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또 다른 보혜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4:25-26약 13분 분량
“내 그럴 줄 알았어.”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대통령 전직 대변인 윤 창중 씨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언젠가 대형 사고를 칠 줄 알았다고들 합니다.
대통령의 대변인은 과연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그는 대통령의 심중이자 입이며, 동시에 한 나라의 입이 되어야 합니다. 대통령과는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늘 대통령의 일투족 일거수(一投足 一擧手)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가슴과 머리에 새겨두었다가, 그 의미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자기 생각이나 말이 아니라, 대통령의 말과 생각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완전히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이 다음 날 미국 의회 연설을 위해서 밤을 새워 준비하며 애를 쓰고 있는 동안에, 그는 술집에서 인턴 여대생을 데리고 술을 마시며 희희덕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미국에 관광여행을 온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마땅히 대통령의 독생자(獨生子)가 되었어야 했을 사람이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독생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의중(意中)이고, 심중(心中)이며, 흉금(胸襟)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부르는 것도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분이 곧 하나님의 심중이자, 의중이며, 흉금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 스스로도 여러 번에 걸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
당연히 대변인의 영광은 대통령의 영광이며, 대변인의 수치는 대통령의 수치가 됩니다. 독생자의 영광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13:31). 이는 그분께서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아버지의 의중을 드러내셨다는 말입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시였다는 의미입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표현을 빌자면,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입니다(참고. 골 1:19; 2:9).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또한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使徒)”로 부르고 있습니다(히 3:1). 사도라 함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도들의 사도이기도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이신 예수님과 함께 삼여 년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그리고 배웠습니다. 지금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까지 선생님의 가르침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25절). 이 표현은 다락방 강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서(예. 16:1, 4), 당시의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이제 그분은 곧 떠나실 것이며, 조만간 다락방 강론이 모두 끝나게 될 것이었습니다(13:31-14:31). 더 이상의 강의는 이제 없을 것입니다. 이후부터 사도들은 지금까지 그동안 선생님께서 하신 그 모든 말씀 하나 하나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적용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들이 가진 소망에 관해서 묻는 자가 있으면, 선생님의 심중이 되고, 의중이 되고, 흉금이 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변인이자 독생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기억의 법칙. 하지만 그 일이 과연 가능할까? 선생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늘 엉뚱한 질문으로 오해와 무지를 드러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시선이 늘 보이는 것들에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이 같은 일이 과연 일어날까? 이들은 지금 무엇인가 듣기는 하나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온통 선생님이 이제 곧 떠나실 것이라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무슨 새로운 것을 배울 것이며, 배운다 한들 무슨 유익이 될 수 있을까?
관심과 흥미가 없는 곳에 설교는 그야말로 설교에 그칠 뿐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별 수 없습니다. 통상 설교는 “잔소리” 내지는 “지겨운 훈계” 등과 동의어로 통용되어왔던 터 아닙니까! 더 나아가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입니다. 스스로 지난 주 내가 들은 설교 내용 중 얼마를 기억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면 쉽게 인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주장합니다. 설교는 교회 교육에서 가장 비효과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사도들의 문제가 무엇일지 한 번 짚어볼까요? 관심과 흥미도 없다. 이해도 안 되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오늘이 그러할 진대 내일은 더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이것은 범죄가 아니라 자연법칙이며 순리입니다. 우리가 흔히 “열역학 제 2 법칙”으로 부르는 것이지요. 사도들만 이 법칙의 적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질병이며, 죽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냥 거대한 탁류에 밀려 떠내려가고 있는 한 그루 통나무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나마 그 탁류에 떠밀려 내려가고 있는 자신을 볼 수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즉 떠내려가면서도 자신이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어떻게 이 거대한 자연법칙을 거슬리고, 어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일이 과연 가능할까? 흔히 기적을 자연법칙에 거슬러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면,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기억의 법칙”을 거슬리는 기적 말입니다.
성령님의 법칙. 그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 사도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롬 8:1). 그렇습니다. 그는 기억의 법칙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문 26절에서 같은 해법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26절상). 이 구절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너무 심오해서, 보다 깊은 묵상을 위하여 잠시 숨고르기를 해야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 짧은 구절 안에 삼위의 하나님 이름 모두가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시 한 번 이 구절을 요약해 보자면,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보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을 사도로 부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늘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그리고 있습니다(참고. 4:34; 5:23, 24, 30, 37; 6:38-40; 7:16; 8:16, 18, 26; 12:44-49).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며, 아버지를 대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5::43; 1:25).
그런데 성령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으며, 예수님의 대변자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님 또한 그 자신의 이름으로 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성령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왔다면,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의 인격”에 이은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논의로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르치고 기억시키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한 구절(26절)은 성령님에 관해서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만, 성령님의 사역에 관해서 가장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성령님의 사역은 두 가지입니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6절). 하지만 이 두 가지 일은 대동소이하면서 상호 보완적입니다.
“생각나게” 한다는 말은 “기억나게” 한다는 말일 것인즉, <요한복음>은 일찍이 이 단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2).
제자들이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을 나중에 비로소 기억하고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희미해지고, 사라져가던 사도들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요?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하던 일이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일까요?
살다보면 우리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 이와 같은 것이지요. 예컨대, 어릴 적에 아주 어렵게 느껴지던 책들이 어른이 되어 읽어보면, 저자의 의도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살아가면서 인생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쌓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이처럼 성숙한 것입니까? 영적인 일들조차 스스로 분별하고 깨달을 있을 정도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들에 있어서는 지식이나 지혜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말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9-13)
이제 우리는 사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찾아왔던 것이지요! 그들 스스로 깨우친 것도, 경험이 그들을 가르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그들을 가르치고, 일깨우며, 기억나고, 생각나게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며, 애매모호하던 것이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 속에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님의 사역을 신학적으로, “영감”(靈感, inspiration) (또는 “감동”(感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는 딱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qeovpneusto", 데오프뉴스토스) 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헬라’어 단어 속에 이미 하나님을 뜻하는 접두사(接頭辭) ‘데오’(qeov)를 포함하고 있어, 영감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의 한 측면이자 수단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만, 이미 이 구절이 <신약> 속에 들어와 있으므로, 그야말로 “모든 성경” 즉 <성경> 66권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감동”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감” 즉 “성령님의 감동”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굳이 구분하자면, 성령님을 <성경>의 실질적이고 초자연적인 저자로 주장한다 해서 크게 잘못된 주장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신약>의 경우, 사도들이나 그들의 추인을 받는 누군가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성령님의 사역은 <성경>의 탄생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성경> 탄생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간여해 왔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이 같은 사역을 “조명”(照明, illumination)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조명”은 <성경> 탄생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시의 또 다른 한 측면이자 수단으로 기능해 왔던 것입니다. “영감”과 “조명”의 사역을 시대적으로 구분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영감”을 통해서, 구전으로 전해오던 말씀들을 전하고, 글로 기록하고, 편집하고, 최종적으로 <성경>으로 완성되게 하셨다면, 그 이후에는 “조명”을 통해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에 간여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기왕에 하나님의 계시 이야기가 나왔으니, 계시의 또 다른 측면을 알아두면 좋을 것입니다. “현현”(顯現; manifestation)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꿈”이나 “음성”이나, “환상”이나, 기타 초자연적인 “기적” 등이 이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이들은 주로 언제 나타났을까? 딱히 시대적으로 구분해보자면 현현은 영감이나 조명에 앞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수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현현은 <구약>에서는 대부분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그리고 <신약>에서는 주로 <사도행전>에서 마치 폭죽이 터지듯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시기적으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바, 이스라엘 즉 교회 탄생 이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탄생 이전에 이처럼 현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현을 성부 하나님과 연관시킬 수 있다면, “영감”과 “조명”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성령님의 사역은 영감과 조명에 국한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현현이든, 영감이든, 조명이든, 계시의 알맹이 즉 핵심 내용과 궁극적 대상은 그리스도, 즉 성자 하나님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7).
범위와 한계. 바로 여기에 “또 다른 보혜사”의 한계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그분께서 “가르치고 생각나게”하는 사역에는 범위와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가르치며, 무엇을 기억나게 하며, 생각나게 한다는 것일까? 전혀 새로운 것들일까? 예수님께서 생전에 가르치지 않았거나, 미처 시간이 없어 가르치지 못했던 것들일까? 그래서 사도들은 소위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선생님께서 말씀하지 않았던 내용까지 추가로 포함시킬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누구나 “성령 충만”(?)을 받으면 늘 새로운 <성경>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6:13-14). 더 이상 명쾌하고 분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가르치고 기억나게 할 것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 그분께서 드러내신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것이야말로 성령 사역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회도 역사적으로 일곱 차례의 공회(公會)를 통해서 엄숙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필요치 않으며, 없을 것이다.” 참으로 단호하고도 명쾌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신약 교회는 바로 이 고백 위에 서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끝난 것인가? 그래서 화석(化石)처럼 <성경> 책갈피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 유물(遺物)과 같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나의 이해가 “현현”이나 “감동”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성령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의 “조명”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도 내가 <성경>을 들고 읽을 때,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조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15:27). 나의 존재의 의미를 상기시켜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일말입니다. 나로 하여금 그분의 대변자요, 심중이며, 흉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제발 윤 아무개 같은 자가 되지는 말라는 경고이자 권면입니다. 헌신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