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세상의 빛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8:12약 9분 분량
미국 ‘라스베가스’의 MGM 호텔에 가면 두 개의 유명한 쇼(show)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의 쇼”이고 또 하나는 “불의 쇼”입니다. 내가 본 것은 “불의 쇼”였습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사차원의 무대가 장치하며, 무대를 압도하는 등장인물들의 박진감 넘치는 연기하며, 아주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유대’인들의 초막절도 축제의 절정을 이루는 두 장관(壯觀)이 있었는데, “물의 축제”와 “불의 축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팔일 동안의 축제 기간 동안 낮에는 “물의 축제”를, 그리고 밤에는 “불의 축제”를 이어가면서 즐기고 기념했다고 합니다. 초막절이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면서 이듬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이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두 축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물의 축제”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바위로부터 물을 내어,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었던 역사적 사건(출 17:1-6)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미래의 계속된 보호와 인도를 기대하고 기원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 하고 외쳤을 때, 무리들이 받았을 충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그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에게 혹시 ‘모세’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타나지는 않았을까요?
아닌 게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출애굽” 당시 ‘모세’가 내려주었던 광야의 ‘만나’를 떠올렸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6:31). 이래저래 “초막절”과 “오병이어”의 기적은 “출애굽”의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불의 축제”는 어떻습니까? 한 ‘유대’ 전승은 “불의 축제”와 관련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축제 첫 날의 말미에 사람들은 성전 내 “여인의 뜰”에 황금 촛대들과 그 각각의 곁에 네 개의 황금 항아리와 네 개의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제사장에 속한 젊은이들이 손에 36리터에 해당하는 기름 항아리를 들고 가서 황금 항아리에 붓는다. 사람들은 그들 손에 횃불을 들고, 춤추고 노래하며, 동시에 레위 인들은 여러 가지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이스라엘의 뜰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인의 뜰까지 나아간다. 이 축제는 밤새 새벽까지 계속되며, 또한 매일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지속된다. 실로 이들은 축제 기간 내내, 잠 한 숨 제대로 안자고 이 행사를 즐긴다. 새벽녘에 한 제사장의 느린 템포의 나팔이 서서히 울려 퍼질 때, 이 축제는 그 날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이 역시 “출애굽”의 경험을 회상시켜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참고. 출 14:19-25). 즉 이 빛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었던 바로 그 빛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상징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시편>도 ‘야훼’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빛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27:1; 44:3).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물과 빛으로 비유하고 있기도 합니다(시 19).
이 축제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외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12절).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일곱 번의 그 유명한 선언, “나는...이다”의 두 번째 선언입니다. 타오르는 횃불을 뒤로 하고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무리들이 이번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보았던 “‘야훼’의 사자”(출 3:12)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 만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다면 그들은 다시 한 번 큰 충격과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광야의 만나”, “바위에서 솟아난 물”,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역사적 유물이 아니더라는 말이지! 우리 선조들의 “출애굽”이 다만 역사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말이지!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상징이고 실존(實存)이었다는 말이지! 그토록 친숙하고 익숙하던 초막절이 갑자기 전혀 새로운 얼굴로, 아주 낯선 모습으로 지금 그들 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의미의 탄생. 그렇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조명(照明)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책의 서막에서부터 반복해서 그리스도를 빛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9).
빛이 그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과학적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하고, 관찰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빛이 없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광합성(光合成)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빛의 자외선은 우리 몸속의 콜레스테롤을 변화시켜 비타민 D를 생성합니다. 비타민 D가 결핍되면 골격이 제대로 형성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단순히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생명일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존재(存在)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즉 생명이 있음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생명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빛이 나에게 비출 때, 나라는 존재가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나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 존재의 의미가 탄생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세상이나 내 주변 환경이 기적적으로 달라지고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과 환경은 그대로 있는데, 그들을 바라보는 내 생각과 마음이 달라집니다. 새로운 내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바라보던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반드시 이렇게 묻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로마서>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멸하도록 하라(롬 12:2)
이 구절은 내가 자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 국가와 민족을 개조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라고 말합니다. 내가 매일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성인(成人)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 교회학교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성경공부의 “교훈과 적용”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회개와, 간증과, 헌신과, 결단으로 공부를 마치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끝난 후에도 영적인 분위기의 여운을 계속 이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개적인 발언의 위력입니다. 그리고 진지한 모임이라면 그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공부 시간 내내 다른 사람 이야기로 시간 끌다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치 이야기 등으로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이런 사람을 혐오합니다. 왜 그렇게 세상과 타인에 대해서 관심과 걱정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책을 읽지 않는 자식 때문에도 걱정이 많습니다. 버릇없는 자식 때문에 걱정입니다. 신앙심 없는 아이들 때문에 걱정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때문에 걱정입니다. 썩어빠진 공무원들 때문에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어라”(마 7:5).
이제는 왜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이곳에 위치해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참으로 짓궂게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그들 역시 문제의 여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어둠속에서 헤매고 있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한쪽은 자기 확신이라는 동굴 속에서, 또 다른 한쪽은 무의미와 허무의 동굴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두 동굴 속에 무엇이 들었든 빛이 없어 어둡기는 매 일반이 아니겠습니까!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것이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이나, 결국 그 어둠의 동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진단입니다. 그리하면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임재와 인도. 그 약속은 이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절). 무슨 약속인가요? 순종의 축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지난 날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말씀하시던 ‘야훼’ 하나님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 그 사건을 기리는 초막절에 직접 백성들의 눈앞에 바로 “그 빛”으로 현현(顯現)하셔서, 들려주는 아주 오래되고 변함없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부담이 됩니다. “나를 따르라”는 순종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순종”이나 “구속”은 썩 유쾌한 단어들은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입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나, 정부에서 가급적 이들 단어들을 사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잘못 말했다가는 되레 극심한 반발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내가 여러분에게 “목사인 나를 따르고 순종하라”고 하면 기꺼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과연 축복이 될까요?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권위에 순종하는 것만큼 인생에 큰 축복은 없다고 말입니다. 대학에서 제자를 가르치면서 그와 같은 경우를 수시로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안동의 <우리 집 교회>에 가서도 수시로 감사와 칭송을 듣습니다. 대호 군 때문입니다. 그가 나의 조언을 받아들여 행한 결과가 이후 어떻게 그의 삶을 변화시켰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대호 어머니를 비롯해서 주변 가족 분들이 그 친구 이야기가 나올 때면 늘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합니다만, 나는 그 때마다 오히려 대호 군 자신의 순종의 축복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래서 부모와 스승은 반 팔자라고 하는가봅니다.
그래도 이 “순종”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편지 않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무리가 순순히 그를 따를 것이라고 기대했을까요? 정 반대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떠올려 봅시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른 것이 아니라,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의 뒤를 따랐습니다(참고. 출 13:21-22; 민 9:17-23; 10:35-36).그 말은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고, 보호하고, 인도하셨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지금 이스라엘을 향해서 명령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인도하고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약속을 다음과 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녕 너를 버리지 아니 하겠고, 내가 정녕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니”(히 13:5).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분을 따를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이와 같은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이스라엘을 그렇게 섬기겠다는 헌신의 약속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그러므로 이제 가서 더 이상 죄짓지 말고 살아라”라고만 했다면 여인이 들은 메시지는 복음이 아니라 새로운 율법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너를 구원해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잘 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약속인 즉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빛 아래 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빛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