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빌라도의 법정(1):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8:28-32약 6분 분량
공회를 고발함
(요 18:28-32)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이란, 어떤 사건에 대해 일단 판결이 확정되면 다시 재판을 청구할 수 없다는 형사상 원칙을 말합니다. ‘유대’ 공회가 이를 몰랐을까요? 예수님에게 대해서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에요. ‘유대’의 법 정신은 역사상 다른 어떤 법보다 더 인권적 원칙에 충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름 아닌 ‘모세’의 율법에 기초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점에 대해서 본인은 수 주 전 설교를 통해서 ‘유대’의 법 정신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소개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죄목으로 두 번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한 번은 공회 즉 유대 법정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빌라도’ 법정 즉 로마 법정입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는 어쩐 일인지 ‘가야바’가 주재하는 ‘유대’ 공회의 재판 과정은 일절 생략한 채(참고. 18:28상), ‘빌라도’의 재판만을 길고 상세하고 다루고 있습니다(참고. 18:28하-19:16). 예수님에 대한 신문으로 말하자면 화자의 네 번째 서술인 셈입니다. 아마 그는 바로 이 부분을 통해서 예수님의 재판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려는 듯이 보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화자 자신의 서술이나 주요 등장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범상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대’ 공회는 왜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다시 세우려 했던 것일까? 공회는 예수님에 대해서 신성모독(神聖冒瀆)의 선고를 이미 내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다시 그분을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온 것일까? ‘빌라도’ 자신도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절).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예수님의 무죄(無罪)가 강력하게 암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재판은 재판관이 피의자에게 기소(起訴) 내용을 재확인함으로써 시작됩니다만, 지금 ‘빌라도’는 피의자가 아니라 고발자들을 향해서 기소 내용을 확인하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당황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냥 통과 의례를 거치기 위해서 피의자를 데리고 온 것뿐인데, 눈치를 보아 하니 ‘빌라도’가 재판을 처음부터 정식으로 시작하려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궁색한 변명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렴 아무 죄도 없는 자를 데리고 왔겠습니까? 그는 흉악한 범죄자입니다”(30절). 이에 ‘빌라도’는 더욱 시큰둥해지며, 다소 짜증스럽다는 듯이 내뱉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 법대로 하면 될 거 아닌가”(31절). ‘유대’ 법정에서 선고한 결론에 따라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들의 양심이 찔리는 순간입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 정책을 반영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로마는 피 점령국가에 대하여 상당한 정도의 자율권과 자치권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형(死刑) 집행에 대해서만큼은 예외 규정을 두었다고 합니다. 즉 사형 집행 권한은 로마에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사십 년 전부터 이스라엘의 사형집행 권한은 로마에 귀속되어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대’ 법에 따라 처리하라는 ‘빌라도’의 말에 자신들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다고 항의하는 이 사람들의 말은 일면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항의는 정당하기도 하고, 또 틀리기도 합니다. ‘스데반’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들에게 사람 죽일 권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즉 누군가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지었을 경우 돌로 쳐 죽일 수는 있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율법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 24:16).
그러니까 신성모독을 범하는 자는 죽일 수 있으며, 그 경우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 첫 번째 목격자가 가장 먼저 돌을 던지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신 17:7).
공회가 ‘빌라도’ 앞에서는 예수님을 단순한 행악자로 기소하고 있습니다만(30절), 그들의 공식 판단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참고. 마 26:63-65; 막 14:62-64; 눅 23:66-71). 따라서 공회 법정은 그를 죽일 권한이 있었고,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비록 증인들마다 증거가 달라 공회의 결정 자체가 아예 인정받기도 어렵겠습니다만. 그런데 공회는 왜 스스로의 결정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인 즉은 순전히 종교적인 것입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손에 피를 묻혀 스스로를 불결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28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증오심이 종교로 포장된 것에 불과합니다. 본인도 개인적인 원한이나 적개심을 종교의 이름을 빌어 거룩한 분노로 포장하는데 일가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고해 보면 본인의 바로 이와 같은 위장과 위선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공회가 보이고 있는 행태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정말 싫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그를 정말 죽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목사나 신부가 교인들의 입바른 소리를 즐겨 들으려 하겠습니까?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차라리 그런 성도는 다른 교회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슨 특별한 적개심이나 증오심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공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자신들의 목적에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빌라도’의 법정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처소이기 때문에 불결하여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참고. 민 9:6-12).
사람을 죽이는 일에 그토록 헌신해있으면서, 자신의 불결함이나 사악함에 대하여는 아무런 가책이나 거리낌도 없으면서, 이방인의 처소에 들어가 자신을 불결하게 함으로써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실로 해악과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행하는 데에는 더 심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한’ 화자의 신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절). 즉 예수께서 ‘유대’법에 따라 신성모독 죄로 돌에 맞아 죽을 것이 아니라, ‘로마’ 법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인데,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이미 예수님 스스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인지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12:32). 적어도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로마’ 법에 따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할 것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이 예수님의 체포에 아무런 역할을 한 것이 없고, ‘베드로’의 결심이나, 헌신도 그분이 체포 당하지 않게 하는데 아무런 기여를 한 것이 없듯이, 공회 역시 예수님의 죽음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스스로 그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를 더 쌓은 것밖에는 말입니다.
즉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쓸데 없이 한 것이었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