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6과
노아 이야기
김태정 목사창세기 6:9-9:29약 142분 분량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8:1)
<성경>에서 하나의 사건을 놓고 “대홍수 이야기”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곳도 없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이 지니는 의미가 비단 <창세기>에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대홍수는 지구나 인간의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드라도 대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대 격변 이후 엄청나게 달라진 지구의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추위와 더위”에 관한 언급이 홍수 이후 비로소 등장하고 있는 것도 달라진 지구 환경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2).
사실 <성경> 외에도 인류의 신화나 전설 가운데서 홍수 이야기만큼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도 없다는 점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신화나, 중국 및 미국의 인디언, 그리고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200여 가지가 알려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가장 가깝기로는 고대 ‘바벨론’의 홍수 설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들 수 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와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를 비교 분석한 ‘알렉산더 하이델’의 탁월한 저서가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Heidel, A. 「고대근동의 창조설화 홍수설화와 구약성경의 비교」. 윤영탁 역. 서울: 엠마오, 1990.
이처럼 많은 홍수 설화들이 세계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경>의 대홍수가 역사적 사실일 것이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와는 정반대로 <성경>의 대홍수도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가볍게 취급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사이비들이 많으면 진짜도 사이비 취급을 당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모리스’(J. Morris) 박사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200여 가지의 홍수 이야기를 연구한 결과 알아낸 사실은, 각 지역의 홍수 이야기는 그 지역이 실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역과 멀어져 갈수록 그 내용에 있어 더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 <성경>의 홍수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여러 지역으로 전해져 가면서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대홍수 이야기>를 역사적이고도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임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 사건이 지니는 엄청난 규모와 비합리적인 내용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홍수 이야기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갖는 의문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과학적 질문입니다: (1) 대홍수는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2) 어떻게 그 많은 생명체들이 방주 속에 다 들어갈 수 있었을까?; (3) 홍수는 과연 전 지구적인 것이었을까? 우리는 이들 질문들에 대해서 추후 ‘교훈과 적용’에서 간략하게나마 다루게 될 것입니다만, 보다 상세한 답변들은 별도의 자료들을 통해서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적 질문들은 한국창조과학회와, 미국의 ICR, 호주의 창조과학회 등에서 발행한 수많은 창조과학 관련 서적이나 슬라이드 등을 통해서 일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본문의 문학과 역사에 관한 질문으로서, 하나의 이야기로서 대홍수 이야기가 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과연 내적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가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야기 도처에서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가 하면, 하나의 사건을 놓고 설명이 다른 부분도 여기 저기 발견된다는 사실 등이 이런 질문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몇 가지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왜 한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와 ‘엘로힘’으로 다르게 쓰이고 있는가?
(2) 홍수의 원인-하늘의 비인가 깊음의 샘들인가?
(3) 홍수의 기간-40일인가 아니면 150일인가?
(4) 방주에 들어간 짐승-모든 짐승을 막론하고 암수 한 쌍씩인가 아니면 정결한 동물 일곱 쌍과 부정한 것 한 쌍씩인가?
(5) 반복되는 표현들-하나님은 홍수를 내리시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하셨는가? 그리고 ‘노아’는 방주에 몇 번이나 들어갔는가?”
이와 같은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질문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답변들은 역시 자료비평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홍수 이야기의 “문학과 역사”에서 이 문제를 간략하게나마 다루게 될 것입니다만, 필자는 <창세기>의 <서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홍수 이야기야말로 자료비평 학자들의 놀이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하면서도 중요한 과학 및 역사에 대한 “지적 정보”(information)를 갈구하는 현대 독자들과는 달리, 화자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어 보입니다. 즉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신학적이고도 신앙적인 질문인 “영적 변화”(transformation)에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선지자 ‘이사야’만 하드라도 대홍수 이야기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사 54:9). ‘에스겔’은 ‘노아’를 인류 역사상 가장 의로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두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겔 14:14, 20). <역대기>와 <누가복음> 기자들은 ‘노아’를 예수님의 족보 속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대상 1:4; 눅 3:36). ‘베드로’ 사도 역시 두 번씩이나 ‘노아’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때마다 역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벧전 3:20; 벧후 2:5). <히브리서>는 ‘노아’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히 11:7).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노아’와 <대홍수 이야기>를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하면서 종말의 징표로 그 사건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7-39; 눅 17:26). 이에 대해서는 두 번째 ‘톨레돗’ 교재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홍수 이야기에 대한 <성경>의 한 결 같은 관심사는 하나로 모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바, 대홍수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교훈과 적용입니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노아’는 어떤 인물인가?; (3) 나는 어떻게 종말을 대비해야 하는가?
문학과 역사
<창세기>의 세 번째 ‘톨레돗’은 ‘노아’의 계보를 알리는 것으로 그 막을 열고 있습니다: “노아의 사적(계보)이 이러하니라”(6:9). 그리고 그의 죽음에 관한 언급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9:28-29). 그러나 대홍수 이야기 자체는 그보다는 앞선 9:17까지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9:17). 그리고 이후의 내용은(9:18-29) 노아와 그의 세 아들에 관한 이야기로서 새로운 단락으로 구분함이 마땅합니다. 노아 이야기를 이처럼 두 개의 큰 단락으로 구분해 놓으면,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 ‘노아’가 두 이야기에서 전혀 다른 인물로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의인 노아(6:9-9:17)
(2) 죄인 노아(9:18-29)
이를 통해서 두 이야기에서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신학적 주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인물 묘사가 이처럼 판이해서, 일부 학자들은 이 두 이야기가 원래 다른 출처에서 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홍수 이야기>를 <창세기> 1-11장의 전체적인 형식이나 구조 속에서 바라보면 놀라운 통일성과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싶습니다. ‘히브리’ 식 이야기의 구성상의 특징에 대해서는 본 교재의 서론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예컨대, 첫 번째 ‘톨레돗’ <에덴 이야기>의 핵심은 “타락”에 있습니다만(2-3장), 곧이어 4장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에덴 이야기>에서 다룬 주제를 보충 및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톨레돗’ “아담의 계보”에서도 처음 두 단락(5:1-32)을 마친 다음, 세 번째 단락(6:1-4)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첨부함으로써, 동일한 주제를 확장시켜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그 동일한 기법을 이곳 <홍수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즉 세 번째 ‘톨레돗’ “노아의 계보”는 첫 단락(6:8-9:17)에서 “대홍수 이야기”를 다룬 후에, 두 번째 단락(9:18-29)에서 ‘노아’의 세 아들과 그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이어지는 이야기의 서론의 기능을 담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화자는 늘 한 이야기의 마지막을 그 이야기의 결말과 동시에 다음 이야기의 서론의 역할을 하도록 구성하고 있습니다.
1. 대홍수(6:9-9:17)
우선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하나님의 활동과 관련해서 요약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요소 내지는 세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계획-방주를 통한 노아와 그 가족의 구원
(2) 행동-홍수를 통한 세상의 멸망
(3) 약속-무지개를 통한 세상의 보존
이와 같은 구성을 통해서 홍수를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첫 두 단락만을 볼 때, 홍수의 목적은 파괴와 멸망에 있는 것 같지만, 세 번째 단락에서 “새 창조”와 “보존”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지금까지의 서술 방식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는 그분의 축복과 약속을 바탕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과학과 문명의 절정을 이루어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는 부패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질서와 혼돈을 거듭하면서 반 절정을 향해서 내려왔습니다. 대홍수는 이에 대한 심판이자 반 창조(反創造)의 절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홍수 기간 동안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태초의 그 어둠(darkness)과 혼돈(formless)과 공허(emptiness)뿐이기 때문입니다(1:2). 그러나 대 홍수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혹은 두 번째 창조)를 위한 서곡입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새 인류 즉 두 번째 ‘아담’ ‘노아’와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언약을 “노아의 언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만, 내용 상 처음 창조 시에 ‘아담’과 맺은 언약을 단절시킨 전혀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오히려 계승되고 발전된 것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형식과 구조가 이점을 더욱 명백하게 지지하고 보강해 주고 있습니다.
홍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12개의 단락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칭 내지는 교차대구를 이루면서, 처음과 마지막 단락은 일종의 전이 구절로서 앞과 뒤의 이야기를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홍수 이야기>에 대한 보다 상세한 문학비평적 연구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탁월한 저서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참고도서 1, 156-158쪽; (2) 참고도서 12, 416-447쪽.
전이 구절(1): 서론(6:9-10)
1. 혼돈과 무질서: 패괴와 강포(6:11-12)
2. 하나님의 말씀(1): “그들을 멸하리라”(6:13-22)
3. 하나님의 말씀(2): “방주로 들어가라”(7:1-10)
4. 홍수의 시작(7:11-16)
5. 물이 늘어남(7:17-24)
하나님이 노아를 권면하심(8:1)
6. 물이 줄어듬(8:1-5)
7. 땅이 마름(8:6-14)
8. 하나님의 말씀(3): “방주를 떠나라”(8:15-19)
9. 하나님의 결심: “다시는 멸하지 아니하리니”(8:20-22)
10. 하나님의 말씀(4): 새 언약의 축복(9:1-17)
전이 구절(2): 결론(9:18-19)
이와 같은 대칭 구조를 통해서 화자가 보여주려고 하는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금방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칭의 중앙에 있는 언급, 즉 “하나님께서 노아를 권면(기억)하셨다”(8:1)입니다. 이로써, 홍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핵심 주제를 이야기의 중앙에 두고 전반부와 후반부는 거울상을 이루듯, 각기 짝을 이루는 한 쌍의 내용들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후반부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마치 전반부에 등장했던 단어들이 메아리가 되어 공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히브리’ 본문에 의하면 이런 공명은 열다섯 번에 걸쳐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면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같은 내용이나 표현이 무의미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느낄 것이며, 때로는 한 이야기 속에 상이한 자료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홍수 이야기가 아주 정교하게 꾸며져 있어 사람에 따라 다양한 구조 분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결코 놀랄 일도 아닙니다. 한 예로써, 전체 이야기를 열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드라마로 볼 수 있고, 이 경우에도 양식이나 등장인물 또는 그 내용에 있어 각기 정교한 대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도표 참고).

위 도표에서 보듯이, 처음과 마지막 장면은(장면 1/10) 그 양식에 있어 독백으로서 이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노아’에게 길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그 독백 속에 ‘노아’와 다른 인류의 현 상황에 대한 진단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아’도 이 두 장면에서 하나님과 함께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 역할은 수동적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듣는 쪽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를 멸하리라”; “내 언약을 세우리라”; “땅에 충만하라”; “먹으라”. 이들 표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포악함이나(6:11, 13), 피흘림(9:5-6) 등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두 장면에서 극적인 반전을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장면이 홍수에 의한 심판과 멸망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에 관한 것이라면, 마지막 장면의 초점은 세상의 보존에 관한 그분의 희망찬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장면과 아홉 번째 장면의 핵심 주제는 ‘노아’의 순종입니다. 처음에는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리고 나중에는 홍수 후에 그 방주를 떠남으로써 순종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와 여덟 번째 장면 역시 ‘노아’의 순종이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지만,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를 주고 있는데, 모든 생명체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것입니다.
네 번째와 일곱 번째 장면은 그 양식이 해설이라는 점에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장면에서는 ‘노아’와 모든 짐승들이 주인공이라면, 일곱 번째 장면에서는 ‘노아’와 새들이 주요 등장인물이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장면에서는 각기 홍수가 언제 시작되었으며(7:6, 11), 언제 끝이 났는지에 대해서(8:13, 14) ‘노아’의 나이를 중심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장면에서는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고 소개하고 있고(7:16), ‘노아’가 후에 그 문을 열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8:6, 13). 일곱 번째 장면에서 방주 문을 여는 ‘노아’의 행동을 묘사하는 이 두 구절(8:6, 13)은 다소 느슨하게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네 번째 장면에서 ‘노아’의 순종을 보여주는 한 쌍의 행동 묘사, 즉 “여호와(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는(7:5, 16) 보다 분명하게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더 나아가서 일곱 번째 장면에서 ‘노아’의 행동을 일주일 간격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에 비해, 네 번째 장면에서는 ‘노아’와 짐승들이 다가오는 홍수에 대비하여 방주에 승선하는 이야기 즉 하나의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길게 묘사하고 있는 점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사건이 주는 중요성 때문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장면은 공히 해설의 양식을 취하면서, 무대의 주인공으로 물과 방주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물과 그 물위에 떠있는 방주 한 척 뿐입니다. 두 장면에서 대조를 이루는 것이 있다면, 앞 장면에서 멸망할 인간들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 것에 반해, 두 번째 장면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 큰 대조를 이루는 것이 있다면, 네 번째와 일곱 번째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서술해 가는 길이의 차이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장면에서는 반복의 기법을 통해서 땅위의 모든 생명체들이 멸망해가는 모습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물이 온 땅을 뒤덮는 장면에 이르러 이야기는 반 절정으로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반면 여섯 번째 장면에서는 긴장이 풀리면서 다소 완화된 산문 식 서술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형식을 맞추기 위한 화자의 각별한 노력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로써, 홍수가 진행되는 기간과 관련해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숫자들이 그것입니다. 아래에서 보듯이 이들 숫자 또한 흥미로운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7일: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비를 내려”(7:4)
7일: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7:10)
40일: “홍수가 땅에 40일을 있었는지라”(7:17)
150일: “물이 일백오십 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7:24)
150일: “물이...일백오십 일 후에 감하고”(8:3)
40일: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창을 열고”(8:6)
7일: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내어놓으매”(8:10)
7일: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8:12)
따라서 이들 숫자와 연관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들 중 일부 숫자는 홍수의 일지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전체의 대칭 구조를 위한 문학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이후 홍수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린 기간은 칠일이 분명한데(7:10), 이 사실을 두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습니다(7:4와 7:10). 그 이유는 홍수 이후 ‘노아’가 칠일 동안 기다렸다는 사실을 두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 것과(8:10, 12) 문학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홍수 이후 ‘노아’가 방주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린 기간은 3주간입니다: (1)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8:8)”; (2)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8:10)”; (3)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8:12). 홍수 기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7:17에서 언급하고 있는 40일 동안의 홍수는 전체 홍수 범람기간 150일(7:24) 속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숫자 역시 8:6에서 ‘노아’가 40 일을 지나서 방주의 창을 열었다는 표현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왕 숫자 이야기가 나왔으니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숫자들을 종합해서 전체 홍수의 연대기를 만들어보는 것도 전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홍수 일지: 우리가 도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전체적인 숫자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홍수 후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 때로부터 물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걸린 기간이 3개월(10월 1일-이듬해 1월 1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에 대한 설명을 토대로 계산해 보면 54일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한 달 정도의 차이가 생기는데, 특히 마지막 한 달(12월) 동안 ‘노아’가 방주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문 후부터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던 날까지 있었던 이야기도 모두 빠져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러한 이야기들은 화자의 관심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홍수 이야기의 전반부, 즉 홍수가 시작해서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 때까지의 시간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많습니다. 홍수의 시작에서부터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 때까지 약 150일이 걸린 것으로 되어있습니다만(2/17-7/17), 이 역시 해당되는 설명을 토대로 합산을 해보면 380일에 이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차이는 설명이 전혀 불가능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두 번의 40일에 대한 언급과 두 번의 150일에 대한 언급은 실은 각각 같은 사건에 대한 반복적인 표현으로 간주하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홍수 기간은 150일로서 40일도 이 기간 중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즉 비가 내린 기간은 40일이고 나머지 110일은 홍수 후 물이 범람하던 기간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도표로부터 주목해야 할 사실은 도표의 가장 오른 쪽에 기록한 요일(曜日)에 관한 언급입니다. 물론 본문 중에는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만, 이야기가 한 주간(7일)의 간격을 두고 한 국면에서 다른 국면으로 진전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서 사건일지를 요일과 연계해서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홍수가 처음 예고된 날이 안식일 다음 날(일요일)이라고 한다면(7:4), 실제 홍수는 그 다음 일요일에 시작되었습니다(7:10). ‘노아’가 홍수 이전에도 충실하게 안식일을 지켰다면 방주 안에서도 그의 가족과 여전히 그렇게 했을 것이며,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문 후에도 네 번에 걸쳐 매 주 일요일마다 새들을 내보내었을 것입니다(8:7, 8, 10, 12). 그리고 홍수가 끝난 요일은 40일 후 목요일(또는 금요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홍수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와는 형식적으로 일종의 병행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창조가 일요일에 시작되어 금요일에 완성된 것처럼 홍수 역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러한 문학적 구도를 통하여, “창조와 안식” 또는 “노동과 안식”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형적인 삶의 패턴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질문에 대해서 “노아처럼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화자 역시 이와 유사한 수사적 기법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창조의 사역에 대해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요한복음> 1:1-2:1 사이에서 날짜별-“이튿날”-로 서술을 진행하다가 2:1에서 그 유명한 “포도주의 기적”을 소개하면서 “삼일 후”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기적을 분명 “새 창조”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이 날을 한 주간의 시작의 날(일요일)로 보고 싶은 것입니다.
2. 홍수 이후(9:18-29)
두 번째 단락은 문학적으로 전체 <노아 이야기>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으며, 이중 “홍수 이야기”는 세 번째 ‘톨레돗’의 한 가운데 놓여 거대한 삽입문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5:32 노아가 500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6:9 노아의 사적(계보)은 이러하니라
9:28-29 홍수 후에 노아가...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두 번째 단락의 신학적 기능은 앞에서 밝힌 바대로 <창세기> 1-11장의 보다 큰 구조 안에서 바라보면 뚜렷해집니다. 그동안 창조-반창조-재창조의 주제가 순환적으로 반복되기도 하고, 동시에 직선적으로 발전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 번의 ‘톨레돗’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관계를 이제는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에덴 이야기>(2-3장)의 아름답고도 목가적인 창조 이야기는 ‘아담’의 범죄와 하나님의 저주로 끝이 납니다. 그 결과는 타락과 분리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짐승들,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거대한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톨레돗’(4장)에서 ‘가인’과 ‘아벨’을 만나게 되는데, 이야기의 핵심은 분리와 타락이 존속 살해라는 범죄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저주하실 때 그분께서 처음에 세우셨던 “창조의 언약”(1:28)마저 무효화 한 것은 아닙니다. 타락과 저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하나님의 처음의 약속대로 늘어가고 번창해 가고 있음을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톨레돗’ <노아 이야기>에서 인류는 더욱 늘어가고, 동시에 인간의 죄악은 절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홍수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당연한 대응입니다 대홍수는 반 창조의 절정, 즉 흑암과 혼돈과 공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반 절정에서 의로운 한 사람 ‘노아’를 남기셔서 그를 통해서 두 번째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와 “아담의 언약”을 다시 체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과연 ‘아담’과 달랐을까? ‘노아’ 이후의 인류는 어떻게 번창해 갔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누구를 통해서 이어져 갔을까? 그러한 분리와 선택의 배경은 또한 무엇일까? <노아 이야기>는 그 대미를 장식하면서 이들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신학적 기능이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기능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단락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9:18-19: 노아의 세 아들
(2) 9:20-27: 술 취한 노아와 세 아들의 반응
(3) 9:28-29: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예언
<홍수 이야기>가 이처럼 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비평 학자들의 가장 좋은 놀이터가 되어왔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자 ‘궁켈’도 <홍수 이야기>에 대한 자료비평적 연구야말로 현대 성서비평학이 이루어놓은 최대의 업적이 아닐 수 없고, 지극히 초보적인 독자들이라도 본문을 통해서 비평적 연구가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전통적으로 <홍수 이야기>는 <야훼 자료>와 <사제 자료>가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선 이야기를 ‘야훼’의 이름이 등장하는 모든 본문은 <야훼 자료>로, 그리고 ‘엘로힘’을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모두 <사제 자료>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이야기의 전반부와(6:5-7:5) 후반부는(8:15-9:17) 뚜렷하게 자료의 성격이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중간 부분은 자료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해당 구절들 안에 등장하는 어휘나 용어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자료비평적 원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전체의 장․절에 대한 자료비평적 연구 결과는 서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본 교재 34쪽). <홍수 이야기>에 대한 보다 최근의 자료비평적 연구 결과는 Wenham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1, 167-169쪽).
<홍수 이야기> 중에서 두 자료의 특징적인 차이 한두 가지만 부각시켜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야훼 자료>에서는 ‘야훼’ 하나님을, 연약한 인간에 대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아주 친근하신 분으로, 그리고 인간을 ‘아담’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반면 <사제 자료>에서 ‘엘로힘’ 하나님은 초월자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모든 혈육 있는 자”라 부르고 있으며, 같은 <사제 자료>에 속하는 <창세기> 1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나 표현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깊음의 샘”; “하늘의 창”;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사제 자료>에서는 이야기의 서술 방식 또한 아주 상세하고 사실적입니다.
(2) <야훼 자료>는 짐승들에 대해서 정결과 부정한 것을 강조하고 구분하고 있는 반면, <사제 자료>에서는 단지 암수 한 쌍씩으로만 구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자료의 역사적 배경이 다른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최종 편집 시기가 주전 10 세기 경 남쪽 ‘유대’왕국으로 알려져 있는 <야훼 자료>에서는 당시의 제의적 가치를 ‘모세’ 이전의 시대에도 적용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보다는 늦은 시기에 출현한(주전 6 세기) <사제 자료>의 경우 반대로 이 사건이 ‘모세’ 이전의 것이라 판단되어 제의를 강조하는 일련의 용어나 표현들을 삽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노아’가 홍수 이후에 제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야훼 자료>만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8:20-22).
신학과 신앙
전체 <노아 이야기>의 형식이나 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만, 이곳에서는 편의상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 (1) 방주; (2) 홍수; (3) 무지개.
1. 방주: 하나님의 계획(6:9-7:4)
1) 타락과 폭력(6:11-12)
<노아 이야기>의 첫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계획, 즉 방주(方舟)입니다. 화자는 우선 이 방주가 왜 필요했던가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11-12절)
‘노아’가 살던 시대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걸친 이 반복은 강조와 놀라움을 나타낸 것입니다. 한 번은 화자 자신의 입장에서(11절), 그리고 또 한 번은 하나님의 입장에서(12절) 진단한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은 12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감정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원문에 가깝게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신즉...보라! 과연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일부 <영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기분을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And God saw the earth, and, behold, it was corrupt; for all flesh had corrupted their way upon the earth.”(ASV; RSV; NKJV). 이 외에도 놀라움을 담은 이러한 표현은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8:13; 18:2; 19:28; 22:13; 24:63; 26:8; 29:2; 31:2, 10; 33:1; 37:25; 40:6; 42:27.
화자는 지난 이야기에서도(두 번째 ‘톨레돗’)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즉 그분은 땅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고, 마음에 크게 근심하셨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6:5-7).
지금 현재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기분은 처음 창조를 마치시던 그 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후 보시고 매우 좋아하셨고(1:31), 그들을 향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1:28).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과 온갖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그 땅이 지금 폭력과 부패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은 분명 모순이고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이 타락한 “땅”을 11-13절의 세 구절 안에서 무려 여섯 번, 그리고 그와 함께 멸망을 뜻하는 “패괴”라는 동사도 다섯 번에 걸쳐 언급하면서 대조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replay의 기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드러내주려는 화자의 노력은 다른 곳에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12절을 <창세기> 1-11장의 전체 구절 중에서 한 가운데에 배치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2) 노아와 그 가족(6:9-10)
‘노아’와 그 가족에 대한 언급은 실은 세 번째 ‘톨레돗’의 서두에 해당합니다만 이야기의 진행 상 이곳에 두었습니다. 까마귀는 백로(白鷺) 때문에 더욱 검게 보이는 법인데, 그 백로란 다름 아닌 ‘노아’입니다. ‘노아’ 때문에 그가 살던 세상은 더욱 핑계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9-10절)
‘아담’의 족보에서 열 번째의 인물로 등장하는 ‘노아’, 그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화자는 ‘히브리어’ 단어 열 개를 사용해서 이 열 번째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다”;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6:9). 이 세 문장은 노아에 대해서 각기 다른 각도에서 비추고 있습니다만, 그 의미는 결국 동일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의로움’은 일종의 법적인 용어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올바른 관계”는 행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언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치 미국의 법정에서 배심원들이 피고인에 대해서 유죄 또는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일단 배심원들의 판결이 무죄로 결정되면 피고인이 실제 범죄 행위를 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재판장은 무죄를 선고하며, 피고인은 법적으로 무죄가 되는 셈입니다(이것이 물론 미국 배심원 제도의 맹점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가 소위 “의로운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약 206회 정도 등장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공의(즉 하나님의 법)를 실천하는 행위”와 연관해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써, 헐벗은 자를 도와주고 가난한 자에게 구제를 하는 행위가 곧 의로운 행위입니다(겔 18:5-9).
그리고 두 번째로 등장하는 표현 “완전함”은 완전무결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이고도 제의적인 의미로서, “흠이 없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 수 있는 품질을 뜻합니다(레 1:3, 10). <성경>은 ‘욥’이나(욥 12:4) ‘아브라함’(창 17:1) 등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신 18:13).
마지막으로 세 번째 표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노아’ 외에 ‘에녹’ 밖에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이스라엘의 경건한 왕들에 대해서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다”고 하나(창 17:1; 48:15; 왕하 20:3), 이 두 사람에 필적한 만한 칭찬을 들은 바는 없습니다. 따라서 ‘노아’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세 번의 표현은 점차적으로 그 강도를 더해가는 순서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노아’는 의로운 이스라엘 백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였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기도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그 시대의 빛이었고 소금이었습니다. 그 세상 가운데에 살았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그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추하고 악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온갖 방법으로 그를 동화시키려고 했고, ‘노아’는 이를 거부하고 이기려고 힘든 싸움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그 시대의 전도자였고 선교사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노아’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3) 방주와 언약(6:13-7:4)
홍수가 왜 필요했을까? 그동안 화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홍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암시해 왔습니다(6:7, 11-12). 이제 이곳에서 하나님 자신의 입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13절)
하나님의 계획이 더 이상 지체될 수 없으며, 또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최후통첩인 셈입니다. 그러나 홍수와 함께 필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노아’를 위한 방주입니다. 홍수와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독백과 대화가 시적 유사 반복의 형식을 이루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13-21절):
A 13절 하나님의 계획: “세상을 멸하리라.”
B 14-16절 하나님의 명령: “방주를 지어라.”
A' 17-20절 하나님의 계획: “홍수로 세상을 멸하리라”(추가 설명).
B' 21절 하나님의 명령: “방주에 양식을 실어라.”
여기서 화자의 관심사는 방주의 크기나 세부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주가 갖는 특별한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방주에 대한 묘사가 세 구절에 불과하고(14-16), 그나마 지극히 애매모호하다는 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세 구절 중에서 밑줄 친 단어들은 방주의 특징, 즉 방주를 건설한 재료나 방주의 구조 등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일련의 지식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6:14-16). 방주를 건설하는데 쓰일 잣나무가 정확하게 어떤 나무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번역본마다 제마다 다른 번역을 내놓고 있습니다. 방주는 이곳 외에 <출애굽기>에서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모세’의 어미가 어린 ‘모세’를 담았던 바로 그 상자를 말합니다(출 2:3, 5). 이런 이유로 방주를 ‘이집트’에서 차용해 온 단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간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일종의 칸막이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이 역시 일종의 건축 재료로서, 나무와 역청 사이에 집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역청 또한 <구약>에서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정확하게 무슨 물질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방주 안팎으로 칠을 했다면 방수의 목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방주의 세부 구조와 관련하여 가로 x 세로 x 높이가 135m x 22m x 13m로서, 전체 크기가 오늘날 축구 경기장의 약 1.5배 정도 되며, 성막 뜰의 세 배 정도에 해당됩니다. 이 정도 크기면 양(洋)과 같은 크기의 가축을 대략 125,000마리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참고 도서 5, 181-182쪽). 이 배의 안정성에 대해서는 수력 공학자 ‘헨리 모리스’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웬만한 파도에도 뒤집어 지는 일이 없고, 설령 기울어진다 해도 90도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한 선박 연구소에서도 <성경>에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모형 방주를 만들어 그 안정성 시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만, 실험 결과는 항해에 아무 문제가 없는 지극히 안전한 구조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기도 합니다(<성경>의 세 구절만을 토대로 어떻게 방주를 건설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방주의 목적이 무슨 항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홍수 기간 동안 생명을 보존하는데 있는 만큼, 안정성 문제는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방주는 또한 위로 지붕을 내도록 되어있습니다만, 이 단어 역시 어원이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번역본에서는 창(窓)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기능은 분명 외부로부터 빛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방주의 뚜껑으로서 방주 안으로 물을 공급해 줄 수 있는 통로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방주에는 또한 문(門)이 있었습니다. 문은 그야말로 홍수 이전이나 이후 출입구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방주의 내부 구조는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만, ‘바벨론’ 홍수 설화에서는 모두 일곱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방주의 삼층 구조가 이루는 높이가 성막의 높이와 같고, 각 층의 넓이가 성막 뜰의 그것과 같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즉 방주와 성막은 <성경>에서 건축과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유일한 구조물일 뿐만 아니라, 그 기능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신처가 된다는 점 등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14-16절)
이런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그 큰 배를 건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리고 방주의 세부 구조는 ‘노아’에게나 필요한 정보이지, 후대의 독자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정보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방주의 구조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방주가 갖는 각별한 의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노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방주는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특별한 관계 즉 ‘언약’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18절)
<창세기> 서론에서 <오경> 전체를 잇는 핵심 단어가 “언약”임을 배운 바 있습니다. 비록 이 단어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노아’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의 관계가 전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따라서 <홍수 이야기> 속에도 창조 이후 면면히 이어져오는 언약에 관한 일련의 공통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약”(berit)의 형식과 내용 등에 관해서는 수차례 다룬 바 있습니다. <노아 이야기>에서도 언약에 관한 언급이 네 번이나 등장하고 있으며(6:17-22; 8:20-22; 9:1-7; 9:8-17), 각기 언약의 특별한 측면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로벗슨’의 고전적인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P. Robertson,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김의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제 7장.
첫째, 언약의 대상과 범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와서 ‘노아’ 한 사람만을 상대로 처음으로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천지 창조 당시부터 ‘아담’을 포함한 모든 피조 세계를 대상으로 맺은 언약이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창 1:28). 비록 이곳에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는 않지만, ‘팔머 로벗슨’ 박사는 이 명령을 “아담 언약”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것을 “창조의 언약”으로 불러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려고 하는 언약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언약을 토대로 그것을 회복하고 갱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는 많은 언어들이 <창세기> 1-2장의 언어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창조 이야기>와 <노아 이야기>에서 상호 대응되는 단어나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남자와 여자(1:27)//암수 한 쌍(6:19); (2) “각기 종류대로”(1:11, 12, 21, 24, 25)//“...그 종류대로”(6:20); (3) “새”와 “육축”과 “기는 것들“(1:20-24; 6:20); (4) 음식에 관한 규례(1:29-30; 6:21).
대표적인 용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볼 때 방주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노아’ 한 사람을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내는 것이 아니라, ‘노아’를 통해서 창조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즉 구원(구속)은 창조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일한 목적 속에서 이루어지는 재창조의 사역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인간은 그의 구원을 단순히 “영혼 구원”이라는 말로 좁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체 피조 세계와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 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롬 8:18-23).
언약의 대상과 범위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노아’의 가족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18절). 이것은 <구약>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가족 단위입니다.
둘째, 언약의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원하시는 것은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하고, 또 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일방적으로 ‘노아’와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6:8).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울’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엡 2:8, 9).
그러니까 이 언약은 마치 오늘날 쌍방 간의 합의로 체결하는 매매계약이나 결혼 서약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계약은 당사자 사이에 양보나 타협 등을 통해서 언약의 내용이나 조건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분 자신이 만들어 제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약이 지니고 있는 조건적인 국면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노아’의 편에서 받아들여야만 그 효력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즉 언약 자체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것이긴 하지만, 언약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노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마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강요하실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 보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그것을 무시할 수도 있었고, 또는 언약을 맺은 후에라도 언제든지 폐기처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완전히 폐기처분까지는 아니라 하드라도 언약의 내용 중 자신의 취향에 맞는 부분만 골라서 지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했을까?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22절)
적어도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서 화자의 최대 관심사는 주인공의 순종임을 강조하는 대목으로서,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세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6:22; 7:5, 9). <노아 이야기>의 처음 세 무대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 대칭적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당연히 두 번째 무대에서 이야기의 핵심 내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도표 참고). 처음과 세 번째 무대에서 방주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한 가운데인 두 번째 무대에서 노아의 순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노아’의 순종에 관한 이 짧은 한 구절은, 동일한 홍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길가메쉬 서사>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에서는 방주의 구조나 모양 등과 관련해서 각양각색으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창세기> 화자는 이 짧은 한 구절을 통해서 그것도 시적 유사 반복의 수사를 통해서,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어디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은 <오경>에서 성막 건설과 관련해서나(출 39:32, 42; 40:16), 또는 광야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에 이스라엘의 순종과 관련해서(민 1:54; 2:34; 9:5)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첫 창조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표현과도 흥미롭게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고 모든 것은 “그대로 되었습니다”(1:3, 9, 11, 15, 24, 30). ‘노아’의 순종이 바로 이에 버금가는 것이었다고 말하려는 듯합니다. 동시에 이런 표현은 ‘아담’의 불순종한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꾸짖고 있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연상시켜주는 것도 사실입니다(2:16; 3:11, 17).
셋째, 언약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소개할 “무지개의 약속”과 관련해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만, “노아 언약”의 핵심은 보호와 보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시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노아’에게 그분의 생각을 알려주십니다.
1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7:1-4)
이번에는 보다 상세하게, 그리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로 더하고 계십니다. 앞의 이야기가 일반적인 내용이었다면(6:13-21), 이곳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이 두 기사(6:13-21; 7:1-10)는 그 내용이나 어휘에 있어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이름(하나님//야훼); (2) 방주에 들어가는 짐승의 종류(모든 생물의 암수 한 쌍//모든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 쌍과 부정한 짐승 암수 한 쌍). 이러한 차이를 자료 설에 입각해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럴 경우 두 기사는 분명 내용 상 일관성이 결여됩니다. 그러나 “문학과 역사”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이 두 이야기를 하나의 통일된 교차대구의 틀 속에서 바라보게 되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오히려 화자의 관점이나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추가되는 내용으로서는 홍수의 시기와 기간에 대한 언급입니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7:4). 그리고 방주에 들어가는 짐승의 숫자와 종류에 대해서도 다른 내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7:2-3).
이들 새로운 내용 가운데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 있는데, 후대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아주 친숙한 숫자들의 등장이 그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 숫자들입니다. 즉 후대 이스라엘의 종교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창세기> 1-11장 전체를 통해서 이러한 제의적인 암시를 주는 단어나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2:1-3); (2) 장막의 상징으로서의 에덴동산(2-3); (3) ‘가인’과 ‘아벨’의 제사(4:1-8); (4)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7:2); (5) 홍수를 전후해서 칠 일 단위로 이어지는 ‘노아’의 행동; (6) 홍수 이후 정결한 짐승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 이 모든 이야기는 <구약>의 종교제도의 골격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처럼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해석하는 성경 설화의 기법을 “현재화”(contemporization)라고 부르는데, 이런 기법을 통해서 후대의 독자들은 설화 속의 인물들과 심리적이고도 정서적인 동질성을 갖게 된다고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들 짐승들을 홍수 뒤에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봄으로써(8:20), 화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홍수: 하나님의 행동(7:5-8:22)
1) 홍수의 시작(7:11-16)
<노아 이야기>에서 두 번째 핵심 요소는 홍수입니다. 네 번째 장면(7:5-16)에서부터 아홉 번째 장면(8:18-19)까지 이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행동을 개시하실 것이고 홍수가 시작될 참인데, 웬 일인지 화자는 하나님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대신에 앞의 두 무대에서 언급한 바 있는 내용과 같은 이야기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1) 7:5-10; (2) 7:11-16. 두 번의 반복에서 주된 표현을 정리해 보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두 이야기는 실은 같은 내용으로서, 연극 무대 위에 올린다면 하나의 무대 장면으로 처리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 전개 기법을 전문적인 용어로 ‘panel writing’이라 부릅니다만, 시로 치자면 유사 반복에 해당될 것입니다. 전반과 후반은 각기 시의 제 1연과 제 2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후반은 전반을 단순하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의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 “노아가 육백 세라”(6절)//“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11절); (2)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7절)//“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13절). 물론 자료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반복을 두 자료가 섞여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만, 그 점을 인정한다 하드라도 이곳에서 두 자료를 확인하고 가려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7:5절과 6:22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앞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이며, 뒤 구절에서는 ‘엘로힘’ 입니다). 또 한 가지 네 번째 무대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있다면, 동일한 내용을 보다 길고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노아’를 비롯한 모든 짐승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편에서 보자면 홍수 이야기의 영웅은 ‘노아’와, 그리고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완공시킨 화려하고도 장엄한 방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길가메쉬 서사>에서 방주를 그토록 상세하고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방주를 건설하기 위한 ‘노아’의 영웅적인 노력이나 재능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다만 단 한 구절로 그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하였다고 쓰고 있을 뿐입니다(6:22). 우리의 편에서 본다면 방주에 들어가는 것과 방주를 건설하는 것 중에서 분명 후자가 훨씬 더 큰 믿음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오히려 전자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인지 이곳 네 번째 무대 전체를 통해서(7:5-16) 그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화자의 이러한 의도를 인식한다면, 제 3막과 제 4막이 그 내용에 있어서나 문학적인 상수에 있어서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 구태여 자료 설에 입각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즉 동일한 내용에 대한 중첩과 반복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가는 ‘히브리’ 식 수사적 기법의 전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체 <홍수 이야기>는 마치 홍수의 실제 상황처럼 몇 단계에 걸쳐 전개되고 있습니다: (1) 홍수의 시작을 알리면서 노아 가족과 모든 짐승들이 방주 속으로 들어가고 ⇒ (2) 물의 범람과 함께 온 땅이 다 잠기고, 홍수가 그 절정을 향해서 진행되다가 ⇒ (3) 서서히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 (4) 땅이 드러나고 ⇒ (5) 홍수가 끝나고 땅이 마르면서 ‘노아’ 가족과 모든 짐승들이 방주로부터 나오는 순서가 그것입니다.
<홍수 이야기>를 보다 흥미롭게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전체적인 분위기, 무대의 주인공, 이야기의 흐름 등을 묘사하기 위하여 동원하고 있는 일련의 문학적인 常數들을 파악하는 것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화자는 일지를 기록하듯 홍수의 시작부터 끝까지 날짜를 시간대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7:11, 12, 17, 24; 8:3-6, 10-14).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처럼 상세하게 시간대를 소개하고 있는 곳은 <홍수 이야기>와 <창조 이야기>(창 1장)뿐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될 만한 연대표가 없었기 때문에, 왕의 재위 기간이나(예: 열왕기 상하)나 유명한 인물의 나이(예: 노아의 나이 600세)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처럼 홍수의 일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예로써, 대홍수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메시지에 사실성을 더하고자 함입니다. 그 외에도 이들 숫자 배후에 모종의 신비한 의미를 찾으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모두 그들의 알파벳과 숫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성경> 속의 여러 숫자들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 풀이해 놓은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숫자 속에 우주의 신비를 푸는 열쇠가 있다고 믿기 때문인 듯합니다. <홍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날짜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습니다만, Jaubert의 설명은 아주 독특하여 여기 소개합니다. 이 사람에 따르면, 홍수 이야기 화자는 주전 2세기 경 유대인 일부가 사용하던 특별한 달력(일명 the book of Jubilees)에 따라 사건을 기록했는데 이 달력은 일 년이 364일로 된 달력으로서 매년 특정한 날짜가 항상 같은 요일에 맞아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신년 첫 날은 항상 수요일입니다. 그래서 이 수요일(넷째 날)은 창조 이야기에서도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즉 이 날에 천체(해, 달, 별)가 만들어지고 이때부터 날자와 계절과 연도의 구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창 1:14-19). 그렇다면 천지창조는 그보다 3일 앞선 일요일에(첫째 날) 시작되었고 금요일에 끝난 셈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 화자에게는 7일 단위의 주기가 중요했던 것이지, 오늘날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창조의 절대적인 시기(즉 연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달력에 따르면, 홍수(反創造: 파괴와 멸망)의 시작도(7:11) 일요일이 됩니다(2월 17일). 그리고 홍수가 끝난 날은 150일 후인(7월 17일) 금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시작, 즉 산이 드러나고(8:5), 물이 마르고(8:13), 방주로부터 나오는(8:14) 등의 일은 모두 수요일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40일의 홍수 후에 ‘노아’는,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첫째 날(일요일)에 시작하신 것처럼, 새로운 활동을 일요일에 시작하고 있습니다(8:6, 10, 12). 사건의 일지를 요일별로 다시 정리해 보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2) 홍수의 진행(7:17-24)
다섯 번째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보다 빠른 속도로 반창조의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화자의 해설 방식은 마치 오늘날 TV 방송국 기자가 홍수의 여러 현장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카메라는 지금 연달아 세 개의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이 본문에 대한 재미가 배가될 것입니다.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17-24절)
화자는 방주와(17-18절), 높은 산들과(19-20절), 그리고 땅위에 살던 모든 생명체들에게(21-23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차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즉 생명체들의 운명에 관해서는 보다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 한 가지 효과, 즉 대홍수의 파괴적인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그의 보도를 다음과 같은 해설로 끝맺고 있습니다: “물이 일백오십 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24절).
다시 한 번 전체적인 분위기를 정리해 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밖에서 닫으신 후(7:16), 상황은 급속도로 반 창조 즉 파괴와 멸망의 절정을 향해서 치달아 갑니다. 질서와 조화가 무너지고, 경계가 사라지며, 창조 시 물로부터 솟아 나와 분리되었던 땅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도 함께 그 물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이라고는 오직 물, 물, 물뿐입니다. 그리고 방주만이 그 물 위를 일엽편주처럼 외롭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홍수를 일으키신 장본인 하나님마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인격체들에 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 장면은 창조 직후의 지구의 모습 바로 그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1:2). ‘노아’가 살던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태초의 어둠과 혼돈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면서”(1:2후), 희망찬 대 창조의 설계를 품고 계셨던 것처럼, 지금 이곳에서도 신세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는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23절후). 반 절정의 바닥에서 이야기의 대 반전을 예고해주는 암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물이 빠지다(8:1-5)
여섯 번째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대반전을 맞이하면서 후반부로 접어듭니다. 서술 방식도 이에 걸맞게 시계 바늘을 되돌리듯, 또는 영화 필름을 되돌리듯 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반에서 이야기가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천천히 진행해 왔다면, 후반에서는 그동안의 팽팽하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보다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4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8:1-5)
당연히 분위기 또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홍수 전후의 차이를 보다 일목요연하게 맛보기 위하여 아래 도표에 정리해 보았습니다.
두 장면에서 지배적인 분위기는 단연 150일 동안(2월 17일-7월 17일) 전 지구를 뒤덮고 있는 물입니다만, 전반에서 후반으로 옮겨갈 때 분위기의 반전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관에서 낙관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혼돈과 무질서에서 구분과 질서로.
그리고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사건 중에서 특별히 요일과 관련해서 주목해 볼 대목이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Jubilee 달력에 의하면 방주가 ‘아라랏’의 산에 머문 시기는 홍수가 난 후부터 정확히 5개월 후이므로 이 날은 금요일이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시작 즉, 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날이 그로부터 다시 2개월 후인 10월 1일로서(8:5) 셋째 날 즉 수요일이 됩니다. 첫 창조기사에서도 이 날은 마른 땅이 드러난 날이기도 합니다(1:9).
어쨌든 이런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극적 대 반전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선언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8:1). 그러나 극적 대 반전 치고는 지극히 의도적으로 짧은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왜 이들을 이처럼 기억하신 것인지에 대한 긴 부연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것은 ‘노아’의 의로움도 그의 순종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전의 약속도 아닙니다. 화자는 하나님께서 다만 ‘노아’를 기억하셨다고만 전할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손도 써볼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만의 완전한 자유의지로 ‘노아’를 기억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회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기억하다라는 단어는 무려 73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로써, 하나님께서는 ‘소돔’을 멸하신 후 ‘아브라함’을 기억하여 그를 불러내셨으며(창 19:29), ‘라헬’을 기억하여 자식을 갖도록 하셨으며(30:22),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이집트로부터 구해내셨습니다(출 2:24; 6:5). 마찬가지로 그분은 오늘 우리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신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8:1하). 여기서 ‘바람’은 다름 아닌 그분의 “영”(또는 “신”)으로서, j"Wר(루아흐)는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약 730회 정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창조를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즉 수면 위를 운행하시면서 첫 창조를 시작하셨던 그분의 신이, 이제 다시 한 번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첫 창조 때에 지구를 온통 뒤덮고 있던 그 물이 하나님의 호흡으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그리고 다시 바다와 육지의 물로 나누어진 것처럼, 그 동일한 일이 다시 시작되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어지는 구절은 계속되는 결과라기보다는 물들이 물러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8:2). 우리는 여기서 물이 줄어들게 되는 두 가지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 두 현상을 수동형으로 묘사함으로써, 홍수가 끝난 것이 무슨 변덕스러운 자연의 현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홍수의 시작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면 이제 그 종말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도 ‘욥’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물이 줄어들게 하는데 태양이 한 일이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점이 문학적으로 유사한 다른 근동 신화와 성경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곳입니다. 화자는 의도적으로 태양의 역할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소위 “태양신” 숭배를 배격하고 있습니다.
홍수 후에 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역할이 끝났을 뿐이며,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 것뿐입니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8:3).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첫 번째 창조 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홍수가 시작된 지 정확하게 다섯 달 후에(7:11),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날은 Jubilee 달력에 따르면 금요일이기도합니다.
방주가 산의 정상에 걸릴 정도로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8:4). 방주가 산의 정상에 머문 시기에 대해서는 이처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 산이 정확하게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이 장소는 흔히들 생각하듯 ‘아라랏 산’ 정상이 아니라, ‘아라랏’으로 불리는 지역 내의 어느 한 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아라랏’은 ‘히브리’어로 ‘우르아르투’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아시리아’ 북쪽의 한 왕국을 지칭하며(왕하 19:37; 사 37:38; 렘 51:27), 후에 ‘아르메니나’로 불리게 됩니다. 지역적으로는 오늘날 세 나라의 국경에 접하고 있는데, ‘터키’ 동쪽과 ‘러시아’ 남쪽, 그리고 ‘이란’ 북서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을 통해서는 정확한 위치 추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에 걸쳐 물은 더욱 줄어들면서 마침내 산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8:5). 화자는 물이 줄어들게 된 것을 한 순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리고 있지 않고 서서히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이 불어날 때에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사건은 각기 대응되는 짝을 가지고 있습니다(도표 참고).

우리는 이 도표를 창조기사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인데, 제 삼일 째에 마른 땅이 드러났던 것처럼(1:9), <홍수 이야기>에서도 세 번째 무대에서 동일한 사건 즉 땅이 드러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두 달 반 동안 ‘노아’와 그의 가족은 계속 방주 안에서 지내야만 했는데, 물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해밀턴’은 산 정상의 방주 안에 머물고 있는 ‘노아’의 모습을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는 시내 산 정상에 있던 ‘모세’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해밀턴, 301쪽.
그러나 물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새로운 희망이 솟아오르고 있는 중인 것을 ‘노아’가 깨닫고 있었을까요?
4) 땅이 드러나다(8:6-14)
일곱 번째 무대는 네 번째 무대에서처럼(7:5-16) ‘노아’와 짐승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이 마르고 마른땅이 드러나면서 카메라의 초점은 물로부터 ‘노아’와 짐승들로 옮겨갑니다. 화자는 이곳에서도 앞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중첩과 반복의 수사를 도입하면서 두 장면의 대칭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13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둘째 달 스무이렛 날에 땅이 말랐더라(6-14절)
그러나 두 장면에서 보여주는 분위기는 대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 장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분위기는 분주하고 요란하며 시끌벅적한 것이었습니다. 임박한 홍수를 앞두고 여러 곳에서 흩어져 살던 온갖 짐승들이 방주로 급히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곳 일곱 번째 장면의 주 무대는 방주 안입니다. 이곳에서 홍수가 끝나고 물이 마르기만을 기다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단조로움과 지루함 그리고 따분함 그것입니다. ‘노아’가 바깥세상 형편을 알아보려고 반복해서 비둘기를 내보내는 행동도 이런 단조로움에 일조를 더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노아’의 반복되는 행동을 중심으로 이 장면을 재구성해보면 세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노아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내다(8:6-7)
(2) 노아가 세 번에 걸쳐 비둘기를 내보내다(8:8-12)
(3)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지면에 물이 마른 것을 보다(8:13-14)
처음과 마지막 단락은 이야기 전개 방식이 아주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두 단락에서 공히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여는 것으로 시작해서, 땅이 말랐는지를 알아보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단락이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면서 한 가운데 비둘기 이야기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땅이 말랐는지 노심초사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방주 밖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노아’의 조심스러운 행동입니다. 방주 뚜껑이 위로 열려있는지라(6:16), 땅이 완전히 말랐다는 증거가 있기 전에는 함부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8:6). 홍수 일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루 바 있습니다만, 만일 이 숫자가 맞다면 ‘노아’가 창을 열고 바깥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일을 시작한 날은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는 앞의 이야기에서처럼(7:10), 일주일 단위로 반복되는 노동과 안식의 패턴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8:10, 12). 40일과 7일이 전체 이야기의 대칭적 형식을 이루고 있다는 점 또한 앞에서 살펴본바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네 번의 실험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실험은 까마귀를 내보내는 것인데 실패로 끝났습니다: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8:7). 이 녀석이 가져다준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까마귀는 썩은 시체를 먹는 짐승이라 홍수 후에 산 정상에 널려있는 시체들을 주워 먹기에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한 까마귀 이야기는 왜 이곳에 등장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구약>에서 까마귀는 불결한 짐승이라(레 11:15; 신 14:14) ‘노아’에게 아무런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지 못했다는 점이 크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부분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까마귀 이야기는 세 번에 걸친 비둘기 이야기와는 잘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일관된 흐름을 오히려 흐리게 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자료비평학자들은 까마귀 이야기는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길가메쉬> 서사에서도 정찰을 위하여 까마귀를 내보내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자료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길가메쉬 서사>에서는 주인공이 정찰을 위해서 먼저 비둘기를 내보내고, 이어서 제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까마귀를 내보내고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이야기와 상호 관계성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후대 독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까마귀는 썩은 시체를 먹는 짐승이고, 비둘기는 낮은 지역에 거주하는 습성이 있는 짐승으로서, 비둘기보다는 까마귀를 내보내는 <성경>의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까마귀가 부정한 짐승이니만치 방주 안에는 이들이 암수 한 쌍이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종류가 후대에도 남아있기 위해서는 이들 중 둘 다 살아남아야 했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달리 정결한 짐승이라(레 1:14; 12:6), 희생 제물로도 쓸 수 있었으며 때로는 이스라엘로 상징되기도 합니다(호 7:11; 11:11). 따라서 <노아 이야기> 안에서 비둘기의 역할은 ‘노아’ 자신을 대신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노아’와 비둘기는 음성학적으로도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노아’(noah); (2) 비둘기(hayyonah).
‘노아’의 사명은 땅이 말랐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고, 비둘기는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이 비둘기 이야기는 ‘노아’와 비둘기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부드럽고도 친밀한 관계를 상상하게 합니다. Whenhem은 ‘노아’의 인격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만 경건하고 의로운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짐승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보호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습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잠 12:10).
‘노아’가 이후 3 주간에 걸쳐 매주 비둘기를 내보내는 이야기는(8:8, 10, 12) ‘히브리’ 식 이야기 구성의 전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 전개는 비록 느리긴 하지만, 또 다른 하나의 절정을 향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일주일이 큰 소득 없이 지나고 두 번째 일요일 저녁, 배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노아’에게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를 물고 들어오는 비둘기와 그를 기쁨과 탄성으로 맞아들이고 있는 ‘노아’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자체가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더라”(8:11-12).
모든 짐승들이 그들의 잠자리로 돌아가는 저녁 시간에 이 비둘기는 감람 잎을 물고 들어온 것입니다! 감람 잎은 고대 근동에서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희생 제물로 쓰이기도 했으며(레 2), 무엇보다도 이 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이었습니다(렘 11:16). 지금 비둘기가 전해주고 있는 이 소식은 ‘노아’가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 즉 그 땅은 이미 말랐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복음의 소식이었습니다: “주인님, 사람과 짐승이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고 다음 주 비둘기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입니다. 남은 일은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열심히 먹고 즐기는 것입니다. ‘노아’ 역시 더 이상 방주 안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일곱 번째 마지막 두 절은 바로 그 사실, 즉 재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백 일 년 곧 그 달 일일에...지면에 물이 걷힌지라...지면에 물이 걷혔더니...이월 이십 칠 일에 땅이 말랐더라”(8:13-14).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땅에 대한 강조가 아닐 수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세상은 옛 땅과 옛 질서를 뒤로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 두 번에 걸쳐 날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앞에서 밝힌 대로 Jubilee 달력에 의하면 두 날은 모두 수요일로서(601년 1월 1일//601년 2월 27일), 하늘의 천체들(태양, 달, 별)이 창조된 날이기도 합니다(창 1). 그리고 홍수의 전체 기간이 365일이었다고 하니 정확하게 일 년이 걸렸다는 의미이며, 음력으로는 일 년(354일) 11일이 걸린 셈입니다.
5) 방주를 떠나다(8:15-19)
그러나 ‘노아’는 멋대로 방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필요했습니다.
15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17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19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15-19절)
그러나 그동안 물이 빠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노아’가 취한 일련의 행동은 마치 하나님의 지시나 명령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직전의 장면에서 하나님은 그냥 무대 뒤에서 ‘노아’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지혜는 결코 상충되거나 모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은혜와 훈련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노아’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행위는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모세’가 정탐꾼을 내보내는 것이나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위하여 ‘여호수아’가 첩자를 내보내는 행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장면이 시작되면서 “방주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려온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신 분도 그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이 점을 여덟 번째와 세 번째 무대가 상호 대칭을 이루도록 꾸밈으로써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7:1 너와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8:16 너는...방주에서 나오고
하나님께서 다시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노아’는 대화의 수동적인 상대자가 됩니다. 방주를 떠나라는 첫 명령에 이어 두 번째 명령을 통해서 방주 안에 함께 있던 다른 짐승들도 모두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리라”(8:17).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창세기> 1장의 모티브를 엿볼 수 있습니다. “창조의 언약”이 바로 그것입니다(1:26-28).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창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에게 국한한 것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언약의 범위가 땅에 사는 모든 짐승들 즉 모든 피조세계로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이후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어지는 아홉 번째 무대는(8:18-19) 두 번째 무대와 함께(6:22) 그 결과, 즉 ‘노아’의 순종을 그리고 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8:18-19).
하나님께 아무 자랑할 것도 없는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것도 오직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즉 순종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단순한 메시지입니다. 선물을 한사코 받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담’ 이후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던 인류 중에서 오직 ‘노아’만이 의롭다 함을 인정받은 것도 바로 이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6) 제사를 드리다(8:20-22)
<홍수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이 될 열 번째 무대는(8:22-9:17) 첫 번째 무대에서처럼 하나님의 독백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독백이라는 본문의 양식만을 고려할 때, 마지막 무대의 범위는 8:22-9:17 전체를 포함해야 할 것이며, 내용 상 네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8:20-22: 하나님의 계획(의도):보존과 유지; (2) 9:1-7: 하나님의 언약; (3) 9:8-11: 언약의 내용; (4) 9:12-17: 언약의 증거(12절과 17절의 수미상관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9장은 전체적으로 무지개로 상징되는 소위 “노아의 언약”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논의의 편의 상 본 교재에서는 따로 다루기로 합니다.
20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20-22절)
하나님께서 마음속으로 계획하고 다짐하고 계신 것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즉 일 년 만에 땅에 첫발을 디딘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행위 즉 예배였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8:20). 이것은 노아가 난생 처음으로 드린 예배가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늘 해오던 생활 방식의 연장이었을 뿐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예배에 대한 반응이 하나님의 독백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독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한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바뀌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8:21). 불과 일 년 전에 그분이 품었던 생각과는 너무나 판이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 함이니라”(6:5-7).
무엇이 이처럼 극적으로 하나님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놓았을까? ‘노아’의 예배, 즉 희생제사에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번제단과 번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번제(burnt offering)란 짐승의 껍질과 내장을 제한 나머지 부분을 통째로 각을 떠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우는 제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의 네 가지 세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제사였습니다(레 1).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받아들이셨다)는 언급도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제물을 받으시기를” 간구하였고(삼상 26:19), <레위기>에서는 불순종한 자의 제사는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레 26:31).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히 향기라고 번역하고 있는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진정시키는(달래는) 향기”(soothing aroma)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언어의 유희를 읽을 수 있습니다. “달래다”는 의미의 이 단어는 ‘노아’와 비슷한 발음을 지닌 ‘니오하’(ההינ)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향기를 맡으신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향기를 맡으셨습니다. ‘라멕’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노아’(위로 또는 안식)라고 지은 이유를 앞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29).
그러니까 ‘노아’가 한 일은 분노한 하나님을 진정시킨 것이었습니다. 불의한 세상과 패역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신약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노아’가 드린 제사가 자발적인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해도, 보다 넓게는 그의 이름이 의미하듯 분명 달래고 진정시키는 화목의 제사였음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 제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노아’ 이후 두 번째 인류에 대한 태도를 바꾸시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랜다는 생각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인데,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인 주장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수시로 생각과 행동을 바꾸신다는 주장 자체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두어야 할 사실은 제사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예배와 제사를 기꺼이 받으시며, 제사를 통해서 여러 가지 유익들 즉 용서와 화목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노아’가 드리는 제사는 단순히 이방제사에서 보듯 인간이 진노한 신을 달래기 위해서 드리는 인간 자신이 정하고 인간 자신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고, 하나님 자신을 위한 제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레위기>의 핵심적인 대 원칙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노아’의 제사는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속죄제의 전형(典型)이 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 제사를 드렸고, ‘욥’이 그 자식들을 위하여 제사장적인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욥 1:5; 42:8) ‘노아’가 드리는 이 제사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봄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보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보게 됩니다. 그 중보자가 ‘노아’이든 ‘모세’이든 하나님은 항상 그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의 의로운 중보자를 세우고 그 사람의 희생 제사나 그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노아’가 드린 제사가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전 우주적이었다는 사실 또한 그분의 독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8:21);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2).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다짐은 이중적입니다. 다시는 무엇인가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21절) 계속해서 하시겠다는 다짐이(22절) 그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다짐과 관련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모순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으로 하여금 땅을 저주하게 하신 이유가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다시는 그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시니 당연히 어리둥절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이런 모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즉 실제 홍수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실망하셨는데, 그 이유는 홍수가 인간을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홍수 후에 곰곰이 되돌아보니 자신의 행동이 썩 지혜롭지 못했고 일을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실수를 인정하셨고, 그로부터 교훈을 삼아 다시는 인간을 그런 식으로 다루지는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셨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본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번역을 받아들일 때는 가능하기도 합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8:21).
그러나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면 의미는 보다 뚜렷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 할지라도,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8:21). 이런 번역은 NIV나 NKJV 등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21절 후반의 접속사(ki)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때문인데, 문맥에 따라 “왜냐하면”(for, because) 또는 “비록...할지라도”(even though) 등처럼 여러 가지 의미가 가능합니다.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받아들일 때 보다 무난한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제부터 일종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을 적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워서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전에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에 내렸던 그 저주가(3:17) 자동적으로 소멸되거나 원인무효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저주의 결과들, 잡초, 엉겅퀴, 고통과 죽음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겪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홍수 이후에도 인간의 본성이 결코 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오히려 반대로 세상을 다시 이전의 모습, 즉 규칙적이며 예측 가능한 지구와 자연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고백이 하나님의 두 번째 다짐과 관련된 것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2). 인간의 행위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실 것이며 그것은 오직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언약이라 부르며, 이어지는 9장의 핵심 내용이 될 것입니다.
3. 무지개: 하나님의 약속(9:1-17)
‘히브리’어로 “무지개”(rainbow)는 “활”(bow)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생긴 모습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영어 단어도 이 점을 나름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두 단어가 공통적으로 ‘bow’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세계에서 활은 전쟁의 상징으로서, 이 활을 벽에 걸어둔다는 것은 곧 전쟁을 그치고 평화조약을 맺는 것을 뜻합니다. 활처럼 생긴 무지개를 구름 가운데 둔다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향한 적대감(전쟁)을 접고 화평을 누리려는 행위라고 이해하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해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는 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바울’의 이 선언은 ‘노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창 6:9). 과연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 방주를 떠나는 노아에게 새로운 창조에 걸 맞는 축복과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9:1). 첫 번째 창조 시 ‘아담’과 맺었던 언약을 “아담 언약”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 두 번째 언약은 “노아 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만, 핵심 내용은 동일한 것입니다(1:28).
이 말씀은 창조 이후 ‘노아’에 이르기까지 세 번째 등장하고 있는데(1:28; 5:2), <창세기>의 나머지 이야기는 결국 이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가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와 대상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언약이 변하지 않고 이어져내려 간다는 사실은 이 세상은 신실하신 한 분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홍수로 범람한 물을 물러가게 하고, 땅이 드러나게 한 후, 새 인류의 조상 노아가 방주로부터 나와서 새로운 질서의 상징 무지개를 바라보는 장면은, 흑암과 혼돈이 하나님의 호흡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의 경계가 드러나고 질서를 잡아가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1) 새 언약(9:1-7)
대홍수 이야기의 즐겁고도 행복한 결론은 하나님과 ‘노아’ 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언약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새 언약의 핵심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으로서, 첫 번째 단락과 수미 상관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강조를 위한 화자의 수사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 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 것이니라. 5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7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9:1-7)
새 언약이라 함은 그것이 옛 언약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지, 앞의 것을 파기하거나 무효화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히 옛 언약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추가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옛 세계와 새 세계가 연속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단절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래 표를 통해서 두 언약 사이에 차이가 무엇이며 그대로인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과 관계해서, 새 언약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짐승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9:2).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군사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서(신 1:21; 11:25; 31:8), 타락 이후 시작된 “분리”의 결과일 것입니다(3:15).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 3 과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
짐승과 사람 사이의 적대감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느낄 수 있는 차이는 먹는 음식과 관련해서인데, 육식(肉食)에 관한 언급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육식과 관련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고 짐승의 생명에 대해서조차도 존엄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언약의 핵심 요소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곧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소홀히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짐승을 먹을 때 그 피 채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 전체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가르침으로서, 희생제사에 썼던 짐승을 먹을 때도 그 피를 다 제거한 후에 먹도록 되어있습니다(레 3:17; 7:26-27; 19:26; 신 12:16-24; 삼상 14:32-34).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짐승도 정결한 것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본문에는 언급이 없지만, <창세기>는 <구약>에서 보여주는 모든 제도와 관습의 기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므로 <레위기>에서 나타나는 음식의 규례가 이곳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곳에서 어떤 짐승들을 먹느냐에 관한 논의는 본문의 핵심적인 주제는 아닙니다.
짐승의 피에 대한 관점이 이러할진대 인간의 피, 즉 생명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인간의 피는 아예 흘리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살인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 점을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9: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그것을 찾으리니),
사람이면 그에게서 그 형제의 피를 찾으리니
살인의 책임은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도 사람을 죽게 하였다면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출애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출 21:28-29). 즉 소가 사람을 뿔로 받아 죽였으면 그 소는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한 형제, 즉 한 가족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은 동생 ‘아벨’을 살해한 ‘가인’을 연상시켜 줍니다. 따라서 살인 행위가 그처럼 심각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살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는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의 원리입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6절은 이 점을 교차대구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Whoever sheds the blood of man, by a man shall his blood be shed.”.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인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살인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언약(1:27)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반 창조적 행위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범죄행위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면서 이 점을 수미상관의 형식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기자는 ‘노아’의 새 언약(9:1-7)을 언급하면서 ‘아담’의 언약을 수미상관적으로(1절과 7절)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의 토대 위에 서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형제도의 대 원칙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고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바탕 위에서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새 언약의 수립(9:8-17)
새로운 세상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이제 언약 조인식을 베풉니다.
8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8-17절)
언약의 당사자는 새 인류의 조상과 모든 짐승들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증거는 무지개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취하신 증거입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친 선언이 이어집니다:
(1) 하나님이...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세우리니(9-11절)
(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12-16절)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17절)
첫 번째 선언은 언약의 대상과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선언에 따르면 이 우주는 다시는 홍수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안정하게 유지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장 길고도 중요한 선언으로서, 그 언약의 증거와 무지개에 관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이르러 <홍수 이야기>는 희망에 찬 해피엔딩을 맞게 되는데, 구름 사이에 나타난 무지개가 이를 보증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화자는 반복과 수미상관 등의 수사를 동원하면서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증거”(12, 13, 17절); “무지개”(13, 14, 16절). 그리고 언약의 대상, 즉 이 증거가 ‘노아’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상대로 한 것임을 무려 다섯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1)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12절)
(2) “나와 세상과의”(13절)
(3)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15절)
(4)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16절)
(5)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17절)
그리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선언은 이 전체 사건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언약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내용을 토대로 세 가지 각도에서 대답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삼중적인 장치를 마련해놓고 있는데, 첫째는 이 모든 약속을 만군의 주 ‘야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그분께서 약속하실 때, 맹세로써 하셨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그분께서는 맹세하실 때 증거를 남겨 두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4. 대미(大尾)(9:18-29)
이제 우리는 대홍수의 동기와 결과, 그리고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홍수 자체는 파괴와 소멸, 그리고 무질서와 혼돈의 극치였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두 번째 창조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습니다. 즉 ‘아담’과 맺었던 그분의 언약을 계속적으로 유지시키고 보존시키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와 새롭게 체결하는 언약을 통해서 그 점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했던 그 언약을 ‘노아’를 통해서 이어가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과연 ‘아담’과 달랐을까? ‘노아’ 이후의 인류는 어떻게 번창해 갔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누구를 통해서 이어져 갔을까? 그러한 분리와 선택의 배경은 또한 무었이었을까? 화자는 <노아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이들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신학적 기능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은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 등장인물 소개(9:18-19)
(2) 술에 취한 노아(9:20-27)
(3) 노아의 예언(9:28-29)
1) 노아의 세 아들(18-19)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18-19절)
이 두 절은 일종의 전이구절입니다. 즉 <대홍수 이야기>와 <창세기>의 네 번째 ‘톨레돗’이 될 ‘노아’의 세 아들들의 계보에 대한 배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홍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세 사람의 이름이 몇 차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5:32; 6:10; 7:13), 이곳에서 다시 등장하면서 이어지는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을 이곳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언약에 따라 온 지구상으로 흩어지면서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인종의 수가 3-6 정도, 그리고 국가의 수는 약 150 정도, 방언의 수는 3,000여 정도 된다고 합니다만, 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습니다. H. Morris, 222쪽(참고서적 10).
오직 <창세기>의 기록(9-11장)만이 민족이나 국가의 기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창세기> 기록이 옳다면 ‘노아’의 세 아들이야말로 오늘날 세상의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그 언약이 지금도 여전히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고, 그 언약 속에서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의 역사가 그렇게 장구하지만은 않고, 더 나아가 진화론의 허무맹랑한 주장들도 먹혀들 틈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만이 인간의 선조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2) 술 취한 노아와 세 아들(20-27)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언약 속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타락한 ‘아담’의 본성마저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노아’는 ‘아담’의 본성을 지니고 있었고, ‘사탄’과 죄의 유혹 앞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두 번째 이야기가 그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20-27절)
홍수 이후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노아는’ 그가 늘 해오던 생업에서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만, 참으로 역설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가(시 104:15) ‘노아’를 취하게 만들었고, 그는 골아 떨어져 알몸으로 자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술이 처음 등장하는 그곳에서 술에 취하여 골아 떨어져 있는 ‘노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9:20-21).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노아’의 모습은 분명 이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니다. 홍수 이전까지 하나님 앞에서 당대의 의인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던 그를 이처럼 다르게 묘사하고 있는 모순에 대해서 학자들은 자료 설에 입각해서 해결하려 하기도 합니다.
포도농사와 술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모리스’ 박사는 ‘노아’가 분명히 홍수 이전부터 이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참고도서 5.
하루의 일과 후에 술 한 잔으로 휴식이나 즐거움을 얻으려 했는데, 그 술이 너무 과했나 봅니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셨습니다. 과하면 부족함만 같지 못하다는 말은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습니다. 이런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다고 심각한 범죄행위로 매도할 것도 아닌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술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술이 분명 인간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하고 있으며(시 104:15), 모든 희생제사에 포도주가 항상 포함되어야 하며(민 15:5-10), 이스라엘의 모든 축제 시에 술을 마시도록 허용하였습니다(신 14:26). 그리고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자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사 5:1-7; 막 12:1-11)! 동시에 <성경>의 여러 곳에서 술의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실 인’은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되며(민 6:3-4), 제사장들이 장막 안에서 제사를 집전할 때 술은 금지되었습니다(레 10:9). 이로 미루어 분명 술 취함과 거룩함 사이에는 함께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일반 백성들의 과음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습니다(잠 21:17; 23:20-21). 술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흐리게 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사 28:7). 술에 취하면 경계심이나 조심성이 사라지게 되고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시키게 됩니다. 취하여 마구 떠들거나, 성적인 욕구를 발동시키기도 합니다. 하박국은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그를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합 2:15). ‘롯’의 두 딸이 그들의 아비에게 취한 행동도 바로 이것입니다(창 19:32). ‘다윗’이 옷을 벗고 춤추는 것을 그의 아내 ‘미갈’이 경멸한 것도 이러한 그들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삼하 6:16). 이스라엘은 벗은 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출 20:26; 신 23:13-15), 나체를 드러내는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벗은 몸으로 수년 동안을 사역한 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당하게 될 수치스러운 심판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사 63:6; 렘 51:57).
오히려 강하게 비난받고 있는 사람은 노아보다는 그의 막내아들 ‘함’입니다. 실수하고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아비를 감싸주기는커녕 사람들 앞에서 크게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그는 인류의 역사상 첫 황색신문(yellow paper) 기자 노릇을 자처하고 나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전통적인 사회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가장 신성한 의무사항입니다. 십계명에도 하나님 다음으로 공경과 예의를 보여야 할 상대가 부모입니다(신 27:15-26). 그래서 부모를 욕하거나 학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출 21:15, 17). 잠언 기자도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잠 17:9)라고 말합니다.
‘함’은 친구의 치부가 아니라 자기 부모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9:22). 일부 학자들은 ‘함’이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상의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그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 중의 한 사람과 근친상간을 범했을 것이라든지, 혹은 그의 아버지와 동성애를 즐겼을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이 모두 지나친 추측일 뿐입니다.
원래 막내아들이 버릇이 없다고 했나요? 아버지를 우습게 알았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권위에 반감이나 불만을 가졌는지도 모르지요. 대개 이런 행동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막내의 이런 막가는 모습은 두 형들의 사려 깊은 행동과는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 하였더라”(9:23). 화자는 이 두 사람의 행동을 천천히 그리고 상세하게 그리고 때로는 반복해서 언급함으로써(‘함’의 행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갔습니다만), 이들의 행위가 칭찬받을 만한 것임을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3) 노아의 예언(9:25-27)
술이 깬 ‘노아’는 세 아들이 한 행동을 알게 됩니다(9:24).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신탁(信託)입니다. 특히 막내아들 함을 향한 지독한 저주가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극히 이례적입니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25절)
보통 술이 깨면 취중에 범한 여러 가지 실수에 대해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상례인데 ‘노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내리는 첫 번째 저주로서, 그것도 부모가 자식에게 내리는 저주라는 점에서 비극적인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노아’가 단순히 기분이나 감정에 치우쳐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입각한 신탁이며 따라서 반드시 예언대로 이루어 질 일입니다. 다만 저주의 대상이 당사자 ‘함’이 아니라 그의 막내아들 ‘가나안’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만, ‘가나안’은 한 사람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에서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고 괴롭히던 그 땅의 이방인 족속을 총칭하는 이름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함’에 대한 저주는 후대 화자의 기분이나 입장이 반영된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분노나 미움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그를 향한 저주가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셈’과 ‘야벳’을 향한 축복의 신탁 중간 중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9:26-27).
왜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시작할 때마다 이런 玉의 티가 늘 함께 묻어 들어오는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옛 창조 시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그런 일이 있었고, 신약의 교회가 새롭게 시작하던 곳에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으로 교회는 처음부터 얼룩진 역사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노아’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언약을 받은 인류의 조상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죄를 범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지식의 열매를, 두 번째 ‘아담’ ‘노아’는 포도 열매를 먹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알몸으로 서게 됩니다.
‘셈’과 ‘야벳’을 향한 신탁을 통해서 창조의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그 속에 저주의 메시지가 함께 들어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언약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창조와 타락의 결과가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분리와 선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아담’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면, 두 번째 세상에서는 ‘노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교훈과 적용
1. 홍수
<대홍수 이야기>는 인류 역사의 분기점을 이루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두고 인류의 온갖 상상력을 자극해 왔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과연 홍수가 온 세상을 뒤덮었을까? 과연 ‘노아’와 그 가족만 남고 모든 인류가 다 전멸하였을까? 그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일 년 동안 지낼 수 있었을까? 홍수 후 그 많던 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홍수 사건을 놓고 이처럼 많은 질문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들 질문들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홍수의 역사성과 홍수 이야기의 과학적 진실성 여부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전 지구를 뒤덮었다는 홍수의 역사적 증거들은 어디 있는가?”
화자의 궁극적인 의도는 물론 홍수에 대한 역사적이고도 과학적인 질문에 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훈에 있을 것입니다만,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이들 질문들에 대해서 최소한의 답변 정도는 마련해 둠이 복음의 변증을 위해서도 필요할 듯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증거들을 찾아낸다고 해서 그들이 홍수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홍수는 과거에 단 한 번 있었던 사건이었고, 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존하는 전승들이나 지구의 현재 모습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간접적인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궁극적인 답변은 우리의 화자가 그러했듯이 성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 증거들을 찾아나서 봅시다.
역사적 증거. 인류의 신화나 전설 가운데서 홍수 이야기만큼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도 없다는 사실이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물론 이와는 정반대로 <성경>의 대홍수도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가볍게 취급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이비들이 많으면 진짜도 사이비 취급을 당하는 법입니다). ‘존 모리스’ 박사가 밝혀 놓은 바에 의하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200여 가지가 넘는 홍수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T. LaHaye와 J. Morris의 공저 「The Ark on Ararat」(231쪽)을 참고할 수 있으며, 이 내용은 다시 Boice가 그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참고도서 6, 제 1권, 357쪽).
많은 이야기들이 나름대로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오히려 여러 면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만 합니다. 예를 들면, 전체의 88%가 구원받은 한 가족을 다루고 있고, 70% 이야기에서 이 가족이 배를 타고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95%의 이야기가 재앙의 원인으로 홍수를 꼽고 있으며, 66%가 홍수의 원인으로 인간의 타락을 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들도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전체의 67%에 이르며, 57%가 살아남은 자들이 산꼭대기에 머물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중 일부 이야기에서는 ‘노아’가 성경에서처럼 새를 배 밖으로 내보내는 이야기라든지, 무지개, 그리고 여덟 명의 생존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 모든 이야기가 결국 하나의 원전에서 출발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처럼, 각 지역의 홍수 이야기는 그 지역이 실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근동 지역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내용이 성경의 홍수 이야기와도 점차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 성경의 홍수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여러 지역으로 전해져 가면서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 갔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홍수 이야기가 단순히 살아남은 몇 사람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기에는 그 충격과 감동이 너무나 컸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질 및 화석학적 증거. 일반적으로 화석이나 지층은 창조나 <성경>의 대홍수를 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진화론이나 그에 바탕을 둔 동일과정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들 증거들을 창조론자의 입장에서 제시할 때 따르는 학문적이고도 사회적인 위험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진화론 일색의 학문의 풍토에서 이들 증거들을 창조론자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학문적 고립을 자초하는 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석이나 지층은 적극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소극적인 홍수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질학 분야에서 소위 창조론적 대안은 “홍수 지질학”(또는 “격변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인 주자로서 미국이나 호주에 연구소를 두고 있는 창조과학회를 들 수 있는데, 이들에 따르면 현재 지표면을 형성하고 있는 지층은 오랜 세월에 걸친 점진적이고 국부적인 홍수로 인한 퇴적 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노아’의 대홍수와 같은 대 격변을 통해서 일시에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본 교재에서 참고한 일련의 창조과학 서적들을 보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13-15). 더욱 최근에 미국 창조과학회는 지난 1980년 미국 ‘시애틀’ 부근의 ‘세인트 헬렌’ 산의 화산 폭발을 담은 비디오를 통해서 수백 미터의 지층이 불과 수 시간 만에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홍수나 지진 등과 같은 대 격변이 일어나면 수목이나 짐승 등은 바위나 흙탕물과 함께 일시에 휩쓸려 내려가 궁극적으로 해양 밑바닥에 잔해로 차례로 쌓이게 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창조론자인 ‘존 위트콤’과 ‘헨리 모리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 잔해가 쌓이는 데는 일정한 순서가 있는데, 밑에서부터 가장 간단한 해양 유기체에서부터, 해양 생명체들, 다음으로 육지 식물과 동물의 순서입니다(이러한 과정을 수력 공학적 선택 작용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퇴적과 응고 과정을 통해서 화석과 지층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만일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전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거의 모든 화석이나 지층이나 석탄 및 석유층은 그 자체로서 홍수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증거를 찾아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두가 이들의 견해에 동조하거나 호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독인 지질학자이며 칼빈 대학 교수인 데이비스 영(D. Young)은 성경의 대홍수를 역사적 사실로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창조론자들의 성경 해석에는 회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반대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만, Boice는 그의 견해를 네 가지로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참고도서 6, 제 1권, 362-363 쪽).
홍수 외의 원인으로 돌리기에는 설명이 힘든 화석 및 지질학적 증거들을 다음 몇 가지로 살펴볼 것인데, 여전히 우리는 지나치게 독단적이거나 단정적이 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질학적 격변이 다 노아 시대의 홍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단정지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전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대규모의 짐승의 뼈 무덤. 이들 무덤은 거대한 협곡으로서 아마도 지진 등과 같은 지각의 대 변동으로 생겼으며, 이 속에 쌓인 대규모의 뼈들은 당시 그러한 지각 변동 시에 물에 의해서 휩쓸려 내려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 무덤은 러시아, 아프리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무덤을 이루고 있는 짐승의 뼈는 코끼리나 공룡, 돼지, 말, 소 등으로서 이들 모두 기본 골격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다만 갈라지고 부서져 있기는 하지만 흩어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뼈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으며, 그 장소도 외떨어지고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모여 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화석 무덤으로 일컬어지는 곳으로서는 프랑스의 ‘사르’ 골짜기를 들 수 있는데, 언덕 높이가 주변 구릉보다 300미터 정도 높이 솟아 있으며, 그 정상에 화석 뼈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것도 함께 발견하기 어려운 짐승의 뼈들이 뒤엉켜 모여 있습니다. ‘세리고’ 섬에는 뼈의 산이라 부르는 산이 있는데 그 밑바닥 둘레가 1.6 킬로미터에 이르며 바닥에서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온통 짐승 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실리의 팔레르모 근처의 한 동굴에서는 20톤이 넘는 짐승 뼈가 발견되었으며, ‘네브라스카’의 북서 끝단에 위치한 한 언덕에서도 1876년 짐승 뼈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9천여 구의 짐승 뼈들이 고스란히 원형대대로 발견된 바 있습니다.
이들 외에도 전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이처럼 다양한 뼈 무덤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평소에는 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해서 함께 살기 어려운 짐승들의 뼈가 한 무덤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 짐승들을 바다 아래가 아닌 높은 산이나 언덕으로 올려다 놓았을까? 그것도 한 둘이 아닌 거대한 무리로... ‘노아’의 대홍수가 적절한 설명이 될 수는 없을까?
2. 내륙에 산재해 있는 염(鹽) 호수들. 염분을 함유하고 호수로 사해(死海)를 꼽을 수 있지만, 지구상에는 이 외에도 염 호수는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한 때 호수나 강도 물이 마르면 소금기를 나타낸다고 믿은 적도 있었으나,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염 호수가 존재하고 있고, 그 속에는 오늘날 바다에서나 살 수 있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한 때 이 지역이 바닷물로 뒤덮여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고비 사막으로 알려져 있는 중국 내륙 지역도 한 때는 그 규모에 있어 지중해에 버금가는 크기의 내륙 호수였다고 합니다(중국 사람들은 이를 內海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질학자들은 이런 지역을 화석 호수(fossil lake)라고 부릅니다. 한 때 호수였다는 의미입니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도 현존하는 바다로서, 해발 6백 미터 정도에 달하며, 한 때는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인도나, 몽고, 터키,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그리고 북미 대륙은 한 때 홍수로 범람했으며 바다나 내륙 호수로 뒤덮여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오대호(the Great Lakes)는 ‘알공킨’(Algonquin)으로 부르는 더 넓고 더 높은(26피트 정도) 호수로 뒤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뉴욕 주 대부분을 덮었다는 ‘이로쿠오이 호수’(Lake Iroquiois), 캐나다의 중동부와 미국의 미네소타주 및 북다코다주를 덮었던 ‘아가시스 호수’(Lake Agassiz), 그리고 오늘날의 미시간 호수만한 크기로 유타주의 ‘솔트호’(Salt Lake)를 뒤덮고 있었던 ‘보네빌 호수’(Lake Bonneville) 등이 지질학자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내륙 호수나 화석 호수의 존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 때 이 지역이 바닷물로 뒤덮여 있었다는 사실 말고...
3. 석탄과 석유. 이들은 엄청난 규모의 식물과 동물들이 묻혀서 탄화 작용의 결과로써 형성된 것이다. 대 홍수 외의 어떤 자연적 현상이 이런 전 지구적인 규모의 층을 형성할 수 있을까?
4. 시베리아의 맘모스 화석. 맘모스는 코끼리 과에 속하는 거대한 짐승으로서 그 무게가 대개 100kg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서식처는 주로 북미나 유럽 대륙 및 북아시아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수의 맘모스 시체가 시베리아와 같은 북아시아 지역에 광범위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 시체가 널려있는 지역만 해도 북극해 연안을 따라 3600킬로미터에 걸쳐 뻗어있습니다. 이처럼 춥고도 황량한 버려진 땅에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숫자의 맘모스가 살 수 있었을까요? 땅이 녹는 여름이라고 해야 겨우 수 주일에 불과한 동토에 어떻게 이들이 살 수 있었을까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중 많은 수가 그대로 꼿꼿하게 선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의 위 속에는 아직도 소화가 되지 않고 푸른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채소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홍수와 같은 갑작스러운 대 격변에 이은 지구 환경의 변화로 이 지역이 동토로 변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제시할 수 있는 증거로는 해수면의 증가를 들 수 있습니다. 2만 년 전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75~90 미터 정도 낮았다고 합니다. 이후 점차 증가하여 지금의 수면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지난 4~5 천년 동안은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약 6천 년 전에는 오히려 지금보다 30~40 센티미터 정도 더 높았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정도의 높이로 지구 전 지역을 다 덮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긴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해수면이 이처럼 갑자기 높아진 원인을 성경의 대홍수 이후의 기간으로 돌릴 수는 없을까요? 특히 지구의 역사에서 달리 특기할 만한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말입니다.
6. 마지막으로 ‘노아’의 방주를 찾겠다는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도 ‘아라랏’ 산 근처의 위성사진이 공개됨으로써 방주에 대한 논란이 다시 가열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Nate 뉴스(2006.03.10)에 실린 글과 사진에서 따온 것입니다:
미국 일간 USA 투데이는 9일자 온라인 기사에서 ‘노아’의 방주 미스터리가 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 연구자들이 ‘노아’의 방주로 주장해 온 물체(혹은 지형)를 담은 선명한 위성사진이 공개되었기 때문. ‘포르세 테일러’ 등 ‘노아’의 방주 연구자들은 <성경>에 묘사된 40일 대홍수가 끝난 뒤 방주가 터키 ‘아라라트’ 산에 안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왔다. 그 증거로서 4663미터 높이의 산허리에 있는 비정상적인 지형의 항공 및 위성 촬영 사진이 제시되어 왔다. 그림자에 불과하다거나 자연 지형이라는 반박도 있었지만,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라는 가설도 있어 왔다. 그런데 최근 문제의 지역을 촬영한 선명한 위성사진이 공개되면서 다시 논란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디지털글로브(DigitalGlobe)사의 위성이 2003년에 촬영한 사진이 일반에 공개된 것이다. ‘노아’의 방주가 실존한다고 믿고 10여 년 동안 연구를 진행해온 ‘포르세 테일러’는, 이번에 공개된 사진이 ‘노아’의 방주 미스터리를 푸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문제의 물체가 노아의 방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길이와 너비가 6:1 비율로 ‘노아’의 방주에 대한 <성경> 기록과 일치한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논거 중 하나. ‘아라라트’ 산허리의 물체 길이는 309미터이다. 언론은 상업 위성사진은 물론 군사 위성 사진들도 속속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노아’의 방주 미스터리가 풀리게 될 것으로 낙관하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성경적 증거. 학문으로서의 지질학은 홍수와 같은 역사적 사건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할만한 무슨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위에서 제시한 일련의 화석 및 지질학적 증거들은 오히려 전 지구적인 홍수와 같은 대 격변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더 합리적이며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창세기>의 기록을 부정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가 과연 전 지구적인 사건이었을까? 국부적인 사건은 아니었을까? 홍수가 전 지구적인 대 격변이었다는 점은 최근까지 교회나 학자들이나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던 기정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즉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로 ‘버나드 램’(Bernard Ramm)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홍수 전후의 지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당시 가장 높은 산들을 다 덮는데 필요한 물의 양을 계산한 바 있습니다. 지구를 완벽한 구(球)로 보았을 때 바다가 전 지구를 덮을 경우 대략 4킬로 정도의 깊이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에서 10킬로미터 이상의 높이를 지닌 산들이 수두룩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 산들을 모두 다 덮으려면 현재 바다에 있는 물보다 여덟 배가 더 많은 양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정도의 물을 새롭게 창조하셔야만 했고, 홍수 이후 그렇게 불어났던 물을 다시 없애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을 더 만드셨다면, 그로 인해 지구의 하중은 더 늘어났을 것이며, 자전이나 공전의 속도는 달라졌을 것이고,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문학적 관찰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한 번도 그런 일이 관찰된 적은 없습니다.
‘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고기의 탄생에 관해서도 이채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홍수 기간 동안 바다 물과 민물이 뒤섞이게 되어 물고기들이 모두 죽게 되었을 것이므로, 이들 물고기들은 홍수 이후 새롭게 창조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또 묻습니다. 어떻게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그 많은 짐승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어떻게 바다를 건너고 땅을 가로질러 방주 안으로 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방주 안에서 일 년이 넘도록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이 모든 의문들이 ‘램’의 마음을 압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질문들에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홍수가 전 세계적이기보다는 국부적 현상이었을 것이라는 입장으로 정리를 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방주 안으로 들어온 짐승들은 당시 근동 지방에 흩어져 살던 것들이며, 이들을 보존한 목적도 홍수 이후 인간의 먹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홍수가 전 세계적인 규모였다는 점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지식으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을 다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그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방주 안으로 다 들어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하드라도 대답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질문들이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질문에 대해서 일일이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하기보다는 성경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헨리 모리스’ 박사는 26가지의 논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홍수가 전 세계적인 규모였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그 중에서 네 가지 정도만 소개하기로 합니다.
첫째, 만일 홍수가 국부적인 것이었다면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크기의 방주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일은 어리석고 불필요한 일입니다. 방주의 크기는 가로 x 세로 x 높이가 450피트 x 75 피트 x 45 피트로서 오늘날 큰 여객선 규모에 달합니다. 이만한 정도의 배를 건설하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인데, 성경에 의하면 적어도 120년이 걸렸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수천 종의 짐승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방주를 어디다 쓰려고 건설하였을까요? 단순히 국부적인 홍수를 대비할 참이었다면 이 정도 규모의 배는 전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노아’더러 그 지역으로부터 피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롯’으로 하여금 ‘소돔’의 멸망을 피하여 도망하라고 경고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나 땅의 짐승들 역시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편이 훨씬 나아 보입니다.
둘째,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8:21-22; 9:11, 15). 만일 홍수가 국부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신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후 지구에서 엄청난 피해를 유발시켰던 홍수가 여러 지역에서 수없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최근만 하드라도 동남아시아의 해일이나 미국 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도 그 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이런 약속은 전 인류가 멸망하는 세계적인 규모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약속임에 틀림없습니다.
셋째, <성경>은 홍수 이후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꼽고 있습니다(9:18-10:32). 물론 이 기록 역시 단순히 근동 지역에 국한된 민족과 국가들의 목록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기록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9:18-19);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10:32).
넷째, 성경의 다른 본문들도 전 세계적인 홍수를 암시하고 있거나 적어도 반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참고 본문: 욥 22:15-16; 시 104:5-9; 사 54:9; 히 11:7; 벧전 3:20; 벧후 2:5; 3:5-6.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 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레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 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 104:5-9).
이와 관련해서 ‘베드로’ 사도 역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 3:5-6). 이곳에서 ‘베드로’ 사도는 지질학에서 소위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이라 불리는 규칙적인 자연 현상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지구는 오랜 세월에 걸친 지역적 홍수와 퇴적 작용으로 말미암아 지층이나 지구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노아’ 시대의 홍수와 같은 대 격변으로 인하여 형성된 것임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자들이 선호할만한 가설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노아’와 대홍수를 거명하면서 최후의 심판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37-41).
만일 대홍수가 세계적인 규모가 아니었다면 구태여 세계의 종말과 연관해서 이 사건을 예로 들었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인 규모의 심판이 있었고, 또 앞으로 한 차례 더 있을 것입니다!
2. 노아
의인. ‘노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같은 홍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와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는 신학이나 신앙적인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예로써, 주인공을 묘사함에 있어 전자(前者)에서는 그의 영웅적인 자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주인공 ‘우트나피쉬팀’(Utnaphistim)은 아주 영민하고 활력이 넘치는 건축자로서, 그의 모든 재능과 능력을 쏟아 엄청난 크기의 방주를 완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창세기> 화자의 관심사는 보다 영적인 차원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인공 ‘노아’가 방주를 어떻게 건설하였으며, 방주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렸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의 인격적 측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언급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뿐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이 말은 그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제반 명령들을 충실하게 따랐던 선하고 착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 화자는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흠도 없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바도 하나님에 대한 ‘노아’의 전적인 순종에 관한 언급들뿐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6:22);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7:5, 16).
홍수가 끝난 후에도 ‘노아’의 순종에 관한 암시는 홍수 이후의 그의 행적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방주를 떠났으며(8:15), 물론 홍수가 끝난 후에 밖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나 비둘기를 내보내는 등의 일련의 세심한 사전 조사를 실시하긴 했습니다만(8:6-14), 이러한 행동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명령과 상충되는 행동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후 감사와 헌신을 뜻하는 희생 제사를 드렸고(8:20), 새로운 언약의 수혜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9:1-17). 이 모든 언급으로 미루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노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맺고 있었던 올바른 관계는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피조세계와의 관계 역시 그래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수행해야 할 위대한 과업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6:19)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6:20)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7:3)
과연 ‘노아’는 하나님의 이런 기대와 희망에 충실하게 반응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둘기 한 마리조차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8:9). 홍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그저 홍수가 끝나기만을 손 놓고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먹이고 지키는 일로 늘 분주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노아’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관계는 또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언급을 음미해 봅시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앞에서 언급했던 두 관계가 수직적인 것이라면, ‘베드로’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이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 즉 동료 인간들과의 좋은 관계를 말합니다. 그의 가족들도 이 속에 포함되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에 따르면, ‘노아’는 단순히 의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를 행하는 자였습니다. 실제 그가 종말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쳤는지에 대해서는 이 한 구절만으로써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방주를 건설하는 행위 그 자체가 당대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종말의 메시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그를 세상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노아’는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은 기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올바른 관계는 항상 쌍방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멸망한 것은 ‘노아’가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노아’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그러나 ‘노아’는 최소한 그의 가족과는 훌륭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시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느니라”(7:1). 가족으로부터 신앙을 인정받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나 가족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이점은 훗날 ‘롯’의 경우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임박한 종말에 대해서 그가 가족들에게 경고했을 때 그의 아내나 사위들이 보였던 태도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가족들로부터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 신앙인입니까?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의 의로움이 나머지 가족 모두가 구원을 얻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신비롭게도 나의 가족 모두를 한꺼번에 구원하기보다는 우선 나를 먼저 부르시고, 나의 눈물과 기도와 아픔과 하소연을 통해서 나머지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오직 순종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늘 분별하며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훈련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지속해 갔습니다. 방주 안에 있을 때조차도 노동과 안식의 패턴을 어김없이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새들을 일주일 간격으로 방주 밖으로 내보내면서 바깥세상 상황을 알아보려 했다는 진술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노아’가 맺고 있었던 그 모든 좋은 관계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단어는 “의인”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6:9상). 그러나 그가 정말 의인이었을까? 이 세상에 자칭 의인은 없습니다.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인정해주어야만 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즉 법정에서 피고가 스스로 무죄 선고를 내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배심원이나 재판관이 그렇게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가 의인의 칭호를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흠이 없었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직전에 화자가 언급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바로 이 진술이 그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불릴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타락. 다시 말하자면 ‘노아’의 의로움은 그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끝난 후 ‘노아’는 하나님 앞에 번제 즉 감사와 속죄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가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8:21상). ‘노아’는 가족과 모든 짐승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감사와 헌신의 번제를 드렸으며, 이 제사는 하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분은 그 향기를 맡으시면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맹세하고 계십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8:21상).
이 맹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구름을 뚫고 찬란한 무지개가 화살 모양을 그리며 ‘노아’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산과 들, 폐부를 찌를 것만 같은 맑고 신선한 공기, 말끔하게 단장한 마른 땅들, 갓 피어오르기 시작한 풀과 나무들, 언제부터인지 다시 물속을 헤엄쳐 돌아다니는 물고기 떼들...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마음속에 간절한 소망이 피어오릅니다: “다시는 홍수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이전의 그 실수들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았으면” 이것이 단순히 희망 사항으로 그칠 수만은 없는 것이, 옛 창조 시에 그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하나님께서 심히 좋다고 노래하시면서 그의 조상 ‘아담’을 축복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동일한 언약으로 그를 축복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9:7).
스스로 흥에 겨워 ‘노아’는 이전에 담아두었던 포도주를 꺼내 마시면서 자축연을 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도 함께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군들 이러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나’의 한 잔치 집에 들러 포도주를 창조해 주심으로써 결혼을 축복해 주셨고 흥을 북돋아 주신 바 있습니다(요 2:1-11).
그러나 술이 너무 과한 탓이었을까요? 육백 한 살이 되도록 그 이웃이나 하나님 앞에 아무 흠도 없이 의롭게 살아오던 ‘노아’가 바로 그 술 때문에 무너지고 맙니다. 술이 너무 취하여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코를 골며 잠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영원한 언약을 받기가 무섭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죠. 왜 이 일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지 현대인들의 관점으로는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다음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막내아들 ‘함’이 이 모습을 보았고,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기는커녕 형들에게 고자질을 해버렸습니다. ‘함’의 이런 행동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아들을 저주하고 있는 아버지의 행동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세상에서 새 인류의 조상이 또다시 “창조-타락”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8:21상)는 진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장 완벽하고 의롭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송받던 ‘노아’조차 이렇게 한 순간의 방심으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면 과연 누가 이 세상에서 의인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인류의 절망과 비극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런 순환은 비단 이곳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심판을 피하여 살아남은 ‘롯’이 그 딸들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고(창 19:30:38),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려 했던 이스라엘은 ‘아간’의 범죄로 얼룩진 바 있으며(수 7), <신약>에서 새롭게 시작한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더럽혀 놓은 바 있습니다(행 5:1-11).
이 모든 사건들 역시 하나같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진정 의인은 없고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롬 3:10). 그렇다면 ‘노아’가 의인이었고, 흠이 없었으며,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 역시 주님과 수년간 동행했던 자입니다. 그가 주님과 동행하는 동안에는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떠나신 후에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쓰라린 회오와 뉘우침으로부터 회복되어 대 사도로 변신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입니다!
3.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대홍수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입니다. 무려 120년에 걸쳐 완성된 엄청난 규모의 방주도 아니고, 그 방주를 힘들여 건설했던 ‘노아’도 아니며, 온 땅을 뒤덮었던 무시무시한 물도 아니고, 온갖 종류의 짐승들은 더더욱 아닙니다. 처음부터 홍수를 계획하신 분도, 방주의 세세한 부분까지 설계하고 건설하신 분도,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도,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문이 열려서 대격변이 시작하게 하신 분도, 홍수가 그치고 땅이 마르게 하신 분도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이야기의 또 다른 중요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노아’가 맡은 역할은 상대적으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보입니다. 이야기 내내 그가 한 말이라고는 단 세 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참고, 9:25-27).
우리는 <대홍수 이야기>를 통해서 적어도 세 가지 영역에서 ‘야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감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인과응보-홍수로 세상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2) ‘헤세드’(긍휼)-‘노아’와 그 가족을 방주를 통해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서; (3) 새 언약-홍수 이후 새로운 세상을 이어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인과응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나님께서 때로는 즐거워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외부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나 할 일이지 하나님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초지일관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놀라거나 슬퍼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그러면 그렇지.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다음 작전 개시!” 뭐 이런 반응을 보이면 됩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하나님을 이처럼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조직신학 속의 하나님으로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감성이 풍부해 보입니다. 보고 느낀 바를 숨기지 못하고 즉각적으로, 거침없이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감성이 풍부하고 변화무상하니 지나간 것은 쉽게 잘 잊어버린다는 약점도 있습니다. 불처럼 화가 났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금방 풀어집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감정이 들쭉날쭉 하실까? 왜 초지일관 요지부동하지 못하실까? 예를 들어, 창조의 마지막 날 그분이 보이신 반응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이 좋았고, 만족스러웠으며, 또한 이들이 “창조의 명령”(1:28)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해 갈 것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전혀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놀랍고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6:11);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6:12). 마치 지금에 와서 처음으로 이 사실을 보신 듯합니다: “하나님이 보신즉...보라! 과연...”(6:12a). 놀라움을 담은 이와 같은 표현은 <창세기>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8:13; 18:2; 19:28; 22:13; 24:63; 26:8; 29:2; 31:2, 10; 33:1; 37:25; 40:6; 42:27).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이처럼 감정의 요동을 보일 수 있을까? 대답은 그분이 인격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홀어머니가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자식을 길렀습니다. 그 자식은 어머니가 엄청난 희생과 사랑으로 자기를 기르신 것을 머리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보답하기는커녕 언제나 말썽만 피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어머니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과 반백이 넘은 머리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희생과, 고생, 그리고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의 감격으로 부딪혀 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충격이 그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은총, 구원의 감격, 등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설명할 수 있고 또 논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식이 어느 날 내 가슴에 하나의 체험으로 부딪혀 올 때, 그 지식이 생명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화는 이성헌 목사님이 “설교의 씨눈”이라는 주제로,「목회와 신학」(1999년 7월호)에 기고한 글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습니다. 그분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이나 즐거움과 슬픔과 분노를 체험하십니다. 전지전능한 화자는 지금 단순하게 온 세상이 타락하고 폭력이 난무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쓰기에는 하나님의 기분을 충분히 다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슬픔과 통분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 번은 자신의 입장을 통해서(6:11), 그리고 또 한 번은 하나님 입장에 서서(6:12) 분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땅’을 무려 여섯 번, 그리고 ‘패괴’한 인간을 다섯 번 씩이나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6:11-13),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음을 독자들 앞에서 시위(示威)해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를 깡그리 잊고 지내는 중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긴장 가운데서 그분의 다음 행동을 기대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6:12). 이 구절이 창세기 제 1부(1-11장)의 전체 구절 중에서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만 합니다. 화자의 뛰어난 수사적 기법이 놀라울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신즉...”이 의미하는 바는, 온 땅이 하나님을 깡그리 잊고 지내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땅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홍수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홍수라는 방법을 택하셨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일차적인 목적은 멸망에 있습니다. 옛 창조를 깡그리 원점으로 되돌려 반 창조로 가져가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패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멸망”을 의미합니다. 즉 그 땅은 이미 멸망의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멀쩡한 세상을 멸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멸망 상태에 있는 세상을 단순히 치워버리실 것입니다. 확인사살에 비유할 수 있을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불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아담’이 타락할 때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 ‘노아’까지 세상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냥 침묵하고 계시다가, 마침내 스스로 멸망하게 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치워버리신다고 하니 말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불만에 아랑곳 않겠다는 듯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사”(롬 1:24);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롬 1:26);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의 말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이유는 인간들이 더욱 많은 죄를 짓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들이 돌이켜 회개할까 봐 더 두려운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셨다고 까지 극언하고 있습니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사 6:9-10). ‘요한’ 화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요 12:39-40).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따를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화자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6:13).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멸망해버린 그 땅을 치워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홍수는 세상의 타락에 대해서 덜도 더도 아닌 지극히 합당한 처벌인 셈입니다. <오경>의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이십니다.
헤세드(긍휼).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과응보의 하나님이시기만 하다면, 즉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이 세상에 남아있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모습을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동; (2)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아 온 집을 뒤지는 한 여인; (3) 집나간 작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홍수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헤세드’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란 무조건적인 긍휼을 말합니다. 그럴 필요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헤세드’의 가장 극적인 예는 <룻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임마누엘’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무 말 없이 오래 참으신 것은 사람들이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참고, 롬 2:4). 또한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롬 5:20). 과연 하나님은 ‘노아’가 방주를 건설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무려 120년을 더 기다렸습니다. 단순히 ‘노아’ 가족만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토록 오래 동안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주십니다: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7:4).
‘노아’와 그 모든 짐승들이 방주에 들어가는데 일주일이 걸렸는지, 아니면 이들 모두가 들어가고 난 뒤 여전히 방주의 문이 일주일 동안 열려 있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실로 이 마지막 일주일은 긴장과 스릴이 넘치는 기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과연 누가 방주 안으로 들어올 것인가? 하나님도, ‘노아’도, 그 가족들도, 짐승들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숨을 죽이고 하루하루를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마침내 토요일! 한 주간은 그렇게 아무 소득도 없이 흘러가 버렸고,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7:16). 하나님의 ‘헤세드’는 아무 보답도 받지 못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홍수의 이차적인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즉 ‘노아’를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완벽한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더러 그 문을 닫으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계 3:7).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구속의 날까지 인(印) 치심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엡 4:30). ‘노아’처럼 우리는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았다고 해서 매일의 삶이 순탄하고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잡을 수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캄캄하고 흔들리는 배 안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주일도 아닌 일 년을 보내야 했던 ‘노아’를 상상해 봅시다. 흔들리는 배처럼 의심과 두려움으로 그의 믿음 역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행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고 계신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날이 갈수록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기억)하사(창 8:1). 이 선언은 놀랍게도 이야기 전체의 문학적 경첩으로서, 교차대구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이야기의 배경이자 원동력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온통 혼돈과 무질서와 흑암으로 뒤덮여 모든 것들이 창조 이전의 블랙홀 상태로 빨려 들어가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노아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신 방식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직접적이며 초자연적인 방식입니다: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8:1하, 3-4).
우리는 이 장면에서 태초의 창조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면서”(1:2), 그 모든 상황을 통제하시고 계셨던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바람”은 다름 아닌 그분의 “영”(또는 “신”)으로서, j"Wר(루아흐)는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약 730회 정도 등장합니다.
수면 위를 운행하시면서 첫 창조를 시작하셨던 그분의 신이, 이제 다시 한 번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첫 창조 때에 지구를 온통 뒤덮고 있던 그 물이 하나님의 호흡으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그리고 다시 바다와 육지의 물로 나누어진 것처럼, 그 동일한 일이 다시 시작되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신 방식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자연적인 방식입니다. 이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미미하지만 의미 있는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홍수가 끝난 후 곧바로 방주를 나가기보다는 주변 상황을 보다 면밀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노아’는 일련의 지혜로운 실험을 단행하였습니다. 먼저 까마귀를 내보내고, 그가 돌아오지 않자, 세 번에 걸쳐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이 주일 후에 비둘기가 물고 가지고 온 희망의 징조, 즉 감람나무 잎을 통해서 방주를 떠날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비둘기와 감람나무 잎은 오늘날에도 평화의 상징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정도입니다.
은혜와 계시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면, 훈련과 이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이 두 쌍은 서로 신비한 상호작용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묶어두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신 방식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8:16-17). 하나님께서 온 땅을 뒤덮었던 물을 이미 물러가게 하셨으며, ‘노아’ 자신 일련의 실험을 통해서 물이 물러가고 마른 땅이 드러난 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가 방주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그분의 말씀입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홍수 이전 방주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을 때 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7:1). 추측컨대 그 이후 일 년 여 동안(정확하게는 일 년 10일)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더불어 직접 말씀을 나누신 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날 이후로 ‘노아’는 방주 안에서 무슨 새로운 지침이나 약속을 전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궁금하던 마음은 점차 불안하고 답답해집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왜 더 이상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지 않으실까?” 그러나 하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실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홍수 기간 동안 방주 안보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더 이상 무슨 경고조처가 필요했겠습니까?
광야에서 담대하게 외치던 소리였던 침례 ‘요한’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처럼 담대하고 확신에 가득 차 있었던 그도 어두운 감옥에서 지내면서 두려움과 의심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그를 잊고 계셨을 리가 없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위로와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눅 7:18-23). 풍랑을 만나 요동치는 배 안에서 제자들이 두려워 떨며,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하고 외쳤을 때에 풍랑을 잠잠케 해주셨던 주님은 실은 그들과 함께 배 안에 타고 계셨습니다(막 6:35-41). 하나님께서 ‘노아’와 함께 방주 안에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고(창 19:29), ‘라헬’을 기억하셨으며(창 30:22), 시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 하시도다”(시 9:12).
나 역시 ‘노아’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인생의 광풍과 노도 앞에서 불안해하고 절망하면서 하나님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방주 안에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을까? 아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던 세 가지 방식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내 편에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만하고 보편타당한 방식은 세 번째 방식, 즉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는 기적이나 주변 환경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표지판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사실 홍수 이전에 세상을 온통 뒤덮는 엄청난 사건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여 방주 안으로 들어갔고, 방주를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떻게 그가 듣는 소리가 단순히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질문입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즉 ‘노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익숙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전 들어보지도 못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가슴 속에 홀연히 들어와서 지시하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평소 성경을 무시하고 잘 읽지도 않고 머리속에는 온갖 잡다한 쓰레기로 가득 찬 사람일수록 초자연적인 방식을 선호합니다. 아니면 주변 환경이 그럴듯하게 돌아가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바라던 기적이 나타나지 않거나, 주변 상황도 여의치 않게 돌아가면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돌아섭니다. ‘욥’의 아내가 그 전형이 아닐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해지는 길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매일 그분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양들은 자기 주인의 음성을 기막히게 알아듣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합니다(참고, 요 10:3-5).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듣고 냄새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요한’의 간증을 들어봅시다: “두 제자가...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시 쯤 되었더라”(요 1:38-39).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묻고 답하고 대화했습니다.
사실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돌아갈 때 하나님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더 쉬운 것은 더욱 아닙니다.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는데, 이중 이방인 한 명만이 이를 기억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했을 뿐입니다. “나머지 아홉은 다 어디 갔느냐?” 예수님의 섭섭함이 담긴 말씀입니다. ‘노아’는 이들 아홉 명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방주를 박차고 나와 멋대로 인생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회개와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도 기억했습니다.
젊은 청중들을 향해서 <전도서>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젊음의 특징은 말보다 행동입니다. 필자의 두 아들만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합니다. 아직도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바쁜 일들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새벽 기도나 수요 기도회에 나오는 성도들도 주로 장년 이후에 접어든 분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야말로 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입니다: “칼을 면한 자들이여 서지 말라 행하라 원방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렘 51:50). 지금 이 메시지를 듣고 있는 백성들은 그럴만한 처지가 아닙니다. 그들의 성전과 종교와 문화와 전통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혀 낯선 곳에서 이방인들 사이에서 삼류 시민으로 지치고 힘든 삶을 유지해 가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들이 지금 이 때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레미야’의 대답은 바로 그런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기억해야 할 때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나’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가 물고기 배속에서 지난날을 어떻게 회고하고 있는지 귀담아 들어봅시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 2:7).
나의 인생 역시 양초처럼 매일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이미 그 모든 시간을 다 써버려 더 이상 쓸 것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자나 약한 자나,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어린 아니나 노인이나, 바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억할 가장 적기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언약. 세상을 멸망시킨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 한 사람만을 보존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담’ 이후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세상, 즉 반 창조의 절정에 와있는 옛 창조를 뒤로하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홍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노아’는 이제 새 언약의 계승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이 언약에 대해서 언급하셨고, 홍수 이후에도 그 언약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언약이라는 단어는 홍수 이야기에 이르러 마치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나 또는 폭죽처럼 일시에 네 군데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6:17-22; 8:20-22; 9:1-7; 9:8-17). 이들 구절들을 근거로 ‘노아’의 계약에서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특성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노아’와의 언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창조의 언약”(또는 시작의 언약)과 “구속의 언약”을 토대로 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창세기> 1장에서 등장하던 단어나 표현들이 이곳에서 그대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새들...짐승...기는 것”(1:24, 25, 30 및 6:20; 8:17); “생육하고 번성하라”(1:28 및 9:1-7).
특히 “땅을 정복하라”는 문화명령(1:28) 역시 ‘노아’의 언약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9:1-7).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이 타락으로 인하여 다른 피조물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9:2).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가 분리와 분열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인간과 짐승들과의 이런 부자연스러운 관계는 필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정복자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피조세계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이러한 위치는 자연스럽게 구원에 대한 전망을 확대시켜주고 있습니다. 즉 구원받은 인간은 그의 구원을 단순히 영혼 구원의 차원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정반대로 사회․문화적 존재로서 전 삶의 양식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노아’의 언약을 통해서 온 가족을 다루고 계십니다. 가족 중 한 개인의 의로움이 전 가족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8)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셋째, ‘노아’와의 언약은 보존의 언약입니다. ‘노아’가 제사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1-22).
특히 이 조항은 언약의 범위와 영역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완성의 날까지 전 우주는 현재의 질서와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가 저주나 심판으로 치료되지 않음을 아십니다. 그분께서 이 사실을 모르셨기 때문에 이 방법을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홍수 이전에도 인간의 마음 상태를 분명히 아셨고, 심판의 한계를 분명히 아셨습니다(6:5-7).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은, 종말의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비웃는 자들을 향한 강력한 논박의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벧후 3:4-6).
인간을 보존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는 다음 구절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 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9:3-6).
모든 생명이 다 성스럽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의 생명이 가장 그러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그 모든 생명을 먹어도 됩니다(9:3). 그러나 피로 상징되는 생명의 원칙은 분명히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9:4). 참고, 레 17:10-14.
넷째, ‘노아’와의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그 많은 타락한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은 유독 ‘노아’와 그 가족에게만 은혜를 보이셨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며, 흠이 없으며,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치켜세우고 있지만(6:9), 이 모든 칭찬이 ‘노아’ 스스로의 행위나 인격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수차례 다룬바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습니다.
4. 종말
전 세계적으로 무려 200여 가지에 달하는 홍수 이야기가 알려져 있고, <성경>도 이에 대해서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 시대에 지구를 멸망시킨 대홍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 들을 때도 ‘베드로’ 사도가 예측한 대로 애써 외면하려 듭니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사실 우리가 특정 광신도 집단에 속한 자가 아니라면,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바 인류와 역사의 종말의 날은 올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그럴듯한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1999년도 초에 일본열도는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한바탕 소동을 치른 바 있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의하면 그 해 7월에 세상의 종말이 오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세상의 종말의 시기에 대해서 예언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특히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만큼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고, 특히 일본 사람들의 반응은 상식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1999년 7월 5日字 「TIME」는 이에 대한 내용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두 세기에 들어서 만도 크게 일곱 번에 걸친 종말의 예언이 있었고,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1) ‘윌리암 밀러’-미국의 복음 전도사로 그를 따르는 5만 명의 추종자들에게 예수의 재림을 1843년으로 예언했다가 일어나지 않자 그의 계산이 잘못됐다며 1844년 10/22로 수정했음; (2) 문선명-하나님의 나라가 1967년에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음; (3) ‘짐 존스’-종말 예언으로 1978년 900여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구아나 존스타운에서 집단 자살함; (4) ‘모세 다윗’ -‘아마게돈’ 전쟁이 1986년에 ‘러시아’가 미국을 패배시키고 공산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함; (5) ‘다윗 코레쉬’-전직 록 가수로서 ‘아마게돈’ 전쟁이 텍사스 주 아코에 있는 그의 “종말의 목장”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함.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곳에서 1993년 정부 군대와 총격전 끝에 모두 종말을 맞이했음; (6) ‘마샬 에플화이트’-1997년이 세상의 종말의 해이고 자신들만이 택한 자들로서(Heaven's Gate), 그 길은 오직 자살을 통해서 외계로 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함; (7) ‘첸 헹민’-대만 출신 목사. 1998년 3/18 TV 화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종말 직전에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함. 우리나라에도 그 유명한 “다미선교회”가 있어 온 나라를 휘젓고 다닌 바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정말 사람들은 과학적이고도 역사적인 증거가 없거나 부족해서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받아들입니다. 종말을 부인하는 자들도 종말이 이유 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 죄와 타락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구속받기도 싫습니다. 두렵거나 귀찮은 것이나 또는 더러운 것은 될 수 있는 한 멀리 두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에릭 포름’은 「존재와 소유」에서 참된 행복과 거짓 행복의 차이는 그 대가를 언제 지불하는가에 있다고 말합니다. ‘스콧 펙’ 박사도「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어린아이를 훈련시키는 방법으로 고통스러운 일을 먼저 하도록 훈련시키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결정은 나중에 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는 정반대의 경향을 보입니다. 즉 맛있는 것은 끝까지 남겨두었다가 가장 나중에 먹기 때문입니다. 가장 맛있는 것을 가장 나중에 먹는 쾌감과 행복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종말을 대비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나중에 돈 벌어서 하겠다든지, 늙어서 하겠다든지, 졸업하고 난 뒤에 하겠다든지, 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하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 8:21). 이 제자는 일의 경중과 완급을 모르는 자인 듯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1-22).
예수님께서 종말은 어느 날 홀연히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종말에 무슨 특별한 징조나 징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며, 자신의 일로 분주하게 살아가느라고 종말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던 바로 그러한 때에 종말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대비하는 가장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뒤로 미루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이점을 철저하게 경험한바 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일 세대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빼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무려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노아’가 방주를 건설하는 것을 보도록 인내하셨고, ‘노아’와 모든 짐승들이 방주로 다 들어가고 난 뒤로도 일주일동안이나 방주 문을 열어두셨습니다. 그 숨 막히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습니다. 방주가 무엇에 쓰려고 하는 것인지 몰랐거나 또는 알았다 하드라도 그 문이 영원히 열려있을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문을 닫으셨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슨 일로 바쁩니까? 그렇게 바쁜 나에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눅 17:27). 그러나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참고, 요 3:17).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이 중대한 초청, 결코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지 증거가 아닙니다!
토의 문제
1. <노아 이야기> 속에는 과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질문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적어보고, 나름대로의 답변들을 마련해 봅시다.
(1) 과학적 질문
(2) 문학적 질문
2. <노아 이야기>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노아 이야기>의 신학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3. <노아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을 세 단계에 걸쳐서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도 그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각 단계의 이야기의 핵심과 주제를 파악해 봅시다.
4. <노아 이야기>의 뛰어난 문학적인 특징에 대해서 서너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예를 들어 교차대구적인 구조나 문학적인 상수들의 반복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5. 방주는 왜 필요했습니까? 그 배경과 동기,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방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6. 홍수의 전체적인 일정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시작과 진행과 결말 등과 관련해서 전체적인 구조 분석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7. <노아 이야기>는 아름답고도 희망에 찬 해피엔딩 입니다. 그것은 ‘노아’의 새 언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이며, 이것이 ‘아담’의 옛 언약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8. <노아 이야기>의 대미(大尾)의 핵심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앞의 세 번의 ‘톨레돗’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구성의 일관된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데, 어떤 면에 있어 그러한지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