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 예수를 어떻게 할까?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45-53약 11분 분량
미국에서 실재 있었던 일입니다. 1954년 12월 21일 자정에 거대한 홍수로 지구가 멸망한다고 예언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교주는 신도들에게 재산을 모두 자신에게 바치게 하고 멸망에 대비하도록 지시했고, 신도들은 교주의 지시에 따라 모두 한 자리에 모여 12월 21일 자정의 명망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숨죽이고 기다리던 12월 21일 자정이 되었지만 홍수는커녕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도들이 속았다고 분노하며 교주에게 달려갔을까요? 교주는 새벽에 신도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내립니다: “너희가 간절하게 기도한 덕분에 하나님께서 지구 멸망을 유예하셨다.” 신도들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과 교주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인지부조화. 이것이 그 유명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이론을 낳게 한 사건입니다. 신도들로서는 전 재산을 팔아 바치고 종말에 대비했는데,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예정되었던 지구 멸망이 연기되었다는 새로운 계시를 믿는 것이 편합니다. 그렇게 해서 인지부조화를 해결합니다.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는 1950년대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주장한 이론입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태도와 행동 간에 일관되지 않거나 모순이 존재할 때 이러한 비일관성이나 모순을 불쾌하게 여겨 이것을 감소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모순을 줄이기 위해 사람은 태도나 행동을 바꾸려 시도하는데, 태도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지만 행동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으므로, 행동에 맞게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도 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내용은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이기적 진실>에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왜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에게 처음부터 1954년 12월 21일에 대홍수가 일어날 예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고 싶은 사실을 선택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사이비 종교 신도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닙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보여 온 일종의 병리 현상인 것입니다.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고 정보가 넘쳐나게 되면 이와 같은 현상은 사라질까? 정 반대라는 것이 저자의 관찰입니다. 즉 정보가 넘쳐날수록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기사나 정보를 접할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의 사실에 엇갈린 의견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사실 자체가 여러 개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지각 능력을 손상시켜버렸습니다.
저자는 미국이 지금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한국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가 않습니다. 북한의 핵개발은 동족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직 미국을 겨냥한 방어용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시켰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국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 미국의 식민지가 될 것으로 믿으며, 미국은 광우병 위험이 없는 쇠고기는 자기네들이 먹고 위험이 있는 쇠고기를 수출한다고 믿습니다.
디지털 혁명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속하는 우리나라는 마음에 드는 사실을 뒷받침할 정보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골라잡아 믿고 싶은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객관적이고 엄정한 사실이나 진리? 애초에 그런 것은 없으며 있다 해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가치 상대주의”가 아니라 “사실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수없이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의 참상(慘狀)에 대해서 한 결 같은 목소리로 증언하고 고발해도, 소위 주사파(主思派) 종북주의자들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탈북자들을 변절자라고 하며 미워하고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북한의 인권이나 삼대 세습 등에 대해서 이야기라도 하려하면 이념 논쟁이니 색깔론이니 하며 극렬하게 반응하고 나섭니다. 도대체 왜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조차도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들이 소위 “선택적 노출”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믿고 싶은 사실에 어긋나는 정보는 무시하고, 믿고 싶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모으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하고만 의사소통을 하는 “선택적 노출”을 통하여 터무니없는 사실을 사실로 믿는 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저자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신병이 다른 신참들과 같은 사단에 배치되었을 때 자신이 전장에서 사울 수 있을 것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신참 병사가 역전의 용사들 틈에 들어갔을 때에는 싸울 수 있다고 느끼는 비율이 두 배에 이르렀다는 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특정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는 의견이 지배적이면, 그 집단의 믿음이 구성원 각각에게도 엄연한 사실로 자리 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 대신에 이념적, 심리적, 감정적, 심미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즉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정보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선택하는 “선택적 노출”을 통해서 사회 집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말에 유유상종(類類相從)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소위 진영논리(陣營論理)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는 천안 함이 사고나 자작극이라는 망령이 떠돌 듯이, 미국에는 9․11이나 ‘아폴로’선 달 착륙이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망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미국인의 1/3이 9․11 테러가 미국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믿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확인물체”(UFO)에 관한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이에 대해서 소위 음모론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정보가 넘쳐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사람들의 편향성은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도 인터넷을 뒤져보면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낼 수가 있으니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그만인 세상이 된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제 세계는 “진실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공회의 인지부조화. 지금 공회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인지부조화라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사로의 기적>은 ‘요한’ 화자가 기록하고 있는 일곱 표적 가운데서 절정에 해당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 중, “빛과 생명의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그 장면을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다고 기록함으로써(45절), 표적과 믿음이라는 <요한복음> 특유의 모티브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또 다른 모티브를 지닌 채 반(反)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불신과 배척”입니다. 그 엄청난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공회의 모습은 달리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실” 즉 ‘팩트’(fact)는 무엇입니까? “나사로가 되살아났다”입니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예수가 나사로를 되살렸다”가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이고 기대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즉 그 사실을 보았으며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참고. 12:9-13, 17-19).
하지만 공회 지도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한사코 진실을 외면하고, 다른 진실을 찾아내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길을 택했습니다(53절). 아시다시피 공회는 무슨 정치 집단이나 사법기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기관에 가까웠다 할 수 있을 것인즉, 이곳에서 사람 잡아 죽이는 일을 모의하고 의결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나 스님이나 신부님이 살인모의(殺人謀議)에 가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두 집단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공동의 적을 퇴치하기 위하여 서로 간의 적개심은 일단 덮어두기로 했습니다.
사상이나 이념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도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정치 집단이 아닌 목회자 집단인 ‘유대’ 공회는 그렇게 해서 소집되었고, 하나의 합의사항을 도출해 냅니다. 그들은 언필칭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율법을 가르치며, 국가나 민족을 염려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들이고 할 것 없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들의 안위 즉 기득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하여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영논리였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거만한 충고가 이를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50절). 지극히 온당하고 합리적인 말 같습니다만, 조직의 보호를 위해서는 한 사람의 희생쯤이야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인 것이지요. 그나마 그 한 사람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인 것을 말입니다!
사필귀정. 이처럼 편향되고 사악하기까진 한 진영논리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을까요?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내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갑론을박(甲論乙駁) 논의를 벌이고 있는 공회를 향해서 무슨 대단한 지혜자나 선지자가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있는 모습을 봅시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
그 자리에 모인 다른 모든 사람들을 우습게 알지 않고서는 어찌 이 같은 발언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충고는 참석자들 모두를 감동시켰나봅니다. 그의 설득은 성공했고, 사람들은 그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즉 모두를 위해서 한 사람을 사지(死地)로 내몰기로 말입니다.
공회의 결정은 그 유명한 “아사셀 염소”를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아사셀’이란 “보내다”는 뜻입니다. <레위기>에 따르면(레 16:6-10), 대제사장은 대속죄일에 자신들의 죄를 대신할 속죄 제물로 ‘아사셀’ 염소를 지정하여, 그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전가한 후, 그를 광야로 끌고 가서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완전 무인지경에 이르러 캄캄한 밤에 버려두고 옵니다. 그 염소의 운명은 굶어죽거나 맹수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제안은 수사적(修辭的)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제안은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공동체는 소수의 희생과 봉사로 유지되고,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조지 바너’(G. Barner)가 그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도 이런 식으로 유지해 간다고 합니다. 즉 12,000명 회원을 가진 교회에서 실제 120명 정도만이 어떠한 형태로든 직분을 가지고 봉사할 뿐, 나머지는 모두 손님으로 예배만 참석하고 간다는 것이지요.
‘가야바’는 공회를 설득시키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총독 ‘빌라도’를 설득시키는 데에도 성공을 거둡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면, 자칭 왕이라는 자를 풀어주게 되는 것이니, 이는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에 다름없다고 협박했기 때문입니다(참고. 19:12-13).
하지만 그의 성공은 여기까지입니다. 모두를 위해서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대였으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결말은 그가 바라는 바대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더 큰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였고, 예상되는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는 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민중 봉기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이는 ‘로마’의 개입을 부추겼고,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유대’ 성전이 있던 땅은 쟁기로 갈아엎어져 이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공회가 자신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 취했던 조처가 역설적으로 정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채 끝이나버린 것이지요.
“만일 예수를 그대로 두면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48절)는 것이 공회의 예상이었습니다. 과연 사람들은 그를 믿었고, 그들은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유대’ 땅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온 땅에 퍼지고 된 것은 예수께서 살아있을 때가 아니라 그분이 죽고 난 뒤였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할까? 이와 같은 역설을 <잠언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가야바’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선택에 대한 준엄한 대가를 치러야 할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온 민족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선택으로 온 민족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시편>의 시인은 공회의 결정을 이렇게 조롱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 2:2-4)
오늘날 나는 그분을 어떻게 하려 합니까? 우리교회는 그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 자신의 선택의 노예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진리 안에서 자유 할 것인가 두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