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생명의 떡(3)-재초청
김태정 목사약 8분 분량
대화의 기본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들 합니다만, 과연 이 원리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직업이 선생이자 목사인 나도 늘 끊임없이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이라 남의 이야기를 경청(傾聽)하는 데에는 별로 익숙하지 못합니다. 특히 나의 약점이나 결점을 지적해주는 말에 대해서는 경청은커녕 버럭 화부터 먼저 냅니다. 이 일로 나는 아내와도 자주 다투는 편입니다. “왜 말할 때 좀 웃으며 하지 못하느냐?” “왜 좀 더 부드럽게 말하지 못하느냐?” “설교가 왜 그 모양이냐?” “성경공부 교제를 왜 그렇게 어렵게 만드나?” 등등의 지적을 종종 받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대뜸 화를 내며 아내를 윽박지릅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싸움으로 번지고, 그 결과 며칠 간 말도 안하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야고보서>는 나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지금 사도 ‘야고보’가 훈계하고 있는 대상은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오늘로 치자면 목사이거나, 장로이거나, 주일학교 교사이거나, 전도사일 것입니다. 사도는 아예 우리가 이런 직분을 갖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사도께서 왜 이러시는 것인가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서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우리더러 종교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것인가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사모하라고까지 충고하지 않았습니까(참고. 딤전 3:1)!
선생의 직업이 가르치는 일이라, 가르치려고만 들지 도무지 배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음은 아닐는지요? 예수님 생전에 그분의 설교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대들던 ‘랍비’나 ‘바리새’인 이나 ‘사두개’인 등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유대인 지도자들. 과연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강의도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조심스러운 독자라면 예수님의 두 번째 강론에서 청중이 무리에서 ‘유대’인으로 바뀐 것을 이내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라 함은 ‘유대’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강론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수긍(首肯)이 아니라 “수군거림”입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41절).
여기서 “수군거리다”(gogguvzw, 공귀조)는 동사는 “불평하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들은 당시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였으며(출 15:24),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했고(출 16:2; 17:3), 사막 생활이 어렵다고 불평하였으며(민 11:1),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하였으며(민 14:1-3), 심지어는 매 끼마다 ‘만나’만 내려준다고 불평하기까지 했습니다(민 11:4-6).
<시편>은 이들의 불평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행위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불평도 결국 예수님을 거부하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지요: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이들이 지금 거부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그분의 자기주장, 즉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증거를 보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지금 ‘유대’ 지도자들의 수군거림을 통해서 그들의 철저한 무지와 무능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도저히 희망이 없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요즈음 우리 집 근처 대로변에 큰 현수막이 하나 걸려있습니다.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인데 주최는 경산시 목회자 협의회이며, 행사 내용인 즉은, “경산시 종교 편향 정책 저지를 위한 세미나 및 기도회”랍니다. 나는 경산시가 기독교회에 반하는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알지 못합니다만, 행사의 목적이 나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특정 종교 편향 정책 저지”를 목적으로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이 기도회를 연 사례가 <성경>의 어디에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해 내지 못하겠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경배 드리고, 회개하고, 간구하며, 중보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저지하고, 투쟁하고, 막고, 싸우기 위한 기도랍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어투나 어법들이 살벌하고 적대적으로 느껴지기만 합니다.
불교계는 어떻습니까? 최근 대한불교 조계종은 사찰 문 앞에, “정부 및 한나라 당 국회의원이나 관계자들은 일체 절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으며, 전국 휘하 사찰들에게도 동일한 지침을 내려 보냈습니다. 이유인 즉은 국회에서 소위 말하는 “템플스테이트” 관련 예산이 한나라 당 주도로 2011 년도 예산안에서 몽땅 빠져버렸기 때문이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정부가 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 눈치 살피느라 공공연하게 불교를 탄압한다고 심심찮게 불평하던 불교계가 이번 일로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사찰 문 앞에 걸린 이 현수막 역시 “경산시 종교 편향 정책 저지를 위한 세미나 및 기도회”를 알리는 현수막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너무나 대동소이합니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최근 언론에 “추기경의 궤변”이란 제목으로 그들의 교회 수장(首長)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이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해서, “정부를 편드시는 남모르는 고충이라도 있는지 여쭙고 싶다”고 쓰고 있는가 하면, 북한이 “천안 함”을 폭파하고 연평도를 도발 포격한 것에 대해서 북한을 비난했다 해서, 추기경을 향해서 “수구반공주의자(守舊反共主義者)”라고 쓰고 있으며 그에게 퇴진의 압력까지 넣고 있습니다.
이들 사제단의 성명은 “궤변”이라는 제목부터 섬뜩합니다. 명색이 평신도를 가르치고, 정의를 실천한다는 사제들이 교회의 수장을 향해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은 결코 아닌 것이지요. 북한을 비난하는 추기경이 “수구반공주의자”라 불러 마땅하다면, 그를 그렇게 부르는 자신들이야말로 “수구 종북주의자(守舊從主北義者)”로 불려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제단의 논설 역시 경산 지역 기독교 목회자가 내건 현수막이나, 조계종 총단에서 내건 현수막의 분위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비아냥과 독선과 아집과 무례와 교만 그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같은 카톨릭 교회 평신도인 이회창 선진당 대표가 “그렇게 정의를 구현하고 싶다면 온실 안에서 활개 치며 촛불 시위를 주도하지 말고 광야 같은 북한에 가서 정의를 구현하라”고까지 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이들 현수막이나 논설의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죽이고 낮추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이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자의 모습이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와 종교 지도자의 모습뿐입니다. 그것도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위해 존재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스스로 신이 되어버린 종교 말입니다. 아, 정말 우리는 결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재 초청. 예수님은 이들 종교인들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초청의 손길을 뻗고 계십니다. 믿음으로의 초청입니다.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반대했던 것은 예수님의 논리가 아니라, 그분의 신분과 정체였습니다. 그들이 무어라고 말합니까?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논리적으로, 믿음은 믿는 자의 몫이나 책임, 즉 그의 결심이나 헌신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강론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강조입니다.
4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43-46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는 이미 예수님의 두 번째 강론에서도 본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참고. 37절). 이 구절은 위 단락과 내용 상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인간적 결단이나 헌신의 결과가 아니라, 들음의 결과이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참고. 롬 10:17),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며(29절), 그분의 선물인 것입니다(엡 2:8).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초청은 초청이라기보다는 선포이자 명령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지만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은 이와 같은 초청조차도 들리지 않으며, 들어도 반응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유대’인의 결례에 사용했던 물과 물 항아리는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일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잔치에 즐거움을 준 것은 포도주, 즉 기독교인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종교는 또한 거룩한 성전을 추잡한 시장바닥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운 그 성전에 빛으로 들어오셔서, 그 안과 주변에 있던 그 모든 종교적인 사람들과 물건들과 제도들을 회초리로 다 날려버렸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드셨습니다.
종교인은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다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