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목자의 음성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0:22-30약 10분 분량
지난 일여 년 동안 내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은 나와 함께 <요한복음> 공부를 해 왔습니다. 총 다섯 명인데 이들 중 두 학생은 믿는 자들이나, 나머지 세 사람은 난생 처음으로 <성경>이라는 것을 대하게 된 자들입니다.
당연히 처음 모임을 시작할 당시에는 글자 한 자, 단어 하나마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습니다만, 일여 년 함께 해온 결과 이제 상당한 지적 수준에 이르게 된 듯합니다. 그리고 교회나 신자들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많이 해소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함께 모이는 시간 내내 거의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주로 내가 말하는 것을 듣고만 있습니다. 아무리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해도 요지부동입니다. 정말 답답하고, 안타까우며, 때로는 짜증이 마구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너무 반응이 없어 그동안 들인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나는 결국 속으로 이들이 <성경>에 대해서 영 관심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도교수라 어쩔 수 없이 앉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싫다는 말도 못하고, 달리 도망갈 수도 없고, 그냥 포기하고 끝나는 시간만 고대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 있을 때면 아주 궁금해 하고 답답해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하고 나머지 두 동료에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일 년 정도 공부를 했으면 믿음이 생길 줄로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믿음이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자 은혜의 선물이라고 배워온 터라, 자신들은 아직 그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가슴 뜨거운 체험도 없고, 은혜라고 생각할 만 한 아무런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나에게 믿음이 있는 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어떤 해답을 마련해주어야 할까요? 나라면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대답이 아니라 나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후 지금까지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단 한 번도 가슴 뜨거워지는 신비한 체험을 한 적도 없고, 무슨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이적을 목격한 적도 없으며, 방언을 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믿는 자로 자처하며 살아왔습니다. 무슨 근거로 내가 이처럼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까? 혹시 내가 엄청난 착각 가운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집요하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에게 물었던 것과 똑 같은 질문을 또 던집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24절).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분명하게 그리스도면 그렇다고 말해달라는 요구입니다. 행여나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하면 믿고 따를지 누가 압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대답을 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26절).
이 얼마나 두려운 판결이며 끔직한 선고입니까? 그런데 만일 나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의 확신이 없다고 고민하는 내 제자들에게도 얼마나 절망적인 선언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내가 그리스도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까? 내 제자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들이 믿음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일까요?
누가 우리를 우리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길에 지팡이로 막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내 스스로 “나는 신앙이 없어, 옳은 방법으로 믿고 있지 않아”하고 하면서 스스로를 부적격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어떤 태도와 모습과 행동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믿음을 가진 자라면,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소망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이며, 왜 믿는지 등에 대해서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나에게 닥치는 웬만한 일들에 대해서 <성경>에 비추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라면 경건생활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과 전도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는 자라면 의심이나 불안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믿음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혼란스러울 지경입니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목자의 양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무리의 믿음.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
이 말씀은 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내가 무리 속에 속하는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말입니다. 즉 내가 무리 안에 있느냐 또는 밖에 있느냐에 따라 내 믿음이 달려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리와 함께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그 무리에 속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모든 이유가 되고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자의 믿음 생활이란 결국 우리 다수의 믿음 생활과 동일할 것입니다. 용기가 솟는 날도 있고, 또 의기소침한 날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산을 옮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조차 힘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는 것들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는 어쩔 수 없이 애매모호함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러니까 믿음의 역설은 우리가 그것을 볼 수도 없고, 따라서 일일이 다 짚어서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확실성보다는 오히려 신뢰와 희망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증거할 수도 없는 어떤 것에 우리의 전 삶을 걸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큰소리를 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결국 우리가 믿는 바가 모두 진실이고 사실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그것은 더더욱 진실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B. B. Taylor).
우리의 믿음은 말보다는 행동에서 더 많이 드러납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도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기관이나 이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변화하는 어떤 관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지만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수술을 앞두고 수술대 위에 누워 불안해하는 마음과 비슷합니다. 의사가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유일하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수술 중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의사가 나를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정도입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술이 끝날 때까지는 나와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나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누가 우리와 함께 하실지 알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일 것입니다. 즉 다음과 같은 약속을 알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어떤 날에는 사도들과 같은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날에는 길 잃은 양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리에 속하는 근거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확신이 아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확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앗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28-29절).
이것이 하나님의 확신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유명한 <로마서> 8장에서 전 우주를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그렇다면 우리는 때때로 목자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인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날에는 그것이 휘파람 소리처럼 들릴 것이고, 또 다른 날에는 혀를 차는 소리처럼, 또 어떤 날에는 사랑의 노래처럼, 또 다른 날에는 분노의 저주처럼 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항상 어떤 분명한 단어나 문장으로 들려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의 일상 중에 어느 순간 들려오는 내 가슴 속에 고요하게 들려와 내 영혼을 회복시키고 소생시키는 음성일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목자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어떤 무리와 한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알듯이 양들은 결국 양들입니다. 그들은 쉽게 겁먹고 당황합니다. 누가 떠미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결정을 자신들의 욕구에 따라 내리며, 이유도 없이 박치기 대회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무리 속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목자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나의 생존뿐 아니라, 기쁨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무리의 일원으로 속해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이 자리에 있든, 또는 믿음을 원해서 이 자리에 있든, 우리는 하나님의 양들에 속하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양들이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분은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그 누구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앗아갈 수 없습니다. 내 믿음이 어떻든지, 우리는 여기에 있고 또 여기에 속해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면. 이제 우리는 나와 <성경> 공부를 하는 내 제자들에게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줄 준비가 되어있는 듯합니다. 나의 상담 내용은 무엇입니까? 왜 그들은 스스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잠시 경찰이나 군인의 제복(制服)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왜 제복을 입습니까? 제복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정해진 규범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컨대, 군복을 입은 자는 마땅히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행동을 보여주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믿음의 회중 앞에서 행하는 “공중 고백”(흔히 간증이라고 하지요)이 제복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담배를 끊기 위해서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금연(禁煙) 선언을 하는 효과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금연 선언을 하고 금연 클럽에 가입하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신비에 대해서 완전하게 다 알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는 천국에 가서도 다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에 누가 감히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기 전까지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없다고 고집부리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비록 겨자씨만 할지라도, 그것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
태어나서 스스로 먹고 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양을 양육시키는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다.” 확신이 없어 고민하는 내 제자들에게 내가 해 준 말은, “그 어머니 품속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겠는가!”였습니다.
우리는 목자의 양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양의 목장 안에 속해있으며, 그분의 음성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증거도 이보다 더 나는 증거는 없습니다. 할렐루야!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