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또 다른 보혜사(4)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6:1-11약 14분 분량
한 편의 강의로서 예수님의 <다락방 강론>(13-17장)은 그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 감히 낙제점에 가깝다고 실토해야겠습니다. 그분은 강의 도중 수시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옮아갔다가 다시 처음의 주제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의의 내용이나, 그분의 태도 또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듯하다가 책망하는가 하면, 질문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선문답 식의 답변을 하는가 하면, 또한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근심하고 있다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솔직히 평가하자면, <다락방 강론>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즉 이 강의는 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일관성이나 통일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며, 쓸데없는 반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령님에 관한 유사한 강론도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모순은 소위 편집 설에 입각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배운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즉 <다락방 강론>은 한 편의 주제 설교가 아니라, 여러 장소, 여러 시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락방 강론의 상황 속에 편집하여 삽입한 결과로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반복되고 상충되는 내용들이 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14장을 원래의 <다락방 강론> 전승에 속한 것으로 본다면, 이어지는 내용들(15-17장)은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으로 가정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락방 강론의 상황이라 함은 강론 전체를 흐르는 지배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과 침통함; 염려와 근심. 왜 그럴까? 주님은 제자들을 적대적인 세상 가운데 남겨두고 떠나야 하고, 제자들은 유일한 희망이던 주님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모두에게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종말의 순간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는 성경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 종말은 창조와 함께 이미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 순간이 이제 더욱 임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종말의 징조. 제자들은 이 종말이 영원한 이별, 즉 그야말로 종말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두렵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종말이 진정 종말이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종말이 없는 새로운 시작, 즉 “새 창조”라고 말합니다. 다만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지만 말입니다. 여인이 산고(産苦)을 치르지 않고 출산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예수님은 교회가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그리고 왜 겪어야 하는지를 이미 말씀하신 바 있고(참고. 15:18-25), 이곳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되새겨주고 있습니다(참고. 16:1-2).
<공관복음>은 이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무시무시한 어조(語調)로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감람산 강론>이 바로 그것입니다(참고. 마 24:1-28; 막 13:1-2; 눅 21:5-6). 성전은 파괴되고, 교회는 흩어지며, 전쟁과, 난리와, 기근과, 지진과, 사이비 그리스도와, 이단과, 거짓과, 불법이 난무할 것입니다. 대 환란인 것이지요. 이들이 종말의 징조입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한 가지 징조가 있습니다. 우리의 ‘요한’ 화자는 이미 세 차례에 걸쳐 그 징조에 대해서 예고한 바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비교적 길고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입니다.
무엇입니까? 당시 사도들이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들의 <성경> 즉 <구약>에서도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이미 밝혀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종말의 날을 흔히 “그 날”, “주의 날”, 또는 “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날이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증언하는 한 징조가 있습니다(참고. 욜 2:28-32; 사 32:14-18; 11:1-10; 42:1-4; 44:1-5; 렘 31:31-34; 겔 11:17-20; 36:24-27; 37:1-14). 무엇일까요?
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사 32:15);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1-2);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2);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 44:3)
33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 36:27);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겔 37:1);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5);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겔 37:14상)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증언하고 있는 종말의 징조란 다름 아닌 “성령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그분의 백성의 마음속에 와 자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최후의 선지자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종말의 징조로 성령님을 언급하고 있다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그분의 강의를 듣는 순간, “옳거니!”하며 무릎을 쳤어야만 했습니다. 제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었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이 같은 주문(注文)은 무리한 요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기 전에는 보혜사가 올 수 없다는 점은 지난 세 번의 강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인식은 되고 있었겠습니다만, 그 사실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 이번에는 세 번에 걸쳐 명시적으로 언급하십니다(7절). 마치 예수님과 성령님이 함께 사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마저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떠나셔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들림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일이 이루어진 후에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질 것이며, 그 일은 보혜사의 사역을 통해서 계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14:17; 15:26)으로서, 교회로 하여금 복음 즉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을 책망함. 자, 그런데 성령님에 관한 네 번째 언급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우리는 성령님에 관한 지난 세 번의 강론에서 성령님의 관심의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라고 배웠습니다. 방금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종말의 징조에 관한 <구약>의 모든 언급도 그렇고, <신약> 어디에도 성령께서 직접 거듭나지 않은 세상을 향하여 무슨 사역을 한다는 언급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성령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무슨 관심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과연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무슨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일까? 주님은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ejlevgcw, 엘렝코)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비난하다”, “폭로하다”, “모독을 주다” 등이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 ‘convict’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법정 용어로서, 피의자(被疑者)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부 영어 번역본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convinc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RSV).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확인시키다”, 또는 “깨닫게 하다” 등과 같은 다소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책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든, 과연 세상을 “책망”하는 성령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세상의 무지와 불신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려 마땅한 대가(代價)를 치르게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확신시키고 이해시켜 회개(悔改)하도록 하려는 것일까? 즉 그 의도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적어도 “죄”와 관련해서 볼 때에는 전자(前者)의 설명이 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즉 세상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일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유죄판결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절). 그리고 이에 대한 판결은 최후의 심판 날에 최종적으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은 어떻습니까? 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즉 세상이 “의”와 “심판”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해서, 그 세상을 최후의 심판 날까지 그대로 포기하고 내버려 둘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무지한 세상을 “책망”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경우 “책망”하는 방식은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 그대로 주지시키고, 이해시켜, 확신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한다” 함은 바로 이 후자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비추었으나 세상이 이를 깨닫지 못하므로, 성령께서 이제 그 세상을 대상으로 “책망”의 사역을 수행할 것이라는 선언이 보혜사에 관한 네 번째 강론의 핵심입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면, 관성의 법칙에 따라 나는 계속해서 그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습관이란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계속해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늘 그런 상태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관성(慣性)의 법칙입니다.
보혜사의 사역에 관한 그동안의 강론이 주로 제자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번에는 세상을 향한 사역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했으며,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는 그 세상 말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 세상이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죄(罪)와, 의(義)와, 그리고 심판(審判)에 관한 인식이 그것입니다.
그 첫 항목은 “죄”에 관해서입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이 죄에 대해서 임의(任意)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책망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죄에 대한 선언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를 윤리․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과 연관 지으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죄란 행동이나 생각의 문제에 앞서, “무지”(無知)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모르거나 또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죄는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참고. 1:11; 3:19; 15:22). 제대로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믿지 않는 것을 죄라 할 수 있을까? 세상 법정에서도 모르고 짓는 죄에 대해서는 정상 참작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지 않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서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증거가 온 우주에 넘쳐나서 그를 몰랐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 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권의 책, 즉 <성경>책과 자연책을 남겨놓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찾고자 한다면 역사나, 교회나, 신자들을 만나보면 됩니다.
불신(不信)이 단순히 불신이나 무지(無知)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하는 것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소극적인 “태만 죄”가 어떻게 적극적인 “행위 범죄”로 나아가고 있는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롬 1:18-32). 즉 관성의 법칙이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르면 배워야 할 텐데,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평가하고 재단(裁斷)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유대’ 공회와 ‘빌라도’의 재판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몰랐고, 거부했으며,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사랑하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사랑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자평(自評)하고 만족해했습니다(참고. 2절). 성령께서는 그들의 행동과 지식이 전적으로 착각이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 책망은 의에 관해서입니다. 의에 관해서도 세상은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의가 윤리․도덕의 문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가 우리로부터 나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은 의란 “올바른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관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제자들이 그분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10절).
이 두 가지 사실이 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마디로 <성경>이 말하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떠나고 없는 이 세상 인간들 사이에서 의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이 점을 상세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책망은 심판에 대해서입니다. 심판에 관한 세상의 오해와 무지는 그것이 없을 것이라는 신념입니다. 역사의 종말이니, 최후의 심판이니 하는 것들은 종교가 만들어 낸 하나의 허구일 뿐이라고 조롱합니다(참고. 벧후 3:3-5).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착시(錯視) 현상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산천이 유구(悠久)하지 않느냐? 만물은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대로 있지 않느냐? 불의는 득세하고 정의는 힘을 쓰지 못하며, 불의한 자가 더 오래, 더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힘 센 자가 이기지 않느냐? 어둠은 더 깊어만 가지 않느냐? 심판은 무슨... 있지도 않고, 설령 있다 해도 우리 시대에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야.”
책망의 통로. 하지만 보혜사는 예수님께서 떠나신 지 오십일 후에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판사가 피의자를 향해 최후 유죄 판결을 내리듯, 세상을 향한 책망을 포효(咆哮)하듯 뿜어냈습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역사적인 오순절 심령 대 부흥회였습니다. 성령님은 그날 사도 ‘베드로’, 즉 교회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던 그 <성경>, 즉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여기 책망의 마지막 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6-38)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진정한 성령 부흥회는 성령께서 선포하시고, 또한 듣는 이로 하여금 반응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세상의 무지와 불신과 무책임함을 책망하실 때, 듣는 이들은 가슴이 찔려왔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질문했습니다: “내가 어찌 해야 할꼬?” 그날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아니 성령께서 그들 마음속에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반응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회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을 그 안에 모신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서 세상의 무지와 불신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비를 내리듯, 시내 산에서 구름과 천둥 가운데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4:7).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한낱 울리는 소리에 불과하다면, 나에게는 아직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라 단정해도 괜찮습니다.
오순절 설교를 듣고 반응한 사람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회개하고, 침례 받고,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갔을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