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하시되 끝까지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1약 10분 분량
‘위키 백과’에서 관상학(觀相學)을 정의한 것을 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인상(人相)을 관찰하여서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고 그 얻어진 결론을 가지고 피흉추길(避凶趨吉)의 방법을 강구하는 학문이다. 관상학은 현실에 근거를 두고 통계학적 방법에 따르는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전해지는 다른 점술(占術)과는 근본적으로 그 유례를 달리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한 사람의 인상을 보면 그가 살아온 지난 세월을 엿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관상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門外漢)조차도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인상을 통해서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격 등에 대해서 예단(豫斷)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대부분은 첫인상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관상학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면, 나는 좋은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의 삶에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내 모습은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이나 태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내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좀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관상법은 없는 것일까? 추천서(推薦書)를 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를 잘 아는 학교 시절 선생이나, 직장 상관이나, 또는 동료들로부터 그 사람의 지난 행적을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추천서는 대개 천편일률적입니다. 인터넷 상에는 아예 모범 추천서 양식이 널려있어 이들을 적절히 짜깁기 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추천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졸업하는 제자들이 취업할 때 제출하기 위해서 들고 오는 추천서의 내용은 한 결 같습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피 추천인(被推薦人告)이나, 추천인이나, 추천서를 필요로 하는 해당 기관이나 할 것 없이 추천서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의 요식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외국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추천서는 그 사람의 장래를 결정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아무도 대충 추천하는 사람도 없고, 아무에게나 추천을 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경우, 아예 정해진 추천서 양식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 사람의 창의성, 인격, 협동성, 전문성, 친교 관계 등에 대해서 몇 단계로 구분하여 해당되는 곳에 명시를 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본인도 내가 작성하는 추천서가 국내용인지 또는 국외용인지에 따라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국내용이면 대충 좋은 말만 골라 씁니다. 하지만 국외용일 경우 아주 세밀하게 엄정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결론적으로 관상학이든, 추천서든 중요한 핵심은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고, 현재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통계에 바탕을 둔 교훈일 것입니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관성의 법칙”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즉 정지해 있는 물체는 그대로 두면 항상 정지해 있는 상태로 있으려 하고, 운동하는 물체라면 계속 운동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사람도 이 법칙에서 예외가 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내 생각이나 행동 양식이 세월이 간다고 바뀌거나 나아지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도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갈수록 상황이 더 나빠진다는 데 있습니다. 자연에는 “관성의 법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름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흔히 “엔트로피 법칙”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자연은 우주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을 소멸시키고, 분해하고, 사라지게 하려는 거대한 힘이나 경향성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사물은 없습니다. 모든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람도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현상을 일러 무상(無常), 즉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필 추천서.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진정 “무상”은 절대불변의 진리일까?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기대와 예측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추천서를 써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분의 과거 행적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를 예측하고 예단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스스로를 위해서 추천서를 쓸 수는 없습니다. 자필 추천서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법이고 반칙입니다. 그러함에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필 추천서를 쓰고 있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이 추천서 안에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문구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분으로부터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던 말이 그것입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참고. 출 3:6, 15, 16; 4:5).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위해서 자필 추천서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싶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였는지 과거 행적을 통해서 살펴보라는 초청입니다. 오늘의 나에 관해서 알고 싶다면 나의 과거 행적을 통해서 판단하라는 초청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 예측을 해보라는 초청입니다. 그것도 어느 한 사람에게만 아니라, 세 사람 모두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증인을 법정에 대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세 사람의 대답이 한 결 같다면, 그 추천서는 믿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 증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은 변화무쌍(變化無雙)하지 않고, 일관되고 한 결 같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도 마땅히 ‘야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준 그분의 이름, ‘야훼’ 즉 “스스로 있는 자”(우리말 번역)란 결국 “현재의 하나님”, 다시 말하자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모세’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자필 추천서였습니다.
요한 화자의 추천서. 우리의 ‘요한’ 화자는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를 어떤 방식으로 추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필 추천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역시 과거의 한 시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즉 그는 다락방 강론을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니”(예: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now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NIV).
선뜻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가 와 닿지는 않습니다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랑하다”(아가페)는 두 동사의 시제(時制)입니다. 두 동사 모두 과거형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만, 이 번역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먼저 나오는 동사의 시제는 뒤에 나오는 동사에 비해 시간 상 더 이전의 것으로 받아들임이 마땅할 것입니다.
즉 앞의 것의 시제를 과거완료형으로, 뒤에 나오는 것을 과거형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이전부터 계속 사랑해 오셨으므로,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이해가 되셨습니까? 화자는 지금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무슨 이유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전부터 쭉 사랑해왔기 때문에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 그분의 사랑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왜 이유가 없을까? 그분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하). 사랑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저 그분의 이름에 충실한 결과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하겠다”는데 무슨 이유나 조건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과연 얼마나, 언제까지 그렇게 사랑하셨을까? “끝까지”라고 말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도 시간적인 의미에서 “세상 끝 날까지”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질적(質的)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더할 수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또는 “변함없는”,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요한’은 훗날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사랑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지셨던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없음을 압니다.
나의 자필 추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 즉 사도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하셨다면,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실까? 확신이 없다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가롯 유다’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에 대해서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의 발도 씻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싫어 떠나려고 합니다.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를 말입니다. 동료 성도와 자기 목자를 말입니다.
‘유다’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2절). ‘유다’의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갔다 해서 ‘유다’의 책임을 과소평가 하려는 시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악한 자의 손에 볼모로 사로잡혀 어쩔 수없이 배신의 자리로 내몰리게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현실에서 이럴 경우 법정에서 정상 참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자의 표현은 강경하고 단호합니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결심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유다’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귀에게 기회를 주었고, 스스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브루스 밀른’의 말대로, ‘유다’는 빛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나서 자신이 어두움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이처럼 ‘유다’의 배신에 관한 이야기가 강론의 벽두를 장식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그리스도에게 묻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질문을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자기 사람들” 즉 사도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하셨다면,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실까? ‘가롯 유다’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는 것 같습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네 마음에 달렸다네.”
그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자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자기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발을 씻겨준 사람들 중에서도 여전히 “마음의 씻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점 성찬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침례와 성만찬이 헌신한 사람에게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이 되지만, 그것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전신 목욕을 한 사람은 다시 목욕을 할 필요가 없이 그저 발을 씻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목욕을 하지 않고 단지 발을 씻는 것만으로 목욕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듯이 ‘사단’은 빛에 대해서 마음을 닫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벧전 5:8). 그러므로 계속해서 주님과 가까이 있으면서, 날마다 그분의 말씀의 빛이 우리를 드러내고 바로잡도록 할 때에만 안전할 것입니다. 양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만 안전하듯이 말입니다.
‘아브라함’ 교회를 떠난 성도 ‘롯’의 종말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목자 ‘아브라함’이 목원 ‘롯’을 끝까지 책임지려 했으나, 그는 ‘유다’처럼 이를 거부하고 떠났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말이지요.
그럼에도 목자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끝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목원 ‘롯’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 ‘아브라함’은 목원 ‘롯’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기도에 응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 목원에 대해서? 내 가족에 대해서? 내 남편에 대해서? 내 아내에 대해서? 내 자식들에 대해서?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