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과
서막(序幕)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18약 60분 분량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1:1)

영화에서 “5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첫 5분 동안에 관객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면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속설(俗說)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감독은 이 5분 동안에 관객의 주목을 끌만한 충격적인 장면들로 화면을 채워 독자들의 주목을 붙잡아 두어야 합니다. 이점 오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서막의 중요성은 가히 절대적입니다. 관중들은 이 서막을 통해서 그 오페라를 계속 관람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물론 서막이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오페라가 객관적으로 아주 훌륭하여 존경심을 가지고 끝까지 남아서 감상하기로 작정한 자라 할지라도, 서막이 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관람 내내 오페라에 대한 즐거움과 호기심은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요한복음>의 첫 본문은 바로 이 서막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브라운’(Brown)은 이 서막의 중요성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신약성경의 진주라고 한다면 그 서막은 <요한복음> 중의 진주다.” 서막을 단순히 이해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 맛을 감상할 줄 아는 자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성경적 지식이 일천한 일반 독자들의 눈에도 이 서막은 어딘지 장엄하고 신비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한 편의 찬양 시와도 같습니다. 말 그대로 연극이나 오페라의 서막처럼 <요한복음> 중의 거대한 진리의 보고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서막을 통해서 <신약>의 어디에도 사용되지 않는 ‘로고스’라는 한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서막의 배경이나 출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을 갖기도 했는데, 이 단어는 그 출처에 있어 <성경> 외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곳에서는 이러한 문제와 함께 서막의 문학과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도 알아볼 것입니다. 앞으로 <요한복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알게 되겠지만, 서막에서 등장하는 주제나 기타 ‘모티브’들이 이 책 전체에 걸쳐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서막을 상세히 공부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봅시다.
문학과 역사
흔히 “로고스 찬양 시” 또는 “로고스 송(頌)”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서막은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한 뒤에도 시적인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그렇게 불러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특히 신학자 ‘버니’(C. F. Burney)에 따르면 “서막”을 ‘아람’어로 번역했을 때, 열한 개의 이행 대구(二行對句)로 이루어진 찬송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중간 중간에 해설이 삽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찬송의 형식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1-5절, 10-11절, 14절, 및 16-17절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해도, 시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서막의 구조와 관련해서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룬 바 있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인바, 신학적 주제에 따른 단락 구분과 문학적 형식에 따른 구조분석을 들 수 있습니다.
1. 신학적 주제에 따른 구조 분석
(1) 1:1-5: 로고스와 창조
(2) 1:6-8: 로고스의 증인-침례 요한
(3) 1:9-13: 로고스와 세상
(4) 1:14-18: 로고스의 증인-교회
2. 교차대구적 구조
많은 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막이 “교차 대구적”(chiastic)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간파하고, 그 구조로부터 서막의 핵심사상도 아울러 끄집어낼 수 있었습니다. 교차대구적 표현은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형식적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한 구절에서부터 한 단락, 또는 한 이야기 전체가 교차대구적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 절이 교차대구로 이루어진 경우도 많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서막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아주 다양한 형태의 교차대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 중 한 가지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요한복음>에 대한 문학적 연구를 다룬 대부분의 책에서 다양한 교차대구적 형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 교재의 서론에서 소개한 책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 로고스와 하나님의 관계(1:1-2)
B 말씀으로 말미암은 창조(1:3)
C 말씀을 통한 인류의 생명(1:4-5)
D 침례요한의 증거(1:6-8)
E 성육신(1:9-11)
F 말씀과 그의 백성(1:11)
G 말씀의 능력과 선물(1:12)
F' 말씀과 그의 백성(1:13)
E' 성육신(1:14)
D' 침례요한의 증거(1:15)
C' 말씀을 통한 인류의 생명(1:16)
B' 말씀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1:17)
A' 로고스와 하나님의 관계(1:18)
이러한 형식의 장점은 화자의 신학적 관심사나 본문의 배경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대개 대칭 구조의 정 중앙에서 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이 구절은 긍정적으로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주제를 알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포 독자의 배경이나 상황 등에 대해서도 추측할 수 있게 해줍니다. 즉 당시 요한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었을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이 구절을 암송해 두는 것도 앞으로 이 책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교차대구가 지니는 장점은 바로 그 구조적 특징으로 해서, 구조의 일부가 변형되었거나, 손실되었을 때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아무나 <성경>을 변조하거나 파괴할 수 없게 해줍니다. 어디 한 곳이라도 빠지면 대칭적 구조가 허물어져 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마치 돈 다발을 종이 띠로 봉합한 후 도장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효과입니다.
3. 서막의 기능
앞에서도 밝혔듯이, 서막은 단순한 소개 또는 서론의 기능을 능가하는 그 무엇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막은 오페라의 서곡의 기능과 흡사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서막을 통하여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야 하는지를 사전에 알 수 있습니다: 주제; 분위기; 목적; 등등. 일차적으로 서막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중요한 단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대략 일곱 개 정도입니다.
이들 단어들과, 그리고 대조되는 일련의 단어나 표현들을 통해서 화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써,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이끌어 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화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 합니까?
(2) 화자는 교회의 사명과 본질에 대해서 무엇이라 합니까?
4. 로고스의 출처
<요한복음>의 서막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사역과 관련해서 아주 특징적인 한 단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물론 ‘로고스’입니다. 요한 공동체가 ‘헬라’적 배경과 ‘유대’적 배경을 지닌 다양한 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 단어는 분명히 이들 두 독자층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단어였을 것입니다. 당시 두 세계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 다양한 의미들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단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연구는 ‘머레이’(G. R. Beasley-Murray)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도서 7.
(1) 헤라크리투스(헬라철학자): 전지전능한 지혜
(2) 스토아학파: 만물의 이치 내지는 내재적인 원리
(3)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창조의 중재자 또는 신적 지식에 이를 수 있는 매개체나 수단
(4) 영지주의 철학: 인간의 형태를 띠고 천상에서 지상에 강림한 구원자나 신의 아들, 내지는 신의 형상 또는 조물주(데미우르게)
(5) 근동(이집트/바벨론): 우주적 힘과 능력; 창조력; 신적 능력
(6) <구약> 및 유대적 사상: 하나님의 말씀(창 1장); 하나님의 창조 행위(창 1:6, 9, 11, 14, 20, 24,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의 지혜(잠 8:22-23, 27, 30, 31); 하나님 자신(유대회당에서의 70일역)
이처럼 다양한 독자층이 모두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한 단어, 즉 ‘로고스’를 사용하여, 이들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는 화자는 마치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헬라’철학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연상시켜줍니다.
신학과 신앙
1. 로고스와 창조(1:1-5)
서막은 <성경> 전체의 거대한 서막(창 1:1)을 연상시키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 화자의 관심사는 창조의 행위가 아니라 그 창조를 가능하게 했던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그 주체를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또 하나님 자신이신 존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충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창조와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선언은 “태초에 하나님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만, 대신에 “말씀”(lovgo", 로고스)으로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 번에 걸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유대’ 배경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선뜻 떠올릴 수 있는 그 흔한 이름, 즉 ‘그리스도’나 ‘인자’나 “아들”이나 “주님”, 또는 보다 오래된 용어 “지혜” 등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단어는 독특하며 오늘날에도 이 단어와 병행하는 다른 적절한 단어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가 지니는 아주 풍성한 의미들에 대해서 <서론>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 있습니다만, 보다 철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자는 이 “말씀”이 태초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밝힌 후(이점에서 이 구절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와는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시적인 반복을 통해서 그 본질과 속성에 대해서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즉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자(前者)의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막 6:3) 내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요일 1:2-3) 등이 될 것이며, 후자(後者)의 표현은 그 본질에 있어 그야말로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신적인 속성이나 본질에 대한 선언인 셈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화자는 “하나님이 곧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로고스’의 신적인 본성은 “창조의 활동”에서 드러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1-5절), 다른 활동 즉 “계시”(5, 9-12, 18절)나 “구속”(12-14, 16-17절)의 활동 등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에서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시적 반복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 지고 있습니다(물론 아직은 그 정체에 대해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2절)
반복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다름 아닌 그 ‘로고스’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2) 태초에 창조와 함께 비롯한 존재가 아니라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그리고 (3) 하나님이신 그가 또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로고스’의 역설입니다. ‘로고스’의 신비한 역설이란 무엇이며, 이 역설이 낳은 오해는 무엇입니까?
화자는 이곳에서 ‘로고스’의 활동 즉 천지 창조를 연결시키면서 긍정문으로 한 번, 그리고 부정문으로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로고스’는 ‘헬라’철학에서 주장하는 소위 “조물주”(데미우르게)도 아니고, 창조의 매개자도 아니고, 바로 창조주 자신입니다. ‘헬라’ 철학에서 이해하고 있는 “조물주”의 창조 행위는 무(無)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기존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가는 “창조적 행위”와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노만 가이슬러’(N. Geisler): <Knowing the truth about the creation>.
또한 ‘로고스’는 단순히 창조의 행위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보존시키는 행위자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
“생명”(zwh, 조에)과 “빛”(fw'", 포스)은 태초의 창조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재창조”(recreation) 즉 “구속”(redemption)을 통해서 주어지기도 하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로고스-아들”을 통한 “재창조”입니다만, 이는 결국 “원 창조”(첫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므로, 첫 창조를 전제로 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과 “빛”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두 ‘모티브’로 반복해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과 “빛”의 창조와 재창조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3-절과 1-2절의 선언을 비교 연구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따라서 창조와 재창조의 행위자 ‘로고스’의 빛은 태초의 창조 시에도 비추었고, 이후 계속해서 타락한 인간들 위에 비추어 왔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데도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비치다”(faivnw,파이노)의 동사의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점이 다소 뜻밖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태초의 어둠 가운데서 ‘로고스’의 빛이 비추고 있었으며, 지금은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서 더욱 밝게 빛나고 있음을 뜻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태초의 어두움이 ‘로고스’의 빛에 의해서 사라졌지만, 더욱 밝고 분명하게 빛나고 있는 성육신 한 ‘로고스’의 빛이 비추고 있는데도 화자 당시의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두움은 요지부동이라는 암시일까요?
2. 로고스의 증인: 침례 요한(1:6-8)
화자는 두 번째 단락에서 ‘로고스’ 찬양 시를 잠시 중단하고 침례 ‘요한’의 사역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습니다:
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6-8절)
왜 화자는 그처럼 아름다운 찬양시의 흐름을 갑자기 끊고 침례 ‘요한’과 “빛”의 관계를 벽두부터 밝히려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포 독자” 즉 “요한 공동체”의 당시 삶의 자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당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아마도 침례 ‘요한’을 “그 빛”으로 주장했을 법합니다. 따라서 화자는 벽두에서부터 이러한 신학적 오류를 효과적으로 고쳐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보이며, 지금 그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은 단지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보낸 자라는 점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혀두자는 것이겠지요.
3. 로고스와 세상(1:9-13)
“참 빛”에 관한 신학적 오류를 바로 잡은 다음, 화자는 다시 ‘로고스’의 주제로 돌아옵니다. 그 주제란 다시 ‘로고스’와 “빛”의 관계에 대한 선언으로서, “성육신사건”을 지칭하고 있는 듯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9절)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 자체로서는 다소 애매모호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로고스가 세상에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비춘다”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춘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든 의미론적으로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과연 언제 그 빛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이 세상에서 ‘로고스’의 우주적 사역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좁은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지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 확증해 주는 증거 구절로 10-12절을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0-12절)
이 세 구절은 또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회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12-13절은 복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세상”(kovsmo", 코스모스)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구절에서 세 번 등장하고 있는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처음에 등장하는 “세상”(10절상)은 중립적인 의미로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고, 두 번째 “세상”(10절중)도 이와 유사하게 사람을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거처하는 장소로 이해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세상”(10절하)은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서, 타락한 인류가 살고 있는 암흑의 세상,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시는 대상으로서의 세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긍정과 부정의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1절은 10절과 유사반복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나, 그의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은 좁게는 이스라엘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출 19:5), 넓게는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고스’의 창조 행위로 존재하게 된 것이니만치 당연히 “그의 소유”가 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10-11절이 ‘로고스’의 성육신에 대한 세상의 반응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반면, 이어지는 12-13절은 긍정적인 관점에서 ‘로고스’의 사역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2-13절)
긍정적인 사역이란 ‘로고스’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지칭하는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누구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은 “영지주의”의 주장처럼 특별한 지식을 통해서도 아니고, “유대주의”의 주장처럼 혈연적인 관계를 통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로고스’의 권위에 의해서였습니다. 우리는 12절에서 입양(入養)의 개념을 연상할 수 있으며, 13절에서는 거듭남(또는 중생)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이 개념은 3:1-21의 핵심 주제가 될 것입니다).
4. 로고스의 증인: 교회(1:14-18)
14절은 “성육신 사건”(Incarnation)에 대한 유명한 선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여기서 “되다”(givnomai, 기노마이)는 동사의 의미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동사의 뜻은 “사람이나 사물의 속성이나 특징이 어떤 새로운 조건이나 상태로 변화거나 바뀐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변화된 새로운 그 무엇이란 “육신”(savrx, 사르크스)입니다. 이 선언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당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입은 이단들, 즉 영지주의(靈知主義)나 가현설(假現說)의 잘못된 신학적 주장을 반박하고 교정하는데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기본 세계관은 극단적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육은 악한 것이고 영은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직역: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화자는 이 선언을 통해서 ‘로고스’의 성육신을 출애굽 사건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의 장막위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처럼(출 33:7-11; 40:34-38), 이 세상은 ‘로고스’의 성육신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한 재창조 즉 구속은 두 번째 출애굽 사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관련한 출애굽의 모티브를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가리키며, 따라서 이 구절은 교회의 고백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곱 가지의 기적과(예, 2:11), 십자가에서의 죽음과(19:35) 그리고 부활(20:24-29) 사건을 통해서 많은 증인들이 목도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화자는 나중에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목도한 이러한 영광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 또는 독생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계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독생자”(movnogenhv", 모노게네스)는 “유일한” 또는 “단 하나”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또는 사랑 받는 아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יחיך(야히드)를 번역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삿 11:34). 따라서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 “사랑받는”(ἁϒαπητός, 아가페토스)다는 단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칠십인 역)(22:2, 12, 16)나 또는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의 독생자 ‘이삭’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두 ‘헬라’ 단어 ‘모노게네스’와 ‘아카페토스’가 <신약>에서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예컨대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침례와 관련하여 그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수차례 사용하고 있는 단어 “독생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3:16, 18, 요일 4:19).
14절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표현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이 표현은 <칠십인 역>에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언약”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출 34:6). <요한복음> 내에서 “은혜”는 이곳 서문에서만 등장하고 있지만(14, 16, 17절), 세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요한 공동체에서 이 단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리”는 <요한복음> 내에서 핵심 단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로고스’에 대한 침례 ‘요한’의 증언은 초대교회에서 소위 ‘케리그마’(설교)의 한 부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인데, 이를 화자는 다시 한 번 인용하면서 재확인 내지는 “로고스에 대한 교회의 증거”로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15절)
이 증언은 나중에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될 것이지만(1:30), 이 구절이 기능하는 바는 침례 ‘요한’의 사역과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시기적으로는 ‘메시아’보다 앞서 등장하였지만, 그 능력이나 권위에 있어 “독생자”를 능가할 수 없다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세절은 14절에서 곧바로 연결됨이 마땅합니다. “은혜와 진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런 점에서 15절은 일종의 부차적인 설명으로 괄호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6-18절)
성육신하신 ‘로고스’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우리 즉 교회가 그것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구히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혜”(cavri", 카리스)가 <요한복음>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점도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화자는 이 새로운 “은혜”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옛 언약”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구원자”인 ‘모세’(적어도 ‘랍비’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라는 선물이자 영광의 계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과하신 짐이나 부담이 아니라 선물이며, 따라서 화자는 이곳에서 율법과 은혜가 서로 대척점에 서있는 상반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옛 언약”이 율법으로 상징된다면, 이제 “두 번째 구원자”이신 ‘로고스-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은혜와 진리”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새 질서이자 종말론적인 성취를 의미합니다.
독생자의 영광과 관련해서 화자가 서문의 마지막에 밝히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여태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4절과 17절에 이어 다시 한 번 이곳에서 “출애굽”의 모티브를 대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목도하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 살아남은 자가 없다”(출 34:18-20). ‘유대’인이라면 이 사실은 불변의 원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출애굽>의 화자는 이 원칙을, “모세가 본 것은 고작 해야 하나님의 뒷모습뿐이었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출 34:21-23). 그리고 ‘모세’는 이런 만남을 통해서 율법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는 자나 그것을 보여 달라고 조르는 자가 있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나는 이런 기도를 한 적은 없습니까?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 독생자가 인간에게 “나타내신”(ejxhgevomai, 엑세게오마이)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해석하다” 또는 “주석하다”는 영어 단어 ‘exegesis’(엑스제시스)가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요세푸스>에서는 이 단어를 ‘랍비’가 율법 해석에 대한 기술적인 용어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독생자가 드러내고 해석한 대상은 다름 아닌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 독생자의 해석은 얼마나 권위가 있으며, 믿을 만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분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독생자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13:23). 이런 관계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그리고 부활이후에도 영원히 이어지는 그런 관계를 말합니다. ‘로고스-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보다 더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없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우리는 소위 ‘포스트모던’(post-modern)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특징은 어떠한 절대적인 규범이나, 질서나, 신조나, 사상을 배격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오히려 해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허용하고 관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도 현대 사회의 세 가지 특징을 세속화, 다원화, 그리고 상대화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특정 종교의 이상과 정신을 따르고, 증언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이며,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가능할까?
여기서 특정 종교는 다름 아닌 기독교를 말하는 것인데,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해주는 선언은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시와 찬송으로 노래하며, 선포하고 있는 이른바 “로고스 송”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1. 로고스와 창조: 예수는 누구인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화자는 <공관복음서>의 화자들과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그의 독자들을 영원 이전, 즉 태초 이전의 상황으로 이끌어갑니다. 태초에 누가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태초, 즉 시간과 영원이 맞닿는 태초, 삼위(三位)의 우주가 시작되던 그 태초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있기 이전의 태초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습니다만, 화자의 관심사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것은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계시를 통한 믿음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합리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혜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화자가 이 서막(prolog)에서 예수를 설명하기 위하여 기울이고 있는 노력이나 문학적 솜씨는 그야말로 탁월합니다. 그는 네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를 노래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네 개의 단어는 모두 영어 자음 ‘L’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시인이 “이합체 시”를 쓰고 있는 듯합니다.
로고스. 그가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는 단어는 ‘로고스’(Logos)입니다. 즉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 “그는 로고스다”입니다(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조금 후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단어가 현대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문 분야를 표기하는 영어 단어의 끝에 어미(語尾)처럼 붙어 다니는 ‘-ology’가 여기서 파생한 것입니다(예: biology; sociology; theology; 등등). 그런 점에서 화자가 이 개념을 도입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으며, 그의 의지와 노력과 창조적 상상력은 귀감으로 삼을 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의 대화를 시도함에 있어, 자신만이 알고 있는 단어나 용어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은 ‘레이건’을 ‘루스벨트’ 다음으로 가장 탁월한 대통령으로 꼽는다고 합니다. 그가 가진 위대한 전달자(communicator)로서의 능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아주 어렵고 전문적인 정치∙경제 용어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 어떤 단어들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교회에서 우리가 수시로 사용하는 종교적 단어들에 대해서 아주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 “구속”; “옛 언약”; “속량”; “선교.” 바로 이런 점에서 화자의 의지와 노력이 귀감을 삼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선택했다는 것이지요. 당시 요한 공동체가 ‘헬라’적 배경과 ‘유대’적 배경을 지닌 다양한 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로고스’는 분명히 이들 두 독자층에서 각 개인의 지적∙종교적 배경에 따라서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단어였을 것입니다. ‘헬라’적 배경을 가진 독자라면 “전지전능한 지혜, “조물주”, “만물의 이치나 원리”, “초자연적 힘” 등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히브리’적 배경을 가진 독자였다면, “하나님의 말씀”(다바르), “하나님의 창조 행위”, 또는 “하나님의 지혜” 등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로고스’에 대한 다양한 이해 방식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우리가 화자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열정(pathos)입니다. 그는 마치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헬라’ 철학자들과 더불어 열렬이 논쟁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씨름하고 있는 ‘바울’을 연상시켜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세상을 향한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화자나 ‘바울’이나 지식과 사랑을 겸비한 탁월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나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이제 화자가 밝혀주는 ‘로고스’ 즉 “말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화자의 ‘로고스’ 송(頌)은 시적 아름다움과 역설 그 자체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존재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2절). 어떻게 이런 존재 방식이 가능한지는 우리의 이해와 상상 밖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분명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있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든 영원한 속성을 함께 누려야 할 것인즉, 따라서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the Lord). 아무튼 “로고스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선언을 통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만일 ‘로고스’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함께 계셨다면,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그 교제의 성격이나 질(質)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냥 침묵하며 각자 다른 일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지냈을까? 마치 오늘날 별거한 부부가 두 대의 TV를 사서 각자의 방에다 놓고 다른 프로그램을 보며 살듯이 그렇게 지내고 있었을까? 서로에 대한 관심이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지내고 있었을까? 이런 부부 사이에 자녀가 탄생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지 않는 부부는 결코 같은 방을 쓰려 하지 않을 것이며,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면 자녀가 태어날 리가 없습니다. 자녀의 탄생은 사랑의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천지 창조는 어떠합니까? 단순히 ‘로고스’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두 분 사이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이런 식의 유비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자와 성부 사이의 교제는 분명 말할 수 없는 친밀함과,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대화하고, 사랑했으며, 그리고 계획과 비전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격려가 있었으며, 비전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런 교제를 “영원한 언약”이라 부릅니다. 결론적으로, 천지창조는 이 모든 행위들의 장엄한 오케스트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런 묵상 가운데 화자는 ‘로고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그러니까 예수는 창조주이면서, 창조의 매개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창조주라면, 당연히 그는 만유의 주인이자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이처럼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는 곳도 드문데도, 역사적으로 이 문제는 수없이 많은 논쟁을 낳았고,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은 이 구절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문자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낳으신 아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그는 하나님이자, 창조주이자, 따라서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교제와 창조에 관한 우리의 묵상은 교회 내에서 성도 사이의 교제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런 교제가 있으며, 창조가 있습니까?
생명(the Life). 창조는 단순히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창조만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창조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파스퇴르’(L. Pasteur)가 그 유명한 “자라 목 실험”에서 발견한 사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인과율(因果律)로서,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진화 생물학에서는 이런 식의 인과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화자는 현대 과학적 주장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니다. 그 또한 생명은 반드시 생명을 주는 자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로고스’에 대하여 이어지는 선언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4절상). 예수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원천이라는 선언입니다. 그가 생명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생명이 없었다면,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가 없었다면, 창조의 결과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무기물로 가득 찬 천지창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장면이 보여주고 있는 “공허하고, 어둡고, 그리고 온통 죽음의 물로 가득 찬 지구”의 모습 바로 그것이겠지요(창 1:2).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생명은 죽음과 함께 <요한복음>에서 핵심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좁게는 “영생”을 의미하며, 보다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또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니까 화자에게 있어 영생은 단순히 사후 천국에 가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누려야 할 신자의 당연한 특권이자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에 속해 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즉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끊어진 자는 이 생명이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로고스’와 하나님 사이에 지속적인 교제의 결과가 생명의 창조로 나타났다면, 나와 그리스도 사이의 교제 역시 동일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영생을 갖기를 원합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빛(the Light). 화자는 또한 생명은 빛을 떠나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하). 자연계에서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만들어지는 유일한 과정이 광합성(光合成)입니다. 대부분의 식물은 이 광합성 즉 빛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로고스’가 생명이자 동시에 빛이 되기도 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요한복음>에서 또 하나의 이분법적인 구분으로서, 빛이 영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반대로 어두움은 영적인 무지와 상실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니고데모’는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공회원들과 함께 한 밤중에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강론을 듣고서 밤 중 어둠 속으로 슬그머니 빠져 나가 그의 선생을 팔아넘깁니다. 예수께서 체포되던 날 밤에 ‘베드로’는 추위와 두려움으로 타오르는 모닥불에 앞에 앉아 불을 쬐면서도 세 번이나 그의 사랑하는 선생님을 부인한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안식일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바퀴벌레와 같은 미물들은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도망하려 합니다. ‘니고데모’도, ‘안나스’도, ‘가롯 유다’도, ‘베드로’도 모두 빛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었던 세상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나는 빛 속에 있습니까? 빛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까? 또는 빛이 되고 있습니까?
2. 로고스의 증인들
<요한복음>의 핵심 모티브 중의 하나가 “증거”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마르투리아’(marturiva)인데 영어로 음역(音譯)하면 “마티르”(martyr), 즉 “순교자”가 됩니다.
이 책 속에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증언”이라는 단어가 이를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화자가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일곱 가지의 기적에 대해서도 단순히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shmei'on, 스메이온)(sign)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또한 이 책의 마지막 진술도 “증언”이라는 말로 끝내고 있습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1:24)
이러한 의도에 맞게 화자는 예수님에 관한 장엄한 “로고스 송”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고스”의 증인에 대한 언급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누가 그 증인입니까?
<요한복음> 속에는 적어도 일곱 부류의 증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숫자 “일곱” 역시 화자가 즐겨 사용하는 모티브 중의 하나라고 서론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들 일곱 중 가장 중요한 증인은 성자 예수님 자신이라고 그분 스스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8:14). 이어 두 번째 증인은 성자 예수님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8:18). 그리고 세 번째 증인은 말할 것도 없이 성령 하나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6:13-14). 네 번째 증인은 <성경> 그 자체입니다. 화자는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이나 또는 제자들의 회고 등을 통해서 <히브리 성경> 즉 <구약>을 인용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로고스’에 대한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화자는 예수님의 인격이나 사역과 관련해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의 선언이나, 제자들의 회고 등을 통해서 <구약>의 여러 본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 2:17; 6:31, 45; 7:42; 8:17, 34 등.
다섯 번째 증인은 예수님의 사역 즉 그분이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10:38);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4:11). 여기서 그 일이란 일차적으로 화자가 이 책속에서 선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일곱 가지의 표적을 포함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 이제 화자는 여섯 번째 증인으로 침례 ‘요한’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서막의 두 번째 단락은 바로 이 사람에 대한 화자 자신의 증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침례 ‘요한’은 단순히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앞선 다섯 증인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그를 소개하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무엇보다 화자는 그를 이스라엘의 예언자 내지는 선지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1:6-7).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 본문을 읽을 때 침례 ‘요한’에 대해서 화자와 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성경>도 당시 다수의 사람들이 침례 ‘요한’의 언행이나 사는 모습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으면, 사람들은 그를 만나보기를 원했고, 실제 그를 만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으며, 종교 지도자들마저 일반 대중들의 이런 반응에 두려움과 껄끄러움을 느껴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살펴보도록 지시했는데, 보냄을 받은 자들마저 일부 그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아 회개하고 침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4-5).
사실 침례 ‘요한’은 성경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눅 16:16상). 이 말은 그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옛 시대와 질서를 대표하는 마지막 주자(走者)라는 뜻입니다. 그 이후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써 새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하). 이런 점에서 그를 새 시대의 선두주자로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며, 사실 예수님께서도 그를 일컬어 모든 인간들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극찬한 바도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상).
침례 ‘요한’은 새 시대의 선두주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회개의 침례를 받도록 준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화자가 서막에서부터 그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에게 행한 침례 사역 자체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사건 즉 빛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그 빛으로 확인하고 확증하는 역사적이고도 법적인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요한’이라 부르는 한 사람의 신실한 소명 의식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화자가 침례 ‘요한’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의 경우와는 달리, 화자는 침례 ‘요한’의 중요한 사역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침례”나 “회개” 등과 같은 침례 ‘요한’의 중요한 사역들에 대해서 <공관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막 1:4; 눅 3:8; 마 3:8.
이점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 한 점은 <공관복음>은 침례 ‘요한’의 사역과 관련해서 가르침(설교) 또는 권면 등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반해(마 3:1; 막 1:4; 눅 3:3; 눅 3:18), <요한복음>은 이들 사역을 모두 증거라는 단어로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역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예수님에게 침례를 베풀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빛의 증인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빛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장면이 <요한복음>의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복음과 관련해서 그 어떠한 신학적 주제도 발전시키고 있지 않으며, 화자 또한 침례 ‘요한’에 관해서 그 어떠한 신학도 전개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이곳 서막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곳이 될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7-8절에서 화자가 ‘요한’을 소개하는 방식은 오히려 부정적입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1:8). 이는 상당히 의도적인 소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침례 ‘요한’ 자신으로부터 직접 그의 사역에 대해서 증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만, 이곳에서 화자의 의도와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궁극적으로 빛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에 앞서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선두주자로서 침례 ‘요한’의 사역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들은 무엇이었을까?”
7-8절의 침례 ‘요한’에 대한 삼중적(三重的)인 설명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1) 침례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지만, 그 자신 그 빛이 아니다; (2)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이다; (3) 그가 온 것은 사람들이 그의 증언을 통해서 그 빛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설명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요한’ 자신은 그가 빛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바로 이점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소위 평신도이든, 목회자이든, 교사이든, 작가이든, 선교사이든, 정치가이든, 스스로 특별한 무엇인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효과적인 증인이 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스스로 무엇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증거하는 내용은 그 빛이 아니라, 그 빛을 이용한 자신의 성공담이나 무용담으로 흘러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교회나 선교 단체나 또는 기독교 언론 매체들을 통해서 이런 모습을 너무나 자주 접해 왔으며, 필자 역시 늘 이런 유혹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도 높이면서 동시에 나도 높이고 싶다는 그런 유혹 말입니다. 그래서 빛의 증인이라는 이름 외에 이런 저런 타이틀을 달고 다니고 싶은 것이지요. 이런 유혹은 아주 은밀하고 교묘해서 쉽게 눈에 뜨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즐겨 부르시는 듯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20).
침례 ‘요한’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은, 그는 스스로 빛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 빛을 입으로 증거하고 다녔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나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아주 참담한 수준에 이른 오늘날에 있어 소위 전도는 호기심은커녕 혐오감만 자아낼 뿐이라고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흔히 삶으로서의 전도 내지는 침묵의 전도입니다. 즉 입으로서가 아니라 선하고 거룩한 행동을 통해서 이웃을 감화시키자는 것이지요. 백번 지당한 생각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위선이며 거짓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참고. 약 2:14-20). 그러나 대단히 불행하게도 소위 침묵의 전도는 그냥 침묵일 뿐이지, 그 자체로서 전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도 즉 증거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핍박이나, 설화(舌禍)나, 또는 배척이 두려워 말하기를 꺼려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게도 바로 이 방법을 통해서 그 빛을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하). 초대교회 당시 공회에서 사도들을 옥에 가둔 것도, 그들이 행한 기적이나, 신유나, 자선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로 하여금 못하게 말린 것은 전도였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행 5:28상). 그런데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그들을 풀어주면서 한 말도 이 전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 5:20).
침례 ‘요한’과 관련해서 세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은, 증거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련해서입니다. 즉 그는 자기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믿게 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목적은 조금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겠습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도의 주체이자 주인공은 전도자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믿어야 할 대상은 전도자나, 교회나, 선교 단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침례 ‘요한’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1:29)고 하면서 그분을 믿고 따르도록 유도했으며, 실제 그의 두 제자가 그렇게 했습니다(1:37). 우리는 교회를 믿으며,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일을 당연한 특권이자 책임으로 생각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일 때문에 예수님과의 직접적이고도 인격적인 만남이나 교제를 소홀히 하는 경우를 너무나 자주 보아왔습니다. 이점 특히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대학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목적은 교회나 선교 단체를 확장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계시이자 ‘로고스’인 <성경>을 제대로 알고 배우도록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 자신이 전도의 주체이자 주인공이라면, 복음 전도가 복음 세일이나 복음 콘서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는 그의 책에서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에 대해서 엄중하게 경고하면서, 소위 “거룩한 소명” 이면에 있는 인간의 종교적 탐욕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오스 기니스’, 「소명」. 홍병룡 역, 서울: IVP, 1998.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나는 왜 전도하려 하는가? 나는 왜 제자를 삼으려 하는가?”
4. 로고스와 세상
1) 세상의 빛(9절)
해마다 연말이 되면 언론이나 방송에서 그해의 국내외 주요 뉴스를 선정하여 발표하곤 합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나 인물, 놀라운 업적이나 발견 들이 항상 단골 메뉴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한 해가 아니라 지난 오천여 년의 인류 역사에서 십대 또는 이십대 뉴스에 들어갈 만 한 사건이나 발견을 꼽는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람마다 그 대답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불을 발견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바퀴를 발견할 것을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학자라면 주전 5 세기경에 ‘그리스’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지적(知的) 및 문화적 업적을 들 것이며, 또 다른 역사학자는 제정 로마 시대의 로마법의 제정을 들기도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보다 중요한 사건은 원자 에너지의 발견이나, 우주여행, 또는 컴퓨터나 인터넷의 발명 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이 비취되. 이 모든 사건이나 발견 또는 발명 들은 그 자체로서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것들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생각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육신(Incarnation) 사건 즉 ‘크리스마스’입니다. 이 날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날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깨지기 쉽고 무방비 상태의 어린 아이가 되신 날입니다. 이 구절은 침례 ‘요한’이 사역하던 당시 바로 이 성육신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9절).
참 빛. 이 구절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참 빛”입니다. 화자는 이미 앞 구절에서 예수님을 “빛”으로 지칭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특별히 “참 빛”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참”은 그리스 단어로 ‘알레티노’(ajlhqinov")인데,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오류” 또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참되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거나, 두 번째는 “부분적”인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전달하려는 의미는 후자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더 나은 번역은 “진정한 빛”(real light) 내지는 “온전한 빛”(genuine light)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야말로 진정한 빛이지 여타의 빛들은 모두 불완전하거나 또는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들 불완전한 빛을 “참 빛”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점에 있어 침례 ‘요한’도 예외일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당대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는 너무나 신비하고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조차도 그를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마 11:11상).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믿고 따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직전의 구절에서 그가 그 빛이 아니라고 분명히 진술한 바 있습니다(8절). 바로 그런 점에서 9절을 6-9절을 포함하고 있는 전체 단락의 맥락에서 읽어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참 빛”과 경쟁을 할 수 없기는 침례 ‘요한’ 만이 아닙니다. 온갖 종류의 가르침이나 사상 또는 세계관들이 “참 빛”과 경쟁을 벌여 왔습니다. 예컨대, 19세기 사람들이 믿고 따랐던 “빛”은 소위 “진보의 사상” 내지는 “낙관주의”였습니다. 진보 사상은 당시까지 이루어진 과학적 발견이나 국제 정치∙외교 분야에서의 진보에 근거한 것으로서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진화론”이나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유물론적 무신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런대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후 지금까지 물질적인 성공이나 번영에 대한 꿈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21세기 문턱에서 “자본주의”의 희망이 아니라 위기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에서 그 위기가 비롯되었다는 데에 충격을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 회사의 대명사로 꼽히던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나, 굴지의 은행과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도산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믿고 따라왔던 일단의 “빛”들이 반드시 거짓된 “빛”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그 “빛”들은 부분적이거나 또는 불완전할 뿐이었습니다. 인류가 진정으로 갈망하고 목말라 하는 내적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요 7:37)고 하십니다. 또한 “내가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십니다.
각 사람에게. 이 구절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두 번째 단어는 “각자에게” 즉 “모두에게”입니다. 즉 예수님의 “빛”이 “모든 사람”에게 미쳤고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화자는 지금 다른 시대가 아닌 1세기의 끝자락에 서서 이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는 지금 그가 전한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가져다 준 충격과 갈등을 익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빛”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거부로 일관해 왔던 족속입니다. 이들에게 이방인들은 지옥불의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나를 여자나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오직 두 종족, 즉 ‘유대’인과 이방인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헬라’인들은 나았을까? 이들 역시 지식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닫힌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지식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계시, 예컨대 “빛”이 모두에게 미쳤다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에게도 오직 두 인류만 있을 뿐입니다. “아는 자”와 “무지한 자”가 그들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로마’ 제국은 어떠했을까? ‘로마’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시민과 “야만인”으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법과 제도”를 소유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은 이들 모두에게 오셨습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나 “야만인” 할 것 없이, 이들 모두에게 골고루 비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는 오직 한 종류의 인류, 즉 “하나님의 백성”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온 세상을 감싸 안을 정도로 큰 가슴을 가진 분입니다.
이전에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습니까? 나에게도 그 “빛”이 비추었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비추고 있습니까?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다릅니까?
2) 세상의 반응(10-12)
“트로이 전쟁” 당시 ‘그리스’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세 장수는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그리고 ‘오디세우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용맹스럽다던 ‘아킬레우스’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으나 이후 오랜 방랑과 역경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 온 사람은 ‘아가멤논’ 한 사람 뿐이었으나, 그마저도 그의 아내에 의하여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는 전쟁 기간 동안 다른 남자와 이미 불륜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배신과 배반에 대한 고전(古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배신과 반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백성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한 나나를 이루도록 하셨으며,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여러 때에 자신을 알리셨으며, 언젠가는 오실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주님을 거절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말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이 백성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 문제를 보다 신학적으로,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다만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도적 거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이지만,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 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출산을 앞두고 머물 장소를 찾았을 때 여관 주인은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년 후 동방의 현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대’인의 왕을 찾는다고 했을 때, ‘헤롯’ 왕은 그들과 함께 그 왕을 찾아 경배를 드리는 대신에 ‘베들레헴’의 모든 어린 아이들을 다 잡아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의 왕위에 도전하는 그 어떤 자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매년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결국 그 진정한 의미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이런 태도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요 3:19).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왔으나 세상은 그를 빛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를 오히려 미워하였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온갖 이유와 핑계를 동원해서 주님을 거부하고자 합니다. 내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려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혐오합니다.
영적 무지.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세상은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무지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3:3-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도대체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타락” 이후 인간은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일까요? “타락”이 “죄”의 결과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과연 어디까지 인간이 타락을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이런 저런 대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진단은 이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총체적으로 타락했으며(롬 3:10-12), 그리고 각 개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 군데도 빠짐없이 철저하게 타락했습니다(롬 3:13-18). ‘존 칼빈’(J. Calvin)의 그 유명한 TULIP의 교리 중 첫 번째 글자에 해당하는 “완벽한 타락”(total depravity)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런 것이라면, 즉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찾아나서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남아있는 가능성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찾아오시는 일입니다. “빛이 세상에 비추었다”는 선언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은 ‘아담’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전 우주 역사에서 기록된 첫 번째 하나님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도 그분은 동일한 질문으로 죄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네가 왜 그렇게 했느냐?” “네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나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립니까? 만일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까요?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아니 이미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과 나의 모습으로 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나의 모습으로, 그리고 나에게는 여러분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지나친 억측입니까? 그렇다면 과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병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갇힌 자는 어떻습니까?
4. 로고스의 증인: 교회의 선포
교회. 침례 ‘요한’이 여섯 번째 증인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일곱 번째 증인은 누구입니까? 서막의 마지막 단락(1:14-18)에서 등장하고 있는 문장의 주어 “우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여기서 우리는 “요한 공동체” 즉 교회를 의미하며, 우리 같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모두 이 속에 포함됩니다. 빛의 마지막 증인이 교회 즉 바로 나라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증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침례 ‘요한’이나 사도들만큼 거창하지도 않고 유명하지도 않음에도 모든 증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를 침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 과연 나는 침례 ‘요한’보다 더 위대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으로 인(印)을 친 천국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된 것은 미련한 어느 전도자의 미련한 전도를 통해서였습니다(소위 “모태신앙인”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과연 침례 ‘요한’보다 더 신실하며 믿음직합니까? 나는 매일 “증거”(순교)하고 있습니까? 매일이라는 단어가 거슬린다면 이 질문은 어떻습니까? “내가 침례를 받은 이후 단 한 번이라도 나로 말미암아 침례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만일 없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라 진단하십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오늘 당장 계획은 무엇입니까? 열정과 지식이 있기라도 한 것입니까?
본 것과 받은 것. 이 질문과 관련해서 필자는 지난 시절을 회고해 보고 싶습니다. 필자가 침례를 받은 것은 1984년 나이 36세 되던 생일날이었는데, 마침 그 해는 주일이라 아침 예배 시간 중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기대와 기쁨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주님과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침례는 내적인 변화에 대한 외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그날 이후 필자의 인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생각이나 태도나 행동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필자에게 道를 전하기 위해 귀찮게 집을 방문하던 젊은 집사 부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으며, 위선적으로만 보이던 교회의 성도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먼저 다가가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당장 침례 받은 다음날부터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필자가 겪은 변화에 대해서 증언하고 간증하며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변화는 내 인생의 목적과 계획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이때부터 기도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서와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정열과 지식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내 속에 넘쳐나는 정열과 지식은 나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 간증하기도 하고, 성경 공부로 초대하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내 삶의 한 부분을 이루어 왔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강요한 사람도 없고, 오직 내 마음 속에서 원하는 그것을 행해 왔을 뿐입니다. 나는 그저 듣고, 보고, 배워서, 내가 소유하게 된 그것을 전하고 증언한 것입니다. 나에게 그 모든 동기를 유발시켜 준 곳이 있다면 필자에게 처음 침례를 베풀어준 그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실로 정열과 지식으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증인으로서의 교회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실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미래를 위한 보험을 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 한 목숨 주님을 위하여 바치겠다는 헌신과 결단의 표현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증거하고 증언할 것인가? 이 질문은 교회가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수사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답에 대신하고 있습니다: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15상)
그렇습니다. 증인이란 보고 들은 것, 그리고 받은 것을 전해주는 자입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받았습니까? 나는 정녕 “그 빛”을 보았고 받았습니까?
보일 것과 줄 것.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역할 모델을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혹시 내가 존경하고 따를 만 한 동료 그리스도인 선배나 후배나 또는 선생님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시대에 선생은 있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으나 제자는 없다는 탄식을 자주 듣습니다. 역할 모델이 없다는 것이지요. 얼마 전 후배 기독교 교수와 대화하는 중에 그분이 어려움을 호소해 온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가지고 어린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수개월이 지나도 도무지 변화가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현상은 그분만 겪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원인은 배우는 자가 따라서 해볼 만 한 살아있는 ‘메뉴얼’, 즉 역할 모델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형편이 이러할 진대 세상 사람들에게 비친 교회의 모습은 더욱 참담한 성적표를 드러낼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필자가 사는 단지 내에 그야말로 열정적인 집사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수시로 기도원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찾기도 하며, 찬양 무용 선교 단에 참여하여 순회 발표회도 가지며, 가끔 주일 저녁에 교회 성도들을 초대하여 기도회를 갖기도 하는데, 기도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였으면 지나가는 이웃 사람들에게 까지 다 들릴 정도입니다. 그것도 창문을 다 열어젖히고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이웃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고 알리고 싶다는 선교적인 저의도 깔려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 부부를 잘 모르는 사람 같으면 그 신앙심에 큰 감동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지난 수년 동안 월 관리비를 한 번 도 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민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이 책임을 그들은 무시하며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운영위원회의 거듭되는 간청과 요구에도 요지부동입니다. 이들 부부가 가난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의 내부 수리를 위해서는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막가파 식 사람들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관리비는 체납하면서도, 전기세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이라 한 번이라도 연체했다가는 당장 전기가 끊어질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영특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우습게 알아도 이만 저만 우습게 안 것이 아닙니다. 도무지 공동체가 무엇인지, 시민의 책임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가르쳐주어야 할 정도로 미숙한 어린 아이들입니다. 이들이 효과적인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들 때문에 모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잠잠하게 있는 것이 하나님을 도우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그런 점에서 탁월한 역할 모델이었습니다. 예컨대, ‘바울’ 사도는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참고. 빌 2:17). 나는 어떻게 탁월한 증인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탁월한 순교자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비법(秘法)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매사가 그렇듯이 무슨 일에든 왕도(王道)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영역에 무슨 일확천금이나 단기간 속성 완성 같은 코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조그만 일에서부터 조금씩 일관되게, 열정과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쌓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줄 믿습니다.
필자에게 있어 이태리 식당을 운영하는 김석준 사장과의 만남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식당 개업을 한 지 몇 개월이 안 되어 아직 손님도 별로 없을 때, 우연히 그 식당에 들러 이 사람과 그 아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딱해 보여서 자주 들러 식사도 해주고, 저의 아내는 갈 때마다 무엇인가 선물이나 먹을 것을 들고 가서 김 사장의 부인에게 전해주기도 했고,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도 해주고, 사업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었더니 이 분들이 어느새 우리 부부를 자신들의 후견인 내지는 후원자로 생각하면서 고마움을 표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사장의 아내는 저의 아내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릅니다. 낯선 객지에 와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저의 아내를 만나 무척이나 행복하답니다. 이분들이 우리 부부의 조언대로 그 식당에서 요리교실도 시작하게 되었고, 매월 음악회도 열리고 있으며, 이런 일들로 해서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대 어느 날 이분이 우리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자기 아내를 제발 교회 좀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번도 그에게 교회 가자고 한 적도 없고, 복음을 전한 적도 없습니다(부끄럽게도 말입니다). 다만 필자는 그 부부가 하나님을 알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기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속내를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사실 우리 대부분은 목사나, 선교사나, 신부나, 수녀나, 기타 전임 사역자로 부름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전임 사역자는 오히려 복음 사역에 제한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오히려 거부감이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고해 보면 필자의 경우도 목사가 되기 이전에 훨씬 더 왕성하고 자유롭게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목사가 된 것을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평가해 보아도 필자는 태생적으로 야전군 체질이지, 정보나 행정병과 출신은 아닌 듯합니다. 전임 사역자들의 특징은 복음을 가르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열정이나 지식은 충만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동료의식이 부족합니다. 선생은 될 수 있을지언정 증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소위 평신도는 단순히 복음을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학생이 질문이 있을 때 선생을 찾지 않고 동료 학생을 먼저 찾아 물어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가 가장 효과적인 자리입니다. 복음을 위한 “관계 맺기”에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의 자리나, 직업이나, 상황을 십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나를 지금 그 자리에 부르심이 아니겠습니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매일 정해놓고 기도하는 대상이 있습니까?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말이나 행동으로써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껏 기도한다는 대상이 늘 믿지 않은 내 가족이나 형제들에 국한되어 있습니까? 눈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목장 안의 교제에서 목장 밖의 선교로 눈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연습과 토의
1. 다음 구절들을 암송해 봅시다: 1:1-5; 1:12-14; 1:18.
2. <요한복음>의 서막의 형식과 구조적 특징은 무엇이며, 기능과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3. 서막에서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미지나 상징들은 무엇입니까? 핵심적인 ‘모티브’는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4. ‘로고스’와 관련한 신비한 역설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로부터 공동체의 전형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나는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아니면 혼자입니까?
7.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습니다(14절). 나는 과연 이것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습니까? 나는 매일 그분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분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나는 매일 순교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