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두 형제 이야기
김태정 목사창세기 4:1-2약 14분 분량
내 큰 아들 달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얼마나 귀엽고 잘 생겼던지 모릅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면 보는 사람들마다 아주 귀엽다고 한 마씩 해댔습니다. 외국인들의 눈에도 이 아이가 귀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달우를 보고 귀여워할 때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우쭐해지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 이 녀석은 분명 나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지는 않았을 거야, 적어도 외모에 있어서는 말이지.” 평소 내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늘 일종의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아들에게 거는 기대도 대단했습니다. 자라가면서 하는 짓도 아주 똑똑하고 예사롭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 녀석 분명 나중에 큰일을 할 거야. 내가 못 다한 일을 할 수 있겠지.” 나는 이렇게 믿으며 커가는 그를 아주 흐뭇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아들에 대해서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참 한심한 아버지라고 놀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 이 같은 기대를 가지지 않겠습니까!
특히 어머니 쪽이 그 정도가 더 심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뱃속에서 열 달이나 품고 있다 세상에 내보냈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겠느냐는 것이지요. 그 어머니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가 낳은 자식에 거는 기대는 더욱 각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대(代)를 이어 연결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내 자식을 통해서 이루실 신비하고도 놀라운 일을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어머니들, 심정이 어떻습니까? 흥분과 기대로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여자의 아들. ‘아담’과 ‘하와’는 어떠했을까요?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임신의 경험, 내 배속에 그 “약속의 씨”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참고. 3:15), 자신들에게 내려진 저주가 이 아이를 통해서 사라지고 다시 그 동산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날을 손꼽아 헤아리고 있지 않았을까요? 요즘 같았으면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열 달, 아홉 달, 여덟 달, 한 달, 한 주일, 삼 일, 그리고 내일... 그야말로 하루가 여삼추(如三秋)와 같은 심정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여인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 즉 “생명” 또는 “생명을 주는 자”로 지은 것만 보아도 그의 믿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분명 죽을 것”(2:17)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의 동쪽”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아들의 탄생은 그 자체로써 구원이고, 회복이며, 소생(蘇生)이 될 것입니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납니다! 두 사람의 기쁨과 흥분을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까? 구세주가 태어난 것이에요! 그들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 말입니다. ‘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기록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여인의 배에서 태어난 첫 인류, 배꼽을 지닌 첫 인류, 부모를 구원해 줄 자식, 세상에 생명을 전수(傳受)해 줄 약속의 씨, 등등. 내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새록새록 숨 쉬며 젖을 빨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와’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혹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과 겹치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두 아들 모두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줄 아이, 즉 그리스도인 것이지요.
아이를 내려다보며 그의 부모가 무엇이라 환호하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절하). 부모의 기대, 환희, 희망, 그리고 자랑을 엿볼 수 있는 환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역본은 이 구절을 “내가 ‘야훼’로 부르는 한 남자를 낳았다”로 번역하기까지 합니다. ‘화와’의 기쁨이나 자신만만함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아이는 처음부터 그 운명이 엇갈리고 있었음을 ‘하와’가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자신의 팔에 안겨 평화롭게 잠들고 있는 이 아이가 인류의 첫 살인자, 그것도 인류의 첫 번째 존속살인자(尊屬殺人者)가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가해자와 피해자 둘 다 자신의 배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가해자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피해자의 어머니가 되어 그 어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도대체 누구를 변호해야 하며,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달리 원망의 대상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처음부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그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지요.
뱀의 아들. 하나님의 예언에 따르면, “여인의 후손” 즉 ‘가인’을 통해서 생명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되어있었으나, 인류의 역사는 처음부터 아이러니 그 자체로 시작합니다. 생명이 아니라 피, 즉 죽음으로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생명을 주는 자가 아니라, 죽음을 주는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제 여인의 아들이 아닌 뱀의 아들로 성장하게 될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던 또 다른 여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창조 명령”(또는 “지상 명령”)의 핵심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번창하라”입니다(참고. 1:28). 이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이 창대하게 되리라”는 약속인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 도처에 하나님의 약속이 정 반대로 성취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희망 찬 약속으로 시작하였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경우 말입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아담’과 ‘하와’일 것이고, ‘가인’을 그 두 번째 사례로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이좋게 지내던 형제가 어느 날 갑자기 원수가 되어, 형이 동생을 잡아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슨 유산이나, 지위를 두고 다투었을 리도 없고, 보험금이 탐이 나서 동생을 죽였을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인’이 태어날 때부터 무슨 선천성 살인 기질을 가져서, 아무나 닥치는 대로 “묻지 마” 식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부모의 죄의 유전자가 자식에게 전수되었다고 한다면 어찌 ‘아벨’은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두 형제의 기질이나 직업만 보면 오히려 동생이 형보다 더 과격해질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많았다 하겠습니다. 형은 농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고, 동생은 목축업입니다. 잡아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피를 보는 일은 형보다 오히려 동생이 더 많이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직업이 사람의 기질을 만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만, 가능성으로 볼 때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농사일은 때를 기다려야 하고, 날씨를 살펴야 하며,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와 절제와 성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가인’이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니었을까 억측도 해봅니다. 왜 이런 억측인가? ‘가인’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처음과 나중을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 ‘엘리’ 가문도 어떻게 그 종말을 고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삼손’은 어떻습니까? 시작과 나중이 이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가 어찌 한 개인에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도 “제사장 나라”로 출발하였습니다(참고. 출 19:6).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즉 “생명의 씨앗”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도 열방의 ‘메시아’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은 ‘사울’이나 ‘솔로몬’이나 ‘엘리’나 ‘삼손’과 같은 운명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 나라” 즉 왕국보다 더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시작하여, 왕국으로 변질되더니, 결국 이웃 왕국의 노예로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회복의 기회를 맞이하긴 했으나,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판단하다가, 그들의 창조주 즉 생명의 주를 살해하는 결정적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즉 ‘가인’의 후예, “뱀의 아들”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섭리와 운명. 그렇다면 처음부터 ‘가인’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가?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태어나는 것과 태어나지 않은 쪽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마치 사과와 오렌지 맛의 우열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하도 ‘가인’의 인생 역전이 안타깝고 남의 일 같지 않기에 해보는 우문(愚問)일 것입니다.
만일 ‘가인’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면, 그가 처음부터 뱀의 아들이 될 운명이었다면, ‘삼손’도, ‘엘리’도, ‘사울’도, ‘솔로몬’도, 그리고 ‘이스라엘’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선지자 ‘예레미야’가 스스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편이 하도 어려워, 왜 자기를 태어나게 했느냐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을 쏟아낸 바 있습니다(참고. 렘 19).
하기야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팔 자에 대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지 않습니까(마 26:24)! ‘가롯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이지요. 이 말씀은 듣기에 따라, ‘가롯 유다’에게는 인생을 다르게 살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책임은 ‘가롯 유다’나 ‘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돌림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들은 감독이나 작가가 아니라, 출연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감독이나 작가가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악역(惡役)을 수행했던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한 가지 단서가 필요합니다. 그 연극의 감독이나 작가가 하나님이라는 단서 말입니다. 그러나 운명론자는 운명의 존재나 운명의 뜻을 믿을지언정, 하나님의 존재나 그분의 의지(意志)를 믿지 않습니다. 설령 믿는다 해도, 하나님은 모순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에게 그 모든 일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운명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정직한 태도가 아닐까요?
우리는 인생을 흔히 “각본 없는 연극”이라 부릅니다. 이 얼마나 멋진 통찰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에 운명이니, 예정이니 하는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이지요. 예컨대, ‘가인’과 ‘아벨’은 각기 처음부터 가해자와 피해자로 살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했습니다. 동일한 부모, 동일한 가정환경, 동일한 교육, 동일한 하나님, 동일한 예배와 제사, 동일한 기회, 동일한 하나님. 두 사람을 화가(畵家)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각기 똑 같은 도화지(圖畵紙)와 물감 재료를 가지고 각자의 인생을 그려나갔다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가나안’에서 처음 이렇게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획 정리를 해놓고 각 지파를 이주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움밈과 둠밈’, 즉 주사위를 던져 거주지를 정하도록 했습니다. 참으로 민주적인 방식이었고, 하나님의 인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식을 “섭리”(攝理)라 부릅니다. 섭리와 운명은 전혀 다릅니다. 운명이 획일적이고, 결정적이고, 기계적이며, 비인격적이라면, 섭리는 다양하고, 열려있으며, 융통성이 있고, 인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분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격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인격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모 신학자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은 멋진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와 함께, 때로는 우리의 뜻에 반(反)해서,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인생에 간여한 방식도 이와 같았다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인격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그분의 절대자유와 절대주권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면 할수록, 인간의 책임도 함께 강조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인’은 뱀의 자식이 되도록 예정되어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고 ‘가인’은 그 사실을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예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살았어야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면서 내일이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육과 훈련, 예배와 제사, 그리고 교제를 통해서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고 소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어찌 나를 위해서 악한 일을 계획해두셨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지만 ‘가인’은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자신의 소명에 실패했을 때, ‘바벨론’으로 흩어졌던 것처럼, 이제 ‘가인’도 땅에서 유리(遊離)하는 자가 되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었습니다. 두려움과 허무와 상실감을 안고 국적도, 가정도, 이웃도 없이 말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형벌은 사회적 죽음, 즉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선택의 기로. ‘가인’의 행동은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큽니다. 그의 인생은,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나중이 미미하게 된” 두 번째 사례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자유인으로 출발하였으나, 노예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은혜로 시작하였으나, 저주로 끝납니다. 공동체의 축복으로 시작하였으나 외톨이로 전전긍긍하며 살 것입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되어 승승장구 장성(將星)이 되고 국가의 최고 사령관까지 올랐으나, 반역죄로 종국에는 이등병으로 강등된 전직 대통령의 신세와 같습니다. 거룩한 ‘나실인’으로 출발하였으나 무절제와 방탕으로 결국 이방인의 노예가 되어 두 눈이 뽑히는 등 치욕의 인생을 살다간 ‘삼손’과 같습니다.
자신이 택한 선택의 결과일 것입니다. 결국 선택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노예로 살 것인가?”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자유의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노예로 살 것인가?” <성경>은 ‘가인’이 자신의 노예가 되어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2);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미래에 대한 예언(豫言)은 실은 현실을 향한 예언(預言)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그 모든 <예언서>들이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豫言) 내지 예고(豫告)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지금 살던 방식대로 그대로 살라고 권고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인 것이지요. 지금 당장 그 멸망의 길에서 떠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豫言의 목적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豫言書>는 <預言書>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미래의 지구 환경이나 인구 문제 등에 관한 이런 저런 충격적인 보고서들이 봇물 터지듯 출판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지구에 다칠 대재앙의 前兆라는 경고와 함께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떠할까요? 2012년 6월 23일(토) 대한민국은 20-50 클럽에 가입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단 일곱 나라만 가입해 있는 명예의 클럽입니다. 그것도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식민 국가에서 이 업적을 성취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입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우려도 함께 싣고 있습니다. 최고속의 노령화와 출산율 저하로 2045년에는 인구는 다시 4천만 이하로 떨어질 것이며, 우리는 이 클럽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우울한 예언(豫言)입니다. 불과 30년 후면 다시 우리는 중진국 수준으로 하락할 것이랍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과연 이 예언은 성취될까요?
나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 6:4-9)
즉 우리에게 두 길이 있고, 그 길은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고는 이것입니다. 제발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이 미미하게 되는 참사(慘事)는 피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참사를 피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탁월함은 훈련과 습관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탁월한 사람이라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은 습관이 만든다.”
훈련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체질을 낳고, 체질은 운명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교회와 목장과 학교가 있어, 격려하고, 훈계하고, 질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