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풍성한 삶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0:10약 11분 분량
우리나라 국민의 40% 정도가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는 통계 자료가 최근 발표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매 년 약 15,500 명 정도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지난 번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해일 피해로 사망한 숫자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와 노후에 대해서 불안하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은 무려 80%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에 대한 비율이 이 정도라면, 기독교인들만을 상대로 조사를 한다면 어떤 수치가 나올까 궁금해집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신실하고 의롭다던 ‘욥’조차도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났다”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서 자신을 늘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누가 감히 자신을 ‘욥’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느끼는 고통이나 불행지수는 어떤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소외감 때문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이라 해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우리 한국인은 체질적으로 자신의 불행을 이웃이나, 정부나, 국가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특별히 강한 듯합니다. 언론이나 방송도 이를 부추기는 일에 한 몫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디에선가 희생양을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일까요? 며칠 전 강원도에 폭설이 내려 교통대란을 빚었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로 기상청이 일기 예보를 너무 안이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방송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즉 실제 내린 눈의 양이 60 센티미터였는데, 예보한 양은 30 센티여서 제대로 대비를 못했다는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에게 닥친 재난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흥미로운 책 하나가 나왔습니다. ‘데이비드 브룩스’라는 사람이 쓴 <소셜 애니멀>이라는 책인데, 저자는 이 책에서 학계나 정계 또는 재계에서 예외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판단하는데 서툴다. 우리는 일과 돈과 부동산이 행복에 기여하는 정도를 과대평가한다. 친밀한 유대감과 힘들게 노력하는 과정은 과소평가한다. 친밀함에 대한 갈망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퇴근 후 친구들과 한 잔 하거나 애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과 같은 사회적 활동들이다. 출․퇴근처럼 혼자 하는 활동은 행복에 해롭다... 사람들은 이성과 의식을 강조하지만 실은 감정이 이성보다 중요하고, 무의식이 의식보다 강력하며, 인간은 다른 인간과 소통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
저자는 지금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풍성한 삶”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면, 그는 이 책에서 신약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설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가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말입니다. 이 무슨 엉뚱한 주장입니까!
풍성한 교회.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교재 <우리교회의 이상과 정신>에서 이미 배운 것들입니다(교재 참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인용해 보도록 하지요.
또 내게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8-19)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핵심 사역과 관련해서 한 쌍의 동사를 만나게 됩니다: “매다”; “풀다”. 무엇을 매고 무엇을 푼다는 말입니까? 두 동사는 불가분 한 단어를 목적어로 가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관계”입니다. 즉 관계 맺기야말로 교회의 핵심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강조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도 바로 이 관계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누구든 이중 하나라도 없으면 이 나라에서 행세하며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이 관계가 끊어진 사람을 “죽은 자”로 규정했습니다. 그들 말로 “샬롬”은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이라 함은 이 관계가 제대로 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사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수직적 관계 맺기의 사역도 있습니다. 아래로는 다른 피조물 특히 자연이나 세상과의 관계 맺기가 있을 것이고, 위로는 모든 관계 중에서 으뜸 되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맺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재에서 이들 세 관계를 십자가 그림, 즉 “관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낸 바 있습니다.
십자가의 정 중앙에 교회가 있다면, 위로는 하나님, 옆으로는 교회 지체, 그리고 아래로는 세상이 있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곳도 아닌 양과 목자의 관계를 강론하시는 바로 이곳에서 “풍성한 삶”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것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10절).
나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이 구절을 묵상하며 더욱 폭넓게, 더욱 깊게 체험하며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과연 “풍성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풍성한 목장. 그것은 결국 “살롬”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주변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삶 말입니다. 이는 소위 “관계의 십자가” 정 중앙에 있는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의 삶이자, “의로운” 삶을 말합니다. “샬롬”이나, “의로움”이나, “공동체”나 한 결 같이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난 주 서울에서 고등학교 동문 신우회의 조찬 예배에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여러분들이 수 주 전에 들었던 “목자의 음성”(10:22-23)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자신을 ‘셀’ 교회의 목자라고 소개하는 한 후배로부터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교회에 대해서 고민하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10장은 우리 교회 식구라면 아주 소중하게 여겨야 할 본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상과 정신>에서도 이곳으로부터 중요한 원칙들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시작할 때 이들에 대해서 합의를 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누군가 우리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배우고 알아야 내용이 바로 이 책에 담긴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에 해당합니다. 신약교회로 치자면 “소요리 문답”에 해당된다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매 주 예배 때마다 우리 교회의 “목적”과, 세 가지 목표에 대해서 재확인하고 함께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의 목적인 “신약교회의 이상과 정신”이란 결국 “관계의 사역”에 충실하자는 것이고, 세 가지 목표란 결국 다름 아닌 세 가지 관계의 사역을 충실하게 구현해 보자는 것입니다.
“교회 목장”은 그 첫 번째 관계, 즉 성도 간의 수평적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목장을 통해서 “가정”(家庭)을 체험하자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정 말입니다. 가정에 부모와 자식이 있듯이 목장에도 영적인 애비와 자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영적인 고아(孤兒)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혼자 전봇대처럼 서 있거나, 또는 ‘람보’나 황야의 무법자처럼 휘젓고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을 체험하자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실제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체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체험은 용서와 화해일 것입니다. 가족 간에는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우리는 기억상실증이나 치매 환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색맹 환자가 되기도 합니다. 붉은 색이 흰색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참고. 사 1:18).
그러나 목장에서는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곳이 아닌 교회에서 가장 많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도 양이나 동료로부터가 아니라 목사나 목자로부터 받는 상처가 더 깊고 큽니다. 쉽게 상처받는다는 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백성보다 더 인내심이 약하고 성급한 족속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면 절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말이 운명공동체이지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평생을 서로 깊이 사귀어 온 것도 아니고,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입니다. 그러니 목장을 이루어 가정을 체험하자는 이상과 정신은 한낱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사실은 우리가 피차 아무 상관도 없다고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다 그렇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고, 영적으로는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후손입니다. 즉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피로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담’의 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마치 DNA의 이중 나사 구조처럼 그렇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니 끊으려 해야 결코 끊을 수 없는 관계, 즉 “끝까지 책임지는 관계”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가정에서 겪게 되는 또 하나의 체험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지나치게 이단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대개 이단들이 가족이나 친지의 관계보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더 중시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정통 교회일수록 <성경>의 기준을 현저히 낮추거나, 완화시켜버립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더구나 책임지는 사랑에는 칭찬과 격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듣기 싫은 소리도 해서 감정을 건드려야 하는 경우도 있기에 더욱 부담스럽습니다. 그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누군가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피상성(皮相性)을 꼽았습니다만, 이런 관계는 그야말로 피상성의 산물 즉 적당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가 나의 인격적 성숙을 위해서 조언이나 지시나 권면을 해줄 때, 기분 나쁠 때도 많이 있습니다. 화가 나고 서운하다면 다음 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이들 말씀이 두렵거나 비위에 거슬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양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자의 소유가 되었지만, 나는 내 의지에 반해서 억지로 교회에 와 앉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장을 선택합니다. 내가 선택한 목장과 목자이므로, 목자의 온당한 요구에 열심히 순종하며 따릅니다. 훈련받기를 자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일이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밉고 고운 정이 쌓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사이가 되는 것이지요. 피상성을 넘어 그야말로 서로를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강론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세 번이나 언급을 하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11, 15, 17절). 처음 두 번이 양과 목자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나머지 한 번은 목자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17절).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든지,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는 나를 안다”라는 등의 표현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선언에 포함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얼마나 동감하고 계십니까? 나의 깨달음은 이런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심전심의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마음을 드러내어 이야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면서) “저 불쌍한 영혼들을 내가 어떻게 구해줄꼬, 저들을 위해서 누구를 보낼꼬?”
성자 하나님: (이 장탄식을 금방 알아차리고) “아버지,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버지가 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아니, 네가 정말 가겠단 말이지?”
성자 하나님: “그렇습니다. 저의 순종이 저들 모두를 구하는 유일한 길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그래,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이 바로 나의 뜻이란다. 너는 그 동안 나와 둘이 아닌 하나로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이 관계를 지속시켜갈 것이지 않니? 누구든 자기 뜻을 이루기를 원하고 사랑하지 않니? 너는 나와 하나이므로 내가 너를 통해서 내 뜻을 이룸은 결국 내가 너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란다. 내가 널 사랑하므로 널 보내지 않을 수가 없구나, 가거라.”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여 기꺼이 죽으려 함은 이해가 되는데, 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 하면서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기에 이처럼 장황히 설명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신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무튼 서로를 향한 숭고한 사랑이 결국 나와 여러분을 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은 풍성한 관계 즉 풍성한 삶을 체험하도록 우리를 이 목장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을 찬양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