셉’이 두 아들을 눈 먼 아버지에게 데리고 올 때, 그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순서, 즉 큰 아들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 편에,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왼쪽 편에 앉게 합니다. 그의 의도대로라면 ‘야곱’은 양 팔을 곧바로 뻗어 두 아들을 축복해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큰 아들에게 장자권이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팔을 엇갈리게 하여 그의 오른 팔이 ‘에브라임’을 향하게 하고, 왼 팔이 ‘므낫세’를 향하게 하여, 오히려 작은 아들에게 장자권이 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이를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의 기분은 편치 않았으며, 눈 먼 아버지가 실수한 줄 알고 바로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만류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19절).
지금 이 자리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야곱’이 지금 늙은이 특유의 옹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어지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하지요. 아닌 게 아니라 ‘야곱’의 아버지 ‘이삭’도 늘그막에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지 그는 작은 아들 ‘야곱’이 아니라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일견 ‘이삭’의 선택은 지극히 정당해 보입니다. 장자에게 장자권을 주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결과적으로 볼 때, ‘야곱’이나 ‘이삭’은 자신의 뜻을 기어코 관철시키려 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고집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삭’이 큰 아들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이고 외모중심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큰 아들에 대한 편애(偏愛)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가정적이며 나약해 보이는 작은 아들 ‘야곱’보다 남자답고 용맹스러운 큰 아들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고집은 하나님의 예언조차 무시할 정도였습니다. 일찍이 그의 아내 ‘리브가’가 뱃속에 ‘야곱’과 ‘이삭’을 잉태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25: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사코 큰 아들을 선택하려 했으며, 나중에 실수로 ‘야곱’에게 장자권을 물려주고 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와서 울며불며 하소연하자 그에게도 다시 복을 빌어줍니다(27:37-40). 이처럼 ‘이삭’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여 싸우려 했으나 결과는 실패였으며,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야곱’에게 속았다는 충격과 분노뿐이었습니다(참고. 28:33).
‘야곱’이 어찌 이 사건을 기억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적어도 장자 권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으리라는 다짐을 수없이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을까? 당연히 장자 권은 장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택의 순간에 작은 아들에게 장자 권을 빌어줍니다. 하지만 그의 완고함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른 완고함이고 고집불통이었다고 본인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20절). <히브리서>도 같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을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그렇습니다. ‘야곱’의 선택은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젊은 시절의 ‘이삭’은 유순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질은 점차 완고해져갔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나이는 오히려 어려지고 유치해져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야곱’은 인생 대부분을 자신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에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만, 만년(晩年)에 이르러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성숙에 이르게 되고, 임종의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철들자 환갑이라”는 우리 네 경구가 그에게 꼭 들어맞는다 하겠습니다. 내 영혼의 나이는 지금 얼마쯤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로. ‘이삭’이 자기의 뜻을 따라 큰 아들 대신 작은 아들을 선택한 것이나,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큰 아들 대신에 작은 아들을 선택한 것이나, 선택은 선택받는 자의 행위가 하니라 전적으로 선택하는 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아버지의 축복을 원했다면 차라리 형이 먹을 죽 속에 독극물을 넣어 그를 독살해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몰래,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켰습니다. 하나님이 단 한 순간도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는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15-16절상).
그렇습니다. 그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인 즉은 그 모든 일의 깊은 근원에는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나 ‘야곱’이 누구를 더 좋아하든, 어떤 의도이든, 그리고 그 결과가 의도했던 대로 드러나든 않든 상관없이, 그 모든 것들을 합력시켜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됨.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을 물려받았을 때 이처럼 겸손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에브라임’이 형을 제치고 장자권을 받았을 때도 이처럼 겸손했을까요? 두 사람 다 나중 된 자들이 아닙니까! 나중 된 자들이 먼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의 선택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복음일 뿐만 아니라, 그 선택이 나이와 순서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요셉’이 장자라서 대국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장자라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장자였습니까? ‘다윗’은 어떻습니까? ‘르우벤’은 장자라서 큰 축복을 받았습니까? 모두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를 제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은 이 모든 자질구레 한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내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내가 너무 늙어서, 내가 너무 무식해서, 내가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의 선택이 장애를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우습게 아는 교만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3. 임종 유언(III)-위대한 중보
“사제” 또는 “제사장”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는 ‘폰티펙스’(pontifex)인데, 본래 뜻은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잭 헤이포드’,「경배」조이선교회출판부. 112쪽.
사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역할은 정확하게 이와 같은 것입니다. 즉 그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단순히 한 개인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도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출 19:6상).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어주신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 말은 지금 ‘야곱’은 선지자이자, 제사장으로서 아들 ‘요셉’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향한 축복의 예언을 들려주었으니, 이제 ‘요셉’을 포함한 자신의 열두 아들에게도 들려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요셉’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일러두어야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가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가나안’의 ‘세겜’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땅을 특별히 ‘요셉’에게 선물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요셉’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실은 ‘요셉’에게는 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야곱’이 ‘요셉’에게 들려준 말입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21절). 특히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유언은 그가 평생 살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에 관한 위대한 간증이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곱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동행은 중심 사상을 이루고 있음을 압니다. 오래 전 형을 피해 집을 떠나 ‘벧엘’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이 이와 같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28:15).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 ‘하란’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서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하신 말씀도 동일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1:3). 그리고 바로 두 절 뒤에 ‘야곱’ 자신도 그의 두 아내에게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느니라”(31:5). 그리고 ‘세겜’에서 딸 ‘디나’의 일로 온 가족이 큰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식들과 함께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자고 하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35:3).
이처럼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은 공기나 햇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분과의 동행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습관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이 마지막 순간에 자식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48:21). 이 마지막 간증은 간증이라기보다는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원하는 축도나 중보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의 임재를 확인시켜주셨고, ‘야곱’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결코 공허한 약속이 아님을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제 그 체험을 아들에게 전수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요약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1:3).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31:5; 35:3).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48:21).
이들 약속을 이처럼 펼쳐 놓았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해 달리는 열차와도 같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시간의 굴레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마치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나 자동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개개 풍경의 연속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비행기를 타고 있다면 나는 전체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풍경들이 한 폭의 그림 속에 다 들어와 있는 형국인 것이지요.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시간의 창조주께서 시간 밖에 계시므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과연 그분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 끝 날까지 인류와 함께 계실 것인가?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없을까? 이것은 과연 참담한 질문인가?
‘아브라함’이 죽을 때 ‘이삭’이 곁에 있었고, ‘이삭’이 죽을 때 ‘야곱’이 침상 머리에 있었으며, ‘야곱’이 죽을 때는 ‘요셉’이 침상 곁에 있었으며, ‘요셉’이 죽을 때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족장들을 통해 이어갔습니다. 족장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신실하실 수 있도록 힘써 도왔다고 말한다면 참담한 말이 될까요?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는 누가 곁에 있었습니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울’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가 알고 있었던 모르고 있었던 간에 ‘스테반’은 제사장의 직책을 그에게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즉 ‘스테반’은 ‘사울’을 복음의 후계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훗날 ‘사울’은 사도가 되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엘리야’가 죽을 때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뒤를 이어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여줄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세상과 함께 계시도록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교회, 즉 <우리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마 28:19)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있기는 합니다. 나는 빠지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면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는 그 나라에 합당치 못한 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대단히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 열 명 중에 여덟 명 정도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통계 조사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당부와 명령에 대해서 거의 요동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아주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사업가의 좌우명은 이런 것입니다: “줄 돈은 잊어버리고 받을 돈만 기억하자.” 이런 기업가 정신으로 사업을 하면 세상에서는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당대에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많은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해서 소홀히 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난과 욕설을 퍼부어댑니다. “도대체 기업이 사회에 대해서 빚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기업주가 이런 식의 질문을 그가 속한 사회에 대고 던진다면 그는 필경 뭇매를 맞아 맞아 만신창이 될 것이 뻔합니다. 그 기업 제품 불매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입니다. 과연 기업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합니까?
그렇다면 복음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복음에 빚진 자”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말입니까? ‘스데반’이 아닐까요? 신약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너무 많은 빚을 안고 있습니다. 처음 복음의 빛이 이스라엘에 비추었을 때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먼저 이방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교회는 이스라엘에 빚진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이었고, 사도들 역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로 13:8).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9). 나는 누구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기도합시다.
4. 임종 유언(IV)-나중 될 자, 르우벤
나는 여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두 누나와 형님 한 분을 두었으니 남자로 치면 차남인 셈입니다. 여섯 명 중의 넷째 정도 되면 집안에서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인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나는 어릴 적에 장남에 대한 심한 투기와 반항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내 부모님께서 너무 형만 싸고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나 친척들도 항상 내 형에게만 관심을 쏟지 나에게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내 어머니를 부를 때조차도, 장남의 어머니로 부르지 나의 어머니로 부르지 않는 것도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습니다. 장차 애를 낳게 되면 절대 장자는 낳지 않고 차남부터 낳겠다고 말입니다.
장자의 특권이 우리나라에서도 이러 했을진대 이스라엘에서야 오죽 했겠습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적자(嫡子) 중의 적자를 꼽으라면 단연 ‘르우벤’입니다. 그는 ‘야곱’의 첫 번째 아내 ‘레아’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면서, 동시에 열두 아들 중의 장남이기도 합니다. 당시 장남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은 각별했으며, 유산 분배만 하더라도 나머지 형제들이 물려받는 것보다 갑절을 더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직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잘났건 못났건 상관이 없습니다. 이삭’이 그랬고, ‘야곱’도 그랬습니다. 물론 그는 첫째는 아니었습니다만 야비한 속임수로 그것을 형으로부터 탈취했습니다.
출생의 특권. 그리고 이제 ‘르우벤’이 장자(長子)의 특권을 물려받게 될 참입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어떤 모습일지. 설마 빨리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누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방탕한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나누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런 관습법에 의거해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아버지가 죽고 나면 대부분 형에게 유산이 다 돌아갈 터이니, 그전에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미리 챙겨두어야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장자의 특권은 단순히 물질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의 특권은 영적인 특권까지도 망라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자의 영적인 특권을 이스라엘이 이방족속에 대해서 가지는 특권으로까지 확대해석했습니다. 과연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동료 이스라엘이 거절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이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이스라엘은 “먼저 된 자”였으며, 이방인은 “나중 된 자”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택한 족속이었으며, 열방에 대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었습니다(출 19:6).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의 절규를 들어볼까요?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롬 3:1)
장자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이 무엇이냐는 절규입니다. 그는 대답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2)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4-5)
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입니까! 비록 오늘날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불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순전히 혈통에 따른 특권입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그 모든 특권과 약속을 가지고 태어나며, 심지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마저 그들의 혈족입니다. 혈통으로 말하자면 이에 버금가는 혈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독교인 부모를 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모태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나가고,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인 친구들과 교제하며, 기독교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 등 말입니다. 다른 세상적인 축복은 이에 비하면 정말 초라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들 영적 축복은 그 자체로써 영혼의 구원을 담보해 주지는 못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으며,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영원한 저주에 빠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났어도 영생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생을 끝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의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대 교단 중의 하나인 한 장로교단이 2009년 말 현재 전체 280만 교인 중에 대학․청년부 소속 교인이 16만 명 즉 5.8%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유년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그런대로 교회 출석은 빠짐없이 했습니다만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거의 90% 이상이 교회를 떠난 결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나갔다는 한 대학생이 나와 <성경> 공부에서 만나고 있는데, 아직까지 교회의 의미, 교회 출석하는 의미, 더 나아가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아직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출생이나 혈통의 특권은 그 자체로써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함을 반증해 주는 사례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 자체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복음의 능력과는 거리가 한 참 먼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지적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탁월한 인생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무난한 삶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흥분된 삶 말입니다.
상실한 특권. ‘르우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야곱’은 그가 출생의 특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라”(4절). 하지만 그의 출발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형제들을 압도하였다고 ‘야곱’은 말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3절). 슬프게도 그의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이 미약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기막힌 언어의 유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가 이런 식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인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될 정도로 말입니다. 적어도 표면상 드러난 이유만 보자면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반인륜적인 죄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 ‘빌하’와 간통을 저지른 죄를 말합니다(참고. 창 35:22). ‘야곱’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절하).
‘르우벤’의 편에서 보자면 한 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하고 저지른 실수였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애비는 이 일을 한 평생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치심과 모멸감과 분노가 얼마나 깊었으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이 순간까지 기억해 두었다가 옛날 그 일을 문제 삼아 장자의 특권을 빼앗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범죄는 단 한 번에 그치긴 했어도 치명적인 범죄였습니다. 따라서 설령 그가 훗날 거듭나고, 아버지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해도, 죄의 결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요?
단 한 번의 범죄로 자신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두고두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은 ‘르우벤’이 유일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아담’과 ‘하와’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했던 장본인들입니다. 당연히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범죄, 즉 하나님에 대한 반역죄로 그들이 누리던 그 모든 특권들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포함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범죄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모든 인류에게 항구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한 개인의 범죄에 대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워두신 것처럼 보입니다. 다소 완화된 형태이긴 하나 십계명에서 그 원칙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오늘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의 교훈을 떠올리게 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네 구원을 이루라”(빌 2:12하).
하지만 <에스겔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다시 말하자면 한 개인의 범죄는 그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지 연대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르우벤’의 잘못을 그의 자자손손(子子孫孫)에 이르기까지 지우는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요?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르우벤’의 잘못이 이것뿐이었을까? 단 한 번의 범죄뿐이었을까? ‘아담’과 ‘하와’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던 것일까? ‘에서’도 단 한 번의 실책으로 그 모든 장자의 특권을 영원히 상실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들은(백번 양보해서 실수라고 치더라도) 실은 그보다 더 심각한 원인의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 모두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일까요?
<잠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여기서 “경외하다”는 “두려워하다” 또는 “어렵게 여기다”를 의미합니다. 이들에게는 이런 자세가 없었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 대상이 육신의 아버지이든 하나님이든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는 ‘에서’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히 12:16하). 또 ‘야곱’은 장자 ‘르우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49:4상). 두 사라 모두 마치 끓는 물처럼 늘 불안하고, 안정감이 없으며, 즉흥적이며, 항상 말초적이며 본능이 가는대로 살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이러니 가치관의 혼란 속에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예컨대, 그들은 이빨을 먼저 닦고 밥을 먹었습니다. 겉옷을 먼저 입고 내의를 입었습니다. 머리를 먼저 감고 염색약을 발랐습니다. 반찬을 먼저 다 먹고 밥을 먹었습니다. 하루가 다 지난 후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졸리는 눈으로 잠시 <성경>을 읽습니다. 결국 이들의 장자 명분은 하나님께서 뺏기 전에 이미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먼저 될 나중 된 자. 과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 털어 ‘르우벤’ 지파에서 왕이나 선지자나 사사가 나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 땅을 점령해 갈 때, ‘르우벤’ 지파는 장자의 체통을 벗어던지고 ‘요단’ 동편에 그냥 주저앉아 살겠다고 간청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너무 기막히게 좋아보였던 것이지요. ‘롯’이 바라보던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위어스비’ 목사님은 ‘르우벤’ 지파를 “경계선 신자”로 칭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 교회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늘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경계 선상에서 살고 싶어했으니까 말입니다. 결과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일찍이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습니다.
적어도 ‘르우벤’의 나중과 관련해서 더 이상 보탤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는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이 미약하였습니다. 처음 되었으나 나중 된 자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던 한 무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굽니까?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그렇습니다. 나중 된 “우리”입니다. 나중 되었으나 처음 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자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18-21)
5. 임종 유언(V)-난형난제, 시므온과 레위
후한(後漢) 말의 학자 진식(陳寔)은 덕망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두 아들 진기(陳紀), 진심(陳諶)과 더불어 세 군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기의 아들 진군(陳群)도 역시 뛰어난 수재로 재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진군이 어렸을 때 어느 날 진심의 아들 진충(陳忠)과 놀다가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을 논하였는데 서로 자기 아버지가 낫다고 하여 결말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물으니, “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아우가 낫다고 하기도 어렵구나.”라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습니다. 난형난제(難兄難弟)는 바로 이 일화에서 유래한 고사성어(故事成語)입니다.
만일 후대 사람들이 ‘야곱’에게 ‘시므온’와 ‘레위’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탁월한가라고 물었더라면, ‘야곱’ 역시 진식과 동일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탁월함은 진기나 진심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폭력과 배반의 명수(名手)라는 점에서 난형난제였습니다.
원래 형제란 서로 의지하고, 어려울 때 힘을 합쳐 이를 극복해 가는 등 상부상조의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사악하고 못된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조장함으로써, 서로를 파괴하고 파멸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자들입니다. 오죽 했으면 아버지가 마지막 임종 시에 덕담(德談)은 고사하고 유언이라고 내놓은 말이 비난과 저주 일색이었겠습니까!
폭력과 배신. 애비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무슨 말입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로 그들은 폭력의 도구로다”(5절). 사악한 쌍둥이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 자식을 두고 이런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간혹 못된 자식을 둔 부모가 검찰에 자식을 고발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야곱’은 온 세상을 향해서 두 아들의 비리를 고발하고 있는 듯합니다. 검사의 논고보다 더 지독한 판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들 형제가 아버지로부터 이와 같은 고발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맏형 ‘르우벤’처럼 씻을 수 없는 과거의 범죄행적 때문입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직후 ‘세겜’에서 저질렀던 야만적인 폭력과 가증스러운 배신의 행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무시무시한 살육(殺戮) 잔치에 원인을 제공한 자는 물론 ‘세겜’ 족장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누이동생 ‘디나’를 겁탈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디나’가 먼저 그 자를 유혹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성폭력은 큰 죄악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의 죄악은 훗날 ‘다윗’의 아들 ‘암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가볍다 할 수 있겠습니다.
‘암논’은 그의 배다른 누이 ‘다말’을 흠모하여 그녀와 억지로 잠자리를 함께 하였으나, 사후에 곧바로 그녀를 집밖으로 내쫓아버립니다. 이런 그의 행위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일어나 가라하니”(삼하 13:15). 하지만 ‘세겜’은 달랐습니다. 그는 ‘디나’를 정말 사랑했으며, 자신의 잘못에 다소 무감각했던 것은 사실이나 ‘디나’와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야곱’에게 와서 결혼 승낙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들은 혼수와 예물은 물론 두 족속 간에 통혼(通婚)하며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자는 제의도 했습니다(참고. 34:8-12).
‘시므온’과 ‘레위’의 사악함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가나안’의 ‘세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악함입니다. 자신들의 누이가 겁탈당한 것에 심한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그들은 곧바로 복수를 계획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세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4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34:14-17)
이들 형제는 자신들의 복수극에 종교적 전통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다 전혀 지킬 의도가 없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종교를 살육과 배신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 동네를 도륙(屠戮)했으며, 그들의 재산과 가축까지 약탈했습니다. 나중에 이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4:31).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을 창녀처럼 취급하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화자는 이들의 행각을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25제 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34:25-29)
이들의 행동을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해 보자면, “기습”과 “살육”과 “노략질”에 더하여 “거짓”과 “배신” 등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세상을 향해서 저지른 행위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두 아들에게 그들의 행위가 “추악한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행위하고 질타한 바 있습니다(34:30).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당시 자신의 신변상의 안전만을 염려했던지 부랴부랴 온 가족을 데리고 ‘세겜’을 떠나 ‘벧엘’로 피신해 버렸습니다.
저주의 예언. 그랬던 그가 왜 지금 와서 지난 일을 꺼내고 있는 것일까? 아들의 범죄를 문제 삼으려 했다면 그 때 했어야지 왜 임종이 가까운 지금에 와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일까? 이제 아무 것도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이제 비로소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일까?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6-7절)
그의 유언은 두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심판과 예언입니다. 우선 심판은 어떤 것입니까? 자신을 두 아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 심판입니다(6절). 이전에 그가 두 아들에 대해서 “추악한 냄새”가 난다고 질타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냄새나는 두 아들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또는 “내 호적에서 너희 놈들을 파내버리겠다” 등과 같은 저주에 가까운 선포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과연 어떤 부모가 범죄 한 자식에 대해서 이처럼 단호한 태도를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식을 더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예언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7절). 그의 예언은 마치 “바벨탑의 저주”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의 반역자들”에 대해서 혼돈과 무질서로 온 지상에 흩어버렸던 것처럼, 이 두 아들과 그 후손들도 약속의 땅에서 모여 살지 못하고 흩어져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실 악한 세력은 모이도록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범죄자가 감옥에서 출소하고 난 뒤에 개과천선(改過遷善) 하지 않고 다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데, 주로 이전에 한 감방에서 사귄 동료 범죄자들로부터 배웠거나 또는 그들과 공모(共謀)한 결과입니다.
과연 ‘야곱’의 예언대로 이 두 지파는 그 땅에서 자신들의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 ‘시므온’의 경우 <여호수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9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수 19:1, 9)
즉 ‘시므온’은 다른 지파들처럼 자신들 만의 기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의 땅에 얹혀 사는 신세가 된 것이지요. <역대기>에서도 다시 한 번 이 점을 역사적 사실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대상 4:28-33). 그러나 <역대기>는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즉 ‘시므온’ 지파의 분화(分化)나 흩어짐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9그들이 그들의 양 떼를 위하여 목장을 구하고자 하여 골짜기 동쪽 그돌 지경에 이르러, 42또 시므온 자손 중에 오백 명이 이시의 아들 블라댜와 느아랴와 르바야와 웃시엘을 두목으로 삼고 세일 산으로 가서(대상 4:39, 42)
‘레위’ 지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땅에서 흩어져 살았으며, 아예 자신들의 기업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제사장 직분을 맡아 48개의 “레위 성읍”에만 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다윗’ 시대에 이르러 이 지파 역시 더욱 세분되어 각기 다른 일을 담당하게 됩니다. 예컨대, ‘다윗’은 삼십 세 이상의 ‘레위’인 삼만 팔천 명을 뽑아서, 이들 중 이만 사천은 성전에서 섬기게 하고, 육천은 관원과 재판장으로, 사천은 문지기로, 그리고 나머지 사천은 찬양대로 섬기게 했습니다(대상 23:2-5).
저주가 아닌 축복. 다른 형제들이 다 나누어갖는 부모의 유산을 나는 갖지 못한다면, 당사자는 물론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축복이 아니라 저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저주의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장은 저주로 보이는 것조차도 결국에는 축복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한 지역에 모여 살지 못하고 다른 형제들의 땅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땅 온 지역을 오가며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해야 했으니 피곤하고 고달프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맡은 직분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지극히 명예로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지파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2그들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기업을 가지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으니라(신 18:1-2)
이 지파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것을 다 가졌던 것입니다! 그 땅의 주인인 하나님을 자신들의 유산으로 받았으며, 하나님에게 바치는 그 땅의 모든 첫 소산을 자신들이 가져갔습니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하고 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지도자와 영웅들이 모두 ‘레위’ 지파에 속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레위’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아론’ 역시 그러합니다. <역대기>는 그와 후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이니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하게 하여 영원토록 심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고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으로 축복하게 되었느니라”(대상 23:13).
‘비느하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역시 특별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세 번째 대제사장으로서, 십구 년간에 걸쳐 그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민수기> 25장에서 그리고 있는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웃 ‘모압’ 족속 여인들과 성적 타락과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로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만 명이 죽어나가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장의 수령들을 잡아 목매어 달아 처형하면 진노를 푸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이에 ‘비느하스’는 ‘시므온’ 지파의 한 두령이 ‘미디언’ 여인과 그의 막사에 들어가는 것을 뒤쫓아 가서 창으로 두 사람의 배를 꿰뚫어 죽여 버립니다. 역병은 그쳤고,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거룩한 질투를 칭송하며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12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2-13)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사십년을 섬긴 ‘실로’의 제사장 ‘엘리’, ‘느헤미야’와 함께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 재건에 공헌한 학사 ‘에스라’, 그리고 “침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레위’ 지파가 낳은 영웅호걸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저주가 반드시 저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는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에 내린 저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역시 각별한 방식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지파는 알다시피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던 관계로 ‘여로보암’의 반역으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질 때, 배교의 무리 이스라엘에 포함되지 않고, ‘유다’에 남아 정통 신앙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멸망을 맞게 되지만, 남쪽 ‘유다’ 왕국은 그보다 135년 뒤인 주전 586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오직 은혜로. 이차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the Holocaust)을 두고 지난날 그들의 선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주면서 그리스도의 피를 자신들에게 돌리라고 외쳐댔던 것에 대한 성취 내지는 보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점쟁이나 사이비 예언자들이 그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가계(家系) 내린 저주를 끊어야 한다며, 부적(符籍)을 사거나 거액을 들여 굿을 벌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는 내 조상도 아닌 죽은 이웃 처녀의 원혼(冤魂)까지 풀어주어야 노총각 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위협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
이는 모두 거짓이고 사기(詐欺)일 뿐입니다. <성경>이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그리고 설령 조상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저주는 한시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미국 작가 ‘어빙 윌리엄’은 체벌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초리로 맞을 때는 그것을 든 사람에게 가까이 갈수록 아픔은 덜하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다른 해결책을 찾지 말고 꾸짖지 아니 하시고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충고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6. 임종 유언(VI)-형제의 찬송, 유다
‘야곱’의 유언은 이제 ‘유다’를 향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의 심정은 어떨까? 이미 세 형에 대한 예언을 들은 그로써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지레짐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자 ‘르우벤’은 족장의 지위를 잃어버렸고,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들 가운데서 흩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자기 차례를 맞고 있는 ‘유다’. 자기에게는 어떤 모진 예언이 떨어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 그는 아마 지난 날 자신이 저지른 죄악들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느라고 분주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은 며느리 ‘다말’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요셉’을 ‘이집트’에 팔자고 제안했던 자가 바로 자기입니다(37:26-27). 세 형에 비해서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그가 무슨 상급이나 칭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주와 심판이 아니라 그야말로 완벽한 삼박자(三拍子) 축복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1)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8절); (2)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9절); (3) “그 옷을 포도주에 빨리로다”(11절). 이들 축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들 축복을 하나하나 보다 상세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의 찬송. 그 첫 번째가 “형제의 찬송”입니다. ‘유다’는 음성학적으로나 어원(語源)에 있어서나 ‘히브리’어로 “찬송”(hd:y, 야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 ‘레아’가 그를 낳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유다’로 지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29:35)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의 예언 중에 하나님에게나 어울리고 합당한 단어 “찬송”을 ‘유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8절). 그의 예언에 따르면 ‘유다’는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많은 왕들과 지도자들이 배출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한 인간이 이처럼 형제들로부터 “찬송”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탈취하여 인간에서 돌린다는 말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대신 인간을 찬송하고, 하나님에게 속한 영광을 인간에게 돌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 가지 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찬송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누군가 이루어놓은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고 찬송할 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감사를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궁극적으로 찬송은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 바로 이와 같은 아름다운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그들의 면류관을 드리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면류관은 영광과 존귀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에게 드리고 있는 면류관들은 어디서 왔을까? 이 구절에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앞의 두세 장(章)에서 일곱 교회를 지칭할 때마다 반복해서 등장했던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그리고 이 표현과 함께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축복과 다스리는 권세와 권능”에 대한 약속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 면류관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그들의 영적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칭송받고 있는 자들은 이들 성도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곧바로 그들이 받은 면류관을 하나님 발아래 내려놓음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유다’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통해서 찬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이웃이나 가족이나 친구가 나를 칭송하며 자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는 일을 칭송하며 그 업적을 기립니까? 이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며, 하등 문제 될 일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백수의 왕. 바로 이 점에서 ‘유다’는 형제들의 찬송이 될 것입니다. ‘유다’가 받을 축복은 그뿐 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자와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9절). 사자를 흔히 백수(百獸)의 왕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유다’는 형제들 중에 가장 뛰어나고 탁월한 왕의 지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루이스’(C. S. Lewis)의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사자 ‘아슬란’도 여기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언은 마치 ‘유다’가 ‘르우벤’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장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들려 이상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장자가 된다는 것은 두 가지 특권을 물려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 가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새 족장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도 두 번째는 재산상의 특권으로서, 장자는 나머지 형제들이 물려받는 모든 유산의 갑절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이 모든 특권이 ‘유다’가 아니라 ‘요셉’ 지파에게 돌아갔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1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물론 ‘요셉’은 이미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만,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 중에 사사와 같은 국가적 지도자들이 속속 배출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자의 명분을 물려받았다 해서 통치권 즉 왕의 지위까지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바로 이점을 그의 예언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지위는 ‘요셉’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가 물려받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백수의 왕 사자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 이를 가리키고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요셉’의 꿈, 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그에게 절하는 꿈이 성취된 것은 사실이지만, 긴 안목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고개 숙여 절을 하게 될 대상은 ‘요셉’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가 될 것입니다. ‘유다’는 ‘메시아’가 올 때까지 이스라엘 왕들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유다’로부터 나왔습니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물론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지만, 사실 상의 첫 번째 왕은 ‘유다’ 지파의 ‘다윗’으로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은 ‘보아스’와 ‘룻’의 후손 ‘제시’의 막내아들인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사십 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위대한 왕으로 불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는 실로 여러 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국가 기관을 처음으로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서민 목동 출신으로서 힘써 일하는 자들의 대변자를 자임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뛰어난 음악가였으며, 군인이자 왕이었고 제사장이었으며 동시에 예언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시편>을 ‘다윗’이 <시편>이라 부르겠습니까! 그를 이어 왕이 된 ‘유다’의 후손들 중 그보다 뛰어난 왕은 사실 상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를 능가할 수는 없었지만 그 역시 뛰어난 왕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이스라엘이 영광의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그의 이름을 딴 ‘솔로몬 성전’을 지었는가 하면, 적어도 <성경>의 세 권의 책을 기록하였으며, 그의 지혜를 능가할 자가 없었을 정도입니다. <열왕기>는 그의 지혜와 관련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9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30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31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왕상 4:29-31)
‘다윗’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져 쇠퇴와 영적 타락을 겪어갑니다만, 그나마 남쪽 ‘유다’ 왕국의 왕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왕들이 “악한 왕”으로 불리던 시기의 ‘유다’ 왕들 중에는 ‘아사’, ‘여호사밧’, ‘우시야’, ‘요담’, ‘히스기가’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나름대로 선정(善政)을 베푼 왕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참고. 왕상 15:11; 22:43; 왕하 15:34; 18:3).
‘다윗’과 ‘솔로몬’ 이후 가장 뛰어난 왕을 꼽는다면 ‘요시아’ 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여덟 살에 재위에 올라 삼십일 년을 통치했습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 되었을 때 제사장들이 궁중 서가에서 오래 동안 잊혀졌던 <성경>을 발견하게 되는데 왕이 그 책을 읽고서는 그의 나라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그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자복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성전을 새롭게 하고, 우상들을 섬기던 신당(神堂)들을 부수고, 점쟁이와 무당들을 몰아내고, 유월절을 부활시켰습니다.
<성경>은 ‘요시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도 ‘유다’ 지파의 명성과 명맥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갑니다. 이 시기에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스룹바벨’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포로기 이후 남은 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 총독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등장하고 있으며, 두 번째 성전이 그의 이름을 따서 “스룹바벨 성전”으로 불리고 있는 것도 그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학개서>도 그의 이름과 함께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각별한 신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을 이어 많은 지도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비우드’; ‘엘리아김’; ‘아솔’; ‘사독’; ‘아님’; ‘엘리우드’; ‘엘리아살’; ‘마단’; ‘야곱’.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양부 ‘요셉’도 ‘유다’의 후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이보다 더 뛰어난 가계(家系)를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풍요와 번성. ‘유다’가 누리게 될 세 번째 축복은 어떤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야곱’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11-12절)
세 쌍으로 이루어진 유사반복의 노래는 매우 상징적이고 암시적이긴 하지만, 한 마디로 “풍요와 번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유다’가 “형제의 찬송”이 되어 영광을 누릴 것이고, 백수의 왕 사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인 즉, 당연히 예상되는 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예언이 있은 지 사백년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차지할 아름다운 땅에 대해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신 8:7-9).
이 약속은 ‘야곱’의 노래가 상징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유다’가 차지할 땅은 너무나 풍요로워 그 땅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자의 나귀와 포도원을 가질 것이며, 포도즙으로 옷을 빨 정도로 포도원의 소출이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풍요 속에 포도주에 취한 눈동자는 충혈 되어 몽롱한 상태가 될 것이며, 이빨은 우유처럼 하얗게 될 것입니다.
왕 중 왕. 형제의 찬송, 백수의 왕 사자, 그리고 풍요와 번성. 이 모든 축복들은 왕 중 왕이신 ‘메시아’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빌 2:11).
또한 <계시록>은 ‘유다’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사자”로 칭하고 있습니다(계 5:5). ‘야곱’은 ‘유다’를 향하여,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할 때까지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빌 2:9), 그리고 “그 앞에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빌 2:10). 예수 그리스도는 백수의 왕 사자로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돌아다니는 “우는 사자” 즉 마귀 또한 발아래에 정복했습니다. 그분은 진정 “왕 중 왕”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유다’ 지파가 누리게 될 “풍요와 번성”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인 즉, <야고보서>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오늘 나에게도 이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까?
7. 임종 유언(VII)-스불론과 잇사갈, 축복의 위기
첫 네 아들들에 대한 유언과 예언을 마친 다음 ‘야곱’의 눈길은 ‘스불론’과 ‘잇사갈’로 향하고 있습니다. 왜 ‘스불론’과 ‘잇사갈’일까? 이 두 아들은 ‘레아’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아들입니다. ‘레아’가 네 아들을 낳은 후 ‘야곱’은 두 사람의 첩(捷) ‘빌하’와 ‘실바’를 두게 되는데, ‘잇사갈’과 ‘스불론’은 출생 순서로 보자면 각기 아홉 번째와 열 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첫 네 아들에 대해서는 출생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유언을 남겨주었습니다만, 이 두 아들에 와서 왜 그 순서를 어기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 가능한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만(참고. <문학과 역사>), 그냥 단순히 생각해 보면 이들 두 아들은 다른 네 아들과 함께 ‘야곱’의 침상에 가장 가까이 둘러서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대로 아이들을 지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의 후손 중에서 특별히 이름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특별히 기억할 만 한 지도자도 없습니다. 다만 ‘스불론’ 지파 중에 사사(使師) ‘엘론’이 그나마 기억할 만 한 인물이며(삿 12:11), ‘잇사갈’ 지파 중에는 사사 ‘톨라’가 있기는 합니다(삿 10:1-2). 그 외에 두 지파를 통 털어 <구약> 전체적으로 28 명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대개 열두 명의 형제 중 아홉째와 열 번째라 하면 가장 주목을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식일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은 그 출생 순서답게 그저 그렇고 그런 생활을 보낸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편에서 보자면, 특별히 주목받을 만 한 것도 없는 무사(無事)하고 안일(安逸)한 일생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안에서 시돈까지. 두 지파에 대한 예언이 단 세절에 그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절을 기초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오히려 부담이 되고 억측으로 끝날 소지가 많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에는 교훈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축복에 관한 교훈이 그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축복의 위기(危機)라고나 할까요.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일 것인 즉, 축복에는 위험과 기회라는 두 얼굴이 있음을 ‘스불론’과 ‘잇사갈’ 두 지파에 대한 예언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선 ‘스불론’의 후손이 차지하게 될 거주지에 관한 예언부터 살펴보기로 합시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 메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13절). ‘야곱’의 예언 중에서 다른 어느 지파에 대해서도 이처럼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거주지를 거명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훗날 열두 지파의 땅은 주사위를 던져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지파가 차지하게 될 지역은 그 자체로서 나머지 지파들에 비하면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암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가의 거주지와 그 경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 17:26)
‘스불론’에 대한 예언 속에 “해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해서 이들이 장차 뱃사람이 될 것이라고 상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만, 이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될 거주지는 그들에게 큰 자산(資産)이자 특권이 될 수 있다는 암시는 분명해 보입니다. 예컨대, <신명기>는 이들 두 지파가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라”(신 33:19)고 언급함으로써, 이들이 누리게 될 물질적인 축복과 특권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처럼 남다른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인가? 일반인들에게 물어보면 그것은 운명적이며 태생적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주변에서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은사나 사회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뛰어난 예술가, 운동선수, 대재벌의 자식, 천재적인 과학자, 등등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노력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일반인들의 기대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세간의 비난과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축복이 도리어 욕이 되는 순간이지요.
나에게는 혹시 남에게는 없는 은사나 자산은 없습니까? 나에게도 무엇인가 타인에게 끼칠 수 있는 유익이나, 모범이나, 영향력은 없습니까? 그 축복이나 특권이 무엇이든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산물이며 선물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 축복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관한 책임 또한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소위 달란트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마 25:21, 23).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축복이 어떻게 저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들이 그 특권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물을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굳이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축복이 저주가 되고 욕이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가진 자가 나누려 하지 않을 때, 욕을 먹고 비난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그가 가진 것이 재물이든 재능이든 말입니다. 또한 전혀 어울리지 않은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도 세상은 그를 임명권자와 함께 싸잡아 비난을 합니다.
‘야곱’의 예언 속에도 이와 같은 경고가 들어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불론’은 해안 지역에 살면서 해외 무역 등으로 아마 큰돈을 벌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지파에 비해서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축복이 마냥 축복으로만 남게 될까? 축복에 따른 위험이나 위기는 없을까? ‘야곱’은 이곳에서 그 위기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 미치리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시돈’이 어떤 곳입니까? 한 마디로 사악한 도시였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사악한 왕비 ‘이사벨’이 ‘시돈’ 출신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스라엘의 왕비로 오면서 섬기던 우상들을 가지고 왔으며, 이로 인해 그녀는 물론 왕과 온 나라가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시돈’이 이스라엘에 끼친 영향은 ‘소돔’과 ‘고모라’가 ‘롯’에게 끼친 영향력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훗날 ‘스불론’의 후예들이 ‘시돈’까지 교제와 활동 영역을 넓혀갈 때 맞게 될 위기는 자칫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과 그의 아내가 겪어야 했던 파멸일 수도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은사를 숨겨두거나 오용(誤用)했을 때 말입니다. ‘롯’은 당시 그가 누리고 있던 사회적, 금전적 특권들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전혀 사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를 찾아온 두 천사와 관계를 하겠다며 그의 집으로 쳐들어온 지역 잡배들을 훈계하여 돌려보내기는커녕, 자기의 두 딸과 대신 관계하라며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가 전하는 종말의 복음을 두 사위조차 우습게 알고 믿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짠 맛을 잃은 소금이었고, 침대 밑에 숨겨둔 등불이었습니다.
왜 그가 이렇게 되었을까? 거룩한 공동체 ‘아브라함’ 교회에 살지 않고, 홀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틈에서 뒤섞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개척하러 떠났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했으며, 세상은 이런 그를 자기편으로 삼았습니다. ‘시돈’에서 ‘스불론’ 또한 그와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었습니다.
건장함과 게으름. “축복의 위기”는 ‘잇사갈’이라 해서 다를 게 없습니다. 동생 ‘스불론’과 공동 운명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는 “건장한 당나귀”로 태어났습니다(14절). 흔히 영어권에서 당나귀는 어리석음이나 무지함의 상징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부자나 귀족들이 가끔 타고 다니던 아주 귀하고 값비싼 교통수단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삿 10:4; 12:14). ‘다윗’ 왕 시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나귀에 술과 음식을 싣고 와서는, 당나귀는 왕과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짐승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삼하 16:1-2). 이렇게 볼 때, ‘잇사갈’을 “건장한 당나귀”에 비유한 것을 두고 하찮게 여기거나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당나귀가 지닌 강점이나 장점들을 통해서 ‘잇사갈’의 태생적 축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당나귀는 강인함과 견고함의 상징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잇사갈’의 모습이 딱 이런 것입니다. ‘잇사갈’은 ‘스불론’과 함께 사사 ‘드보라’와 ‘바락’을 도와 ‘가나안’ 족속들과의 위험한 전쟁에 나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삿 5:15-18). 당시 일부 지파들이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수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들을 차출했을 때 ‘유다’와 ‘단’ 지파를 제외하고는 ‘잇사갈’ 지파보다 더 많은 장정들을 내놓은 지파는 없었습니다(민 26).
‘잇사갈’ 지파의 장정 수는 나중에 더 크게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26장에서 보여주는 숫자는 64,300 명이었는데, 왕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87,500에 이르고 있습니다(대상 7:5). 이들 숫자가 전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잇사갈’은 이스라엘의 충성스럽고 믿을 만 한 지파였음에 분명합니다.
하나 인생이 용맹스러움과 충성스러움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일까요? ‘야곱’은 ‘잇사갈’에게도 약점이 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습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14-15절).
그렇습니다. ‘잇사갈’은 건장하지만, 게으르고 꿈이 없습니다.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보기 좋은 것들에 만족하며 새로운 모험이나 개척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힘은 있으나 제대로 발휘하려 하지 않으며, 재능은 있으나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결과가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떻게 현실로 나타났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잇사갈’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수시로 외적의 침입을 목격해야 했으며, 결국에는 주전 732년 ‘티글렛-블레셋’이 이끄는 ‘아시리아’ 군대에 의해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북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푯대를 향하여. ‘야곱’의 예언은 여기까지입니다만, 그가 주고자 했던 교훈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 그것일 것입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사도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알고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과거의 구원에 안주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나를 아는 것만큼 나도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달려가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곳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옥입니다. 만일 기독교 역사에서 자신이 행한 과거의 업적을 바탕으로 여생을 편히 보낼 자격을 갖춘 한 사람을 뽑는다면 단연 사도 ‘바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달려갈 길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사도의 간절한 소망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있어서 은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죽는 날이 은퇴의 날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공생에 시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슬프게도 ‘스불론’과 ‘잇사갈’은 눈앞에 펼쳐진 너무 좋은 것들을 보고 너무 일찍 은퇴를 작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의 갈릴리. 이 두 지파가 차지했던 지역은 훗날 “이방인의 갈릴리”로 불릴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 ‘유다’만 제외하고 모두 이 지역 출신들입니다. 이 지역은 예수님 당시까지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침공하여 다스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는 ‘사마리아’와는 달리 본연의 모습이나 색깔을 쉽게 잃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스불론’과 ‘잇사갈’의 후예가 없으리라는 법이 없겠지요.
‘잇사갈’이 처음 이 아름답고 비옥한 땅을 물려받아 현실에 만족하며, 꿈도 비전도 없이 살아가다, 결국 자유를 빼앗기고 외세의 노예 신세로 전락하여 살아왔습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들의 상황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그들의 영혼마저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스불론’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 역시 해상 무역을 통해 온 세상으로 나아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야 할 것이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들의 후예들에게 예수께서 ‘갈릴리’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함께 사시다 가시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 옛날 ‘야곱’이 그들의 선조들에게 유언을 남기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유언인 즉은 이것입니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혹시 ‘갈릴리’는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마치 내가 다 이룬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불론’과 ‘잇사갈’의 후예들처럼 말입니다. 미래를 꿈꾸지 않으면 현실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대위임령”은 우리가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기회입니다. 그것은 명령이자, 약속이며, 또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누리시길.
8. 임종 유언(VIII)-남이 아닌 단, 갓, 아셀, 납달리
아버지 ‘야곱’의 임종 유언을 듣고 있으면서 가장 불안해했을 자식들은 누구였을까? 추측컨대, ‘단’과 ‘갓’과 ‘아셀’ 및 ‘납달리’ 네 지파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야곱’은 이들 네 아들을 차례로 거명하며 유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마치 한 사람에게 말하듯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들이 이처럼 전전긍긍하며 아버지의 유언을 듣고 있었을까? 신분 즉 출생 성분이 나머지 형제들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적자(嫡子)가 아니라 서자(庶子)들입니다. 그들은 정식 부인 ‘레아’와 ‘라헬’의 자식이 아니라, 그들의 시녀였던 ‘빌하’와 ‘실바’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단’과 ‘납달리’는 ‘빌하’가 낳았으며, ‘갓’과 ‘아셀’은 ‘실바’의 소생들입니다. 아들이라 해서 다 같은 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보듯이, ‘이스마엘’은 ‘이삭’의 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의 어머니 ‘하갈’과 함께 아버지 ‘아브라함’을 떠나야 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들 네 자식들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유산은 고사하고, 호적 상 아들로 인정받기도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 네 아들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하겠습니다.
공정사회 이스라엘. 그러나 이들의 불안함과는 달리 ‘야곱’은 예상을 깨고 이들 네 자식들에 대해서도 공명정대(公明正大)한 모습입니다. 그들이 자유자의 아들이든 노예의 아들이든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누구든 출생이나 신분의 차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에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을 선언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유다’에 관한 예언보다는 그 길이에 있어 짧고 간단합니다만, 이들의 미래에 관한 예언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결코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이점 ‘단’에 관한 예언을 통해서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단’에 관한 예언은 ‘단’ 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한 나머지 세 지파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16절).
‘단’은 그 출생 성분에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한 지파에 속해야 함을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를 ‘레아’나 ‘라헬’의 자식들과 같이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나머지 세 지파들에 대해서도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맡게 될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야곱’은 그가 외적과의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정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16절). 그리고 그가 수행하게 될 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17절).
우리는 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 ‘단’에 대한 이와 같은 예언 역시 부정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예언에 등장하고 있는 일단의 짐승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각 짐승들이 가진 장점들을 부각시키는 것이 해석 상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잇사갈’을 “건장한 당나귀”로 비유한 것에 대해서도 당나귀의 장점만을 부각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14절). 마찬가지로 지금 ‘단’을 “뱀”으로 비유한 것도, 이 짐승이 지닌 지혜와 신속함 그리고 효과적인 공격 방법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함”을 가르친 바 있습니다.
혹시 ‘단’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스라엘에 자유와 정의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삼손’일 것입니다. 그는 이십여 년을 이스라엘을 통치한 사사였습니다(삿 13-16). 하지만 그는 지혜로운 사사로서보다는 오히려 힘과 용맹스러운 사사로 더 잘 기억되고 있습니다. 힘과 용맹스러움에 있어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던 것이, 맨 손으로 사자와 싸워 찢어 죽여 버릴 정도였습니다. 적과의 전쟁에서도 한 번은 뱀과 같은 기습으로 적을 덮쳐 한 번에 천 명을 죽여 버렸습니다.
‘삼손’은 또한 그의 죽음에 있어서도 유별났습니다. 자신이 가진 힘의 비밀을 요부(妖婦) ‘들릴라’에게 알려준 대가로 그 모든 힘을 상실해 버리고, ‘블레셋’ 족속에게 붙잡혀 눈이 뽑히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인생을 끝내지는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다시 머리카락이 자라고, 힘이 되돌아왔을 때, ‘다곤’ 성전에서 그를 비웃던 ‘블레셋’ 인들을 성전과 함께 전멸시키고 장렬한 최후를 장식합니다. <사사기>는 그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야곱’의 예언이 이와 같은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그의 장렬한 죽음이 이스라엘에 비록 잠시나마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언급하면서 아예 ‘단’의 이름을 빼버리고 있습니다(대상 1-7). <계시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5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계 7:5-8)
그의 이름이 빠진 것을 놓고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단’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가장 먼저 우상숭배에 빠진 지파였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참고. 삿 18:30). 아닌 게 아니라 <아모스>는 이에 대해서 ‘단’을 질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암 8:14)
이와 같은 평가에 근거해서 일부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단’을 말세에 등장할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억측이며 다분히 이단적인 해석임에 분명합니다. 우상숭배로 치자면 다른 지파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단’의 이름이 <계시록>이나 <역대기>에서 지파 목록에서 빠져있기는 하지만, <성경>의 다른 곳에서 적어도 열여섯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단’ 미래나 운명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추측을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아모스>가 말하고 있는 ‘단’의 죄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의 경계로 삼을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관한 경계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사사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숭배 대상은 그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의 구원. 그런 점에서 ‘야곱’이 예언 중에 마지막 숨을 내쉬며 외치는 간구는 시의적절(時宜適切)하다 하겠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사실 이 기도는 본문의 흐름에서 일탈(逸脫)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자식들을 앞에 놓고 예언을 말하는 중에 느닷없이 이와 같은 개인적인 기도문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과 관련해서 일단의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단’이 뱀과 같은 지혜와 파괴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영웅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진정한 희망은 일개 사사의 영웅적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사이신 ‘야훼’ 하나님에게 달려있음을 동시에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는 왜 이 시점에 ‘야훼’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아무리 뱀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해도, 뱀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태초의 한 사건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유혹과 반역이 그것입니다. 뱀은 유혹과 반역의 대가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지만(3:14),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곧바로 이어서 그에게 그 유명한 소위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셨습니다(3:15).
혹시 ‘야곱’이 예언 중에 이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간구는 예언과 절묘한 공명(共鳴)을 이루고 있다 할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유다’를 위한 예언 중에서도 ‘메시아’를 암시하는 단어 ‘실로’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10절). 그가 지금 간구하고 있는 “주의 구원”은 ‘히브리’어로 ‘예슈아’ 즉 ‘예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에 관한 언급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야곱’이 지금 이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어느 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주의 구원”을 기대하고 고대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 22:20) 하며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 세 예언들. 이제 나머지 세 지파, ‘갓’과 ‘아셀’과 ‘납달리’에 대한 예언은 어떻습니까? 각 지파마다 한 절 씩만을 할당하고 있을 뿐이니 가장 짧은 예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갓’ 지파 역시 ‘단’과 마찬가지로 용맹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갓(dG)은 군대(dWdG, 게두드)의 추격(dWG, 구드)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dWG, 구드)하리로다”(19절). 앞에서 본 바처럼 ‘갓’에 대한 이 예언은 일종의 언어의 유희로서, 반복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말바굽 소리에 대한 의태어(擬態語)입니다.
이 지파는 ‘가나안’ 정착 시에 일찌감치 ‘요단’ 강 동쪽에 자리 잡은 두 지파 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땅은 흔히 ‘길르앗’으로 통칭되는 곳으로서 땅이 풍요롭고 목축하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만, 동시에 ‘암몬’이나 ‘모압’ 같은 외적들의 침입을 수시로 감수해야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예언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갓’은 이와 같은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용기와 의지로 외적을 퇴치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다윗’ 시대에 있었던 일을 한 사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대상 12:8)
이 지파는 이처럼 한 때는 군사적으로 강했고 용맹스러웠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들은 ‘요단’ 동쪽의 나머지 지파와 함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찌감치 사라져버릴 운명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스라엘 교회 안에서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늘 이방 족속과 잦은 접촉과 싸움과 교류를 하는 동안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축복의 양면성”을 보게 됩니다. 축복은 위기라는 교훈 말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좋다고 얼른 차지한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유념하고 조심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하겠습니다. ‘롯’의 운명을 뒤쫓아 간 것이지요.
‘앗셀’는 어떻습니까? ‘앗셀’은 행복 또는 행운을 뜻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지파는 다른 어느 지파보다 물질적으로 더 부유하고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20절). ‘스불론’이 해안 지역에 거주하면서 해양 무역을 통해서 큰 이득을 취했다면, ‘앗셀’은 이에 더하여 거주하는 땅도 비옥하여 더 큰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함께 많은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사사기>는 ‘아셀’이 이웃하는 형제 지파가 외적들과 싸우고 있는 동안 이를 못 본 체 자신만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을 나무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삿 5:17-18). 옆집이 불타고 있는데 내 집이라고 온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요?
하지만 ‘앗셀’ 지파 중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의 구원을 기다리던 “충성스러운 소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여선지자 ‘안나’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녀는 결혼 칠년 만에 과부가 되어 나이 팔십이 넘도록 ‘예루살렘’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에 할례를 받으러온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자입니다(눅 2:36-39).
‘납달리’에 대한 예언은 그 자체로서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언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성경>에서 ‘납달리’ 후손으로 유일하게 알려진 인물로 ‘바락’을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는 사사 ‘드보라’와 함께 ‘가나안’의 왕 ‘야빈’과 맞서 싸운 바 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장군이긴 하지만 동시에 ‘드보라’와 함께 아름다운 “드보라의 노래”를 지은 공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참고. 삿 5). 이런 점에서 볼 때, ‘야곱’의 예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납달리’가 “아름다운 소리”를 발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니 말입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21절).
아름다운 그 말씀.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아름다운 소리”는 ‘바락’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분은 비록 ‘납달리’의 후손은 아니지만, 공생애의 많은 부분을 ‘납달리’에서 보냈습니다.
12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2-16)
‘납달리’ 뿐만 아니라 ‘가나안’ 온 땅에 울려 퍼졌던 예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진실하며, 믿을 수 있는 위대한 “그 말씀”이었습니다. 한 때 그를 체포하려 했던 병사들조차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요 7:46)
우리는 그의 고백에 한 마디 더 거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인생이 아닐까요?
9. 임종 유언(IX)-무성한 나무, 요셉
우리는 흔히 <성경>의 저자(著者)는 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이는 <성경> 저작 과정에서 초자연적인 측면과 자연적인 측면이 동시에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 3:16상)이라는 <디모데후서>의 선언은 <성경> 저작의 초자연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를 어떻게 감동시키시는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 영감설”(聖經 靈感設)에는 여러 가지가 알려져 있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 저자는 기계적으로,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단순히 필경사(筆耕士) 노릇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저자의 지적, 사회적 배경이라든지 심지어 그 사람의 취항이나 기질까지 저작 과정에 어떤 형태로든 스며드는 것을 허용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을 “역동적 영감설”이라 부릅니다.
그래서인지 예컨대, <로마서>에서 느끼는 감동이 다르며, <베드로서>에서 맛보는 감동이 다릅니다. ‘야곱’의 위대한 임종 예언도 이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요셉’을 향한 그의 예언 속에는 이 아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과 애착이 다른 어느 아들에 대한 예언에서보다 더 많이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모든 형태의 축복을 ‘요셉’에게 모조리 전수해 주고 싶은 심정인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만 무려 여덟 번에 걸쳐 “축복”이라는 단어가 봇물 터지듯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언의 분량도 ‘유다’에 대한 예언과 함께 가장 길고 많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심정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에게 ‘요셉’이 누굽니까?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 ‘라헬’의 장남이 아닙니까! 그러나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이복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 어린 시절을 온갖 고초가운데서 살아온 아들입니다. 이 아들에 대해서 어찌 미안함과 애틋함이 없겠으며, 그를 볼 때마다 먼저 간 아내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아들에게 무엇을 준다 한 들 아까울 것이 없는 법이지요.
하지만 ‘요셉’은 이미 그 모든 세상의 축복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위나 명예, 그리고 물질적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생육하고 번창하라”는 창조의 언약도 그를 통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컨대, <신명기>는 그의 후손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신 33:17하). 즉 그의 후손이 큰 나라와 큰 민족을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요셉’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협력시켜 선을 이루시고 마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격이나 성품과는 상관없이 그 일을 이루어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환란을 통해 인내를 배웠으며, 인내는 연단을 이루어냈으며(즉 인격과 체질을 형성했으며), 연단은 그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말끝마다 “내 하나님께서”를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달고 다녔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야곱’ 역시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 듯, 그를 “풍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하며 현재 ‘요셉’이 누리고 있는 “풍성한 삶”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22절). 그리고 그가 이처럼 풍성함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비결이 하나님 때문이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23-24절).
하지만 ‘야곱’은 ‘요셉’을 단순히 “풍성한 포도나무”로 그리고 있지 만은 않습니다. 그가 강력하고 지치지 않는 힘을 지닌 “궁수”(弓手)이기도 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적절하면서도 상반되는 두 상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궁수(弓手)가 과연 ‘요셉’을 지칭하는 것인지 또는 그의 대적자들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해석상의 논란이 없지는 않다고 앞에서 논의한 바 있습니다: 참고. <신학과 신앙>.
굳센 활과 강건한 팔이 상징하는 바는 ‘요셉’이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역경의 세월에 그가 인내하며 이루어낸 그의 강인한 인격입니다. 형들의 질시와 미움 그리고 살해의 음모, 타국에서의 노예생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간계(奸計), 그리고 모함에 이은 투옥까지 삼십 년의 세월이 그 속에 녹아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세월을 한탄과 원망과 그리고 세상을 향한 적개심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 모든 질고를 받아들이는 태도나 모습이 마치 한 마리 온순한 양과 같이 보이지는 않았을까요? “풍성한 포도나무”가 드러내고 있는바 상징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저 땅에서 올라오는 수액만 빨아먹는 수동적이고 온순한 포도나무 말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이집트’에서 옮겨다가 새 땅에 심은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시 80:8-16; 사 5:1-7; 렘 2:21; 겔 15:1-8; 19:10-14; 호 10:1). 즉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만 무성한 나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경우는 다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도 풍성한 포도나무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2절).
‘야곱’의 노래는 ‘요셉’만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손들도 역시 그러하리라는 예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열다섯 명의 사사 중에서 다섯 명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기드온’(다섯 번째 사사); ‘아비멜랙’(여섯 번째); ‘야일’(여덟 번째); ‘에바다’(아홉 번째); ‘사무엘’(열다섯 번째). 그리그 그 유명한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출신입니다. 그는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을 그 땅에 정착시킨 위대한 지도자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실로 ‘요셉’은 이스라엘과 열방을 위한 “풍성한 포도나무”였습니다.
야곱의 전능자. 자식에게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모든 축복을 쏟아 부어 주고 싶은 애비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실현 여부는 그에게 달린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의 이어지는 노래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노래 후반은 온통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 “네 아버지의 하나님”; “전능자”(24-25절).
아들의 성공 비결이 다름 아닌 이들 이름 때문이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노래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야곱’이 과연 이들 이름 하나하나마다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하나님을 “야곱의 전능자”로 부름으로써 자신과의 각별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엘 샤다이’ 즉 “전능자”로 부르고 있긴 합니다만(참고. 시 132:2, 5; 사 49:26; 60:16), 특별히 <창세기>는 “전능자 하나님”을 ‘야곱’의 생애와 관련해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참고. 28:3; 35:11; 43:14; 48:3).
“축복” 역시 족장 언약의 핵심 단어로서, <창세기>에서만 무려 88여 회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특히 이 마지막 두 절에서 마치 불꽃놀이의 대미(大尾)를 보는 듯합니다. “축복”이 “전능자 하나님”과 함께 폭죽처럼 터져 나오면서 ‘야곱’의 임종 유언이 절정을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축복은 그동안 ‘야곱’이 경험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고 초월하는 그런 것들이 될 것입니다. 즉 인간의 그 모든 활동 영역을 망라하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하늘”(!yIm'v, 샤마임)로부터 비가 내리고, “깊은 샘”(!/hT, 테훔)에서 솟아나는 물은 땅을 촉촉이 적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할 것이며(3:17-19), 여인의 “태”(!j'r, 라함)와 “가슴”(dv, 샤다임)은 다산(多産)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대조 3:16). 흥미롭게도 ‘야곱’이 풍요와 다산의 축복과 관련해서 동원하고 있는 네 단어, “하늘”과 “깊은 샘”과 “태”(자궁)와 “젖먹이”(유방)는 모두 두운법(頭韻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서 화자는 남성과 여성의 활동 영역을 균형 있게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남녀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완벽하고 총체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애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에 집착하며 살아온 ‘야곱’이 이제 이 장면에서 자신이 누렸던 그 축복에 대해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토록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제 아들 ‘요셉’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입니다. 그는 ‘요셉’을 “형제들 중 뛰어난 자”, 즉 구별된 자(ryzIn, 나시르)로 부르고 있습니다. 유사한 표현이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신 33:16; 애 4:7).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요셉’ 지파에서 왕이 배출된 적은 없으므로, 따라서 ‘요셉’을 “형제들 중 뛰어난 자”로 부르는 것은 ‘요셉’ 개인에 대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난 자였습니다. ‘이집트’에서만 하더라도 그는 분명 그 땅의 통치자였습니다.
참 포도나무. 하지만 <신약>에서 ‘요셉’보다 뛰어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요 15:1-17). 그는 스스로를 “참 포도나무”로 칭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 역시 ‘요셉’처럼, 그의 성공 비결이 자신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 때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서 천명하고 계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농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어찌 농부가 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분은 늘 하나님 안에 상주(常駐)하셨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에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스승의 성공 비결이 이러하다면, 그 스승을 따르는 자들 즉 제자들의 성공 비결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 즉 임종 유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16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4, 8, 16)
10. 임종 유언(X)-물어뜯는 이리, 베냐민
꺼질 듯 말 듯, ‘야곱’의 숨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막내아들 ‘베냐민’을 향한 유언을 마치기 전까지는 그는 결코 죽을 수 없다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Spurgeon) 목사님도 ‘야곱’의 임종 장면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일을 완수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위로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감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는 누구도 그를 해치거나 목숨을 앗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요한복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유대’ 공회가 그를 잡아 제거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음이니라”고 설명합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주인공 ‘야곱’은 반면교사(反面敎師)는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위대한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그는 일생 동안 제대로 한 번도 탁월한 삶을 살았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을 위대하게 만들어놓고 있는 대목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즉 임종의 자리에서 비로소 위대한 예언자와 따뜻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식 하나하나를 놓고 신탁(神託)을 들려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역설도 바로 여기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즉 우리 인생이 아무리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종말을 이처럼 멋있게 장식할 수 있게 한다는 역설 말입니다. ‘야곱’의 임종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이유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는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성숙했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더욱 가까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예언만 하더라도,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단순한 “예언”(豫言) 아니라, 그들의 과거 행적을 토대로 미래에 대한 경고와 교훈을 담은 선지자적 “예언”(預言)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자식들의 인격적 특징을 짐승이나 다른 사물에 비유하고 있는 것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유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여섯 아들에 대한 유언과 나머지 여섯 아들에 대한 것인데, 처음 여섯 아들은 ‘레아’의 자식들로서 관심의 초점은 ‘유다’였습니다. 나머지 여섯 명의 아들은 두 몸종이 낳은 네 아들과, ‘라헬’이 낳은 두 아들로서 이곳에서 관심의 초점은 ‘요셉’입니다. ‘유다’와 ‘요셉’에 관한 유언이 가장 길다는 점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작은 거인.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아들 ‘베냐민’에 대한 유언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단 한 줄로 처리해 버리고 맙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27절). 있으나 마나 한 유언처럼 들립니다. ‘요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요셉’에 대해서 하늘과 땅에 있는 축복이란 축복은 모두 주고 싶어 하던 그가 ‘베냐민’에 대해선 달랑 한 줄로 그치고 말다니, 차별도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베냐민’은 지파의 크기에 있어서도 다른 지파에 비해 아주 작고 미미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야곱’은 이 유언을 마치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습니다. 작은 것이 시시한 것하고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다고 중요하지 않거나, 또는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키가 크다고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숫자가 많다고 큰 일을 이루는 것도 아닌 것과 같습니다. ‘베냐민’은 형제 중에서 막내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지파였습니다. 하지만 ‘베냐민’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사자(獅子)라면,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입니다. 사자가 백수(百獸)의 왕이라면, 이리는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맹렬합니다. ‘단’이 뱀처럼 적을 기습 공격하여 치명적인 독을 뿜어냈다면, ‘베냐민’은 이리처럼 용감무쌍하게, 맹렬하게 하나님의 적을 공격하고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결코 지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노래를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27절).
<시편>도 ‘베냐민’의 이와 같은 탁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24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27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시 68:24, 27)
‘베냐민’은 작지만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졸병이 아닌 장군으로,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실로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레위’나 ‘유다’ 그리고 ‘요셉’ 지파를 제외하고 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베냐민’ 지파만큼 걸출한 지도자나 위인들을 많이 배출한 지파도 없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자랑하고도 남을 ‘에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使師)입니다. ‘사울’은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의리의 사나이 ‘요나단’, ‘사울’ 왕의 용맹스러운 군대 사령관 ‘아브넬’, 그리고 ‘페르샤’의 왕비 ‘에스더’의 삼촌으로 이스라엘을 멸족 위기에서 구한 ‘모르드개’ 등이 모두 ‘베냐민’ 출신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 용맹스럽고 충성스러운 이스라엘의 ‘롤 모델’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무용담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사사 ‘에훗’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이 ‘모압’ 족의 지배하에 있을 당시의 사사였습니다. 당시 ‘모압’의 왕 ‘에글론’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무장을 해제 당한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왼손잡이 ‘에훗’은 작은 칼을 오른 쪽 허벅지 옷 속에 숨겼습니다. 왕의 호위병들이 그가 왼손잡이 임을 알았던지 아마 오른 손은 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음인지, 오른쪽 팔과 다리는 그냥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모험을 감수하고 그는 왕에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를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를 죽인 후 곧바로 빠져나와 ‘에브라임’ 언덕에 있는 요새로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규합하여 ‘모압’을 칩니다. 이 전쟁에서 장군들만 만 명을 죽이고 ‘모압’을 이스라엘의 수하에 팔십 년 동안을 굴복시켰습니다(삿 3:12-30).
우리는 여기서 ‘베냐민’의 또 다른 영웅 ‘요나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울’ 왕 재위 시에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은 ‘블레셋’이었습니다. 한 번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무기를 모두 빼앗겨 버리고, 칼과 창을 가진 자라고는 왕과 ‘요나단’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농기구나 도끼 등으로 적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블레셋’은 이처럼 열세에 놓인 이스라엘이 그들과 싸우러 나아오는 것을 보고 조롱하며 놀려댑니다: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삿 14:11). 하지만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요나단’의 용맹과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삿 4:12).
過如不及. 실로 ‘베냐민’은 ‘야곱’의 예언대로 “물어뜯는 이리”였습니다. 한 번 물었다 하면 절대 놓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예언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언”(豫言) 만은 아니라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경고와 교훈을 담은 선지자적 “예언”(預言)도 담고 있다 했습니다. 이리에게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용맹스러움과 맹렬함이 있기는 하지만, 파괴적인 난폭함이나 잔인함도 함께 드러나기도 합니다. 용맹이 과하여 교만이 되고, 힘이 과하여 잔혹함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힘과 용기가 적절한 통제를 받지 못하면 과여불급(過如不及)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겪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내란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치른 “베냐민의 전쟁”을 말합니다. 도대체 ‘베냐민’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머지 모든 지파들이 그를 응징하려 했다는 말인가? <사사기>는 마지막 세 장(19-21장)을 할애하면서까지 “베냐민의 전쟁”에 얽힌 사연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에게 ‘베들레헴’ 출신 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행음을 하고 남편을 버리고 친정아버지 집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하지만 마음 좋은 남편은 그녀를 찾아가 겨우 설득하여, 장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데리고 집을 향해 돌아옵니다. 귀향 길 첫날 저녁에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서 한 친절한 노인을 만나 그 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밤중에 성읍 불량배들이 몰려와 나그네를 내놓으라고 위협합니다. 그와 관계하겠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집 주인은 결코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자기 딸과 이 여인을 대신 내어줄테니 그들과 관계하라고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이들은 막무가내입니다.
이를 보다 못한 ‘레위’인 남편은 집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했을 것이며, 그에게 화가 미치게 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음인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줍니다. 폭도들은 밤새 돌아가며 이 여인을 능욕하고는 새벽이 되어서야 놓아줍니다만, 여인은 결국 죽고 맙니다. 남편은 여인이 시체를 당나귀에 싣고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가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남편은 첩의 시신(屍身)을 열두 마디로 동강내어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에 한 동강 씩 보내어 반응을 촉발시키고자 했습니다. 그의 의도는 적중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분기탱천(憤氣撐天)하며 ‘미스바’에 모여 악행을 저지른 ‘베냐민’을 심판하기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열한 지파 동맹은 먼저 ‘베냐민’ 지파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합니다만, ‘베냐민’은 이를 거절합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열한 지파 편에서 보자면 응징과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전쟁은 처음에는 ‘베냐민’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습니다. ‘베냐민’이 사만 명의 연합군을 격파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세는 역전되어, 이번에는 연합군이 ‘베냐민’의 성읍들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도륙해버렸습니다. ‘베냐민’은 이 전쟁으로 멸족(滅族)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불과 육백 명만이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대재앙은 여태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열한 지파는 자신들의 행위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음인지 살아남은 육백 명에게 아내를 맞이하게 해줌으로써 지파의 명맥을 이어가게 해줍니다(삿 21:17). 이렇게 해서 ‘베냐민’은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으며, 훗날 다시 일정 부분 이전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리의 두 얼굴. 이처럼 한 사람의 기질(氣質)은 은사나, 시간이나, 축복이나, 땅의 기업처럼, 늘 위험과 기회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봅니다. 이리의 야성(野性)과 용맹을 지닌 ‘베냐민’은 작은 거인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의의 병기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면, 야성과 용맹이 지나쳐 불의(不義)의 병기가 되어 타인은 물론 자신마저도 멸망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용맹스러운 ‘베냐민’의 후손을 또 한 사람 만납니다. 그 이름 ‘사울’입니다. 자신이 속한 지파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된 ‘사울’ 왕의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했겠습니까! 그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열심이 지나쳐 종교적 광신도가 되어있었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도 스스럼없이 행하던 그였으니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그가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 기질을 가진 자인지를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로 기록될 수 있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그도 함께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그분의 은혜로 거듭나게 된 것이지요. 거듭난 이후 그의 기질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거세당한 짐승의 수컷처럼 온순한 양이 되었을까? 식물인간처럼 살았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야성과 용맹을 갖춘 ‘베냐민’의 후손입니다. 괴물 같은 불의의 병기가 그리스도를 위한 의의 병기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 스스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광스러운 기회는 무엇입니까? 은사나 기질은 무엇입니까?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남은 물론 나까지고 파괴하고, 공격하고, 비난하며, 죽이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울’이 되어 그리스도의 병기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11. 야곱의 임종
마침내 열두 아들 모두를 향한 유언을 마치고, 이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해야 할 시점이 왔습니다. 이 일을 다 끝낼 때까지 ‘야곱’은 결코 죽을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일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작이 있는 모든 곳에 끝도 있는 법, 이제는 떠날 시간입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그의 죽음을 놓고 이렇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속임수의 달인이었다 해도 죽음이 그를 모르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의 눈먼 아버지 ‘이삭’은 속일 수 있었을 지라도 사망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분노한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할 수는 있었을지라도 무덤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황야에서 밤을 지새울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이제 곧 사망의 음침한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싸워 이기기도 했지만, 이제 그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놓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살아생전에 늘 그와 함께 하셨고, 그의 모든 길을 인도하셨으며, 모든 위기와 한란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손을 떠나, 이제 마지막 원수의 손에 떨어져 무시무시한 복수의 칼날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일 것입니다. 죽음에도 무슨 종류가 있고, 차별이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즉 단순한 임종(臨終)이 있는가 하면, 선종(善終) 즉 선한 마무리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종교적 위인이나 성자(聖者)의 죽음을 선종(善終)이라 칭합니다. 그가 살아온 위대한 삶을 두고 내리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인 셈입니다.
하늘의 도성. 혹시 ‘야곱’의 죽음도 단순한 임종이 아닌 선종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일생은 치열했고 파란만장(波瀾萬丈)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목숨을 걸 정도의 열정과 신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일생을 본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 모델로 더 적절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만일 선종의 의미를 재정의(再定義) 한다면, 즉 선종을 그가 살은 인생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마지막 순간만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라면, ‘야곱’의 임종을 단순한 임종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그가 지나간 세월동안 추구했던 가치들이 대부분 이 땅에 속한 것이었다면, 이제 마지막 순간에 드러내고 있는 그의 소망은 하늘에 속한 것 즉 “하나님의 나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조상들에게 돌아가리니”(29절상).
물론 “조상들에게 돌아간다”는 말은 단순히 “죽는다”의 표현의 완곡어법에 불과하며, 이를 두고 ‘야곱’이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절하 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자신이 어디에 묻힐 지에 대해서도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집트’에 묻히든 ‘가나안’에 묻히든, 조상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묻힌 곳에 묻히고 싶은 것입니다.
전에도 그는 ‘요셉’에게 같은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 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47:29-30). 이는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조상들과 함께 연합하고 싶다는 소망과 믿음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요? 참고로 <창세기> 화자는 ‘이스마엘’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가 자기 백성들에게 돌아갔다고 쓰고 있습니다만(25:17), 그가 묻힌 곳은 ‘막벨라’ 동굴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을 비롯한 우리의 족장들이 과연 부활 소망을 지니고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히브리서>는 오늘 우리를 위한 교훈을 주기 위함인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9-10)
이 구절은 ‘아브라함’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만, 믿음의 백성 모두를 향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이 진정 부활에 대한 소망을 피력했든지 아니 했든지 상관없이 그의 임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위대한 마감 즉 선종이라 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가 오늘 새 이스라엘 즉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권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하지만 세상은 이와 같은 생각을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아니 무지(無知)하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모르니 배척하는 것이지요. 세상은 그에 속한 사람들이 철저하게 세상과 동화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땅에 살면서 하늘을 생각하는 우리를 조롱합니다. 종교라는 마약에 취한 자라든지, 또는 죽음의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하여 헛된 망상을 꾸는 자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의 믿음도 삶도 모두 헛된 것이 되겠지요.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실재(實在)하고 있음을 애써 믿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도. “위에 것을 생각하라”고 해서 땅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말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공상가나 몽상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야곱’이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야말로 치열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내일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너무 지나친 권고일까요? ‘야곱’이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도 그가 묻힐 땅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일까요? 그는 자신이 묻힐 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29-32절).
조상들에게 돌아가면 그만인 그가 굳이 이 땅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 땅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 땅에 나그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이 땅에 그렇게 집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땅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야곱’의 자식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 땅이 약속의 땅이긴 했지만 값을 주고 사야했던 땅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땅을 샀던 것입니다. 이 무슨 모순된 태도입니까! 약속을 믿었으면 그냥 그 땅이 내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될 일이지 돈을 주고 사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그 땅을 사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야곱’의 간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땅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산 것이니 우리의 소유가 되어야 함을 주지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의 관심사는 항상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살다가, 돌아가신, 이 지구에 있다는 말입니다. ‘야곱’의 관심사가 ‘막벨라’ 동굴이었다면,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온 지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고백했던 대로 이 우주에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한 영역이 한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우리가 이 땅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신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즉 “어떻게 선종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가 하늘의 도성(都城) 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이는 분명 도피적이고 염세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지금 ‘야곱’처럼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 그분 앞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충격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까? 아니면 환희(歡喜)와 만족으로 서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우리에게 지혜자의 충고를 남겨놓은 바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늘 죽음을 묵상하고, 죽음에 즈음해서는 생명을 묵상하라.” 본인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우리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몸부림칩니다. 마치 이전에 한 번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죽음이 이토록 생소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늘 죽음을 묵상하며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죽음을 바라보며 절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 앞에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바울’ 사도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8)
죽음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절망시킬 때, 생명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을 기억합시다!
12. 애곡할 때와 기뻐할 때
그동안 이런 저런 초청이나 소식을 많이 접하며 살아왔지만, 나이 들면서 부쩍 자주 접하는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주변 지인(知人)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싫던 좋던 장례식장 출입이 잦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에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이전 젊었던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뭐라 할까 내 자신도 이제 죽음의 문턱에 아주 가까이 와있다는 느낌이 그것입니다.
젊었던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입니다. 그 때야 고인(故人)이 된 분들과 나와의 나이 차이가 적어도 한두 세대는 넘어, 죽음이 그렇게 심각하게 와 닿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고인과 나이 차이가 이제 불과 십여 년 안팎이거나 때로는 나의 동료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굳이 잊으려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의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등등 온갖 상념(想念)에 빠져 있는 내 모습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과연 정상인지 아닌 지조차 헷갈리기도 합니다.
죽음을 잊음. 지난 시절 내 모습을 그려보면 이는 분명 정상이 아닙니다. 영국 가수 ‘메리 홉킨스’가 오래 전에 부른 유명한 노래 “Those were the days”의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친구여, 그 때는 정말 좋았지. 우리는 그 시절이 끝도 한도 없을 줄 알았지. 영원히 노래하고 춤추며 살 수 있을 줄로 알았지.” 나도 지난 세월을 이런 자세로 살아왔다는 생각입니다. 머리로야 인생에 누구나 종말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가슴으로는 애써 거부하고 잊으려 했던 것이지요.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른 바 “탈현대 사회”(postmodern society)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라는 종교단체가 운명하는 신문,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에디’(M. B. Eddy)라는 사람이 죽음을 “생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신문이야 설립자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더라도, 과연 누가 “생각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의 존재 자체를 아예 거부하려는 태도는 이와 같은 범신론 계열의 종교단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즉 종교나 세계관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업주의에 물든 현대 사회와 문화도 그 공모자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우리의 가장 큰 원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문화는 오히려 죽음을 잊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온갖 종류의 신무기들을 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건강보조식품, 성형수술, 찜질과 목욕, 체육 시설 등. 이들 모두 활기차고 건강한 젊음을 유지하는데, 즉 죽음을 잊게 하는 필수적인 무기라고 선전하면서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 죽음을 잊게 하려고, 이를 대체할 만 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에도 가히 천재적입니다. 보험회사가 만들어낸 “생명보험”이라는 단어가 그 한 예입니다. 사실 이 보험의 이름은 “사망보험”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보험은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현실을 완화시키거나 축소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죽었다”는 말 대신에 “서거(逝去)하였다”, “영면(永眠)하였다”, “별세하였다”, 또는 “숨을 거두었다” 등으로 고쳐 말하는가 하면, 기독교인의 경우라면 “소천(所天)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에 대한 표현도 달라집니다. 죽은 자는 “고인”(故人)이나, “사랑하던 사람”으로 바뀌고, 그는 “시체 보관소”가 아닌 “영안실”(永安室)에 안치가 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광고도 “죽음 알림”이 아니라 “부음”(訃音)으로 전해집니다.
이처럼 많은 은유(隱喩)나 상징을 가진 단어가 죽음 말고 또 있을까? 왜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많은 수식어를 헌정(獻呈)하고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태도는 마치 죽은 자를 방부처리하고 얼굴에 화장(化粧)을 해놓아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는 역설적으로 죽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이 아닐까?
우리의 이와 같은 모습 뒤에는 여러 요인들이 아주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 심리적인 요인이 가장 큰 것처럼 보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시그먼드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가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죽음은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가장 두려워하는 실재(實在)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더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더욱 부인하고 거부하고 싶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상 세계 즉 영화나 TV 드라마 등에서 죽음의 융단포격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죽음이 일상사가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려는 욕구 역시 비례해서 늘어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역설은 그것을 무시할수록 더 절망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 찾아왔을 때 나타나는 반응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놓고 대부분의 유족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죽음을 잊고 살다가 정작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이를 맞는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죽음을 잊으려 하다가 부활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요?
죽음을 환영함. 이처럼 죽음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하려는 “탈현대 사회”의 모습과는 달리, 이를 운명처럼 즐겁게 수용하려했던 모습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보여주고 있었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당시 ‘아테네’ 사회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이단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죄목으로 당국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이 가까워오자 제자들과 지인들이 몰려와 한사코 안 된다고 하면서 말렸습니다만, 그는 오히려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스스럼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독배(毒杯)를 마시고는 죽었습니다. 사라져 갔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지요.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죽는 일을 즐거운 일로 생각하게 했을까? ‘소피스트’(Sophist) 철학자로서의 자기 논리와 확신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는 영혼불멸설을 신봉하는 자로서, 선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유한하고 썩을 수밖에 없는 육체 속에 갇혀 있으므로, 죽음만이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혼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자 구원자가 되는 셈입니다. 지고(地高)의 자유는 결국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태도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결국 이것은 자살을 조장하거나 부추기는 그야말로 혹세무민하는 가르침이 아닐까? 백번을 양보해서 그의 생각이 맞다 치더라도, 그 자신은 평화롭게 죽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은 유족이나 친지들이 겪어야 할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충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스타 제자 ‘플라톤’(Plato)은 그의 저서 <파이도(Phaedo)>에서 스승이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를 지켜보던 모두가 큰 슬픔에 잠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항거함. 이와 같이 죽음을 깡그리 잊고 사는 사회도, 그렇다고 죽음을 영혼의 자유에 이르는 유일한 대안으로 환영하는 사회도, 모두 건강한 사회라 보기 어렵습니다. 잊을 수도 없고 즐겁게 맞이할 수도 없는 상대라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것에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말입니다.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우리는 결코 죽음을 잊어버리거나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는 죄와 율법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소지한 채 우리를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를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거부하고 항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실재하지만, 이미 패배했고 무기력한 식물인간처럼 누워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죽었다”는 선포이자 실증(實證)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항상 인식하되, 또한 거부하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인 듯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에 항상 기억하라는 것일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부활하였고 또한 앞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거부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동시에 소망을 가지고 기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죽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말입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는 울었습니다(50:1). 하지만 소망 없는 자처럼 절망하거나 비탄에 빠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울어야 할 때이지만, 울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과 당부를 존중했으며, 자신이 했던 약속을 지키려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해(遺骸)를 ‘가나안’ 땅 조상의 매장지 ‘막벨라’ 동굴에 안치했습니다(13절). 그리고 훗날 자신이 죽을 때에도 그를 같은 곳에 묻어달라고 남은 자들에게 당부할 것이었습니다(25절). 그가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와 같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소망 없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는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슬픔의 순간에도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고하고 있습니다(참고. 살전 4:18).
하지만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대우(待遇)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다고 해서 죽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그를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극진한 예를 다하여 그를 떠나보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말입니다. 지금 그는 온갖 예를 갖추어 아버지의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사십일에 걸친 방부처리, 칠십일 동안의 애도와 추모 기간, 그리고 ‘이집트’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장엄한 장례 행렬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예를 다 갖추어 죽은 자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추모식이 당시 이집트백성들에게 어떻게 비추었을까? 무슨 깨달음을 주었을까?
공동체가 함께. ‘프리센’ 목사님은 “장례식이 뜸할수록 찬된 영성을 형성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장례식이 마치 북극성 같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통해 현재 서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 목적지로 방향을 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은 “우리는 장례식에서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을 추스린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 “장례식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잣대를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말입니다. 장례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아버지였으며 사랑스러운 남편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잘 돌보았고, 교회에서 젊은 여성들의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테레사 라이소트’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홀로 죽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늘 함께 겪는 경험입니다. 계속되는 의식과 예배를 통해서 임종은 물론 그 이후까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마지막 두 죽음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를 죽게 했던 그 죽음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또한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13.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어린 딸이 자기 집안의 가보(家寶)로 전해 내려오던 오래된 도자기를 실수로 그만 깨어버렸습니다. 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가 퇴근 후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고했습니다. 아이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딸을 부드럽게 안으며 괜찮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끼는 가보라도 자식보다 더 귀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아이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를 제대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자기가 저지른 일이 너무 엄청나서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그날 저녁에 퇴근하여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다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지난 일이고 다 용서하였으니 다시는 괜한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소녀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렇지, 나는 어제 이미 용서받았지.”
그러나 소녀의 확신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출근하는 아버지를 향해서 다시 용서를 빕니다. 정말이지 아주 소심하고 마음 착한 딸인 듯합니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정색을 하며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고 이릅니다. 딸도 죄송하여 그러겠노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조금 후 다시 소녀는 자신의 생각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다시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아버지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내가 이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아, 내 딸은 너무 착해! 내가 몇 번이고 용서했다고 했는데도 계속해서 용서를 구하고 있으니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이제 그만하면 되었으니 정말 용서해 주어야지!” 뭐 이런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이 딸과 똑 같은 수준에 있다 하겠습니다. 도대체 이 딸의 문제는 무엇일까?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려 했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왜 자기를 무조건 용서해 주는지를 이해하려 했다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오, 통재라!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려 하다니! 그것은 이해가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사실 나도 지난 시절 이와 같았습니다. 아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시큰둥했습니다. 그래도 체면상 어쩔 수 없이 대답 정도는 해야겠기에, 나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글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알겠는데, 내가 과연 그분을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내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실은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 역시 그분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들려주는 작은 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를 졸라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챙겨 집을 떠나 모든 것을 다 탕진한 후에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가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기 때문이었을까요? 다시 돌아가면 아버지가 반갑게 무조건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여전히 작은 아들로 받아 줄 줄로 생각하며 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대가와 보복을 치루는 한이 있더라도 굶어죽은 것보다야 낫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하인이라도 좋으니 그 집에 빌붙어 생계라도 해결하자는 속셈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그렇게 사정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를 무조건 용서해 줄 것이라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지난 시절 단 한 번도 아버지와 그렇게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자신 한 번도 아버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는 그에게 다만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두려운 보복. ‘요셉’의 형들이 이 작은 아들과 꼭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동생이 그들과의 두 번째 상봉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 후에 왜 그렇게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지난 죄악을 모두 일소에 부치고 무조건 용서해 주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경쟁과 시기, 음모와 잔재주 등으로 잔뼈가 굵은 그들의 사전에 조건 없는 용서라는 단어가 있을 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이 베푸는 호의(好意)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고, 대가성(代價性) 없는 정치 헌금이 있을 수 없듯이, 그들에게 용서란 낯설고 생소한 단어일 뿐입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늘 ‘요셉’의 의도나 진심을 헤아리느라 바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동생의 진심을 밝혀내려 했지 그 진심을 함께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전도나 봉사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가 이면(裏面)에 감추고 있는 진정한 의도를 읽으려 한다는 점 말입니다. 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우리의 문제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더 힘들고 어렵다는 점 말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용서가 위로나 위안이 아니라, 부담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요셉’은 그동안 몇 번에 걸쳐서 형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두려움은 가시기는커녕 ‘야곱’이 죽은 후에는 더욱 큰 공포로 짓눌려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의 유언을 들먹이며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자기들을 용서해주라는 유언을 그들에게 남겼다는 것이지요(16-17절).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조금 전 비유로 들었던 딸의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을까요? 진심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섭섭함이나 답답함을 넘어 화가 치미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심하면 보복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례를 비유로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왕의 아들의 결혼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왕은 자신의 초청을 거절한 백성들과 그 동네를 진멸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마 22).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화자는 그가 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17절).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과 측은함에서 흘리는 눈물이었겠지요! 눈물을 흘리기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심, 즉 “독생자”를 믿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그분은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눅 13;34-35)
형들 앞에 선 ‘요셉’의 모습이 ‘예루살렘’ 앞에 선 그리스도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예루살렘’에 보내신 것처럼, ‘요셉’을 그 형들에게 보냈던 것처럼 보입니다. 두 경우 모두 용서라는 코드를 그들의 유전자 속에 심어주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사실 ‘요셉’의 형들이나, ‘예루살렘’이나, 도자기를 깨뜨린 그 딸이나, 한 결 같이 AIDS(후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듯이 ‘에이즈’란 무슨 특별한 유전질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병균에 대항하는 항체(抗體)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 모두는 용서받는 일에 지극히 서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가 오히려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니 늘 “왜?”하고 묻습니다. 용서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를 모르니 답답하고 두려운 것은 아닐까요?
두려워 말라. 물론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요셉’의 형들의 경우만 해도 두려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인생을 망가뜨린 원흉이자 원인 제공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어려워하기 보다는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내 속에 용서에 감응할 수 있는 센서가 아예 없거나, 또는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한 번도 진정한 용서를 받아본 적도 없고, 나 역시 진정으로 용서해본 경험도 없습니다. 나나 세상이나 항상 용서에 전제조건을 달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동생이 형을 용서하겠다는 데, 아버지가 자식을 용서하겠다는 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용서하겠다는 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아무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분의 음성을 듣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 ‘요셉’이 형들에게 들려주는 그 위대한 용서의 음성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절). ‘요셉’은 형들로부터 마치 다짐이라도 받겠다는 듯이 두 번씩이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복수는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지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행여나 믿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목도하게 됩니다. 형들의 자식들을 맡아 길러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장면이 그것입니다(21절). 약속의 보증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인데, 과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분에 넘치는 ‘헤세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로마서>는 이보다 더 큰 ‘헤세드’가 있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형들의 자식들을 맡아 길렀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의 용서를 아무 두려움 없이 믿을 수 있다는 담보이자 증거라는 말입니다. <로마서>는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복음의 가장 놀라운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거나,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다 거나, 우리와 화목하셨다 거나,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절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형님이 되셨다는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뻔뻔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아무 겁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우리의 요청을 아뢸 수 있다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요한일서> 역시 한 목소리로 합창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여전히 그분의 용서가 의심스럽습니까? 여전히 그분의 용서가 두렵습니까? 지금 미워하고 있는 그 누군가를 용서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4. 요셉 교회, 요셉 목사
얼마 전 TV 뉴스에서 공중 화장실에서 거주하고 있는 어린 세 형제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서 그 후유증 때문인지 정신 장애 증상이 생긴 상태이고, 이들 어머니는 그 때문인지 아이들을 내버리고 가출하고 없습니다. 잠은 공중 화장실에서 해결하고, 끼니는 백화점 등을 돌아다니면서 공짜 시식 코너 같은 곳에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은 어떻게 지내는지 기자가 물었더니 화장실 벽에 걸려있는 온풍기를 틀어놓고 언 손을 녹인다고 합니다. 부모가 얼마나 무심했던지 세 아이들 모두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아서 동 사무소나 기타 복지단체 같은 곳에서도 도와줄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 아이는 법적으로 무국적자들입니다. 대한민국에 이처럼 부모들이 내다버린 아이들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가족이 완전히 해체된 것이지요.
누가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할까요? 누가 이들에게 복음(福音)이 되어야 합니까?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국가나 정부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답을 한 사람의 원조(元祖)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계몽시대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일 것입니다. 그는 저서 <민약론(民約論)>에서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분위기로 보면 아주 혁명적이고 누구나 귀가 솔깃했을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라면 그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목하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소위 보편적 복지 논쟁도 한 예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루소’라는 사람은 생전에 여성 편력이 대단하여 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만나는 여성들마다 그의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나중에는 ‘루소’ 자신도 누가 자기 아이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가 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았을 리가 없습니다. 한 집에 모두 같이 살아야 하는데 그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일까? 그는 국가를 생각했습니다. 가정 대신 국가가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결국 자기가 할 일을 국가가 대신 좀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이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결국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그 원대한 이상(理想)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귀찮고, 힘이 들고, 돈이 드는 일이니 내 대신 정부나 국가가 맡아서 해달라는 것이지요.
요셉의 복음. ‘요셉’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처음 형들에게 비친 그의 모습은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관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생 앞에서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 듯 떨었습니다. 동생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 때 그들은 더욱 크게 떨었습니다. 그들이 지난 날 저지른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형들의 지난 잘못도 용서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형들에게 몇 번이고 거듭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두려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이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요셉과 화평”(peace with Joseph)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만, 그들의 현실에서 “요셉의 평강”(peace of Joseph)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요셉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만, 그것이 내면화 되고 육화(肉化)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요셉의 복음”이 여기까지라면, 안타깝지만 그의 복음은 온전한 복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한 것이 “요셉 복음”의 전부였을까? 아닙니다. 산의 정상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요셉 복음”의 절정은 용서와 화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절정은 이것입니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21절중).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의 진수(眞髓)를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요셉’ 앞에 선 형들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원수였으며, 멸망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진노를 그분의 아들 예수님에게 전가하셨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和睦) 즉 화평(和平)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판관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義人)이라는 판결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요셉’의 형들처럼 여전히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심판자가 아니라,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화평”(peace with God)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평강”(peace of God)을 자동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왜 그럴까? 단순히 원수에서 친구가 되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뀐 것은, 따지고 보면 어디까지나 사회적이고 법적인 변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재판관이 한 강도를 무죄방면(無罪放免) 했다고 해서, 그 재판관이 강도와 가까운 친구가 되겠다거나, 사랑하는 연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도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기까지 라면, 즉 단순히 용서하고, 무죄방면(無罪放免)하고, 구원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라면, 복음은 완전한 복음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동생으로부터 몇 번이고 용서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형들이 여전히 떨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재판관이 이 강도의 아버지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절정은 이전에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신약> 곳곳에서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나니”(롬 8:15-16).
여기서 성령은 양자의 인격입니다. 원수가 갑자기 양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새로운 인격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형님으로 부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물론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자란 사람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에 호감보다는 불쾌감을 더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가 갖는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친밀함과 자애로움일 것입니다. 나도 참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인데, 내 자식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더지도 자기 자식은 끔찍이 사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난 번 ‘밴쿠버’ 방문 시에도 그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둘째 아들 녀석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가엽고, 측은해 보이는지 속으로 눈물을 좀 흘렸습니다. 오래 만에 우리를 만나 그런지, 여기가 아프고 저기가 편지 않다는 등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다. 공항에서 우리를 바래다주고 홀로 되돌아가는 녀석을 보면서 울컥 눈물이 솟구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에 대한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도 바로 이런 아버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요셉 교회, 요셉 목사. ‘요셉’이 전하는 복음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이제 ‘야곱’ 공동체 즉 ‘야곱’ 교회의 맏형이 되고, 목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야곱’이 방치해두었던 가족 공동체, 즉 가정 교회를 회복하고 새롭게 개척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 즉 “계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의 계보가 이러하니라”(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도합 열한 개의 계보 중에서 “하늘과 땅”의 계보를 다루고 있는 첫 번째 것만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도 결국 가족 즉 교회에 관한 이야기이며, 교회가 없이는 복음도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구 사회를 거치는 동안 가족의 의미나 가치가 <구약>에서 가르치고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버렸습니다만, <신약>의 복음은 이를 다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사람들이 학교나 직장 또는 결혼 등을 통해서 이동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가족은 해체되고 그 전통과 역사 또한 단절되어가는 이 시대에 “신약 교회”의 이상과 정신은 더욱 각별하다 하겠습니다.
‘요셉’의 소명도 이것입니다. 즉 “요셉 교회”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며, 그리고 자신이 “맏형”이 되는 교회를 이루겠다는 선언입니다. ‘루소’가 그 자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야곱’이 방치해 두었던 그의 후손들을 맡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며, 기르겠다는 선언입니다. 그가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았는지 화자는 잠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50:22-23). 그는 실로 소명이 시키는 바대로 열정적으로 살다 간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요, 사도로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자기 어머니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참고. 요. 19:27). 그리고 부활 후에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주문하기도 했습니다(요 21:15-17).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유대’ 국가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제자가 맡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요청은 ‘베드로’로 하여금 제자가 아니라 선생이 되라는 것이고, 자식이 아니라 부모가 되라는 것이며, 양이 아니라 목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제자로 부르실 때부터, 이 같은 계획과 꿈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와 우리 교회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약간 다르게 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교회에서 서 동관 목자와 김 태정 목자가 떠나고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대답이, “아, 그야 다른 교회로 옮기면 되지”라고 한다면, 우리 교회는 앞날이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로 끝날 것이 분명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사 입히고, 교육을 시키는 것은 자녀들이 어린 아이로 남아있지 않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부모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식의 소명은 부모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근심은 자식이 자라지 못하고 늘 지진아(遲進兒)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식을 부모는 평생을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며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실패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근심의 자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와 <우리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약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5․8 기도 제목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목표였습니다. 이 기도를 성취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전략은 <동관 목장>의 네 양(洋)이 모두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 안에 <순애 교회>, <필연 교회>, <혜영 교회>, <재진 교회>가 세워지면 됩니다.
우리의 목자 장이자 맏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소명을 이루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중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셨던 사역,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사역이 곧 나의 사역임을 늘 일깨워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헌신하고 결단합시다.
15. 이집트의 관(棺)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 이들은 1950년 <6․25 사변>을 일으킨 장본인들입니다. 김일성이 주범이라면 나머지 두 사람은 공범들입니다. 이 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범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독재자였으며, 거짓과 배신의 명수(名手)였으며, 공포정치의 대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죽음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갔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세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미이라’가 되어, 죽음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모습으로 화려한 관 속에 누워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대한 ‘피라미드’속의 ‘바로’ 왕처럼 말입니다.
누가 이들을 이처럼 박제품(剝製品)으로 만들어놓았을까요? 그들의 추종자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임종 시에 그렇게 해달라고 유언이라도 했을까?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아서 죽어서도 계속 통치하고 싶어 했던 것일까? 그들이 무엇을 더 이야기하고 싶어 했든, 이들 세 ‘미이라’가 오늘날 관광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정작 본인들이 가장 들려주기 싫어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그것이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이 한 결 같이 두려워하는 그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죽음 말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죽음 말입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은 죽은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떠한 절대 권력도 죽음을 이길 권력은 없다는 것을 이들 ‘미이라’는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풀은 말라 죽고, 꽃은 시드는 것으로 그만이지만, 이들의 죽음은 그렇지 못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말씀은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심판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을 대비하고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에 있는 ‘요셉’의 관도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의 죽음 이후 출애굽에 이르기까지 사백여 년의 세월 동안 그 땅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죽음을 이길 왕후장상(王侯將相)은 없음을 교훈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사실 <창세기>는 죽음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부터, 질서와 생명과 희망과 약속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창세기>는 이렇게 끝이 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가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거룩하다고 환호하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는 갖가지 기이한 생명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창조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가 벗었으나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결말을 짓고 있습니다(창 2).
그렇습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누리던 그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과 영광과 존엄도 그를 결코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구원한 ‘요셉’이었지만 정장 그 자신은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참고. 마 27:42).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그 관은 그렇게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시대와 이후 사백년을 살아가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말입니다. ‘모세’의 노래가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시 90:10-11)
실패할 수 없는 약속. 그의 노래는 허무와 무의미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간절한 소망도 함께 담겨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마찬가지로 ‘요셉’의 관 역시 죽음의 필연이나 권능만을 우울하게 증거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라, 약속과 희망 역시 실패할 수 없음을 함께 증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약속과 희망이란 원래 믿는 자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겠지요. ‘에덴’ 동산도 원래 그렇게 출발했던 것입니다. 약속과 희망과 생명과 활력의 동산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에덴’ 동산에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도 ‘하와’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본인은 ‘하와’가 뱀의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불신했다는 사실에 더 방점(傍點)을 두고 싶습니다. 알다시피 불신의 결과는 전 우주적이었습니다. 만물의 지배자, 통치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그가 죄와 죽음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지요.
‘하와’가 끝까지 불신 가운데 살다 갔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오늘날에도 충실한 ‘하와’의 후예들은 끊임없이 나타나서는 세상을 혼미하게 합니다. 아마 이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가장 열렬한 ‘하와’의 후예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만들어진 신>을 쓴 ‘리차드 도킨스’와 <시간의 역사>의 저자 ‘스티븐 호킹스’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구”일 뿐이며, 우주는 창조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지옥이나 천국도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믿든 어디까지나 본인의 자유이겠지만,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한 마디 할 때마다 마치 선지자나 구세주를 만난 듯 열광하고 그들의 주장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환호하며 응답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아, 불신이란 이렇게 쉬운 것을! ‘요셉’의 관도 무려 사백여 년을 한 자리를 지키면서, 그 앞을 지나치는 수 없이 많은 후손들에게 동일한 약속을 증거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오직 믿음의 자손들에게만 의미 있게 다가갔을 것이리라! ‘요셉’의 관이 들려주었던 약속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었던 그 약속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5:13-14).
이 약속을 상기시키고 있는 사람은 그동안 “약속의 땅”에서 살아왔던 ‘요셉’의 형들이 아니라, 이방의 땅, 약속 밖의 땅, 이집트에서 살아온 ‘요셉’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50:24-25).
그가 들려주는 약속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반복해서 들어왔던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가 그 약속이 “하나님의 맹세”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들려주던 그 약속,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반복했고, 아버지 ‘야곱’이 반복해서 들려주던 그 약속을 후손들에게 다시 반복했고, 사백년 동안을 그렇게 한 결 같이 반복해갔던 것입니다.
구름 같은 증인들. 아무런 기념비조차 없었기에 사백년 동안의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허물어지고, 낮아져서 누구의 무덤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을 그 무덤. 하지만 그 무덤은 그냥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은 결코 예루살렘을 잊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역사의 민족이라는 증거입니다. 역사가 없는 민족, 있어도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6․25 사변>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미국 정부는 아직도 이 한반도 어딘가에 묻혀있을 미군의 유해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유해는 극진한 예를 다하여 그들의 국립묘지에 옮겨 그 이름을 그들의 역사에 남깁니다.
우리나라도 참으로 모진 근대사를 겪어오는 동안 먹고 사는 일에 바빠 이와 같은 전쟁 유해를 발견하는 일에 거의 무관심하게 지내왔습니다만, 다행스럽게 우리의 의식 수준이나 역사의식도 많이 향상되어 전쟁 유해를 발굴하는 일과 유가족을 찾아 보상하는 일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그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의 관”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일에 하나의 기념비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요셉’의 관, 즉 하나님의 약속은 대를 이어가며 전해져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감당했는지 알 수 없으며, 그들의 이름을 더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를 이어갔다는 사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증거로 <창세기>가 끝나고 곧바로 이어지는 책, <출애굽기>에서 한 부부의 이름 ‘암람’과 ‘요게벳’을 만나게 됩니다(출 6:20). 이들 부부는 ‘모세’와 ‘아론’의 부모로서,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가르치고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 당대에 ‘요셉’의 유훈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요셉’의 마지막 유언은 이루어졌습니다.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는 그 유언 말입니다.
<신약>은 이상할 정도로 ‘요셉’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유일하게 그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그리고 ‘암람’과 ‘요게벳’과 ‘모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 11:23-24)
‘요셉’의 관은 위대한 시작의 책 <창세기>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요셉’의 관은 없습니다. 있다면 “빈 무덤”의 증거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백년의 어두운 세월 동안 무수한 증인들을 통해서 ‘요셉’의 관을 보며 희망의 역사를 이어갔던 것처럼, 새 이스라엘 교회도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빈 무덤”의 증거를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우리는 죽음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나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우리 또한 그 부활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1-57)
연습과 토의
* 아래 질문들에 대해서 별도 노트북에 나 자신의 답변을 기록한 다음 지체들과 나누어봅시다.
1. ‘야곱’이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겠습니까? 나는 내 자식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줄 계획입니까? 그 계획으로 일환으로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두 족장 ‘이삭’과 ‘야곱’이 그들의 임종 시에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각자의 평소의 모습과 비교해 봅시다. “자라간다 또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두 족장의 선택은 어떤 점에서 닮았으며, 어떤 점에서 대조적입니까? 그리고 두 선택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야곱’이 후손에 대해서 지고 있는 책임과 특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어주신 또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에 대해서 지고 있는 독특한 책임과 권리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새 이스라엘”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지고 있는 독특한 책임과 권리는 무엇입니까? 나는 성전이고 또한 교회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독특한 권리와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과연 세상 끝 날까지 교회와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음 구절들을 상호 비교하며 논의해 봅시다: 창 48:21; 출19:6; 행 1:8; 마 28:19-20; 벧전 2:9.
4. ‘요셉’은 “요셉 교회”의 목자요 목회자였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5. ‘이집트’에 있는 ‘요셉’의 관에 대해서 묵상해봅시다.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