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문(1): 닭이 울기 전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8:15-18약 9분 분량
‘베드로’는 왜 이 시각에,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는 것일까?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그분의 제자들이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6:56; 막 14:50). 하지만 <요한>은 그들이 도망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제자들은 그냥 가도록 두라고 명령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18:8). 어찌 되었건 ‘베드로’는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화(禍)를 자초(自招)하겠다는 듯이 말입니다. 한 “문지기 여종”으로부터 받지 않아도 될 신문을 받게 될 것이며(18:17),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듣지 않아도 될 변절자의 오명(汚名)을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듣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그는 잘못된 시각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사람들 틈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점 그의 주님이 지금 처한 상황과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피의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안나스’ 앞에, 그리고 그의 제자는 여종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라는 요구 앞에 서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점이 교회 즉 제자의 숙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어느 신부가 신랑이 받고 있는 혐의에 대하여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어는 제자가 그 선생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과 ‘베드로’의 처지가 일치하는 지점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부터 대조와 차이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게 될 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이 상황을 맞이하고 있지만, ‘베드로’는 혼자가 아닙니다.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곁에 있습니다. 무엇이 그리 추운지 불을 쬐고 있습니다. 행여 두려워 떨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의 선생님은 지금 혼자 당당하게 두려움에 맞서 이 어둠을 꾸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베드로’는 신문이 시작되자 말자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자신에 대한 혐의(嫌疑)를 완강하게 부인합니다. 신문하던 자가 당대를 호령하던 ‘안나스’가 아니라, 하찮은 여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신문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안나스’의 신문은 뒤이어 등장하고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사실 여기 “‘베드로’ 에피소드”는 정상적인 이야기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화자는 지금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이 단락을 의도적으로 삽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마치 두 개의 재판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싶다는 듯이 말이지요. 지금 ‘안나스’의 집 안과 바깥뜰에서 두 개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과연 ‘요한’ 화자는 ‘베드로’를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베드로의 실패. 단순히 ‘베드로’의 실패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혹자는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즉 초대 교회 당시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던 ‘베드로’의 지위나 위상(位相)을 깎아 내리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신학자 ‘한센’(Haenchen)은 ‘베드로’의 실패를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된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예수님조차도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베드로’의 실패를 진작부터 예고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막 14:27).
따라서 ‘베드로’의 실패는 어쩌면 필연적이었고, 그로서도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가롯 유다’의 실패처럼 말입니다. 누가 주의 뜻을 거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를 어찌 ‘가롯 유다’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베드로’ 사도는 ‘아리마데 요셉’도 아니고 ‘니고데모’도 아닙니다. 매사에 신중하고 고상해서 사람들의 눈치나 살피면서 얌전하게 신앙생활 하는 교인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청은 받았으나 그가 가진 돈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되돌아간 어느 돈 많은 부자 청년도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 그는 사도 중의 사도입니다.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고 충성스러웠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맹세까지 했던 열렬 제자입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이랬던 그가 지금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부정(否定)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아닙니다. 그분이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아닙니다!”입니다. 그의 절규(絶叫)를 좀 다르게 표현해 볼까요? “나는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다릅니다. 나는 그런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혹시 내가 만나는 교인들 중에 자기 교회를 험담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습니까? 교회와 교인들의 비리(非理)를 술자리 안주처럼 대화의 주제로 즐겨 사용하는 교인을 본 적은 없습니까? 대개 교회의 지도자급 중에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입니다. 내가 ‘아담’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주장할 수 없듯이, 교회를 향하는 세상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대하여 내가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결속성”(結束性)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이 범죄 했을 때,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수 7:11). 사도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온 인류가 함께 죄를 지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참고. 롬 5:12-19). 그렇다면 당시 ‘베드로’의 실패는 실은 나의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즉 그가 “나는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나 역시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에요!”라고 말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를 변호하며.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의 기둥 ‘베드로’가 이처럼 엄청난 실패를 자초했던 것일까? 그가 이처럼 맥없이 쓰러질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세상 앞에서 담대하고 떳떳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로마 교황청이 수시로 시성(諡聖)을 내려주는 성인(聖人)이나 복자(福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신앙인으로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교회 특히 개신교회에 대한 이 시대의 평가가 최악의 수준에 이른 오늘날에, 과연 누가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하며 자랑하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가 행동했던 것처럼 하지 않으면 최소한 배신자 내지 실패자의 낙인은 받지 않고도 신앙생활은 그럭저럭 해 갈 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실패했던 것일까? ‘바클레이’(W. Barclay)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다른 제자들처럼 제 살길을 찾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뒤따라 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실패한 것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용감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선생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왜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던 것일까? 왜 그토록 큰 위험을 무릅쓰고 ‘안나스’의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던 것일까?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찾은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이 떠나고 안 계신 그 빈 무덤 주변을 서성거렸던 것일까요? 사랑하는 주님의 시체라도 찾아서 제대로 장사(葬事)를 지내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렇습니다! 선생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여인이 무덤 주위를 서성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도 같은 동기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을 향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분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게 했던 것이겠지요. 이 같은 사랑이 그를 실패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합니다(요일 4:18). ‘막달라 마리아’도 ‘베드로’도 그들의 선생님을 너무나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패의 두려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배반당할 위험도 없습니다. 실패할 위험도 없습니다. 사랑의 깊이가 깊을수록 배신의 쓰라림은 더욱 클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배신자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끝까지 믿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만이 배신의 쓰라림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예수님 체포 당시에 칼을 빼들고 선생님을 보호하려 했던 자는 ‘베드로’ 뿐이었습니다.
혹자는 ‘베드로’를 가리켜 인간적인 자신감이 지나쳤다든지(참고. 막 14:31), 영적인 일을 육적으로 해결하려했다든지, 그러므로 칼이 아니라 기도로 위기를 해결했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참고로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주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영역과 육적인 영역이 일도양단(一刀兩斷) 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중 과연 몇이나 그 같은 고도(高度)의 영적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더군다나 당시 체포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이라면 과연 누가 ‘베드로’의 용기를 만용(蠻勇)이라 할 수 있겠으며, 그의 사랑을 광적이라거나 편집적인 집착으로 매도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사랑했기 때문에 실패했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이 같은 실패를 부끄러워해야 할까? 다시는 내가 그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리라고 맹세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 모닥불 앞에서 화끈 달아오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불의 열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수치심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있지 않아야 할 시각에,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 틈에 있었던 관계로, 이처럼 부끄러운 실패를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나, 악인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노래합니다(참고. 시 1:1, 4).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마치 겨와 같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눅 22:31). 그는 지금 불의(不義)한 무리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는 중입니다.
자랑스러운 실패. 하지만 조금 후 우리는 또 다른 ‘베드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참고. 21장). 전혀 다른 종류의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안나스’의 하인들이 피운 불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의 선생님께서 직접 피워놓은 불입니다. 그 불로 아침을 준비해놓고 이 선생님께서 지금 그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베드로’가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한사코 부인했던 그 선생님이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욥’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사탄’은 그를 영원한 실패자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실패를 자랑스러운 실패로, 영광스러운 실패로 회복시키실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의 기도를 드릴 때부터, ‘베드로’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우리는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자신의 실패와 회복에 대해서 어떻게 자랑하며 증언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참고. 행 2:14-36). 실패가 없는 곳에 회복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자가 실패하여 넘어져 있는 형제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누가 ‘베드로’의 수치스런 실패를 영광과 자랑의 실패로 만들어놓았습니까? 이것이 ‘요한’ 화자가 그의 교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도전입니다! 나는 과거의 실패로 지금 쓰러져 있지 않습니까? ‘예레미야’처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 하리라” 다짐하며, 분노와 후회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수치와 눈물을 누구에게 가져가야 할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