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한복음 3장 16절
김태정 목사약 8분 분량
하나님의 사랑
필자가 목사가 되기 위해 치른 안수(按手) 고시 과목 중에는 5분 정도의 즉석 설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자의 설교 자질이나 그의 신학적 입장을 들어보아야겠다는 의도일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 고시 위원회에서 제시한 <성경> 본문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 구절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고시위원들이 왜 이 구절을 선택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가장 위대한 구절 중의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다른 구절은 몰라도 이 구절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외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자가 이 구절을 제대로 전달 또는 증거 하지 못한다면, 목사로서는 고사하고 교인으로서의 자질도 의심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슨 역설입니까? 나의 설교는 영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횡설수설이었습니다. 주어진 5분의 시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겨우 설교를 끝내자 고시 위원들의 비판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습니다. 왜 그처럼 유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조차 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창피스러워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왜 나는 이 구절을 제대로 설교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복음을 제대로 증거 하지 못했을까? 너무나 유명한 구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구절, 그래서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떻습니까? 오늘날 세상 속에서 복음이 바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역설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닐까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처럼,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마른하늘에서 천둥치듯 문맥의 전후 상황이나 배경과 상관없이 갑자기 등장한 선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유명한 복음의 “대 헌장”은 16절뿐만 아니라 3:13-21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한 밤중 예수님과 ‘니고데모’ 간의 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이었고, ‘니고데모’는 두 번에 걸쳐서 “거듭남”의 의미나 방법에 대해서 물은 바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거듭날 수 있겠나이까”(4, 9절). 이 본문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화자 자신의 답변을 담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3장 16절은 전체 답변에 대한 요약적 선언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그 속에 포함된 단어 하나하나를 통해서 복음의 총체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세상”; “독생자”; “영생과 멸망”; “믿음.” 이제 이들 단어 하나하나에 대한 여행을 떠나보기로 합시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두 단어는 각기 <요한복음> 3장 16절의 주어와 동사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사.” “하나님”이 복음의 주체이자 기원이라고 한다면, 그분의 “사랑”은 복음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요일 4:7)는 사실은 아마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위대한 진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언입니다: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사도가 말하는 “그 큰 사랑”은 “위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에로스’나 ‘필리아’ 등을 사용하지 않고 ‘아가페’라고 사용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유난하고 각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완전히 다른 성격의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덧붙여 설명하자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사랑, 아무도 이해조차하기 어려운 무한하고 신비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사도는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깨달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어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찬송가도 솔직히 그러하다고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찬송가 404장)
이 찬송가는 “성도여 찬양하세”라는 후렴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위대하고, 신비하며,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동일한 찬송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용서하셨네
그 이유란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하늘의 별처럼 혼자 고고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장16절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나니.” 두 번째 동사입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사랑을 혼자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차지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질 수 있게 되었으며, 볼 수 있게 되었고,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며, 무한하며, 주는 사랑일 뿐만 아니라 변치 않는 신실한 사랑이이기도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선지자 ‘호세아’와 그의 방탕한 아내 ‘고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말도 안 되는 이와 같은 명령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앞날이 창창한 젊은 신부나 목사를 불러 사창가 한 창녀와 결혼하라고 지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래도 결혼을 하면 이 여인의 이전 생활이 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짓궂게도 이 창녀가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 돌아다닐 것이고, 애비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음란한 자식들”을 셋이나 낳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심보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연극입니다. 연극의 제목은 <호세아와 고멜>이며, 두 주인공은 각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을 맡아 연기하게 될 것입니다. ‘호세아’는 지시대로 했고, 과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보게 됩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 즉 “흩어버리다” 또는 “뿌리다”입니다(호 1:4). 딸의 이름은 ‘로 루하마’, 즉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다”입니다(호 1:6).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로 암미’, 즉 “내 백성이 아니다”입니다(호 1:9).
이들 세 자식들의 이름은 한 결 같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의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두 부정적이고 저주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남편이 아내가 밖에서 음행하여 낳은 “음란한 자식들”을 내 자식으로 대우를 해주겠습니까?
이야기의 끝이 여기까지라면 연극의 결말치고는 너무 싱겁고 실망스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기에도 미흡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개입하여 연극이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음란한 자식들”의 이름을 새롭게 바꾸어서 내 자식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르엘’을 ‘이스르엘’로, ‘로 루하마’를 ‘루하마’로, 그리고 ‘로 암미’를 ‘암미’로 바꿀 것입니다. ‘루하마’는 “긍휼이 여김을 받다”이며,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첫 아들의 경우 바뀐 이름은 이전과 같은 ‘이스르엘’이지만, 그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즉 이전에는 부정적인 의미의 “흩어버리다”였습니다만, 이번에는 “(씨를) 뿌려 심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호 1:10)
그런데 ‘고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난 ‘고멜’은 어떻게 할까요? 이 여자도 다시 데려다 살아야 합니까? 정말 어처구니없지만 그렇습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호 3:1)
지금 이 여인의 처지가 어떠합니까? 여전히 이전의 미모와 화려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많은 정부(情夫)들을 거느리며, 그들로부터 온갖 명품과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선물 공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여인의 처지는 비참 그 자체입니다. 젊음도 가고, 미모도 가고, 그 많던 놈팽이들도 다 떠나고 없습니다. 더욱 한심하게도, 마지막으로 그녀를 데리고 놀던 한 놈팽이는 온갖 단 맛 다 빨아먹고서는 그녀를 노예로 팔아넘기고는 도망을 가버린 듯합니다. 지금 ‘고멜’은 ‘예루살렘’ 성문 앞 시장 바닥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수치와 두려움으로 떨며 서 있습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목에 두른 가격표가 유일한 것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사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가 이 늙은 퇴기에게 定價를 지불하려 하겠습니까? 누군가 턱도 안 되는 가격, 은 한 냥을 먼저 제시합니다. 그저 먹겠다는 것이지요.
다시 누군가 조금 나은 가격을 제시합니다. 이번에는 은 다섯 냥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매 가는 점점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다섯 냥에서 일곱 냥, 일곱에서 다시 열 냥... 결국 ‘호세아’가 가장 높은 가격인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고멜’을 삽니다(호 3:1). 사람 좋은 ‘호세아’는 얼른 그녀에게 옷을 입히고서는 군중 속으로 데리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하면 ‘고멜’은 다시 ‘호세아’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이제 그녀는 ‘호세아’가 돈을 지불하고 산 노예에 불과합니다. 노예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대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도 이런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안 됩니까?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도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신실함으로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정말 대책 없는 신실함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 하리라(호 3:3)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결단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