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5과
요셉과 왕궁
김태정 목사창세기 41:1-57약 69분 분량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41:40)
<요셉 이야기>는 이제 세 번째 순환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십삼 년이라는 실망과 좌절과 배신의 세월이 마침내, 그러나 갑자기 종말을 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롭고도 극적인 변화는 ‘요셉’이 감옥에서 왕의 존전(尊前)으로 불려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극적이고 놀라운 변화는 이처럼 외적인 것에 있기 보다는, ‘요셉’의 성품과 인격의 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버릇없고, 경솔하며,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십대의 철부지가 아닙니다. ‘이집트’ 전역에서 그 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지혜와 명철로 가득 찬 현인(賢人)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눈물과 한숨의 계곡이 영혼의 성숙을 위한 수련장이자 대장간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가 경험하고 있는 외적인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이전에 겪었던 두 번의 신분 상승의 변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가 겪었던 신분 상승의 변화란 외국인 노예에서 고관의 집사로, 그리고 감옥의 죄수에서 동료 고관 죄수의 개인 비서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맞이하고 있는 세 번째 변화는 죄수에서 총리가 되어 왕 다음 가는 권력과 위엄과 위용을 갖추고 그 나라를 통치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집트’ 식 이름과 ‘이집트’인 아내를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신분에 걸 맞는 의관(衣冠)을 갖추고, 어디든 행차할 때마다 권력 순위 제 이 인자의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사람들은 그의 수레가 지나갈 때마다 “물렀거라, 물렀거라”는 고함을 듣고 머리를 땅에 박고 입맞춤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내적인 변화 즉 철부지 십대에서 현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예컨대, 그는 권력을 단순히 행사하고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편애를 등에 업고, 아버지가 만들어준 채색 옷을 입고, 형제들 사이를 뽐내면서 돌아다녔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왕의 총애를 업고, 왕의 수레를 타고 백성들 사이를 돌아다니지만, 국가적 대재앙을 극복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현자로 부르는 것은 그가 가진 지식이나 예지(叡智)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태도와 자세 때문입니다. 어떤 태도입니까?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이것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요셉’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극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 있습니다. 그가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며, 그의 역할과 의도가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요셉’을 버릇없는 십대 망나니에서 한 나라의 최고의 현자로 변화시켰으며, 그를 통해서 세상이 구원을 얻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의도입니다. 그는 ‘요셉’이 이처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바로’를 끌어들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습니다. 절대 권력자로, 신의 대리인으로 자처하여 살아가던 그에게 요상한 꿈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여 감옥에 있던 ‘요셉’에게까지 구조를 요청하게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과 관련해서 더 큰 의도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처럼 ‘요셉’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의 진정한 의도를 이루기 위한 조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이야기의 중요한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가 그를 어떻게 호칭하고 있는지를 앎으로써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38절 참고). 그에 대한 찬사는 실은 <성경>이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에 대한 자격이나 조건에 걸 맞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요셉 이야기>의 “위대한 막간”(39-41장)은 41장에서 결론을 맞고 있습니다. 가족과 헤어져 낯선 땅에 노예로 팔려와, 그 땅의 고위 관리들의 호의를 입어 두 번씩이나 성공의 기회를 잡는 듯했으나, 두 번 모두 좌절로 끝나고 마는 비극적 결말이 지난 두 번의 에피소드의 결론이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디발’의 호의로 출세의 길이 열리는 듯했습니다만, 결국은 감옥행으로 끝나고 맙니다(참고. 39장). 두 번째 에피소드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간수장의 호의 및 전직 고위 관리였던 두 죄수들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써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는 듯했으나, 그의 호의는 무시되고 다시 기약 없는 감옥 생활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참고. 40장).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 역시 다소 불길한 가운데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전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이야기는 예의 그 친숙한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사”라는 전조(前兆)에 가까운 표현이 없이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점은 이전보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셉’이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나와 ‘바로’의 왕궁에서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 왕은 그를 그 나라의 제 이인자로 임명해준다는 사실이 이를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의 이야기 전달 방식에 근거해 볼 때, 이 사실이 앞으로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다름 아닌 기근을 만나 ‘이집트’로 몰려든 원근각지(遠近各地)의 많은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요셉’에 관한 이야기로서, ‘가나안’에 머물러 있는 ‘요셉’의 가족들도 ‘이집트’를 방문하게 되는 계기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의 구조는 아래 표와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이 표에 따르면 41장은 우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꿈에 대한 서술(1-13절)
(2) ‘요셉’의 꿈에 대한 해석(14-46절)
(3) 꿈의 성취(47-57절)
그리고 처음 두 부분(1-46절)은 마치 시(詩)의 두 연(聯)이 유사반복을 이루듯(ABC A1B1C1)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A: 꿈
B: 해석
C: 요셉-왕의 호출
A1: 꿈
B1: 해석-올바른 해석
C1: 요셉-왕의 선택
특히 ‘바로’ 왕이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단락(A1)은 화자가 왕의 꿈을 서술하고 있는 단락(A)을 거의 있는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41장의 에피소드가 <요셉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과는 어떻게 연결되고 있을까? 즉 <요셉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예컨대, 우선 14절은 감옥에 수감된 ‘요셉’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이전 이야기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39:20-40:23). 특히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이 감옥에서 ‘요셉’과 만난 일과 그가 자신의 꿈을 해몽해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장면은(41:9-13) 이미 지난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참고. 40:1-23). ‘바로’의 두 번의 꿈은 이번 에피소드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미 “한 쌍의 꿈”은 <요셉 이야기> 전체의 중요한 모티브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왕의 두 번의 꿈(41:1-36)은 ‘요셉’이 꾼 두 번의 꿈(37:5-11)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동시에 직전의 이야기에서 소개한 바 있는 왕의 두 관원장의 꿈(40:5-19)과도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이들 두 관원장의 꿈을 성공적으로 해석해 주던 장면은 이미 이어지는 또 다른 꿈, 즉 ‘바로’ 왕의 두 번의 꿈도 성공적으로 해석해 줄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지난 이야기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내용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흉년에 주변의 모든 족속들이 그에게 양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를 찾게 될 것에 대비해서 식량을 축적해 두는 장면은(41:55-57) 그의 형제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이 나라를 찾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42-44장). ‘요셉’에게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태어났다는 언급(41:50-52)은 그 자신의 출생과(37장) 수감(39-40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장차 소개할 내용 즉 ‘야곱’이 이들을 축복하면서 이스라엘의 강성한 두 지파로 삼는 장면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48장; 49:22-26). 이처럼 41장은 전체 <요셉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용해되어 충분히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웨스터만’(Westermann)이 주장했던 바처럼, 원래 별도의 독립적인 이야기 단위로 볼 이유는 없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웨스터만’ 자신도 인정한 바 있습니다만, 41장은 <요셉 이야기>에서 핵심 기능을 하고 있으며, 네 번째 에피소드는 전체적으로 <요셉 이야기>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의 입장에 따르면, 1-32절의 내용은 40장과 함께 순수한 “엘로힘 자료”입니다. 그러나 41장의 나머지 부분(33-57절)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나머지 내용 역시 “엘로힘 자료”에 속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Dillmann, Driver, Speister), 또 다른 학자들은 “야훼자료”와 “엘로힘 자료”가 섞여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Gunkel, Skinner, von Rad, Schmidt). 두 자료가 섞여 있다는 주장은 이 부분에서 발견되는 “문학적 상수의 불일치”나 불필요하게 보이는 “반복적 서술”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궁켈’이 제시하고 있는 일련의 상충되는 진술과 그에 따른 자료 구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33절(E)과 34절(J)의 불일치: 33절에서 ‘요셉’은 왕에게 ‘이집트’를 다스릴 감독관으로 한 사람을 천거하고 있는 반면, 34절에서는 복수(複數)의 감독관들을 추천하고 있는 점
(2) 54절(E)과 55-56절(J)의 불일치: 54절은 흉년이 ‘이집트’에는 미치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55-56절에서는 ‘이집트’ 역시 기근을 겪고 있음
(3) 35절상/48절(J)과 35절하/49절(E)의 불일치: 전자(前者)는 “양식을 거두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반면, 후자(後者)는 “양식을 쌓아두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
이처럼 내용이 상호 모순되거나 불일치되는 진술 외에도,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부분도 있는 것이, 특히 ‘요셉’의 신분 즉 지위가 상승되는 것과 관련된 진술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소위 “공시비평”(共示批評)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차이보다는 오히려 상당한 정도의 내적 통일성을 지닌다는 것이 현대 비평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본문 중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과 ‘야훼’가 공히 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러한 차이를 자료의 차이에서 찾기보다는,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배경이나 상황의 차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에서 ‘야훼’ 대신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16, 25, 28, 32, 38, 39, 51, 52절) 이야기의 배경이 ‘이집트’라는 이방 지역으로서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야훼’가 아닌 ‘엘로힘’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중간에 간혹 하나님을 ‘야훼’로 호칭하는 것은(39:2-5, 21-23), 화자 자신의 입장이나 서술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왕의 꿈(1-7절)
첫 번째 장면은 화자 자신의 진술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가 꾼 두 번의 꿈 이야기를 제 삼 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꿈은 세 번째 장면에서 ‘바로’ 왕 자신이 직접 ‘요셉’에게 설명할 때 다시 한 번 소상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1-7절)
“만 이 년 후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를 연결해주는 전이 구절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즉 “빵 굽는 관원 장”이 죽은 지 이년이 흘렀고, “술 맡은 관원 장”이 왕의 은총을 회복하여 이전의 자리로 복직된 지 이년이 흘렀으며, ‘요셉’은 여전히 감옥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충분히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암시해주는 진술로 보입니다. 왕이 자신의 생일을 맞아 특별 사면을 단행한 것이라면, 그가 두 번의 꿈을 꾼 것은 아마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생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습니다. ‘이집트’ 같은 고대 근동 국가에서 ‘바로’의 존재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거의 신적인 존재에 가까운 것이라, 그의 꿈도 단순한 꿈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계시와 맞먹는 그 무엇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번에 꾼 한 쌍의 꿈은 이전에 그가 꾸었을 여러 다른 꿈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임이 이어지는 단락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만, 내용 자체가 괴기하고 ‘판타지’(fantasy) 요소마저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꿈에서 왕이 본 것은 두 무리의 “일곱 마리 암소”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암소”는 단순히 농사짓는 소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이집트’ 국가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시 대양”, 또는 ‘이시스’(Isis) 신에 대한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숫자 “일곱” 역시 고대 사회에서 행운 내지 불운과 연관된 범상치 않은 숫자입니다. 왕이 본 “암소” 무리는 두 무리로서, 먼저 나타난 한 무리는 일곱 마리의 “아름답고 살진” 것들이며, 두 번째 나타나 이들을 잡아먹은 또 다른 무리의 일곱 마리는 “흉하고 파리한” 것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나타난 이들 일곱 마리의 암소들은 외관상 “흉하고 파리할” 뿐만 아니라, 더욱 끔찍하게도 육식(肉食) 짐승으로서, 먼저 나타난 일곱 마리 “아름답고 살진 암소”들을 모두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 꿈의 ‘판타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왕이 놀라 깨어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가 다시 잠이 들어 꾼 두 번째 꿈 역시 그 충격에 있어 첫 번째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곡창지로서 이집트에서 곡식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나, 이번에도 두 무리의 “일곱 이삭” 중에서 나중에 나타난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먼저 나타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 무리를 집어삼켜버린 것입니다! 봄과 가을에 사막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동풍”은 모든 식물들을 순 식간에 말려 죽여 버릴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데, <성경>도 여러 곳에서 이 바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겔 19:12; 사 40:7-8; 마 6:30). ‘이집트’에서는 사막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오지만, “동풍”은 이스라엘 독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입니다.
이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바로’는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현실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깨어난 후에도 그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꿈은 잠에서 깨어나면 잊어버리는 데도 말입니다.
2. 왕의 해몽가들(8-13절)
두 번째 장면은 왕의 번민하여 자기 꿈을 해석해 줄 사람들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8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9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0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8-13절)
왕이 지난 이 년 동안 꿈을 꾼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입니다만, 이번처럼 그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이번에 꾼 꿈은 이전에 그가 꾸었을 여러 다른 꿈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화자는 그가 “불안하여 번민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표현을 <다니엘>에서도 읽을 수 있는바, ‘느부갓네살’이 그가 꾼 기이한 꿈 때문에 드러내고 있는 모습입니다(단 2:1, 3).
왕은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점성가들과 현인들을 불러 모아 꿈의 해석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도 제대로 해석해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과연 이들이 왕의 꿈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까? 왕의 꿈은 ‘요셉’의 꿈처럼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한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요셉’의 꿈의 경우 그의 형들이 그 꿈에 대해서 듣자 말자 이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이들 점성가들도 왕의 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챘으나 짐짓 모른 체 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상스럽지 못한 징조를 왕에게 고하였다가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정직보다는 외교적 수사(修辭)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꿈의 의미를 해석해 주었으나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왕이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드디어 ‘요셉’에게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 장”이 마침내 왕 앞에 나아와서 그의 지난 체험과 더불어 ‘요셉’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9-13절)는 40장에서 이미 화자가 소개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죄(들)를 기억한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죄란 일차적으로 왕을 진노하게 했던 그 죄임에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요셉’의 부탁을 기억해내면서 갖게 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 “죄”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의 오랜 기다림이 마침내 그 빛을 보게 될 참입니다. 노예에서 죄수로 그리고 마침내 왕의 부르심을 받을 순간이 온 것입니다. 이처럼 극적인 변화를 의도적으로 강조라도 하려는 듯, “술 맡은 관원 장”은 ‘요셉’을 그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친위 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해몽가(14-46절)
세 번째 단락은 본문의 절정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45:1-15의 본문과 함께 <요셉 이야기> 전체의 절정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무명 씨 ‘요셉’에서 마침내 왕의 오른 팔이 되는 과정을 이 단락은 담고 있습니다.
왕의 호출. 그 첫 장면은 왕이 감옥에 있는 ‘요셉’을 호출해 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14절)
이 장면은 ‘요셉’의 신변상의 변화가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자가 이 문장에서 동원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보내어... 부르매... 급히 내놓은 지라.” “감옥” 역시 그의 극적인 변화를 대변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단어는 “구덩이”(r/B, 보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전에 ‘요셉’의 형들이 그를 내버린 바로 그 구덩이와 같은 단어이며(37:20, 22, 24, 28-29), ‘요셉’ 스스로도 자신이 갇혀 있던 감옥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40:15). 그러니까 수치와 모멸을 상징하는 이 장소가 존귀와 명예를 상징하는 왕궁이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할 것입니다. ‘요셉’은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이 제사나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도 같은 행위가 요구되고 있습니다(35:2; 출 19:10, 14; 레 14:8-9).
왕의 꿈. ‘요셉’과 왕의 첫 대면은 다소 논쟁적인 질문과 답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5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5-16절)
왕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요셉’의 능력에 대한 자신의 기대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그러한 정보를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말입니다. ‘요셉’ 또한 왕에게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즉답을 피한 채, 왕이 가진 정보가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면서 이를 수정해 주고 있습니다. 즉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면서, 동시에 왕에게 일말의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렸다고 했으니 당연히 정확한 해석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존의 권리와 신적인 능력을 지닌 한 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가장 비천한 노예이자 죄수로부터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받고 있는 이 장면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 장의 꿈을 해석해 줄 때였습니다.
이제 왕은 안심하고 꿈의 내용을 ‘요셉’에게 밝힙니다. 이처럼 ‘바로’ 왕이 ‘요셉’을 대하는 태도는 훗날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대하는 태도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로’와는 달리 자신의 꿈에 대해서 전혀 기억조차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인지 ‘다니엘’에게 꿈의 해석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꿈의 내용부터 알려달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단 2). 그런데 ‘바로’가 ‘요셉’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는 첫 번째 단락(1-7절)에서 화자가 소개한 바 있는 내용과는 다소 다릅니다.
17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18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19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20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21먹었으나 먹은 듯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22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23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24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17-24절)
즉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일곱 마리의 살찐 암소와 또 다른 일곱 마리의 야윈 암소에 대한 진술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 한 쌍의 이삭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왕은 야윈 암소나 가늘고 마른 이삭에 대해서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 일곱 마리의 마른 암소에 대해서 “내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가 하면(19절), 이들 마른 암소들이 살진 암소들을 먹어치운 후의 모습에 대해서도 “먹기 전의 모습과 같고 여전히 흉하더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21절). 아마도 그의 꿈에 대해서 상당히 겁먹은 듯한 모습입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왕이 두 번의 꿈을 꾸었음에도 그 꿈들에 대해서 말할 때 한 번의 꿈인 것처럼 단수형, “나의 꿈”이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17, 22절; 참고 15절). 아마 그는 두 가지 꿈 모두 자신의 미래에 대한 동일한 경고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래서 ‘요셉’의 해석을 경청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의 해몽. ‘요셉’이 왕의 꿈을 해석해주고 있는 이 장면은 그동안 <요셉 이야기>에서 그 자신의 이야기로서는 처음으로 가장 긴 대목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분명하고 또한 단언적입니다. 그의 해석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꿈의 해석(25-32절); (2) 왕이 취해야 할 행동 강령(33-36절). 우선 그 첫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25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27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32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25-32절)
‘요셉’의 해석은 네 가지 요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두 꿈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25-26절). 둘째, 일곱 암소와 일곱 이삭은 일곱 해를 의미하는 것이다(26-27절). 셋째, 일곱 해의 풍년 뒤에는 일곱 해의 흉년이 따를 것이다(29-31절). 넷째, 같은 꿈을 두 번씩이나 꾼 것은 그 일이 신속하게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32절).
이처럼 ‘요셉’은 이 꿈을 하나의 유비 즉 ‘알레고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암소나 이삭을 땅의 소출과 연관시키는 것은 ‘이집트’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해석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주전 2 세기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의 한 문헌에 따르면, 주전 2600년 경 칠년의 풍년에 이은 칠년의 흉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인지 또는 후대의 거짓 기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만, ‘이집트’나 고대 근동 지방에서 칠년에 걸친 흉년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길가메쉬 서사시>나 <우가릿의 아캇트 서사시>에서도 칠년 동안의 흉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다윗’의 선지자 ‘갓’도 칠년의 흉년에 대해서 예고하고 있습니다(삼하 24:13).
꿈의 기원과 관련해서 ‘요셉’은 당시 ‘이집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신적인 기원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8절). 당연히 꿈의 해석도 “예언적 신탁”의 양식을 띠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라) 일곱 해의 큰 풍년이 오리니”(29절). <족장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이 예언자 내지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15:1-21; 18:17-33; 20:17; 27:27-29; 48:15-49:27), ‘요셉’ 또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닙니다. 특히 이곳에서 그는 ‘나단’ 등과 같은 왕궁 예언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삼하 7).
‘요셉’이 꿈을 해석하면서 풍년보다는 뒤이어 올 흉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풍년을 언급하는 장면은 단 한 문장으로 처리하고 있는 반면(29절), 이어지는 흉년에 대해서는 다섯 문장에 걸쳐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30-31절). 꿈을 경고나 위협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서는 ‘요셉’이나 ‘바로’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셉’은 ‘바로’ 자신이 했던 말을 일부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리라”(31절하). 지난 날 ‘가나안’에서의 극심한 흉년이 ‘아브라함’을 ‘이집트’로 내몰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야곱’ 가족을 이곳으로 내몰게 될 것입니다(43:1; 47:4, 13). 흉년에 관한 ‘요셉’의 언급은 벌써부터 드라마의 다음 장면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두 번의 꿈이 의미하는 바는 의미심장합니다. ‘요셉’도 언급하고 있는 바처럼(32절),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표현은 여러 가지 경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일이 확실하게 드러나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경우를 의미할 때나(신 13:14; 17:4), ‘다윗’의 왕조의 굳건함을 강조할 때나(삼하 7:26), 또는 달과 같은 천체의 변함없는 운행을 의미할 때(시 89:37),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두 번의 꿈이 의미하는 바는 또 있습니다. 즉 “그 일이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문맥에 따르면, 그 일은 다가올 흉년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요셉 이야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수년 전 ‘요셉’ 자신이 꾼 두 차례의 꿈이 성취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그에게 나아와 절을 하는 그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도 속히 이루실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다시 한 번 이 장면은 다음에 전개될 에피소드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이 꿈을 해석해 줌으로 인해서 조만간 국가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단락은 ‘요셉’의 해몽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왕이 취해야 할 행동에 관한 조언입니다:
33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33-36절)
그는 단순히 꿈을 해석해 주는 자가 아니라, 왕이 취해야 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조언까지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조언은 신학적으로 적절한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von Rad). 즉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고, 그 일을 반드시 신속하게 이루실 것이라면, 그 일에 적절히 대비하는 일이야말로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부언하자면 하나님의 예정은 수수방관 지켜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정에 적절히 대응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왕에게 주는 첫 번째 조언은 우선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선택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하라는 것입니다(33절). <구약>에서 “명철과 지혜”는 훌륭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신 1:13; 왕상 3:12; 잠 10:13; 14:33). 왕이 취해야 할 두 번째 행위는 “감독관”(dyqiP, 파키드)들을 임명하는 것입니다(34절). 감독관, 장관, 행정관, 또는 타인을 감독하는 부하 관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키드’는 ‘파카드’(dq'P)에서 유래했으며, <구약>에서 이 단어는 13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선택하는 것과 “감독관들”을 선택하는 것이 서로 상충되거나 무의미한 반복 진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둘은 서로 다른 직책을 말하는 것으로서, “감독관들”이란 그보다 더 놓은 지위에 있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행정적으로 수행하고 돕는 자들로 보면 될 것입니다(G. Wenham). 이들이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은 곡식의 수확과 보관 및 분배 등에 관한 일이었을 것입니다(34-36절). ‘요셉’이 왕의 행동을 촉구하는 표현 중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이같이) 행하사”는 앞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언급할 때 사용한 그 동사와 동일하다는 점에서(참고. 25, 28, 32절),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본받아 그대로 행동을 취하라는 충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의 선택. 왕은 ‘요셉’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안도 수용하고 있습니다. 왕은 ‘요셉’의 해석이 밝고 낙관적인 것이 아니라 어둡고 비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용하였습니다. 자신이 받았던 느낌도 역시 그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7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37-41절)
왕이 ‘요셉’을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요셉’의 제안한 해결책 때문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의 제안대로 한다면 재앙과 역경을 극복하고 나라의 장래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왕은 그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로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영”(!yhila> j"Wr, 루아흐 엘로힘)을 언급하기는 이곳이 두 번째입니다(참고. 창 1:2). “하나님의 영”은 ‘브살렐’과 같은 성막 건축 기술자를 감동시킨 바 있으며(출 31:3; 35:31), ‘기드온’이나 ‘삼손’은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며(삿 6:34; 14:6), ‘사울’이나 ‘다윗’ 등과 같은 이스라엘의 왕이나 지도자들에게도 임하기도 했습니다(삼하 10:6; 16:13; 사 11:2; 단 5:14). <상경>은 “지혜”도 “하나님의 영”이 주는 하나의 은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를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도 ‘요셉’처럼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을 찾아보라는 요청으로서, 왕이 그를 선택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왕은 결국 ‘요셉’을 “총리”로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직책이나 지위와 관련해서 본문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는, “총리”(vizier)가 분명해 보입니다. 40-41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처럼 그가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사실 또한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41절은 40절의 내용에 대한 반복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만, 41절은 구문론 상으로나 그 내용에 있어 40절과는 불가분 의존적인 관계에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은 그에게 왕 다음가는 권력을 위임함으로써, ‘이집트’를 총리하게 하였으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하도록 했습니다(문자적으로 “입 맞추도록” 함).
‘요셉’의 취임 장면은 <성경> 그 어디에도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화려하고 장엄한 것으로서, 다음 두 절은 이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42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44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42-44절)
이처럼 화려한 취임식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의 유품들을 통해서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왕의 인장”은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요셉’의 권위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마포”(vv, 셰쉬)는 ‘이집트’ 단어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왕궁 관리들은 속이 드려다 보이는 최고급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성막”의 장막이나 제사장의 옷을 세마포로 만들었습니다(출 26:1; 39:27). 왕이 그의 종이나 신하들을 치하할 때 그들의 목에 “금사슬”을 걸어주는 장면을 고대 ‘이집트’의 많은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총리를 임명할 때에도 이와 같은 의식을 거행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왕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요셉’의 꿈 해석과 현명한 조언에 대한 보답이자 치하(致賀)의 표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왕은 그에게 또한 “버금 수레” 즉 제 이 인자를 상징하는 수레를 하사했습니다. “수족을 놀릴 수 없다”는 표현은 “꼼작할 수 없다” 또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다”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은 ‘요셉’에게 총리의 지위에 걸 맞는 모든 위엄과 정치권력을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사실상 ‘이집트’의 지배 계층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45절)
즉 그에게 ‘이집트’ 식 이름을 하사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헌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집트’ 이름을 주는 일에 대해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새로운 이름 ‘사브낫바네아’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요세푸스’는 이를 “숨어있는 탐험가”(hiding discover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대 주석가들은 1889년 Steindorff가 제안한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가 살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런 뜻의 이름은 노년(老年)에 부부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아이에게 붙여주는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Vergote; Kitchen).
‘요셉’은 ‘이집트’ 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사제의 딸로서 그 이름은 ‘아스낫’이며, ‘이집트’어로 “네이트 여신에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이 사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이제 ‘이집트’ 사회에서 소위 ‘로얄 패밀리’로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a)은 ‘카이로’ 북동쪽 16 킬로미터에 위치한 지역으로 태양신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음 구절이 ‘요셉’의 정치적 권력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6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즉 그가 ‘이집트’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지위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약관 삼십이었다고 하니, 그가 십칠 세에 이곳으로 노예로 팔려왔으니 십삼 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입니다. 지나간 세월은 그야말로 고통과 수치와 실의와 좌절의 무명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그의 지나간 세월을 회고해 주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가족과 함께 살 던 그 시절을 회고해 주면서 이제 곧 있을 가족과의 감격적인 재회와 그리고 그의 꿈이 성취되고 있음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4. 꿈의 성취(47-57절)
하지만 ‘요셉’의 꿈이 성취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바로’의 꿈이 현실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두 장면에서 차례로 보여주고 있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장면은 41장을 마무리 짓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칠년의 풍년. 먼저 네 번째 장면(47-52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칠년의 풍년에 대한 기술입니다.
47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47-52절)
그런데 이 단락은 칠년 동안의 풍년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요셉’의 활동이나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자는 이곳에서 칠년 동안의 풍년에 대한 기록은 사실상 단 한 구절로 아주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는 반면(47절), ‘요셉’의 활동이나 자녀 출생과 같은 그의 가족사에 오히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칠년 동안의 흉년에 대한 비교적 긴 설명과 비교하면 다소 불균형한 진술이라 하겠습니다.
첫 칠년 동안 소출이 “심히 많았다”($m,q, 코메츠)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한 웅큼”을 의미합니다. “곡식이 손에 가득하다”는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은 자신이 왕에게 조언한 그대로 행동에 옮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35절). 풍년 동안 쌓아둔 곡식의 양이 심히 많아 “바다의 모래”와 같았습니다. 이 표현은 <족장 이야기>에서는 아주 친숙한 것으로서, 후손의 수와 관련해서 ‘아브라함’ 언약(22:17)이나 ‘야곱’ 언약(32:12)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어지는 세절(50-52절)에서 ‘요셉’의 두 아들의 출생에 관한 언급은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또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훼스터만’(Westermann)의 주장, 즉 이 세 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하는 일종의 편집적 삽입이라는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겠습니다.
첫 칠년은 국가적으로 뿐만 아니라, ‘요셉’ 개인적으로도 아주 풍성한 기간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자녀의 출산은 풍년과 함께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입니다(신 28:4). 그의 첫 아들 ‘므낫세’(hV,n"m)가 의미하는 바는 본문의 설명대로 “잊어버리게 하다”인데, 한 아들의 출생은 이처럼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과거지사 전부를 잊어버리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내 아버지의 온 집 일”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가족을 잊어본 적이 없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몽매(夢寐)에 그리던 그 가족을 이제 곧 만나게 될 것임을 그의 독백이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 아들, ‘에브라임’(!yIr"p]a)은 원래 “비옥한 땅” 또는 “방목지” 등을 의미하는바, 이는 앞으로 ‘에브라임’ 지파가 기업으로 물려받게 될 땅에 대한 적절한 묘사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곳에서 아들의 이름과 연관 짓고 있는 의미는 ‘히브리’어 동사 “생육하다”(hr;P) 또는 “풍부하게 결실을 맺다”로서 이는 <창세기>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창 1:22, 28; 8:17; 26:22; 35:11). 특히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해서 그렇습니다(17:6, 20; 28:3; 48:4).
‘요셉’이 이제 겨우 아들 둘을 낳고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소 어색합니다만, 그의 말 속에서 다소 예언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훗날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서 가장 크고 강성한 지파 중의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신 33:17).
아무튼 ‘므낫세’이든 ‘에브라임’이든 두 이름 모두에서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감사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므낫세’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느낄 수 있다면, ‘에브라임’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이름 모두에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약속,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39:2-6, 21-23). 따라서 두 아들의 이름 속에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이 드러나 있다 하겠습니다.
동시에 ‘요셉’의 표현대로 그가 “수고한 땅” 즉 “고난의 땅”은 <출애굽>이나(3:7, 17; 4:31) <신명기>에서(26:7)에서 “이집트의 구속” 즉 노예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요셉’이 이곳에서 경험한 바는 훗날 이스라엘이 겪게 될 운명을 예고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칠년의 흉년.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일곱 해의 흉년에 관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칠년 동안의 흉년은 아주 친숙한 것입니다. 예컨대, ‘이집트’ 남쪽 ‘수단’ 지역에서 적절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 북쪽 ‘이집트’에서는 약 삼 개월 간의 홍수 시기에 ‘나일’ 강이 범람하지 않으며, 범람이 없으면 ‘이집트’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지역에서도 기근은 흉작을 불러옵니다. ‘수단’과 지중해 의 전 지역이 동시에 가무는 경우는 그리 흔치는 않습니다만, 본문은 그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서 ‘이집트’는 물론 주변 모든 나라들이 최악의 상황은 모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3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54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55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53-57절)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화자는 흉년의 심각한 피해를 강조하려는 듯, 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반복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근은 ‘이집트’는 물론(55-56절) 주변 모든 나라에 심각한 피해를 안겨주고 있습니다(54, 55절). 화자는 ‘이집트’와 주변 각국에 미친 광범위한 기근의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두 지역을 교차대구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A 각국(54절)
B 애굽 온 땅(54절하, 55절)
B' 온 지면, 애굽 땅(56절)
A' 온 세상(57절)
이처럼 세계적 기근에 대한 다섯 번에 걸친 반복과 두 번에 걸친 “기근이 심하다”는 표현을 통해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근과 관련해서 이와 유사한 표현은 ‘예루살렘’의 함락과 관련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왕하 25:3; 렘 52:6).
화자가 기근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있는 바는, 그것이 ‘요셉’이 예고했던 그대로 일어났으며(54절), 그가 비축해둔 양식을 ‘이집트’ 백성에게 공급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이전에 해석해 주었던 왕의 꿈이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 또 한 가지 꿈이 이십여 년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은 ‘요셉’ 자신의 꿈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각국이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다”고 함으로써, 그의 꿈 또한 곧 성취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요셉’이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비상 구호의 역할은 ‘이집트’에서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집트’ 문헌에서 기근 시 동료 시민들에게 비상식량을 원조해주는 사람의 이야기들이 꽤나 알려져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왕의 꿈
꿈. 오늘날 꿈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꿈은 어떤 간절한 희망이나 또는 두려움이 투영된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 문학에서 꿈은 그야말로 “헛된 망상”, “부질없는 생각” 등에 대한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이 덧없고 부질없다는 의미에서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부르는가 하면, 인생에서 한 때의 부귀영화를 “남가지몽”(南柯之夢)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남가지몽”은 중국 당나라의 순우분(淳于棼)이 술에 취하여 홰나무의 남쪽으로 뻗은 가지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괴안국(槐安國)으로부터 영접을 받아 20년 동안 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서양의 한 민요도 인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어가세, 저어가게, 또 저어가세 우리 인생의 배를
가만히, 가만히, 물결을 따라
유쾌하게, 유쾌하게, 유쾌하게, 또 유쾌하게
인생은 한낱 꿈인 것을
이 노래 역시 인생을 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꿈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꿈에 대해서 더욱 냉소적입니다. 그들은 “꿈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루 밤 새에 많은 꿈을 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대부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필자도 지난밤에 꿈을 꾸다 크게 웃으면서 깨어난 기억이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내가 왜 웃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꿈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을까요? <시편> 기자는 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 73:20). 시인은 이곳에서 악인을, “무시하고 멸시해도 괜찮은 꿈”에 비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그런데 <요셉 이야기>는 유독 꿈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그것도 무시하고 잊어버려도 괜찮은 꿈이 아니라, 한 개인은 물론 국가나 민족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가 꾼 두 번의 꿈도 그렇습니다. 화자는 이들 두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라”(41:25). 그리고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이들 꿈은 <창세기>를 관통하는 “언약” 즉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통로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요셉’은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의 왕이나, 그의 두 고위 관리(“술 맡은 관원 장과 ”빵 굽는 관원 장)들은 이 언약과는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니 “족장의 언약” 속에 그를 포함시킬 수 있다 해도, ‘이집트’의 이방인들을 그 속에 포함시킬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무대의 등장인물로 이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을 이루는 방식 또한 썩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꿈이 이야기의 중요한 도구로 등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쉽고도 간단한 방법을 두고 이처럼 복잡한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까?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작가나 연출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할 때, 어떤 소재(素材)를 사용할 것인지, 어떤 인물들을 등장시킬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구성할 것인지 등에 관해서 독자나 청중들에게 묻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나 연출가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우연처럼 보이는 그 모든 사건이나 에피소드조차도 필연이라는 고리를 통해서 연결시켜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나 <출애굽 이야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출애굽>이 <요셉 이야기>의 “반 모형”(反 模型; anti-type)으로 볼 때, 두 이야기 모두에서 ‘바로’가 중요한 인물로 무대 위에 등장한다 해서 크게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두 이야기에서 두 왕이 맡은 역할이 정 반대입니다. 한 사람이 악역(惡役)을 맡고 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선하거나 중립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화자는 왕이 꾼 두 번의 꿈에 대한 기술로 시작하고 있으며, 꿈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왕 자신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꿈의 내용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기에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들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화자는 ‘요셉’의 발언을 통해서 왕의 꿈이 아무 의미 없는 우연한 “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25절).
물론 왕 자신은 그 사실을 알 리도 없고, 또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 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흉흉한 꿈이라는 기억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꿈의 내용은 알되 그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자기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왕 주변의 어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기에 그의 번민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일견 ‘바로’의 꿈은 훗날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비슷한 면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 경우에도 왕의 꿈을 이해하고 해석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바로’와는 달리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전혀 기억조차 하지 못했으며, 그러니 다른 사람이 그의 꿈을 해석해 줄 수 없었음이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바로’의 문제는 꿈의 내용이 아니라 꿈의 의미를 해석해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통상 하나님의 계시가 갖는 특징이 이런 것일까요? 애매모호하고, 아무도 알 수도 없고, 언제 성취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신비한 그 무엇 말입니다. 가장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정의하자면 이런 입장은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엇을 계시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역설적 대답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그분을 온전히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을 모두 다 파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서 ‘바로’의 신하나, 점성가나, 현자나, 또는 마술사들 중에서 아무도 그가 꾼 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없다는 진술은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의 마음을 텅 빈 상태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왕의 마음만 꿈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잠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하나님. 바로 여기에 ‘요셉’을 선지자로 부를 수 있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을 선지자로 부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족장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영웅이며 동시에 선지자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때로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 언약을 ‘요셉’을 통해서 이어갈 차례입니다. 바야흐로 ‘요셉’의 인생 역전 제 3막이 전개되려는 순간입니다.
왕이 감옥에 있는 그를 급하게 불러내고 있습니다. 무명의 한 ‘히브리’ 인 죄수가 절대 권력자 ‘바로’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무대의 중앙으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듯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요셉’만큼 극적인 인생의 반전을 경험한 인물도 없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나이 삼십에 어느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인생의 山戰水戰을 다 겪었습니다.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우리네 경구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이 경구를 적용해 보자면, “잘되면 내 탓, 못되면 하나님 탓”이 아닐까요? 대개 우리는 갑자기 역경을 만나게 되면 실망에 빠져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으로 생각하거나, 더 심하면 실망은 분노로 바뀌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분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상황이 호전되면 그렇게 열심히 찾던 하나님은 내 안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면서 그 모든 변화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버립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하나님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인생이 ‘요요’(yoyo)처럼 변화무쌍하다면, 그에 대한 나의 대응 방식 또한 ‘요요’와 같이 一喜一悲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감옥에서 불려나오며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의기양양하고 있었을까? “그러면 그렇지”하고 말입니다. 화자는 그가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갔다”라고만 전하고 있습니다(14절하). 그를 지키던 간수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그의 모습에서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로서의 고요함과 담담함, 그리고 겸손함을 엿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태여 이런 설명이 아니더라도, 지난 십 수 년 동안의 역경을 거치면서 ‘요셉’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왔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한 번도 하나님을 잊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이 년 전 왕의 “술 맡은 관원 장”과 “빵 굽는 관원 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그가 했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 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40:8).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에 우연이란 없으며, 아무 의미 없는 일이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이 도움을 주었던 그 일이 이번에는 자신을 도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려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고 ‘요셉’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하고 계신다 하겠습니다. ‘요셉’에게 신세를 졌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 한 사람도 ‘요셉’을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기억을 되살려 놓은 것입니다. 그가 왕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9-1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혹시 ‘요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왕이 그에게 꿈에 대해서 설명하며,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고 말하자 ‘요셉’은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절). 그는 왕에게 그저 “예, 그렇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집트’의 잡다한 신들 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왕에게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그의 분노를 자초하는 것은 아닐까? 꿈을 해석하는 신령한 능력을 과시하면서,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생의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물실호기(勿失好機)를 맞아 과연 어느 쪽이 확률적으로 더 나은 선택일 것인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으로 돌릴 것인가? 적어도 확률적으로 볼 때,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이름을 굳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손해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은 더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요셉’이 이런 선택을 앞에 두고 흔들렸다거나 갈등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단호했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지존의 왕과 滿朝百官이 나열해 있는 화려하고 장엄한 왕궁에서 일개 죄수가 그들 모두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시여, 그 꿈을 해석해 줄 사람은 이 나라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나라의 잡다한 신들도, 당신 앞에 나열해 서 있는 저 많은 신하들도, 저 모든 점술가도, 현인들도 아닙니다. 오직 한 분이신 나의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어떻습니까? 가슴이 뛰고 심장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역시 큰 감동과 함께,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는 과연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내가 너를 구하겠고, 내가 너를 높이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왕과 하나님. 하나님만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역시 그렇습니다. 그에게 ‘요셉’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요 예언자였습니다. 경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38절하).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곧 “성령”을 이르는 말로서, <성경> 전체적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이후 <출애굽> 등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출 31:3-5; 35:30-31), <신약>의 “오순절” 날에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그 절정을 맞이하고 있습니다(행 2:1-21). 그리고 이 사건은 <요엘>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기도 합니다(욜 2:28-32).
“바벨탑의 반역”이 있었을 때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셔서 인간들의 영을 혼미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요셉’에게 “성령”으로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지혜와 명철로 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이 자기에게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혜와 명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임을 직감했습니다. 이방인 ‘바로’에게도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39:2, 3, 21, 23). 나는 어떻습니까?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들과 한 통속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생각이나 행동과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말입니다. 아니면 나를 별종으로 간주하고 있습니까?
역경과 환난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합니까? 인생이 내 계획대로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인생들이 나를 속이고 배반하며 돌아설 때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을 때는 또 어떻게 합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까요? 정말 그분이 나를 항상 기억하고 계실까요? 언제 어디서나 내가 드리는 기도를 듣고 계실까요?
그렇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환난 날에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난 날에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늘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나를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면, 하나님 역시 나를 발견하고 기억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고, 제자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여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닫고 장장 150일에 걸친 대홍수를 끝낸 것은 ‘노아’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이 혼란과 격동과 어두움이 아니라 질서와 절제와 평안 가운데 지낼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기억하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2. 총리 요셉
성공의 비결. 나이 열일곱에 노예로 팔려와 서른에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니 변신도 이만한 변신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다윗’도 홍안(紅顔)의 소년 시절 선지자 ‘사무엘’의 점지를 받은 후 실제 왕으로 등극하기 까지 13여 년을 도피와 방랑 가운데 보냈으니, 두 사람이 忍苦의 세월을 보낸 기간은 거의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되는 과정이나 비결도 유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요셉’이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頂点)에 서게 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앞에서 그 비결을 ‘요셉’의 인격에서 찾은 바 있습니다. 환난을 통하여 형성된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의 비결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셨고, 항상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가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그의 평소 말과 행동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증거는 “그가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이방인 ‘바로’였습니다. 그는 ‘요셉’으로부터 자기나 자기 신하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요셉’이 환난과 역경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 번도 하나님으로부터 눈길을 돌린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역경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그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김홍신 작가가 쓴 <인생사용 설명서>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산을 오르거나 다리를 다쳤을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편합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거나 다리가 완쾌되었을 때는 지팡이가 오히려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가 의도했던 교훈은 다른데 있었지만, 우리는 그의 글을 ‘요셉’의 성공 이야기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낮은 자리에 있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가난할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를 의지해서 사회적인 성공을 기대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단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고 나면, 지위가 올라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하나님도 서서히 귀찮고 짜증스러운 존재가 되어갑니다. 하산 시에 지팡이가 귀찮게 여겨지듯 말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참석하던 성경공부나 기도회도 점차 소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주일 예배도 수시로 빠지게 됩니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자녀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점차 관심이 멀어져 갑니다. 점차 세속적이 되어갑니다. 부요가 가난을, 풍요가 빈곤을 가져오게 된 것이지요.
이는 비단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자신의 조국 미국도 그렇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J. M. Boice, 971쪽.
그의 진단에 따르면, 한 때 미국은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경건한 국가였습니다. 물론 미국이 처음부터 기독교 국가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 제국들에 비하면 신대륙이 기독교 정신에 충일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양대 세계 대전 전후만 하더라도 유럽 정치가들은 “미국이 위대한 것은 미국이 선하기 때문이다”고 시인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고, 이후 미국은 번영과 함께 쇠락의 길을 함께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번영이라 함은 세상적 번영을 말하고 쇠락이라 함은 영적 쇠락을 말합니다. 미국은 적게 가졌을 때, 오히려 더 자주 하나님과 교회를 찾았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좇아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시간적 여유가 늘어갈수록 하나님은 미국인들의 삶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져만 갔습니다. 공공장소에서의 기도는 사라지고, 학교는 세속적 인본주의의 溫床이 되었으며, “주의 날”(the Lord's day)은 소위 “슈퍼 선데이”(Super Sunday)가 되어 하나님이 아니라 온갖 스포츠나 연예 공연 행사가 경배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몰아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기독교 국가는 고사하고 도덕적인 국가로 인정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몰아낸 결과일 것입니다. 그 자리에 정부와 국회와 법원이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리와 실용과 합법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나라가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할 때, 윤리나 도덕이나 선함도 함께 그들의 삶에서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북극해의 빙하 덩어리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하루아침에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하우스’(Barnhouse) 목사님은 그의 설교에서 한 예화를 들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국가에서 주화(鑄貨)를 제조할 때 오늘날처럼 자동 공정을 거쳐 일정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수작업(手作業)으로 이루어졌는데, 금이나 은을 녹인 물을 틀에다 부은 후에 왕이나 신의 형상을 새긴 주형(鑄型)을 찍어 눌러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주화 하나하나마다 형태나 함량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알고 함량이 더 나가는 것으로 보이는 주화는 가려내어 날카로운 칼로 여분의 금이나 은을 벗겨내어, 새로운 주화를 만들어내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위조 주화를 각 가정마다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불법 행위가 하도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터라 이를 막기 위하여, ‘아테네’ 시의 경우 약 백년의 기간 동안 무려 팔십여 개에 달하는 규례를 제정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고대 주화를 전시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박물관에서 이러한 함량 미달의 주화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당시 이런 행위가 얼마나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관행을 사도 ‘바울’도 알고 있었던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여기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동사 “버림을 당하다”(ajdovkimo", 아도키모스)는 위에서 예로 든 “함량 미달의 금속” 내지는 “공인받지 못한 화폐”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들 화폐는 정상적인 상거래에서 사용될 수 없으며, 모아서 재공정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사도 자신도 훗날 함량 미달의 주화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언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고난의 시기일까 아니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고 있을 때일까? 타협과 양보는 고난의 시기에서보다는 오히려 번영과 번성의 시기에 더 쉬워지는 것 같습니다. 자극이 있는 곳에 분투가 있고, 환란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만, 풍요와 무위도식이 있는 곳에 오히려 절망과 우울증이 싹틉니다. 한 개인이 영적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 교회가 그렇게 되고, 국가가 그렇게 됩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전혀 고려치 않으며, 법정은 시시비비를 가려 정의를 세우는 곳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터로 변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한 사람 때문에 이집트는 조만간 사상 유례 없는 풍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셉’ 자신은 자만이나 독선에 빠져들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초지일관이었습니다. 그가 출세의 정점에 서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면 이러한 진단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51-52절).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요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가 역경에 빠져 있든, 순항하고 있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셉에게 가라.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눈에 보이는 역할 모델 즉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인생의 스승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현자들의 한 결 같은 충고이자, 현재 이야기에서 ‘바로’ 왕의 충고이기도 합니다. 그 좋았던 칠년의 황금기가 끝나고 동일한 기간의 흉년이 닥쳤습니다. ‘요셉’의 경고를 무시하고, 여름 한 철 베짱이처럼 흥청망청 놀고먹던 사람들이 추운 겨울을 맞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왕에게 와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입니다(55절상). 왕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요셉에게 가서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55절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칠년의 풍년”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칠년의 흉년”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류는 때로 태평성대를 구가한 적도 있기는 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일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소위 “빅토리아의 전성기”를 거치기도 했고, 이차 세계 대전의 終戰 이후 2009년의 미국 발 “금융 대란”이 있기 까지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 한 곳이었으며, 번영과 풍요는 계속 이어지고 발전해 갈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가 꾸었던 첫 번째 꿈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빅토리아의 전성기”의 낙관론은 이후 계속된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서 산산조각이 났으며, 소위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변되던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끔직한 두 번째 꿈이 다시 찾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악몽은 단순히 경제적인 위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인류에게 닥친 위기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구폭발, 식량부족, 전 세계적인 기아와 기근, 지구 온난화, 자원의 고갈, 핵전쟁의 공포. 어느 한 가지 심각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혼돈과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사기>가 진단하고 있는바 그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 또한 그들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예정하신 일도 아닙니다. ‘바로’ 왕 시절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내어 온 나라와 족속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아구스도’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온 인류가 구원받도록 예비하셨습니다. 절망에 빠져 다가오는 백성들에게 ‘바로’가 “요셉에게 가라”고 충고한 것처럼,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예수에게로 가라”고 충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요 6:35). 영적 기근으로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하).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골 1:19). ‘요셉’이 양식을 찾아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값을 받고 팔았다면, 예수님은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저 주실 것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야기는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하였다”는 언급으로 끝맺고 있습니다(57절). 오늘도 그 때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기근이 나를 덮치고 있습니까? 예수에게로 가서 그가 이르는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자기에게 오는 하인들에게 ‘마리아’도 그들에게 충고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 예수님께 내 모든 문제를 아뢰고,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3. 기억과 망각
1953년 7월 27일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을 무슨 특별한 날로 기념하는 행사도 없습니다. 이 날은 6·25 전쟁 휴전 일입니다. ‘오바마’(Obama) 미 대통령이 이 날을 “한국전 참전용사 휴전일”로 지정함에 따라 2009년 7월 27일 워싱턴 DC의 백악관을 비롯한 미전역의 연방정부 건물 등에 일제히 성조기가 조기(弔旗) 게양됐습니다. 백악관과 연방의회 의사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성조기가 조기로 게양됐으며, 인접한 다른 연방정부 건물도 모두 성조기가 반기(半旗)로 내려졌습니다. 이날 6·25 전쟁 휴전 56주년 기념식이 열린 한국전 참전 기념탑에도 성조기가 조기로 게양됐습니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이런 일을 가능케 하도록 백악관과 미 의회의 문을 두드린 이는 20대 재미교포 ‘한나 김’(Kim)과 그녀가 1년 전에 시작한 모임 “리멤버 7·27”입니다. 6·25 참전용사 출신의 ‘찰스 랭겔’(Rangel) 연방 하원 세입위원장이 “한나 김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일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 역할이 컸습니다. 미 하원에서 ‘낸시 펠로시’(Pelosi) 의장 다음가는 영향력을 지닌 ‘랭겔’ 위원장은 그의 정성에 감동해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을 발의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국은 참전용사들이 흘린 피의 중요성을 어느 나라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입니다. 6·25 종군 기자였던 ‘데이비드 할버스탐’(Halberstam)이 출간한 719쪽 분량의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이 주목받은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하겠습니다.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고 예우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삐딱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한나 김’은 2006년 1월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동료들과 435명의 하원 의원 실을 모두 방문하고, 백악관 관계자들을 접촉하고, 끊임없이 이메일과 팩스를 보내 협조를 요청하여, 이 일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운 ‘한나 김’과 “리멤버 7·27” 회원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6·25 전쟁은 종전(終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정전(停戰) 중입니다.
이처럼 한 개인이든 국가든 반드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동일한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기 위함입니다. 물고기는 기억력이 불과 4초를 넘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끼를 물려다 낚시에 걸려 입이 찢어지는 혹독한 체험을 하고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미끼를 물러 다가온다고 합니다. 아마 그냥 즐기자고 한 이야기 같습니다만, 마땅히 기억해야 할 일을 망각하는데 대한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품고 있음으로 해서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온 나라에 큰 낭패와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계속 모아둠으로써 온 집안에 악취가 가득하게 되는 경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억과 망각”은 각각 나름대로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서도 “기억하라”와 “잊어라”는 권면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기억과 망각”에 관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만, 화자는 이를 위하여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의 결혼과 두 아들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50-52절)를 마치 괄호로 처리하듯 잠시 언급하면서, 주의 깊은 독자로 하여금 이 주제에 관한 교훈을 이끌어내 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망각의 유익. 우선 ‘요셉’의 큰 아들 ‘므낫세’(hV,n"m)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잊어버리다”입니다. ‘요셉’은 큰 아들의 탄생을 계기로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홍신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영혼의 쓰레기”입니다. 원한과 분노와 복수심으로 얼룩진 과거를 말합니다.
고 직한 선교사님은 한국판 <Christianity, Today> 2009년도 8월 호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아쉬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노무현은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가진 상처와 쓴 뿌리를 치유하지 못했을 뿐이다. 대통령이라는 명예와 권세를 얻었어도 온전한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내적 치유란 없다.”
‘요셉’은 이점에서 故人과 다르다 하겠습니다. 그는 썩어서 악취가 나는 영혼의 쓰레기, 즉 원한과 분노와 좌절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수시로 들추어내어 자기 연민을 위한 안주거리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권좌에 오른 뒤 복수의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습니다. 총리가 된 뒤에 ‘보디발’의 아내 생각이 왜 나지 않겠습니까? 불러다 요절(腰折)이라도 낼 법도 한 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치유하시도록 허용했습니다. 과거는 그야말로 과거지사로 흘려보내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는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근평 씨가 국회의원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변의 권유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부추김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고, 그를 부추기는 자들의 저의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를 이용해서 정치적 이들을 챙겨보자는 것일 텐데, 만일 그가 출마를 하게 된다면 그 동기는 분명 이들과는 다른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가 출마를 하든 않든 순전히 본인의 자유의사에 달린 것이겠지만, 만일 그가 당선되었을 때 보여줄 행보가 적이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염려는 이런 것입니다. 즉 과연 그가 아버지처럼 분노와 적개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억울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대변하고 신원(伸寃)해 줄 수 있을까? 세상을 바꾸고 싶은 지도자가 되려 한다면, 우선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자라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일로 인해서 미움과 원한과 저주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역사는 교훈하고 있습니다.
‘루이스’(C. S. Lewis)는 그의 책 <The Great Divorce>에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지옥에서는 망각과 용서가 없는 곳입니다. 즉 사람들은 이곳에서 쓰라린 과거지사를 하나도 잊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람들의 내면세계 역시 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머리가 온통 버려야 할 쓰레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다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으며”, 이들 모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참고. 고후 5:17).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사야>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과거지사를 깡그리 잊을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단순한 수사적 과장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이 망각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말입니다. 우리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붉은 물체를 붉은 색 투명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면 흰색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피를 통해서 인간의 붉은 죄악을 바라볼 때, 흰색으로 비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야 할 과거지사는 쓰라린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조차도 지옥의 쓰레기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 11:5-6)
현재의 삶, 현재의 모습, 현재의 상황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불만과 원성을 가지고 과거로 되돌아갑니다. 그 좋았던 시절 말입니다. 소위 “마늘과 부추” 신자(信者)가 되는 순간입니다. 결혼 생활 내내 첫날밤의 흥분과 감격만을 회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늘 동일한 간증,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간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 역시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스라엘은 ‘이집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우리는 “성령 충만”의 세계에서 살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과거는 깨끗이 잊고, 현재는 마음껏 즐기며, 그리고 미래는 설렘으로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기억의 유익. 이 모든 망각이 주는 유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억해야 할 그 무엇은 없습니까? ‘요셉’의 작은 아들 ‘에브라임’(!yIr"p]a)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작은 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52절).
악덕 기업가의 좌우명이 있다면 “채무는 잊고 채권만 기억하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좌우명은 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신세 진 사람, 내게 크게 도움을 준 사람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금방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손해를 끼쳤거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잘되지를 않는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일방적인 도움은 대개 독(毒)이 되어 돌아옵니다. 도움을 받는 자가 감사하기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남한과 북한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특히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시절 실로 천문학적인 경제 지원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으로부터의 감사는커녕, 원자핵을 포함한 군사적 위협이나 양측 간의 갈등과 불신은 오히려 더 심화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미국만큼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지원을 많이 해 준 나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았던 나라치고 반미(反美)로 돌아서지 않은 나라가 별로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개인이든 국가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때, 하나님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이 단순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를 잊으려 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성경>도 이를 알고 곳곳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신 32:18). ‘이사야’는 어떻습니까?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 도다”(사 17:10). <예레미야>에서 이 주제는 더욱 강력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렘 3:21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렘 13:25);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렘 18:15상). 이스라엘의 이러한 기억상실증에 대해서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겔 23:25).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그 모든 영광이 “헛되며, 헛되다”고 회고했던 ‘솔로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장탄식은 ‘솔로몬’이 아니라 ‘요셉’에게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선한 의도와 의로운 삶은 보상은커녕 늘 부당한 대우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인생이 “헛되며, 헛되다”고 탄식했을 법 합니다. 훗날 ‘요셉’의 아버지 ‘야곱’도 이 아들의 인생이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니라, 실로 풍성한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22요셉은 무성한 (포도)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49:22-25)
‘요셉’의 인생은 <시편> 1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의인의 삶과 그에 따른 축복을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요셉’은 큰 아들의 출생을 통해서 쓰라린 과거와 화해하고 용서하였으며, 작은 아들의 탄생을 통해서 풍성한 오늘과 희망 찬 내일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연습과 토의
1. 꿈과 계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요셉’의 성공 비결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망각의 유익과 기억의 유익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내가 잊어야 할 과거는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과거는 무엇입니까? 기대해야 할 미래는 무엇입니까?
4.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으며, 지금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