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지와 열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5:2-12약 12분 분량
귀신이 들려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수근댑니다(참고. 마 12:22-24).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3-35)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경험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들 법칙은 너무나 지당해서, 마치 공기나 햇빛을 대하듯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는 “인과율”(因果律)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선언이 그것입니다. 예컨대,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인과율과 함께 또 하나 아주 강력한 경험의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흔히 동일설(同一設)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제반 과학법칙이 동일하고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다는 발견입니다. 그것은 이 우주가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즉 인류가 오래 역사를 통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동일한 원인은 항상 동일한 결과를 가져 오더라”는 것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자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은 그 유명한 ‘멘델’(Memdel)의 유전법칙에 대한 한국판 선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이를 일반화하고, 보편화하여,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온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파스퇴르’(Pasteur)는 그 유명한 “자라목 실험”을 통해서 이를 처음으로 규명한 바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생명의 “자연 발생설”(自然發生設)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모양입니다.
인과율과 동일설은 우리 인류의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것으로서, 하도 강력해서 반박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뿐만 아니라, 실험과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적인 회의론자(懷疑論者)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아니라면, 이 두 법칙에 이의(異意)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나, 또는 자연과학을 막론하고, 학문 연구의 주된 동기나 목적도 드러난 현상이나 사건의 원인을 밝히는데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동일설을 대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원인이 시도 때도 없이 그 결과를 다르게 드러낸다면 누가 제대로 된 일관성 있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왜 우주와 자연은 이처럼 일관될까? 이것은 일종의 기원(起源)에 관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성경> 외에는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곳이 없어 보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그래서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참고. 히 1:3; 벧후 4:4). 이 두 선언에 따르면, 우주와 자연이 일관 된 것은 하나님이 일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가지. 그런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불가사의(不可思議) 그 자체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인과율도 동일설도 모두 틀렸음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봉 종자에서 노지 포도가 나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와 버렸다는 말입니다. 속 썩이는 자식을 두고 흔히 부모들이 한탄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저런 자식이 나한테서 나왔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는 사실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참고. 사 5:4, 7; 렘 2:21).
아버지의 자랑이요, 기쁨이 되어야 할 아들이 오히려 수치가 되고 후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생명에서 생명이 나와야 하는데, 생명에서 죽음의 열매가 나와 버렸습니다. 빛에서 어둠이 나왔습니다. 어릴 적에 천재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아이가 점차 평범한 아이로 자라가는 것을 자주 봅니다. ‘삼손’도 그와 같았습니다. 특별하게 구별된 아이로 태어났는데, 혈기(血氣)와 주색잡기(酒色雜技)로 청년 시절을 보내다가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거지로 인생을 마감한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출생이 거룩한 인생을 보장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축소판입니다.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교회를 얼마나 힘들게 개척하셨는지 우리는 압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공원 산책 나오듯이 한가하고 여유롭게 ‘이집트’를 빠져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밤중에 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기사(奇事)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에서 탈취(奪取)해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힘들게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힘든 교회개척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난산(難産) 끝에 사산(死産)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점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입니다. 인과율이나 동일설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결코 그럴 리는 없습니다만, 왜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이들 법칙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일까? 왜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했을까? 여러 가지들 중에서 유독 이스라엘의 가지에만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야살의 책>에서 노래하고 있는 바처럼(수 10:12-13), 태양이 그 운행을 잠시 멈추었기 때문일까? 처음에 좀 자라다가 말라 죽어버렸기 때문일까? 처음부터 가지가 부러져 있었기 때문일까? 싹수가 노랗다 싶어 농부가 아예 처음부터 꺾어버렸기 때문일까? 다시 한 번 이런 저런 원인들에 대해서 논의를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인보다는 오히려 처방에 더 방점(傍點)을 두고 계신 듯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그 처방이 무엇일까? 본문(4-10절) 사이에서 마치 폭죽 터지듯 무려 열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한 단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하다”(mevnw, 메노). 즉 “남아있다”(remain; stay) 또는 “계속 머물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지금 처방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도 동시에 진단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진단이란 이것입니다: “가지가 말라죽은 것은 나무에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진단은 곧바로 처방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가지가 되려거든 나무에 계속 머물러 있어라.” 즉 “내 안에 거하라”는 처방이 그것입니다. 이는 “새롭게 들어오라”는 초청이 아닙니다. “문을 열고 받아들이라”는 초청이 아닙니다. 그냥 지금 있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줄기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3절).
외과(外科)적 수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거수술이고, 다른 하나는 이식(移植)수술입니다. 전자(前者)는 환부(患部)를 도려내고 새 살이 솟아나도록 하는 방법이고, 후자(後者)의 경우는 건강한 새 살을 환부로 옮겨와서 접합을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식물에도 이와 유사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지치기”(pruning)와 “접붙이기”(grafting)의 원리가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원리를 이방인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각각 비유로 적용하고 있습니다(참고. 롬 11). 이 둘은 각기 이스라엘 교회와 신약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가지치기”로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이방인을 “접붙이기”로 이식시켰습니다. 나무는 “참 포도나무”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이들 가지들이 어디에서 왔건, 그 수가 얼마이건, 나무줄기에 붙어있는 한, 모두 동일한 열매를 맺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뿌리가 같고, 가지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인과율과 동일설에 따르자면,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열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으니, “그리스도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5절).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슨 피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컨대, ‘노아’의 가족이 대홍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홍수기간 내내 그저 배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배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무슨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선택된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 이 또한 애매모호(曖昧模糊)한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절). 어떤 계명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1절). 더 이상 분명할 수가 없는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하지만 우리는 계명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항상 처벌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 TV 드라마에서 이런 대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神)도 완전하지 않아. 왜냐하면 인간이 잘못하면 벌을 주기 때문이지.” 이처럼 신에 관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은 비단 종교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인류의 보편적 생각 같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도 처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들립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 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절).
일견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자면,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경고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무익한 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에 사르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런 식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잘려나간 포도나무 가지를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집을 짓겠습니까! 울타리로 쓰겠습니까! 큰 불을 일으키는 재목으로 쓰겠습니까! 이스라엘에의 역사에서 한 때, 성전(聖殿)에서 희생제물을 태우는데 필요한 땔감으로 나무를 가져와야 한다는 규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여기서 제외되었다고 합니다(W. Barclay).
땔감으로도 적당치 않다는 판단에서였겠지요. 포도나무 자신으로 보자면, 이 얼마나 큰 수치이자 모독입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로 취급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무도 이들 가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여겨 태워 없애버린다는 것이지요. 나는 이것이 6절의 의미이자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대학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교수, 군대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병사, 직장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직원, 교회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교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예언인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처지를 한심하게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늘어진 개 팔자라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합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직장이나 군대에서, 편하고 책임질 일 별로 없는 보직(補職)을 원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훈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이 말씀은 그림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호수나 강가의 나루터에 묶여있던 배가 닻줄이 스르르 풀리면서 흘러내려가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대목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유념하라”입니다. 왜냐하면 정작 이 훈계가 필요한 당사자는 지금 자신이 흘러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당시 ‘예루살렘’ 성벽의 처지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아주 조금씩, 금이 가고, 그 새로 빗물이 스며들고, 벽은 갈라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그 사이로 잡초가 자라고, 여우나 다람쥐와 같은 들짐승들이 드나들게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城) 안과 밖의 구별이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주일 예배 참석도, 개인적인 묵상도, 기도도, 성도 간의 교제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내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겪었던 것처럼, 내 영혼의 성벽도 그런 식으로 무너지고 와해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내 모습을 바라보니, 내 안에 잡초가 무성하고, 온갖 들짐승들이 뛰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탄 배는 돛이 풀려 항구를 멀리 떠나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성벽을 다시 세우고 싶다는 의지도, 항구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욕구도,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찾지도, 필요로 하지도, 기억도 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열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의 열매”는 내가 이루어야 할 그 무슨 의무나 책임이라기보다는 나에게 그저 값없이 주어지는 보상이요 유익(有益)인 것입니다! 내 존재를 의미 있게 해주는 보상이자 유익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유익을 말하는 것일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충격적인 약속입니다! 누가 이 약속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무슨 자격으로 이처럼 엄청난 기도를 아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의 체면이나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누울 자리 보아가며 누어야지요! 정말 그럴까? 정말 나는 무엇이든지 아뢰기 전에, 내 판단에 따라 들어주실 만 한 기도제목들만 골라서 아뢰어야 할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예의바른 길이 아닐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주님은 “열매”, 즉 “그리스도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이나, 그에 따른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열매가 주는 유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라면 누구나 누리게 될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처럼 담대하고, 무모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겁도 없이, 원하는 것을 기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왜냐? 내 편에서 보자면,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가 당신에게 영광이 되는 일을 왜 마다하시겠습니까!
본문의 핵심은 “열매를 맺어라”가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라”입니다. 열매는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는 이미 깨끗하여 졌느니라.” 나는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