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장성한 신앙
김태정 목사히브리서 5:12-6:2약 6분 분량
출생은 하였으나 자라지 않는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어머니는 늘 수심에 잠겨있었습니다. 남편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 그리고 본인의 교육 수준 등만 놓고 볼 때, 대한민국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 자식 중에 가장 큰 딸이 지진아(遲進兒)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난지 12년이 되었음에도 자기 손으로 먹고 입는 것은 고사하고 의사 표현도 할 수 없으며, 육체나 지적 수준이 태어날 때 그대로였습니다. 그 딸과 함께 십 수 년을 살다보니 이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에 깊은 수심이 베어버린 듯 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즐겁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성장이 결코 멈출 수 없듯이, 우리의 영혼이나 인격 또한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육체가 자라기 위해서는 영양분을 취해야 할 것이며, 영혼과 인격이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도 그에 합당한 영양분을 취해야 가능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이점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5:12-6:2)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수심(愁心)이 어리게 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맹인이었던 우리의 주인공은 아닌 게 아니라, 서서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의 이웃은 별로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의 복음의 간증을 들었고 합당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듯합니다.
오늘은 부득이 제가 본인 자랑으로 설교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듣기에 다소 거북하시더라도 저의 어리석음을 용납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영어로 강의를 하고, 연구 논문을 쓰며, 국제회의에 나가서 영어로 발표를 하는 일은 대학교수라 해서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대학의 현실입니다. 본인이 근무하는 학과만 해도 몇몇 교수님들은 나에게 영어 논문을 써달라거나, 또는 교정을 좀 봐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내가 상당한 수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논문을 쓰는 데에도 나에게 부
그리스도인이 경영하는 사업장에서 자주 만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과연 이 구절이 사업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장밋빛 공약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잠언서>의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개역). 이 두 구절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습니까?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어떻습니까?
30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여기서 내 마음을 사로잡는 대목은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입니다. 가장 작다는 겨자씨가 자라고, 또 자라서 공중의 새들에게 더할 수 없는 유익한 선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태초에 ‘아담’ 부부를 향한 “창조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참고. 창 1:28). 물론 여기서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침략하고 파괴하라”는 말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왕이나 권력자가 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방식은 “심복”(心腹)내지는 “덕치”(德治)입니다(참고. 막 10:35-45).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라는 것이겠지요. 그리하여 마음으로부터 복종을 이끌어내라는 것일 겁니다.
인데도 그랬습니다. 한다며가장 작다는 겨자씨가 점점 자라고 또 자라서 새가 깃들일 정도가 되었으니, 이 씨는 그야말로 는 창조의 명령에 충실하여 약속과 본연의 목적을 이루었다 하겠습니다(참고. 창 1:8). 과 약속에 충실하게 큰 가장 작은 씨가 모든 근동 지역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던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약속은 반드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직전의 구절입니다: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성장은 같은 빛이라 하더라도 사막에 내려쬐는 빛과 오랜 장마 끝에 비치는 빛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빛의 두 가지 기능은 소생과 소멸과 살균의 기능이 있는가 하면, 시들시들 죽어가는 생명체를 살리기도 합니다. 양초를 물렁물렁하게 하는가 하면 진흙은 단단하게 만듭니다. 맹인을 불러 세워 심문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진흙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고도 모른다고 하니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둠은 항상 서로 적대적이며 충돌하는 두 세력입니다. 화자는 서막에서부터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또는 이기지 못하더라)”(5절). 두 번역 모두 타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에 이은 “분리와 분열”은 <성경>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9장의 주제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빛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 도대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요 1:4-5; 요 3:19-21). 다름 아닌 분리, 즉 계시와 심판입니다. 빛은 본질상 밝음과 어두움을 창조해 냅니다. 그러나 빛의 궁극적 목적은 밝음이지 어두움은 아닙니다. 어두움은 단지 빛의 결과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본문 속에 내포된 소재(motifs)들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롬 2:1-11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5절과 39절에서 잘 읽을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이 빛을 받아들인 자와 거부하는 자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해설자는 추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신 적이 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가진 자는 더 가질 것이요 갖지 못한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이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두 경우를 통해서 살펴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