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왕의 입성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2:12-19약 10분 분량
사이몬 몬티피오리(Simon Montefiore)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 전기>에서 ‘예루살렘’ 최후의 날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후 70년 7월 하순, ‘유대’인 달력으로 ‘압’월 8일 ‘예루살렘’을 넉 달째 포위하고 있던 로마의 ‘디도’ 장군은 전 군대에게 새벽 시간 성전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다음 날은 500년 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총 6만 명의 로마군과 현지 지원군으로 구성된 공격군은 이날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성벽 너머에는 50만에서 백만에 가까운 굶주린 유대인들이 생지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수천 구의 시체들이 햇빛 아래 썩어가고 있었고, 악취는 진동하였으며, 개와 자칼 떼가 인육으로 만찬을 벌였다. 산 자들은 우분, 가죽, 신발이나 묵은 건초를 먹었으며, ‘마리아’라는 한 부유했던 여성은 돈과 식량이 다 떨어지자, 결국 미쳐서 자기 아들을 죽여 반은 구워 먹고 반은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다. 구미를 당기는 맛있는 냄새가 온 도시에 퍼졌다. 반란군이 냄새를 맡고는 그 집으로 들이닥쳤지만 살인청부업자조차 반 토막만 남은 아이의 시체를 보고는 온몸을 떨면서 물러났다.
저자는 또한 ‘예루살렘’ 점령 이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죄수나 탈주자는 십자가에 매달렸으며, 매일 500명의 ‘유대’인이 그렇게 처형을 당했다. 도시 주변의 올리브 산과 바위산은 십자가로 빼곡히 들어차 더 이상 십자가를 꽂을 공간도 없었고, 만들 나무도 없었다. (중략)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디도’는 수천 명의 ‘유대’인 죄수들이 목숨을 잃을 때까지 야생동물과 싸움질하는 것을 구경했다. 며칠 후에 ‘가이사’의 한 원형 경기장에서는 2,500명이 죽은 것을 구경하고, ‘베이루트’에서 오락삼아 학살을 한 다음 개선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
여기서 ‘디도’ 장군은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인물입니다. 저자의 글에서 보듯이, 개선장군이 점령지에 입성하여 가장 먼저 할 일은 성 안에 남아있는 반군(叛軍)들을 색출하여 소탕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살아남은 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입성하는 것입니다. 전쟁 중 반군의 저항이 거세었을수록, 그리고 그 전쟁이 길어 점령군의 피해가 컸을수록 복수는 더욱 잔인해지기 마련입니다.
이 같은 대 참극이 있기 30여 년 전에도 ‘예루살렘’ 입성을 했던 또 다른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었습니다. ‘요한’ 화자는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는 이미 왕이 있었습니다. 그 악명 높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리파 2세’입니다. 이 사람은 실은 유명무실한 왕이었던 것이, 그는 로마 계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힘을 빌려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대한 항전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유대’인들을 독려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의 편에 서서 반군들을 소탕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었습니다.
말이 아닌 당나귀로. 아무튼 지금 “이스라엘의 왕”이 당나귀를 타고 자기 나라의 수도(首都)에 입성(入城)하고 있는 이 장면은 ‘디도’ 장군의 그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종려주일”(the Palm Sunday)로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분의 탄생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 사건 만큼이나 유명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려나무(the palm tree)를 들고 나와 그분의 입성을 환영했다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의 화자는 ‘예루살렘’ 주민의 편에서 이날의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12절). 아마도 그곳 주민 중의 한사람으로부터 들었던 바를 훗날 그의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기대와 환호 그것이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절).
과연 어느 시대, 어느 백성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이처럼 열렬히 환영할 수 있을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은 대개 기대 반 의심 반일 텐데 말입니다. 오늘날 목사를 바라보는 교인의 마음과 비슷하다 할까요? 왜냐하면 대체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소위 “거룩한 소명”과 “개인적 욕망”을 구별하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에 대해서 아주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내가 모두(冒頭)에 소개했던 <예루살렘 전기>의 저자도 ‘예루살렘’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이 도시가 거룩한 도시이긴 하지만 항상 미신과 편협한 신앙이 판을 쳐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진실은 많은 경우 신화(神話)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역사를 두고 이 도시에 관한 사실들을 수없이 왜곡하였으며, 종교적, 민족적 편견을 합리화하고 제국의 야욕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인, ‘팔레스타인’인, 그리고 기독교인 할 것 없이 모두 이러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종려주일, 그리스도의 입성을 환영하고 환호하는 이들 주민인들 무엇이 달랐겠습니까! 과연 그들은 이 초라하고 별 볼 일도 없어 보이는 한 청년이 그들이 기대하던 거룩한 ‘메시아’, ‘이스라엘’의 소명과 기대를 충족시켜 줄 왕으로 믿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기에 성 밖까지 달려 나와 연도에서 그를 그처럼 열렬히 환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기를 진정 바랬던 것일까?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의 함성은 실은 “우리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해결해 주십시오”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저 로마 제국주의를 괴롭히고 멸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정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주십시오”가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 ‘로마’ 제국이 아니라, ‘이스라엘’ 제국을 세워주십시오”가 아닐까요? <시편>의 시인이라면 이와 같은 기도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환호를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말이지요. 예컨대 이런 것들입니다: “대구를 거룩한 예루살렘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을 하나님에게 바치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 이후의 대책(對策)이 들리지 않습니다. 나도 왕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까? 우리 역시 당나귀를 탄 임금님 앞에서 종려나무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왕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공관복음>은 이 대목에서 ‘요한’ 화자가 생략하고 있는 다른 이야기를 추가하면서, 이날 ‘이스라엘’의 왕의 기분은 어떠했는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감람’산에 올라 화려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우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눅 19:41). 그분께서 얼마나 무거운 마음으로 그 도시를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셨는지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도시의 비극적인 불신앙과 다가올 대학살로 인해 지금 그분은 전율하며 슬퍼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런데 당나귀에 종려나무라니요! 이 둘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궁합인 것입니다. 종려나무는 ‘다윗’의 깃발을 휘날리며 승승장구 진격하는 기병부대 앞에서 흔들면 제격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정치 지도자는 힘과 권능을 가진 자로 늘 말(馬)과 병거를 몰고 다니는 자입니다. 정치는 힘이며, 조직이며, 세력이며, 돈입니다. ‘솔로몬’도 말과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았습니까(왕상 4:26)! 훗날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 왕조를 세운 ‘유다 마카비’도 그랬습니다.
죽기 위하여. 사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넓게는 팔레스타인 전체)은 ‘솔로몬’의 통치를 제외하면 늘 열방들의 힘의 각축장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이집트’, 북으로는 ‘시리아’, 그리고 동으로는 ‘바벨론’이나 ‘페르샤’가 주변의 열강들이었습니다. 그 후 로마가 세계의 강자가 되었을 때, 이 지역은 로마 총독의 지배 아래 있었고, 이어서 ‘비잔틴’의 지배는 성지탈환이라는 명목 하에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운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1517-1917년까지 약 400년에 걸친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동안 이 지역은 거의 완전히 ‘이슬람’화 되는 듯 했습니다.
‘이슬람’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7년 “팔레스타인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자인 영국의 ‘알렌비’ 장군과 관련한 일화는 지금도 유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말을 타고 입성하면서, 예수님이 살아 걸어 다니시던 이 땅을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말에서 내려 걷자, 그를 따르던 병사 모두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우습긴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의 당나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가랴>가 일찍이 당나귀의 의미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당나귀 새끼를 타고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그 비법이 겸손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예수님은 ‘솔로몬’이나 ‘유다 마카비’나 ‘알렌비’ 장군처럼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개선장군으로 입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서 벌어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입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승리는 적을 죽여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으로써 이루는 승리입니다. 이 원리는 무슨 대단한 신비 같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상대를 결코 죽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잠언에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상대의 목을 비틀어서, 무슨 논쟁을 통해서, 그를 설득시킬 수도 없고, 마음으로 항복시킬 수가 없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이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가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바로 이 악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유일한 방법이 자신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당나귀를 탄자와 말을 탄자가 싸우면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뻔 하지 않습니까!
화평을 이룸. 그분께서 죽어서 이루어놓으신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허울뿐인 이름 ‘예루살렘’을 진정한 ‘예루살렘’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샬롬’ 즉 “화평”이었습니다. 성 내 주민들이 그렇게 열렬히 원했던 해방과 구원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이 달아나고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화자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15절).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 이루어질 왕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롬 14:17).
그러나 대개 대부분의 진리가 그러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화평은 좌우에 날이 선 칼과 같습니다. 그분이 가져다주는 “화평”은 역설적으로 분열을 가져오게 하는 화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쟁과 분열을 주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 무리는 일대 항전(抗戰)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왕을 죽이는 것이 곧 자신들을 영원히 죽이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종교인들이 그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지적한대로, ‘아담’ 이후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분리의 역사였습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 두 계보는 타락 이후 지금까지 간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뱀의 자식이라고 지칭한 ‘바리새’인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가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19절).
이런 점에서 볼 때, 그 왕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닙니다. <스가랴>가 예언했던 대로,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에(슥 9:10), 팔레스타인의 한 지역, 한 민족의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조차 인정하고 있듯이, 그분은 진정 “온 세상의 왕”이 될 것입니다(19절).
‘헬라’인들이 그를 찾아와 만나기를 간청하고 있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한 암시가 될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왕입니까? 나는 진정 그분과 화평 즉 화해를 이루었습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나는 지금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나는 사랑하는 자를 살리기 위하여 죽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매일 그리스도와 싸워 그를 이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