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베드로의 헌신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36-38약 12분 분량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미국 영화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남여 주인공의 대화입니다:
“당신 어제 저녁 뭐했죠?” 여인이 묻습니다.
“그렇게 먼 옛날 일은 나는 기억하지 못하오.” 남자의 대답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 무얼 할 건가요?” 여인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게 먼 장래 일은 예측할 수 없다오” 남자는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런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예언에 대한 어느 현자(賢者)의 충고가 떠오릅니다: “결코 예언을 하려들지 말라. 만일 당신의 예언이 틀리면 사람들은 당신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고, 만일 맞으면 그 예언을 기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고 있는 대화나, <성경>의 모든 <예언서>들의 핵심 메시지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라는 것이지요.
헌신을 미래에 대한 일종의 예언이라고 본다면, 오늘 ‘베드로’의 놀라운 헌신의 고백도 예언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의 헌신이 내일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불교계의 거장 승철 스님이 남긴 유명한 법어가 생각납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 법어는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어두웠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산을 물이라고 하고, 물을 산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겠죠.
이 말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냥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진리를 진리대로 받아들이며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충고가 아닐까요? 어제가 어떠했고, 내일은 어떠할 것이라는 짐작이나 회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겠죠. 예수님도 내가 내일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헌신이나 고백을 할 것 없이, 오직 우리의 대답을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이유대지 말고 시키면 지금 당장 시키는 대로 순종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내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고 졸고 있거나, 딴 생각하고 있으면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새 계명”을 말씀하시고 있는 이 순간에 그가 제대로 듣고만 있었다면, 그의 질문은 달라야 했습니다. 예컨대, “주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라든지, 아니면 “주님, 우리에게 정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라고 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왜 나는 지금 갈 수 없습니까?” 영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질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만 크게 마음이 흔들린 듯합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자, ‘베드로’는 그다운 헌신과 맹세로써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절). 어떻게 보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통제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정녕 잘못된 것일까?
나의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의 청중이 누군가에 따라 설교의 내용이나 톤이 달라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의 메시지와 <요한복음>의 메시지가 같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놓고 서로가 옳다고 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쪽은 오직 믿음으로, 다른 한 쪽은 오직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다면, 나는 ‘베드로’를 영웅으로 치켜세울 것입니다. 그의 본을 따르자고 웅변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워 그냥 그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있어서는 안 된다고 설교할 것입니다.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라고 강조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무엇인가 해보는 것의 차이는 태초 이전과 이후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할 것입니다.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그 무엇엔가 내 인생을 투자하라고 설득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는 탈현대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말입니다. 열정은 죽었고, 헌신은 사라졌으며, 그래도 이웃에 대해서는 상냥하고, 고상하고, 양순하며, 전투적인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상징입니다. 마치 머리털과 눈알이 다 빠져버린 ‘삼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모습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며, 귀감이며, 역할 모델이어야 합니다!
나는 직업이 직업이니 만치 젊은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사역의 대상은 주로 청년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성경> 공부도 하고, 설교도 하며, 예배를 함께 드리기도 했습니다. 젊음의 특징은 쉽게 반응하고, 결단하며, 헌신한다는 데 있습니다. 당장 태산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기도 합니다. 어깨가 축 늘어져 풀이 죽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까지 지니고 있어, 감정이 극과 극을 왕래하면서 마치 파도치듯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헌신을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런 친구에게는, “전진하라. 헌신하라. 큰 뜻을 품어라” 비전을 가져라” 또는 “더 큰 비전을 가지라” 등과 같은 주마가편(走馬加鞭)은 곤란할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오히려 피폐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헌신을 다루는 방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그분은 오히려 되묻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죽겠다고?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게 될 텐데.” 이 장면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두 사람 다 몇 년 동안 예수님과 사귀어 왔습니다. 둘 다 그분의 표적들을 보고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둘 다를 사랑하셨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계셨습니다. 두 사람 다 예수님이 가장 그들을 필요로 했을 때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비탄에 잠기게 했고, 고통을 가중시켰으며, 두 사람의 실패는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을, 나머지 한 사람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운명을 이처럼 극명하게 갈라놓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두 사람의 마음과 가슴의 차이라고 ‘바클레이’는 말합니다. 배신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유다’는 처음부터 그것을 계획하고 꾸몄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바꾸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호소마저 냉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릅니다. 꿈에도 선생님을 배반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한 순간의 연약함으로 헌신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을 뿐입니다. 엄청난 현실의 광풍(狂風)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뿐입니다.
‘베드로’가 이 역사적인 고백을 드릴 때, 그의 나이가 과연 몇이었을까? 혈기왕성한 20대 후반 내지는 30대 초반 정도? 질풍노도(疾風怒濤)와도 같다는 청년의 때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그의 연약함을 나무라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못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을 후회해야 할 것입니다.
같은 죄라도 고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도피성(逃避城)의 경우도 이 두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은 법으로 이 두 차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했던 헌신의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랐을 뿐입니다. 단지 그는 선생님을 열렬히 사랑했고, 늘 곁에 두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선생님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사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그의 약점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불같은 충동성이나, 어딘가 안정되지 못한 마음 자세나, 생각하기 전에 불쑥 말부터 먼저 내뱉고 보는 성급함 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갈대에서 바위로 바꾸어 주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충동적인 헌신에 대해서도 바로잡아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약속이나 헌신 그 모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충정인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아들 학우는 결혼 후 자기 엄마와 같이 살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달우도 그가 나중에 돈을 벌면 엄마에게 우선 드릴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울 뿐인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마음도 이러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선생님의 뒤를 이어 위대한 순교의 길을 걷게 될 것임을 주님께서는 익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찌 그러한 ‘베드로’를 죽도록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베드로’가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헌신이나 결단의 덕분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로부터 나온 것은 사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비탄에 잠겨 쓰디쓴 눈물을 흘린 것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용서와 자비를 구하고, 회개와 자책의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겠지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여기서 논점에서 잠시 일탈하여 <Dead Man Walking>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회상해볼까 합니다. 방금 던진 질문에 대한 일말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이 영화는 1996년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의 뜻은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말입니다. 번역하자면, “사형수 입장이요”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볼 만한 풍경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어두컴컴한 교도소와 허름한 빈민가, 그리고 낡은 ‘카톨릭’ 교회가 배경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사형수와 수녀 두 사람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데, 이 두 사람 ‘숀 펜’과 ‘수잔 서랜든’의 연기가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주었습니다. 남자 주인공 ‘매튜’는 어느 날 데이트 나온 십대 청소년 둘을 덮쳐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한 후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그는 경찰에 잡히고 사형 언도를 받게 되자, ‘헬렌’이라는 수녀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씁니다. 그는 수녀를 만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 순진한 수녀는 그 말을 믿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구명운동에 나섭니다. 그러나 확실한 물적 증거 때문에 수녀는 그가 살해범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튜’의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냉소적이고, 거칠고 야비해도,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외로움에 사랑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용서와 관용과 사랑을 전하며, 하나님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참 안식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사형 집행 하루 전, 그토록 잔인하고 냉정하던 ‘매튜’가 ‘헬렌’ 수녀의 어머니와 같은 한 결 같은 사랑 앞에 비로소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고백합니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의 눈에서는 참회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헬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고 확신을 준 후, “당신을 세상에서 마지막 보는 것이 웃는 얼굴이기를 바래요” 하며 그의 마음에 안정을 심어줍니다.
다음날 “데드 맨 워킹!” 하는 간수장의 목소리와 함께 ‘매튜’는 사형실로 들어옵니다. 방탄유리 건너편에서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과, 변호사, 그리고 수녀가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봅니다.
사형집행관들은 그의 팔다리를 벌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벨트로 조였습니다. 그리고 최후로 그는 죽은 아이들의 부모님께 용서를 빌며 수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의 이 한마디가 모든 이의 가슴을 적실 즈음 그의 혈관에는 마취제가 흘러 들어가고, 뒤이어 독극물이 투입되기 시작합니다. ‘매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잔인한 강간 살인범이었습니다. 순진하기만 한 수녀 ‘헬렌’을 그의 구명을 위해 이용할 만큼 그는 뉘우침 없는 용서 못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앞에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회개하며 그를 묶고 있던 죄악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 ‘베드로’가 한 일은, 아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매튜’에게 하신 것처럼 ‘베드로’에게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교회나 회중을 너무 이상적으로 본 나머지, 조금만 잘못된 모습에도 참지 못하고 더욱 다급한 권면을 자주 합니다. “부름 받은 모습대로 살아야지” 하면서 말이지요. 사실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모인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천에 옮겨야 할 교리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난 뒤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가 먼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창조하신 것이지, 우리의 헌신을 받기 위해서 조직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고 경건이 부족하며, 아무리 일할 능력이 부족한 공동체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분은 헌신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 즉 응답과 대화를 요구하십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인간의 반응을 원하십니다. 마치 늙은 부모가 요구하는 것이 자식의 용돈이 아니라 대화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물으셨습니다. 선하신 목자께서 ‘베드로’에게 자기의 어린 양을 가르치고, 조직화하고, 억지로 끌고 가거나, 무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냥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유다’가 저지른 실패의 씨앗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과 그분을 배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도무지 맹세나 약속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우리의 대답을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수없이 공허한 약속이나, 서원이나, 맹세를 남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역겨움을 느끼며, 위선자들이라고 조롱하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자신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배신이자 거부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에게 오는 모든 자에 중에서 한 사람도 내어 쫓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요 6:37).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브루스 밀른’은 Luci Shaw의 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은을 취하고
몸과 피를 먹으면서
내가 (죄 있느냐고) 물으며
그분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배신자들이기에,
우리 모두가
돌진해 나아가
목매어 죽기는 쉬우리.
하지만 만일 우리가
울며 기다릴 은혜를 발견한다면,
아침의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비탄케 하기에
충분할 만큼 분명히
우리 귀에 들린 후,
그분은 거기 계셔
우리 각자에게 다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리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