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적에 대하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5:36약 9분 분량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기적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正確無誤)한 말씀으로 믿고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이들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대한 신실한 증거가 되어 자신들의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거침돌이 되어 종교에 대한 불신(不信)만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종교란 결국 온갖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지.”
이렇게 볼 때 결국 기적은 두 가지 상반된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보강해주는 통로로, 그리고 불신자에게는 불신을 정당화시켜주는 근거로 기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적에 대해서 두 가지 상충되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즉 기적을 보고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반대로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기적 행하기를 거부하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기적이 이처럼 상충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기적이란 무엇인가? 기적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은 아닌가?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기적에 의한 것이라고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은 기적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기적은 왜 일어나는가? 기적은 과연 유익한가? <성경> 속의 그 많은 기적들이 왜 갑자기 사라져버렸는가? 이제 더 이상의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기적과 과학법칙. 기적은 과연 과학법칙(또는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인가? 논리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수시로 우주에 개입하여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켜야 할 정도라면, 굳이 자연법칙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과학법칙은 오히려 성가신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의 천지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수시로 우주나 인간사에 개입해서 그 항로나 운행을 바꾸어야 할 정도라면 창조는 애초부터 완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논리이지요.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었고, 우주는 마치 잘 만들어진 시계처럼, 그냥 내버려두어도 일련의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운행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적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법칙이 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법칙이란 결국 일상적이고도 반복적인 우리 인류의 경험을 귀납적으로 요약해 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법칙에 의거해서, 어떤 일이 미래에 일어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예측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과학법칙은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그 속성상 언제 일어날지, 그리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설명할 적절한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다 해서 그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일어나지 말라고 명령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바로 여기에 귀납법적인 과학법칙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즉 과학법칙은 윤리∙도덕법과는 그 성격이나 적용범위가 전혀 다릅니다. 윤리∙도덕법은 율법처럼 “처방적”(處方的, prescriptive)입니다. 우리가 약을 처방받을 때, 그 약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 아닙니다. 병이 낫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교통법규도 마찬가지입니다. 윤리∙도덕은 우리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학법칙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법칙은 처방적이 아니라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입니다. 즉 무슨 일이나 현상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인 것이지, 그 일이 일어나야 된다든지 또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든지 하는 등의 규정이나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과학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법칙이나 패러다임을 고안해 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도덕법(moral law)과 자연법(natural law)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해를 위해서 조잡하지만 쉬운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예컨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울창한 숲속에 있는 한 작은 옹달샘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물고기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외부 침입자의 방문을 받은 적도 없이 아주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죽는 날 동안 늘 이렇게 평화는 지속되겠지.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자기 몸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 고요하고 평화롭던 보금자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등반 차 이곳을 찾은 한 어린 아이가 우물 속에 있는 자기를 보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그 돌을 피하면서 본능적으로 외칩니다: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상식과 의사(意思)에 반해서 그 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주장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 일은 적어도 물고기에서 있어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었으며, 그 어린 아이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요?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인격적이며 초월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면, 초자연적인 일은 그의 의지나 의사에 따라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적은 자연법칙의 위반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첨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면 기적이라 부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만, 방금 소개한 이야기는 자연법과 도덕법의 성격이나 적용 범위를 이해하는 데 충분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다 해서 모두 기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신비주의자가 아니라면 일상생활을 늘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적을 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규범 내지는 해석 틀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기적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기존의 과학법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기적으로 분류한다면, ‘헨리 모리스’(H. Morris)의 분류 방식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기적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등급 A 기적; (2) 등급 B 기적.
그의 분류 방식의 근거는 흔히들 가장 보편적인 과학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열역학의 법칙들”(the laws of thermodynamics)이나 ‘뉴턴’의 “힘의 법칙”입니다. 열역학의 법칙에는 세 가지가 알려져 있는데, 이중 처음 두 법칙을 일반적인 언어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역학 제 일 법칙: 이 법칙은 흔히 질량보존의 법칙 또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 전체의 질량이나 에너지는 새롭게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고 완성된 창조로 선언하고 있으니만치, “열역학 제 일 법칙”은 성경적이기도 합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제반 새로운 창조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기적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의 기적; 오병이어(五甁二魚)의 기적; 등.
(2) 열역학 제 이 법칙: 흔히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법칙은 비전문적인 용어를 빌자면, “무질서의 법칙”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모든 자연 현상은 그대로 두면 질서가 무너지고 와해(瓦解)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선언입니다. 이 법칙은 굳이 법칙으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우리 생활주변에서 늘 경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이 이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롭게 지은 집도 오랜 세월 그대로 방치해 두면 낡아 허물어집니다. 병정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그대로 두면 어느새 줄이 흐트러지고 맙니다. 원숭이를 훈련시켜 온갖 재주를 부리게 할 수는 있겠으나, 조금만 그대로 두면 자기 마음대로 해버립니다.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치유와 소생의 기적들이 이 범주에 듭니다: ‘나자로’가 살아난 일;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는 사건; 등.
‘헨리 모리스’ 박사님은 이 두 법칙을 위반하는 모든 기적들을 “등급 A 기적” 또는 “창조의 기적”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들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딱히 이 두 법칙에 위배되지는 않지만, 기적적인 일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수없이 많은 기적들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홍해의 기적”은 오늘날 대한민국 완도(莞島)에서 매년 일어나는 일과 너무 흡사하며, 굳이 초자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등의 과학적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홍해의 사건”을 기적으로 부르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時點) 때문입니다.
즉 “왜, 하필 그 때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화자의 관심사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우연”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많은 일들을 <성경>의 화자는 기적, 즉 하나님의 “필연”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왜, 하필 그 때에?”에 대한 질문을 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헨리 모리스’ 박사님은 이들 기적을 “등급 B의 기적” 또는 “섭리의 기적” 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들 기적의 예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봅시다.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이 질문은 마치 옹달샘의 물고기가 어느 날 샘에 떨어진 돌멩이를 놓고, 그 일이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니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것과 흡사합니다. 자연법칙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귀납법적인 유추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든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처방(prescription)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서술(description)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서술에 입각해서 미래에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과 전망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미국의 “대협곡”(the Grand Canyon)이 형성된 원인을 놓고 자연적인 원인, 즉 오랜 세월에 걸친 침식과 마모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러쉬모어’ 산(Mt. Rushmore) 절벽에 새겨놓은 네 사람의 대통령의 얼굴 즉 “큰 바위 얼굴들”도 동일한 자연적인 과정, 즉 오랜 세월 동안 비와 바람의 풍화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고로 “큰 바위 얼굴들”은 1927-1941년 사이에 초자연적으로, 즉 조각가의 활동에 힘입어 홀연히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큰 바위 얼굴들”을 향해서 자연법칙의 위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어떤 능력이나 이치나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라면, 그분의 의지나 의사에 따라 기존의 법칙들 외에 새로운 현상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원한다면 이들 새로운 일들을 기적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우주의 운행이 이신론자의 주장처럼 이치나 법칙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우주와 세상이 규칙적으로 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와 세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시사(示唆)하는 바는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고 있다면, 자연법칙 또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