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6과
요단강의 기적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3:1-5:1약 62분 분량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5:1)
역사(history)를 흔히 “하나님의 역사”(His story)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점 특히 <성경>의 화자들에게 각별한 것으로서, 이들에게 사실로서의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신학화(神學化) 한 역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모든 현상과 사건에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섭리가 배후에서 작동한 결과입니다. <요단 이야기>(3:1-5:1)도 그 대표적인 경우로서, 화자는 <여호수아서> 1-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시켰던 예의 친숙한 모티브로써 “요단의 기적”에 대한 신학적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참고. 5:1). 이 구절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본문의 핵심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요단 이야기>의 구성적인 원리는 (1) 준비, (2) 도강(渡江), 및 (3) 기념이라는 세 개의 요소가 직선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또 다른 문학적 특징으로서 “반복과 모순”의 패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본문은 많은 역사 비평학자들의 각별한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 대한 문학적 연구 또한 중요한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학과 역사
자료와 편집.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형식상의 특징은 “반복과 모순”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복이란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고, 모순은 사건의 전개가 연대기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등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연대기적 불일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언급들을 차례대로 나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삼일 후에 ‘요단’을 건널 것이라는 언급이 처음으로 있은 후에(1:11), <아합의 고백>에서 두 명의 정탐꾼들이 산속에서 삼일을 유숙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2:22). 그 후 이스라엘은 ‘싯딤’에서 ‘요단’까지 와서 다시 3일을 더 유숙합니다(3:2). 그리고는 다시 성결의식을 위해서 하루를 더 지체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3:5). 물론 이 의식은 실제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참고. 3:6).
다음으로 “반복”과 관련된 내용들을 질문과 함께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요단’강 도강에 관한 언급(3:16; 4:10).
과연 ‘요단’ 강을 건넌 일이 한 번에 걸쳐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인가? 본문은 두 곳(3:17; 4:1)에서 ‘요단’을 건넌 일을 기정사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그러나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요단’을 건넜다는 추가 언급이 4:10-13, 18절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2) 기념비로 세운 돌에 관한 문제.
‘여호수아’는 먼저 열두 지파들로부터 열두 명의 사람들을 선발하라고 명하는데, 선발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3:12). 나중에 ‘요단’을 건넌 후(4:1), ‘여호수아’는 열두 명의 사람들을 선발하라는 두 번째 명령을 받습니다(4:2). 이번에는 그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열두 명으로 하여금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그날 밤에 진을 칠 장소로 옮겨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4:3).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며(4:4-7), 열두 명의 사람들 역시 명령 받은 대로 행동합니다(4:8). 그리고나서 놀랍게도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별도의 명령을 받지 않은 채로 열두 개의 돌들을 ‘요단’ 강 가운데 세웁니다(4:9). 마지막으로 ‘여호수아’는 ‘요단’으로부터 가져온 열두 개의 돌을 ‘길갈’에 세웁니다(4:20). 종합해 보면 돌을 운반할 12명을 선택하는 것에 관한 언급이 두 번(3:12; 4:2), 돌무덤이 있는 장소에 관한 언급이 세 번(4:8, 19, 20), 그리고 돌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교훈이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4:6-7, 21-24).
이렇게 볼 때, 최소한 두 개의 상이한 전승이 혼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 대한 상세한 자료비평적 연구 결과는 Butl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Butler, 41-44쪽.
그리고 각 전승의 강조점이 다소 다르다는 점을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각 전승의 이름을 편의상 <여리고 전승>과 <길갈 전승>으로 명명한다면, 각 전승은 우선 “요단강 도강의 목표 지점”을 달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3:16)와 ‘길갈’(4:19-20). 그리고 각 전승의 절정은 “요단의 기적”에 대한 의미를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물의 흐름을 끊는 언약궤와 기념 돌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4:6-7), 다른 하나는 마른 땅과 그 마른 땅을 건너는 제사장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4:21-23). 언약궤를 강조하고 있는 전자의 전승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문학적인 상수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떠나다”(출발하다); “(물이) 끊어지다”(3:2-4, 6, 9, 11-14, 16; 4:4-7, 11). 한편 제사장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후자의 전승에서 빈번한 어휘들을 다음과 같습니다: (1) “나오다”; “서다”; “올라오다”; “마른 땅”; “물가”(3:1, 7, 8-10, 15-16, 17; 4:1-3, 8, 15-22).
<여리고 전승>의 핵심으로 추측되는 언약궤나 돌무덤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실물 그대로 각각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를 위한 “제단”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들은 단순하게 상징적인 기념물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의 공동체는 자신들을 위한 교육적 목적으로 이들의 의미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려주고 있는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약궤에 대한 명칭이 아주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1) “궤”(3:15; 4:10); (2) “언약궤”(3:6; 4:9); (3) “증거궤”(4:16); (4) “여호와의 궤”(4:11); (5) “여호와의 언약궤”(3:3, 6, 8, 14, 17); (6) “주 여호와의 궤”(4:5); (7) “온 땅의 주 여호와의 언약궤”(3:11, 13; 4:18). 이외에도 다양한 증거들이 있습니다만, 본문 주석 시에 그 일부를 다루고자 합니다.
한편 <길갈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마른 땅”(3:17; 4:22)은 과거의 전승 즉 <출애굽>의 <홍해 이야기>(출 14-15)에 등장한 바 있는 동일한 모티브와 결합하여 당대의 공동체를 위한 교훈으로 새롭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길갈 전승>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은 예배와 제의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당연히 강조하고 있는 바도 <시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신앙고백 입니다.
단락과 범위. 이러한 역사 비평적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요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이야기 단위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모티브나 구조적 통일성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반복되고 있는 모티브는 1-2장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것들입니다: (1) “건너다”(rb'[, 아바르)(최소 22회 등장); (2) “두려워하지 말라”; (3) “리더십”; (4) “일치와 연합.” 그리고 본문의 구조적 통일성에 관한 근거는 3-4장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단락 구분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핵심 주제는 <요단의 기적>으로 결정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 이는 두 장을 관통하는 중심 되는 사건이 다름 아닌 “요단강 도강”이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바로 건널 새”(3:16).
이 구절은 이야기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으로서, 이 구절을 기점으로 앞부분은 “요단의 기적” 자체에 대한 서술을 담고 있고, 뒷부분은 기적의 의미에 대한 강론 내지는 설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성은 직선적이며 진행적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에 따라 본문을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제 1단락(3:1-7): 요단 앞에 서라
(2) 제 2단락(3:8-17): 요단에 들어서라
(3) 제 3단락(4:1-5:1): 요단을 기념하라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의 형식과 구조가 흥미롭습니다. 이 단락은 형식에 있어 1장과 아주 유사합니다. 특히 명령체계 즉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고 수행되는 방식과 순서가 두 장이 아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형식을 이 단락에서 두 번씩이나 관찰할 수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4:1) ⇒ “여호수아가 열두 사람을 불러”(4:4) ⇒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대로”(4:18);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4:15) ⇒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4:17) ⇒ “제사장들이”(4:18).
세 번째 단락의 구조는 이처럼 두 번의 반복되는 패턴에 따라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도표 참조). 도표에서 보듯이, 각 단락은 <요단의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각기 다른 측면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전반부가 ‘여호수아’에게 촉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반부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각 부분의 핵심 구절을 읽어봄으로써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부분이 모두 <요단의 기적>에 대한 의미와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이라면 두 부분의 절정과 핵심 주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단락의 이와 같은 구조적 특징은 두 번째의 그것과도 놀랍게도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여호수아 봉우리(3:7): 기적의 일차적 목표
(2) 야훼 봉우리(3:16): 기적의 궁극적 목적
(3) 대결론(3:17)
이렇게 볼 때 화자는 이곳 세 번째 단락에서 <요단강 기적>을 단순히 반복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4장은 이야기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일종의 반절정(反絶頂)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가진 모든 전승들을 결합시켜,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주제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입니다. 물론 세 번째 단락에서 독특하게 마치 “캠브리아 대폭발”을 보듯이 새로운 표현이나 강조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요단 가운데 즉 제사장들의 발이 선 그곳에”(4:3상, 5상, 8후, 9상, 10후, 18상). 그러나 이 역시 동일한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여호수아’가 이 단락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에 두 번째로 “물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1) 홍해; (2) ‘요단’ 강. 홍해와 ‘요단’ 강의 차이는 전자가 출구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입구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다는 이스라엘이 결코 돌아가서는 안 되는 곳이며, 강은 목표를 향하여 반드시 건너야 하는 곳입니다. 바다에서는 배후에 원수가 있었으나, 강에서는 앞에 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강을 건널 때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책임은 놀랍게도 지극히 미미한 것입니다. 단순히 두 발을 강에 내딛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3:5)
여기서 순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먼저 스스로를 성결하게 해야만 합니다. 이 순서는 이스라엘이 ‘아이’성 공격에 실패한 후에도 다시 보게 됩니다:
13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14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7:13-14)
역시 같은 내용이 <민수기>의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민 11:18)
마찬가지로 ‘욥’도 그의 자녀들에게 늘 성결하게 하라는 지시를 보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욥 1:5). 그리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현현을 준비하시는 중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계십니다:
10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11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출 19:10-11)
이 구절은 옷을 세탁하고 일상적인 성관계를 금지하는 행동이 성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위 모든 구절들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 내용은 동일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적이 가능하게 되려면 백성의 성별(聖別)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 준비: 요단 앞에 서라(3:1-7)
첫 번째 단락의 핵심은 “기적을 기대하고 준비하라”입니다. 당연히 본문은 기적에 대한 암시들로 가득 차 있으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건너지 아니하고(1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라”(4절); “야훼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5절후);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7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싯딤’에서 출발하여 ‘요단’까지 당도하는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3:1)
화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도자 ‘여호수아’에 대한 강조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들, 즉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은”(1절상). ‘여호수아’의 지시와 행동에 따라 이스라엘 전체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단락의 주인공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매 구절마다 ‘여호수아’ 리더십과 관련하여 그의 인격과 권위를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이를 요약함으로써, 절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호수아’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총사령관; (2) 예언자; (3) 하나님의 대언자. 물론 혹자는 이를 두고 다양한 전승이 결합한 증거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여호수아’의 즉각적인 반응과 순종입니다. 그는 두 명의 정탐꾼이 돌아오자 말자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여, 목표지점인 ‘요단’ 강까지 내달려 왔습니다. 이 구절은 분명 <라합 이야기>을 연상시켜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기회의 문을 열어 주셨을 때, 그는 지체치 않고 순종하여,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대 이 강은 홍수 시기가 아니라면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장애 요인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단’은 지리적인 장애라기보다는 신앙적인 장애물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에서 탈출하여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장애입니다. 이 강을 신앙적인 장애로 규정하는 이유는 이 강은 봄철 홍수 때가 아니면 범람하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에서 주목을 끄는 단어는 “건너다”(rb'[, 아바르)입니다. 이 단어는 앞으로 무려 22회에 걸쳐 마치 합창하듯 본문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텐데, 여기서 처음 등장함으로써 서곡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두 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다소 지체시키는 내용과 표현입니다. 고조되던 긴장도 다소 완화되고 있습니다:
2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3:2-3)
우선 “관리”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뜻밖입니다.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들은 ‘여호수아’가 진군 명령을 내릴 때, ‘여호수아’ 다음으로 지휘 계통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1:10). 이곳에서 이들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최고 지도자의 계획과 명령이 어김없이 실행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함입니다.
또 한 가지 뜻밖의 등장은 제사장과 언약궤입니다. 이 역시 화자의 의도를 놓칠 수 없습니다. 물론 전승에 따라 그 의미나 강조가 다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언약궤에 대한 다양한 전승과 의미의 변화에 대해서는 Butl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ibid, 44-45쪽.
이 전쟁은 분명 “하나님의 전쟁”(하렘)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두 번째 ‘모세’인 ‘여호수아’와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론인 즉은 백성들이 “관리”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님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은 계속됩니다. 이번에는 한 번은 관리들에게, 또 한 번은 일반 백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3:4-5)
그러나 화자의 핵심은 명령을 듣는 청중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령의 내용에 있습니다: (1) “너무 가까이서 따르지 말라”; (2) “스스로 성결케 하라.” 특히 첫 번째 명령 속에 등장하는 “이천 규빗”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습니다. 이 거리는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 “이천 규빗”이 ‘레위’의 경작지였습니다(민 35:4).
다소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이 두 명령은 실은 동일한 화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하나의 명령으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전쟁의 성격에 관한 강조로 볼 수 있는데,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전쟁은 단순히 정복 전쟁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두 명령의 의미를 분석해 보자면,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그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별(聖別)에 대한 강조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남은 일은 행동 개시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3:6)
마침내 ‘여호수아’는 오래 기다려 왔던 진군 명령을 내리고, 제사장들은 이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모세’에 이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며, ‘여호수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1:2)이 실현을 보고 있는 순간입니다. 마침내 ‘야훼’ 하나님께서 이 단락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3:7)
이 말씀은 새로운 계시라기보다는 이미 1장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약속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참고. 1:5), 이 단락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이스라엘이 목격하게 될 <요단의 기적>의 일차적인 목표가 있다면 ‘여호수아’가 제 2의 ‘모세’임을 보이는데 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의 권위는 그가 이루어 놓은 그 어떠한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있다면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이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고 따랐던 ‘여호수아’의 순종 때문일 것입니다.
2. 행동: 요단에 들어서라(3:8-17)
정복을 위한 “도강”(渡江)은 준비에 이어 행동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요단에 들어서라”는 곧 “기적을 체험하라”는 메시지와 같습니다. 이곳 두 번째 단락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서 ‘여호수아’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강조점이 사뭇 달라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즉 그는 이곳에서 “예언자” 또는 “대언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의 주인공이 ‘여호수아’였다면, 두 번째 단락의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각 단락은 7절과 16절을 절정으로 삼으면서 두 주인공을 한껏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7절에서 “여호수아의 봉우리”를, 그리고 16절에서 “야훼의 봉우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이스라엘 그리고 ‘여호수아’는 조연들입니다. 제사장은 언약궤를 매고 서 있고(8절), 이스라엘은 듣고 있으며(9절), ‘여호수아’는 신탁(神託)을 전하고 있습니다(10절).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7절과 8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제사장들을 위한 훈령입니다:
8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바야흐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하실 텐데,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긴장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언약궤를 매고 ‘요단’ 강가에 서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는지라 긴장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13절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8절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와 예견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불러 모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9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3:9-10)
바야흐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보이실 일은 그분의 능력과 인격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는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가나안’의 주민들을 내쫓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경>은 ‘가나안’의 주민들과 관련해서, 그 이름이나 순서 및 목록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창 15:19-21; 출 3:17; 23:28; 신 7:1 등). 이곳에서는 일곱 족속을 거명하고 있는데, 아마도 숫자 일곱이 상징하는 완전함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가나안의 모든 족속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베여있다 할 것입니다. 참고로, 여섯 족속만을 거명하고 있는 곳도 있는가 하면(수 9:1; 출 3:17), 열 족속을 소개하기도 합니다(창 15:19-21). ‘가나안’은 이 지역 주민 전체를 대표하기도 하고, 한 족속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지중해에 연하여 살고 있는 한 특정 족속을 지칭하고 있습니다(5:1; 민 13:29). 또한 ‘가나안’은 본문에서처럼 이 지역 원주민들을 족속별로 거명할 때, 가장 앞에 등장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헷’ 족속은 ‘히위’ 족에 속한 더 작은 무리의 씨족으로 보이며(9:7; 11:19), 이들은 ‘세겜’에 살기도 했습니다(창 34:2; 수 9:7; 11:3). ‘브리스’ 족속은 족장 시대 당시 ‘팔레스타인’의 중앙 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창 13:7; 출 3:8, 17; 23:23), <성경>외는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르가스’ 족속은 ‘갈릴리 호수’ 근처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추정되나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아모리’ 족속 역시 ‘가나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가나안’ 주민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며(24:15; 창 15:16; 삿 1:34-35), ‘가나안’의 산악 지역에 살았던 한 족속을 나타내기도 합니다(민 13:29; 신 1:7). ‘여부스’ 족속은 <여호수아>에서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면(11:3), 항상 ‘가나안’ 원주민 목록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모리’ 족속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산악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11:3; 민 13:29). 이들은 또한 ‘예루살렘’ 지역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삿 1:21; 19:10-11; 삼하 5:6).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을 쫓아내실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것으로써 너희가 알리라”고만 말씀하십니다. 3-4장의 핵심 사건이 될 <요단의 기적>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 있습니다. 화자는 이야기 서술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추면서 독자의 궁금증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소위 <요단의 기적>이 어떤 형태로 일어나든 그것은 단순한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표적”(sign)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빈도에 있어 기적으로 불러 마땅할 “초자연적 사건”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가치중립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기적들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빈도”나 “규모” 외에도 “목적”을 가져야 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게 될”([d'y, 야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 지식은 단순히 머리 지식이 아니라, 체험을 통한 습득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될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방 민족의 신들, 즉 행동할 수 없고 구원할 수 없는 신들과는 구별되어야 마땅합니다(시 96:5; 115:3-7). 이들 신들은 단순히 “우상”이거나(레 19:4) 또는 “허무한 것”(신 32:21; 렘 8:19)일 뿐입니다. 이 때 “허무한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발림’(lb<h)으로서, “증기”, “숨”, “허무”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곧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그 분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바로 그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언약궤로 초점을 옮기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3:11)
여기서 ‘여호수아’의 요점은 분명합니다만, 언약궤와 관련하여 “온 땅의 주의 언약궤”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의 요지를 풀어 보자면,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계시며, “온 땅의 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땅”($r,a, 에레츠)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땅”; “지구.” 본문에서는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 땅의 주”로 부르는 것을 놓고 특별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참고. 미 4:13; 슥 4:14; 6:5; 시 97:5; 114:7), 정확히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한 실정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상황에서 볼 때, 약속의 땅에 대한 정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나름대로 화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이어지는 지시는 다소 뜻밖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3:12)
전후 문맥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 구절이 원래 속해 있던 전승이나 그 기능에 대해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신탁의 한 부분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지금 <요단의 기적>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이들을 독려하고 준비시키는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하게 요구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곳에 삽입하고 있는 화자의 의도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화자의 의도인 즉은 이 구절 역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신탁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화자는 세 번째 단락에서 이들 열두 명을 언약궤와 보다 구체적으로 연관 짓고 있습니다(참고. 4:2).
이야기는 13절에서 결정적인 절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마침내 앞으로 무슨 기적이 일어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3:13)
이 구절과 함께 나머지 14-16절의 ‘히브리’ 문장은 구문(構文) 상 매우 길고도 복잡한 문장입니다. 이처럼 여러 개의 문장을 일렬로 나열시킴으로써, 각 문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일련의 현상이나 행위들이 결국 하나의 목표 지점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화자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현상은 16절에서 그리고 있는 바, 거대한 물기둥이 쌓여 멈추어 있는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서 화자는 13-16절 사이에서 무려 열 번에 걸쳐 사해(死海)로 향해 흘러들어가는 “요단의 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이 시시각각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마치 생중계를 하듯 긴박감 넘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4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 가니라. 15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14-16절)
화자의 의도에 따라 이 부분을 다시 재구성해보면 <요단의 기적>이 일어나기까지의 긴박감을 보다 현실감 있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13절);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일어나 쌓이고...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바로 건널 새”(16절). 이 장면을 음악에 비유하자면 “점점 더 세게”가 될 것이며, 16절의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는 절정의 스타카토가 될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장면의 관심의 초점은 “요단의 물”입니다. 두 번째 단락이 서두에서 ‘여호수아’의 사역과 지도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면, 이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적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보다 앞서 가시면서 물의 기적을 통해서 과연 “온 땅의 주”이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요단의 기적>이 단순히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15절상).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신 때가 “수확기의 홍수 철”(봄철 어느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름 철 기근이 한참일 때, 즉 ‘요단’의 물이 거의 없을 때 물의 흐름을 중단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봄철에 고지대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강 수면이 불어났을 때 물의 흐름을 중단시키셨다는 것입니다(아래 두 사진은 시기에 따라 요단의 물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정보는 전략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 홍수 철에 강물이 불어나게 되면 강 건너편의 주민들이 경계심을 덜 갖게 만들기 때문에 침공이 용이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임을 강변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화자는 친절하게도 추가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4:18)
기적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로 “규모”나 “빈도” 외에도 “시점” 즉 타이밍을 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위에서 밝힌 이유 외에도 17절에서 다시 한 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3:17)
모든 백성이 강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단의 기적>에 대한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 “섭리의 기적” 그 자체에 대한 변론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화자는 이어지는 4장에서 다시 한 번 <요단의 기적>에 대해서 언급하게 될 것이지만, 다른 의도에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3. 교훈: 요단을 기념하라(4:1-5:1)
세 번째 단락의 핵심은 앞선 두 단락과는 사뭇 다릅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요단의 기적>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사건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 사건의 의미와 교훈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두 번의 반복되는 질문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4:6후, 21후).
그러나 “기념 돌”들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동일한 두 번의 질문에 대해서 화자는 각기 다른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단락과 구조도 이들 대답을 축으로 두 개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각 단락은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신탁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마지막은 위 질문에 대한 각기 다른 대답을 결말과 절정으로 삼고 있음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도표 참조).
기념 1(1-14절). 세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신탁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4:1-3)
그러나 이것은 그 형식에 있어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자신의 위대한 계획과 활동을 말씀하셨습니다. 기적은 실현되었고 백성들은 이를 통해서 ‘여호수아’의 위대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패턴의 신탁은 한 때는 이스라엘 전체 또는 일단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그 대상은 ‘여호수아’ 혼자뿐입니다.
<요단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여 열두 지파에서 각기 한 사람씩 뽑아서 제사장들이 서 있던 ‘요단’강 “가운데”에서 열두 개의 돌을 가져와 “기념 돌”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단’강 “가운데”는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만(4:3, 5, 8, 9, 10, 18), 3장에서는 17절을 제외한 나머지 곳에서 모두 이 장소가 강 한가운데가 아니라 “물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8, 15). 기념 돌을 세운 장소 또한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은 이스라엘이 “유숙하는 곳”이라고 했다가(4:8), 또 한 번은 제사장들이 서 있던 ‘요단’강 가운데라고 쓰고 있습니다(4:9).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앞에서 설명한대로 자료비평적 접근이 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최종 본문 속에 두 개의 전승 즉 <여리고 전승>과 <길갈 전승>이 혼재해 있어 나름대로 상이한 관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념 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일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념 돌”을 두 장소에 세웠는지, 아니면 한 곳에 세웠는지, 그리고 한 번이라면 어디에 세웠는지 등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여호수아’의 행동과 관련해서 보여주고 있는 다음의 정보입니다:
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준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 5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6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7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 하니라(4:4-7)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순종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 모델을 자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화자는 그 이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여호수아’를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자요, ‘모세’처럼 이스라엘의 교사의 원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6-7절의 표현은 자식과 아비 사이에 오가는 질문과 답변의 형식을 갖춘 교육용 자료로서, 이러한 패턴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출 12:26-27; 13:14-15; 신 6:20-21). 아마도 이스라엘의 성인들은 출애굽 등과 같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후대의 자녀들에게 이를 가르치기 위한 예배용 교재로서 이러한 패턴을 채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하여 교육 체계의 근간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며, 후대의 제사장들 사이에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육 내용은 <요단의 기적>에 한정될 것이며, 하나님의 기적으로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에 대한 언급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지시에 대해서 백성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의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에 두었더라(4:8)
역시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단락에서 화자가 보여주고 싶은 신학적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과 그분의 백성을 위해서 한 지도자를 선택하셨는데, 그는 하나님께 대해서 순종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순종을 이끌어내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다소 어색한 삽입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여호수아’의 연설이 아니라 행동이 돋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4:9)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제사장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건국의 아버지로 기념하여 높이고 있습니다. ‘요단’ 한 가운데에서 직접 제사장들을 영원히 기념할 돌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제사장들의 행위를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구절은 나름대로의 신학적 관점을 지닌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제사장의 역할과 지위에 관한 것으로서, 그들에게 영원한 기념비적인 지위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 전승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내에서 직분을 가진 각 방면의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나름대로의 권위를 부여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다음 절은 이 단락의 절정이자, 1-9절 사이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10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사 백성에게 말하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 서 있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11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4:10-11)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두 번째 단락(3:17-4:1)의 절정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표현을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이 건넜다.” <요단의 기적>에 대한 반복적 서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이 구절은 앞서 진술한 그 모든 내용에 대한 절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여호수아’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강을 건너는 동안 물속에 서 있으라고 명령한 바 있습니다(3:8). 그리고 제사장들은 그 명령에 순종했다고 이 구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인 즉은 이스라엘이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명령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모세’가 이전에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명령한 것을 지켜 순종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계명을 따랐을 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의 임재 하에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2-13절은 적어도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다시 반 절정을 향한 일종의 사족(蛇足) 같은 것입니다:
12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 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13무장한 사만 명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4:12-13)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대한 언급이 느닷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관한 언급은 1:12-18에서 한 번 등장한 바 있습니다만, 화자는 왜 이곳에서 이들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일치와 연합에 관한 모티브를 위한 것으로서, 이들 지파는 자신들의 약속을 다 지켰다는 점입니다(참고. 1:16-18). 둘째, 리더십에 관한 모티브로서 ‘여호수아’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13절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12절을 다시 한 번 요약하는데 그치는 것일까? 그러나 이 구절은 12절에는 없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어 단순히 12절에 대한 반복으로 보기는 어려움 점이 있습니다. 13절의 기능과 관련해서 두 가지 정도를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나는 자료적인 측면과 관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 내에서의 신학적 기능과 관련한 것입니다. 우선 화자가 13절에서 구사하고 있는 일련의 어휘들로 미루어 볼 때, 이 구절은 <민수기> 32장 특히 32:27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대한 또 다른 전승에 속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문법적으로 볼 때, 12절과 13절은 일종의 동등 접속사로 연결되고 있어 13절이 12절에 대한 설명이나 요약이 아니라, 앞선 이야기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 보아야 함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13절에 따르면 “무장 군인 사만 명”이 ‘여리고’를 향하여 진군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구절은 논리적으로 5장의 이야기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13절은 ‘요단’강 도강 이야기를 담은 초기 전승의 결론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4장의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기능과 관련해서 13절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다름 아닌 리더십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이 될 것입니다.
14절에서 마침내 4장 전반부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4:14)
결론은 분명합니다. <요단의 기적>의 일차적인 목표는 ‘여호수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홍해의 기적>이 ‘모세’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반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여호수아에게로 하달되었고(1-3절), ‘여호수아’는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이 명령을 수행하도록 독려하고 지시했습니다(4-8절). 그 결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고(10절), 이 일에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도 기꺼이 순종했으며(12-13절),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두 번째 ‘모세’로 세우셨습니다.
기념 2(15-24절). ‘여호수아’의 역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이야기가 만일 14절에서 끝난다면, 아직 절반 밖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4장의 나머지 절반은 또 다른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15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17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18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에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4:15-18)
우리는 여기서 동일한 명령 체계가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고,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지시하고, 다시 백성들의 순종을 이끌어 내는 패턴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이곳에서도 순종의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조점은 기적 그 자체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화자의 초점은 하나님의 기적에서 제의적인 관점으로 다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원래의 제사장 계열의 관심사를 드러내고 있는 <길갈전승>에서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20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4:19-20)
도강(渡江)의 지점을 ‘길갈’로 부르고 있는 점이나, 도강의 시기를 농사력(農事曆)인 4월이 아니라 종교력(宗敎曆)인 정월 십일로 부르고 있는 점, 그리고 12 개의 기념 돌에 관한 언급 등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들 용어의 사용과 관련해서 다음 구절은 흥미로운 비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每人이 어린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출 12:3). 두 본문에서 “정월 십일”이 특별히 눈에 띕니다.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요단의 기적>의 신학적 의미를 <홍해의 기적>과 같은 선상에 두고 있습니다. ‘요단’ 도강의 시기는 “출애굽”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홍수 철인 4월이 아니라, 신앙적인 신년 즉 새해라는 말입니다. 새 출발에 대한 강조입니다. 마치 한국의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새 출발의 시기는 신년 정월이 아니라 새 학기의 시작 3월이듯이 말입니다.
화자의 제의적인 관심사는 곧바로 후대를 위한 교훈 즉 교육적인 관심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1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22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4:21-22)
여기서 밝히고 있는 도강의 의미는 4장의 전반부에서도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만(4:6-7), 이번에는 강조점이 다른 것이, “물이 갈라지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른 땅”에 대한 강조가 그것입니다. “마른 땅”에 대한 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단의 마른 땅”을 “홍해의 마른 땅”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젠가 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4:23)
이처럼 현재 공동체가 경험하고 있는 사건을 이전 시대의 공동체가 경험했던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시공을 뛰어넘는 공동체적인 일치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가령 두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해서 세대를 뛰어넘는 공동체적인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마른 요단강을 건넜는가? 우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덕분에 마른 홍해를 건넜지! 우리는 결국 하나이구나!”
이제 드디어 <요단의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천황봉인 24절에 도달하게 됩니다(23-24절은 문법적으로 22절에 종속절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4:24)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열방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적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온 땅의 주”로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자신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지, 이방인을 향한 것이 아닐진대, 이스라엘의 적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리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들 열방의 적들을 가차 없이 진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피날레. 마지막으로 5:1은 4:24절에 대한 결과이거나 또는 이야기 전체의 대결론(大結論)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5:1)
<요단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이전에 <홍해의 기적>을 듣고 그들이 보였던 반응과 동일한 것입니다.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듣고 있는 소식은 조금 전 ‘여호수아’가 ‘라합’을 통해서 정탐꾼으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것입니다. 동일한 모티브의 등장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얻었다”라는 선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가 성취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화자가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서 말하고 싶은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바를 주셨다면, 어찌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지 않겠습니까?”
교훈 및 적용
‘존 호건’은 [과학의 종말]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일 과학자들이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알아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을 알아버린 후의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물음 속에는, 과학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과학의 급속한 종말을 가져올 것이고(질주를 더할수록 목표지점에 빨리 도달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지식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일종의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과연 지식이 더하면 외경심이 사라지는 것일까? <잠언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또는 시작)”이라고 말합니다(잠 1:7).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만(시 14:1), 더욱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롬 1:21) 자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그런데 그의 비극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운명까지도 훤히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경배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여호수아>의 반복되는 모티브 중의 하나는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수 1:6)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진실로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마태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그러나 <여호수아서>는 다르게 답하고 있습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를 두려워하라. 그것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를 두려워함이 없이는 나를 두려워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 준비: 요단 앞에 서라(3:1-7)
‘여호수아’는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어떤 일이 날까? 기적입니다. 이들이 기적을 체험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기적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하라”입니다. 당연히 본문은 기적에 대한 암시들로 가득 차 있으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건너지 아니하고(1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라”(4절); “야훼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5절후);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7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싯딤’에서 출발하여 ‘요단’까지 당도하는 것입니다(1절). 사실 ‘요단’은 지리적인 장애라기보다는 신앙적인 장애물입니다. 이 장애물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급복해야 할 마지막 장애입니다. 그러나 이 장애는 실은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큰 것이 아닌데도 크게 느껴지는 그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강은 봄철 홍수 때가 아니면 범람하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싯딤’을 떠나 ‘요단’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팔이 짧아서 능히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종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질문을 하지 않는 학생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겠으니 도와달라는 학생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부른 자에게 자꾸 음식을 권할 수 없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주님께서도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받기를 싫어하는 자에게 억지로 떠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님께서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죄인을 향한 선포이지. 구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을 ‘요단’ 앞에 서게 할 것인가? 누가 이 기적을 준비하도록 할 것인가?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입니다. 화자는 여기서 ‘여호수아’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권위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들, 즉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은”(1절상). ‘여호수아’의 지시와 행동에 따라 이스라엘 전체가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단락의 주인공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매 구절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과 관련하여 그의 인격과 권위를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이를 요약함으로써, 절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3:7).
지도자나 정부가 영이 서지 않으면 국가나 공동체가 어떻게 되는지를 현재 우리나라의 난맥상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향하여 쥐새끼, 미국 대통령의 강아지, 도둑놈 등 온갖 조롱과 욕설을 퍼부어도 아무도 뭐라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좌익 폭도들은 국가 공권력을 향해서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경찰차를 불 지르고, 시도 때도 없이 거리를 장악하여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해도, 경찰은 속수무책입니다. 이런 자들을 국가 공영 방송들은 오히려 경찰의 과격 진압만을 탓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 난국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일까요?
화자가 ‘여호수아’와 관련해서 보여주고 싶은 두 번째 강조점은 그의 즉각적인 반응과 순종입니다. 무릇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려는 자는 그보다 위의 권위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점 ‘여호수아’는 완벽한 역할 모델입니다. 그는 두 명의 정탐꾼이 돌아오자 말자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 즉각적으로 행동을 개시하여, 목표지점인 ‘요단’ 강까지 내달려 왔습니다. 이 구절은 분명 <라합 이야기>을 연상시켜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라합’의 고백을 통해서 기회의 문을 열어 주셨을 때, 그는 지체치 않고 순종하여,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 앞에 서기 위해서 이 백성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준비만은 아닙니다. 성결이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뜻밖에 제사장과 언약궤를 언급하고 있는 장면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명령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너무 가까이서 따르지 말라”; (2) “스스로 성결케 하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소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이 두 명령은 실은 동일한 화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하나의 명령으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전쟁의 성격에 관한 강조로 볼 수 있는데,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전쟁은 단순히 정복 전쟁이 아니라, 심판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두 명령의 의미를 분석해 보자면,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이 거룩하니 그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별(聖別)에 대한 강조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남은 일은 행동 개시입니다. 마침내 ‘여호수아’는 오래 기다려 왔던 진군 명령을 내리고, 제사장들은 이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3:6). ‘모세’에 이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며, ‘여호수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1:2)이 실현을 보고 있는 순간입니다. 마침내 ‘야훼’ 하나님께서 이 단락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말씀하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3:7).
이 말씀은 새로운 계시라기보다는 이미 1장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약속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참고. 1:5), 이 단락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이스라엘이 목격하게 될 <요단의 기적>의 일차적인 목표가 있다면 ‘여호수아’가 두 번째 ‘모세’임을 보이는데 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의 권위는 그가 이루어 놓은 그 어떠한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있다면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이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고 따랐던 ‘여호수아’의 순종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무슨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를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2. 행동: 요단에 들어서라(3:8-17)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 섰을 때, ‘모세’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이어서 하나님께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고 물이 갈라져 바다가 바른 땅이 되어 이스라엘이 그 가운데를 걸어갔습니다(출 14:21-22).
“홍해의 기적”이 “요단의 기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상황이 우선 다릅니다. 예컨대, 이전에는 적들이 이스라엘을 뒤쫓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적들이 그들의 앞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도록 했고, ‘모세’가 그대로 행했을 때 바다 물이 갈라져 마른 땅이 드러나고, 갈라진 물은 두 개의 물기둥을 이루었으며, 이스라엘은 그 사이를 건너갔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로 하여금 먼저 요단에 들어서라고 명령하십니다. 물이 흐르고 있는 강으로 들어가는 것과 물이 갈라진 강바닥으로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편에서 보면 출애굽 당시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한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공동체”에게 더 큰 믿음의 시험이 있다면, 기적에 대한 사전 예고가 이번에는 즉각적으로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홍해의 기적”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곧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사전에 예고해 주십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6). 그런 점에서 이 새로운 명령은 더 큰 긴장감을 조성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는 13절에 가서야 알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 “요단에 들어서라”는 말은 곧 “기적을 체험하라”는 메시지와 같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행동 즉 “순종의 행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물론 순종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해주며, 우리가 들을 수도 또 볼 수도 없는 것들을 듣고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블루오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꿈에 대해서 들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세 가지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헐리웃’의 액션 배우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케네디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 가지 꿈을 모두 다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행동하고, 기도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놀드의 기적”은 다소 무모하고, 황당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면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만, “요단의 기적”은 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요단의 기적”은 어느 한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여호수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만도 아닙니다(7절). 그것은 이스라엘 교회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요단의 기적”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 이스라엘이나 제사장이나, ‘여호수아’ 모두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동안 ‘여호수아’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무대의 前面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7절상); (2) “너는...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8절상); (3)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9절하).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며, 제사장은 언약궤를 매고 서 있고(8절), 이스라엘은 듣고 있으며(9절), ‘여호수아’는 신탁(神託)을 전하고 있습니다(10절).
이런 점에서 볼 때 “요단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무슨 결단이나, 믿음이나,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야 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출애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해야 했던 일은 마른 땅 위를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단의 기적”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것인지에 대해서 처음에는 암시를 통해서만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하다가,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의 긴장을 절정으로 고조시켜 놓고 있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10절);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13절);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일어나 쌓이고...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바로 건널 새”(16절). 이와 더불어 기적에 대한 묘사도 아주 사실적입니다: (1) 열 번에 걸친 “물”에 대한 강조와; (2) 그 물에 대해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언급(16절).
그리고 화자는 <요단의 기적>이 단순히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표적”(sign) 즉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15절상).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신 때가 “수확기의 홍수 철”(봄철 어느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름 철 기근이 한참일 때, 즉 ‘요단’의 물이 거의 없을 때 물의 흐름을 중단시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봄철에 고지대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강 수면이 불어났을 때 물의 흐름을 중단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빈도에 있어 기적으로 불러 마땅할 “초자연적 사건”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가치중립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기적들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은 “빈도”나 “규모” 외에도 “목적”을 가져야 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임을 강변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화자는 친절하게도 추가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4:18). 기적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로 “규모”나 “빈도” 외에도 “시점” 즉 타이밍을 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위에서 밝힌 이유 외에도 17절에서 다시 한 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3:17). 모든 백성이 강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단의 기적>에 대한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섭리의 기적” 그 자체에 대한 변론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합니다.
3. 요단을 기념하라(4:1-5:1)
희랍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流轉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발을 담구고 있는 이 강물은 더 이상 어제의 강물이 아닙니다. 있다면 늘 새로운 것뿐입니다.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역시 “無常”입니다. 즉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더 이상의 홍해도, 더 이상의 ‘요단’강도 없습니다. 이들에게 역사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서> 3-4장은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본성, 즉 하나님의 인격이 있고, 그의 행위 즉 역사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에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왜 존재합니까? 후대의 교훈을 위해서 입니다(고전 10:1-6). “해 아래 새 것은 없다”는 말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전 1:9).
<요단의 기적>은 <홍해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세대에게 일어났습니다. 다시 반복되지 않을 사건들 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둘을 하나의 사건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의 두 전승을 자신의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하나의 큰 전승으로 재창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두 개의 작은 물줄기가 합쳐서 새로운 큰 물줄기를 형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재창조의 작업이 가능한 이유는 두 사건이 지닌 동일한 교훈 때문입니다.
세 번째 단락의 목적이 후대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교훈과 교육을 위한 것이라면, <요단강 이야기>도 마땅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사건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 사건의 의미와 교훈을 부각시켜야 할 것입니다.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질문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4:6후, 21후).” 두 번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동일한 이 질문이야말로 본문의 세 번째 단락의 신학적 기능과 제목을 결정짓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즉 “요단을 기념하라”입니다.
기념 돌. 그렇다면 ‘요단’을 어떻게 기념해야 합니까?
“기념 돌을 세워야 합니다.” 즉 예배를 통해서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란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세 가지 중요한 사역-교제, 증거, 예배-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의 사역이 관계의 사역이라고 할 때(참고. 마 16:18-19), 예배 사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예배는 건강한 관계를, 따분한 예배는 따분한 관계를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듯이 예배의 형식과 절차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십니다. 이점 다른 제사와 구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드는 제사는 필경 한 가지 목적을 가지게 되는데 자기만족과 위안을 얻기 위함입니다. 즉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한 뇌물의 성격이 짙다는 것입니다.
기념 돌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예배의 구체성에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예배는 추상적일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여호수아’ 공동체의 예배는 ‘요단’의 기적이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 자리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 교회의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고 기억합니다. 물론 기념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 예배에 참여하는 나 자신의 지난 한 주간의 죽음과 부활의 삶, 즉 실존적 사실을 기념하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예배에 구체성과 역사성이 결여될 수 없습니다. 열두 개의 돌에 대한 강조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제목을 정함에 있어서나, 성도간의 교제 시에 한 주를 간증하고, 회고함에 있어서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그저 범사에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그것도 감사하고. 그래서 결국 범사에 감사한 것이지, 처음부터 무턱대고 범사에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 제목이 구체적이지 못할 때, 이처럼 “범사에 감사한 그리스도인”이 양산되는 것입니다. 애매하고 막연한 기도 제목이 있다면 지금 당장 바꾸어 봅시다. 병 고침을 받았던 한 문둥병자는 자신의 기도 제목이 무어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응답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열두 돌. 하나님은 또한 “열두 개의 기념 돌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3절). 이 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함께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의 화자는 일련의 에피소드나 또는 해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결속성”(solidarity)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가 아니라 공동 운명체라는 것이지요.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도 결코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12-13절). 결속성에 대한 극적인 사례는 “아이성”의 패배 이후 하나님과 여호수아 간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투 같지도 않던 전투에서 수치스럽게 패한 후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며 대드는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수 7:11). “결속성”에 관한 상세한 신학적 논의는 다른 곳에서 다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결속성”을 인류 전체로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즉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 혼자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 자리에서 함께 공법자로 참여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1).
이 모두 일치와 연합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강력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에서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교회의 이미지들, 즉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군대, 그리스도의 신부 등이 모두 일치와 연합에 대한 강력한 표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여호수아. 열두 개의 기념 돌을 보며 이스라엘이 기념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즉 그들이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기념합니까? 앞에서도 잠간 언급하였듯이 예배를 제정하신 이가 하나님이실진대, 예배의 주인공은 마땅히 하나님 자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를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역사 속에서 노시는 분이십니다(E. Peterson). 이 말은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는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성을 띄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단’을 기념하되 구체적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열두 개의 돌이 바로 구체적인 기념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가 나타난 일차적인 현장은 다름 아닌 공동체의 지도자 ‘여호수아’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떠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으며, ‘여호수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자요, 후대 자녀들을 위하여 교육 체계의 근간을 마련하고 있는 교사의 원형입니다(4:4-7).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하게 한 지도자의 역할 모델을 자임하고 있기도 합니다(4:8).
<신약>은 신자 개개인이 왕이자 제사장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만(벧전 2:9), 여전히 교회의 리더십에 관해서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히 13:17). 눈에 보이는 영적 지도자에게 순종함이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 그러나 여호수아가 예배의 궁극적인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지도자의 궁극적인 역할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고, 따르도록 하는 것 이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예배의 초점도 하나님 자신의 인격과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침례 ‘요한’도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 번째 단락의 나머지 절반(15-24절)에서 화자 역시 같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단락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그 형식에 있어 동일한 명령 체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고,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다시 백성들의 순종을 이끌어 내는 형식적 특징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순종의 모티브이기는 합니다만,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기적 그 자체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의도에 걸맞게 본문은 하나님의 임재와 행위를 암시하는 일련의 단어나 표현들이 마치 “캠브리아 대폭발”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증거궤; 언약궤; 제사장; 마른 땅.
선교와 교육. 예배의 또 다른 기능은 없습니까? <요단 이야기>의 천황봉이자 대 절정을 읽어 봅시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서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24절).
이 구절은 우선 우리의 예배가 세상을 향해서 증거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향한 메시지는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열방들아, 어찌 허사를 경영하려 드는가? 헛된 짓을 말지어다. 내가 진정한 만군의 主 야훼시니라!” 그러나 열방들이 이 메시지를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지, 이방인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은 하나님의 인격과 행위를 두려워 떨기는 할지언정(5:1), 경외와 믿음으로 반응해 나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바로’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재앙 앞에 두려워 떨기는 했으나, 순종으로 나아오지는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선택과 그 결과를 존중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24, 26, 28).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사실은 무엇이었습니까? 예배의 또 다른 기능과 관련한 질문입니다. 즉 우리의 예배는 공동체의 교육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24절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나안’의 적들을 인정사정없이 진멸하시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적들을 그토록 진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들어봅시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롬 11:18-22)
이스라엘을 향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스라엘의 ‘쉐마’는 예배가 신앙의 선배나 어버이가, 후배나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신앙교육이라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세대가 새롭게 경험하는, 새로운 사건들의 의미를, 이전 세대가 먼저 경험했던 사건들과 연관시켜 해석해 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면서, 함께 어우러져 새 시대를 개척해 가는 공동체에 대한 좋은 교훈이 됩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체험들이 창조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미래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대차이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경우 개인이나 교회는 늘 과거의 전통, 즉 “이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이전 교회에서는 이렇게 했는데”에만 집착합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해 냉소적입니다: “나도 왕년에 그랬었지.” 아니면 정 반대로 모든 전통이나 역사에 대해서 경멸적인 자세를 태도를 취하기 일쑤입니다.
오순절 성령 하나님을 체험했던 그 사도들이 우리의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들의 체험과 고백이 우리의 것이라면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4).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136장)
내 삶의 목적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최근 건넌 ‘요단’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요단’에서 가져온 돌은 무엇이며, 몇 개나 됩니까? 이들을 예배에서 지체들이나 이웃이게 증거한 적 있습니까? 세월이 지날수록 돌의 수가 증가해 왔습니까?
토의와 연습
1. <요단 이야기>는 이 책의 3-4장에 걸쳐 소개되고 있는데, 가장 독특한 문학적 특징이 “반복과 모순”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토의해 봅시다.
2. <요단 이야기>의 반복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주제에 따라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 단락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3. <요단 이야기>가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