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요한복음 (2)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18약 171분 분량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구조는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크게 네 개의 단원으로 나눌 수 있다고 서론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공생애 이야기>와 <수난 및 부활 이야기>는 다시 여러 개의 작은 단락을 포함하고 있는데, <공생애 이야기>는 소위 “기적설화”와 관련된 담론 및 대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수난 및 부활 이야기>의 주 내용은 흔히 “수난설화” 및 “부활설화”로 불리는 것들입니다. 이들을 다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단락 구분은 ‘비슬리-머레이’(참고문헌 1)를 참고하였습니다.
1. 서막(1:1-18): 로고스 송
2. 공생애(1:19-12:50)
1) 예수-그의 증인들(1:19-51)
2) 예수-새 질서의 계시(2:1-4:42)
(1) 표적 1: 물과 포도주(2:1-12)
(2) 표적 2: 성전 숙정(2:13-22)
(3) 담론 1: 니고데모(2:23-3:36)
(4) 담론 2: 사마리아 여인(4:1-42)
3) 예수-생명과 심판의 중보자(4:43-5:47)
4) 예수-생명의 떡(6:1-71)
5) 예수-생명의 물/세상의 빛(7:1-8:59)
(1) 생명의 물(7:1-52)
(2) 세상의 빛(8:12-59)
(3) 간음 중에 잡힌 여인(7:53-8:11)
6) 예수-빛과 목자(9:1-10:42)
(1) 빛의 계시와 심판(9:1-41)
(2) 양의 목자/하나님의 아들(10:1-42)
7) 예수-부활과 생명(11:1-54)
8) 예수-이스라엘의 왕/죽음의 정복자(11:55-12:50)
3. 수난과 부활(13:1-20:31)
1) 다락방 강론(13:1-17:26)
(1) 섬김과 배신(13:1-30)
(2) 이별과 재회(13:31-14:31)
(3) 참 포도나무/교회의 환란/환란과 기쁨(15:1-16:33)
(4) 거룩을 위한 기도(17:1-26)
2) 죽음과 부활(18:1-20:31)
(1) 수난설화(18:1-19:42)
(2) 부활(20:1-31)
4. 결말(21:1-25): 선교, 교회, 사도
본 교재 <요한복음(2)>는 공생애의 네 번째 단락, <생명의 떡>에서부터 시작합니다.
9
생명의 떡
(6:1-71)
34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 게로 가오리이까(34, 56, 68절)

<요한복음> 제 6장은 두 개의 기적을 연속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 오병이어(五甁二漁)의 기적; (2)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그리고 둘 중에서 첫 번째 기적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긴 강론을 통해서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새로운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새로운 기적 이야기가 등장할 때마다 그리스도에 관한 새로운 선언이 함께 등장하고 있으며, 새로운 선언은 항상 복음서의 서막(1:1-18)을 회고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론”에 관한 중요한 주제를 발견하도록 요청하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일차적으로는 화자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자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우주적이고도 보편적인 신약 교회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강론은 당시나 지금이나 아주 다양한 반응과 반향을 불러일으킵니다: 무관심; 거부와 배척; 수용과 순종; 등등. 본문의 독서 포인트 중의 하나도 어떤 무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서 오늘을 위한 부차적인 교훈, 즉 “제자도”에 관한 주제를 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양식과 구조. 6장은 그 내용에 있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설화임에 분명합니다만, 그 안에 여러 가지의 형식들이 혼재하여 함께 등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야기; 대화; 담론(설교). 따라서 본문의 구조적인 원리도 이들 양식의 차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기적 이야기 1 (1-15절): 오천 명을 먹이심
(2) 기적 이야기 2 (16-21절): 물 위를 걸으심
(3) 대화 1 (22-26절): 무리들이 예수를 찾음
(4) 대화 2 (27-31절): 예수님과 무리들
(5) 담론 (32-59절): 생명의 떡
(6) 대화 3 (60-65절): 예수님과 제자들
(7) 대화 4 (66-71): 예수님과 열두 제자
처음 두 단락에서 연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두 개의 <기적 이야기>는 모두 자연(自然)을 상대로 한 것입니다. 이들 두 기적을 ‘모리스’의 방식대로 구분해 본다면, 둘 다 “등급 A 기적” 또는 “창조의 기적”에 속하는 것으로서, 각각 에너지 보존의 법칙(열역학 제 1법칙)과 ‘뉴턴’의 “힘의 법칙”(중력의 법칙)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두 기적 이야기는 그 형식이나 길이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병이어”(五甁二魚)의 기적은 이야기의 배경 설명에서부터 기적의 의미에 대한 예수님의 긴 강론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이 길고 상세합니다. 반면 두 번째 기적 즉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이야기는 아주 짧을 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들만 간여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은, 호수 위에서 사도들이 곤경을 겪자(16-17절),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고(19-21절), 곧바로 배가 맞은 편 땅에 도달한다는(21절)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도 화자의 해설이나 예수님의 강론이 전무하다는 점도 첫 번째 기적과는 차이가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두 번째 기적에 대한 <요한복음>의 기록은 동일한 기적을 다루고 있는 <공관복음>과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은 <요한복음>과는 달리 이야기의 배경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막 6:45-52; 마 14:22-33). 예컨대, 예수님께서 열광하는 군중들을 피하여 제자들을 따로 불러내어 먼저 ‘갈릴리’ 호수 반대편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수 한 가운데서 당황하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보고 예수님께서 책망과 함께,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제자들의 고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기적 이야기에 이어 두 번의 대화가 새로운 단락(제 3, 4 단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본문의 핵심 주제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긴 강론(講論)을 담고 있는 다섯 번째 단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담론은 주제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다양한 수사적 기법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비유와 이미지; 도치와 반어법; 오해와 생략; 등. 이들 기법들을 스스로 찾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담론은 다양한 수사적 기법만큼이나 내용에 따른 구조 분석 또한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된 바 있습니다. 구조 분석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는 담론의 일관성입니다. 우선 강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즉 한 장소가 아니라 두 개의 지명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호수가의 한 장소”(25절); ‘가버나움’ 회당(59절). 과연 예수님께서 다른 두 장소에서 설교를 하셨는가 아니면 한 곳인가? 의문은 또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청중은 과연 누구였을까? 기적을 집적 목격한 자들이었을까(25-26절), 수군거리는 ‘유대’인들이었을까(41, 52절)?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을까(61, 66절)? 혹은 열두 사도들이었을까(67-71절)? 실로 다양한 청중들이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기에, 이 또한 이야기의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컨대, 25-27절 사이에 등장하고 있는 청중들과 30-31절의 청중들은 다른 청중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이와 같은 문학적 비일관성은 본문에 대한 편집비평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즉 본문은 이전의 여러 다양한 자료들의 복합적인 편집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담론을 오병이어의 기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담론(談論)의 양식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곳에서 유대인 특유의 “주해적 해석”(midrashic interpretation)의 사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오병이어의 기적을 두 번째 출애굽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 사례입니다(31-40절). 더 나아가서 “성만찬 전승”의 영향도 받고 있는 듯합니다(51-58절).
이와 같은 문학적 상수(常數)의 불일치는 모두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의 결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전체적으로 일관성과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요한’ 화자 자신의 단독적인 작업의 결과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와 편집. 본문 이야기의 배경(더 정확하게는 설화세계의 배경)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1절); “그 산”(3, 15절); “그러나 호수에 가까운 그 산”(16절); ‘가버나움’(24, 59절). 이들 장소는 <마가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한적한 외딴 곳”(막 6:31, 32, 36)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처럼 두 복음서가 동일한 기적에 대해서 각기 다른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은 두 화자의 신학적 차이나 의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요한’ 화자는 기적의 시점을 유월절 전후로 밝히고 있는가 하면(4절), 하나님의 어린 양의 희생적 죽음과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51-59절). 이로 미루어, ‘요한’ 화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출애굽으로 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양에 관한 언급은 <서막>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고(1:29, 36),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기사(記事)도 이와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19:36). 기적의 의미를 설명하는 담론 중에 예수님을 ‘모세’와 연관시키고 있다든지, 떡을 예수님의 피와 살로 대치시키고 있는 점도 두 번째 출애굽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자료나 편집과 관련해서 볼 때, <요한복음>의 서술 방식은 <공관복음>의 기록과 흥미로운 접촉점을 많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두 기적 이야기의 순서는 <마가복음>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외에도 “칠병이어”(七甁二魚)의 기적이 등장하고 있는데(막 8:1-8),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말함(막 8:1-8).
이 경우에도 기적 이야기에 이어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 인들과의 “대화”가 뒤를 잇고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누룩과 빵에 관한 것으로서(막 8:14-21), 이는 <요한복음>에서 기적의 의미에 대한 강론과 짝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복음서에 공히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베드로’의 신앙고백 내지는 그와 유사한 고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참고. 막 8:27-30; 요 6:66-71).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간의 이와 같은 유사성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보다 최근에는 <공관복음>과 병행하는 어떤 다른 전승에 더 많이 의존해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기도 합니다.
신학과 신앙
1. 기적 1(1-15절): 오병이어
이 기적은 네 복음서에서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서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며, 모르긴 해도 예수님의 명성이 전 ‘유대’ 땅에 알려지게 된 사건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인기나 명성은 그에 대한 증오심이나 혐오감과 함께 더 높아 갔을 것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반응을 본문을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배경. 처음 네 절은 기적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1-4절)
그런데 이야기의 중차대함에 비해 배경 설명은 상대적으로 짧고 간략합니다. 예컨대, 본문이 앞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적어도 직선적인 연대기로만 따져보면, 4절에서 유월절을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시기는 성전을 청소하신 일로부터(2:13 이하) 일 년이 지났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가 ‘갈릴리’ 지역이라는 사실만 밝히고 있으며, 이 지역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는 아닙니다. 사실 갈릴리는 예수님의 주 사역 무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월절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예수님은 아마도 개인적인 휴식을 위하여 이곳에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막 6:31).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십니다. 이 지역은 오늘날 ‘골란’ 고원(Golan Heights)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서, 예수님께서 오르신 “산”(3절)은 정관사와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the hillside), 그들이 자주 방문하던 곳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브루스 밀런’). 제자들 역시 휴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들 역시 예수님 일행을 놓치지 않고 따라옵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갈릴리’ 사람들은 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었으며, 최소한의 임금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남쪽 ‘예루살렘’에서 만난 다소 고상하고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청중들과는 대조를 이루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는 모두 한 가지,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무리들이 따라오자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앉으십니다. 그리고 화자는 그 때가 유월절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 유월절입니까? 화자는 지금 기적을 유월절에 연계시키려는 듯이 보입니다. 유월절하면 “어린 양”을 빠뜨릴 수 없고(1:29, 36), 이날에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을 예상하게 됩니다(19:36). 이어지는 담론(6:32-59)에서도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에게서 ‘모세’로, 떡에서 살과 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즉 4절은 사건의 해석을 위한 사전 예고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두 번째 출애굽으로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신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동기. 예수님은 자신의 휴가를 침범하는 이들을 받아들여 돌보려하는 의지를 분명히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중략)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절)
초청.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제자들을 시험할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왜 하필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그는 아마 근처의 ‘벳세다’ 출신으로서 문제의 심각성을 예수님에게 전달하는 제자들의 대변자였던 것 같습니다. ‘브루스 밀른’, 134쪽.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6절)
예수님은 지금 ‘빌립’을 창조의 사역에 초청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빌립’은 계산으로써 초청에 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덟 달분의 임금”이 있어도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려면 떡 한 조각밖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
‘빌립’의 합리적이지만 현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비관적인 계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침착하십니다.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6절). 사람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자비심의 발로입니다. ‘마가’는 이 점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막 8:2-3)
그분은 궁핍한 세상을 동정어린 마음으로 살피시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계획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 시대와 우리가 사는 세대에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이미 아시며’, 우리 개인의 현재와 미래라는 얽히고설킨 나의 개인사(個人史)에 대해서도 똑같이 어떻게 하실지 알고 계십니다. 사실 내가 무어라고 기도하기 전에 이미 그는 나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안드레’는 ‘빌립’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를 데리고 오기 때문입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
옆에서 본 자만이 기술할 수 있는 아주 사실적이며 섬세한 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이 아이의 한 끼분 식사에도 겨우 미칠까 말까 할 정도로 미미한 양입니다. 이만한 양으로 그 큰 무리를 다 먹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슨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말입니다. 이것이 독자들이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갖게 되는 심정일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안드레’에게 말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곧 꿈속에서나 바랄 수 있던 그 꿈이 현실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그 소년의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빌립의 행동과 이 소년의 음식은 기적의 수훈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빌립’과 ‘안드레’의 행동을 통해서 많은 창의력 넘치는 추측을 할 수도 있겠으나 너무 독단적인 교훈이나 결론을 쌓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취. 감사를 드린 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분은 ‘나눠주고...원대로 주셨습니다’(6:11). 온 무리가 다 먹었으며 그것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11절에 나오는 “축사하시다”라는 말이 원어로는 ‘유카리스테인’(eucharistein)인데 여기에서 흔히 성찬식을 가리키는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너누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 먹고도 남아서 아직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 있을 정도입니다(6:13). 다르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은 후에도 처음보다 더 많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그랬습니다. 일곱 항아리에 넘치도록 가득 찬 양질의 포도주를 그날 참석한 사람들은 취하고 또 취하도록 먹고 마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백성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가 가지고 계시는 자원은 무한합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낭비해도 되는 그런 자원은 아닙니다. 무엇이든 귀하게 여기지 못할 때 우리는 낭비하게 됩니다. 그분은 경계를 내리십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6:12). 이렇게 모은 남은 음식을 어떻게 했을까요? 다음날에도 두고 먹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웃들과 나누었을까? 그래서 기적의 수혜자가 오천이 아니라 오만까지 늘어났을까?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소비와 나눔에 관한 도전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식량 기근은 생산의 부족이 아니라 소비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과. 기적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의 반응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절)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하는 동안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백성을 초자연적으로 먹이신 사건을 기념하며 제정한 것입니다. 그 배경은 또 광야 지역 곧 ‘모세’가 앞으로 올 ‘그 선지자’에 대해서 말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이 백성들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신명기>의 그 예언(신 18:15-19)이 성취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 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선지자 즉 “두 번째 모세”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민족 해방을 기념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열광한 백성들이 그들의 영웅을 만들려고 환호하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어떤 사본은 “뒤로 도망갔다”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환호하는 백성들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대중들의 “오해”와 예수님의 “숨기심”이라는 기법을 통해서 오히려 드러내고 싶은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정말 그가 종말의 날에 오기로 되어있는 그 선지자라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기적 2(16-21절): 물위를 걸으심

다섯 번째 기적은 네 번째에 비하면 내용도 짧고 간결합니다. 그리고 두 기적이 문학적으로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간적으로도 과연 연속성을 가지는 것인지에 관해서 조차도 확신할 길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두 번째 기적의 배경 즉 상황 설명 때문이기도 합니다(16절). 즉 왜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향하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16절이 15절과 시간적으로 연속적이라고 가정한다면, 가능한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15절에서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상황은 위험한 상황입니다. 떡의 기적을 보고 대중들이 그를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 역시 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은 혼자 산으로 피신하고 제자들로 하여금 다른 곳으로 피하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이런 것이 아니고, 오병이어의 기적과의 연관성 가운데서 찾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떡의 기적에 대한 긴 강론을 소개하기 전에 이 기적을 연이서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 이번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마 14:22-36; 막 6:45-52). 자연과 자연법칙을 통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주님을 보여주고자 함인지 모르겠습니다.
<욥기>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그분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는”(욥 9:8) 분이십니다. 바로 그러한 분이 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릴리’ 호수는 여느 때처럼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고, 하필 그러한 때에 제자들끼리 배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밤이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고(17절) 하면서 절망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때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의 물체가 파도 위를 걸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입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19절)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는 일부 주석가들은 여기에서 빠져 나갈 구멍을 발견합니다. 그분이 “바다 위”가 아닌 “바다 곁”에서 걷고 있었다고 번역함으로써, 기적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립니다. 19절은 “바다 곁으로”(ejpi)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 배가 물가에서 멀리 떨어진 적은 결코 없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해안선을 따라 걸어가면서 모습을 나타내셨을 뿐이라고 설명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제자들이 왜 그를 보고 두려워했는지 도무지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면, 이 사건이 떡의 기적에 연이어 이곳에 등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에서도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것이 분명 하나의 기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숙련된 선원들이었던 제자들이 그냥 바닷가를 따라 걷는 것과 물위를 걷는 것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워했다”고 화자는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어두움과 폭풍이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과연 그분은 인사말을 건네시면서 제자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십니다.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20절)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정도가 아니라, 보다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ego eimi)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엄청난 자기 선언입니다. 참고, 6:35; 8:24, 58; 10:14; 15:1; 18:5.
이 선언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들었던 바로 그 선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와 같은 의미입니다.
유월절이라는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이 선언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과 함께 곧바로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었고, 초자연적인 만나의 공급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체험들은 홍해를 거친 후,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그 바다를 가르심으로써 자신의 권능과 능력을 보이신 것을 경험한 후에 하게 된 것입니다(출 12-14장). 지금 예수님께서 파도와 바다를 다스리시면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그 옛날 홍해를 걸으시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현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한 사건 역시 하나의 기적임에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들어 오시자마자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21절)
3. 예수님 찾기(22-26절)
그런데 이어지는 단락의 연결이 그렇게 매끄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정확하게 밝히는 일도 그렇게 만만치는 보입니다. 우선 첫 세 절의 의미가 그렇습니다.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22-25절)
혹자는 원래의 전승에서는 22절이 25절로 바로 연결되어야 하며, 그 중간에 있는 23-24절은 일종의 편집적 삽입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냥 단순하게 23절을 괄호로 처리해 버리면, 단락의 의미는 무리 없이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단락은 앞선 기적 이야기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로 기능하고 있다고 볼 수 것입니다. 예컨대, 무리들이 호수 건너편 제자들이 당도한 곳에서 발견한 것은 오직 배 한 척 뿐이었으며,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 무리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했던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를 찾아 나선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
즉 이들이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또 더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표적 즉 기적의 의미를 몰랐으니,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해서 다만 의아해 했을 뿐입니다.
4. 예수님과 무리들(27-31절)
두 번째 대화의 지배적인 주제는 “일”과 “떡”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화는 당시 ‘갈릴리’ 농부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사실, 즉 떡을 위해서 일한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떡”은 단순한 떡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떡”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27절)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떡”과 “일”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떡은 “인자” 만이 줄 수 있는 떡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 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청중은 ‘유대’인들입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영의 양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리고 영생은 율법을 충실하게 지킨 대가로 받는 보상으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묻는 것입니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분명 도전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절)
그러나 무리는 자신들을 향한 도전, 즉 “인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은 제쳐두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즉 지금 이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전 날 엄청난 표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30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0-31절)
지금 무리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표적의 근거로 <성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참고. 출 16:15; 느 9:15; 시 78:24), 그들의 질문은 ‘메시아’에 대한 당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모세’에 이은 “두 번째 구원자”로서 그가 와서 그 옛날 ‘모세’가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하늘의 “만나”를 공급해 줄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가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도 예수가 만일 그 자라면 하늘로부터 그 만나를 공급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그 만나를 맛보지 않았던가? 이미 기적을 체험하고 기적의 떡을 먹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것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독자들이 무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들 무리에 대해서 진단하신 바 있습니다. 즉 이들이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들의 배를 채웠을 뿐이라고 말입니다(참고. 26절).
5. 생명의 떡(32-59절)
이 단락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강론을 담은 곳입니다.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 단락은 기적 사건과 곧바로 연결되어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기적과 그에 대한 강론이 왜 이처럼 떨어져 있는지 궁금합니다만, 그 배경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 당국의 적개심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 치안을 책임 맡은 당국자들을 부추겨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긴 강론은 그 내용에 있어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들이 뒤섞여있어 하나의 일관되고 통일되는 주제를 이끌어 내기가 다소 어려운 면이 없지는 않지만, 핵심적인 주제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생명의 떡”입니다.
강론은 전체적으로 다섯 개의 작은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단락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생명의 떡(32-35절)
2) 믿음을 요구함(36-40절)
3) 재 초청(41-47절)
4)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예수 그리스도(48-51절)
5) 예수의 살과 피(52-59절)
1) 생명의 떡(32-35).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은 먼저 ‘유대’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해서 교정해 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절)
교정의 내용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잘못 알아왔던 “성경 해석”에 관한 오류를 바로잡아주는 것입니다: (1) 광야에서 그들 선조가 먹었던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은 참된 떡으로서, 지금 주시는 것이다; (3) 그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에 생명을 주는 떡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강론은 또 다른 “오해”를 낳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에 관한 오해가 그것으로서, ‘유대’인들은 여전히 ‘사마리아’ 여인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오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4:15).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
‘유대’인들은 그 떡을 지금 당장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그러한 떡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줍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비로소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의미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이와 같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 즉 “나는...이라”(ejgw eijmi; I am)는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일곱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곳이 처음입니다.
그분이 말하는 생명은 그에게 오는 자, 즉 그를 믿는 자마다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사용하고 계시는 “주림”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누리게 될 종말의 구원에 대한 은유로서, <구약>의 여러 책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습니다(예. 사 55:1; 잠 6:5). 참고로 ‘유대’인의 지혜문헌 속에 다음과 같은 시적 은유는 35절의 말씀을 역설적으로 강조해 놓은 것으로 아주 흥미롭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는 더 주릴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마시는 자는 더욱 목마를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나”는 “지혜”를 일컫는 것으로서, 이는 곧바로 “율법”과 연결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곧 생명의 떡입니다. 혹자는 ‘만나’를 그 떡, 즉 율법과 동일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처럼 유대적인 배경에서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믿음을 요구함(36-40). 이어지는 예수님의 강론은 질책에 가까운 것입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지요.
36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6-37절)
무리는 기적을 보았으나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보리떡과 물고기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일견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믿기를 거부하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인간의 의지적 선택에 달린 것만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가 있는데,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속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는 예수님께서 절대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참고. 10:9-11, 26-30).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38-40)
우리는 이 단락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읽을 수 있습니다. 거듭 반복되는 선언입니다만, 그분께서 오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맡기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날, 즉 부활과 함께 누리게 될 생명과 지금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성, 즉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으며, 앞으로 올 것이라”는 점을 공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재 초청(41-47).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강의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하겠습니다. 무리의 반응은 무관심을 넘어 “수군거림”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41절)
“수군거리다”(gogguvzw, 공귀조)는 “불평하다”는 뜻으로서,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던 모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였으며(출 15:24),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했고(출 16:2; 17:3), 사막 생활이 어렵다고 불평하였으며(민 11:1),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하였으며(민 14:1-3), 심지어는 ‘만나’만 내려준다고 불평하기까지 했습니다(민 11:4-6). <시편>은 이들의 이와 같은 행태는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로 규정한 바 있는데,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유대’인의 불평도 결국 예수님을 거부하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 무리가 지금 거부하고 있는 것은 ‘만나’ 즉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 화자는 수군거리고 있는 ‘유대’인 무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언급함으로써, 동료 ‘유대’인들의 무지와 무능을 폭로함과 동시에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들이 믿음을 갖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초청에 대한 반응, 즉 헌신이나 결단은 듣는 자의 몫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의 강론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강조입니다.
4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43-46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는 이미 앞선 두 번째 강론에서도 본 바 있으며(참고. 37절), 그런 점에서 이들 두 단락은 내용 상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인간적 결단이나 헌신의 결과가 아니라, 들음의 결과이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참고. 롬 10:17),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며(29절), 그분의 선물인 것입니다(엡 2:8).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초청은 초청이라기보다는 선포이자 명령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지만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은 이와 같은 초청조차도 들리지 않으며, 들어도 반응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하늘로부터 온 만나(48-51). 이 단락에서 주제는 다시 첫 번째 단락(32-35절)의 그것, 즉 “생명의 떡”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48-51절)
만일 “생명의 떡”에 관한 강론이 첫 단락에서 시작하여 네 번째 단락까지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네 번째 단락이 기능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처음과 네 번째 단락은 동일한 주제에 대하여 일종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네 번째 단락은 첫 단락의 내용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새로운 내용을 지속적으로 더함으로써 추가로 강조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특히 화자는 “생명의 떡”에 관해서 시적 종합반복의 기법을 도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 “하늘에서 내려온 떡”;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두 단락은 수미상관의 기능 외에도 대조 반복의 기능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화자는 지금 두 가지 종류의 ‘만나’를 대조시키고 있는바,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 먹었던 “광야의 만나”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입니다. 두 “만나”가 주는 극적인 대조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광야의 만나”는 먹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떡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만나”는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게 하는 떡이라는 점입니다(51절).
대조는 단순히 대조에 그치지 않습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선택하라는 초청이자 경고입니다. “광야의 만나”를 먹는 것으로 만족하여 선조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는 이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먹어야 할 당위성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생명의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한 생명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둘째, 그 떡은 성육신 한 자의 육체(살)이며, 세상을 위해 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그 “떡”을 단순히 “신체”라고 하지 않고 “육신”(savrx, 사르크스)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서막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1:14)는 선언과 조화를 이루려 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주다”, “육신”, “위하여” 등의 표현을 통해서 강하게 드러나는 의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그분의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참고. 11:50-52; 17:19). 그리고 이 강조를 통해서 암시되고 있는 바가 다음 단락(52-59)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살과 피(52-59). <출애굽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당하는 고초(苦楚)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의 종 ‘모세’에게 불평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민 20:3).
그들의 후손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주는 내 살”이라고 하신 언급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
이들 ‘유대’인의 모습을 일상적인 용어로 풀이하자면, “유대인들은 지금 대단히 화가 나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52절에서 드러나는 화자의 의도인 즉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통해서 그들의 무지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도 아닌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들의 분노어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더욱 어렵고 헷갈리는 말씀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절)
이 말씀은 51절의 사상을 부정적인 표현으로 반복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실은 “떡과 생수”(35절)에 관한 종전의 강론을 “피와 살”이라는 주제로 더욱 심화 및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그리고 35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두 동사 “오다”와 “믿다”가 53절에서는 “먹다”와 “마시다”로 대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이미지는 “생명의 떡”에서 “피와 살”로, 그리고 “믿음”에서 “먹고 마심”으로 점차 그 강도를 더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피와 살”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은 단순히 “성만찬”(the Sacrament; the Lord's Supper)에 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이점에 관해서는 “적용과 교훈”에서 별도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이 “성만찬”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성만찬”이 일부 기독교 진영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바처럼, “영생”의 통로로 이해되는 것은 경계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이점에 대해서도 별도 다루도록 할 것입니다).
“피와 살”에 관한 부정적인 진술은 긍정적인 진술로 바뀌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구절(53-54절)은 일종의 시적 대조 반복을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4절)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먹다”(trwvgw, 트로고)는 때로 짐승이 음식을 깨물어 씹어 먹는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 행위가 형이상학적인 상징이나 암시가 아니라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가현설”(假現設, Docetism)을 신봉하던 일단의 이단(異端) 종교인들을 향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했던 의도로 보이기도 합니다. “가현설”이라 함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참되다”(ajlhqhv", 알레데스)는 표현 역시 이에 상응하는 단어로서, “진실되다”는 의미와 함께 “실재(實在)하다”는 의미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두 구절은 “피와 살”을 먹은 결과에 관한 진술입니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6-57절)
그 결과란 상호 “내재”(內在) 즉 서로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관계를 ‘코이노니아’로 지칭하고 있는데(참고. 갈 2:19-20), 믿음에 기초한 인격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와 그리스도 간의 상호 내재는 성자와 성부 간의 그것에 비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하고 관계 맺고 있듯이 신자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고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강의는 58절에서 결론을 맺고 있는데, 주제는 처음 시작하였던 31절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8절)
6. 계시의 결과-빛과 심판(60-71)
예수님의 강의는 두 가지의 반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계시는 속성 상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리는 <창조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했습니다. 계시의 결과 빛에 속하게 된 자는 “헌신의 고백”으로 나아오는가 하면, 어두움에 남겨진 자는 “수군거림”으로 진리를 회피하고 거부합니다.
도피. “수군거림”으로 진리를 회피하고 거부하는 자들 속에는 ‘유대’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절)
“어렵다”는 말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지적인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듣고 따르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60-61절과 41-42절의 두 본문을 비교해 보는 일도 유익할 것입니다.
이들 수군거리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더욱 어려운 선문답과도 같습니다.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1-62절)
인자의 성육신에 걸려 넘어지는 자는 결국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영원한 분리 즉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통첩과도 같습니다.
빛의 계시가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인의 영적 무지의 소치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유기(遺棄)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세 구절이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3-65절)
육에 속한 자는 육의 요구를 충실하게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열광하던 무리들이나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제자들은 거듭되는 예수님의 최후통첩 성의 설명 또한 제대로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
고백. 대부분의 제자들이 떠나간 버린 후, 예수님의 눈길은 열두 제자에게 머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7절)
예수님의 질문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설마 너희들도 가고 싶어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지?” 부정문으로 드러나고 있는 예수님의 이와 같은 질문은 거의 비탄과 절망에 가까운 그분의 기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어 ‘베드로’의 그 유명한 고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그가 열두 사도를 대표해서 주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볼 때, ‘베드로’의 고백은 다른 <복음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사한 다른 고백에 비해서 훨씬 더 극적으로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절)
‘베드로’의 고백은 적어도 세 가지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 외는 찾아갈 만 한 사람이 어디에도 없다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보았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예수에 버금가는 그 어떤 사람도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참고. 사 46:9; 행 4:12). 둘째, 영생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을 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분과의 만남을 계속할수록 확대되고 증가되었다는 데에 대한 확신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을 믿어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를 “거룩한 자”로 지칭하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원래 “거룩”은 하나님에만 국한해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존재의 본질에 있어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피안의 세계 즉 하나님에게 속한 저 세상에서 온 자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지칭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바, 예수님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 스스로 “나는...이라”(예. 21절)는 자기 선언에 대한 일종의 응답 내지는 긍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은 예수님의 대답과는 너무나 불편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7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70-71절)
불편한 대조라 함은 예수님을 자신의 목숨을 버려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고백한 직후에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를 배반하여 죽음에 내몰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대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제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가롯 유다’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왜 이곳에서 화자가 ‘가롯 유다’에 관한 주님의 언급을 소개하고 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베드로’를 변호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시 교회를 위한 교훈의 목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즉 교회는 배신자 ‘가롯 유다’의 편에 설 것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의 고백에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교훈과 적용
1. 네 번째 기적(1)-유월절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어, 그 중요도에 있어 다른 기적 사건들을 능가했던 것 같습니다. 각 복음서마다 화자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심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요한’ 화자는 이 기적을 ‘유대’ 인들의 최대의 명절, 유월절과 연계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공관복음>의 기록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오병이어”의 배경으로 삼고 있는 ‘요한’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큰 무리가 따르니. 한국인들에게 추석이 갖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단순한 휴가가 아닙니다. 추석하면 떠오르는 따뜻하고 친숙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고향; 가족; 친구. 한국인들은 매년 귀성을 통해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이 이와 같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은 단순한 명절 그 이상입니다. 해방과 자유, 그리고 민족자존과 독립 국가 건설을 성취한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가 언급하고 있는 “유월절”은 이처럼 밝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영광과 성공이 아니라, 좌절과 실패, 그리고 궁핍과 필요를 말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의 “유월절”이 아니라 “유월절” 이후를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다름 아닌 그들의 광야 생활입니다. 사막이나 광야에 무엇이 있으며 기대할 것이 무엇입니까? 나도 얼마 전 미국 여행 중에 차로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을 횡단해 본 적이 있어, 사막 여행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이 무엇이지 어렴풋하게나마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낮이면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다가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기온, 전갈과 방울뱀과 같은 맹독 짐승들, 횡단 내내 마을이나 주유소 하나 없는 상황, 등등. 이스라엘 역시 홍해를 건너는 순간부터 이와 같은 사막, 아무 것도 없는 광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의지하고 기댈 만 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월절”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요한’ 화자가 “오병이어”라는 엄청난 기적 사건, 신약의 네 <복음서>가 모두 소개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그 배경으로 “유월절”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 축제의 기간에 먹을 떡과 마실 물이 없어 수천 명의 무리가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기대하며 그를 따라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국가나 종교의 무능과 무관심을 일견 고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일용할 양식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수천의 무리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들 무리를 “목자 잃은 양”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돌보지도, 돌볼 수도 없는 고아 같은 무리들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이 모습을 기적의 배경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전의 그 어느 시대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본 의식주는 말 할 것도 없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전개되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우리의 삶을 앞으로도 더욱 향상시키고 발전시킬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가나 과학자 모두 진보를 말하고 희망을 말합니다. 그래서 조만간 더 이상 새로운 그 무엇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은 시대가 도래 할 것만 같습니다. 적어도 과학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지금 우리는 제 2의 “빅토리아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성전에 나타나신다 해도 그분을 열렬하게 따를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모두들 희망과 발전을 말하고 있고, 풍요를 노래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바로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은 자국의 명운(命運)을 걸고 치열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미래 산업에 필요한 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은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서 그랬다면, 이제는 첨단 신소재를 위한 희귀 자원 확보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대에 세계는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를 두려워했다면, 이제는 더욱 다양한 무기들로 인해 두려움은 더욱 증대되고 있습니다. “식량 무기화”, “희토류 금속 무기화”, “희귀금속 무기화”, 심지어 “지적 재산 무기화”, 등등 아주 다양합니다. 결국 희망과 진보는 역설적으로 우리 인류를 더욱 더 의존적이고 의타적인 존재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국가도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세계 어디에도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한 국가가 이러할 진대 개인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물질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일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어떻습니까? 매사에 활기 넘치고, 명랑하게, 자족하며,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시인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입니까?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까? 아니면 어디서 오는 지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는 불만과 좌절, 다른 사람을 향한 불평과 원망, 나 자신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자책감이나 분노, 그리고 공허감과 무기력, 등등으로 마치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이집트’라는 외부 세력에 의해서 타의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나는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왜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그 풍성한 삶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 주님의 약속은 믿을 만 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 약속에 대한 나의 믿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그 약속을 성취시켜보려 했던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내가 힘써 한 일이란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내 속에서 몰아낸 것 밖에는 없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작가 ‘필립 얀시’(P. Yancy)도 젊은 시절, “아, 내 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절규하며 방황한 적이 있었다고 그의 책에서 쓰고 있습니다. <성경> 속의 그 하나님이 내 속에는 없다는 탄식입니다.
그가 왜 그토록 고민하며 방황했을까?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내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를 대신할 그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는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무리를 따라 나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 이들 무리는 그 동기가 무엇이었든 (단순히 기적을 더 보고 싶다는 호기심만은 아니었으리라 짐작됩니다만), 그들의 필요를 정확하게 채워줄 수 있고, 또 채워주기를 즐겨하는 대상을 따라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 화자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소개하는 두 번째 이유가 여기 있다 하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났을 때, 우리의 모든 재원(財源)이 다 소진(消盡)되었을 때, 우리의 실존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임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빌립보서>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그리스도의 영광은 단순히 그분의 능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따르는 무리들의 동기가 무엇이든, 예수님의 동기는 일관되고 한 결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동기에 대해서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막 6:34)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뿐만 아니라, 채워주고 싶어 안달하고 계신 분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무리의 배고픔을 자신의 배고픔과 동일시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쳐다보신 것은 얼마나 많은 무리가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가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수가 얼마이든 그 속에 허기지고, 상실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보살펴 주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함께 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히 4:15)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행여나 예수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분이 아무리 능력이 많고, 동정심이 많다 한들 무슨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자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받기를 아예 포기하는 편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2차 대전 동안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한 발 늦게 도착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데도, 그토록 애절하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완전히 잊고 계신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를 기억하실까? 혹시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홀로코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놓고 수없이 기도했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어, 그분이 나를 완전히 잊고 계신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의 관심사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제자들보다 먼저 무리들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기진 이들 무리를 어떻게 먹일 것인가를 놓고 제자들보다 먼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
제자들도 배가 고팠을 것이기 때문에 떡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관심사는 자기중심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문제가 우선 관심사였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사는 자신과 제자들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어떻게 식사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에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나에게 격려가 되고 용기가 됩니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한 결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대해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큰 무리 속에 있어도 그분은 결코 나를 놓치지 않습니다. 잊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내 기도에 귀를 막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보다 나에 대해서, 내 형편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 것도 된 것이 없으며, 나 역시 그분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장 깊숙한 굶주림은 무엇입니까? 안전과 행복과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입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미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처럼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보다 무리들의 필요에 먼저 반응하셨다면, 나 역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타인의 필요에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고독과 외로움, 실망과 좌절, 허기와 갈증으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주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셨듯이, 오늘 나를 향해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상상력을 발휘해 봅시다.
2. 네 번째 기적(2)-상상력
꿈. 지난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 축구대회 이후 대한민국이 참여하는 거의 대부분의 국제 경기에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현수막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꿈은 환상이며, 비전입니다. 그리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상상(想像)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이나 공산품들이 모두 상상의 결과라고 볼 때,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호는 단순히 빈 말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상상하고 꿈을 꾸었기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그분의 생각과 가슴과 머릿속에 있는 상상이나 꿈을 가시적으로 실현한 행위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공조(共助)의 결과로 실현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창조할 그 무엇은 없을까? 아니면 내가 그 창조에 참여할 길은 없을까? “나도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노라”하며 큰 소리로 자랑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오직 자존심과, 자부심과, 가슴 뿌듯함과, 활기참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예컨대,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떻습니까? 내가 그 기적 이야기의 주연은 아니라 할지라도 조연으로나마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있는 듯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어깨를 으쓱이며, “보라, 내가 한 일을!” 하고 자랑할 수 있는 길이 항상 열려있는 듯합니다.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고 따르는 그의 제자라면 누구에게나 말입니다. ‘빌립’이나 ‘안드레’나 무명(無名)의 한 소년이 바로 그들입니다.
빌립. 무리를 보신 후, 예수께서 가장 먼저 동참을 유도한 제자는 ‘빌립’입니다. 학자들은 그가 인근 ‘벳세다’ 출신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 사정이나 형편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누구보다 먼저 지목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절하).
질문을 받은 ‘빌립’은 아마 우쭐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이 지역 사정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그는 한껏 고무되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주님,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요, 이 근처에는 가게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선생님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물어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진 지식을 뽐내며 선생님이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되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과연 선생님이 무엇을 몰라 그에게 물어본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화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6절). 이 얼마나 천만 다행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실 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고 하니 말입니다. 전쟁에서 장군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부하 병사에게 물어보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 공부 잘 하는 학생에게 수시로 물어보아야 한다면 어떻습니까? 수술받기 위해 누워있는 환자에게 의사가 수술 부위가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불안해서 누워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실지 친히 알고 계시다고 화자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분은 궁핍한 세상을 동정어린 마음으로 살피시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계획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 시대와 우리가 사는 세대에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이미 아시며”, 우리 개인의 현재와 미래라는 얽히고설킨 실꾸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어떻게 하실지 알고 계십니다. 사실 내가 무어라고 기도하기 전에 이미 그는 나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감사하고 기도드립시다. 현재 난마와도 같이 얽혀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도 부디 그의 계획을 드러내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의 실패는 무엇입니까? 선생님이 자기를 시험해 보시는 줄 모르고 오히려 선생님을 가르치고, 설득하려 했다는데 있지 않을까요?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말입니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가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가진 지식과 재량(裁量)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지식은 필경 사람을 자만하고 교만하게 만드나 봅니다. 본인은 지식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식은 축복이며 자랑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일에 있어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빌립’의 경우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빌립’이 시험에 실패한 원인은 또 있습니다. 그는 기적이 일어날 그 지역에 대해서 훤하게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숫자와 계산에도 능했습니다. 소위 이재(理財)에 밝았으며, 그래서 돈 계산에 빨랐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을 받자말자 그는 신속하게 그곳에 모인 무리의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머리도 신속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 것인지 계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계산기를 두드린 것처럼 계산은 곧 끝이 납니다. 그리고 결과를 선생님에게 알려줍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 정말 신속하고 정확한 계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오, 가련한 ‘빌립’이여! 바로 그것이 당신의 한계란 말인가요? 선생님이 당신더러 과학 논문을 쓰라거나, 사실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신 것이 아닐 텐데요. 예수교회의 회계 집사가 되라고 하지도 않으셨을 텐데요. 왜 당신은 과학자가 아니라 시인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인가요? 정말이지 당신은 상상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가요?”
상상력.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상상력을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월터 브루그만’(W. Brugermann)은 오늘날 교회의 책임을 “산문으로 가득 찬 무미건조한 이 세상에서 시를 쓰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 B. Taylor)는 “교회의 핵심 임무는 상상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은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 상상을 동원하지 않고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상상을 할 때, 즉 상상력을 발휘할 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예컨대, 어린 아이가 화장실 벽에 걸린 수건과 변기 청소 봉을 들고 상상력을 발휘할 때 무슨 짓을 할 수 있을까요? 혹시 수건을 어깨에 두르고, 변기 청소 봉을 홀처럼 들고 왕이나 된 듯이 호령하려들지는 않을까요? 혹시 어릴 적에 옥수수를 들고 하모니카라며 불어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상상에는 어떤 한계나, 정해진 틀이나, 결론이 없습니다. 상상은 비단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일까요? 과학자 ‘아인스타인’(A. Einstein)조차도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지식은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지만, 상상은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는 계산을 하지만 인간의 두뇌는 상상을 합니다. 상상은 창조입니다. 상상은 개혁과 변혁입니다.
대기업의 경리 직원이 회계 장부를 정리하는 동안 그 기업 회장은 상상합니다. 상상은 모험이며 도전입니다.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지식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이던 70년대 이야기입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울산 앞바다의 허허벌판 갯벌에 조선소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불러 사업 추진 의사를 타진합니다. 한 사람은 당시 삼성 그룹 회장 이병철 씨였고, 또 한 사람은 현대건설 사장 정주영 씨였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그 일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정 회장은 가능하다고 했고 자신이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정 회장의 판단은 적중했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최대의 조선 수주 국으로 우뚝 서는 기틀이 마련된 것입니다. 여기서 굳이 두 사람의 차이를 본인더러 진단해 보라고 한다면, 이 회장이 합리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 동안 정 회장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이 치밀하고 사려 깊었다면 정 회장은 담대하고 모험을 감수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빌립’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질에 있어 정 회장보다는 이 회장을 더 닮은 듯싶습니다. 돈 계산을 잘 한다는 것과 경영을 잘 한다는 것 사이에는 이토록 큰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빌립’이 회계 직원이었다면 예수님은 그 회사의 회장님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그는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의 치명적인 실패는 회장님의 그 상상을 계산속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나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업을 계획할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변수를 늘 빠뜨리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분이 활동할 영역이나 개입할 공간 같은 것 말입니다. <민수기> 13장은 한 슬픈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운명의 ‘가나안’ 침공을 위하여, ‘모세’가 열두 명의 첩자를 그 땅에 보낼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명의 첩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중략)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하고...(중략)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중략)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27-33)
첩자들의 보고는 주지하다시피 정확하고 객관적이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니 결코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40년을 광야에서 전전긍긍하다가 모두들 죽어갔습니다. 그들이 실패했던 원인은 계산을 잘못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다름 아닌 ‘갈렙’과 ‘여호수아’의 다음과 같은 상상입니다: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8-9)
참으로 담대한 상상입니다. 문학적 상상의 대가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님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묻는 제자들에게 “천국은 이것이다” 하며 요점 정리를 해주는 대신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가장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서 그냥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그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무화과나무를 보라”; “씨와 잡초와 동전과 양과, 그물과 진주와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부모와 자식들과 청지기들과 일꾼들과, 농부들과 어부들을 보아라”; “바닥을 쓸고 있는 여인과 빵을 굽는 것을 보아라”; “밀가루 세 되 속에 섞으려는 한 여인이 들고 있는 누룩을 보아라.”
예수님의 초청인 즉은 이들 꽃이나, 짐승이나, 나무들에 대해서 생물학적 연구를 수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대로 바라보라는 초청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기계적인 모방이나 추종이 아니라 상상과 창의가 넘치는 제자가 되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과 같습니다. 흥미와 모험과 그리고 때로는 위험으로 가득 찬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선지자 ‘요엘’은 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할 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더욱 풍성한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꿈을 꾸고, 예언하며, 이상을 보는 것 말입니다. 이 모두 창조적 상상의 결과일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꿈꾸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3. 네 번째 기적(3)-보리떡과 물고기
경영. “경영”(management)이란 “타인들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J. M. Boice). 코치의 역할도 이와 유사하다 할 수 있을 것인데, 선수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시키는 자가 곧 코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훌륭한 경영인은 훌륭한 코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에서 “경영”에 관한 사례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빌립’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그의 동참을 유도하려 했던 일을 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손을 높이 들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기 위해서 각자의 호주머니 속에 떡을 창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소 귀찮고 수고스럽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다 수행하기보다는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그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신 것이겠지요. 제자들이 기적의 사역에 동참하여 즐거움과, 자부심과, 긍지와, 행복함을 맛보기를 원하신 듯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빌립’의 상상력은 빈곤했습니다. 그는 머리는 좋았으나 꿈이 없었고, 상상력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훌륭한 경영인의 자질도 없어 보입니다. 주변에 널려있는 많은 재원(財源)들을 동원하거나, 활용하는 사업가적인 수완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이점에서 ‘빌립’을 매우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한 아이. 만일 ‘빌립’이 곁에 있는 한 아이를 눈 여겨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 말입니다(9절). 하지만 이런 기대는 너무 무리인가 봅니다.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그보다 더 나았겠습니까? 그 자리에 누가 있었던 이 별 볼일 없는 아이를 주목해 보았겠습니까?
우리는 이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껏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지독히도 가난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가 점심 식사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으니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책 <미쉬나>에 따르면, 간음죄(姦淫罪)에 대한 속죄 제물로 보리떡을 바쳤다고 합니다. 왜 보리떡인가 하면 보리떡은 짐승들이 먹는 음식인데, 간음은 짐승들이나 저지르는 행위라는 모독과 경멸이 담긴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리떡에 대한 유사한 경멸은 ‘사무엘 존슨’이 편찬한 유명한 영어 사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사전에서 “보리”를 “‘잉글랜드’에서는 말에게 먹이나 ‘스코트랜드’에서는 사람들이 먹는 곡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J. M. Boice). ‘스코트랜드’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아이가 보리떡을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 메마르고 거친 보리떡을 목에 걸리지 않고 넘어가게 해 줄 물고기 두 마리를 점심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했는지를 시사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토록 가난한 어린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들이 엄청난 창조의 기적의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처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들이 기적의 수단이 되고 있는 사례를 여러 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땅의 “먼지”(rp;[, 아파르)보다 더 하찮은 것이 또 있을까요? 그것으로부터 곡식 한 알 수확할 수 없을 정도로 시시하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먼지로부터 한 인간 즉 ‘아담’이 탄생합니다(창 2:5). “당나귀 턱뼈”를 어디다 쓰시겠습니까? 그런데 ‘삼손’은 그것으로 천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쳤습니다. 목동의 구부러진 “지팡이”는 어떻습니까? ‘모세’는 그것으로 ‘이집트’의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어냅니다. “돌팔매”([l'q, 켈라)는 단순히 새를 잡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으로 ‘골리앗’의 머리를 박살내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대 로마제국의 한 변방 ‘베들레헴’에 살던 한 시골뜨기 처녀에게 누가 주목이나 했겠습니까?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 그리고 세상의 구세주가 그녀로부터 탄생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땅의 흙먼지보다 못합니까? 당나귀 턱뼈보다 못한가요? 목동의 지팡이보다 못합니까? 돌팔매보다 못합니까? 한 시골뜨기 처녀보다 가진 것이 없고 재능이 없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 조차도 나에게 없습니까?
설마 이렇게 까지 나를 비하하거나, 경멸하고 싶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니 정 반대로, 누가 나를 그런 식으로 비하한다면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라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그분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둘째,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찾는 일만 하더라도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소명이 무엇인지 들려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날 그와 같은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왕 말이 났으니 주제에서 일탈하는 부담을 무릅쓰고 한 번 물어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직업이나 소명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바바라 테일러’(B. B. Taylor)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소명(또는 직업)이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지상명령(至上命令; the greatest command))이라 부릅니다. 우리 각자가 부여받은 다양한 은사(恩賜)라는 것들도 결국 지상명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은사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무슨 일이든 시작해 보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은사는 대체적으로 반복과 훈련과 인내를 통해서, 그리고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완성되어가는 그 무엇입니다.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은사는 게으른 자가 바라는 그 무엇도 아니고, 되었으면 하는 그 무엇도 아니며, 가지고 싶어 하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것은 밭에 감춰진 보배와 같다고나 할까요? 찾고, 뒤지고, 갈고, 닦아야 하는 그 무엇입니다.
‘요셉’의 꿈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 꿈은 분명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분명했음에도 그는 그 꿈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무려 20여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임명은 등극하기 위해서 13여 년을 절치부심(切齒腐心) 기다렸던 것과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어떤 세월을 거쳐 갔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냥 앉아 세월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안드레. 나는 과연 은사를 개발하기 위하여 그동안 어떤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까? 눈을 씻고 찾고, 뒤지고 했는데도 여전히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안드레’로부터 한 수 배우는 것은 어떨까요?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니 그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일하는 법입니다. 사실 ‘빌립’이나 ‘안드레’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안드레’도 ‘빌립’과 마찬가지로 수천 명에 달하는 무리들에게 줄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경영 마인드”에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경영이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투자자를 유치하고, 은행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처음부터 자기 돈 100% 투자해서 사업하는 사람 거의 없을 것으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생명 살리기” 사업에 ‘빌립’을 투자자로 유치하려 했던 것처럼, ‘안드레’는 주위에 있던 한 아이를 그 일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빌립’이 자기가 가진 돈이 없다고 사업에 뛰어들기를 주저했다면, ‘안드레’는 다른 투자자를 동원했습니다. 투자 금액이 미미하기 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안드레’의 개척적인 기업정신이 돋보인다 하겠습니다.
사실 그 자신도 이 사업의 성공 여부에는 크게 자신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절)”
그렇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미미한 분량입니다. 이 대화를 듣고 있는 독자라면 하나같이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림도 없지. 행여 기적이 일어난다면 몰라도.” 바로 여기에 화자의 의도가 숨어있다 하겠습니다. 과연 이제 곧 꿈과 망상이 현실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꿈과 현실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自信)이 없다고 포기하는 것과, 자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해 보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자신”(自信)은 단어 뜻 그대로 “자기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가 ‘안드레’를 개척자로 부를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고(故) 정주영 회장을 탁월한 개척자로 부르게 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현대조선소 건립 당시 개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외국 은행의 투자자를 설득시킨 이야기입니다. 그는 거북선이 새겨져 있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보여주면서, 우리 선조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거북선을 건조한 기술과 경험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투자하라고 투자자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은행은 정 회장의 말만 믿고 당시 천문학적 금액을 투자했으며, 투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몇 배의 기업 이윤을 남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 덕을 본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또 다른 교훈이 있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와 똑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오병 이어” 기적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입니까? 무리입니까? ‘빌립’입니까? ‘안드레’입니까? 아니면 어린 아이입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여기에 비하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투자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어떻습니까? 그날 그 자리에 모인 다른 많은 아이들과 다를 게 하나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아이입니다. 오죽 했으면 화자는 그의 이름조차 거명하지 않습니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 근처에서 그냥 어슬렁대고 있었는지, 아니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철없이 놀고 있었는지 알 길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그날의 대 사건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나머지 평생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아이입니다. ‘안드레’가 그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이 아이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한 사람. 이 아이야말로 자기가 가진 하찮은 것을 주님에게 내놓음으로써 기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혹시 내 인생에서 이와 같이 ‘안드레’의 역할을 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하잘 것 없는 내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려 위대한 삶을 살도록 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내가 어느 누군가에게 ‘안드레’가 되어준 적은 있었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하잘 것 없이 살아가던 그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드려 탁월한 삶을 살도록 해 준 적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성공이며, 축복인지 간과하고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잣대로 나를 판단할 때도 많습니다. 그 잣대로 내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너무 왜소하고, 너무 시시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영 지침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분은 새 생명의 기적에 늘 동역자를 찾으십니다. 동역자가 될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고전 3:9). 그분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위대하거나 탁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빌립’처럼 수학이나 계산에 능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자 ‘나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한 노예 소녀를 동참시키셨으며, 선지자 ‘엘리사’를 구하기 위해서 한 과부를 보내셨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과 불평을 하며 기진맥진(氣盡脈盡)해 있던 선지자 ‘엘리야’를 소생시키기 위하여 까마귀를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위대하고 탁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 자신이 이미 위대하고 탁월하기 때문에 더 이상 탁월한 인물이나 조력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안드레’가 되든지, 또는 어린 아이가 되든지 하면 될 것입니다. 헌신합시다.
4. 네 번째 기적(4)-오천 명을 먹이심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서구사회에서처럼 기부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은 참 고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영화배우 신영균 씨가 평생 모은 재산 500억 원을 후진 양성과 영화 산업 진흥을 위해 내어놓았다는 소식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습니다. 평소에 동료나 후배들로부터 지독한 구두쇠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그 분이 이런 엄청난 금액을 사회에 환원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평소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할 말이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2010년도 대종상 특별상을 그분에게 수여한 것도 그분의 아름다운 나눔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자연인이 이처럼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진대,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일에 무심하거나 소심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수백억의 재산이 아니라, 불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지고서도 수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지체 장애자가 아니라면 머리가 하는 일을 몸이 모르거나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일은 네 <복음서>가 모두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기적 외에는 달리 이를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묵상하면서 감동을 느껴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당시 이 사건을 목도했던 ‘유대’인 무리들이 받았을 그 충격이나 감동은 전해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덤덤했다고나 할까요. 솔직히 신영균 씨에 관한 소식보다 더 감동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오래 동안 너무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덤덤한 느낌은 비단 이번 이야기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읽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엄청난 기적에 대해서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내 잘못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요한’ 화자의 방식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야기란 원래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원칙을 따라 절정을 향해서 점진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나아가야 하는 법이거늘, 화자는 장황하게 주변적인 묘사로 시간을 끌다 절정에서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기적의 배경이나 동기 그리고 기적에의 초청 등에 대해서 느리고 아주 세세하게 기록하면서, 정작 기적의 발생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단 한 줄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전체 열다섯 절중에서 기적 그 자체에 대해서 과연 몇 절이나 할애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 한 절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11절). 이것이 끝입니다.
왜 네 <복음서>는 모두 한 결 같이 이야기의 절정을 이처럼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마는가? 후대의 독자들을 위해서 보다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일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바로 여기에 절정(絶頂)의 역설이 있다 하겠습니다. 절정은 짧고 함축적일수록 더욱 극적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대부분의 <성경> 이야기들이 이와 같습니다. 이야기의 반전이나 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나, 주인공의 행위에 대해서 가능한 한 짧고 간단하게 처리해버리고 맙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타락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절정, 즉 인류의 구속(救贖)이라는 대 서사시의 단초를 제공한 ‘아담’의 반역에 대해서 화자가 단 세 개의 단어만을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도 먹었더라”(창 3:6하).
‘요한’ 화자 역시 이야기의 대가(大家)입니다. 그는 사실적인 묘사에도 지극히 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절제(節制)의 미학도 통달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기적의 발생에 관한 그의 설명은 다른 세 <공관복음>의 그것보다 더욱 짧고 간단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무리를 돌아가며 떡을 나누어주었다”고 상대적으로 소상하게 전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아예 그러한 설명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 모든 떡을 일일이 무리에게 직접 나눠주셨다는 느낌을 받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11절을 꼼꼼히 다시 읽어봅시다).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들의 원대로 주었다”는 설명은 무엇인가요? “그들이 배부르게 먹었다”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기적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당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와 같은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그날 실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날 모두가 나눈 식사는 “성만찬”이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다”는 설명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물론 이 단어가 원어(原語)로 ‘유카리스테오’(eujcaristevw)로서, 성찬식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유카리스트’(Eucharist)가 여기서 유래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날 예수께서 나누어 준 떡은 식사가 아니라 성찬을 위한 떡 조각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가 “배불렀다”는 것도 문자적인 배부름이 아니라, 일종의 영적인 황홀감을 의미한다는 주장입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주장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날 보이신 행동, 즉 자신과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지극히 미미한 분량의 식사,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조차 기꺼이 나누어 먹으려 하는 그 행동에 무리들이 감동을 받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양식을 서로 내어놓아 모두들 흡족하게 나누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화자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와 같은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할 하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도도하고도 당당한 “열역학 제 일 법칙”을 잠시 유보시키고, 새로운 창조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그가 누구이기에, 모든 것이 소멸되고 사라지는 막강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다섯 개와 두 개가 수천 수 만 개로 증가시킬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어떤 지도자가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다 주었는데도 여전히 그 양이 줄기는커녕 처음보다 더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무한한 자원을 소유할 수 있을까?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는 표현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가나’의 혼인잔치도 이와 같지 않았던가? 그날 잔치 집에 모인 하객들이 일곱 항아리에 넘치도록 가득 찬 양질의 포도주를 마셨던 일과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과연 어떤 종교 지도자가, 어떤 정치 지도자가 이토록 무한한 자원을 가질 수 있겠으며, 이토록 자애롭고 전능할 수 있을까?
무리의 반응. 하지만 무리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육감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이 아닙니까? 크고 작은 그 모든 일들을 항상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체질화 되어있는 족속 아닙니까? ‘유대’인이라면 아무리 무지해도 그 정도는 본능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반응은 기대했던 대로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절). 이들이 말하는 “그 선지자”는 수천 년 전 ‘모세’가 예언했고, 이스라엘이 오늘날에도 기다리고 있는 종말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8)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하는 동안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백성을 초자연적으로 먹이신 사건을 기념하며 제정한 것입니다. 그 배경은 또 광야 지역 곧 ‘모세’가 앞으로 올 “그 선지자”에 대해서 말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적을 체험한 이 무리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신명기>의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선지자” 즉 “두 번째 모세”가 틀림없다는 것이지요. 민족 해방을 기념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무리가 열광하며, 그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만들려고 환호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성경>도 ‘그리스도’가 오면 이날처럼 배고픔과 굶주림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시 132:15). 이날 그들이 목도한 장면은 바로 이 <성경>의 약속이 영락없이 성취되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바로 “그 선지자”가 됨이 마땅할 것이며, 자신들의 왕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싫다는 데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하고 있습니다(15절).
예수님의 반응.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후). 어떤 사본은 “뒤로 도망갔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한’ 화자는 무리의 “오해”와 예수님의 “숨기심”이라는 대조의 기법을 통해서 오히려 드러내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그 선지자”이자 “이스라엘의 왕”임에 틀림없다는 선언입니다. 이들 무리가 전혀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들을 피하여 자신을 숨기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리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에서 답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무리가 가진 “반쪽짜리” 지식입니다. 반쪽 지식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며,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우리네 경구도 따지고 보면 “반쪽짜리”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탄’이 ‘아담’에게 일러준 지식도 “반쪽짜리” 지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 선지자”이자 “이스라엘의 왕”임에 분명합니다만, 무리가 알지 못했던 타이틀이 더 있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자 “(하나님의) 어린 양” 즉 “희생 제물”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왕은 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먼저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놓아야 합니다(막 10:45). 이들 무리가 <성경>에 대해서 반쪽짜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리의 열광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답변은 무리의 잘못된 동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동기가 잘못되면 거룩한 목적이 타락하고 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한 기꺼이 그분을 지지하고, 환영할 것입니다. 그분을 내 목적을 위하여 활용하고 이용할 수 있는 한 왕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리는 더 많은 떡이 필요했으며, 그 때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정치적 해방과 자유가 필요했으며, 그 때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 나는 이들 무리와 얼마나 다릅니까? 나는 위로가 필요할 때는 없습니까? 큰 어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없습니까? 힘이 빠져 있을 때 안식과 평안이 필요할 때는 없습니까? 그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고 간구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진정 나의 힘이요, 위로요, 즐거움이자 기쁨입니다. 내 진정 사모하는 구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행여나 그분께서 나에게 오셔서 자신이 지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갈 2:20)? 나더러 이 시대의 그리스도가 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롬 8:29)? 나더러 무리에게 떡을 먹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눅 9:13)?
여전히 그분을 나의 왕으로 구주로 열렬히 환영하시겠습니까?
5. 다섯 번째 기적-물 위를 걸으심
그 어둡고 바람 불던 밤, 시커먼 파도가 넘실대던 ‘갈릴리’ 호수 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힘들여 노를 젓고 있었는지, 그렇게 힘들여 ‘가버나움’으로 가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제자들만 타고 있었는지, 그 시간에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오천 명에게 떡을 먹이신 예수님이 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릴리’ 호수는 여느 때처럼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고, 하필 그와 같은 때에 제자들끼리 배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밤이 깊이 드리워져 있어(17절), 예수님의 부재(不在)에서 오는 절망스러운 분위기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한’ 화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는 이번 이야기를 아예 생략해 버렸습니다만, 흥미롭게도 <마가>와 <마태>는 <요한>에서처럼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이 이야기를 한 쌍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다와 제자들. 이들 세 복음서 중에서 <마태>가 이번 이야기를 가장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베드로’의 도전과 실패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걸으려 했으나 이내 물에 빠져버렸고, 이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면서 질책하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제자들과 바람은 잠잠해 집니다. 제자들은 한 사람씩 배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28-33).
하지만 <마가>는 <마태>에 비해서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나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훨씬 더 거칠고 무례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일부 부정확한 서술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 ‘벳새다’로 향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벳새다’는 건너편이 아니라 멀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나옵니다. 바람이 너무 거세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기 전까지 그들은 그 밤의 절반 이상을 노 젓는 데에 소모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의아스러운 점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신 것이 아니라, 실은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는 점입니다(막 6:48).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두려워 큰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주의를 끌게 된 것 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을 안심시키시려고 배에 오르셨는데, 이후 바람이 멈추고, 이에 제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예수님께 고맙다는 인사조차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분이 누구인지 여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아니, 무슨 이야기의 결말이 이렇습니까? 영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마태>는 그래도 제자들이 믿음의 고백은 드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마가>는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매우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제자들의 심장이 굳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심경화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심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일 텐데 그것이 꽉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모두 심장질환자가 되어있었을까? 일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바람과 파도 때문이었을까? 아닙니다. 이들은 학교 선생님이나, 시인이나, 공무원이 아닙니다. 힘든 일에 익숙한 노동자이자 어부(漁夫)입니다. 어지 간 한 육체적인 어려움은 견디고 이겨낼 줄 압니다. 폭풍우 따위는 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어부가 파도를 두려워해서야 무슨 어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그들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시고, 바람을 멈추신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잠잠케 하셨을 때, 제자들은 대경실색(大驚失色)을 했는데, 그것은 풍랑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고요함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마음이 둔하여져서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장애가 있었고, 자신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노를 젓고 또 저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날 밤 그들이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면, 그들이 결코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가장 이상한 방법으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시던 주님을 뵙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오실 것이라고 예고도 하신 적도 없고, 또 그들에게 오실 의향도 없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보지 못했고, 대신 유령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꽉 막힌 심장으로 볼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유령으로, 자신들을 해치려 하는 누군가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 때문에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그냥 지나치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두려움에 울부짖었을 때, 즉각 멈추시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막 6:50; 요 5:20). 그리고 바람은 멈추었습니다(막 6:51). 그리고 배는 곧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요 6:21).
이들은 또 한 번 망연자실(茫然自失)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떡에 대해서도, 바람에 대해서도, 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장은 굳어져 있었으나, 주님은 배에 올라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의 심장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 주님께서 자신의 심장으로 그들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교회를 하나의 배로 비유하는데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화자는 그의 이야기 속에 주님의 임재가 없는 제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오늘날 세계의 많은 교회에 대해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묘사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소수의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탄 배는 밖으로는 세속주의, 그리고 안으로는 불확실성의 바람에 흔들려 출발점에서 멀어져, 자기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분명한 목적지도 없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를 저으며 애쓰지만 앞으로는 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에게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심장은 아주 굳어있으며, “이미 어두운” 것입니다. 늘 곁에서 바라보며 살던 그 호수가 이렇게 두렵고 절망을 느낄 정도로 낯선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바람이나 거친 파도가 아니라 주님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이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마치 그분이 나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하시려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실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훗날 이곳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고통스럽게 그의 지난 실패를 돌아보도록 하시면서 목자의 사역을 맡기려고 하셨을 때, 그는 두려워 또 한 번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21:15-21).
이 점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게도니아’로 가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음에도, 결국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행 16:9, 24).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서이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분열과 갈등이 야기되기도 합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그러합니다(마 10:34-39). 또 환영받기보다는 거부당하기도 합니다(15:18-21).
그러나 주님은 나더러 당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20절). 왜입니까? 그분의 헌신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그분이 보이지 않고,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분에게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거나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 그분은 결코 교회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바다와 주님. 이것이 <요한>이 말하고 싶은 전부일까요? <요한>은 <마태>나 <마가>보다 할 말이 더 많은 듯싶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20절). 이 말씀은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정도 이상입니다. 그보다 훨씬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표현, “내니”는 원어(原語)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神聖)을 드러내는 엄청난 자기 선언입니다. 참고, 6:35; 8:24, 58; 10:14; 15:1; 18:5.
이 선언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들었던 ‘야훼’ 하나님의 이름,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와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과 자연법칙을 통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그분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는”(욥 9:8) 분이십니다. 유월절이라는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이 선언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과 함께 곧바로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었고, 초자연적인 ‘만나’의 공급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체험들은 홍해를 거친 후,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그 바다를 가르심으로써 자신의 권능과 능력을 보이신 것을 경험한 후에 맛보게 된 것입니다(출 12-14). 지금 예수님께서 파도와 바다를 다스리시면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그 옛날 홍해를 걸으시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현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출애굽” 당시 홍해의 기적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시 77:16, 19)
그리고 같은 <시편>은 갈릴리 호수의 기적을 마치 예고라도 하듯,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 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29-30)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한 사건 역시 하나의 기적임에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들어 오시자마자 제자들은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21절). ‘고데’(F. L. Godet)는 이 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는,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지극히 장엄하고 위엄 있는 권능을 행사하신 후에, 그 분은 배 안에 가만히 앉아 있고 제자들이 애를 써서 노를 저어 항해를 계속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예수님은 배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방금 그처럼 멋지게 보여주신, 중력과 공간을 이기고 승리한 힘을 그 배에 전달하셨다.
교회와 주님.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 분의 낙담한 교회와 필요한 곳에, 그리고 개인들의 삶에 새로운 소망과 능력을 안겨 줍니다. 세상이 아무리 위협적으로 보인다 해도 결정적인 것은 세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파도 위로 걸어오시며 교회는 그 분의 임재에 대한 체험을 회복하고 나서,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길을 당당히 걸어갈 것이며, 마침내 창조주 주님께서 우리가 가야할 그 “영원한 해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바람과 폭풍 가운데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 “내니 두려워 말라”가 그 어떤 비바람과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이제 응답합시다. 그리고 감사합시다.
6. 예수를 찾는 이유
오늘날 우리는 수 없이 많은 비밀 번호를 가지고 삽니다. 은행 계좌에서부터 아파트 출입문, 휴대폰, 컴퓨터, 온라인 회원, 등등 모두 비밀 번호가 없으면 사용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비밀번호는 자물쇠와 열쇠의 관계에서 보듯이, 각 경우에 꼭 들어맞는 비밀번호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예컨대, 한 개의 은행 계좌에 필요한 비밀번호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 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 몸도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는 수없이 많은 신진대사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 대사를 원활하게 해주는 수없이 많은 효소 즉 생체 촉매들이 있지만, 각각의 대사에 맞는 촉매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물쇠와 열쇠의 원리”(the rock & key principle)라 부릅니다.
우리의 몸이 그렇다면, 영혼도 그러하다고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일찍이 고백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당신을 위해서 우리를 지었은즉,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 우리 영혼에 쉼이 없나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영혼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단 하나, 즉 하나님밖에는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열려고 시도할 때마다 실패와 좌절만을 겪게 될 뿐이라는 고백인 것이지요.
떡을 찾아서. 왜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까? 그 전날 배가 터지도록 먹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왜 그가 또 필요한가요? 그분을 찾아서 무엇을 얻어내겠다는 말입니까? 내 영혼의 안식에 꼭 필요한 바로 그 열쇠를 얻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그로부터 또 다른 빵을 얻어먹기 위함일까요?
이들 무리가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나섰든, 그들은 지금 ‘어거스틴’의 고백을 행동으로 재확인시켜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전날 배터지도록 먹었던 물고기와 보리떡은 단 한 끼의 식사에 그칠 뿐이었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만족이 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은 이례적인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빛이 먼저 찾아와 비추지 않으면 그대로 어둠으로 남아있으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둠이 먼저 빛을 맞으러 나아오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의미, 즉 “표적”을 읽지 못하는 무리가 어찌 예수님을 먼저 찾아 나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로마서>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
<로마서>의 진단인 즉은, 지금 이곳에서 가당치도 않은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도 이들이 기적의 의미 즉 “표적”을 읽었을 리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먼저 예수님을 찾으러 나선 것일까요? 그리고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 본문 이야기 속에는 여러 개의 배가 등장하고 있어, 이야기 내용을 파악하는데 다소 애매모호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대충 정리해 보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전날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던 날, 호수 이쪽 편 나룻 터에는 배가 한 척밖에 없었으며, 다음날 제자들만 그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즉 ‘가버나움’ 쪽으로 건너간 줄로 알고 있는데, 지금 이곳에는 예수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분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래서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분은 이미 ‘가버나움’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라 묻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25절).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퉁명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거기에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
예수님은 이처럼 별 가치 없는 질문에 대해서는 엉뚱한 대답으로 즉답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별로 친절한 선생님 같지 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개 그 엉뚱하고 퉁명스러운 말씀 속에는 보석같이 빛나는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즉 무리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는지 그 동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표적과 떡. 그 동기는 순전히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떡과 물고기를 먹이신 것도 이들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시고 측은히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프기 마련인 법, 다시 배를 채워 줄 예수님을 찾는 것이 왜 잘못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무리는 지금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떡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만일 무리가 기적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주님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떡을 찾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주신 것은 그들을 측은히 여겼기 때문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기였지, 표적 즉 “기적의 목적”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실패로 끝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의 목적, 즉 표적에 대해서 제 5장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주님은 기적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말씀을 하셨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단연히 거부하시지만, 동시에 기적이“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적이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5:36).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기적의 증거에 대해서 일관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 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10:25)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10:37-38)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떡이 아니라 나를 구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즉 기적의 떡을 맛보았으니 나를 맛보라는 것이지, 떡을 위하여 그분을 찾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요? 떡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수단과 목적을 혼돈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그분을 맛보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나의 직업이자 내 삶의 목적입니까? 아니면 내 인생의 필요와 목적을 위한 수단(手段)으로 그분을 활용하고자 합니까?
제자 되기 원함. 이 동일한 질문을 나에게 한 번 적용해 봅시다. 즉 누군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나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이 나라 국회의원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신과 모멸과 혐오의 대상입니다. 설마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 신학자보다 더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력을 지닌 작가였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해도, 그분의 삶을 따르고 싶다.” 그분이 제자가 되고 싶다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심오한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떡을 위하여 예수를 찾는 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종으로 삼겠다는 말은 아닐까요?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제자로 삼겠다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의 헌신이나 결단이 필요 없습니다. 여차 하면 그냥 보따리 챙겨 떠나면 그만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떡과 물고기”의 의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강의를 하셨을 때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참고. 66절).
우리가 그분을 종으로, 그분을 나의 제자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데도 왜 인생에 만족이 없을까? 내 마음대로 그분을 부리고 있는데도 왜 안식과 만족이 없는 것일까?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잠간, 조금 후면 다시 새로운 필요를 찾아 나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 무리처럼 떡을 주신 자가 아니라, 떡으로 만족하고 살려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내 영혼을 채우려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는 진정 하나님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까?
7. 하나님의 일
연극이나 영화의 등장인물은 각자가 맡은 역할과 대화가 따로 있습니다. 주인공이 조연 역할을 하지 않으며, 조연이 주인공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조연이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KBS <개그콘서트>의 “엑스트라”라는 코너에서 보듯이 완전히 우스개가 되어버립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의 일이 있고, 자녀의 일이 다릅니다. 학교에서 선생이 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면, 학생이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며 인간의 일은 무엇입니까? 역할이 뒤바뀌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믿음과 행함.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돌아다니는 무리들과의 두 번째 대화에서 이 “역할”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무리가 자기를 찾는 동기가 순전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임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절상).
‘유대’인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를 리 없습니다. “썩을 양식”과 “영생의 양식”, 그리고 “일” 말입니다. “영생의 양식”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이며,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에게 재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되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그들이 몰라서 묻는 질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방금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28절). 양식을 그저 값없이 주겠다는 데도 스스로 찾아 나서겠다는 심보는 또 무엇입니까?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유대’인들의 인류 분류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눈다고 합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그리고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 처음 두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세 번째 부류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습니다. 즉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들이 정해놓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면 선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경> 속의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질문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묻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눅 18:18)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도 ‘베드로’ 사도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형제여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할꼬?”(행 2:37)
이 질문은 비단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 감옥 간수가 그곳에 갇혀있던 ‘바울’ 사도에게 물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요?”(행 16:30)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여, 나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당신의 종들 중의 하나로 여기소서”(눅 15:19). 그의 이 말속에는 종에 합당한 대우, 즉 그가 행한 일만큼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청인 것입니다.
이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천국이든 극락이든 행함의 대가로 갈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런 태도는 과연 겸손한 것입니까? 책임 있는 자의 태도입니까? 혹시 하나님을 빚쟁이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내가 이 정도 했으니 그가 나를 구원해 줄 의무가 있다는 식 말입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 한 완전한 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거만을 떠는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행위는 어디까지 행위 즉 “사람의 일”일 뿐이라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십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빌리보’ 감옥 간수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행 16:31).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역시 같은 질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이 질문은 애초 잘못된 것입니다. 역할 구분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누구이며 조연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의자와 재판관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의 답변인 즉은 바로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이다. 너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일을 믿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것이 너를 위한 구원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 앞으로 계산하라. 이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이스’ 복사님은 <빌레몬서>를 통해서 아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서 살았던 한 부자였습니다. 그가 부자라는 사실은 ‘골로새’ 교회가 그의 집에서 모였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점 외에도 그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 사도의 선교 여행 중에 그를 통해서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에 의하면 정작 ‘바울’ 자신은 ‘골로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빌레몬’이 회심을 경험한 곳은 ‘골로새’가 아닌 다른 도시, 즉 ‘에베소’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회심 이후 ‘골로새’로 돌아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골로새’로 온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의 하인 중에 ‘오네시모’라는 자가 도망을 해버렸습니다. ‘빌레몬’이 그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하인이 도망을 쳤다는 사실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법에 따르면 도망친 노예는 잡아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도망친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은 심각한 위법 행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네시모’는 그냥 도망친 것이 아니라 주인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 ‘오네시모’는 이렇게 훔친 돈으로 ‘골로새’로부터 멀리 ‘로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훔친 돈으로 흥청망청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대개 쉽게 얻은 재물은 쉽게 써버리기 마련인 것이지요. <누가복음>의 집나간 작은 아들처럼 살았을 것이겠지요. 그리고 당연히 이 기간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계속 지켜보고 계셨으며, ‘바울’을 만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자입니다.
어떻게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 역시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 두 사람은 감옥에서 만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일생에 간여하는 방식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났으며, 그는 거듭났습니다.
‘오네시모’는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양육 받고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를 키우고 자라게 해주었을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그의 영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시작했으며, 그의 양심은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성경공부 시간에 그는 마침내 그의 가슴 깊숙이 숨겨두었던 고민과 두려움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의 양심은 이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양심은 ‘바울’이 말하기도 전에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전 주인에게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벌을 달게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훔친 돈은 이미 다 탕진해 버렸고, 돌아갈 여비조차 없습니다. 돌아간다 해도 붙잡혀 죽는 일 외는 달리 기대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바울’은 과연 무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그는 ‘오네시모’를 위한 담보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옛날 ‘유다’가 ‘베냐민’을 위한 담보가 되겠다고 자원해 나선 것과 같습니다(참고. 창 43:9). ‘바울’도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스스로 담보가 되겠다고 하며, 그를 위해 편지를 써주고 있습니다: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몬 18-19상)
‘바울’의 친서를 들고 달려가고 있는 ‘오네시모’를 상상해 봅시다. 그의 기대와, 즐거움과, 기쁨과, 희망으로 벅찬 가슴을 안고 달려가고 있는 그의 모습 말입니다.
한편 ‘빌레몬’은 어떻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숨을 헐떡이며 자기 앞에 나타난 ‘오네시모’를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상상합니다: “아니 이 자가 누구인가! 왜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훔친 돈이 다 떨어져 내게 더 구걸을 하러 왔단 말인가?”
마침내 마주 선 두 사람. 먼저 ‘빌레몬’이 분노를 삭이며 ‘오네시모’에게 쏘아 붙입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낯으로 다시 내 앞에 섰단 말인가? 정말 놀랐는걸.” 그러자 ‘오네시모스’는 자신을 위한 변명 대신에 말없이 도포자락으로부터 두루마리 서신을 꺼내어 주인에게 건네주며 말합니다: “주인님, 잠깐만요. 아무 말씀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단지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이 서신을 봐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빌레몬’은 할 수 없이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 된 것을 뜯고 서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서신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로부터.” 그는 놀랍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이 편지는 ‘바울’ 사도가 보낸 것 아닌가!” 그리고 ‘빌레몬’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 그를 만났단 말인가?”
‘오네시모스’는 그렇다고 답하면서 고백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분을 로마 감옥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잠깐” 하며, ‘빌레몬’은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갑니다. 아마 그의 아내 ‘압비아’도 불러 함께 읽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편지 속에는 아내의 이름도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1-2절)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두 사람은 다음 구절에 이르러서는 분노가 의구심으로 바뀝니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9-10절)
“아니, 이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잘못을 덮고 유야무야하려는 자는 이자가 처음은 아니었지.” 두 사람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계속 읽어내려 갑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11-12절)
여기까지 읽고 ‘빌레몬’은 잠시 편지에서 눈을 떼고는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바울’ 선생이 이 녀석에게 완전히 감동을 먹은 모양이군. 그러나 나는 달라. 선생은 그를 완전 회개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고 있을이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가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그 빚을 갚기 전에는 결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 없어.” 이렇게 다짐하며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갑니다.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8-19절)
이 부분에 이르러 ‘빌레몬’은 완전히 압도당하고 맙니다. 이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자신의 죄를 이미 자백했으며, ‘바울’ 선생과 자기와의 확고부동한 관계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의 편지를 가지고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선생이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를 위한 “대속”(代贖)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오네시모’는 이러한 ‘바울’을 철석같이 믿고 ‘빌레몬’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그를 용서했을까요? 용서했다면 누구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의 대속. <빌레몬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해하기 위한 완벽한 우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맡은 역할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의 역할은 성부 하나님입니다. 나와 여러분은 ‘오네시모’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훔친 것은 무엇입니까? ‘아담’이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그 모든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이름, 그리고 예배와 순종, 그 모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더욱 멀리 도망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내 부끄러운 부분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허물을 덮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개과선천입니까? 종교적 행위입니까? 전도입니까? 예배입니까? 성경공부입니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대답은 당신의 몫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일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은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담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8. 생명의 떡(1)
생명의 양식. 식품 영양학자들이 자주 쓰는 유명한 금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We are what we eat).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올해 초, 내 아내는 의사로부터 “고지혈증(高脂血症)” 진단을 받은 바 있습니다. 나는 이 때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적어도 아침 한 끼는 순수한 야채식(野菜食)으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로부터 약 6 개월 정도가 지난 후 다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았는데, 수치가 정상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저는 정말 놀랍고도 즐거운 체험을 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계속 아침 야채식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먹으며, 또 자라기 위해서 먹는다고들 합니다만, 제 아내에게 있어 먹는 문제는 그 이상입니다.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해서 무엇을 먹느냐?”가 항상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이는 당뇨를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뇨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상인의 식단이 아니라, “당뇨식단”일 것이며, 그것만이 그들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세상에 주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를 찾아온 무리를 향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있었던 그날 오후 이후 밤이 새도록 줄곧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날 낮에는 비록 진수성찬(珍羞盛饌)은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 덕분에 배가 터지도록 먹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공허한 수사(修辭)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어제도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은유(隱喩)를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유의 대가(大家)이신 예수님, 그분은 지금 “육체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유는 이것입니다. ‘모세’의 말입니다.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예수님께서 무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것도 역시 같은 목적에서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었던 이들 무리는, 그 옛날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그들의 선조들처럼, 여전히 배고픈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모스>의 말씀입니다.
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이 말씀을 먹어라.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생명의 양식” 즉 그리스도를 먹으라는 말씀이 아니던가요? 그리스도를 먹다니요?
제가 중학교 재학 시절 일입니다. 당시 우리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초등학교에서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영어 과목을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난생 처음 배우는 과목이라 많은 학생들이 힘들어했습니다. 우리말과는 전혀 다른 문법 체계도 그렇거니와 전혀 생소한 단어들을 기억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 중의 하나가 매일 한영사전(韓英辭典) 한 쪽씩을 찢어 그 안에 든 단어들을 다 외운 다음 입안으로 집어삼켜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이와 같지 않을까요? <성경>을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찢어 먹는 것 말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9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9-10)
우리는 이 강력한 은유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려는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전해지던 당시의 상황도 모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온갖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고통 받고 신음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교회가 그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한 비법(recipe)을 마련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책을 먹어라”는 명령을 받은 이는 사도 ‘요한’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보다 육백여 년 전에 ‘에스겔’도 책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겔 2:8-3:3). 그리고 ‘에스겔’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습니다(렘 15:16). <구약>의 이 두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도 <계시록>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방에서 온갖 억압과 배척과 환난이 몰려오던 때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먹고 삽니다. 음식이 인간의 몸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듯이 교회에 영양분을 제공해 줍니다. 교회는 단지 <성경>을 배우거나 연구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흡수합니다(E Peterson). <요한복음>은 그 위대한 서문(序文)에서 그리스도가 곧 “말씀”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1:1-5).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4절). 죽은 사람은 말을 못합니다. 오직 산 사람만이 말할 수 있고, 그렇기에 말은 살아서 움직이며, 사람들을 움직이게 합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책을 단순히 읽는 것과 책을 먹는 것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책을 먹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어서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합니다. 독자는 자신이 읽는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E Peterson). 그러므로 책을 먹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더 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 가에 있습니다. 그 무엇이란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은 쉬운 일인가? 책을 먹는 이야기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무시해 온 한 가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성경>을 먹고 나서 배앓이를 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그 책을 입에 넣었을 때는 맛이 좋았지만, 뱃속에 들어갔을 때는 배가 아팠습니다(계 10:10). 도대체 왜 배가 아픈 것입니까?
제가 늘 다니는 스포츠센터 근처에 ‘아멘교회’라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는 전도에 열심인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인들은 매주 번갈아 가며 스포츠센터에 나타나 전도지와 함께 선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전해주는 전도지 말씀 중에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적인 문구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전도자의 열성이나 의도를 비난보다는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지만, 그래도 그 문구를 혼자 되씹어 보면서 야릇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와 같은 전도 문구는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달콤한 맛을 느끼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초신자(初信者)들이 <성경>을 처음 배우면서 갖게 되는 기분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축복과 약속, 위로와 격려, 등은 분명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고 <성경>을 사랑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속에 있는 모든 말씀이 다 자신의 기호(嗜好)에 맞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작은 단데 나중에 보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썩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배속에 들어와서 쓰게 된 것입니다. 점차 깨닫게 되는 사실은 그 책이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쓰여 진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듣고 이해하는 것도 힘들지만, 순종하기는 더욱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소화하기에는 힘든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심각한 소화불량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소화불량에 걸렸을 때, 밥을 삶아 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입맛이나 취향에 맞게 조리하거나 취사선택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 해결식으로 그 책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요약하거나 체계화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책을 먹되 가까운 곳에 소화제도 늘 준비해 놓아야만 할 것입니다(E Peterson).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 말은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큰 곤란에 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어떤 사람의 손에 쥐어주면서 “그것을 먹어라”고 말하는 것은 자동차 열쇠 한 묶음과 자동차 한 대를 어린 아이에게 주면서 “운전을 해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E Peterson). 따라서 <성경>을 먹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그것을 어떻게 먹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야채식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빠뜨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채식이 좋다 해서 모든 야채를 다 날것으로 먹을 수는 없으며, 그럴 경우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간이나 신장(腎臟)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볍게 데치거나 삶아 먹어야 할 야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배추의 경우 정상인이라면 어떻게 먹든 상관없겠습니다만, 이 식품은 ‘칼륨’(K)이 아주 풍부하여 신장이 좋지 못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아내의 경우에는 양배추는 반드시 삶아 먹어야 합니다. 도마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 날 것으로 먹는 것보다 살짝 익혀서 오일(oil)에 발라 먹는 것이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한 율법학자에게 질문을 던지셨고 그것 때문에 그 학자는 곤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네가 읽는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네가 어떻게 읽느냐?”였습니다. 즉 “어떻게 먹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화의 끝에 그 학자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십니다: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 즉 “네가 먹은 대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지만, 먹은 것은 반드시 살아내어야 합니다. 즉 소화를 시켜서 태워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뇨환자에게 있어 음식만큼 중요한 것은 운동입니다. “육체의 양식”이나 “영혼의 양식”이 이렇게 닮은 점이 많다는 데에 대해서 새삼스럽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먹을까?”, 그리고 “먹은 것을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연기자는 대본을 단순히 읽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연기해 내는 자입니다. 즉 대본을 살아내는 자라는 것입니다. 연기자가 읽는 대본을 연기해 내지 못한다면 그 대본은 그야말로 죽은 텍스트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말이 되어야 할 것이 글로 남아 죽은 상태로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말과 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살리지만 글은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참고. 고후 3:6). 기록된 모든 말, 책이라는 관에 담겨 도서관에 묻혀있는 말들은 모두 죽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책은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덮어버리거나 다른 책을 찾아 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말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전화로 직접 대화하는 것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적당히 회피하고 싶을 때, 말로 하지 않고 문자를 보내거나 이메일로 대신합니다. 그 점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자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말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 속의 세계도 원래 살아있는 음성의 세계였습니다. 하나님도 원래 글이 아니라 말로 자신의 의중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기록되었을 때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목소리, 음색, 음조, 주변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 분노와 세세한 기분들, 느낌, 등. 즉 생생하고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박물관에 진열된 박제품이나 화석처럼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독서라는 것도, 심지어 그것이 <성경>의 경우라 해도 마치 공동묘지 비석에 기록된 글씨의 탁본을 뜨는 정도의 경건한 산책에 불과합니다. 기록된 모든 말, 책이라는 관(棺)에 담겨 도서관에 묻혀있는 말들은 모두 죽은 말입니다.
하지만 ‘피터슨’ 목사님은 그것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죽은 말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글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3:6).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기 위해서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靈)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적독서”(lectio divina)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영적독서에 관해서는 많은 책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피터슨’ 목사님의 <이 책을 먹어라>을 읽어보시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행한 설교의 많은 부분도 실은 이 책에서 인용하고 발췌했습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자라갑시다.”
9. 생명의 떡(2)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는 금언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면, 교회는 이 떡을 먹음으로써 건강하게 자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교회가 이 떡을 제대로 먹지 못했거나, 또는 먹었으되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면, 교회는 병이 들거나 무기력해 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무기력증에 걸려있는 수 없이 많은 교회나 교인을 달리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생동감이 넘쳐나며, 건강하게 자라가고 있습니까? 먹는 음식이 우리교회 체질이나 수준에 맞으며, 먹은 음식은 잘 소화해 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어른들이 먹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어른이 유아 용 분유를 먹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강의(36-40절)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아마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가장 어려운 본문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교리문답 책(敎理問答冊)도 아니고, 따라서 <성경>의 특정 한두 구절을 가지고 어떤 신조(信條)나 교리(敎理)를 세울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번째 강론이 포함하고 있는 본문은 신학적으로 매우 예민하고 까다로운 교리들을 이끌어내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리란 오늘날 대부분의 “개혁 교회”(Reformed Church)가 신봉하고 있는 “칼빈의 5대 강령”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강령은 영어의 첫 글자들을 따서 흔히 ‘TULIP’이라 부르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 “5대 강령”의 신조(信條)를 받아들이는 정도나 이해하는 정도에 있어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 강령은 그 자체로써 뿐만 아니라 탄생과 관련한 역사적 배경 또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내용과 역사적 배경 등에 관해서 알아두면 유익할 것입니다.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물론 “칼빈의 5대 강령”이 “칼빈주의”의 전부도 아니며, “칼빈주의”와는 대척점(對蹠點)에는 “아르미안 주의”로 부르는 전혀 상반되는 신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이 우리의 영적 건강과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리라 사료됩니다.
다만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이 상당 부분 “칼빈의 5대 강령”을 지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본문을 묵상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입니다.
전적 타락(全的墮落). 그 첫 번째가 인간의 전적 타락에 관한 것으로서,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는 다른 질이 있어서 그 중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 여기서 무능하다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선언과 그 선언으로부터 어떤 주장이나 신조를 이끌어내는 문제는 분명 별개의 것입니다만, 우선 이 첫 번째 강령의 주장, 즉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 본문은 이곳에서보다는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 세 절은 우선 타락의 문제가 어느 특정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함께”;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타락의 영역은 전 포괄적이며 입체적이라고 말합니다: (1) 윤리․도덕적 타락-“의인은 없나니”; (2) 지적(知的) 타락-“깨닫는 자도 없고”; (3) 의지(意志)의 타락-“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과연 이런 상태를 전적 타락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입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개선을 위한 실 날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로마서>는 이제 전 인류가 아닌 한 개인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 3:13-17)
정말 절망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각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느 하나 온전한 구석이라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런 상태를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고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의지적으로 그대로 두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개선(改善)의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로마서>를 주목해 봅시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8)
바로 여기에 첫 번째 강령의 또 다른 주장, 즉 인간의 무능에 대한 근거가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정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며, 설령 안다 해도 그것을 구하러 나서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도 같은 주장을 펼치고 계시는 것일까? 무리를 향한 그분의 질책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36절). 무리가 기적을 보았으나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 선택. 이처럼 믿음이 인간의 의지적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에게로 나아올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5대 강령”의 두 번째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뜻으로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7절상);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상).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우리의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主權的 選擇)에 의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참고. 29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관한 선언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17장 여러 곳에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동일한 내용을 엿들을 수 있습니다:
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6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 6, 9, 24)
하나님께서 언제 이 사람들을 선택해서 예수님에게 건네주셨을까? <에베소서>는 그 일이 창세전에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상)
이것이 선택의 교리입니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하셨고, 그것은 처음부터 의도되고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오늘 그리스도 안에 나와 여러분이 있고 우리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간 밖에서 행하신 일이므로,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의 의지나 행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이점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즉 우리로 말미암아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안전이 담보되는 곳입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실패나 돌이킴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한 속죄론. 하지만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유기(遺棄)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이점을 명시적으로 강조하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분의 말씀 속에 이점이 암시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한 번 그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7절상);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 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상). 이 말씀의 이면(裏面)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지 않는 자들도 있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도다”(요 10:26);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다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선택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5대 강령”의 세 번째 주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선택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유기가 적극적인 행위였는지 아니면 선택에 따르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로 그렇게 하셨으니 어느 누구도 이의(異義)를 제기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서>의 선언입니다.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4-16, 18)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의 선택이 무조건적이며, 제한적이라고 했으니 그것이 무자비하거나 맹목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선택과 관련해서 여기서 인용한 <에베소서>나 <로마서>의 두 본문에서 배경음악처럼 반복해서 들려오고 있는 것은 “은혜”와, “선물”과, 그리고 “긍휼”입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속성(屬性)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으며, 그야말로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대 강령”의 네 번째 주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는 인간의 의지나 선택을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인간을 마치 아무 생명도 없는 한낱 인형이나 기계 다루듯 합니다. <에베소서>도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말합니다(엡 2:1). 하지만 우리가 이 강령의 첫 번째 주장, 즉 “전적 타락”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 은혜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죽은 자가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인형이나 기계가 무슨 의지(意志)가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어떻게 내 인생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활동하고 있는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나는 그분의 은혜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를 억누르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저 그분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톰슨’(F. Thompson)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천국의 사냥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속 미궁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울음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 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감으로...
성도의 견인. 이제 우리는 다음 세 절에서 강령의 마지막 주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에 관한 주장입니다.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38-40)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이지요. 창세 이전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처음부터 영원한 선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 즉 부활과 함께 누리게 될 생명과 지금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 서로 다르다거나, 상충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성, 즉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으며, 앞으로 올 것이라”는 점을 공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5대 강령”은 많은 논리적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도하는 바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관한 믿음입니다. 우리 또한 그 의도에 따라 이 강령을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10. 생명의 떡(3)-재초청
대화의 기본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들 합니다만, 과연 이 원리를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직업이 선생이자 목사인 나도 늘 끊임없이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이라 남의 이야기를 경청(傾聽)하는 데에는 별로 익숙하지 못합니다. 특히 나의 약점이나 결점을 지적해주는 말에 대해서는 경청은커녕 버럭 화부터 먼저 냅니다. 이 일로 나는 아내와도 자주 다투는 편입니다. “왜 말할 때 좀 웃으며 하지 못하느냐?” “왜 좀 더 부드럽게 말하지 못하느냐?” “설교가 왜 그 모양이냐?” “성경공부 교제를 왜 그렇게 어렵게 만드나?” 등등의 지적을 종종 받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마다 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대뜸 화를 내며 아내를 윽박지릅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싸움으로 번지고, 그 결과 며칠 간 말도 안하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야고보서>는 나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지금 사도 ‘야고보’가 훈계하고 있는 대상은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오늘로 치자면 목사이거나, 장로이거나, 주일학교 교사이거나, 전도사일 것입니다. 사도는 아예 우리가 이런 직분을 갖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사도께서 왜 이러시는 것인가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서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우리더러 종교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것인가요?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사모하라고까지 충고하지 않았습니까(참고. 딤전 3:1)! 선생의 직업이 가르치는 일이라, 가르치려고만 들지 도무지 배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음은 아닐는지요? 예수님 생전에 그분의 설교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대들던 ‘랍비’나 ‘바리새’인 이나 ‘사두개’인 등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유대인 지도자들. 과연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강의도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조심스러운 독자라면 예수님의 두 번째 강론에서 청중이 무리에서 ‘유대’인으로 바뀐 것을 이내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라 함은 ‘유대’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강론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수긍(首肯)이 아니라 “수군거림”입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41절).
여기서 “수군거리다”(gogguvzw, 공귀조)는 동사는 “불평하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들은 당시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였으며(출 15:24),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했고(출 16:2; 17:3), 사막 생활이 어렵다고 불평하였으며(민 11:1),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하였으며(민 14:1-3), 심지어는 매 끼마다 ‘만나’만 내려준다고 불평하기까지 했습니다(민 11:4-6).
<시편>은 이들의 불평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행위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불평도 결국 예수님을 거부하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지요: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이들이 지금 거부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그분의 자기주장, 즉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전적 타락에 대한 증거를 보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는 지금 ‘유대’ 지도자들의 수군거림을 통해서 그들의 철저한 무지와 무능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도저히 희망이 없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요즈음 우리 집 근처 대로변에 큰 현수막이 하나 걸려있습니다.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인데 주최는 경산시 목회자 협의회이며, 행사 내용인 즉은, “경산시 종교 편향 정책 저지를 위한 세미나 및 기도회”랍니다. 나는 경산시가 기독교회에 반하는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알지 못합니다만, 행사의 목적이 나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특정 종교 편향 정책 저지”를 목적으로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이 기도회를 연 사례가 <성경>의 어디에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해 내지 못하겠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경배 드리고, 회개하고, 간구하며, 중보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저지하고, 투쟁하고, 막고, 싸우기 위한 기도랍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어투나 어법들이 살벌하고 적대적으로 느껴지기만 합니다.
불교계는 어떻습니까? 최근 대한불교 조계종은 사찰 문 앞에, “정부 및 한나라 당 국회의원이나 관계자들은 일체 절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으며, 전국 휘하 사찰들에게도 동일한 지침을 내려 보냈습니다. 이유인 즉은 국회에서 소위 말하는 “템플스테이트” 관련 예산이 한나라 당 주도로 2011 년도 예산안에서 몽땅 빠져버렸기 때문이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정부가 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 눈치 살피느라 공공연하게 불교를 탄압한다고 심심찮게 불평하던 불교계가 이번 일로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사찰 문 앞에 걸린 이 현수막 역시 “경산시 종교 편향 정책 저지를 위한 세미나 및 기도회”를 알리는 현수막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너무나 대동소이합니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최근 언론에 “추기경의 궤변”이란 제목으로 그들의 교회 수장(首長)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이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해서, “정부를 편드시는 남모르는 고충이라도 있는지 여쭙고 싶다”고 쓰고 있는가 하면, 북한이 “천안 함”을 폭파하고 연평도를 도발 포격한 것에 대해서 북한을 비난했다 해서, 추기경을 향해서 “수구반공주의자(守舊反共主義者)”라고 쓰고 있으며 그에게 퇴진의 압력까지 넣고 있습니다. 이들 사제단의 성명은 “궤변”이라는 제목부터 섬뜩합니다. 명색이 평신도를 가르치고, 정의를 실천한다는 사제들이 교회의 수장을 향해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은 결코 아닌 것이지요. 북한을 비난하는 추기경이 “수구반공주의자”라 불러 마땅하다면, 그를 그렇게 부르는 자신들이야말로 “수구 종북주의자(守舊從主北義者)”로 불려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제단의 논설 역시 경산 지역 기독교 목회자가 내건 현수막이나, 조계종 총단에서 내건 현수막의 분위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비아냥과 독선과 아집과 무례와 교만 그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같은 카톨릭 교회 평신도인 이회창 선진당 대표가 “그렇게 정의를 구현하고 싶다면 온실 안에서 활개 치며 촛불 시위를 주도하지 말고 광야 같은 북한에 가서 정의를 구현하라”고까지 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이들 현수막이나 논설의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죽이고 낮추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이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와 종교 지도자의 모습뿐입니다. 그것도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위해 존재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스스로 신이 되어버린 종교 말입니다. 아, 정말 우리는 결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재 초청. 예수님은 이들 종교인들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초청의 손길을 뻗고 계십니다. 믿음으로의 초청입니다.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반대했던 것은 예수님의 논리가 아니라, 그분의 신분과 정체였습니다. 그들이 무어라고 말합니까?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논리적으로, 믿음은 믿는 자의 몫이나 책임, 즉 그의 결심이나 헌신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강론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강조입니다.
4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43-46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는 이미 예수님의 두 번째 강론에서도 본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참고. 37절). 이 구절은 위 단락과 내용 상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인간적 결단이나 헌신의 결과가 아니라, 들음의 결과이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참고. 롬 10:17),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며(29절), 그분의 선물인 것입니다(엡 2:8).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초청은 초청이라기보다는 선포이자 명령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지만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은 이와 같은 초청조차도 들리지 않으며, 들어도 반응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유대’인의 결례에 사용했던 물과 물 항아리는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일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잔치에 즐거움을 준 것은 포도주, 즉 기독교인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종교는 또한 거룩한 성전을 추잡한 시장바닥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운 그 성전에 빛으로 들어오셔서, 그 안과 주변에 있던 그 모든 종교적인 사람들과 물건들과 제도들을 회초리로 다 날려버렸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게 만드셨습니다.
종교인은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다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시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11. 생명의 떡(4)-두 가지 만나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라 할지라도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내 선에서 적절히 이해하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와 같은 재량권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표적인 경우를 예로 들자면, 기도의 응답에 관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약속과 그에 대한 나의 기대나 이해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과연 주님의 이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좀 심하게 말하자면 나는 불신에 가까울 정도로 이 약속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내 이야기가 너무 참담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니 내 의지는 믿어야 한다고 나를 설득합니다만, 내 마음은 늘 반신반의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응답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나 기대가 아예 처음부터 없다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오랜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혜의 산물이라는 생각입니다. 보다 현실적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열심히 기도는 했으나 정작 응답받은 기억이 별로 없어 그렇기 때문이라 자위해 봅니다. 간혹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할 만 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원체 가뭄에 콩 나듯 한 것이라 기도의 응답이라기보다는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체험이 쌓이고 쌓여서, 체념하고 포기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나는 “아, 이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구나”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네가 필요한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네게 필요한 것을)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네가 필요할 때)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서 괄호 안의 말은 내가 집어넣은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괄호 안의 말을 빠뜨린 것은 아닐까요? 아니 그게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필요한 것을 구하지,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필요할 때 구하지 필요하지 않는데도 구하는 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건 괜한 말장난이 아닌가!
아니, 잠간! 어쩌면 그렇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혹시 내가 예수님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니까요.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네가 원하는 것을)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네가 원할 때)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어쩌면 그동안 내가 열심히 기도해 왔던 것들이 내가 원하는 것들이 아니었을까? 내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은 아닐까?
광야의 만나.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었다는 “광야의 만나”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 ‘만나’는 이스라엘이 원했던 것일까 필요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광야의 만나”는 조금 전 ‘갈릴리’ 호수 가에서 오천 명이 먹었던 보리떡과 물고기처럼 이스라엘이 원했던 것이었지만 진정으로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이점이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설교의 요지입니다.
대개 철없는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가 원하는 대로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고 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사랑과 관심일 것입니다. 그리고 보호와 격려도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녀가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지도와 편달도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와 편달이라고 했습니다. 지도와 편달에는 훈련과 고통이 따릅니다. 부모도 그렇지만 아이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가정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우리 옛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배운 것은 없어도 본 것은 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대개 가정에서 멋대로 자란 아이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멋대로 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탄합니다. 요즈음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체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 견디지 못해 합니다. 당장 학교로 달려가 항의하고 심하면 교사에 대해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처럼 말입니다. 그도 아들이 술집에서 싸우다 다쳤다 하여 달려가 아들에게 상처를 준 자들에게 보복 주먹질을 해댔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왜 이처럼 개인적이고 전혀 사회성이 없는 아이들이 되었을까? 왜 이처럼 공주와 왕자가 되어버렸을까요? 부모가 자식이 필요로 하는 ‘만나’가 아니라 자식이 원하는 ‘만나’만 먹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요한 음식을 먹지 않고 좋아하는 것만 편식을 하게 되면 육체적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까지 해치고 만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적 미숙아도 이와 같습니다. 필요한 것을 제쳐두고 원하는 것만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도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는 그렇지 못하고,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그랬듯이 먹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양식, 즉 “광야의 만나”만을 쫓아 나섰습니다.
생명의 만나.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생명의 떡”에 대한 주제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8절). 즉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만나’ 즉 “생명의 만나”임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마치 시에서의 종합 반복이나, 음악에서의 “점점 더 세게”와 같은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즉 처음에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했다가, 이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다음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밝히심으로써, 계시의 절정에 이르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특히 이 마지막 계시가 암시하는 바는 십자가에서 그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을 언급하시면서 그분의 죽음을 포함시킨 것은 정말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훌륭한 교사나 모델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며, 그분의 삶을 존경하고 기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라면, 그 모범은 너무나 지고(至高)하여 우리 중 아무도 그분을 따라 갈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미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자신을 “생명의 만나”로 밝히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분의 주장은 요구사항을 담고 있습니다. “생명의 만나”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떡은 먹으라고 있는 것이지, 바라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를 먹어야 합니다. 즉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마귀도 그리스도가 “생명의 만나”인 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를 혐오하고 먹지 않습니다. 이점이 나와 마귀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광야의 만나”를 먹을 것인가 또는 “생명의 만나”를 먹을 것인가는 선택 사항이나 기호(嗜好)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햄릿’이 고백하고 있듯이 “살 것인가 또는 죽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두 만나 이야기>의 핵심 결론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이방인처럼 죽을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12. 생명의 떡(5)-예수님의 살과 피
점입가경(漸入佳境)이란 원래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점점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과 청중의 반응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다만 그 방향이 고사성어(故事成語)에서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즉 그분의 강의가 점점 재미있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으며, 청중은 이해가 아니라 더욱 깊은 오해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강의를 듣는 청중들이 어려워하다 못해 심하게 화를 내며 예수님과 다투기까지 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52절상). 사람들은 잘 모르면 더 알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화를 내며 포기합니다.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은 늘 선생이 잘 가르치지 못한다고 불평을 합니다. 지금 ‘유대’인 청중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라면 무식한 자신을 향해서 겸손하게 화를 내야 할 텐데, 서로 앞을 다투어 예수님에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 옛날 광야에서 그들의 선조들이 ‘모세’와 ‘야훼’ 하나님에게 대들고 항의했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피 속에는 이처럼 “불평과 불신”의 DNA가 심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무지(無知)와 오해를 감추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대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정말 점입가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자의 번뜩이는 해학과 조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소경들을 보라! 자칭 의인들을 보라! 방탕한 동생을 둔 형을 보라!
오늘날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왜 교회에 나갈 수 없는지 수 없이 많은 이유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그 이유들 중에는 교회와 교인들이 의롭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어쩌다 교회의 비리가 언론을 통해서 드러나는 날에는, “그 봐라. 내가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지 이제야 알겠지” 하며 더욱 득의만만해 집니다. <성경>은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데도, 그래도 나만은 예외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고 단죄(斷罪)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살과 피.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청중들이 이토록 화가 난 것입니까? 무슨 국민 윤리 강의를 하셨나요? 정의롭게 사는 길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셨습니까? 왜 사람들이 자기를 본받아 자기처럼 살지 않는지 책망이라도 하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윤리나, 도덕이나, 정의에 대해서 강의하신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태어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 강의하셨습니다. 다시 들어봅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54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절)
바로 이 말씀 때문에 청중이 화가 났던 것입니다. 흡혈귀(吸血鬼)나 짐승이 아니고서야 어찌 인육(人肉)을 먹을 수 있겠으며, 사람의 피를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분노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마치 상대를 조롱하듯 노래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세 절로 이루어진 노래 말입니다. 일 절은 부정문으로, 이 절은 긍정문으로, 그리고 세 번째 절은 대 종합입니다(참고. 53-55절).
사실 이 노래는 “떡과 생수”(35절)에 관한 그동안의 강론을 “살과 피”라는 주제로 더욱 심화 및 발전시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교를 위해서 35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우리는 여기서 한 쌍의 의미 있는 동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다”; “믿다”. 그런데 이들 동사가 이 노래에서 “먹다”와 “마시다”로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에 관한 이미지를 드러냄에 있어, “생명의 떡”에서 “살과 피”로, 그리고 “믿음”에서 “먹고 마심”으로 점차 그 강도를 더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만찬. 수업시간에 산만하지 않은 학생이라면,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후 보게 될 것입니다만, 많은 제자들조차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 가버립니다. “이 말은 어렵도다”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들 제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도 이 강의의 내용을 놓고 설왕설래(說往說來) 많은 논쟁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강론을 “성만찬”(the Sacrament; the Lord's Supper)에 관한 강의로 이해했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과연 그런가 하는 문제는 조금 후 따져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성만찬에 관한 입장만 해도 여러 가지가 알려져 있습니다: (1) 화체설(化体設; Transubstantiation); (2) 공재설(共在設; Consubstantiation); (3) 기념설(記念說; Memorialism); (4) 임재설(臨在說; Presence).
“화체설”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롯하여 영국의 성공회, 그리고 동방정교회 등이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입니다. "화체설“에 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견해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분명하게 설정되었습니다. 현재 서구에 있는 많은 카톨릭 교도들은 이 견해의 일부 주장들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믿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화체설에 따르면 성만찬 시에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실제로 형이상학적인 변화가 발생한다는 교리입니다. 떡과 포도주의 “본질”(substance), 즉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각각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됩니다. 물론 이 때 변화된 것은 본질이지 “속성”(accidents)은 아닙니다. 따라서 떡은 떡의 형태와 성분과 맛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화학적인 성분은 그것이 여전히 떡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만,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살과 피를 자신들 안으로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현대인들은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화체설은 불합리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오늘 우리에게는 생소한 것은 분명합니다. 실은 이 이론은 존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일원론적인 철학 사상, 즉 모든 존재는 본질과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둘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속성 속에 존재한다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중세의 ‘카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받아들였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었습니다.
“공재설”은 주로 ‘루터교회’ 진영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입니다. “화체설”의 입장을 전부 부정하지는 않지만 일부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의 입장과는 달리, 이들 요소는 그대로 있으며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즙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 임재한다는 이론입니다. 마치 불로 달구어진 쇠막대의 경우 쇠의 본질은 불의 본질이 그 안에 침투하여 높은 온도로 가열할 때에도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것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떡과 포도주 외에 몸과 피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념설”은 성만찬에 관한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5, 26). 이 구절에 따르면 성만찬의 목적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증거하는 데에 있다 하겠습니다. “기념설”은 나름대로 일정 부분 진실의 일단을 내포하고 있긴 하나, 성만찬에 주님께서 어떻게 임재하시는 지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데 이론의 약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임재설”(또는 영적 임재설)은 주류 개혁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공식 입장으로서, 성만찬에서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임재 하신다는 이론입니다. 물론 실제 육체적으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합니다. 태양은 하늘에 있지만, 그 온기와 빛이 땅 위에 임재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 하나님의 광채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영적인 교제를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로마서>(8:9-11)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식은 성령에 의한, 오직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성만찬에 관한 네 가지 이론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실은 본문은 성만찬에 대한 강의는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선 성만찬이 제정된 것은 이보다 나중의 일입니다. 그리고 성만찬은 교회를 위한 것이지 불신자들 즉 당시의 청중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목적은 구원을 위한 것이지,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만찬에서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신자(信者)의 성숙과 교제를 위한 것이지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만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유익과 효능.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상징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나 다 같은 상징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상징입니까? 다시 한 번 35절을 읽어봅시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예수님에게로 와서 그분을 믿는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믿음”은 생명현상과도 같습니다.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고, 그리고 성숙해 갑니다. 영적 생명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갑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계속해서 먹고 마신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모든 행위에는 결과나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게임이나 도박이나 마약을 먹고 마신 결과는 재산과, 인격과, 가정과, 인간관계를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의 파괴입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 결과는 그리스도의 체질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꿈과 비전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 꿈과 비전이 내 삶의 목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 꿈이 없다면 나는 사생자이거나, 고아이거나, 이도저도 아니라면 한낱 본능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살아가는 개나 돼지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짐승에게 꿈과 비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돼지에게 돼지답게 살라고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마라고 하셨습니다. 가치 없다는 것이지요. 아깝다는 것이지요.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이지요.
내 꿈은 무엇입니까? 내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있기라도 한 것입니까? 지난해처럼 사는 것입니까? 응답합시다. 그리고 결단합시다.
13. 계시의 결과(1)-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며칠 전 제자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결혼식에 주례사 듣기 위해 오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마치 장터 같은 결혼식장 안 밖의 소란한 분위기 때문에 도무지 주례사를 읽을 기분조차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는 경우라도 가능하면 5 분 안에 짧게 끝낼 수 있도록 원고를 준비해 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나마도 채우지 못하고 2-3 분 정도 읽다가 중간에 대충 끝내버렸습니다. 도저히 더 계속하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에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중간에 졸고 있는 학생, 지겨워하거나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다 싶으면, 나는 강의를 대충 마무리해 버립니다. 계속하고 싶은 열의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에게 최근 새로운 고통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안동 우리 집 교회”에서 <창세기> 공부를 하는 일입니다. 장 전도사님의 요청으로 시작은 했습니다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내가 만든 교재의 내용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대부분 힘들어하고, 그래서 중간에 조는 분들도 속출(續出)합니다. 그래서 나도 웬만한 내용은 다 생략하고 서둘러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이 배우기 싫을 때 으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 꼭 알아야 돼?” <창세기> 공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창조의 날”에 관한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서, 이분들 하시는 말씀은 “그냥 있는 그대로 믿으면 되지, 이것들을 왜 배우고 알아야 돼?”였습니다.
어려운 강의. “생명의 떡”과 “피와 살”에 관한 예수님의 강의도 정말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냥 따라 믿기도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나만큼 미련하셨던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왜 좀 더 재미있고 쉽게 하실 수는 없었을까요? 그러나 그분의 태도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로 일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청중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강의 중간에 들고 일어나 예수님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대들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1-42절);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
잘 모르면 겸손하게 손을 들고 일어나 질문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선생님에게 화를 내며 대들고 있습니까? 화를 내야 한다면 선생님이 아니라 무지한 자기에게다 대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는 알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아닌가요? 알량한 내 지식으로 해박한 선생님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화자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책의 서막에서 여러 차례 예고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11).
계시의 결과는 항상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분리가 그것입니다. 빛에 속한 자라면 고백과 헌신으로 나아오는가 하면, 어두움에 남겨진 자는 회피와 도피를 선택합니다. 본문은 어두움에 남겨진 자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에는 ‘유대’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수군거림” 즉 불평과 불만이었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어려워하는 제자들을 위해 좀 더 쉽게 풀어주셨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어려운 질문으로 제자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1-62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치 고승(高僧)의 선문답(禪問答)을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분이 다시 올라가다니요? 이 무슨 말씀입니까? 자신의 죽음과 승천(昇天)에 관한 말씀일까요? 아직 그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야기의 진행 상 이르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일까?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 봅시다. 극장에서 영화 상영이 다 끝났는데도 극장 측이 관객들로 하여금 떠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다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야기를 결말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시작까지 보는 일은 정말 하품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죽었던 인물들이 다시 살아나고, 해결된 실마리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 드는 등,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버린다면 정말 싱거운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시간 비행기를 타고 과거로 되돌아가서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당시로 되돌아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우주와 인류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만일 예수님께서 태초의 상황, 즉 말씀이 육신이 되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신다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상황으로 영원히 되돌아가버리신다면, 지금 인류의 상황은 어떻게 되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 대해서 <에베소서>는 다음과 같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지금 사도 ‘바울’이 그려주고 있는 이 상황은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나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신다면”, 나 역시 이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마치 지구가 창조 이전의 그 상황,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창 1:2) 그 절망스럽고 끔찍한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도전인 즉은, “그래도 좋으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강의가 어렵다며 불만하고 있을 테냐?”는 도전입니다. “울며불며 사정을 해도 될까 말까 한 판에, 뭐 어렵다고?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뭐 이런 질책이 아닐까요?
육에 속함. 예수님의 강의는 정말 어려웠을까요?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고 예수님께서 진단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진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63절).
제자들이 하나님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고, 볼 수도 있었으며,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심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예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볼 수만 있었다면 하고 말입니다. 한 번은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눅 11:27).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직접 예수님을 낳고, 보고, 길렀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꾸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 사람들의 허(虛)를 찌르는 데는 정말이지 달통한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몰랐습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 다시 어머니 배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3:6).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 때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7).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도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성령께서 그렇게 고백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침례를 받았기 때문도 아니고,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도 아니며,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결과요 은혜의 산물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님의 강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이들이 아직 어둠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여전히 육에 속해있다는 증거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 <성경>은 그저 윤리․도덕경이나 삶의 지침서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내지는 마음의 안식이나 위로를 얻는 장소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내 연구실에 ‘베트남’에서 온 ‘손롱’이라는 유학생이 있습니다. 그는 요즘 성경공부를 통해서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이 생겼습니다. 수시로 나에게 질문을 가지고 옵니다. 한 번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도시 곳곳에 불교 사원이 있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 때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이들 사원에 가서 빌거나 또는 승려들의 조언을 들음으로써 해결을 받곤 했는데, 여기서는 어디로 가면 되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에 가면 된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라면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너는 교회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네가 곧 교회이고 성전이기 때문이다. 네가 성전이라는 말은 네 속에 성령이 계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네는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네. ‘니고데모’처럼 말일세.”
이제 그도 <니고데모 이야기>를 성경공부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실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시라도 그 시기를 앞당기고 싶다는 기대와 소망 가운데, 그를 우리교회로 인도해 올 작정입니다. 우리와 함께 공동체 삶을 통해서 그가 거듭나고, 자라고, 지도자로 성숙하게 하고 싶습니다.
어둠을 사랑함. 제자들이 예수님의 강론을 어려워했던 두 번째 이유는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듣고 싶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듣고 싶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서 ‘요한’ 화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3:19-20)
‘요한’ 화자는 마치 사람들이 바퀴벌레와 같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바퀴벌레의 속성은 빛을 보면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둠이 좋고 더 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자는 이러한 진단에 대해서 이렇게 자기변호를 하고 싶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악하지는 않아. 진리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아, 진리에 우호적이지만 다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려 할 뿐이야.”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요한’ 화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3:21).
진리에는 중간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거부하거나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어 살든지, 또는 거부하든지입니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는 결코 나를 피해가는 법이 없습니다. 기차 건널목 위에 고장 난 채로 서있는 자동차와 그 안에 갇혀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살기 위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차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입니다. 차가 아까워 그 안에 앉아있겠다고 해서 기차가 나를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유기의 예정. 이처럼 선택에는 결과와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사항이 아닐 때에도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이나 “출애굽” 당시 이집트 ‘바로’ 왕의 선택은 그들 자신의 완고한 고집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운명과도 같이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의 강의를 어려워했던 보다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이유도 그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절).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된 유기(遺棄)로 인해서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피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책임은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이 “생명의 떡”에 대해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군거리고 떠나는 많은 제자들과 넓은 길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베드로’의 고백과 헌신을 따르겠습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절)
14. 계시의 결과(2)-너희도 가려느냐?
<성경>은 어떤 점에서 독특한가? <신약>으로부터 두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디모데후서>가 선언하고 있는 바는 <성경>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나 지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 <성경>이 단순한 책이나 죽어있는 “글”(즉 문자)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서막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말씀”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위로나 안식,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하고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히브리서>의 말대로, 읽는 이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적나나(赤裸裸)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쾌하며, 또 두려워지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들을 수시로 만납니다. 조용히 쉬고 싶은 데 불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웃이 나를 짜증나게 합니다. 먹고 싶지도 않은 음식을 억지로 내 숟가락에 얹어주는 아내 때문에 아주 불편하고 귀찮을 때가 많습니다. 어릴 적에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부모님 때문에 화나고 짜증났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겠다고 해 놓고서 도망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한 농부의 큰 아들처럼 말입니다. 이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을 때마다 늘 “예”하고 대답은 합니다만, 실은 한 번도 지시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참고. 마 21:28-32).
<성경>도 그런 점에서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하는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대부분의 청중들과 심지어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군거리고 불평하며 그 자리를 떠난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처음에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몰려들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한 결 같은 반응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였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어려웠단 말인가? 우리는 압니다. 왜 그들이 떠났는지.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합당치 못한 자.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일까요? 눈이 뒤집히는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었고, 그 위에다 긴 설명과 해설까지 덧붙여주었음에도 한사코 떠나는 자를 무슨 수로 도울 수 있겠으며,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일까? 이런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일관되어 보입니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신 것처럼 보입니다. 작은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요구했을 때, 아버지가 그의 안전을 염려하기보다는 그의 자유의사를 존중해서 요구대로 들어준 것처럼 말입니다(참고. 눅 15:11-12). 왜 그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집에 눌러 앉혀두지 않았을까? 우리의 묵상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누가복음>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 주기에 충분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57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57-62)
여기서 예수님의 태도는 심술궂으며, 일관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일관되기는커녕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왜 자신을 따르겠다는 자에게 칭찬과 격려는 고사하고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따르기는 하겠으나 급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고 뒤따라가겠다는 요청을 왜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가족에게 작별 인사할 틈조차 줄 수 없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대답인 즉은 이러한 태도나 자세는 모두 “합당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기드온 이야기>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무리가 ‘기드온’을 따라나섰습니다만, 이들 중 삼백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합당치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어떤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일까? “하나님의 나라”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일까요? 우리는 알지 못하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자신의 강의를 “어렵다”며 떠나가는 무리들과 제자들을 말리지 않았던 것도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상에서도 성공에 이르는 길이 이와 같지 않을까?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차이를 아는 것 말입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된 채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합당한 질문. 이런 예수님께서 태도를 바꾸어 남아있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이 질문은 단순히 합당한 질문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치명적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들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내 말에 동의하느냐?”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소연에 가깝게 들립니다: “너희들은 떠나지 않겠지?” 하지만 이 질문은 강의가 실패로 끝났음을 시인하는 예수님의 자조(自嘲)가 아닙니다. 이 질문은 초청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를 가려내기 위한 초청인 것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서>는 “모두가 범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3: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초청이 필요한 것입니다. 초청이 없다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참으로 합당한 것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은 자 중에는 ‘베드로’가 있었는가 하면, ‘가롯 유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도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반응. 그러므로 누구든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영어 단어에서 “응답”(response)과 “책임”(responsibility)은 같은 어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실 “책임”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핵심 어휘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미성년자나 금치산자(禁治産者)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자들로서, 이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아무런 권리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는 이들을 정상적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참고로 우리 사회는 짐승들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금치산자나, 미성년자나, 짐승이 아닐진대, 내가 취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져야할 책임 중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다면 응답해야 할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의 응답이 즉각적이며, 공개적이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응답처럼 말입니다. 이 장면은 얼마나 극적인지 모르겠습니다. 훗날 그가 보여줄 또 따른 모습, 즉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모습만큼이나 극적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베드로’의 고백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즉흥적이며 감상적인 고백이나 헌신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내심 다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세 가지 위대한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절).
첫째, 예수님 외는 쫓아 따를 만 한 한 사람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보았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예수에 버금가는 그 어떤 사람도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영생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을 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분과의 만남을 계속할수록 확대되고 증가되었다는 데에 대한 확신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을 믿어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원래 “거룩”은 하나님에만 국한해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존재의 본질에 있어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피안의 세계 즉 하나님에게 속한 저 세상에서 온 자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가장 가슴이 찔렸을 텐데도,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남은 자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주님의 말씀에도 아무런 미동(微動)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마귀라고 부르고 있는데도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날 그 자리가 바늘방석과도 같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불편함을 참고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설교의 초청에 대해서 침묵은 금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왔다면, 교회는 벌써 ‘가롯 유다’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배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침묵함으로써, 도피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배신의 싹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담배를 정말 끊기를 원한다면, 끊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하십시오!
토의와 연습
1.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읽고 다음 주제들에 관하여 토의해 봅시다: (1) 기적의 배경; (2) 기적의 동기; (3) 기적으로의 초청; (4) 기적의 의미; (5) 기적의 결과; (6) 표적으로서의 기적.
2. ‘빌립’과 ‘안드레’와 “어린 아이”의 역할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교회가 시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3. 두 기적 이야기는 상호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서도 논의해 봅시다. 두 기적의 핵심 주제를 파악해 봅시다.
4.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5. 이 주제를 통해서 드러나는 구약적 모티브들은 무엇입니까? 아는 바대로 열거하고 논의해 봅시다.
6. “칼빈의 5대 강령”을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이와 대척점에 서있는 “아르미안 주의”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서로를 비교 연구해 봅시다.
7. 두 종류의 ‘만나’에 대해서 소감을 나누어봅시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8. 예수님의 강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여기서 <요한복음> 특유의 이분법적인 모티브가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계시의 결과에 대한 반응으로서, 빛과 어두움의 분리가 그것입니다. 이들 각각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9.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놓고 묵상해 봅시다. ‘베드로’와 ‘유다’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예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베드로’입니까 또는 ‘기롯 유다’입니까? 고백과 간증과 헌신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