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네 번째 기적(3)-보리떡과 물고기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2:5약 10분 분량
6:8-9
경영. “경영”(management)이란 “타인들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J. M. Boice). 코치의 역할도 이와 유사하다 할 수 있을 것인데, 선수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시키는 자가 곧 코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훌륭한 경영인은 훌륭한 코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에서 “경영”에 관한 사례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빌립’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그의 동참을 유도하려 했던 일을 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손을 높이 들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기 위해서 각자의 호주머니 속에 떡을 창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소 귀찮고 수고스럽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다 수행하기보다는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그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신 것이겠지요. 제자들이 기적의 사역에 동참하여 즐거움과, 자부심과, 긍지와, 행복함을 맛보기를 원하신 듯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빌립’의 상상력은 빈곤했습니다. 그는 머리는 좋았으나 꿈이 없었고, 상상력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훌륭한 경영인의 자질도 없어 보입니다. 주변에 널려있는 많은 재원(財源)들을 동원하거나, 활용하는 사업가적인 수완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이점에서 ‘빌립’을 매우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한 아이. 만일 ‘빌립’이 곁에 있는 한 아이를 눈 여겨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 말입니다(9절). 하지만 이런 기대는 너무 무리인가 봅니다.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그보다 더 나았겠습니까? 그 자리에 누가 있었던 이 별 볼일 없는 아이를 주목해 보았겠습니까?
우리는 이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껏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지독히도 가난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가 점심 식사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으니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책 <미쉬나>에 따르면, 간음죄(姦淫罪)에 대한 속죄 제물로 보리떡을 바쳤다고 합니다. 왜 보리떡인가 하면 보리떡은 짐승들이 먹는 음식인데, 간음은 짐승들이나 저지르는 행위라는 모독과 경멸이 담긴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리떡에 대한 유사한 경멸은 ‘사무엘 존슨’이 편찬한 유명한 영어 사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사전에서 “보리”를 “‘잉글랜드’에서는 말에게 먹이나 ‘스코트랜드’에서는 사람들이 먹는 곡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J. M. Boice). ‘스코트랜드’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아이가 보리떡을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 메마르고 거친 보리떡을 목에 걸리지 않고 넘어가게 해 줄 물고기 두 마리를 점심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했는지를 시사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토록 가난한 어린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들이 엄청난 창조의 기적의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처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들이 기적의 수단이 되고 있는 사례를 여러 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땅의 “먼지”보다 더 하찮은 것이 또 있을까요? 그것으로부터 곡식 한 알 수확할 수 없을 정도로 시시하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먼지로부터 한 인간 즉 ‘아담’이 탄생합니다(창 2:5). “당나귀 턱뼈”를 어디다 쓰시겠습니까? 그런데 ‘삼손’은 그것으로 천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쳤습니다. 목동의 구부러진 “지팡이”는 어떻습니까? ‘모세’는 그것으로 ‘이집트’의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어냅니다. “돌팔매”는 단순히 새를 잡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으로 ‘골리앗’의 머리를 박살내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대 로마제국의 한 변방 ‘베들레헴’에 살던 한 시골뜨기 처녀에게 누가 주목이나 했겠습니까?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 그리고 세상의 구세주가 그녀로부터 탄생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땅의 흙먼지보다 못합니까? 당나귀 턱뼈보다 못한가요? 목동의 지팡이보다 못합니까? 돌팔매보다 못합니까? 한 시골뜨기 처녀보다 가진 것이 없고 재능이 없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 조차도 나에게 없습니까?
설마 이렇게 까지 나를 비하하거나, 경멸하고 싶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니 정 반대로, 누가 나를 그런 식으로 비하한다면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라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그분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둘째,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찾는 일만 하더라도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소명이 무엇인지 들려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날 그와 같은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왕 말이 났으니 주제에서 일탈하는 부담을 무릅쓰고 한 번 물어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직업이나 소명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바바라 테일러’(B. B. Taylor)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소명(또는 직업)이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지상명령(至上命令; the greatest command))이라 부릅니다. 우리 각자가 부여받은 다양한 은사(恩賜)라는 것들도 결국 지상명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은사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무슨 일이든 시작해 보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은사는 대체적으로 반복과 훈련과 인내를 통해서, 그리고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완성되어가는 그 무엇입니다.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은사는 게으른 자가 바라는 그 무엇도 아니고, 되었으면 하는 그 무엇도 아니며, 가지고 싶어 하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것은 밭에 감춰진 보배와 같다고나 할까요? 찾고, 뒤지고, 갈고, 닦아야 하는 그 무엇입니다.
‘요셉’의 꿈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 꿈은 분명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분명했음에도 그는 그 꿈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무려 20여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임명은 등극하기 위해서 13여 년을 절치부심(切齒腐心) 기다렸던 것과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어떤 세월을 거쳐 갔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냥 앉아 세월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안드레. 나는 과연 은사를 개발하기 위하여 그동안 어떤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까? 눈을 씻고 찾고, 뒤지고 했는데도 여전히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안드레’로부터 한 수 배우는 것은 어떨까요?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니 그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일하는 법입니다. 사실 ‘빌립’이나 ‘안드레’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안드레’도 ‘빌립’과 마찬가지로 수천 명에 달하는 무리들에게 줄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경영 마인드”에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경영이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투자자를 유치하고, 은행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처음부터 자기 돈 100% 투자해서 사업하는 사람 거의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생명 살리기” 사업에 ‘빌립’을 투자자로 유치하려 했던 것처럼, ‘안드레’는 주위에 있던 한 아이를 그 일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빌립’이 자기가 가진 돈이 없다고 사업에 뛰어들기를 주저했다면, ‘안드레’는 다른 투자자를 동원했습니다. 투자 금액이 미미하기 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안드레’의 개척적인 기업정신이 돋보인다 하겠습니다.
사실 그 자신도 이 사업의 성공 여부에는 크게 자신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
그렇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미미한 분량입니다. 이 대화를 듣고 있는 독자라면 하나같이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림도 없지. 행여 기적이 일어난다면 몰라도.”
바로 여기에 화자의 의도가 숨어있다 하겠습니다. 과연 이제 곧 꿈과 망상이 현실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꿈과 현실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自信)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자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해 보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자신”(自信)은 단어 뜻 그대로 “자기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가 ‘안드레’를 개척자로 부를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고(故) 정주영 회장을 탁월한 개척자로 부르게 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현대조선소 건립 당시 개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외국 은행의 투자자를 설득시킨 이야기입니다. 그는 거북선이 새겨져 있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보여주면서, 우리 선조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거북선을 건조한 기술과 경험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투자하라고 투자자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행은 정 회장의 말만 믿고 당시 천문학적 금액을 투자했으며, 투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몇 배의 기업 이윤을 남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 덕을 본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또 다른 교훈이 있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와 똑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오병 이어” 기적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입니까? 무리입니까? ‘빌립’입니까? ‘안드레’입니까? 아니면 어린 아이입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여기에 비하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투자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어떻습니까? 그날 그 자리에 모인 다른 많은 아이들과 다를 게 하나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아이입니다. 오죽 했으면 화자는 그의 이름조차 거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 근처에서 그냥 어슬렁대고 있었는지, 아니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철없이 놀고 있었는지 알 길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그날의 대 사건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나머지 평생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아이입니다. ‘안드레’가 그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이 아이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한 사람. 이 아이야말로 자기가 가진 하찮은 것을 주님에게 내놓음으로써 기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혹시 내 인생에서 이와 같이 ‘안드레’의 역할을 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하잘 것 없는 내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려 위대한 삶을 살도록 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내가 어느 누군가에게 ‘안드레’가 되어준 적은 있었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하잘 것 없이 살아가던 그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드려 탁월한 삶을 살도록 해 준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성공이며, 축복인지 간과하고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잣대로 나를 판단할 때도 많습니다. 그 잣대로 내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너무 왜소하고, 너무 시시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영 지침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분은 새 생명의 기적에 늘 동역자를 찾으십니다. 동역자가 될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고전 3:9). 그분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위대하거나 탁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빌립’처럼 수학이나 계산에 능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자 ‘나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한 노예 소녀를 동참시키셨으며, 선지자 ‘엘리사’를 구하기 위해서 한 과부를 보내셨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과 불평하며 기진맥진 해 있던 선지자 ‘엘리야’를 소생시키기 위하여 까마귀를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위대하고 탁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 자신이 이미 위대하고 탁월하기 때문에 더 이상 탁월한 인물이나 조력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안드레’가 되든지, 또는 어린 아이가 되든지 하면 될 것입니다. 헌신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