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 10 幕
김태정 목사창세기 37:2-50:26약 62분 분량
야곱의 계보: <요셉 이야기>
(37:2-50:26)
단락과 범위. <창세기>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계보의 시작과 끝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계보는 이러하니라(37:2)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50:26)
형식과 구조. 알다시피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야곱’이 아니라 ‘요셉’으로서, 이야기의 내용만을 근거로 했을 때 열 번째 계보의 적절한 제목은 <요셉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이삭의 계보>가 그 내용에 있어 <야곱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점은 <창세기> 화자가 다른 계보에서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이야기 구성상의 원칙이라는 점을 앞에서 수차례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이야기>는 별개의 독립된 이야기 단위가 아니라 <야곱 이야기>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더 정확하게는 <야곱 이야기>의 속편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야곱-요셉 이야기>로 볼 때, <야곱 이야기>는 제 1부, 그리고 <요셉 이야기>는 제 2부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두 이야기의 형식과 구조 등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본 교재의 제 8막 서론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요셉 이야기>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다른 <족장 이야기>들에 비해 가장 짜임새가 있고 일관성이 있어, 한 편의 단편 소설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아홉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위 도표), 이중 두 쌍으로 이루어진 여섯 개의 에피소드는 마치 두 개의 연이 시적 반복을 이루고 있는 형식입니다: ABC 및 A'B'C'. 그리고 이야기의 구성상의 원리는 직선적이며 진행적인 것으로서 <오경>의 주제가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주제란 다름 아닌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시작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12:1-3). 이 언약의 핵심은 “땅”과 “후손”과 “축복”에 관한 것으로서, 특히 후손에 관한 부분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이집트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해서 기근으로 멸절의 위기에 내몰린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어떻게 구제하고, 구원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요셉’과 같은 인간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요셉’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섭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사실 ‘요셉’의 역할은 이야기의 벽두에 그의 꿈 이야기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는데, 꿈의 내용인 즉은 그의 형제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물론 이 꿈은 42-47장 사이(A'B'C')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47장을 <요셉 이야기>의 결론으로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38장의 <유다와 다말 에피소드>와 48-50장에 그리고 있는 <야곱과 요셉의 말년>에 관한 본문은 원래 <요셉 이야기>에 속하지 않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화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컨대, 37장에 등장하는 ‘요셉’의 꿈 이야기와 그 꿈이 성취되는 것에 관한 본문39-47장(ABCA'B'C') 간의 상호 관계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세 개의 에피소드(A/B/C)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셉’과 함께 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A)에는 ‘요셉’이 ‘보디발’의 집사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39:1-20). 두 번째 에피소드(B)는 그가 죄수의 신분이긴 하지만 옥중의 사무 책임자의 자리를 맡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39:21-40:23),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C)는 이집트의 국왕 다음으로 높은 총리 자리에 오르는 이야기로서(41:1-57), ‘요셉’이 이집트 내의 식량 배급을 포함한 모든 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개의 에피소드는 음악적 crescendo의 기법을 통해서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나머지 세 개의 에피소드(A'/B'/C')는 또 다른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봉우리들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A')에서 ‘요셉’의 열 명의 형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절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42:1-38), ‘요셉’의 꿈이 성취되기 시작하는 것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B')는 ‘요셉’ 형들의 두 번째 이집트 방문에 관한 이야기로서, 이번에는 형들이 ‘벤야민’을 대동하고 있으며, 마침내 ‘요셉’이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C')에서는 ‘야곱’을 포함한 ‘요셉’의 모든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오고 있으며, ‘요셉’은 아버지와 극적 해후를 하게 됩니다(46:1-47:31). 따라서 만일 <요셉 이야기>의 주제를 ‘요셉’의 꿈의 성취에 관한 것으로 국한한다면, 이야기의 결론으로서 47장이 적절할 것이며, <유다와 다말 에피소드>(38장)나 <야곱과 요셉의 말년>에 관한 본문(48-50장) 등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화자는 마지막 계보의 제목을 <요셉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계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37:2). 다시 말하자면 화자의 관심사는 ‘요셉’ 한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모든 자식들에 있습니다. <이삭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삭의 계보>(25:19)는 ‘이삭’의 두 아들 즉 ‘야곱’과 ‘에서’ 모두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야곱’의 모든 자식들에 대한 화자의 관심사를 잘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야곱의 유언”(49장)으로서, 우리는 이곳에서 ‘야곱’이 임종 시에 그의 모든 자식들에게 축복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요셉 이야기> 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의 절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 국가의 잉태에 관한 단서를 보게 되는데, ‘유다’와 ‘요셉’ 지파가 주축을 이룰 남쪽 유다 왕국과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대부분 ‘요셉’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요셉 이야기>, 특히 ‘요셉’이 무대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세 개의 에피소드(A/B/C)(39-41장)에 앞서서, 38장 한 장을 온전히 ‘유다’와 관련한 이야기로 채운다고 해서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머지 세 개의 에피소드(A'B'C')(42-46장)에서 ‘요셉’이 ‘유다’와 함께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으며, 나머지 인물들 즉 ‘야곱’이나 ‘르우벤’, ‘시므온’, ‘베냐민’이 조연(助演)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37-50장 전체를 통해서 화자의 관심사는 ‘요셉’ 한 사람이 아니라 ‘야곱’의 모든 자식들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열 번째 계보를 단순히 <요셉 이야기>로 명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 25-50장 사이에서 36장을 제외하면 모든 이야기는 ‘야곱’의 일대기에 관한 것입니다. 전체 본문은 그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의 죽음과 매장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5:21)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50:14)
앞에서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이, 화자는 <야곱 이야기>를 제 1부와 제 2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야곱 이야기(1)>-“이삭의 계보”(25:19-35:29); (2) <야곱 이야기(2)>-“야곱의 계보”(37z:2-50:26). 당연히 이 두 부분이 하나의 이야기로 통일성을 갖게 하는 요소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야곱’의 유언 중에서 ‘르우벤’에 관한 언급(49:3-4)은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했던 사건(35:22)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유언(49:5-7)은 ‘디나’의 사건(34:25-31)을 기억나게 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유언(49장)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이전에 이들이 탄생할 당시의 이야기와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참고, 29:31-30:24). 이들의 탄생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연관된 이름을 가진 아들들은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요셉’이었습니다만(29:32, 33, 35; 30:24), 이곳 <요셉 이야기>에서도 이들은 주요 인물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 이야기> 전반부에서 ‘레아’와 ‘라헬’의 갈등(29-31장)이 나중에 그 자식들과 ‘야곱’ 사이에 전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만(34; 35:22), 후반부에 이르러는 부모와 자식들 간의 갈등은 ‘요셉’과 그의 이복형들 사이에 더욱 그 골이 깊어지고 있으며(37장), 급기야 ‘요셉’이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창세기>의 나머지는 화해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화해의 이야기는 47:12에서 절정을 맞고 있기는 하지만, ‘요셉’의 형들 사이에 일말의 두려움이나 의구심이 깨끗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사후 ‘요셉’의 복수가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두려움에 대해서 ‘요셉’은 다시 한 번 달래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50:14-21). 그러므로 <야곱 이야기>(25:19-50:26)는 전체적으로 한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구성상의 또 다른 특징은 아래에 보는 바처럼 교차대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형원. 「복음과 실천」(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1994), p. 378; Vincent L. Tollers; John Maier eds., Mappings of the Biblical Terain: The Bible as Text(London: Bucknell University Press, 1990), pp. 215-232.
이 구조에 따르면 <다말과 유다 이야기>가 이곳에 있어야 당위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비평이나 편집비평에 따르면 이 본문은 잘못 위치한 본문의 전형입니다.
즉 두 번째와 세 번째 에피소드에는 두 여인 ‘다말’과 ‘보디발’의 아내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 여인들의 상대역으로 각기 ‘유다’와 ‘요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여인의 음란성과 음란한 두 여인을 상대하는 두 남자 주인공의 행위가 좋은 대조를 이루게 하는 것도 화자의 의도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 연구에 의하면, 이야기의 주된 자료는 <야훼 전승>과 <엘로힘 전승>이 37-45장 사이에 대략 비슷한 정도로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부분에는 <사제 전승>도 일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야훼 전승>과 관련해서 일부 수정된 견해가 있기도 한데, 이중 일부가 후대에 소위 <르우벤-엘로힘 전승>으로 불리는 자료가 일부 보충되었다는 견해입니다. 보다 최근에는 <요셉 이야기>의 핵심 부분 즉 37장이나 39-45장을 순수한 <야훼 전승>으로 보고, 나머지 이야기는 후대에 <사제 전승>과 <야곱 이야기>로 보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자료와 편집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는 각 본문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제 41과: 이집트로 팔린 요셉
41
요셉: 이집트로 팔려감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7:2상)
문학과 역사
범위와 구조. <요셉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 ‘야곱’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7:2). 이러한 형식은 <창세기>의 다른 족장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이미 친숙한 것이 되어있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 이야기>가 그의 아버지 ‘데라’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고, <야곱 이야기> 역시 그의 아버지 ‘이삭’의 계보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요셉 이야기>의 시작으로 간주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37:1을 새로운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지난 에피소드의 결론이 되어야 함을 지난 과에서 살펴 본 바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 내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과에서 다루게 될 37:2-36의 본문 또한 그 안에서 작은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충분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38장의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37:36과 39장 사이에 특별하게 끼어든 하나의 막간으로 간주할 때,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서의 37장의 기능은 더욱 뚜렷해진다 할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시작은 <야곱 이야기>의 첫 시작과 비교해 보는 것도 두 이야기의 배경을 이해함에 있어 유익할 것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제목에 이어 이야기 주인공들의 나이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후 이들이 부모와 다른 형제(들)를 떠나 이십여 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게 했던 두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표 참고):

<요셉 이야기>의 경우 주인공과 나머지 형제들 간의 갈등은 이야기의 벽두에서부터 세 번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화자의 진술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그를 미워하여”(37:4, 5, 8). 그리고 37:11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형제 사이의 갈등에 관한 이러한 진술들이 <요셉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나머지 이야기의 구조를 아래 여덟 개의 장면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처음과 두 번째 장면을 하나의 장면으로 처리할 수도 있겠으나, 두 장면에서 주인공이 있는 장소가 다르다는 점에서 별도의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와 네 번째 장면 역시 한 개의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르우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단락으로 구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모든 장면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바는, 각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에 따르면, 본문은 세 개의 자료 즉 <야훼 자료>, <엘로힘 자료> 및 <사제 자료>가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궁켈’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사제 자료>: 2절
(2) <야훼 자료>: 3-4절, 12-13절상, 14하-17절, 18절하, 21절, 23절, 25-27절, 31-33절상, 34하-35절상
(3) <엘로힘 자료>: 5-11절, 13하-14절상, 18절상, 19-20절, 22절, 24절, 28-30절, 33하-34절상, 35하-36절
이처럼 자료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본분 중에 본문 중에 일련의 표현이나 단어들이 중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요셉’의 아비의 이름을 ‘야곱’으로 부르는가 하면(34절) 이스라엘로 부르기도 한다든지(3, 13절), ‘르우벤’과(21-22절, 29-30절) ‘유다’(26절) 모두 ‘요셉’을 구출하기 위하여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렸다고 하기도 하고(25, 28절),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렸다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28, 36절).
그러나 오늘날 ‘궁켈’의 이와 같은 자료비평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본문이 갖는 내적 통일성이나 일관성이 너무 강력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료 간의 미미한 차이는 해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사안들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이 받아들이기로는 본문은 하나의 자료에서 유래한 것이며, 중간 중간에 요약 내지는 일부 확장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볼 때, 위에서 제시한 문단 구분도 나름대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매 장면마다 서술과 대화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다른 자료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게 되면 이야기의 내적 통일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2절의 경우만 하드라도, 이를 다른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이야기의 내경 내지는 서론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다만 본문을 하나의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할 때, 이를 <야훼 자료>로 볼 것인지 아니면 <엘로힘 자료>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본문이 구성이나 형식에 있어 <야곱 이야기>의 25:19-27:45의 본문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야훼 자료>로 간주하는 편이 더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제목(2절상)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2절상)
<창세기> 37장 이후의 대부분의 기록은 ‘야곱’이 아니라 그의 아들 ‘요셉’에 관한 것이지만, <요셉 이야기> 역시 다른 족장 이야기에서처럼 주인공의 아버지의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그리고 이야기의 제목이 37:1이 아니라, 37:2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셉 이야기>의 범위와 단락이 자동적으로 결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요셉: 밀고자(2절하-11절)
<요셉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주인공 ‘요셉’과 나머지 형제들 사이의 갈등과 그 원인에 대해서 묘사함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으로 전체 이야기의 배경 내지는 서막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먼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반감이나 미움의 두 가지 원인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요약해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2하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2-4절)
화자가 ‘요셉’을 언급하기는 그의 출생에 관한 언급이 있은 이후(30:23-24) 이곳이 처음입니다. 다만 ‘야곱’의 아들들의 목록에서 그의 이름이 한 번 등장한 바 있기는 합니다(35:24).
그날 이후 지금까지 십칠 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신상에 관한 정보는 베일에 가려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 중 가장 막내이긴 했습니다만, 형들과 함께 가축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쳤다”는 구절은 문맥상 “그의 형들을 돌보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으므로, 이럴 경우 이 구절은 그야말로 <요셉 이야기>에서 탁월한 서론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V. Hamilton). 즉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훗날 그가 성인이 되어 하게 될 일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나중에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백성들을 돌보고 양식을 제공해주는 등 다스리고 통치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동생이 형들을 돌보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양을) 치다”(h[;r, 라아)는 “다스리다” 또는 “통치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예. 삼하 7:7). 흥미롭게도 ‘요셉’의 형들조차도 그를 힐난하면서 이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8절상).
이곳에서는 특별히 ‘빌하’의 두 아들(‘단’과 ‘납달리’) 및 ‘실바’의 두 아들(‘갓’과 ‘아셀’)과 더불어 가축을 돌보았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나머지 형제들 모두를 다 포함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절에 따르면 ‘요셉’은 형들이 양을 치러 나갔을 때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추후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첫 번째 원인은 그가 형들의 비리(?)를 일일이 아버지 ‘야곱’에게 일러바쳤기 때문입니다. 이복형제들 사이의 갈등이나 ‘야곱’의 편애 등에 대해서는 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는 터이긴 하지만, 그가 왜 밀고자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에게 전한 이야기가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거짓 보고였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다만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들의 잘못을 말하다”는 표현은 일종의 중상모략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고. 시 31:14; 렘 20:10; 겔 36:3; 민 13:32; 14:36, 37). 만일 ‘요셉’이 아버지에게 이처럼 거짓 보고를 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형들의 분노와 미움은 더욱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된 두 번째 원인은 아버지의 편애(偏愛) 때문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편애하였으면 그에게 “채색 옷”(.!ySiP' tn<toK, 케토네트 파심)을 만들어 줄 정도였습니다(3절). 이 옷이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옷이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케토네트 팟심’은 원래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 외투’를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만(창 37:23, 32), <칠십인 역>이나 <벌게이트> 등에서 “채색옷”(키토나 포이킬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Hamilton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Hamilton, V. 407-408쪽.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 준 것이라면 이를 바라보는 나머지 형제들의 심사는 보지 않아도 훤합니다. 우리는 <족장 이야기>에서 편애의 문제가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였으며,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이 이제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형들이 그를 미워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화자는 세 번에 걸쳐 그들의 미움을 언급함으로써(4, 5, 9절), 이들의 미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야곱’이 ‘레아’를 미워하였다고 두 번이나 언급한 바 있는데(29:31, 33), 이제는 ‘레아’의 자식들이 ‘라헬’의 자식 ‘요셉’에게 그 미움을 되돌려주고 있는 형국입니다.
화자는 왜 이곳에서 ‘야곱’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까? “얍복강 사건” 이후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후에도 두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뀐 후 늘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두 이름을 번갈아 사용해야 할 무슨 특별한 상황이나 배경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적어도 <요셉 이야기> 내에서 화자는 한 이름을 다름 이름보다 선호해서 사용하고 있는 경우를 관찰할 수는 있습니다. 첫째, 전체적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더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31회); 이스라엘(20회). 이렇게 볼 때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를 때 오히려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 내에서 ‘야곱’은 역사적인 한 개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라면 이스라엘은 때로 민족이나 국가를 지칭하고 있습니다(46:8; 47:27; 48:20). 세 번째, 이스라엘을 한 개인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에서조차도 지파 내에서의 위치 즉 족장으로서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함인 것처럼 보입니다(43:6, 8, 11; 46:1; 48:2). 반면 ‘야곱’은 종종 연약한 인간으로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할 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37:34; 42:4, 36; 47:9). 이런 사실은 두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야곱’은 “속이는 자”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에서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야곱’이 새 힘을 얻는 경우에 그를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45:28; 48:2). 마지막으로, ‘요셉’이 등장하고 있는 장면에서는 이스라엘보다는 ‘야곱’을 선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37:3, 13; 46:29, 30; 48:2, 8, 11, 14, 20, 21; 50:2).
아무튼 ‘요셉’이 형들로부터 당하고 있는 따돌림은 대부분 아버지의 편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는 있으나, 그가 자초(自招)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 위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요셉’이 자초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의 “꿈 이야기” 때문입니다:
5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5-11절)
이 “꿈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세 쌍의 “꿈 이야기” 중에서 첫 번째 쌍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만(참고. 40:1-41:36), ‘요셉’ 자신이 꾼 유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이 꿈이 예고하는 바는, 훗날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는 ‘요셉’에게 찾아와 그가 누구인지 모른 채 머리 숙여 양식을 구걸하기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42:6; 44:14). ‘요셉’의 꿈은 나중에 ‘이집트’ 왕 ‘바로’의 두 번에 걸친 꿈과 마찬가지로, 이 두 번의 꿈 역시 실은 하나의 꿈으로 볼 수 있습니다(41:25).
결국 동일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요셉’의 가족들이 어느 날 그에게 모두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미래에 성취될 동일한 한 사건을 두고 두 번에 걸친 “꿈 이야기”를 통해서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입니다(41:32). 이러한 사실은 두 번의 꿈이 묘사하고 있는 배경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의 꿈이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바로’의 꿈은 풍년과 흉년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는 이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상천하지(上天下地)의 하나님에 대한 강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두 번의 꿈에서 차이를 찾아낸다면, ‘바로’의 꿈에 대해서는 ‘요셉’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공식적인 해석 즉 해몽(解夢)을 해주고 있습니다만(40:8; 41:16, 25, 28), ‘요셉’ 자신이 꾼 꿈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5-11절). 이런 점에서 볼 때, ‘요셉’의 꿈이 과연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과대망상적인 부풀리기를 한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의 형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당연히 후자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요셉’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 댄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5, 8절). 이 표현은 ‘요셉’의 이름에 대한 일종의 언어의 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더욱 미워하였다”다는 직역하자면 “미움을 더하였다”(פוֹי, 요시푸)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평범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노래하듯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7절은 두 번에 걸쳐 “보라”(hNEh, 힌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신의 꿈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반발과 분노를 격동시킬 뿐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해와 달”(즉 부모)조차도 그에게 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9절), “열한 개의 별”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에 미루어, ‘요셉’이 꿈을 꾼 시기가 아직 “벤야민”이 태어나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아니면 상이한 자료가 혼재해 있는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형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아버지조차도 분노하며 그를 꾸짖기에 이릅니다(10절).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이 장면에서 ‘요셉’이 가족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는 정도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의 형들이 그를 “매우 시기했다”(an:q, 카나)는 것은 그를 “미워했다”(5, 8절)는 것보다 더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 동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폭력을 수반할 정도의 강력한 미움의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동사로 사용하고 있으며(민 25:11, 13), 하나님에 대해서도 “시기하는 하나님”으로 십계명에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출 20:5). <민수기>에서도 간통이 의심되는 아내를 남편이 “시기심”으로 죽이거나 처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별도의 조사 절차를 마련하고 있으며(민 5:11-13), <잠언서>는 “시기심”이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잠 14:30; 23:17; 24:1, 19). 이처럼 강력한 단어를 ‘요셉’의 형들이 가졌던 감정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이들이 ‘요셉’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 감정을 처리하게 될 것인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분노와 질책은 ‘요셉’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잠잠하게 함으로써 형들의 미움으로부터 다소라도 보호해 주기 위한 포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11절). 오히려 ‘야곱’은 아들의 꿈이 진정 하나님의 계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아들들이 그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셉’을 그 형들이 있는 곳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요셉: 노예(12-35절)
이곳 제 2막에서는 서막에서 잉태되어 내연(內燃)하고 있던 갈등과 분노가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해 나오는 전체 과정이 여덟 개의 장면에 걸쳐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이곳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건을 기점으로 와해의 길을 걷게 되고, 향후 20년을 그러한 상태로 남아있게 됩니다.
장면 1: 요셉이 형들을 찾아 나섬(12-14절). 그리고 그 단초는 ‘요셉’의 형들이 ‘예루살렘’에서 ‘세겜’으로 앙 떼를 치러가면서 은밀하게 나누던 대화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12절)
‘세겜’은 이들 형제가 여동생 ‘디나’의 일로 대학살을 자행했던 곳입니다(34:24-30). 그런데 이제 이들이 다시 그곳에서 동생을 잡아 죽일 모의를 도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낸 것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13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13-14절)
그러나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습니다. 왜 ‘요셉’은 처음부터 형들과 함께 양을 치러 가지 않았을까? 그가 가기 싫어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겜’이 너무 위험한 동네라 그 아비가 그를 함께 딸려 보내기가 두려웠을까? 혹은 형들이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더더욱 그를 혼자 나중에 보낼 수는 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통해서 추측해 보건대, ‘요셉’이 형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 그렇게 위험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야곱’은 그의 아들들과 양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더 염려가 많았습니다. 이 본문에서 “평안”을 뜻하는 ‘샬롬’(שׁלום)이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야곱’의 이런 염려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즉 그가 염려하는 바는 아들들이나 양들이 도적이나 강도들의 위험으로부터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야곱’에게 있어 ‘세겜’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곳임에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진실로 염려해야 했던 점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이나 위협이 아니라, 가족 내부에 상존해 있는 위험과 위협이었습니다. 화자는 이점을 여러 번에 걸쳐 암시한 바 있습니다. 즉 ‘요셉’의 형들이 그를 심히 미워하고, 시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4, 5, 8, 11절). 따라서 우리는 ‘야곱’이 ‘요셉’을 그 형들을 찾으라고 내보낼 때, 열일곱의 이 소년이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떠나 위험한 길에 들어서고 있는 것을 보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장면 2: 요셉이 세겜에서 길을 잃음(15-17절). 염려는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세겜’에 있는 ‘요셉’을 발견하게 됩니다:
15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15-17절)
그는 이제 그의 유일한 보호자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양처럼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으며, 낯선 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헤브론’에서 이곳 북쪽 ‘세겜’까지 80 킬로미터를 올라왔지만, 형들이 있는 ‘도단’까지 가려면 다시 북쪽으로 2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만 했습니다. 그가 형들을 만나기 위해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곧 만나게 될 운명의 순간과는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의 긴장은 점점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장면 3: 형들이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밈(18-20절). 장면은 바뀌어 형들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형들의 눈을 통해서 ‘요셉’이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들의 대화를 엿듣게 됩니다:
18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18-20절)
형들이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동생을 죽일 음모를 “꾀합니다”(lk'n, 나칼). 이 동사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아닙니다만, 한 번도 긍정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단어이기도 합니다(예. 시 105:25). 동생이 멀리서부터 가까이 오기 전에 그렇게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진술을 통해서 볼 때, 이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멀리서 이 동생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형들이 ‘요셉’을 향하여 “꿈꾸는 자”로 부르고 있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여서라도 그 꿈이 틀렸음을 입증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를 살해해도 그 꿈이 여전히 이루어질까?” ‘요셉’을 향한 형들의 적개심이 이처럼 골수에 사무쳤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처럼(4:8, 14), ‘에서’가 ‘야곱’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27:41, 42), ‘요셉’을 살해하려 하는데, 이 모두 불법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금언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이들은 불법적인 살인에 이어 거짓말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들이 나중에 아비 앞에서 이 거짓말을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피 묻은 옷을 본 ‘야곱’이 스스로 그렇게 단정해 버립니다(37:33).
장면 4: 르우벤이 개입하다(21-22절). 이 짧은 장면은 ‘르우벤’이 뜻밖에 개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21-22절)
추측컨대 ‘르우벤’은 ‘요셉’에 대한 살해 계획을 나중에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이 계획에 찬동하지 않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가장 맏형으로서 일말의 책임감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이전에 아버지의 첩 ‘빌하’와의 문제에 대해서 아버지로부터 무언가 속죄라도 받고 싶어 했을까요?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화자는 그의 명령을 직설화법으로 담아냄으로써, 맏형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피를 흘리지 말라”;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후자의 표현은 일종의 관용 어구로서 종종 “살해를 품은 기습 공격”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예. 삼상 22:17; 24:6; 26:23; 창 22:12).
‘르우벤’은 명령에 이어 다른 계획을 내놓습니다. ‘요셉’을 죽이는 대신 “광야 구덩이(굴)”에 내버리자는 것입니다. 화자는 그가 왜 이런 제안을 내놓고 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중에 혼자 몰래 와서 ‘요셉’을 구해주기 위함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르우벤’ 자신은 이를 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요셉’이 구출된다면 나중에 다른 형제들이 이를 알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었을 때 이들이 자신에게도 ‘요셉’에게와 같은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요? 나도 ‘요셉’처럼 외톨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이런 모험을 감행하기로 작정했을까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복원하고, 더 나아가서 신뢰와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기를 원했을까요?
사람을 직접 죽이는 일과 그를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빠뜨려 죽도록 내버려 두는 일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법 형식 논리로만 보자면 후자의 행위가 죄 질에 있어 다소 가벼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벨’의 피를 땅이 받고 그 땅이 ‘가인’에게 피의 복수 즉 저주를 내리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4:10). 만일 ‘요셉’을 구덩이에 내버려 둔다면 그의 “핏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며, ‘르우벤’의 교묘한 제안은 다른 동생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면 5: 요셉을 팔아넘김(23-28절). 이 장면에서 행동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요셉’이 마침내 형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고, 형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구덩이에 집어던지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겨버립니다. 이 장면은 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형식 상 화자의 진술이 먼저 있은 다음 담화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번에 담화의 주인공은 ‘유다’입니다.
등장인물들의 거침없는 행동은 음악에서의 ‘스타카토’처럼, 화자가 동원하고 있는 일련의 연속적인 동사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벗기고”; “잡아”; “던지니”.
23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24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23-24절)
‘요셉’을 대하는 이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거칠기도 합니다. 이들은 마치 짐승의 가죽을 벗기듯 동생의 특별한 채색 옷을 벗기고 있습니다(참고. 레 1:6).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요셉’의 “채색 옷”에 주목함으로써,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고 있는 각별한 총애와 이와 대조적으로 형들로부터 받고 있는 미움을 대조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아버지가 각별한 사랑과 은총으로 만들어 입힌 그 옷을 형제들이 난폭하게 벗기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덩이가 “비었고”, “물이 없었다”고 소개함으로써 ‘요셉’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다면 오래 버티기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텅 비고, 메마른” 구덩이는 훗날 ‘가나안’을 덮친 7년 동안의 기근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
한편 이 모든 일을 당하는 동안 과연 ‘요셉’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화자는 유난히 이 질문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그는 형들의 자비를 간구하며 애걸했습니다(42:21). 그러나 그들은 귀를 막았고, 범죄 현장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을 정도로 잔인하고 냉정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25절상)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동생의 절규가 들려오는 구덩이 주변에 모여 앉아 아마 ‘요셉’이 가져왔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이 형들의 비정함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들이 동생의 절규에 귀를 막고 있는 대신 눈으로 본 것은 있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25절하)
화자는 그들이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라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낙타에 여러 가지 상품들을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인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스마엘’ 족속입니까 아니면 ‘미디안’ 족속입니까?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 두 호칭이 같은 이야기 내에서 번갈아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마엘’ 사람들은 이 구절 외에도 다른 곳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만(27, 28절, 39:1), 또 다른 곳에서는 이들을 ‘미디안’ 상인으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28, 36절). 이처럼 동일한 대상을 두고 상이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 아주 다양한 이견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로 자료 및 편집 비평에 바탕을 둔 연구 결과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추측과 가정에 근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은 이들 상인들에 대해서 이 두 이름을 번갈아 사용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더 나아 보입니다(G. Wenham). <창세기> 화자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그는 한 번은 ‘미디안’ 사람이 ‘요셉’을 ‘보디발’에게 팔았다고 하고 있는가 하면(37:36), 다른 곳에서는 ‘보디발’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샀다고 진술하고 있기도 합니다(39:1). <사사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이스마엘’과 ‘미디안’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또 그들(미디안)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 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귀고리가 있었음이라”(삿 8:24). ‘이스마엘’과 ‘미디안’이 결국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은 ‘히브리’ 식 이야기의 특징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한 이야기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 통상 그 사람을 두 번은 고유명사로 부른 다음에 일반 대명사로 부르게 됩니다. 예컨대 28절에서 처음으로 ‘미디안’이 등장하고 있는데, 같은 구절 내에서 그를 지칭할 때 역시 동일한 고유명사를 사용해야 할 것인데, 대명사 그들로 바꾸어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28절). 여기서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린 자가 ‘미디안’ 사람이라면 같은 고유명사를 반복해서 사용했을 것입니다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그들”로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요셉의 형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개역 개정>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미디안’과 ‘이스마엘’을 서로 다른 대상으로 봅니다. 따라서 이들이 선호하는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린 자는 ‘미디안’ 사람들이며, 이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이름이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라면, 이 둘 사이에 무슨 특별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이스마엘’이 보다 일반적으로 “약대 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미디안’은 이들이 속해있던 구체적인 지파나 족속을 의미했던 것일 수 있습니다. 또는 ‘이스마엘’이 보다 넓은 지파 연합을 지칭했다면, ‘미디안’은 그 속에 포함된 한 족속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로 ‘이스마엘’의 계보에 일단의 유목 지파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창 25:13-17).
이들의 등장은 적어도 ‘유다’에게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제안하고 있는 바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6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26-27절)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처음 제안했던 자는 ‘르우벤’입니다만, 그의 계획은 실은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미해결의 상태로 남겨둔 것에 불과합니다. 과연 이들 형제가 ‘요셉’을 그곳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죽일 것인가? 또는 ‘요셉’이 그곳을 도망쳐 나와 아버지 ‘야곱’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게 될 것인가? 따라서 ‘유다’의 제안은 동생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으며, 피의 복수는 면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창 4:10). 어디 그뿐입니까? 경제적인 유익도 생기는 일입니다. 일견 ‘유다’는 ‘르우벤’보다 더 고상한 동기를 지닌 듯합니다: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27절하). 그러나 그 역시 동생을 구출할 의도는 전혀 없었던 그의 제안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또 다른 구덩이에 집어 던져 넣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혈육을 팔아 금전적 유익을 챙기는 행위는 사형에 처해야 할 정도의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1:16; 신 24:7).
결국 ‘요셉’은 은 이십 세겔에 팔립니다: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28절)
이 금액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나 고대 바벨론 사회에서 오세에서 이십 세까지의 남자 노예의 가격입니다(참고. 레 27:5). 참고로 목동으로 고용되었을 때 일 년 치 임금이 대략 8 세겔 정도였다고 하니, 이들 형제들은 ‘요셉’의 몸값으로 상당한 보상을 챙길 수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넘김으로써, 사실상 그를 영원히 없애버렸지만, 이는 결국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요셉’의 꿈을 이루는데 일조(一助)를 한 셈이 되었습니다.
장면 6: 르우벤의 등장(29-30절). 이 모든 거래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르우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이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29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29-30절)
아마 그는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자는 제안만 해놓고서는 어딘가로 떠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와서 동생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옷을 찢는 등 통곡과 비통 등 ‘요셉’을 향한 연민의 정을 쏟아내고 있습니다(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그의 이런 행동은 조금 뒤 그의 아버지 ‘야곱’이 보일 행동을 예고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33-34절). ‘르우벤’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염려에 찬 그의 말, “나는 어디고 갈까”는 바로 이런 염려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장면 7: 요셉의 옷을 야곱에게 보임(31-33절). 그러나 ‘르우벤’과는 달리 다른 형제들의 가슴은 냉혈한의 그것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에는 그래도 아버지의 반응을 생각해서 짐짓 슬픈 내색을 지으며 동생이 짐승에게 물려갔다고 거짓말을 할 생각도 있었으나(20절), 정작 동생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 구태여 표정 관리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이들은 염소의 피를 묻힌 동생의 옷을 다른 사람을 시켜 아버지 앞에 보내는 것으로 보고에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감정 따위는 이제 별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태도입니다:
31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그의 채색 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31-32절)
이들이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서 사용한 ‘요셉’의 옷과 염소의 피는 이전에 ‘야곱’ 자신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했던 바 있는 바로 그 도구들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27:9-17). 다만 ‘이삭’과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삭’이 그 아들 ‘야곱’의 위장복(僞裝服)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에 비해,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27:23).
‘야곱’은 금방 ‘요셉’의 옷을 알아보았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33절)
바로 이 대목에서 두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연결점을 갖게 됩니다. 젊은 자식들이 늙은 아버지를 속이는 범죄를 저지르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했던 것에 비해, ‘야곱’의 자식들은 그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지금 ‘야곱’이 내지르고 있는 세 마디의 단말마적인 절규는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이야기는 이 장면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참고. 삼하 18:33).
장면 8: 야곱의 애곡(34-35절). 마지막 장면은 ‘야곱’이 죽은 아들을 위하여 오래 동안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34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34-35절)
이러한 행동은 상(喪)을 당한 자가 보여주는 당시의 일반적이고도 공식적인 관습입니다(삼하 3:31; 왕상 20:31-32; 욘 3:5; 창 50:10; 삼하 19:1-4; 에 4:3; 출 33:4; 사 61:3). 대개 부모가 돌아갔을 때 조문 기간은 한 주간 정도 걸렸으며(창 50:10), ‘모세’의 경우에는 한 달이 걸리기도 했습니다(신 34:8). 그러나 ‘야곱’은 그의 자녀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위하여 애곡하기를 멈추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울 작정이었습니다. “스올에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구약>에서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음침하고도 불쾌한 장소이며(사 14:14-20), 친척들이 나중에 죽어서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삼하 12:23). 이러한 ‘스올’ 역시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암 9:2), <시편>의 시인들은 ‘스올’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고 있으며, 또한 ‘스올’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 미래에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시 16:10; 30:3; 49:15).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악인들이 가는 ‘스올’에 자신도 함께 가기를 기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절망과는 달리 화자는 ‘요셉’이 ‘이집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36절)
친위대장의 역할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보디발’은 아마 왕궁 감옥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40:3-4; 41:10, 12). 참고로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장군 ‘느부갓네살’도 같은 호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요셉: 사계절의 사나이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한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우리는 이런 자를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축구 선수로 비유하자면 모든 포지션을 거뜬히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구약>에서 ‘바울’에 버금가는 또 다른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를 찾아내고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요셉’입니다. ‘요셉’을 이렇게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즉 그 역시 ‘바울’만큼이나 인생의 온갖 영욕(榮辱)을 다 겪은 인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당시 근동 사회가 보여주고 있던 거의 모든 사회적 계층의 스펙트럼을 살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형제들 중에서 아버지의 가장 총애 받는 아들이자 미래의 상속자로 출발하였으나, 타국의 노예로 전락하였다가, 감옥에 갇히는 등 죽음의 위기를 거치면서, 종국에는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어 국왕 다음가는 권좌에 올라, 그 나라는 물론 자신의 가족과 민족의 구원자가 됩니다. 그는 사랑과 미움, 총애와 질시, 시험과 신뢰, 출세와 추락 등 인생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인생의 그 모든 역경이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지 못했던 것처럼, 인생의 부귀와 영화 또한 그를 거만하고 목이 곧은 자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은 것이 아니라, 선으로 갚아주었습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나, 대중 앞에서나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사계절(四季節)의 사나이”였습니다.
아마도 <구약>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통 털어 ‘요셉’만큼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그 역시 다른 인간들처럼 흠이나 약점이 없을 수 없겠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화자는 그에 관해서 한 번도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요셉 이야기>와 주인공 ‘요셉’을 특별히 더 사랑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은 그를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지는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신약>에서 중요하게 자주 언급하는 인물은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될지언정 ‘요셉’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에서 ‘요셉’만큼 대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도 없습니다만, <신약>은 그의 말을 한 번도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그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경우란 단 네 번에 불과합니다. <신약>에서 ‘요셉’을 거명하고 있는 네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요한복음>(4:5)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의 여인 간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수가’ 성 우물가 근처의 땅을 ‘야곱’이 ‘요셉’에게 준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음(하지만 <창세기>에서는 이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음); (2) ‘스데반’ 집사가 공회 앞에서 유대 역사를 회고하면서 ‘요셉’과 관련한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함(행 7:9-14); (3) <히브리서> 11장에서 <구약>의 믿음의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포함하고 있음(히 11:21-22); (4) <계시록>에서 종말의 때에 요셉 지파에 속한 일만 이천의 하나님의 종에 관한 언급 중에 등장함(계 7:8).
예수님도 ‘요셉’에 관해서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에 대한 인물 평가를 하기 위하여 참고할 만한 아무런 <신약>적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료라고는 결국 <요셉 이야기> 그 자체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모형.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설득력 있는 ‘요셉’에 대한 이해는 그를 그리스도의 모형(模型)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 해석의 원리에서 볼 때 전형적인 “모형론적 해석”(좁게는 기독론적 해석)으로서, <신약>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만, 두 인물의 사이에는 나름대로의 유사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유사성들이 있는지 열거해 봅시다(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팡세>의 작가 ‘파스칼’이 그의 책에서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요셉’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의 고전(古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총애하는 한 아들, 아무런 흠도 잘못도 없는 그를 형들에게 보냈으나, 형들은 그를 은 이십 냥에 팔아넘겨버린다. (그러나) 바로 이 일을 통해서 그는 자기 형제들은 물론, 이방인과, 온 세상의 구주(救主)가 된다. 만약 형들이 그를 배척하지 않았거나, 죽이려고 모의하지 않았거나, 결국 그를 팔아넘기지 않았다면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죄 없는 ‘요셉’은 감옥에서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예수님 역시 두 명의 다른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두 명의 죄인들은 외형상 아무런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살아남게 될 것이고, 다른 한 명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한 사람은 택함을 입었다는 이유로 구원을 받았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동일한 죄로 인해서 저주를 받아야만 했다. 요셉은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예언을 해 주는 것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은 그 예언을 행동으로 성취시키셨다. ‘요셉’은 살아남게 될 죄수에게 나중에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예수님으로부터 낙원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죄수는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중에 임할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리스도인의 모델. 이처럼 ‘요셉’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흥미롭고 매력적이긴 하나, 오늘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교훈을 주기에는 미흡한 면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위한 “역할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요셉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있다면 ‘요셉’ 자신의 인격적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단순히 자신의 무죄함을 입증하는 것을 뛰어 넘어,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게 한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낸다면, “일관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믿음”; “정의에 대한 일관된 신념.” 그러니까 그가 거둔 승리는 단순히 한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승리를 거두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믿음은 그로 하여금 인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경우를 만나든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일관된 믿음은 그로 하여금 타협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인이 되라”는 그 흔한 금언도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이집트’인으로 살 수도 있었습니다. 집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한들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좀 했기로서니 누가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같은 교회 식구이겠습니까? 목장 리더이겠습니까? 어차피 피장파장 아닌가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소명과 책임이 무엇인지 알았고, 아는 바대로 행동했습니다. 누가 보건 보지 않건, 손해가 되건 안 되건, 감옥에 갇혀 있건 총리 자리에 있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단순히 꿈꾸는 신앙인에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된 ‘요셉’은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타인의 질시와 미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까?
어떻게 은밀한 성적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을까?
어떻게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한 마디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셉’은 실로 참된 신앙인의 역할 모델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누구의 역할 모델이 되고 있습니까?
2. 하나님: 섭리와 언약
<요셉 이야기>의 인생관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낙관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여러 시대를 두고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족장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만, <아브라함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를 비교해 보자면 두 이야기 모두 열네 장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길이에 있어서는 <요셉 이야기>가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가 <창세기> 속에 있는 이유는 단순히 흥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을 찾아내어 ‘요셉’을 위대한 “사계절의 사나이”로 만들어 준 자가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이야기의 진정한 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요셉’이 위대한 “사계절의 사나이”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누가 그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을까? ‘바울’은 그 비결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애 내내 그를 지켜주신 것처럼, ‘요셉’의 110 년의 생애동안 단 한 번도 그로부터 눈을 떼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한 행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를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섭리”(providence), 그리고 다소 경직된 표현을 빌자면 “예정”(predestination)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통상 그렇듯이 신비하고,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칠 년 동안의 대 기근으로부터 그 나라와 수백만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었을까? 만일 ‘바로’ 왕이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왕의 신하들 중에서 누군가 왕의 꿈을 제대로 해석을 해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과 함께 동료 죄수로 감옥에 있던 자가 ‘요셉’을 왕에게 천거해 주지 않았다면? ‘요셉’이 감옥에서 동료 죄수들의 꿈을 해석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가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갔더라면? ‘이집트’로 팔려오지 않았더라면? 형들의 미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그를 편애하지 않았다면? 그가 채색 옷을 입고 형들이 가축을 돌보고 있는 곳으로 가지만 않았다면? 질문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인공 ‘요셉’의 고백에 따르면, 이 모든 일들이 선하든 악하든, 크든 작든, 중대하든 시시콜콜하든, 마치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인생에서 결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 같이 의미 없는 일이란 없다는 것이지요. 주변적인 사건들,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들, 짜증나는 일들, 슬프게 하는 일들, 절망하게 하는 일들조차도 나의 이야기, 즉 <요셉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해서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거장(巨匠)다운 솜씨를 발휘하셔서 아름답게 녹여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나도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간증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에서 그처럼 쓸데없고, 불필요한 일들조차 함께 섞어 ‘요셉’이라는 걸작품을 만들어내셨을까요? 한 마디로 그분의 “언약”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요셉 이야기>가 단순히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아닌 <족장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창세기>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가 특별히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련해서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를 보게 됩니다. 땅과 후손과 축복과 관련한 성취를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요셉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을 떠나 이집트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수 세기 후에 ‘야곱’의 후손들이 이곳을 떠나 ‘시내’ 산을 거쳐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야곱’의 후손은 열둘에서 칠십으로 늘어나고, 점차 더욱 큰 무리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가 끝날 때까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큰 나라”(12:2)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만,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12:2)는 약속은 ‘요셉’이 무명의 노예 신분에서 왕 다음가는 권좌에 올라 그 땅의 유명인사가 됨으로써 일부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드러내 주는 극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 때조차도 함께 했음을 화자는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39:2, 3, 21, 23).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언약” 중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2:2)는 축복에 대한 약속 또한 ‘요셉’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를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은 다름 아닌 ‘보디발’이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39:3). 그러나 이것은 약과입니다. 훗날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각국 백성이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다”(41:57)는 사실에서 그의 가족은 물론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요셉 이야기>가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가 아니라 반대로 언약의 후퇴 내지는 퇴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부터 미래에 구속의 땅이 될 ‘이집트’로 내려가는 모습에서 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분적인 성취는 부분적인 미성취를 뜻하기도 합니다. 마치 절반의 성공이 절반의 실패를 의미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가고자 했을 때, <족장 이야기>에서는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셨다는 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46:3-4). ‘야곱’에게 하나님의 이 약속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것은 그가 취하게 될 행동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임종 시에 조상의 무덤이 있는 ‘맥벨라’ 동굴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49:29-30). 마찬가지로 ‘요셉’도 그의 형제들에게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50:25). 이처럼 <창세기>는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를 다루고 있으나 동시에 그것이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 여전히 미해결의 숙제가 많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는 속편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라는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오경>의 나머지 책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요셉 이야기> 그 자체에만 주목해 볼 때 하나님의 섭리는 이야기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주인공 ‘요셉’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3. 야곱과 아들들: 자유와 책임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섭리”임에는 틀림없지만, 또 하나 중요한 주제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무엇일까요?
“인간의 책임”입니다. 만일 <요셉 이야기>에서 이 두 번째 주제를 무시해 버린다면 <성경>의 가르침은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나 계획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역사와 인생을 주관해 가신다면, “누가 그 뜻을 대적할 수 있겠으며 대적한들 어찌 허물할 수 있겠습니까(롬 9:19)?” 누가 ‘이집트’의 ‘바로’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가롯 유다’를 비난할 수 있겠으며, ‘야곱’과 ‘요셉’의 형들을 야단칠 수 있겠습니까? 그들 모두는 무대의 조명이나 장치에 불과한 자들로서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롯 유다’가 정해진 각본에 따라 은 이십 냥에 주님을 팔아넘긴 것처럼, ‘요셉’의 형들도 같은 은 이십 냥에 동생을 팔아넘긴 것 역시 정해진 각본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저 우리 인생이 할 수 일이란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운명론자가 되어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맡기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학자 ‘브루그만’(Brueggerman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나 계획과 함께, 또는 이들을 통해서, 또는 이들을 거슬러서 역사하신다.” 즉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책임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가롯 유다’는 하나님의 정해진 뜻과는 상관없이 응분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나 ‘요셉’이나 그 형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만 했을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사도는 지금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핵심 요소들입니다.
<요셉 이야기> 역시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의 심각한 결과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편애는 시기와 미움을 낳고 종국에는 살인에 버금가는 친족 유기라는 끔찍한 범죄에까지 이르는 것을 봅니다. 비록 살인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한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은 이십 년이 흐르도록 방치된 채 한 가정을 분열과 해체 직전까지 몰아갔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일차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화자는 먼저 ‘야곱’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주된 원인 제공자로서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의 편애가 문제였습니다. 만일 그가 여러 자식들 중에서 한 아들만 유난히 편애하지만 않았어도 형제들 사이의 갈등과 원한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야곱’ 역시 편애의 희생자라는 전력(前歷)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 이야기>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 이야기>는 <야곱 이야기>와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 염소 털과 형의 옷을 가지고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이, 이번에는 그의 아들들이 보여주는 염소 피와 옷을 보고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인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부모의 편애가 빚은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형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이를 피해 이십 년을 객지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뼈저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모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 명의 아들들 중에서 유독 ‘요셉’만을 편애함으로써, 이전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요셉’을 피해자로 만드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이전에 그의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타의에 의해 형들을 떠나 이십 년을 객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한 가정을 향한 저주의 고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습니까? 혹시 그가 책임 질 일은 없습니까? 그는 정녕 이 모든 일과 전혀 무관하게 살았습니까?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은 듯합니다. 화자는 ‘요셉’에 대해서 ‘야곱’에 대해서만큼 단도직입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서막을 통해서 ‘요셉’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없을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친다든지”(2절하), 비록 아버지의 심부름이긴 하지만 “형들의 동정을 살피러 그들이 양을 치며 일하고 있는 먼 ‘도단’까지 채색 옷을 입고 온다든지”(14-17절) 하는 등의 일로 형들의 시기와 분노를 자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4절). 형들이 그를 결정적으로 죽이려고 모의하게 만든 것도 그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하던 당시 근동 사회에서 ‘요셉’이 들려주는 꿈의 내용은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무례한 것이라 형들은 물론 그의 아비까지 분노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10-11절). 사실 그의 꿈은 훗날 진실로 하나님의 예언이었음이 밝혀지겠지만, 가족의 반응은 이 꿈의 성취 여부와는 상관없습니다. 화자는 ‘요셉’이 거짓말을 했다거나, 형들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했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의 언행은 다소 경솔하고 진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가 열일곱 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정도의 실수쯤은 얼마든지 지나쳐 버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의 형들은 이조차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요셉’의 형들의 책임이 가장 무겁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필자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비정함이나 잔인함에 있어 이들은 실로 ‘가인’의 후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가인’이 동생을 향한 살의(殺意)를 행동으로 옮겼다면, 이들은 살인 미수에 그쳤다는 점뿐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에 있어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인’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계획하고 수행했지만, 아홉 명의 형들이 한 동생을 죽이려고 모의한 적은 비단 <성경>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그 어디에도 전례를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멀리서 오고 있는 동생을 보고 죽이려고 했고, 그들의 아비에게는 짐승이 그를 물어갔다고 거짓을 말할 참이었습니다. 다행히 가장 맏형 ‘르우벤’의 개입으로 ‘요셉’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동생이 도착하자말자 그를 때려 눕혀, 그 꼴 보기 싫은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 속으로 집어 던져버립니다. 그리고는 살려 달라 애원하는 동생의 절규를 들으면서 구덩이 어귀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다가, 때마침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그를 은 이십 냥에 팔아넘겨버렸습니다. 그들은 동생을 생물학적으로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죽음을 맞게 한 셈입니다.
무엇이 ‘가인’과 이들 ‘가인’의 후예로 하여금 종족 살인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했을까?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창 37:11, 행 7:9). 이것이 그 모든 죄악의 뿌리였습니다. <잠언서>는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잠 14:30), <야고보서>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약 3:16)고 말합니다. “시기심”이라는 뿌리는 필경 “미움”의 싹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화자는 세 번에 걸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4, 5, 8절). 나무의 싹은 그 상태로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 이야기>에서나 <요셉 이야기> 모두에서 그 열매는 “살인”(또는 살인 모의)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시기심이 그를 삼키기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그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형들은 시기심을 억제하기는커녕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으며, 그를 죽이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혹시 내가 시기하는 동료는 없습니까? ‘가인’과 ‘요셉’의 형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일입니다. 나를 시기하는 동료는 없습니까? ‘요셉’을 바라 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마지막으로 <요셉 이야기>가 나의 책임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장차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아마도 지금 당장은 대답을 찾을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말대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드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개척자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계획하고 시도해 보고자 할 때, 우리는 열심히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그 일이 커고 중요할 때에는 우리의 간구는 더욱 절실해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실패가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패가 더 두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획했던 일이 실패로 끝날 경우 자칫 그 일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으로 결론내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실패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없던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모두 실패한 자들입니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듣고 돌이켜 회개한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자면 실패나 성공의 의미는 우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일, 즉 진정한 성공은 우리가 원래 계획했던 일이 성공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만,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또한 성령 충만을 우리에게 주실 주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로 하여금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뜻과 함께, 또는 우리의 뜻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신비하게도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역사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게 하신” 구체적인 예가 있으면 나누어 봅시다.
2. ‘요셉’의 인격적 특징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도 토의해 봅시다.
3. “하나님은 나와 함께, 또는 나를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나의 의지에 반하거나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4.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결단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나의 이야기>에서 다음 한 주의 삶이 어떻게 한 부분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각오를 피력해 봅시다(구체적으로).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