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6): 다 이루었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28-30약 11분 분량
죽으면서 “나는 정말 원(怨)도 한(恨)도 없이 살다 가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전도서>의 ‘솔로몬’이 아마 그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오히려 그는 부질없고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원(怨)은 무엇이며, 또 한(恨)은 무엇입니까? 이 둘은 서로 어떻게 다릅니까? 일견 같은 것 같은데, 이어령 선생은 이 둘은 전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분에 따르면, 한이란 어떤 외부의 힘이나 방해로 이루지 못한 욕망입니다. 원도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것 같기는 합니다만, 한풀이와 원풀이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춘향이에게 있어 변학도에 대한 감정은 원이지만, 이몽룡에게는 한이 됩니다. 춘향이의 시(詩)가 변학도에게 향하면 원풀이의 언어가 되며, 이 도령에게 향하면 한풀이의 시가 됩니다.
춘향이의 원이 행동으로 나타나면 원수(怨讐)를 갚는 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 사또에게 복수를 한다 해도, 이 도령을 만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한은 풀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것을 멸할 수 있어도 평생 동안 마음속에 담아둔 그 한은 없앨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은 숭고하고 참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생각입니다. 흔히 우리 한국인을 한의 민족이라 하는데, 한국인이 종교로부터 구하려고 한 것도 영생이 아니라 어쩌면 그 한을 풀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어령 선생은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을 참으로 숭고한 “한의 시”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심훈이 이 한편의 시로 불멸의 시인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재미 삼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여기서 “그날”은 조국의 광복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춘향이를 심훈으로 바꾸고, 변학도를 일제(日帝)로, 그리고 이 도령을 광복으로 바꾸면, 왜 이 시가 한의 시가 되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어령 선생이 이 시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잠깐 들어보기로 합시다:
시의 첫 번째 연이 죽음보다도 강한 “한풀이”를 노래하고 있다면, 두 번째 연에서는 죽음보다 강한 “신바람”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제 1연에서는 제 머리로 인경을 받아 종을 울리지만, 제 2연에서는 칼로 제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친다. 종소리가 민족의 한을 푸는 소리라면, 북소리는 민족의 행진을 이끄는 신바람의 소리다.
(중략) 그러므로 그 속에는 북과 북을 치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자기 가죽으로 만든 북을 자기가 친다고 했다. 치는 것도 자기요, 울리는 것도 자기다. 사람이 북이 되고, 북이 사람이 된다. 그러한 신명의 북소리는 삼각산 한강수와 교감은 물론 생과 죽음의 문지방마저도 횡단한다. (중략)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의 종소리와 신바람의 북소리는 다 같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점이다. 한의 종소리는 자신의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소리이고, 신명의 북소리는 자신의 살가죽을 칼로 벗겨내는 소리이다. (중략) 그러므로 그날의 기쁨을 뒤집기만 하면 가혹한 일제의 압제 상황인 오늘에 대한 고발과 분노의 심판이 되는 것이다.
테텔레스타이. 어떻습니까? 지금 십자가의 상황을 이 시에 그대로 대입한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심훈에게 “그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로 남아있다면, 예수님에게 “그날”은 지금 당장 이루어진 현실입니다.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30절)”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무런 여한(餘恨)도 없다”는 말씀으로 들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때, 예수님께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이 삼십대에, 동족으로부터는 종교적 이단자로, 로마 당국으로부터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혁명 분자로 낙인 찍혀, 당시 가장 참혹하다는 십자가의 처벌을 받고 죽은 죄수를 누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이 문장은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그 일은 끝났다”, 내지는 “그 일이 다 이루어졌다”입니다. 그러나 듣기에 따라서는 이 말은 자포자기(自暴自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가 무슨 큰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하여 당당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대역무도(大逆無道)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말한다면, 누가 들어도 한 맺힌 최후의 절규로 듣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불과 얼마 전까지 극도의 고통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해도 곁에서도 겨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가 무슨 힘이 남아돌아 큰 소리로, “테텔레스타이”라고 고함쳤겠습니까! ‘요한’ 화자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두 복음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마 27:50);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막 15:37). 도대체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요? 결국 두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큰 고함 소리는 ‘요한’이 전하는 “다 이루었다”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극도의 피곤과 고통 가운데서, 패배나 실패를 자인(自認)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지금 확신과 안도감(安堵感) 가운데서 승리의 환호(歡呼)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안도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안도감이란 아무 여한이 없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느끼는 안도감이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내가 살아가면서 안도의 긴 숨을 내쉴 때는 언제입니까? 내가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안도의 긴 숨을 내쉴 때는 언제일까요? 내가 만일 잠수함 속에서 몇 년을 근무한 해군 장병이라면 어떻습니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마침내 종전(終戰)의 메시지를 듣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요? ‘필립 얀시’는 <내가 몰랐던 예수>에서,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기분을 지구 귀환을 앞둔 우주인의 심정, 내지는 수년간의 잠수함 근무를 끝내고 육지로 올라오는 수병(水兵)의 기분으로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안도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그리고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았다”고 쓰고 있습니다(히 12:2).
그 즐거움이란, “귀환”(歸還)의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힘들고 지친 전투, 그러나 마침내 승리로 마무리한 기나긴 그 전투를 끝내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그 즐거움 말입니다.
혹시 지금 예수님께서 믿음의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침내 내가 가야 할 그 곳, 내가 속한 그 위치와 지위로 돌아가 있는 내 모습을 본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모습을 입고 천사보다 잠시 못하게 되었으나, 이제는 그 남루한 옷을 벗어버리고, 영광과 존귀의 옷으로 갈아입고 만유(萬有)의 주(主)로 앉아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참고. 빌 2:8-10)? <계시록>은 여러 곳에서 영광의 자리에 앉아,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고 있는 “어린 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이 광경! 이 즐거움 때문에, 두개골이 파열되고 가죽이 벗겨지는 아픔도 참겠다던 심훈처럼, 예수님 역시 같은 고통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한’이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 “(영혼이) 떠나가다”(paradivdwmi, 파라디도미)는 <공관복음>의 표현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 단어는 “전하다”, “전수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이전에 그분께서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말씀하신 바를 연상시켜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0:18).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죽음은 자발적이며 의도적인 것이지 어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암시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심훈에게 즐거움의 원천은 조국 광복(光復)이었습니다. 광복이 곧 회복(回復)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즐거움의 원천도 역시 광복에 있다 하겠습니다. 어떤 광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분이 학수고대하던 영광스러운 “왕의 귀환”을 포함해서 “인류의 광복”을 말합니다. “인류의 광복”이란 인간을 본래의 인간으로 재창조(recreation)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하지만 재창조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救贖)이 필요합니다.
재창조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그려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 중의 하나가 구속이라는 그림입니다. 구속은 경제 용어로서, 고대 로마 시대에 노예를 일정 값을 주고 사오는 행위를 말합니다. 오늘날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행위도 영어로 redeem, 즉 “구속”(救贖)이라 부릅니다. 현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현금 외는 없을 터인데, 은행에서 그 가치를 현금과 동일하게 인정해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의 대가는 반드시 등가(等價)의 가치를 지닌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는 곧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무시하고 사람 대신에 짐승(때로는 곡식)으로 값을 치를 수 있다는 법을 만드신 것입니다. <레위기>의 희생제사가 그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다. 짐승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불공정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편에서도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잘못했는데, 짐승더러 그 대가를 치르도록 했으니 말입니다. 사형수를 대신해서 그의 애완견이나 가축을 죽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사형수를 대신해서 그 가족이나 이웃 중 누군가 대신 죽어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느 정신 나간 자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짐승을 대속의 제물(祭物)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일시적이며, 상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스라엘만 이 사실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했을 때, 어찌 그를 거부하고 배척할 수 있었겠습니까?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과 함께 처음으로 지켰던 그 “유월절”을 회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야 했습니까?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 온 땅을 덮쳐 모든 이집트인의 첫 아들을 다 죽였을 때, 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모두 함께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출애굽기>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출 12:21하-22상).
즉 “어린 양”이 대속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정말 치사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닙니까! 그들은 이집트를 빠져 나오면서 하나님의 진노에 부들부들 떨었어야 했고, 동시에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어야 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그런대 지금 그들 눈앞에서 그 때와 똑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28하-29절). 하나님의 아들이 목이 왜 마릅니까? 스스로 생수(生水)로 자처하시던 분이 목이 마르다니요!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 ‘요한’ 화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한 인간의 죽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고한 인간 말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자라면, 이 장면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알아챘어야 합니다. ‘요한’ 화자가 이 장면을 두고, 다시 한 번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28절).
따라서 이 장면을 목도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에 두려움으로 전율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격으로 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어야 할 것입니다:
아, 이것이었구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출애굽이구나! 짐승이 아닌, 사람이 대속의 제물로 죽어가고 있구나. 무고한 어린 양이 아닌, 무고한 한 인간이 나를 위해서 죽어가는구나. 이제 내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인간 대접을 받는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그토록 고상하고, 아름답고, 귀중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남하 목사가 쓴 <예수님짜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지인 즉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가치가 한낱 어린 양 한 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면, 나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출애굽 즉 구속해 내기 위하여 하나님이 치른 가격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존재입니다! 세상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