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3. 침례 요한과 사도들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1-11약 11분 분량
수 년 전 한 보험 회사 직원이 필자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화재 및 도난 보험 상품을 얼마나 열렬하게 홍보를 해대든지, 그 열의에 넘어가 거금 백이십만 원을 지불하고 3 년 만기 보험에 가입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보험은 소멸성이라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끝나버렸습니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계약 기간 중에 집에 있던 귀중품을 도난당하여 보상을 요구했습니다만, 그 설계사는 복잡한 보험 약관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이리저리 지불 불가 이유를 대기에 그나마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3년이 지나 다시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와서 계약 기간을 연장하겠느냐고 묻기에 호통을 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팔기에만 열중했지 고객 관리는 엉망이었던 이 친구가
지금도 그 회사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 적어도 한 가지만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처음 만나는 상대를 어떻게 해서든 설득을 해서 자사(自社) 상품을 팔고야 마는 그 열정과 헌신입니다. 상품을 마치 책 읽듯 소개만 하고, 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말라는 식이라면 영업사원으로서는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제자에게. “증거-회심”이라는 연쇄반응의 첫 번째 주자가 침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회심의 사례는 침례 ‘요한’의 두 제자, 즉 ‘안드레’와 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또 한 사람의 제자의 회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제 삼 일째입니다. ‘요한’은 그의 두 제자와 함께 이전에 그가 침례를 주던 그곳에서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35절). 혹시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의 금식과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막 돌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참고. 마 4:1-11; 막 1:12-13; 눅 4:1-13).
회고해 보면 필자의 지난 시절이 이와 같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현재 근무하는 대학에 처음 부임하여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일념에서 “사 영리”(四 靈理) 전도지를 한 묶음 수업시간에 들고 들어가서는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일사천리로 학생들에게 읽어주고는 그 결과가 어떻든 나는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걸어 나오곤 했으니 말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든 않든 나는 그래도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용기 있게 하지 않았느냐는 다소 우쭐한 기분에 그랬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그런 기분이 안 드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일들로 해서 갬프스 성경공부가 시작되었고, 그들과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그 중 일부는 전임 사역자가 되어 지금도 사역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첫 전도자로 등장하고 있는 침례 ‘요한’은 어떤 마음으로 전도를 했을까? 그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이곳 본문에서 효과적인 증거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 우리의 역할 모델로 삼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도 이전에 필자가 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전하기만 하고 그들이 믿든 말든 개의치 않았는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선 우리는 서막의 선언을 통해서 그가 세상에 왜 왔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6-8절).
이 구절에 따르면 그가 온 목적이 이중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은 그가 예수님에 대한 증인으로서 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세 번째 단락은 바로 이 두 번째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증거”는 “회심”(悔心)을 낳고, “회심”은 다시 “증거”를 이어가는 식입니다. 마치 핵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듯 이 일도 그렇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삼 일에 걸쳐서 말입니다.
제자에게. “증거-회심”이라는 연쇄반응의 첫 번째 주자가 침례 ‘요한’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회심의 사례는 침례 ‘요한’의 두 제자, 즉 ‘안드레’와 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또 한 사람의 제자의 회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 제 삼 일째입니다.
‘요한’은 그의 두 제자와 함께 이전에 그가 침례를 주던 그곳에서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35절). 혹시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의 금식과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막 돌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참고. 마 4:1-11; 막 1:12-13; 눅 4:1-13).
‘요한’은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절). 이것은 단순한 소개나 선언이라기보다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에 가깝다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지금 두 제자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믿도록” 강권(强勸)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따르고 행동에 옮기는 법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믿고 있는 사실을 같이 믿고 따르도록 강권하는 것은 제자를 향한 애정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상). 그의 증언은 “얘들아, 한 번 믿어봐, 좋을거야” 정도가 아닙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왜입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두 제자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37절).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이 두 학생은 선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리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솔직히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순종”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굴욕적인 항복이나, 자기 판단을 포기한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행동을 연상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교인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컨대, 목사에게 순종하라는 설교에 대해서 성도들이 보이는 반응은 냉소 아니면 코웃음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이런 태도는 성숙한 자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들이나 보일 수 있는 반응인 것이지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지도자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경>에서도 그렇고, <여호수아>는 책 전체의 주제가 아예 리더십에 대한 순종입니다.
<신약>은 어떻습니까? <갈라디아서>나 <히브리서> 등에서도 한 결 같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침을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히 13:17). 순종은 권위주의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권위에 대한 순종은 그 자체로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두 가지 권위를 세워놓으셨습니다: 부모와 스승.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제자도 이제 곧 순종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선생님의 말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라 간 결과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들 두 사람은 처음 한 동안은 일정 거리를 둔 채 그냥 예수님을 뒤쫓아 간 것처럼 보입니다. 권투시합으로 치자면 탐색전을 벌였다고나 할까요?
어쩌면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객관적인 검증과 탐색 작업을 거쳐야지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탐색작업이 끝났으면 결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탐색전은 1-2회전에서 끝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임자를 알아 모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로빈 후드>의 ‘리틀 존’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숲 속에서 좀도적질을 일삼던 그가 ‘로빈 후드’를 만나 한 차례 격투를 벌인 끝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머리 숙여 그의 부하가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서유기>의 저팔계는 어떻습니까? <삼국지>의 장비는 또 어떻습니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입니다.
대개 소인배가 항상 머리 굴리고(시체 말로 “통 박” 굴린다고 함), 빠져나갈 길을 준비해 두고 하다가, 종국에는 자기 꾀에 빠져 자멸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온 우주의 창조주이고, 이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마지막 날의 심판자로 오실 분인가? 이 질문에 대한 탐색 작업이 끝났으면, 심각한 정신장애자가 아니라면, 온 생애를 걸어 그를 사랑하고 좇아야 할 것입니다.
<벤허>의 저자 ‘루이 윌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가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성경>을 연구하고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탐색 작업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도서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부인하고 모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공부의 목적이자 결과입니다. 회심이 증거보다 먼저입니다. ‘안드레’와 또 한 사람의 제자도 이와 같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깨어진 것입니다. 그것도 저자 직강(直講)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들은 밤이 새도록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39절).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습니다. 의심과 절망으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슴이 뜨거워져서 오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했을까?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렇습니다. 주님과의 만남 즉 성경공부였습니다. 귀향의 감격보다는 형 ‘에서’를 만나야 한다는 공포와 불안으로 떨고 있는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성경공부 즉 주님을 붙들고 씨름한 결과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없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분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형에게.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마른하늘에서 날벼락 치듯 그냥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들음과, 증거와, 그리고 강권함”이 합작하여 이루어낸 것입니다. 예컨대, 이 두 사람이 그날 종일토록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다가, 객관적으로 분석만 하다가 기적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따르는 일에 부담을 느껴 늘 일정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역사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혹시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에 막연한 두려움이나 부담감이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내 문제를 털어내 놓기가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근처에 얼씬대기만 했는데도 이런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그분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먼저 묻고 계십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의 초청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따라오는 자라면 누구든지 들어야 할 초청의 질문입니다. 아담도 범죄 이후 처음으로 받은 질문이 이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예수를 왜 믿으려 하는가? 그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원하는가?
예수님을 찾게 되는 동기와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뒤따라갔던 것일까요?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동기나 이유로 예수님을 찾든, 예수님을 만난 결과는 항상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는 두 사람에게 “와서 보라”고 대답하신 예수님께서도 결국 이 같은 결과를 기대하고 계신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일어났던 바로 그 일입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말자 ‘안드레’가 달려 나와 그의 형 ‘베드로’를 찾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격과 흥분으로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2절). 마침내 그도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비취었고, 그 빛은 침례 ‘요한’에게 전달되었고, 침례 ‘요한’은 제자 ‘안드레’에게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였고, ‘안드레’는 가장 먼저 형 ‘베드로’에게 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생명의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불가사의한 현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불가사의함이 그것입니다.
무덤덤하고, 복음 전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함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규정함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 살아있으며, 빛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증명해 보입시다. 우선 내 가족에게 그렇게 해 보입시다.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들어야 사람이 있다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내 가족이 어찌 내 신변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알아채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 전도에 무슨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겠습니까?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 사도로 삼으시고, 제자 훈련을 시키기도 전에 이미 가족 선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잠깐, 우리가 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롯’입니다. 그가 왜 가족 전도에 실패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두 가지로 요약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