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 생명의 呱呱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26-30약 9분 분량
조용하던 무대가 갑자기 시끄럽고 어지러워집니다. ‘수가’ 성 내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이제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 둔 채 마을을 향해 달려갑니다. 충격과 흥분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물동이를 내버렸다는 사실도, 왜 우물가로 왔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달려갑니다. 여인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습니다. “어서 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어야지.” 여인의 머리는 온통 이 생각으로 하얗게 되어버렸습니다.
대화가 필요 없게 된 사람은 여인만이 아닙니다. 제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그들의 선생이 왜 이방인 여인과 은밀하게 단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왜 이 여인이 이처럼 황급하게 달려가는 것인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 여인은 지금 왜 물동이를 내버려 둔 채 마을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도대체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화자가 그의 복음서에서 첫 번째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니고데모’가 먼저 경험했어야 했던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거듭남” 즉 “새로운 탄생”입니다.
여인은 이제 첫 번째 ‘아담’의 계보에서 두 번째 ‘아담’의 계보에 그 이름을 새롭게 올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일대 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과의 개인적인 성경공부를 통해서, 여인은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마침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할 그 물을 마신 것입니다.
‘가나’의 기적이 초자연적이고 공개적이었다면, 이번의 기적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내면적이며,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입니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여인이 거듭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그를 주님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그라”던 이 사람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은 이제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인이 거듭났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지극히 평범한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변화”입니다. 여인에게 일어난 변화를 통해서 거듭남의 신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두 가지 변화입니다.
어머니 배속에서 10개월을 지내던 태아가 바깥세상으로 나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보이스’ 목사님은 신생아가 태어난 지 불과 수 초 동안에 겪는 수십 가지의 변화를 아주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만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둠 속에서만 익숙해있던 아이의 눈은 빛에 적응하게 됩니다. 섭씨 36도의 어머니의 체온에서 그보다 무려 20도나 낮은 온도에도 적응하게 됩니다. 그동안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서만 공급받던 영양분을 이제부터 입을 통해서 섭취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혈액 순환도 어머니의 탯줄이 아닌 자신의 심폐 기능을 통해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열려있던 심장 판막은 이제부터 동맥과 정맥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닫히게 됩니다. 그의 허파는 이제 공기로 숨 쉬는 기능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코와 입과 소화기관과 그리고 피부도 그가 태어난 수 초 이내에 모두 변화와 적응을 거쳐 가야 할 것입니다. 새 생명의 탄생에 수반되는 변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태아는 태어나자말자 죽어버릴 것입니다.
‘수가’ 성 여인에게 일어난 변화도 이와 같습니다. 여인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여인에게만 국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듭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변화입니다.
간증-입으로. 이 여인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아이가 태어날 때 산모나 의사가 가장 우선적으로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우는 것은 공기가 폐로 들어가서 호흡을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영적 탄생도 이와 같습니다. 진흙 덩어리에 불과하던 ‘아담’의 코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호흡 즉 생기(生氣)를 불어넣었을 때 그가 비로소 “살아있는 영”이 되었던 것처럼(창 2:7), 누구든 거듭날 때 주변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새 생명의 고고(呱呱)입니다. 우리는 이 울음소리를 다른 말로 간증(干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공중 고백 즉 간증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 공중 고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간증을 통해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간증을 하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사산(死産)이 아니라 생산(生産)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특히 교회 회중 앞에서 간증을 하는 문제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즉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혹자는 간증 대신에 그냥 조용하게 살아가는 쪽을 택합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믿음은 그냥 가슴에 간직한 채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와 이 여인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화자는 짓궂을 정도로 두 사람을 철저하고도 공개적으로 해부하고, 비교해 놓고 있습니다. 적어도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니고데모’는 여인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여인은 아예 관심조차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먼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여인은 오히려 먼저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요리저리 피하기만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는지 예수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초청을 한사코 피해가려 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니고데모’가 훨씬 진지하고 영적인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과연 거듭났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거듭남에 관한 예수님의 그 위대한 강의를 들었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믿음의 고백과 간증을 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공모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가 개입하여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는 함부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7:51). 그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인권 침해 여부인데, 그의 태도는 정말 훌륭하고 고상하며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는 공중 고백이나 간증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발언을 근거로 그가 거듭났다고 확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그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과 유향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9:39). 하지만 이와 같은 행동을 두고 그가 거듭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죄책감에 그렇게 했을 수도 있으며, 누구든 죽은 자에 대해서 이 정도의 예우와 경의는 표할 수는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지난 번 천안 함의 전사 장병들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애도와 경의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그가 거듭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가 거듭났음을 확인할 만 한 아무 증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가 하나님의 호흡을 받아들여 탄생의 큰 울음소리를 터뜨리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니고데모’와 ‘수가’ 성 여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 그것입니다. 여인은 구원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대화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음을 즉각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새 생명의 탄생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9절). 예수님은 “내가 그라”하며 여인에게 나타내셨고, 여인은 주님의 증언을 믿었으며, 주님의 증언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나는 언제 거듭났습니까? 그리고 언제 그 사실을 외쳤습니까? 지금도 수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공적 예배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말입니다.
간증-행동으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시면 달라지는 것은 또 있습니다. 거듭난 자는 입으로 주를 간증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가치관도 함께 달라집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관심사, 우선순위 등등이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화자는 이를 여인의 행동을 통해서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28절상).
늘 그렇듯이 <요한복음>에서 화자의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며, 그래서 마치 생생한 현장 증인의 증거를 듣고 있는 듯합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렸다는 사실이 거듭남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의 주제가 “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물에 관해서 말했고,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해갈시켜 줄 “그 물”을 얻은 것입니다. 하여 이제 그 물동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더 이상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주님을 만난 이후 경험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필자가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은 성경공부를 통해서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나를 만나주신 것이었지요. 아무튼 주님을 만난 이후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습니다. 내 존재의 의미, 삶의 방식, 그리고 인생의 목표 등에 대해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내가 겪은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이 여인과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원래 본인은 체질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지 못하는 아주 소극적이고 소심한 편이었습니다. 누군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면 마지못해 대응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체질은 크게 변하지 않아서, 타인의 인생사에 개입하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별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예외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성도들 앞에서 회심의 간증을 한 이후 목사님을 찾아가 전도할 대상이 있으면 함께 가자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날 이후 나는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대 일 성경공부로 초청하는 일이 내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주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타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아닌 남편에게 달려갔습니다. 자신을 이용하고, 학대하며, 멸시하던 이웃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도 이처럼 미치도록 강권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