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1과
벧엘에서
김태정 목사창세기 28:10-22약 53분 분량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28:16)
<야곱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는 주인공 ‘야곱’의 생애에서 처음이자 가장 의미 깊은 한 사건, “하나님과의 만남”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만남은 역사나, 이야기나, 연구나 묵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을 통해서 이루어진 만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그 자체로서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되어버린 한 사건입니다. 그동안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나 가족의 전승 속에 남아있는 삼인칭의 타자(他者)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거나 무관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형과 아버지를 속여 형에게 돌아갈 그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아버릴 정도로 관심과 욕심이 대단했습니다. 추측컨대, 어쩌면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은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존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이처럼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은, 자신이 원했거나 찾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그리고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장소에서 그렇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 역사적인 만남에서 소위 “깨어남” 즉 “거듭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깨어나서, 예배와 기도로 나아갑니다. 기도는 서원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적어도 신학적으로 볼 때 본문 에피소드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방식을 통해서 본문이 <야곱 이야기> 뿐만 아니라 <족장 이야기> 내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더불어 ‘야곱’의 예배와 기도는 어떤 역할 모델을 제공해 주려는 것입니까? 단순히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모든 영적 후손에게 해당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두 질문이 <야곱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야곱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는 그 시작과 끝이 비교적 명확합니다. ‘야곱’의 여정을 요약하고 있는 10절을 이야기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데, 내용 상 전후의 이야기들과(27, 29장)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말은 주인공의 서원을 다루고 있는 20-22절로서, 서원에 담긴 내용 역시 지나간 이야기에 대한 회고와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한 전망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의 단락 구분과 관련해서, 에피소드가 단 하루 밤의 꿈과 이튿날 아침의 행동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두 개의 장면으로 나눌 수도 있겠으나(10-17절; 18-22절), 하나의 긴 장면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더 나아 보입니다. 또는 주인공 ‘야곱’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마다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본문을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10-15절‘야곱’의 체험
(2) 16-17절‘야곱’의 반응
(3) 18-22절‘야곱’의 서원
더 나아가 <창세기> 특유의 구조나 구성을 놓칠 수 없는데, 다름 아닌 동심원적(同心圓的) 교차대구(交叉對句)나 유사반복(類似反復)의 형식이 그것입니다. 우선 동심원적(同心圓的) 구조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핵심어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A) “한 곳”(11절)
(B) “돌을 가져 베개로 삼고”(11절)
(C) “하늘”(12절)
(D) “하나님”(12절)
(E) “야훼”(13절)
(E) “야훼”(16절)
(D) “하나님”(17절)
(C) “하늘”(17절)
(B)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18절)
(A) “그 곳”(19절)
그리고 시적 유사반복(類似反復)의 형식 또한 발견할 수 있는데, 전체 이야기는 마치 두 개의 행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특히 ‘야곱’의 서원은(20-22절)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약속(13-15절)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내용을 둘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본문은 그 구성에 있어 하나의 이야기로서 손색이 없지만, 그 내용에 있어 여전히 전후의 이야기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브엘세바’(10절)는 직전의 에피소드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고(26:23-28:5), 그가 떠나가는 곳 ‘하란’은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주요 무대가 될 것입니다(29:4-31:54). 그리고 ‘벧엘’에서 ‘야곱’이 꾼 꿈도(11절) 멀리는 ‘아브라함’이 보았던 환상에서부터(15:12-21) 앞으로 그가 ‘브니엘’에서 체험하게 될 또 한 번의 환상(꿈)(32:13-32)과 비교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꿈의 내용(13-14절) 또한 <아브라함 이야기> 벽두에서부터 반복되어 왔던 하나님의 언약 바로 그것이며(12:3; 13:14-16),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가 듣게 될 것이기도 합니다(32:10-13; 35:11-12). 그리고 현재 ‘야곱’에게만 국한된 약속, 즉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겠고 그가 다시 이 땅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약속도(15절), 이후 이어지는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거듭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31:3, 5, 42; 32:12; 35:3). ‘야곱’이 서원의 제단을 쌓는 이야기(18-22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31:13; 35:1-7). <야곱 순환>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벧엘’에서 하나님과의 첫 대면은 그가 ‘하란’으로부터 귀향하면서 겪게 될 두 번째 대면과(32:1-2)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본문의 자료와 관련해서 전통적인 입장은 <야훼 자료>와 <엘로힘 자료>가 혼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 따르면 전자(前者)에 속하는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과 ‘벧엘’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내용들이며(13-16절, 19절상), 후자에 속하는 본문은 꿈이나 돌 제단을 세우는 내용, 및 ‘야곱’의 서원 등을 포함하고 있는 것들입니다(11-12절, 17-18절, 20-21절상, 22절).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비교적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부 구절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전승에 대한 후대 편집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어 모호함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예: 10절, 19절상, 21절하).
두 자료가 섞여 있는 방식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엘로힘 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고, <야훼 자료>가 13-16절 및 19절 등에 일부 보충되어 있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두 자료의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역시 일련의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상수(常數)들일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이름, 즉 ‘야훼’와 ‘엘로힘’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가장 확실한 증거로 꼽을 수있을 것입니다: ‘야훼’(13, 16, 21절); ‘엘로힘’(12, 17, 20, 21, 22절). 그리고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대해서도 두 가지 상이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한 번은 “하나님의 천사”로 표현하는가 하면(12절) 다른 곳에서는 “야훼께서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절).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그곳을 거룩한 장소로 묘사하면서도 두 번에 걸쳐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도(16, 17절) 두 자료가 섞여 있을 가능성을 지지해 주는 증거로 삼을 만합니다. 두 자료가 섞여 있을 가능성은 이야기의 결말에 관한 분석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야기는 원인론적 서술, 즉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그 장소를 옛 이름 ‘루스’ 대신에 새로운 이름 ‘벧엘’로 지칭하면서 끝나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어지는 내용 즉 ‘야곱’의 서원은(20-22절) 사족처럼 느껴질 뿐 아니라, 이미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이전 약속과도(13-15절)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본문의 자료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같은 역사비평 진영 내에서도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학자들은 본문이 처음부터 하나의 이야기였으며, 다만 후대에 적어도 두 번에 걸친 확대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즉 이야기의 원 핵심 부분은 소위 “이스라엘 이전 사료”로서 11-12절, 16-19절 등이 이에 속하고, 이후에 <야훼 기자>에 의하여 15절의 내용이 추가되고, 다시 제 삼의 편집 작업으로 13-14절, 20-22절 등을 포함하는 내용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입니다(Westermann). 또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13-15절의 내용도 소위 <원 사료>에 추가된 것으로서, <족장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 고리를 마련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Rendorf; Blum). 이들에 따르면, 사족처럼 보이는 부분 20-22절은 원래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자료로서 이 역시 십일조와 관련한 서원의 한 형태(22절하)를 보다 확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본문의 자료나 역사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 견해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분명치가 않아 보입니다. 종합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결국 하나의 단순한 결론 즉 <엘로힘 전승>을 바탕으로 <야훼 전승>이 보충적으로 삽입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크게 새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결국 이야기의 최종 편집자는 <창세기>의 다른 주요 이야기에서처럼 ‘야훼’ 기자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화자의 주요 관심사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13-15절)에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인간의 대응 즉 “서원”에 대해서도(20-22절)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요소는 결국 가장 초기 형태의 <족장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두 축이 되었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De Pury).
신학과 신앙
1. 하나님: 현현(10-15절)
화자는 본문의 첫 두 단락을 서술하면서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야곱’의 여행과 꿈을 소개하고 있으나, 두 번째 단락에서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의 말과 행동을 보다 주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지극히 간단한 진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10절)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두 지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는 것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이미 등장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 이후 지금까지 이들 가족의 터전이었습니다(22:19; 26:23, 33). ‘이삭’은 ‘야곱’으로 하여금 ‘밧단-아람’으로 떠나라고 했으며(28:2, 5), 한편 ‘리브가’는 ‘하란’으로 떠나라고 했습니다(27:43). 다만 ‘밧단-아람’과 ‘하란’은 같은 지역임이 분명한대도, 이곳에서 ‘하란’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측컨대 화자는 ‘하란’을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름으로 부각시키고 싶은 듯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위대한 약속을 처음으로 천명하셨으며(11:31-12:5), 이제 ‘하란’에서 ‘야곱’에게 동일한 약속을 재천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화자의 관심사는 ‘하란’에 누가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야곱’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아니라(참고, 28:2), ‘야곱’이 ‘하란’에 당도하기 전에 과연 누구를 만날 것인가 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하란’까지의 여행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그곳까지 이르는 거리가 장장 구백 여 킬로미터에, 낙타로 쉬지 않고 간다 해도 두어 달은 족히 걸릴 여행길입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을 여행에 대해서 화자는 단 하나의 장면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느 한 장소에서 단 하루 밤 동안에 일어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11절)
이 장면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예사롭지 않습니다. 대개 여행객이 밤을 만나면 인근에 있는 사람들 집에 들어가 하루 밤 묵기를 청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입니다(19:1-3; 삿 19:11-21). 그러나 야곱의 지금 형편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인가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한 장소에서 돌을 베개 삼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잠을 청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야곱’이 의도적으로 찾아온 곳이 아니라, 그냥 하루 여행의 끝에 우연히 이르게 된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어 있습니다: “한 곳에 이르러.” 그래서인지 세 번씩이나 이 “장소”(םוקמ, 마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지명을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 번 모두 “그 장소”(םוקמה, 하마콤)라고 반복 언급함으로써 이곳이 단순히 광야의 한 장소가 아니라, 특별한 바로 “그 장소”, 즉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소는 19절에서 그 이름이 마침내 드러날 때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16, 17, 19절) 계속해서 “그곳”이라는 익명으로만 통용될 것입니다. 이점은 ‘야곱’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각별한 이름으로 그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가 꾼 꿈 때문입니다:
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12-13절상)
이 장면에 이르러, ‘야곱’에 관한 화자의 객관적 진술이 갑자기 ‘야곱’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담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마치 화자 자신이 ‘야곱’ 속으로 들어가 꿈을 꾸고 있는 듯합니다. <성경>에서 꿈은 항상 꿈꾸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31:10; 41:1-7.
이 꿈은 세 가지 요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는 사닥다리; 둘째,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자들; 셋째, 야훼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모두 해석상의 난점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부연 설명이 필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우선 “사닥다리”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 단어 ‘술람’(םלס)의 의미가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 말 성경은 물론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도(NIV 제외) 이 단어를 “사닥다리”(ladd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학자들은 “계단”(stairway) 내지는 “승강 계단”(ramp) 등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Hamilton). 모든 천사들이 동시에 한 방향으로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한 것이 아니라면, 사닥다리보다는 계단이 훨씬 더 나은 통행 수단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에 대한 의문 제기는 언어학적 차원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해야겠습니다. 혹자는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단어가 ‘이집트’나 ‘바벨론’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술람’이 계단을 의미한다면, 이 계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구랏’(ziggurat)의 계단을 연상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이들 제국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성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문헌과의 단순 비교는 어려운 것이,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천사나 신적 존재가 이들 계단을 통해서 하강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닥다리”가 하늘까지 닿아있다는 언급은 <바벨탑 이야기>를 연상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당시 사람들 역시 하늘까지 이르기 위하여 그 탑을 쌓았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11:4). 그러나 두 이야기의 상호 연관성은 여기까지입니다. ‘바벨’ 탑과는 달리 이 사닥다리는 인간 업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한 한 수단이자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통로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일 뿐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술람’의 정확한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하늘과 땅”에 동시에 닿아 있으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통로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분주하게 왕래하고 있는 천사들의 역할에 대해서 한 학자는 흥미로운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대개 <구약>에서 천사들은 민족이나 국가를 보호하거나 온 땅을 돌아보거나 하는 등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욥 1:6; 2:1; 슥 1:8-17; 신 32:8). 이에 따라 지금 계단을 오르고 있는 천사들은 ‘야곱’이 떠나온 고향 땅을 보살피고 있는 중이며, 내려오고 있는 천사들은 그가 가고 있는 동방 땅을 살피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야곱’이 꿈을 통해서 보고 있는 이 환상은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해석이 나름대로 흥미를 끄는 것은, 이제 곧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예고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15절).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주인공이 밤중에 본 환상은(15:11-12) 이어지는 신탁(15:13-16)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
하여튼 지금 무대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많은 분주한 움직임들입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동방을 향하고 있고, 천사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으며, ‘야곱’은 또한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장소에 “이르고”(עגפ, 파가) 있는가 하면, 그의 꿈속에서는 한 계단이 하늘에 “이르고”(עגנ, 나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언어의 유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의 꿈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세 번째 질문은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라는 표현입니다. 특히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그 위에”(ןילע, 알라우)라는 표현으로서, 지금 하나님께서 “사닥다리 위에” 서 계신다는 것인지, 아니면 “‘야곱’ 곁에(또는 위에)” 서 계신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두 입장 모두 지지를 받고 있으며, 각 진영마다 나름대로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대명사 어미와 “~위에” 또는 “~곁에”를 뜻하는 전치사 ‘알’(לע)의 합성어로서, 대명사가 지칭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또는 무엇)인가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에서도 다음에서 보듯이 두 가지 용례가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1) 前者의 의미: 출 17:9; 33:21; 34:2; 삼하 18:17; (2) 後者의 의미: 출 7:15; 민 23:6, 17; 삼상 19:20; 22:9). 이처럼 한 단어가 이중적으로 사용될 수 있거나 또는 불분명하여 문법적이거나 어원론적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 주장은 결국 나름대로의 논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Wenham은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前者가 되어야 하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환상을 보고 있는 주체가 ‘야곱’ 자신인 만큼,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라는 표현 중에서 “그”는 마땅히 자기가 아닌 사닥다리를 지칭하는 것이라야 한다. 굳이 자신을 지칭하려 했다면 “여호와께서 내 위에(또는 곁에) 서서”라고 했어야만 마땅하다(참고. 40:9); (2)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께 보고하는 것으로서, 구약의 다른 예들을 통해서 보드라도(왕상 22:19-22; 욥 1:6-8; 2:1-3; 슥 1:10) 지극히 익숙한 장면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사닥다리의 가장 위에 서 계시는 모습 즉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하늘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은 전체 환상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이기도 하다(Wenham, 222쪽). 한편 Hamilton은 동일한 표현이 다른 곳에서 後者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위에) 나타나시니라...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위에) 섰는지라(창 18:1,2); (2)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위에) 섰다가(창 24:13); (3) 내가 이 우물곁에(위에) 섰다가(24:43상); (4) 사무엘이 그들의(위에) 수령으로 선 것을(삼상 19:20상). 이들 표현들은 모두 “~위에”로 번역하기보다는 “~곁에”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닥다리 곁에 서서”보다는 “하나님께서 ‘야곱’ 곁에 서서”라고 해석함이 마땅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야곱’을 향한 약속입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고 있으며, 어떤 약속을 주고 있습니까? 우선 그분이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13절중)
이런 표현은 <구약>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이와 유사한 호칭으로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들 수 있고(26:24), “네 열조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출 3:15, 16) 등이 있기는 합니다. <출애굽>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 호칭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들은 것으로서, 이 하나님은 다름 아닌 이전에 그들의 조상에게 알려진 바로 그 하나님 ‘야훼’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에게 알려지고 있는 이 호칭은 보다 직접적이며 친밀한 것으로서,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의 언약”을 회고함과 동시에 재확인시켜주면서, 이들 조상들에게 약속한 언약과 축복이 ‘야곱’에게도 전수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과연 그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약속은 <족장 이야기>의 벽두에 ‘아브라함’이 들었던 바로 그 약속(13:14-16)과 너무나 흡사한 것입니다. 아래에서 보듯이 두 언약의 병행관계가 이처럼 분명할 수 없습니다:
28:13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3: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28: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13:16내가 제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28:14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13:14네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물론 “아브라함 언약”에는 땅에 관한 약속과 관련하여 다른 언급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12:7; 15:18; 17:8; 24:7), 위의 두 본문처럼(28:13-14; 13:14-16) 서로 밀접하게 병행을 이루고 있는 곳도 없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들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28:14하)는 표현도 “아브라함 언약”(12:3)을 인용하면서, 동시에 “네 자손”에 관한 언급을 추가로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손에 관한 이런 언급은 <아브라함 이야기> 후반에서도 한 두 차례 등장한 바 있어(22:18; 26:4), 이 또한 두 언약 사이의 상호관계를 더욱 보강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바는, 지금 그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야곱’이 그 약속의 계열을 잇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언약 사이의 이런 연속성은 그 내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경 또한 그러합니다. 두 언약 모두 ‘벧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기만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란’으로부터 이곳에 정착하면서 언약을 받았는가 하면, 이제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 ‘하란’으로 가는 도중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언약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Hamilton은 두 언약을 비교하면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지금 하나님은 ‘야곱’의 지난 행적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합니다. 아버지나 형을 속인 것에 대해서 일체의 비난도 정죄도 없으며 있다면 무조건적인 약속과 축복뿐입니다. 바로 이점이 ‘야곱’을 ‘아브라함’이나 ‘이삭’에 이은 족장의 반열에 속하게 하는 연결 고리라는 점입니다. 그의 두 선조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는 등 비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속임을 당한 이웃이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인한 대가를 치러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들 족장에 대한 하나님의 지나치다싶을 정도의 관대함은 그분이 ‘아담’과 ‘하와’나, ‘가인’이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나, ‘바벨’ 탑을 건설하던 무리들에게 보였던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Hamilton, 242-243쪽).
굳이 두 언약의 차별성을 끄집어 내 본다면, ‘야곱’의 언약이 더욱 극적으로 돋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후손에 관한 약속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은 당시 자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결혼은 한 상태였지만, 지금 ‘야곱’은 아직 미혼일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처지라 후손에 관한 이 약속은 실현 여부는 고사하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약속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야곱’의 최대 관심사는 먼 미래가 아니라, 과연 수 일 내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야곱’의 고민에 부응이라도 하듯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내가)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하신지라(15절)
하나님의 다짐과 약속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조를 위하여 모든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를 각기 괄호와 밑줄로 표기해 보았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여섯 번에 걸쳐 주어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때마다 유일한 목적어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아니라 ‘야곱’ 자신입니다. 화자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소 애매하고 비현실적으로만 들리던 약속이(13-14절) 이곳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가까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약속이야말로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바가 아니었을까요?
이 약속의 핵심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데 있으며, <야곱 순환>을 특징짓는 상투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참고, 28:20; 31:3; 46:4). 만일 ‘야곱’이 다시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는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해야 할 것이며, 그가 이 땅에 돌아오고 난 뒤에도 그 약속은 유효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야곱’은 그 땅을 뒤로하고 “떠나고”(בזע, 아자브)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떠나지”(בזע, 아자브) 않을 것입니다.
2. 야곱: 반응(16-17절)
‘야곱’은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반응은 어떤 것입니까? Wenham은 ‘야곱’이 두 번에 걸쳐 깨어나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Wenham, 223쪽.
그 첫 번째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16야곱이 잠에서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6-17절)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이 두려움일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과 무가치함을 처음으로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창 3:10; 출 3:6; 20:15; 삿 6:23; 13:22). 두려움은 곧바로 수치심으로 연결됩니다. 무지(無知)에 대한 수치심입니다. ‘브엘세바’가 아니라, 이름도 알 수 없는 이 “장소”(םוקמ, 마콤)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처럼 미미했다는 데에 대한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 때 그 자신도 아버지 ‘이삭’에게 큰 충격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속은 후 다음과 같이 절규한 바 있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내 앞에 앉았던 자가 ‘야곱’이었단 말인가? 내가 그것을 몰랐다니!” 그러나 이제는 ‘야곱’ 자신이 같은 절규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삼손’처럼 하나님께서 늘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억측과 착각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삿 16:20). 전자의 경우를 하나님에 대한 무지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에 대한 독단과 독선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그 폐해가 자신에게 국한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타인에게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하고 사악하기조차 합니다. 무지와 독선은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힘만 믿고 좌충우돌하던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가 두 눈이 뽑히는 치욕과 고통을 당한 후 비로소 영적인 눈이 밝아졌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야곱’의 깨달음은 그야말로 행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삼행시(三行詩)와도 같은 17절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그는 자신이 놀랐다고 말하는 대신 “그 장소가 두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의 두려움을 촉발시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장소”(םוקמה, 하마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םיהלא תיב, 바이트 엘로힘)은 이제 곧 ‘야곱’이 그 장소에 대해서 붙여줄(19절) 새로운 이름 ‘벧엘’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한 장소가 비로소 바로 “그 장소”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문”은 <구약> 전체에서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하늘(또는 하늘나라)에 이르는 통로가 여럿 있다는 사상은 고대 근동에 널리 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등장하는 ‘바벨’ 역시 이런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3. 야곱: 서원(18-22절)
‘삼손’은 영적 대 각성 이후 ‘블레셋’ 사람들의 성전 기둥을 무너뜨림으로써,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비장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한편 ‘야곱’은 베고 누워 자던 돌에 기름을 부어 거룩한 “기둥”(הבצמ. 맛체바)을 세움으로써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18절)
<구약>에서 돌은 때로 죽은 자를 위한 기념비가 되기도 하고(35:20, 삼하 18:18), 조약의 증거가 되기도 했습니다(31:45, 51). 또 한편 돌기둥은 ‘가나안’ 종교의 상징물로서 ‘이스라엘’이 멀리해야 할 것이기도 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신 16:21-22; 참고, 출 23:24; 34:13; 왕상 14:23). 그렇다면 ‘야곱’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가 세운 돌기둥은 단순히 하나의 기념물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예배와 제사에 필요했던 하나의 기구였을까? 두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만, ‘야곱’의 행동과 말을 근거로 판단해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즉 그는 그 돌 위에 기름을 붓는가 하면, 그 돌을 가리켜 “하나님의 집”으로 부르면서 서원의 맹세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은 제사에 드리는 기구들을 거룩하게 구별할 때 이와 유사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출 40:9-13; 레 8:10-12; 민 7:1). 그들에게 제사 기구들은 단순한 기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대변해 주는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주전 8 세기경에 이루어진 <Sefire 조약>의 비문에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성별된 돌은 때로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의 집으로 간주되기도 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비블로스’의 ‘필로’는 이런 유의 돌들을 가리켜 ‘바이틸리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단어는 ‘아람’어 ‘베델’에 대한 ‘그리스’ 음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이 세운 돌기둥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聖物)이었습니다.
이처럼 후대 ‘이스라엘’에서 금기시 되었던 행동이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후대 화자의 의도적인 기록일까? 아니면 <벧엘 에피소드>가 족장 시대부터 전해오던 아주 오래된 기록이라는 증거일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야곱 이야기>의 화자는 주인공 ‘야곱’이 돌기둥을 세우는 장면을 수차례 소개하고 있는데, 그의 행동에 대한 비난이나 판단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족장 이야기>의 전승이 아주 오래된 것임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사실 ‘벧엘’은 ‘여로보암’의 반역 이후에 ‘가나안’ 식 제사의 중심이 되었던 터라, 이 장소를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구별하고 있는 ‘야곱’의 행동은 후대 화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야곱’이 꿈에서 깨어나 취했던 행동을 재구성해보자면, 그는 우선 돌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기름(ןמשׁ, 셰멘)을 부었으며, 그 장소에 새로운 이름(םשׁ, 솀)을 붙여줍니다: ‘벧엘’.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19절)
이제 처음으로 이곳이 무명의 장소가 아니라 이전부터 ‘루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루스’는 “호두나무(nut)”, “아몬드”(almond), 또는 “헤즐넛”(hazelnut) 등을 의미합니다. 아마 처음에는 이 장소가 “Laoz, Loz”로 불렸을 것이나 이후 “도피처”를 의미하는 ‘Luz’로 발음되었을 것인데, 현재 ‘야곱’의 도피 여행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합니다(Hamilton).
그것도 ‘야곱’이 아니라 화자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벧엘’이라는 이름이 두 번씩이나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화자는 두 이야기에서 모두 연대기를 고려함이 없이 나중에 바뀐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Hamilton이 관찰하고 있는 바처럼, 이 에피소드는 많은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베개로 사용한 돌이 예배를 위한 돌기둥이 되었고, 이름 없는 “한 장소”((םוקמ, 마콤)가 ‘벧엘’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집”을 떠나 도망가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집”으로 피신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변화는 또 있습니다. ‘루스’가 ‘벧엘’이 된 것처럼 ‘야곱’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될 것이며, ‘벧엘’의 ‘엘’(가나안의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더 극적인 변화가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즉 예배를 위해서 돌기둥을 세우는 ‘야곱’의 행위는 훗날 그의 후손들이 피해야 할 금기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지금 ‘야곱’에게 더없이 거룩한 장소로 기념되어야 할 ‘벧엘’ 또한 파괴되어 마땅한 “우상의 신전”이 되어버립니다. 바로 이곳에서 ‘여로보암 1세’가 ‘예루살렘’ 예배에 대항하는 자기 식의 제사를 드렸습니다(왕상 12:26-33). 그가 예배를 위하여 세운 제단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왕상 13:1-5). 이곳에서 드렸던 우상 숭배에 가까운 제사는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비난이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암 3:14; 4:4; 5:5-6; 7:13; 호 4:15; 5:8; 10:5). ‘호세아’는 ‘벧엘’을 가리켜 ‘벧아벤’ 즉 “사악한 집/무의 집” 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결국 ‘벧엘’의 제단은 ‘요시아’의 개혁 시에 파괴되고 맙니다(왕하 23:15).
‘야곱’의 보다 깊은 깨달음 즉 두 번째 “깨어남”은 영적인 차원에 있는 듯합니다. 그는 서원(誓願)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0-22절)
이 서원은 <야곱 순환>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 ‘야곱’ 생애의 전환점마다 거듭 등장하고 있습니다(31:13; 35:1-3, 7). 고대근동에서 꿈은 항상 하나님의 메시지, 즉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수반하는 것이 상례인데, 13-15절의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서원은 이 꿈에 대한 해석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 중에서 먼 장래의 일에 대한 부분(13-14절)은 무시하고 지금 당장의 처지와 관련된 부분(15절)만을 가지고 자신의 서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그리고 “무사히 귀환하는 일” 등일 것입니다.
구약에서 통상 서원은 위기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성소(聖所)에서 기도와 함께 드리게 되는데, 나중에 기도가 응답받았을 때 그 성소에서 서원을 실천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본문이나(28장) <야곱 순환>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야곱’의 일생은 항상 서원을 할 수밖에 없는 최적의 상황에 노정(露呈)되어 있음을 봅니다. 지금의 상황 역시 극도의 위기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한 장소에서 불안과 고독과 두려움으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다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고, 여행 내내 그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밖의 약속을 듣게 됩니다. ‘야곱’으로서는 서원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원은 그 형식에 있어 일종의 조건부 약속입니다. ‘야곱’이 조건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서원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거듭 밝히지만 ‘야곱’이 조건부로 드리고 있는 서원은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정도입니다. 다만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추가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즉 ‘야곱’의 서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해서 ‘야곱’의 서원은 불필요한 반복으로서, 그 전승이 다른데서 온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참고, 눅 11:5-13).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놓고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21절에 대한 구문론적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20-22절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해지며, 조건의 범위와 내용 또한 달라집니다. 두 본문의 결정적인 차이가 어디서 나타나고 있는지 파악해 보시기 바랍니다: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0-22절)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며,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면,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0-22절)
참고로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첫 번째 본문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Hamilton은 문법적이고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 후자의 번역을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Hamilton, 247-249쪽.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서원을 담고 있는 22절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의 서원은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가 야훼를 경배할 것이며; (2) 이 장소를 거룩한 곳으로 삼을 것이며; (3) 십일조를 바칠 것임.
마지막으로 서원과 관련해서 특별히 의미심장한 것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삼인칭이 아닌 이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십일조는 ‘아브라함’이나 ‘멜기세댁’의 경우처럼 ‘야곱’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징표가 될 것이며, 그 역시 이점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던 곳이 남쪽 유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었다면(14장), ‘야곱’이 십일조의 헌신을 하고 있는 장소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중심 ‘벧엘’입니다(28장). ‘야훼’를 하나님으로 삼고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헌신 서약을 통해서 ‘야곱’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전형을 따름으로써 후대 ‘이스라엘’ 모두가 따라야 할 신앙의 패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남쪽 ‘유대’ 왕국에 속해 있든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속해 있든 상관없습니다.
교훈과 적용
1. 루스: 위기와 기회
최근 한미 양국 간에 체결된 자유무역 협정에 대해서 찬반양론이 비등합니다만, 각자가 처한 여건에 따라 대하는 자세나 각오가 다른 듯합니다. 제약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조업 분야에서는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로서 이를 기회로 삼아 더욱 넓은 “푸른 대양”(blue ocean)으로 나가야 한다는 각오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반면 농업이나 목축업 분야에서는 이 협정을 매국으로까지 규정하면서 거세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육이나 의료 분야는 이번 협상에서 제외된 탓에 조용하게 넘어갔지만, 만일 포함되었더라면 지금쯤 온 나라는 벌집 쑤셔놓은 듯했을 것입니다.
제약업계나 농수산업계 그리고 의료 및 교육계가 이처럼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글로벌 경쟁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제약의 경우 미국 최대 제약회사 ‘화이자’(Pfizer)의 2006년도 한 해 매출은 483억 달러, 연구 개발비는 76억 달러였습니다. 반면 국내 250개 제약업체 매출은 모두 합쳐 10조 원쯤으로 ‘화이자’의 사분의 일도 못되었습니다. 연구 개발비는 몇십분의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마당에 20년이던 신약 특허기간이 최대 25년으로 늘어나고, 미국의 신약을 복사한 개량 신약이나 복제 약을 만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예상대로라면 앞으로 국내 제약업체의 10분의 1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합니다.
교육 분야로 눈을 돌려보아도 형편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국민이 자녀 교육에 쓰는 돈은 국가 예산과 학부모가 쓰는 돈을 모두 합쳐 80조원이 된다고 합니다. 이중 국가 예산이 30조원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학부모 개인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서, 학원•과외비로 20조원, 해외유학 연수비로 10조원, 그리고 학교교육에 20조원입니다. 미국에 유학 중인 한국 유학생이 2006년 현재 약 10만 명으로서 인도와 중국 유학생을 앞지른 세계 1위 유학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그냥 두어도 미국에 찾아와 돈을 쏟고 가는 학생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한국 내에 분교를 설치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의료분야는 어떻습니까? 공공 보험 위주의 한국 의료 시장도 진료비가 싸게 묶여 있어 미국 병원들에게는 큰 매력이 없습니다. 싱가포르의 경우 그 나라를 찾는 외국인 환자가 한 해 37만 명으로서 그들이 쓰는 돈이 9억 달러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5천만 달러 안팎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형편이 이러하니 지금도 자식 공부시키러 외국에 보내고,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하여 이웃 동남아나 미국의 병원으로 떠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미 FTA 타결로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는 농업 분야는 어떻습니까? 과거 김영삼•김대중 정부도 1992년 우루과이라운드(UR) 체결 이후 농업시장 개방이 있을 때마다 거액의 지원 대책을 내놓아 지금까지 총 130조원을 농어촌에 쏟아 부었는데도 여전히 피폐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다시 반복해야 할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왜 이들 분야가 이처럼 글로벌 경쟁력을 갖지 못했을까? 제대로 한 번도 위기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늘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 방식대로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동양 제과에서 만드는 ‘초코파이’ 이야기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시장을 개방한 분야는 과자 시장입니다. 시장을 열어도 큰 피해가 없을 것으로 믿었던 정부가 80년대 초 이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당시 양담배만 피워도 잡혀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과자업계는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예상대로 세계 굴지의 과자업체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고, 토종 과자업체는 이들과 힘든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 때 동양 제과는 한국 소비자의 입맛에 맞고 값이 싼 제품을 개발하자는 일념으로 ‘초코파이’라는 과자를 만들었고, 이 제품은 당시 개당 가격이 100원으로서, 지나치게 달고 값이 비싼 외국산 과자들을 몰아내는데 수훈을 세웠습니다. 한국산 과자가 판정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동남아와 중국 등지로 수출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자동차 시장을 개방할 때에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을 상대로 수입차 관세 인하, 자동차 세제 개편, 외제차 소유자 세무조사 금지 등을 요구하면서 슈퍼 301조라는 무역보복에 돌입했습니다. 국내의 현대, 대우, 기아 자동차 회사들은 모두 한국 자동차 산업의 위기라며 펄쩍 뛰었고, 국산차 애용하자며 소비자의 애국심에 호소하기도 했고, 일부에서는 외제차 유리창을 깨기도 했습니다. 그 후 10여 년 성적표를 보면 어떻습니까? 2006년도에 한국에 들어온 외제 자동차는 4만대. 수출 차량 수는 365만대이며 미국에만 100만 대를 수출했습니다. 만약 우리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을 닫아걸고, 우리가 만든 차를 우리만 타고 다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최대라는 ‘구글’이나 ‘야후’는 한국에서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에 맥을 못 춥니다. 네티즌이 요구하는 서비스 개발 속도가 느려서 소비자들의 선택에서 밀려난 것입니다. 이곳에서 제시한 일련의 수치나 통계 및 일화들은 조선일보(2007년 4월 6일자) 기사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유통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굴지의 ‘월마트’나 ‘카르프’는 토종 유통업체 ‘이마트’에 밀려 철수해 버렸습니다.
위기와 기회는 이처럼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인가 봅니다. 지금 ‘야곱’이 처한 상황이 이런 것은 아닐까요? 그는 지금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상황, 그러나 스스로 자초했던 상황에 내몰려 있습니다. 그것도 외톨이로 내팽개쳐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은 물론 주변에 인가도 없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낯선 곳에서, 돌을 베개 삼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잠을 청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낯설기만 합니다. 활달하고 외향적인 형과는 달리 조용하고, 내향적이며 집에서만 지내기를 좋아했던 그로서는 이런 상황이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롭고 쓸쓸하며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상황이 이쯤 되면 지난 일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후회가 되지요: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나 후회는 잠시이고 의심과 분노에 찬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모든 하나님의 축복이 이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축복이 화가 되어 돌아오다니!” 아버지를 속여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지만 않았더라도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도, 원망과 분노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이전에 어머니와 공모하여 형과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게 했던 그 기술과 지략과 지혜는 다 어디 갔을까요? 지금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는데 무슨 도움이라도 될 수 있지도 않을까요?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요? 그러나 지금 그의 처지는 아버지나 형의 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속수무책! 이런 상황을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각 경우 원인 제공자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형과 아버지가 ‘야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면, ‘야곱’은 스스로 자초한 때문입니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불렀습니까?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는 일 뿐이었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처럼 어려운 때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거북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욥’을 생각해 봅니다. 여우같은 아내에다 토끼 같은 자녀가 열 명, 가진 재산도 엄청납니다. 그의 자식들은 매일처럼 서로 돌아가며 파티를 열어,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겼습니다. ‘욥’은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대도 그는 매일 아침마다 자식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립니다. 자식의 숫자대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니 매일 열 번의 제사를 올린 셈입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제사로 보냈다고 하니 경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무슨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고... 왜 그랬을까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자식들이 부지불식간에 죄를 지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나 않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두려웠다는 말입니까?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염려와 불안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급격한 변화나 변혁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지요. ‘욥’과 같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간절하게 아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혹시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늘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아니, 제 인생에 갑자기 나타나셔서 저를 당혹하게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두 종교 집단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와 ‘바리새’ 집단이 그들입니다. 이 두 집단은 신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앙숙지간이었습니다. 예컨대, 정치•사회적으로 ‘바리새’ 집단은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진보 내지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사두개’ 집단은 정 반대로 현상 및 체제 유지를 지지하는 보수주의자입니다. 한편 부활이나 영생과 등과 같은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는 입장이 완전히 바뀝니다. ‘바리새’ 집단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신봉하는 보수•정통주의자라면, ‘사두개’ 집단은 이를 거부하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각자가 처해있던 사회적 지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두개’ 인들은 제사장 집단으로서 성전에서 예배와 제사를 관장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 ‘이스라엘’과 같은 종교국가에서는 이 직분은 책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와 명예를 보장받을 수 있는 특권 지배 계층에 속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직책은 요즈음 영국의 상원처럼 세습적이었으나, 이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당시 지배자 로마 당국과도 정치적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해야만 가능했습니다. 당연히 이들에게 정치•사회적인 급격한 변화나 혁명은 위험하고 혐오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들로서 부활이니 영생이니 하는 장차 올 것들에 대한 관심도 희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실 정치에 개입하셔서 정치나 종교 체제를 바꾸어 놓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지나 않았을까요? ‘욥’처럼 말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현현은 가장 부담스럽고 기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이런 염려를 헤아려 주실까?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는 그냥 혼자 계시다가, 우리가 원할 때만 나타나 도와주시는 등 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을 기다리는 것을 늘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억지로, 강포하다 싶을 정도로, 예기지 못했던 장소와 시각에 신비한 방법으로 나타나셔서 그분을 주목해 주기를 바라시는 듯합니다. <시편>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의 대면은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가 되는 셈이지요. 그것을 원했던 원치 아니하였든 말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벧엘’은 위기의 장소이자 위기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들 교회의 위기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욱 큰 위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거북스러워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속수무책 잠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독교사회책임”(대표: 서경석 목사; 서울조선족 교회)이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얼마 전부터 “거리의 목회운동” 캠페인을 벌여왔습니다. 이 운동은 교회 목회 대신 길거리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거리의 목회자”가 되자는 것인데, 2007년 4월 초에 그 출범식을 갖고 아홉 명의 목사들이 제 1기 참가자로 헌신한 바 있습니다. ‘예배당이 없는 목회’를 자원한 것입니다. 이들 모두는 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았거나, 곧 받을 예정이었는데 매주 일요일 서경석 목사 등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토론하면서 ‘길 목회’ 방법을 모색했고, 예배당 대신 길거리를 목회지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길거리에서 펼칠 사업 계획 역시 “푸드뱅크”, “차 상위 계층 자녀들을 위한 주말 영어 학교”, “위기가정 자녀결연사업”, “독거노인 음식나누기” 등입니다. 교회 건물에서 주일예배, 철야기도, 새벽기도를 인도하는 대신에 직접 거리로 나가 어려운 이웃들을 구하고 돕는 “119”를 자처한 것이지요.
“기독교사회책임”이 이처럼 거리 목회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교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이웃이 많다는 점이 그 일차적 동기가 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극빈·실직·장애인·환자·중독자 등 소위 “강도 만난 사람”이 국민의 15%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편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목회 지를 찾지 못한 무임(無任) 목사의 수가 5만 명에 이르며, 전국 교회의 70% 이상이 교인 100명 미만의 소형교회이고, 그 숫자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개척을 통한 교회 간의 경쟁이 아닌 사회구제로 무임 목회자·전도사들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계의 ‘블루오션’을 개척하자는 뜻이지요. “기독교사회책임”은 앞으로도 “거리의 목회운동”을 지속하면서 목회자들과 후원자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당시 제 1기 출범식에 설교자로 나선 김준곤 목사(CCC 명예총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한때 하루에 6개씩 교회가 섰지만 2005년에는 1년간 3000개 교회가 사라진 것으로 파악될 정도로 썰물이라고 합니다. 최 성규 목사(순복음 인천교회)는 “교회 안의 못자리에서 자란 모를 교회 밖에 심으러 가는 변화의 선발대”라고 이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기존 교회에서는 이런 운동을 “무 교회 운동”으로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아예 관심도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리의 목회운동”이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블루오션”의 한 전략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목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소위 “평신도” 자비량 사역의 한 전형으로 말입니다. 환난 날에 속수무책 그냥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던 ‘야곱’에게 먼저 도움을 자청하고 나섰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의 수없이 많은 “평신도”들에게 이 운동에 동참하라는 비전을 보여주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세상 끝날 까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루스’에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시기를...
2. 벧엘: 조우와 헌신
‘야곱’은 ‘루스’에서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납니다. 이 말은 그가 이전에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과연 그가 ‘브엘세바’에서 가족과 함께 살 때에 하나님을 모르고 지냈을까? 정반대입니다.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수없이 들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조부모와 부모의 신앙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많이 듣고 배워서, 하나님은 마치 그에게 물이나 공기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말하자면 그의 형 ‘에서’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형을 축복한다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겠지요. 그래서 형에게 돌아갈 그 모든 축복을 빼앗아 버렸으니, 이제 하나님은 어느 모로 보나 나의 하나님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는 삼인칭의 타자(他者)였던 듯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일대 일로 대면했을 때 보이고 있는 모습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16-17절).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서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깨어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지금 단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한 가지 더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며,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처녀 ‘마리아’가 천사를 만나 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남자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체험해 본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性) 지식과 성 체험은 별개의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지식이 체험을 낳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 지식을 낳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맞닥뜨림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지식인이자 종교 지도자인 ‘니고데모’를 향해서 “너는 거듭나야 한다”고 했을 때도 이런 뜻입니다. 지식이나 유추를 통해서 ‘예수’를 만나려 해서도 안 되고 만날 수도 없다는 말이겠지요. 오직 거듭남의 체험을 통해서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스스로 태어나는 자가 없고 어머니의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타의(他意)로 태어나듯이, 거듭남의 체험 또한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주권적인 행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던 게지요. ‘루스’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된 지식은 무엇입니까? 그가 놀라움과 두려움 가운데 쏟아내는 첫 지식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즉 내가 무식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노래 제목은 <진정 난 몰랐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처럼 미미할 줄을 진정 난 몰랐네.” <시편>도 같은 노래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11). 사도 ‘바울’도 자칭 무식한 자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무엇을 얻지 못했으며, 무엇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아는 것만큼 내가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나를 아는 지식과 내가 그분을 아는 지식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자기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에 그런 무리들이 있었나 봅니다. 자칭 다 이루었다고 주장하던 자들입니다. 다름 아닌 유대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욥’의 친구들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자들입니다. ‘욥’이 가정과 인생이 파탄이 나서 힘든 씨름을 하고 있을 때, 경건한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훈계하기 시작합니다. 인생과 고통의 의미라든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와 악의 문제라든지,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하나님을 만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참으로 역설이자 해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욥’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은 ‘욥’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욥’이라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욥’은 지금 ‘루스’에서 ‘야곱’처럼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 전지전능하며, 그래서 두려운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엄청난 축복을 주셨지만, 혹시라도 잘못하는 순간 그 모든 축복을 가차 없이 거두어 가시는 정확무오한 분이십니다. 조금도 빈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가 매일 드려야 했던 수많은 제사가 그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진광풍(一陣狂風) 앞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는 허탈과 분노로 울부짖으며, 하나님은 이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그는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가 있으며, 하나님 또한 그에게 가장 가까이 와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편> 기자도 “고난을 통하여 주의 규례를 배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히 5:8-9상). ‘야곱’이 ‘루스’가 아닌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었을까? ‘욥’의 친구들이 인생의 ‘루스’에서 단 한번이라도 잠을 자 본적이 있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브엘세바’에 있을 때가 아니라, ‘루스’에 있을 때 그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두 가지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삼손’처럼 하나님께서 늘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억측과 착각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삿 16:20). 전자의 경우를 하나님에 대한 무지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에 대한 독단과 독선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그 폐해가 자신에게 국한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타인에게까지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고 사악하기조차 합니다. 무지와 독선은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힘만 믿고 좌충우돌하던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가 두 눈이 뽑히는 치욕과 고통을 당한 후 비로소 영적인 눈이 밝아졌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어둠 가운데서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에 비하면 ‘야곱’의 깨달음은 그야말로 행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니고데모’처럼 먼저 하나님을 찾아갔던 자가 아니라, ‘사마리아’ 우물가의 한 여인처럼 먼저 하나님께서 찾아가셨던 자입니다. 더욱 다행인 것은 이렇게 먼저 그분이 찾아오실 때, 지난 행적을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에 대해서 아무런 질책이나 비난이 없습니다. 오히려 과분할 정도의 약속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아브라함 언약” 즉 땅과 후손과 축복의 삼중주를 다시 들려주고 계신 것이지요(13-14절).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 직접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약속은 아버지를 통해서도 이미 들어 익히 알고 있던 바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약속 때문에 지금 이런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약속만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시키기에는 역부족이 아닐까요? 땅이니 후손이니 하는 것들 모두 먼 장래의 일이 아닙니까? 지금 당장의 관심사는 “과연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이 모든 약속도 부질없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15절)
‘야곱’은 <성경>의 인물로는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그에게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모세’도(출 3:12), ‘여호수아’도(수 1:5), ‘기드온’도(삿 6:16),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도 동일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하). 오늘 나도 그 약속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사 7:14; 마 1:23).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고 정녕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히 13:5). 내가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고 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삼손’은 영적 대 각성 이후 ‘블레셋’ 사람들의 성전 기둥을 무너뜨림으로써,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비장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비극적 최후이긴 하지만,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한편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베고 누워 자던 돌에 기름을 부어 거룩한 “기둥”(הבצמ. 맛체바)을 세움으로써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18절). 난생 처음으로 해 보는 헌신이며, 비로소 하나님을 이인칭으로 부르며 기도와 맹세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비록 조건부이긴 하지만 그의 맹세 속에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1) ‘야훼’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며; (2) 이 장소를 거룩한 곳으로 삼을 것이며; (3) 십일조를 바칠 것임(20-22절).
조건부 맹세라 해서 그를 매도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아무리 계산과 이해득실에 빠른 ‘야곱’이라 해도 이전에 형과 거래를 하듯 하나님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서원이라기보다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기도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누구나 어려움에 빠졌다가 기사회생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이런 감격의 기도나 맹세를 드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입다’의 서원이나(삿 11:30-39) ‘한나’의 서원(삼상 1:10-28), 그리고 ‘요나’와 그의 항해사들의 서원(욘 1:16-2:9) 등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였고,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들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체험한 자가 설령 서원을 하지 않았다 한들 어찌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십일조든 무엇이든 말입니다.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 일련의 서원을 제시하고 있는 ‘야곱’의 행동도 그것이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믿음의 발로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서원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보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해주신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며...”(마 6:9-33). 우리가 무슨 자격과 근거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엄청난 요구를 할 수 있습니까? 그분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를 통해서 그분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들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가장 큰 헌신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내 가정과 직장과 학교 모두를 루스가 아닌 ‘벧엘’로 만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내가 곧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드릴 가장 큰 헌신은 따라서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맛보고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맛보고 즐기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는 지금 ‘루스’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위기를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멀리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래서 고통스럽고 두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나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 있습니다. 그분이 ‘야곱’과 함께 ‘루스’에도 계셨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 이제 내가 드려야 할 헌신은 무엇입니까?
연습과 토의
1. <야곱 이야기: 에피소드 4>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2. “야곱 언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에 이어 그 내용이 확대되거나 심화되는 측면은 무엇입니까?
3. “브엘세바, 루스, 벧엘” 또는 “조우와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문을 작성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