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경>-誣告罪를 고발함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5:40-47약 9분 분량
요 5:40-47
전두환 대통령 시절,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으나 기업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잘 나가는 기업들을 임의로 처분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거나 타인에게 양도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부산에 있던 국제 그룹도 그 중 하나인데, 이 기업이 소유하고 있던 수백억 대의 사옥이 공교롭게도 다름 아닌 당시 국제 그룹 회장 양정모 씨의 사돈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긴 양씨는 정권이 바뀐 후 그 재산을 되찾으려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돈 사이에 법정 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두 사돈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재산권에 관한 법정공방을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양씨는 자기에게 당연히 유리한 증언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피고소인의 며느리가 된 시집간 자기 딸을 증인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그의 딸은 친정아버지가 아니라 시아버지에게 유리한 증거를 해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딸이 자신의 친정아버지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양씨의 편에서 보자면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라 하겠습니다. 시체 말로 완전히 물먹은 것이지요. 정말 이지 증인 잘 세워야 하겠습니다.
법정에 선 예수님과 ‘유대’인들. 각기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증인들은 누구입니까? 이들 증인은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양정모 전 회장님이 친딸을 변호인으로 내세운 것처럼 증인을 잘못 선택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발. 법정에서 피고를 위한 증인의 역할은 피고의 주장이 옳음을 변론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역할일 뿐입니다. 보다 적극적인 역할은 무엇입니까? 원고 즉 고발자의 고발이 틀렸음을 고발하는 데 있습니다. 즉 고발자를 무고죄(誣告罪)로 역 고발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지금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자기 변론을 끝으로 법정을 떠나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단순히 재판장이나 배심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끝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네 증인을 불러내어, 그들의 고발이 온당치 않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발이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37절).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독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누구보다 그분을 잘 알고 있으며, <성경>에 대해서도 달통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착각은 자유”라고 선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혹시 나도 같은 진단을 받지는 않을까요? 나도 매일 <매일 성경>을 통해서 경건생활을 하고 있고, 기도도 하며, 성경공부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내가 도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진단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삼중적입니다. 첫째,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38절). 둘째,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40절). 셋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42절).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입니다. 이와 같은 진단은 예수님의 자기 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을 역 고발하여 피고인의 자리에 앉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쩌다가 이스라엘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이처럼 철저하게 실패하게 된 근본 원인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의 진단인 즉은, 사람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높게 평가한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 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절).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적이나 세상의 인정을 앞세워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을 오히려 더 인정하고 높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 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절).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과 수고를 들이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높이고, 인정하는 교인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이지요. 현대 사회의 선지자는 더 이상 목회자나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나 사제는 과학자이거나 정치가이거나 또는 경제학자들입니다. 국가나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이들이 써놓은 책들이 서점에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예연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신봉하며 따라갑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과 수고를 들이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높이고, 인정하는 교인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이지요. 현대 사회의 선지자는 더 이상 목회자나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나 사제는 과학자이거나 정치가이거나 또는 경제학자들입니다. 국가나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이들이 써놓은 책들이 서점에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예연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신봉하며 따라갑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와 같은 세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3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3-5)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진단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위 과학자나 선지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성경>을 조롱하며 역사의 종말을 거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정욕”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다고 사도는 진단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이름을 높이고 싶다는 정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예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과학자나 정치가들은 늘 자신의 이름으로 논문이나 정견(政見)을 발표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절대 하지 않습니다. 대중들의 신뢰나 지지를 나 혼자 차지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그렇다 치고, 이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무슨 동기입니까? 대개 폐쇄된 사회는 집단사고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눌러두고 집단의 사고를 따라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뻔합니다. 괜한 소리해서 “왕따”를 자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지 못해 안달들인데, 스스로 왕따가 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혼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외롭게 살아가는 것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합니다.
집단사고의 위력은 인터넷에서 여지없이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히들 인터넷이 열린사회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선지자를 자처하는 과학자나 정치가들도 인터넷 앞에서는 벌벌 떱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론 주도자는 인터넷입니다. 대통령도 인터넷이 뽑고, 정부 각료들도 이들이 좌지우지해 버립니다. 국회도, 대통령도 소신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인터넷에 글 한 번 잘못 올렸다가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완전히 매장시켜 버립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이 사회의 여론을 주도해 갑니다. 인터넷은 현대 사회의 ‘바알’이 되어버렸습니다.
‘유대’ 지도자들 역시 집단사고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누구든 예수님의 주장을 인정하고 따른다면, 그는 필경 그 집단의 왕따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저항은 더욱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조직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서나, 자기 세뇌를 위해서 말입니다.
모세의 고발. 그러나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진단이라기보다는 피고를 향한 검사의 논고나, 재판장의 판결문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어느새 원고와 피고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세 구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마치 검사가 논고를 하듯, 또는 재판장이 최종 판결문을 읽어내려 가듯 그를 고발하던 ‘유대’인들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45-47절).
이것은 진단이라기보다는 고발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무고죄를 고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고발하는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이 철석같이 믿어오던 이스라엘의 변호사 ‘모세’랍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요? 자신들의 변호사가 직무유기를 넘어 기만과 배신까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강론을 듣고, 혹시 마음속으로 “그래도 우리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있는데” 하며 내심 자위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무슨 변호사가 의뢰인을 변호하고 보호해 주어야지 느닷없이 검사가 되어 자신들을 기소하고 있다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들 ‘유대’인들이 착각을 해도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닌 것이, 검사를 변호사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검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법률에 입각해서 죄목(罪目)을 정하고 그에 따라 형량(刑量)을 정하면 그만입니다. 율법의 역할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법은 죄인을 구원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자를 가려내어 처벌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검사요 또한 율법인 것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변호사요, 생명의 복음입니다.
배심원의 진단. 이 모든 증인들을 다 살펴보았는데, 그래서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습니까? 침례 ‘요한’의 증언과, 기적의 증언, 그리고 <성경>의 증언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기만 속에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진단도 예수님의 진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3-24)
만일 내가 지금 법정 배심원의 자리에 앉아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면,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억지 주장을 펴면서 한사코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덤벼드는 원고, 즉 ‘유대’인 고발자들을 바라보면서 이들을 오히려 피고석에 앉혀 무고죄로 기소하고 싶은 심정은 아닙니까? 우리 화자의 의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답답함으로 ‘유대’인들을 정죄하도록 유도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놓고 있는 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라! 법정에서 친정아버지의 편을 들어야 할 딸이 오히려 그 아버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는 이 배은망덕한 딸을 보라!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지금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증거를 제시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니!”
이래저래 아들과 아버지는 운명 공동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공동 운명체입니까? 그분과 함께 피고석에 서있습니까?
아니면 <성경>이 내가 피고석에 서 있지 않다며 나를 고발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