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2과
마지막 시험
김태정 목사창세기 22:1-19약 56분 분량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시험은 어렵든 쉽든, 기간이 짧든 길든, 그 목적이 본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든 아니든, 그 자체로서 결코 유쾌하거나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시련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듭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에 대해서 소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하드라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가 일상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무자비하고 비이성적이며 난폭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실로 경이로운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즉각적이며, 결의에 차있으며, 지속적입니다. 이야기의 또 다른 등장인물 ‘이삭’도 아버지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으며,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시대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믿음의 행동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신약의 한 기자는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을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표본으로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화자의 설명과 <신약>의 가르침을 통해서 보더라도, 이야기의 핵심 주인공은 ‘아브라함’과 ‘이삭’일 것이며, 핵심 주제 또한 이들의 초인적인 믿음과 용기에 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으니, 우리 역시 이들처럼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려야 한다는 요지의 교훈으로 설교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런 것입니까? 본문의 진정한 주제는 무엇일까요?
문학과 역사
형식과 내용.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로 그리고 있는 본문 이야기는 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아브라함 순환>에서 절정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뛰어난 수사와 깊이 있는 신학으로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회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랑을 받아온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본문 이야기는 <아브라함 순환>에 등장하고 있는 앞의 이야기들과는 거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문학적 상수들이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12:2, 3; 17:16, 20; 18:18; 16:10; 17:2, 20; 15:4-5.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7-18절)
그리고 ‘이삭’을 가리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로 지칭하고 있는 것도(2, 12, 16절), ‘이스마엘’ 이야기(21장)에 대한 사전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마당에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식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기왕에 ‘이스마엘’ 이야기가 나왔으니, 21장과 22장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두 에피소드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아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에서 ‘아브라함’과 ‘하갈’의 역할과 ‘이삭’과 ‘이스마엘’의 역할도 그런 점에서 좋은 비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도표). 이 도표를 통해서 두 이야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나 표현들이 여러 가지 면에 있어 시적 유사 반복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상의 미묘한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1) “아이”(22:5, 12; 21:12, 17-19); (2) “이른 아침 아브라함이...취하여”(22:3; 21:14); (3) “차지하리라”(22:17; 21:10; 15:3-4).

또 한 편으로 22장은 1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또 다른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와도 일련의 유사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히 야훼의 천사가 ‘하갈’과 ‘아브라함’에게 나타나고 있으며(22:11, 15; 16:7, 9-11), 이들 각각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22:17; 16:10). 또한 두 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핵심 히브리 동사는 “만나다” 또는 “준비하다”는 의미의 ראה(라아)로서, 각 주인공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기념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16:13-14상)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22:8상)....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22:14)
마지막으로, 또 하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명령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2)
이처럼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용어나 표현들이 앞의 이야기들을 회고해 주고 있어, 본문의 구조나 전승들을 파악하고 해석함에 있어 마땅히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장면에 따라 구분해 보면 <창세기>에서 자주 만나는 대칭 구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면 1/6. 이 두 장면은 모두 하나님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이 진행되는 순서를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1, 11절),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로 대응하며, 다시 하나님(또는 천사)의 명령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1-2절)
여호와의 사자가 ...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11-12절)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두 장면을 마지막으로 <아브라함 순환>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상기할 점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이 두 장면에서 하나님의 명령이나 약속은 <아브라함 순환>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연상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참고: 12:1-3).
장면 2/5. 이 두 장면은 순전히 화자의 해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짝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설의 초점은 ‘아브라함’이 희생 제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으며, 두 장면에서 공히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무”; “그의 아들 이삭”; “하나님이 그에게 일어주신 곳”.
장면 3/4. 두 장면에서 그리고 있는 공통적인 장소는 ‘브엘세바’와 산 정상 사이에 있으며, 대화의 내용은 앞으로 행할 제사에 관한 것입니다. 장면 3에서 대화의 상대는 ‘아브라함’과 그의 종들이며, 장면 4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두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 역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역시 순수한 해설이라는 점에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절정은 가장 긴 마지막 여섯 번째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산 정상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리려고 하는 순간에 천사가 급히 나타나 그를 만류하고, 대신 양이 드려지며, 이어서 ‘아브라함 언약’이 재확인되는 이야기까지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선 여러 개의 짧은 장면들은 바로 이 절정을 위한 보조 장치로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Wenham은 통찰력 넘치는 설명으로, 마지막 장면의 절정을 보다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일련의 문학적 장치들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Wenham, 101쪽(참고도서 2).
자료와 편집. 본문의 전승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근거로 <엘로힘 전승>과 <야훼 전승>의 두 자료가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예를 들어, 1-14절과 19절에서는 주로 ‘엘로힘’이 사용되고 있어 대체적으로 전자(前者)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외 15-18절은 ‘야훼’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後者)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전통적 견해, 특히 1-14절을 <엘로힘 전승>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조차도 ‘야훼’의 이름을 일부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2, 14, 15절), 문장의 스타일도 오히려 <야훼 전승>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도 실은 ‘야훼’에 대한 필경 상의 오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만을 가지고 전승의 성격을 가리는 작업은 더 이상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학자들은, 오히려 본문 전체를 <야훼 전승>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웨스터만’(Westermann)과 같은 학자는, <아브라함 이야기> 전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본문에 대한 편집은 <창세기>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합니다(물론 원 이야기 자체는 족장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질 것입니다만).
특히 15-18절의 내용을 읽어보면, 어딘지 원래 이야기에 부차적으로 덧붙여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 소위 ‘후대 편집 설’에 나름대로 탄력을 더해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반대 주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만일 15-18절의 내용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면, 원 이야기는 결론이나 절정이 없는 이상한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부분의 내용이 처음부터 있어야만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의 목적이 분명해 지고, 그의 순종의 결과 후손들이 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웨스터만’(Westermann)은 이런 주장마저도 간단히 일축해 버리고 마는데, 그의 주장인 즉은 15-18절은 다른 구절들과는 문장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1-14절과 15-18절을 비교해 보면 미세하기는 하지만 그런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1-14절에서는 다소 긴장되면서도 절제된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에 반해, 15-18절에서는 반복과 중첩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러나 보다 큰 차이는 다른데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Moberley). 즉 1-19절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서 15-18절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거추장스럽게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의 일부 구절들을 그 순서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읽어보면 이 점은 보다 명쾌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 1-13절 ⇒ (2) 15-18절 ⇒ (3) 14절 ⇒ (4) 19절. 다시 말하자면 이야기의 전체적인 결론(19절)은 오히려 14절에서 더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 15-18절이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이라는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해 준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발견임에 틀림없습니다만, 문제는 과연 15-18절이 단순히 1-14절과 19절 사이에 삽입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만일 15-18절의 내용이 없다면 ‘아브라함’을 시험한 목적이 별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여전히 설득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들을 잃어버릴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이삭’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이 전제되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언급은 단순히 별 의미도 없는 반 절정으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엄청난 시험이 끝난 후 무엇인가 더 하실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문체상의 차이만 가지고 15-18절에 대한 편집 설을 주장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두 본문의 장르상의 차이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 더 적절할 듯싶습니다. 즉 1-14절의 내용은 ‘이야기’로, 그리고 15-18절의 내용은 ‘약속’으로 구분할 때, 전자(前者)는 그 문체에 있어 다소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반면, 후자(後者)는 비교적 길고 반복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그리고 15-18절에서 보는 반복적인 서술은 언약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수사적 장치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재확인해 주고 있는 15-18절의 내용이 단순히 후대에 삽입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창세기>의 다른 내용들과 비교 분석을 통해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21:8-21), 하나님께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마엘’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재확인해 주신 바 있습니다(21:18). 하물며 이들보다 훨씬 더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15-18절은 <이스마엘 이야기>에서 21:18절과 유사병행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두 번째로 하늘에서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말했다고 해서 이 구절이 나중에 삽입된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하갈’이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천사가 나타나서 네 번에 걸쳐 같은 약속을 반복한 바 있고(16:8-12),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할례의 언약을 행할 때에도 천사는 그에게 다섯 번에 걸쳐 약속을 재확인해 주고 있습니다(17장).
하나님의 계시라는 측면에서도 본문과 12장은 놀라울 정도의 유사병행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12장이 하나님의 첫 계시라면, 본문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두 번의 계시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주 유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2)
첫 번째 계시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명령은 반드시 그분의 약속을 수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12:2-3), 이번에도 역시 그분의 약속을 기대할 수 있으며 여섯 번째 장면의 15-18절이 바로 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장면은 흥미롭게도 다시 첫 번째 장면과 대칭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22:2절이 12:1의 메아리라고 한다면, 22:15-18이 12:2-3의 메아리가 되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서론(1절상)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로 소개하고 있는 본문 이야기는 극적인 효과에 있어서나, 신학적으로나 절정에 해당하는 중요한 순간을 담아내고 있긴 하지만, 서론은 오히려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1절상)
충격이란 다름 아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명령을 말하는 것인데, 화자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 뿐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놓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의 관심도, “과연 이삭이 희생될 것인가?”라기보다는 “과연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것인가?”로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일 후에”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브엘세바’의 언약이 있은 이후 여러 해가 지났을 것이며, ‘이삭’의 나이도 ‘이스마엘’이 쫓겨날 때의 나이와 거의 같은 십대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공히 ‘이스마엘’과 ‘이삭’을 지칭하여 ‘아이’(רענ)를 뜻하는 동일한 히브리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22:12; 21:12).
누가 ‘아브라함’을 부르고 있습니까? ‘엘로힘’입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 ‘야훼’가 아닌, 하나님을 총칭하는 이름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소 특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Wenham). 대개 <창세기>에서 ‘엘로힘’을 사용할 때면, ‘엘 샤다이’(17:1) 등과 같이 적절한 다른 수식어를 함께 붙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1, 3, 8, 9절). ‘야훼’는 11절에 가서야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변화를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변덕으로 볼 수 있을 것인데, 화자는 이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단지 ‘엘로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어 이야기의 연대기적인 모순을 피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에서 족장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엘 샤다이’(전능자 하나님)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3)
그러나 화자에게는 이런 연대기적인 고려 외에도, 신학적인 의도 또한 있을 수 있습니다(Delitzsch). <엘로힘 전승>과 <야훼 전승>이 나름대로 각기 독특한 문학․신학적인 상수(常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두 이름 ‘엘로힘’과 ‘야훼’가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서막>이나 <에덴 이야기>에서 ‘엘로힘’ 하나님은 어딘지 초월적이고 신비하며 비인격적인 창조주의 모습으로 비취는데 반해서, ‘야훼’ 하나님은 친밀하고 인격적인 언약의 하나님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특히 <에덴 이야기>(2-3장)의 타락을 다루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늘 ‘엘로힘’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타락 이후 아담의 언약에 이르면 ‘야훼’ 하나님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도록 요구하고 있는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초월적이며 신비하고 비이성적이기까지 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이야기의 후반에서는 아들을 살리고 보호하며 언약을 지키려하는 ‘야훼’ 하나님이 되어야 함이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Delitzsch).
시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시험하셨다는 언급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구든 시험을 통해서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게 되는 법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시련과 고통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험에는 비단 하나님의 시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을 시험한 적이 있고(왕상 10:1),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음식을 놓고 시험을 받은 바 있기도 합니다(단 1:12, 14).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적은 여러 차례 있습니다. 광야에서 배고픔과 갈증의 시험을 받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출 15:25; 16:4; 20:20; 신 8:2, 16), 거짓 선지자나(신 13:4), 이방인의 억압(삿 2:22; 3:1, 14) 등등이 실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그의 백성을 시험하시는 것일까? <신명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신 8:2)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대개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나면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려움을 자성의 기회로 삼아 성숙과 발전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이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잠언>은 징계의 유익에 대해서 책 전체를 할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과연 그가 무슨 큰 축복을 누리게 될까요?
2. 장면 1: 지시(1하-2절)
처음과 마지막 두 장면은 장르 상 독백이라는 점에서 짝을 이루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처음 시작되던 장면과 유사 병행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구절 공히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떠날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미 서론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았던 터라, 무엇인가 어렵고 힘든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것쯤은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정작 하나님 자신은 어딘지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모습이 느껴집니다(Wenham). 하나님도 자신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인지를 충분히 알고 계신 것이겠지요. 우선 ‘히브리’ 문장의 형식이 단순 명령형이 아닌 일종의 권유 형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 지극히 이례적입니다. 영어 식 번역은 “Please”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서술의 방식 또한 전형적인 반복과 지연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삭’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네 아들 ⇒ 네 유일한 아들 ⇒ 네가 사랑하는 아들 ⇒ 이삭.” 그동안 ‘이삭’의 출생과 관련해서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가슴 저미는 내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출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노년에 가까스로 얻은 약속의 아들, ‘아브라함’의 가계를 이어갈 유일한 희망으로 애지중지하던 아들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슴은 이제 곧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둘로 찢어지는 아픔을 겪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임을 예고해 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브라함’의 마음은 태평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태풍 전야의 고요는 “떠나라”는 불길한 명령으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도 동일한 명령으로 ‘아브라함’은 그가 누리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떠나야 했습니다(12:1). 그리고 아내의 요구로, 사랑하던 아들 ‘이스마엘’조차 내보내기도 했습니다(21:10, 12). 아비가 사랑하는 아들을 내보내는 것보다 더한 고통과 비극이 있을까?
그가 가야 할 곳은 ‘모리아 땅’입니다. <역대기>에서는 이 지역을 ‘예루살렘’ 성전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만(대하 3:15), ‘아브라함’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고,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더 이상 다루고 있지 않아서, 두 지역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기초하고 있는 원래의 전승에서도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본문에서는 이 이름이 갖는 중요성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일부 사본에서 이 지명을 지칭하면서 ‘환상(계시)의 땅’으로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예비하신다”(보여 주신다; האר)는 의미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8, 14절).
“번제로 드리라.”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은 오랜 수사적 지연 끝에 드러나고 있는 최후의 일격과도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이 제사의 의미나 성격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번제란 그야말로 짐승을 각을 떠서 태우는 제사를 말하는데, 이 의식이 의미하는 바를 대략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제사를 드리는 자의 철저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고(희생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자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드리는 자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그것입니다. 제물은 주로 새나 양을 드렸습니다만, 부유한 사람들은 소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는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제사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믹 6:7)
이처럼 반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말할 것도 없이 “아니다”입니다. <레위기>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8:21)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이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레 20: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근동에서 이런 일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입다’가 그의 딸을 바쳤으며(삿 11:31-40), ‘모압’ 왕이 자기 위를 이을 아들을 번제로 바쳤으며(왕하 3:27),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이런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기도 했습니다(왕하 17:17). <성경>도 첫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다른 짐승으로 대속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출 22:29). 나중에 이 대속의 개념은 ‘레위’인의 제사장 역할로 확대되어, 이들이 이스라엘의 장자를 위한 대속이 된다고 한 바 있습니다(민 4:45-49).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와 같은 대속적 희생 제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 장면 2: 떠남(3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런 속내를 알고 있었을까? 화자의 침묵은 그 대답을 독자의 상상에 맡겨두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히려 주인공의 행동 즉 즉각적인 순종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3절)
이전에 첫 아들 ‘이스마엘’을 보낼 때 그랬던 것처럼(21:14),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해야 할 일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언급은 ‘아브라함’의 순종과 관련해서 독자들에게는 이제 친숙한 표현이기도 합니다(19:27; 20:8). “그리고”(and)라는 접속사로 연결하고 있는 일련의 동사들(안장을 지우고, 데리고, 쪼개어, 가더니) 역시 ‘아브라함’의 일사불란한 행동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이 어딘지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나무를 먼저 쪼개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만, 반대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하인과 아들을 데려다 놓은 후에 나무를 쪼개고 있습니다. 나무 쪼개는 일에 이들이 도왔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차분하게 생각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할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요?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행의 목적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까? 그의 속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했던 간에, 시키는 대로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이번에도 역시 여행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몰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떠나는 곳을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표현은 ‘아브라함’ 여정에서 친숙한 모티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행 중에 있었을 하나님과의 대화를 생략함으로써 ‘순종’의 주제를 더욱 강화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떠났던 그 장소는 거룩한 장소를 말합니다(12:6; 13:4; 28:16; 출 3:5; 20:24).
4. 장면 3: 여행(4-6절)
‘브엘세바’에서 ‘모리아’까지는 삼일 여행 거리였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4절)
<창세기>에서 삼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데,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을 의미합니다(31:22; 40:20; 42:18). <출애굽>의 ‘시내’ 산 이야기에서도 “제 삼일 째에”라는 표현이 두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출 19:11, 16).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야훼’의 산에 도달하는 데에 삼일이 걸렸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출 3:18; 5:3). ‘아브라함’에게 삼일은 극도의 시련과 고통의 기간이었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을 당장 죽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삼일 내내 이 문제를 놓고 고통을 겪도록 강요하기까지 했습니다(J. Calvin).
삼일동안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아무런 암시조차 없습니다만, 만일 ‘아브라함’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했다면 필경은 다음과 같은 호소였을 것입니다: “만약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로 피하게 하소서.” 이런 점에서 화자는 우리의 주인공을 다시 한 번 초인적인 믿음의 영웅으로 그리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V. Hamilton). Hamilton, 107쪽(참고도서 4).
상식을 벗어난, 비이성적인 하나님의 요구에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하게 따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다”는 표현 역시 <창세기>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데, 대개 바라보는 대상이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거나 또는 가치를 지니는 것들입니다(18:2; 24:63; 33:1, 5; 43:29). 이곳에서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아들을 바칠 그 장소입니다. 삼일의 여행 끝에 드디어 가시권에 들어온 그 장소, 아들을 바쳐야만 할 그 장소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고통스런 마음이 다시 한 번 느껴지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삼일 동안의 침묵 끝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첫 마디가 여러 가지 점에서 당황스럽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5절)
왜 그는 하인들을 산 위까지 대동하지 않고 산 아래에 기다리라고 했을까? 나귀가 올라가기에는 너무 험한 길이었을까? 어린 하인들에게 아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을까? 하인들이 만류하는 것이 두려웠을까? 거룩한 장소에 데리고 가기에는 나귀가 너무 더러웠을까? 하나님께서 이들을 내버려두라고 지시하셨을까? 모두가 가능한 설명이긴 합니다만 미해결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유사한 이야기가 <출애굽>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만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산 정상으로 올라오도록 명령을 받았을 때, 백성들은 산 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출 19:20, 24; 24:1-2).
그러나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말은 더욱 혼란스러우며, 수수께끼와도 같습니다. 우선 그는 ‘이삭’을 더 이상 내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이’로 부르고 있습니다. ‘히브리’ 단어 ‘나아르’(רענ)는 “유아”나 이유기의 “어린 아기”(출 2:6, 삼하 12:16, 삼상 1:24), “어린 아이”나 “작은 아이들”, 작은 “소년”(왕상 2:23-24), “청소년”(삼하 14:21, 삼하 18:5), 왕의 “종”이나 “신복”들(왕하 19:6), “병사”들(왕하 20:15이하), 그리고 가정의 “사환”이나 “하인”(삼하 16:1, 왕하 4:19 이하)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유아”와 혼기 사이의 “청소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만, 나이보다는 오히려 법적이고 사회적인 측면과 관련해서 더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습니다. 즉 부모나 상관의 보호와 지휘 아래 있는 일정 연령의 청년으로 보는 편이 낫다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는 “사환”과 “아이”에 대해서 모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의식적으로 그와 결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그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한 이상 더 이상 정에 얽매여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그는 “경배를 드리고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번제가 아니고 경배를 드리겠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애매합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절을 하거나, 무릎을 꿇는 정도의 행위에 불과합니다(참고. 18:2; 19:1). 그렇다면 아들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그의 결심이 흐려진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할 일을 하인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일까? 질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다 설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마지막 질문과 관련해서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해석은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 그의 말은 악의 없는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를 이미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실질적인 제사에 대해서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고 위장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참고. 7절). 즉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러 가면서 희생 제물에 대해서는 일부러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동행하는 하인들의 생각에는 당연히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아들을 바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견해입니다. 이럴 경우 그는 불신과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비쳐집니다. 마지막으로는 정반대 경우, 즉 확고한 믿음의 선언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비록 아들을 바치긴 하지만,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형태로든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다루고 있는 주석가들은 많지는 않습니다만, 일단의 학자들은 처음 두 경우를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견해로 취하고 있습니다(참고 도서 1, 107-108쪽).
‘아브라함’이 과연 짐짓 거짓을 말하고 있던 것인가? 단순히 돌아오고 싶다는 희망 사항을 피력한 것인가?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을 반영한 것인가? 처음부터 아예 순종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것일까?
믿음이나 영성이 완성이 아니고 하나의 과정이며 몸부림이고, ‘아브라함’이 천사가 아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마지막 추측이야말로 가장 개연성이 높은 설명이 될 것입니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 9:24)
이 사람의 절규가 들립니까? 인간의 역설적인 상황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으려 하나 불신이 앞서고, 행하려 하나 두려움이 앞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통 기독교 영성은 인간을 두 세계에 끼어 고통당하는 피조물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Rodney Clapp). 「사람을 위한 영성」
‘아브라함’ 역시 당위성과 현실 사이에 끼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세계가 어떠하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6절)
화자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불과 칼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결의에 찬 모습을 강조하려 하는 듯합니다. 당연히 다음 그가 취할 행동이야말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것이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손에 칼을 든 아버지와 등에 번제 나무를 지고 가는 아들은 제 삼자의 눈에도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유대인의 <미드라쉬>는 이 장면에서 ‘이삭’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저주받은 영혼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5. 장면 4: 등산(6-8절)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두 사람의 대화는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며 눈물겹습니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6-8절)
“내 아버지여”하고 부르는 아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하며 답하는 아버지, 번제 할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순진무구한 아들, 애끓는 가슴을 누르고 짐짓 태연하게 거짓을 말해야 하는 아버지, 이 모두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합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번제로 바쳐질 줄을 알면서도 따라나섰을까? 어떤 경우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깊은 사랑과 신뢰는 더욱 크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끊기고, 두 사람은 함께 산 정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그러나 완전히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번제할 양을 준비해 놓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표현인가, 예언인가, 아니면 희망을 담은 기도인가! 이번에도 역시 이 모든 설명들이 다 가능하다고 열어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해서 본문 이야기의 깊이가 더욱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어떤 의도로 했든,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선언으로 인하여 그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말의 의미가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피가 아니라 순종을, 불신이 아니라 희망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6. 장면 5: 제사(9-10절)
장소는 산 정상. 일종의 호흡 고르기와도 같은 준비 설명이 네 번에 걸쳐 있은 후, 갑자기 이야기는 절정을 향하여 치닫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9-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으로 왔다는 서술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일련의 서술은 오히려 ‘아브라함’이 결정적인 순간에 머뭇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과 서스펜스를 느끼게 해줍니다. 그 장소에 도착하여 단을 쌓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삭’의 손과 발을 결박하고 제단 위에 놓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참고로 이곳에서 묘사하고 있는 번제의 방법이나 순서가 <레위기> 1장에서 규정하고 있는 바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승의 경우 잡아 죽이기 전에 결박하라는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지를 절단하여 제단 위에 놓기 전에 먼저 도살을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만, 여기서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삭’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결박을 당했을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려는 것일까요?
아무런 흠이나 점도 없고, 아무 저항도 없이, 어떤 희생이 오드라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좇아 죽기까지 순종했던 아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야기의 절정은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비이성적이며, 폭력적이며,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인간의 한 행동에 관한 묘사입니다. 그 일이 이제 곧 벌어질 참입니다. 칼이나 (목을 따는)도살 등과 같은 살벌한 단어들이 절정의 분위기를 더욱 살벌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7. 장면 6: 맹세(11-18절)
마지막 장면은 장르 상 대화라는 점에서 첫 번째 장면과 짝을 이루며, 내용에 있어서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첫 시작과(12:2-3) 공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들의 목을 따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바야흐로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 천사의 목소리가 황급하게 하늘로부터 들려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11절)
다급한 하나님의 심정이 두 번에 걸쳐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행동을 중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성경>에서 더러 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출 3:4); “사무엘아, 사무엘아”(삼상 3:4); “사울아, 사울아”(행 9:4). 모세가 서 있던 거룩한 땅이 더럽혀질까봐 그로 하여금 신을 벗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부르셨으며,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살기 등등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무소불변의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켜 이전에 내렸던 지시 사항을 철회하거나 번복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또 다른 예로, <발람과 발락 이야기>(민 22:22-35)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화자는 그가 ‘야훼의 천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야훼’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이자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언약의 아들 ‘이삭’이 탄생하였을 때 등장했던 그 이름이(21:1) 다시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던 이해할 수 없었던 무소불변의 ‘엘로힘 하나님’은, 다름 아닌 약속을 지키시며 자비로운 ‘야훼 하나님’이셨다는 것이겠지요. ‘야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항상 마음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그분이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이런 과정을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훼의 천사가 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은, 즉 ‘아브라함’이 천사에게 “보여준”(예비해 준) 메시지는 “예레 엘로힘”(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서, 이는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줄”(예비해 줄) 메시지 “야훼 이레”(하나님이 예비하심)와 유사한 음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경외심 즉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지식이라고 잠언서는 말한 바 있습니다(잠 1:7). ‘아브라함’은 ‘그랄’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두려워 거짓을 말했다고 술회했으며(20:11),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된 후 만난 그의 형제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선처한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42:18).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과연 천사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의 진심을 알게 되었을까? 그 이전에는 몰랐을까? 이 사건을 통해서 천사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무엇일까? 만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쓸데없는 자작극(?)을 벌이시는 것일까?” 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이와 유사한 자작극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지개의 언약이 그것입니다. 무지개는 단순히 인간들만을 위한 언약의 징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도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기 위한 징표로 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9장). 하나님이 무슨 기억 상실증을 가진 분도 아닐 텐데, 왜 스스로를 위한 징표로 삼아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유월절의 피도 그렇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집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그 피를 보고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피해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십니다만, 이미 그 이전에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을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고센’ 땅에 이주시켜놓았습니다(출 12:23). 이 경우에도 역시 하나님은 눈이 머셨거나 아니면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계신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모른다고 전제할 때, 비로소 이 사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작극으로 불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의 고통이나 시련의 의미를 모르기는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 흠이 없고, 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는데도(욥 1:1, 8; 2:3),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셨고 ‘욥’은 이 시험에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서야 비로소 ‘사탄’도 ‘하나님’도 ‘욥’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 화자는 전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13절)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의 황급한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이야기는 곧바로 ‘이삭’을 대체할 다른 번제물 수양(ram)에게로 옮겨갑니다. 이번에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전에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운명의 산이 아니라(4절), “숲에 걸려있는 한 마리 수양”입니다. 천사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그의 눈앞에 벌어진 장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지체 없이 그 양을 아들 대신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홍수 후에 ‘노아’가 취했던 행동을 연상시켜줍니다. 두 경우 모두 주인공의 동기가 암시되어 있는데, 다름 아닌 감사와 헌신의 표현일 것입니다. 동시에 미래의 보장에 대한 확신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삭’이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을 때, ‘아브라함’은 “야훼 이레” 즉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8절). 그런데 실제 번제로 바친 것은 어린 양(חשׂ; 세)이 아니라 수양(לאי; 야일)이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서 화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만, 혹시 ‘이삭’이 이제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청소년이 되었다는 사실과 연관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Wenham).
이 대답이 단순히 불확실한 희망 사항이었는지, 간절한 기도였는지, 또는 확실한 신탁이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대답을 현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타이밍도 완벽했습니다! 그는 ‘하갈’이 그랬던 것처럼(16:13-14),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하갈’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예비해 주신 그 샘을 기려 ‘브엘라해로이’(즉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우물)로 명명했던 것처럼, ‘아브라함’도 그 땅을 기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4절)
여섯 번째 장면의 나머지 이야기는(15-18절) 앞에서 살펴본 대로, 원 이야기에 추가로 덧붙여진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들 학자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부르고 있는 도입부가(15절) 직전의 이야기와는 연결이 부드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천사가 들려주는 언약의 내용이(16-18절) 이야기 전체의 주제와는 방향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15절),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6-1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단락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이 겪은 시험과 시련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제공해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그가 하나님의 지시에 순응해서 아들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만일 ‘아브라함’이 계속 거절했더라면 아들의 목숨은 그대로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결말은 그냥 미궁 속으로 빠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 제사를 통해서 그와 후손들의 미래에 대해서 확실한 보장을 받았으며, ‘욥’은 시련이 시험이 끝난 후에 재산과 자식 등 모든 것을 두 배나 되돌려 받았고, ‘하갈’도 그의 아들이 장차 수없이 많은 후손을 두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단락을 단순히 원래의 이야기에는 없던 새롭게 추가된 내용으로 간과해 버린다면, 전체 이야기는 무미건조해 질뿐만 아니라 내용의 일관성이 약해지게 됩니다. 이야기의 형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이 단락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교차대구적인 구조가 완성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단락이야말로 ‘아브라함’ 언약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힘 있게 강조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부분이 없다면 <아브라함 순환>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최종 확인해 주고 있는 상대는 ‘하갈’로서(21:18), 그럴 경우 관심의 대상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 되어버립니다. 결론적으로 이 마지막 단락은, 후대에 추가로 삽입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 <아브라함 순환>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결론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두 번째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무엇인가를 말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해 줍니다. ‘하갈’의 경우에는 한 번 밖에 나타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21:17).
더욱 특기할 만 한 점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언약에 대해서 ‘맹세’를 하고 계시다는 점인데, 이런 경우는 <족장 이야기>에서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경우가 <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그만큼 언약의 중요성과 확실성에 대한 더할 수 없는 보장이 됩니다: 창 24:7; 26:3; 50:24; 출 13:5; 렘 22:5; 49:13; 암 4:2, 6:8; 히 6:13-18.
이처럼 맹세로써 자신의 언약을 재확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해당 구절의 수사적 반복을 음미해봅시다(17-18절).
언약의 내용은 또 무엇입니까? 무슨 강조나 새로운 것이 있습니까?
이제 ‘아브라함’ 하면 ‘축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12:2-3; 14:19; 17:16, 20; 24:1, 35). 이곳에서는 그 점을 더욱 새롭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진정으로) 큰 복을 주고, (진정으로)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17절). 아쉽게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이 부사가 빠져 있습니다만, ‘히브리’ 원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복하다는 동사의 형태는 절대 부정형으로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는 이 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대적의 문을 얻게 될 것”이라는 표현 또한 새롭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그 땅’과 연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12:1, 7; 13:15-17; 15:7-8; 17:8). 아들은 이미 얻었으니, 이제 남은 두 번째 약속 또한 점차 그 성취를 눈앞에 두고 있는 셈이지요.
8. 결론(19절)
19절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여러 다른 에피소드의 결론과 잘 부합하는 표현입니다(12:9; 13:18; 18:33; 21:34):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19절)
그러나 미처 못 다한 내용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야기의 핵심 인물인 ‘이삭’에 관한 것이라든지, ‘사라’에 관한 이야기 등을 추가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럴 경우 이야기는 중심 주제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야기의 핵심 주제란 과연 무엇입니까?
교훈과 적용
1. 계시의 위기
계시와 위기.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나이 100 세에 겨우 얻은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징표로 친히 주신 그 아들을 다시 바치라고 하십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어쩐지 그동안 너무 조용하고 편안하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하기조차 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와 가족을 위해서 매일처럼 조심스럽게 기도와 제사를 드려왔는데도, 아니나 다를까 광풍이 몰아닥쳐 내 인생의 유일한 의미를 다 날려 보내게 되었습니다. ‘욥’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의롭게 살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사탄도 그 점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이 위기의 순간에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의문이자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편안하게 살지 않았느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이후 그의 생활은 오히려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의 역설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즉 그분의 존재는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의 생활은 이별과 버림과 방랑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은 그가 자초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하나님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정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을 때,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도 못한 채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순순히 떠났습니다. 그동안 누려오던 그 모든 편안함과 사회적 신분과 관계들을 뒤로 한 채 말입니다. 그처럼 어려운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가 펼쳐지겠거니 하는 기대가 그것이겠지요. 그 기대 때문에 힘든 세월도 견뎌왔습니다. 나에게 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의 땅에 와보니 이미 다른 족속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살고 있었고, 젖과 꿀은 고사하고 수시로 가뭄으로 물 한 방울 얻기가 어려웠으며, 약속한 아들은 기약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미 있던 아들마저 내보내야 했습니다.
마침내 아들이 태어났고, 그 땅에서 내 소유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좀 여유와 희망을 가지고 사나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아무 보장도 없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할 수 있습니까? 만일 이번에도 이전처럼 고분고분 순종한다면, 그야말로 헛된 약속 하나 믿고 인생 전체를 날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분노와 실의와 좌절을 즐기고 있는 듯 한 모습입니다(반복이 주는 수사적 효과를 통해서 이점을 맛볼 수 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2절).
그러나 위기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이름에도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어떻게 주었다가 다시 뺏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는가? 그는 믿을 수 없으며, 잔인하고 끔찍합니다. 그 땅의 다른 신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가 이런 신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믿음과 시험. 혹자는 말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만 ‘아브라함’의 진심을 알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화자도 하나님의 비이성적인 요구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1절). 그러나 한 사람의 진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처럼 가혹하고도 잔인한 시험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탄’도 이점을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욥’은 당대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사탄’도 모두 이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생각은 다소 달랐습니다. ‘욥’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 정도 축복을 받은 자라면 누군들 하나님께 감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 축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라도 열심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섬기지 않을까. 그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린 후에도 과연 하나님을 믿고 따를까? 이 도전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마도 소극적으로 ‘사탄’에게 그를 시험해 보라고 하셨고, ‘욥’의 시련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이런 대화를 들을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그를 시험해 보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시험에 응하는 ‘아브라함’의 행동은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줄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의 행동은 결연하고, 신속하며, 지속적입니다. 출제자가 원하는 해답이 무엇인지를 훤하게 알고 있는 학생과도 같습니다. 화자는 이어지는 여러 장면에서 일련의 수사적 기법을 통해서 이 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소개하는 일련의 장면들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 “신학과 신앙”의 부분을 다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3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4-5절)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6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6-8절)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9-10절)
‘아브라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도대체 어디서 이런 초자연적인 용기와 힘이 생긴 것입니까? 아무리 정답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하드라도 천사나 하나님이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 행동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가 하나님의 생각과 일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약>이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아브라함’의 생각이나 믿음에 관해서 일체의 암시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 기자는 이에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이 구절 또한 정말 난해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었다니! 해석적 오류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시험의 목적과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든 몰랐든 간에 그의 행동은 실로 영웅적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취하고 있는 행동, 즉 아들의 목을 따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바야흐로 칼을 내려치려는 이 행동에서 이야기는 급격하게 상승곡선을 그리며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가장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11절).
놀라서 황급하게 ‘아브라함’을 두 번씩이나 부르면서 그의 행동을 저지시키고 있는 자가 있으니 다름 아닌 ‘야훼 하나님’ 자신입니다. 무소불변의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신학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분이 왜 마음을 바꾸게 되었을까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설명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아브라함’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전에는 몰랐다는 말입니까? 이 사건을 통해서 천사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무엇일까? 만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쓸데없는 자작극(?)을 벌이시는 것일까?”
이와 유사한 자작극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지개의 언약이 그것입니다. 무지개는 단순히 인간들만을 위한 언약의 징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도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기 위한 징표로 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9장). 하나님이 무슨 기억 상실증을 가진 분도 아닐 텐데, 왜 스스로를 위한 징표로 삼아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유월절의 피도 그렇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집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그 피를 보고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피해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십니다만, 이미 그 이전에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을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고센’ 땅에 이주시켜놓았습니다(출 12:23). 이 경우에도 역시 하나님은 눈이 머셨거나 아니면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계신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모른다고 전제할 때, 비로소 이 사건은 더 이상 자작극으로 불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의 고통이나 시련의 의미를 모르기는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 흠이 없고, 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는데도(욥 1:1, 8; 2:3),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셨고 ‘욥’은 이 시험에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서야 비로소 ‘사탄’도 ‘하나님’도 ‘욥’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 화자는 전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13절).
2. 여호와 이레
수양. 이 구절은 오히려 절정의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야기의 전개 방식을 볼 때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삭’이나 ‘아브라함’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핵심 주제는 이들의 변함없는 순종이나 믿음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약의 여러 기자들이 아브라함의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1-23)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훈을 위한 겉으로 드러난 주제일 뿐입니다. ‘아브라함’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13-14절)
<구약>에서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인격 그 자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역시 그의 인격과 속성을 알 수 있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구약에서 그분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타나십니다: (1) ‘엘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천지의 주재); (2) ‘엘 샤다이’(전능자 하나님); (3) ‘엘 올람’(영생하시는 불변의 하나님); (4) ‘아도나이’(주님); (5) ‘야훼 샴마’(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 이름에 더하여 ‘아브라함’은 또 하나의 이름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hwhy)와 ‘라아’(ha;r;)에서 유래했으며,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다”(또는 보시리라)를 의미합니다.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준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번제를 요구하셨던 하나님께서 실은 스스로 준비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일은 ‘이삭’이 번제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이미 ‘아브라함’이 예견했던 것이거나 또는 막연히 일어났으면 하고 희망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아들의 물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리라고 대답해 준 바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일은 일어났습니다. ‘모리아 산’ 정상에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받으셨고, ‘아브라함’의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 손수 마련하신 짐승이었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그래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모리아’ 산 정상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대신에 양을 준비하셨던 ‘여호와 이레’는 먼 훗날 동일한 장소에서 그분의 아들을 준비하시고 대신 죽였습니다. 이번에는 ‘이삭’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였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 산을 ‘예루살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 산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대하 3:1). ‘아브라함’ 당시 아무도 살지 않던 허허벌판 사막이었던 이곳에 성전을 세우게 하시고,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단 하나밖에 없던 아들을 이곳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삼일이 걸렸다는 표현 또한 상당히 암시적입니다(4절).
이 두 역사적 사건을 종합해 보는 것 자체가 경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이 그 아비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 때문입니다: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아담 이후 예수님 당시까지 모든 인류가 물어보고 해답을 얻어야만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모세’는 그와 백성들을 위한 번제로 드릴 양이 어디 있는지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에게 해준 말이 그 해답입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위대한 왕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합당한 자라고 칭송을 듣던 그도 모세와 동일한 처지에서 같은 질문을 물어야 했습니다. 이 질문은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모든 위대한 선지자들이 물어야 했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대답은 영원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
선지자도 이스라엘도 모두 사라지고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청년이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으로 내려와 ‘요한’이라 불리는 한 선지자로부터 침례를 받았는데, 그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가 침례를 받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그의 머리 위에 앉았을 때, 하늘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그 다음 날 침례 ‘요한’은 두 제자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요 1:36). 이전에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포해 왔던 바이기도 합니다(요 1:29). 예수야말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시리라”고 말했던 그 양입니까?
‘요한’이 하나님의 양이라고 불렀던 이 사람의 행적과 가르침은 실로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문둥병자들을 깨끗하게 하며, 눈먼 자를 보게 하며,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냅니다. 무지한 병사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그러나 정작 경이로운 사실은 다른데 있습니다. 왜 ‘요한’은 이런 사람을 번제로 드려야 할 하나님의 양이라고 불렀는가 하는 점입니다. “왜 하필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양으로 예비하셨을까?” 이렇게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종려 주일. 이런 그가 어느 날 ‘모리아 산’, 즉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날은 추측컨대 일요일 즉 그 잔혹한 최후의 유월절이 있기 나흘 전이었습니다(또는 사흘 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마리 당나귀에 올라타고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올라가는 아들의 모습은 보잘것없고 엉뚱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
때와 장소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연주회나 극장에서 박수를 쳐야 할 곳에서 침묵하고, 치지 말아야 할 곳에서 환호하고 있습니다. 죽으러 가는 사람을 향하여 박수치고 환호하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장터의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 어느 누구에게도 이 장면이 수천 년 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나귀 등에 태우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 그 장면과 오버랩 되어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삭’은 예수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이삭’이 아무리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이었다고 하나, 죽지도 않았고, 번제가 될 자격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를 죽였는가. 그렇다면 예수는 왜 죽으셨습니까?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아마도 이 주제에 대해서 ‘존 스토트’만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J. Stott. 「그리스도의 십자가」. 황영철․정옥배 역. 서울: IVP, 1988.
십자가를 다루는 그의 입장은 그가 다른 주제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입체적이며, 상호보완적입니다. 사실 이런 입장은 비단 신학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가져야 할 태도일 것입니다. 특히 상충되고 모순되어 보이는 요소를 담고 있는 현상이나 사건을 다룸에 있어 이런 식의 접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우선 우리 인간의 편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개인과 무리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배신자 ‘가롯 유다’, 제사장 ‘가야바’, ‘본디오 빌라도’, 성난 군중, 그리고 로마 병정들. 이들 개인 혹은 무리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죽이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탐욕 때문에, 제사장들은 시기심 때문에 ‘빌라도’에게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비겁함 때문에 군병들에게 넘겨주었고, 군병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스토트’는 이들 무리 속에 “나”를 포함시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또한 예수의 죽음에 ‘빌라도’처럼, “나는 그의 피에 대해 무죄하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도신경>은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서 오직 ‘빌라도’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복음서> 기자들이 제시하는 완전한 설명은 아닙니다. 예수가 인간의 죄악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긴 했지만, 그는 순교자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하고 치명적인 한 가지 설명은, 그는 스스로 의도적으로 죽음을 항해 나아갔습니다. 그분은 자신에 관하여 기록된 것을 성취하겠다는 결심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신 바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런 연후에 은유를 제고하고서,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그러나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서 궁극적인 책임은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성부께서 예수를 내어주셨고, 예수께서도 자기 자신을 내주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행한 유명한 설교 속에 이 진리가 잘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내몬 아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증거로 내어놓으신 것이라고 <신약>의 다른 기자들도 한 결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연습과 토의
1. “계시의 위험”이란 무슨 뜻입니까?
2.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않고, 또 시험하지도 않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3. 나의 ‘이삭’은 무엇인지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