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유다도 함께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21-30약 12분 분량
본인의 아내는 요즘 큰 아들 달우가 어렸을 적에 왜 그렇게 심하게 구박을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종종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작은 아들 학우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음에도 말입니다. 아마도 작은 녀석이 큰 녀석에 비해서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라며, 그래서 애처롭고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최근까지 아내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우리 부부의 이와 같은 심정은 <누가복음> 15장에서 들려주는 세 비유의 주인공들의 심정과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심정, 충실하고 성실한 큰 아들이 집에 있음에도 집나간 작은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은전 아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잃어버린 하나를 찾으러 온 집을 뒤지는 한 여인의 심정 말입니다.
왜 이들 비유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없는 것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부질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식을 키워본 부모라면, 잘난 자식보다는 못난 자식, 똑똑하고 잘나가는 자식보다는 부족하고 모자라는 자식, 착하고 말 잘 듣는 자식보다는 말썽 피우는 자식에 대해서 더 애착을 가지고 안쓰럽게 여겼던 경험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똑똑하고, 말 잘 듣고, 잘나가는 자식은 사실 그냥 두어도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식은 그냥 두었다간 필경 실패자로 끝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겠지요.
유다에게 빛을. ‘가롯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심정도 이와 같았을까요? 다만 여느 부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미래와 그 종말에 대해서 이미 훤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예수 공동체 밖의 사람이었으며, 운명적으로 “자기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예수님 스스로 밝힌 바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하).
<성경>도 여러 곳에서 그의 운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었으며, 그의 비극적인 종말은 단순히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일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참고. 행 1:16). 예수님 자신도 같은 말씀을 바로 이 자리에서 하고 계십니다: “내 떡을 먹은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절). 이런 그가 무슨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것뿐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21절). 화자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 예수님의 심중은 마치 연못의 물이 요동치듯 격동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화자는 이전에도 한 번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성전을 모독할 때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깊은 분노와 동요를 일으켰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2:13-17). ‘유다’에게 닥쳐올 그 엄청난 결과를 미리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지금 안타까움과 고통으로 전율(戰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모순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리 결과를 정해놓고 그것을 되돌리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닌 듯싶습니다. 오히려 경험과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듯합니다.
예컨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미래에 닥칠 좋지 않은 일을 미리 알고 있다 해서 염려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수술을 앞둔 환자가 불안해하는 것은 의사를 믿지 못해서이거나, 수술이 잘못될 것이라는 의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이나 또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냥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너희 중에 나를 배반할 자가 있다”는 선생님의 진단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단순한 예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실 분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비록 ‘유다’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바꾸어놓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은 아닐까? 그러므로 ‘유다’에 관한 그분의 그 유명한 역사적인 예언은 사랑하는 친구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행동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분은 지금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안 되는 줄 알면서 말입니다. 처음부터 “자기 사람”이 아닌 사람을 제자로 삼아, 그를 “자기 사람”으로 되돌려놓으려 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행여나 돌이켜 회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음일까? 교회의 식구로 함께 살다보면 변화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했음일까? 설교하고, 가르치고, 기적을 보여주고, 희생하고, 그리고 모범을 보여주면 언젠가는 변화될 것으로 기대했음일까? 그러나 결국은 허사로 끝이 날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설교도, 비유도, 헌신도, 기적도, 겸손도, 권면도, ‘유다’를 바꾸어놓는 일에는 실패할 것이었습니다. ‘유다’, 그는 실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제자였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할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오래 동안 학교와 교회에서 제자들을 상대로 가르치고 훈련시켜왔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역은 그 자체로서 힘들고 고달픕니다. 배우는 학생이나 제자의 믿음과 순종은 별개로 치더라도, 선생으로서 지치지 않는 열정이 있어야하고,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하여 부단 없이 노력해야 하며,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나 선생 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약 3:1).
그런데 선생이 이와 같은 모든 자질이나 필요조건들을 다 갖추었다 해서 제자훈련이 성공할 수 있을까? 배우는 자가 제자가 되고, 영적 자식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실패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탁월한 선생님으로부터 보았고, 배웠으며, 현장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롤 모델’로서의 예수님은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모범적인 삶이 내 이웃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를 교회에 데려다 예배에 참여시키고, 설교를 듣게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 변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교회에서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유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변화는 듣고, 보고, 배움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중생” 즉 “거듭남”의 문제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필요했던 중생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사도는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영적 자식이라 말합니다. 복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써 자식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나에게도 이와 같이 내가 복음으로 낳은 영적 자식이 있습니까?
사도는 지금 자신과 그들 사이에 동일한 영적 유전자가 있고, 동일한 영적 피가 흐르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영적 대물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이 같아지고, 사상이 같아지며, 목표와 비전이 같아지며,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와 순종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면이나 질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무어라 말하기 전에 이미 다 해 놓습니다. 마치 성부 하나님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성자 예수님께서 스스로 알아 하시는 것과 같은 관계입니다.
이 말은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과장이나 문학적 수사가 결코 아닙니다. 나의 일상에서도 이 같은 일을 여러 차례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전에 나와 공동체를 함께 했던 나의 제자들은 나를 교수님, 목사님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나를 아버지 또는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그들이 나를 존경하고, 신뢰하며, 나의 도덕적 자질에 존경을 표하는 말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허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동일한 영적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내가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나를 어떻게 부릅니까? 목사님? 교수님? 그렇다면 아직 우리 사이는 교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냥 교회에서 서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목사와 성도 사이일 뿐입니다.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관계 말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을지 궁금합니다. 예수 목사님 또는 교수님으로 부르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발꿈치를 듦. 어쨌든 ‘유다’는 수년간의 예수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도 거듭나지 못했음을 그의 행동이 보여줍니다. 성령 하나님이 그 안에 없었습니다! 다른 지체들과 함께 배우고, 듣고, 예배와 사역에 참여했음에도 여전히 그는 이방인이었고,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초청은 받았으나 택함은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는 초청을 단순히 거부한 것이 아니라, 청첩장을 들고 온 배달부를 잡아 죽이는 일에 공모했습니다. 선생님의 애틋한 권유에 발꿈치를 드는 것으로 반응했습니다. 근동지방의 풍습에 의하면 빵과 소금을 나눈다는 것은 서로를 계약으로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발꿈치를 든다는 것은 배반의 정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 벌써 그 계약을 어길 궁리를 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단순히 배신을 넘어, 모독과 적개심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거짓이요, 사기(詐欺)입니다. 그는 지금 허위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유다’의 내면세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이 어떠한지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행동은 생각이 나타난 결과일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배반의 싹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악마 그 자신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귀가 원래 “속이는 자”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는 마귀가 자기 마음을 빼앗고, 통제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허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막힌 사실은 남을 속이는 자는 먼저 자신을 속여야 합니다. 즉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먼저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괜찮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하지만 이 같은 자기 합리화는 실은 스스로에게 최면(催眠)을 거는 것, 즉 자기를 속이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마귀, 즉 “속이는 자”가 이런 식으로 자기를 속이고 있었으니, 그는 어쩌면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드러난 결과는 그가 바라던 바와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마귀를 허용하셨을까? 같은 질문을 ‘유다’에 대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유다’를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삼으셨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두렵게 하는 한 가지 교훈이 떠오릅니다. 교회에 ‘유다’와 같은 회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고가 그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도 그의 실체를 눈치조차 챌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전율하게 합니다.
세상 끝 날까지 ‘유다’는 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다’를 가려내고 속아내는 수고는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좋은 씨와 가라지는 늘 함께 자라므로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참고. 마 13:24-30). 예수님의 충고인 즉은,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온 집을 태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밤을 향하여. 지금 예수님 자신도 끝까지 “가라지”, 즉 ‘유다’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고 인내하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를 끝까지 영광의 자리 즉 그분의 옆 자리에 앉혀두고 있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은 서로 선생님의 왼편과 오른 편에 앉겠다고 싸웠겠습니다만(눅 22:24), 예수님은 아마 ‘유다’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다’야, 이리 오너라. 내 왼편에 앉아 나랑 이야기 좀 하자꾸나.”
그렇다면 ‘유다’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분의 속삭임, 숨 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그가 스스로 떠날 때까지 이 영광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떡을 떼어주었고, 발을 씻겨주었으며, 겸손과 나눔에 대해서 강의하셨으며, 그의 반응을 인내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오, 주님 어쩌면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나이까!
그러나 ‘유다’는 전혀 감동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태연하게 다른 제자들처럼 행동했습니다. 입을 벌려 그분의 떡을 받아먹었고, 발도 내어놓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하게 속삭입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하). 원래 계획했던 대로 행하라는 것이겠죠. 예수님은 그가 최종적으로 어두움의 권세에 복종하도록 몰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유다’는 화들짝 놀랐겠지요. 그의 속내를 들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떡을 받아먹자 말자 그는 그 자리를 떠납니다. ‘요한’ 화자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절).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둠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화자는 서막에서 이렇게 예고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유다’ 자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선생님이 베푸는 마지막 초청을 걷어 차버렸습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어둠이 올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조만간 어두운 터널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이 통과해야 할 어둠은 ‘유다’가 겪게 될 그 어둠에 비하면 짧고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자신이 선택한 그 어둠 속에 갇혀 고통하고 신음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탄식과 후회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후회는 항상 나중에 찾아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도 “순종이 예배보다 낫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곧 축복입니다. <히브리서>도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그리고 이어서 충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1-2).
좋은 말 할 때 듣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경고로 들립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 가운데 거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