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제 1부에서는 필자의 다른 교재들에서처럼 먼저 이 책의 해석과 관련한 제반 문제들, 즉 “역사와 문학과 신학” 등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역사적 문제라 함은 이 책에 대한 역사비평적 질문들에 관한 것이며, 문학이라 함은 이 책의 구성과 형식 및 내용, 그리고 제반 수사적(修辭的) 기법들에 관한 것이며, 신학이라 함은 이 책이 담아내고 있는 일련의 신학적 주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성경>의 어떤 책을 공부하더라도, 이처럼 그 책에 대한 “종합비평적” 접근을 시도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이해를 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과 해석>에 관한 공부는 본 교회학교의 다른 과목에서 보다 상세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본 교재의 제 1부에서는 이와 관련한 제반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역사
1. 여호수아
<여호수아>의 주인공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 이 책의 명칭도 그의 이름에서 파생했음에 분명해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그가 이 책을 썼을 것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책 자체가 그 점을 전혀 암시하고 있지 않으며, 오늘날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반 지파의 아들로서, ‘애굽’에서 태어났으며, 출애굽 당시에는 젊은 청년이었습니다(출 33:11). 그는 ‘호세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민 13:8), ‘모세’는 그를 ‘여호수아’ 또는 ‘요수아’(‘야훼’는 구원이시다; 16절)로 불렀습니다. ‘모세는 그를 수종자(개인 수행원?)로 선택하였으며, 시내 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갈 때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출 24:13). 그는 또한 ‘모세’가 ‘야훼’를 만나는 동안 회막을 지키는 자였습니다(33:11).
‘여호수아’는 또한 ‘시내’ 광야의 ‘르비딤’에서 ‘아말렉’의 공격을 격퇴시키기 위한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지휘하기도 했으며(출 17:9), 후에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된 열두 명 중의 하나였습니다(민 13:8). 이 정탐에서 그는 ‘갈렙’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내놓았으며, 이 일로 해서 훗날 그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일 세대의 유일한 인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차세대 지도자로 임명되었습니다(신 31:14, 15, 23).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길갈’에 주둔지를 두는 작전을 세웠는데, 이 작전은 그 땅을 효과적으로 양분하여 먼저 남쪽을 친 후에 북쪽을 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서, 군사전문가들로부터 탁월한 선택이라는 평가를 듣습니다. 본문 지도참고.
구체적인 전투에 대해서는 해당 본문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본문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의 전략으로 돌리는 것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헤렘’ 즉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사실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는 사실을 본문의 신학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호수아’를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의 전형으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일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행정가, 그리고 사심 없고, 불편부당한 지도자,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2. 정복시기
<여호수아>의 역사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대두되는 질문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연대에 관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소위 “초기 정착설”(주전 15세기)과 “후기 정착설”(주전 13세기)이 그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 학계의 경향은 “후기 정착설”을 받아들이는 쪽이지만, 일부 보수 신학 진영에서는 “초기 정착설”을 지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두 견해는 출애굽의 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구약 이야기: 역사와 문학과 신학>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쪽을 받아들이든 이 책의 신학과 관련해서 특별하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합니다.
3. 실제적인 승리
<여호수아>의 곳곳에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일부 언급들이나 <사사기>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고 이 책만을 있는 그대로 읽어 내려가면, ‘가나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복은 신속하고도 완벽한 것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온 땅을 다 정복하였더라”(10:40); “여호수아가 그 온 땅을 취하였으니”(11:16);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11:16);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한 바 되었으니”(11:19).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아직 얻을 땅이 많도다”하고 언급하고 있으며, 얻을 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중에는 ‘블레셋’인들의 지역과 ‘팔레스타’인 북부의 일부 지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나안’의 집단 거주 지역들이 그러했는데, 이 지역들에 남아 있던 ‘가나안’ 제단(祭壇)들과 성소(聖所)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을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4. 역사적 신빙성
<여호수아> 내에 존재하는 일견 모순되고 상충되는 진술들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전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고고학적 연구의 결과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이들 고고학적 발견이나 기타 연관된 연구 결과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구약개론>이나 <성경과 해석> 등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5. 태양의 멈춤
‘여호수아’는 과연 태양을 멈추게 했을까? 이 질문은 <여호수아>의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입니다:
12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13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수 10:12-13)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태양과 달이 거의 하루 동안 하늘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지지해 주는 것으로 전 세계의 많은 민담 속에 태양이 지지 않았던 날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근본주의적인 창조론 진영에서도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는 듯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본문이 이런 기적을 지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기적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과 어떤 성경 구절이 정말 기적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지 아닌 지를 해석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제기할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서 의심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성경>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구절은 시(詩)의 한 구절입니다. 시에서 대개 문자적인 의미는 수사적(修辭的) 표현으로 대치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더 나아가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번역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문체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몇 개의 단어가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자적으로 그대로 번역하면(우리는 이에 대해서 해당 본문에서 다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기브온 위의 태양아, 가만히 있으라,
아얄론 골짜기 달도 가만히 있으라?
그래서 태양이 가만히 있었으며, 달도 가만히 있었다...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가만히 있다”(!m"D, 다맘) 또는 “멈추다”(dm'[, 아마드) 등은 문자적으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조용히 있다”(be still) 또는 “침묵하다”(be quite) 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이들 천체를 향해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또는 “잠잠하라”(즉 심한 열을 발하지 말고)고 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13절에 따르면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는 의미를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는 “야살의 책”에 관한 언급입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이며, 누가 썼으며,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 책에서 어느 정도의 분량을 인용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만일 이 책을 뒤 구절과 관련해서 인용하고 있다면 “야살의 책”은 “머무르다”라는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자가 이 시를 인용하면서 정확하게 의도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일 길은 없지만, 아마 중요한 사실은 기적과 그 기적의 목적 사이에는 반드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재미로, 또는 아무 이유 없이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기적의 규모와 목적 간에도 일말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기적은 적어도 우주적인 기적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지구의 회전이 24시간은 멈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그처럼 거대한 기적이 필요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학자들의 답변은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 전체가 이교도적인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실제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를 다르게 이해하려 합니다. 혹자는 ‘여호수아’가 태양의 열기를 다소 완화시켜 줄 것을 간구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대기의 반사력이 변함에 따라 태양과 달의 빛이 굴절되었으며, 그 결과 이들이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적의 규모가 어떠했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이들의 신앙은 크게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6. 자료와 편집
<여호수아>의 역사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제기할 수 있는 관심사는 이 책에 대한 소위 “역사비평적” 질문들일 것입니다. 즉 자료와 편집 등에 관한 질문들입니다. <구약> 전체에 대한 일반적이고 총괄적인 “역사비평” 연구에 대해서는 필자의 <성경과 해석>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여호수아>에 국한해서 이 책의 자료나 편집 등에 대해서만 논의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의 자료와 관련해서 <창세기>에 적용하던 소위 “문서설”이 이 책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학자들 사이에서 <여호수아>를 “육경”(六經) 중의 마지막 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즉 <모세 오경>에 이 책이 추가되었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더욱 최근에 와서는 <신명기>를 앞의 네 책과 분리시켜 <전기 예언서>와 연결시켜, <전기 예언서>에 속한 모든 책들을 “신명기적 역사”(the Deutronomic hostory)로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육경으로 부르는 이유도 “신명기적 사관”(史觀)이 책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적 역사”에 대해서는 이 책의 <신학> 부분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문서설”의 가정을 이 책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하는 이유는 <오경>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문학적인 상수(常數)나 신학적인 주제 등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중복되거나, 또는 모순되는 부분들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이한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 “상이한 문체의 존재”; “중복되는 내용”;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상이한 원인 설명”; “후대의 상황이나 지명이 그보다 이전 시대의 기록 속에 등장하고 있음”(“야살의 책,” “유다 왕의 역대지략” 등). 이들 각각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에 대해서는 해당되는 본문의 <문학과 역사>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전통적인 “문서설”에 따르면, 이 책의 제 1부(1-12장)는 대부분 <신명기 전승>과 <야훼/엘로힘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책의 나머지 부분(13-24장)은 거의 전부 <사제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결국 처음 열두 장은 일련의 원인론적 이야기(etiological tales), 즉 “이스라엘은 어디서 왔는가?”, “기브온 족속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등에 관한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이전의 전승들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명한 역사비평학자 ‘노트’(M. Noth)는 이러한 가설을 배격하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여호수아>를 위시해서 <전기 예언서>는 J, E. P 등의 전승보다는 전체적으로 <신명기>(D 자료)와 더 공통점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 1-12장은 “신명기적 역사관”에 입각해서 수집 및 편집되었으며, 이들 자료에 후대의 자료들 즉 성읍들의 목록이나 경계에 관한 기록 등이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후대 자료의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저명한 역사학자 ‘브라이트’(J. Bright)는 그 연대를 주전 10세기의 완정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직후에 나머지 “신명기적” 자료들이 첨가되었으며(13-21장), 다른 첨가 자료들은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여호수아>의 일부 자료, 특히 5-7장은 목격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장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부 세부적인 기록들은 ‘여호수아’와 동시대이거나 또는 그렇게 많이 늦지 않은 시대의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고 있습니다: (1) ‘페니키아’의 중심 도시는 시돈(13:4 이하; 19:28)이었는데, 나중에는 ‘두로’가 중심 도시가 되었음; (2) ‘라합’이 그 당시 생존해 있었음; (3) 성소는 아직 고정된 자리가 없었음(9:23); (4) ‘기브온’ 주민들은 그 당시에도 여전히 성소에서 수종드는 노예였음(9:27; 삼하 21:1-6); (5) ‘여부스’ 족속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음(15:8; 참고 삼하 5:6 이하); (6) ‘가나안’인들은 여전히 ‘게셀’에서 살고 있었음(16:10; 참고, 왕상 9:16); (7) 옛 지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반드시 해설이 덧붙여져야 했음(15:9 이하).
그러나 본문 중에 “오늘날까지”라는 문구는 그 사건이 분명 사건의 기록 당시보다 이전에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당연히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 내지는 수정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만 그렇게 멀리 떨어진 후대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적” 자료의 연대를 상당히 이른 시기-왕정시대나 그 이전-로 잡지 않는 한 본문이 전적으로 “신명기적 역사관”에 따라 편집되었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문학
1. 분류상의 문제
신학화 된 역사. <여호수아>는 개신교 <영어성경>의 분류에 따르면 역사서의 첫 책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두 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예언서>(또는 <선지서>)의 첫 번째 책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분류에 대해서는 <구약개론> 등 다른 책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이 책을 <선지서>로 불렀으며, 왜 지금은 <역사서>로 간주되고 있는 것일까? 흔히 개신교 <정경>의 순서는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어도 고대 ‘유대’인들에게 <선지서>가 역사적인 성격보다는 선지적인 성격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역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역사에는 순수한 사실(事實)로서의 역사가 있긴 하지만, 모든 사실을 다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들을 취사선택하고 배열함에 있어 실제 사건과 후대의 독자 사이에는 기록자의 주관적 입장이 끼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한 연대기나 족보를 역사로 규정할 수 없듯이, <전기 예언서>의 책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아무리 역사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규정한다 하더라도 현대의 역사가들을 만족시키는 그러한 종류의 역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신학화 된 역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의 경우,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은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공평성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단강 도하 이야기”, “길갈의 언약 의식”, “여리고와 아이성의 이야기” 등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가나안 남부 지역 정벌”에 관한 기록은 매우 간결합니다. “북부 지역 정벌”에 관한 기록은 이보다 더 짧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복된 민족이나 도시의 이름조차 생략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성이 반드시 연대기적으로 기록된 아니라, 후대 화자의 신학적 의도를 담은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사기> 역시 당대의 정확한 역사를 소개해주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 역시 이스라엘의 왕정에 관한 모든 사실(史實)들을 다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북조 왕국에 얽힌 정치적인 이야기보다 신앙적인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전기 예언서>는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관점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함직한 그런 종류의 역사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선지자적 관점의 “신학화 된 역사”입니다. 선지자의 주된 목적은 우선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사무엘’, ‘나단,’ ‘엘리야’, ‘엘리사’ 등과 같은 선지자들의 활동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언약과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인과응보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 중요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 즉 <전기 예언서>의 책들의 역사적인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역사 기록은 선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매우 편향된 시각을 가진 ‘아시리아’ 왕들의 연보(年譜)나 ‘헤르도투스’ 및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은 당연히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역사 기록이 역사적인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역사가는 목적에 따라 자료를 선별할 뿐입니다. 그는 역사 기록을 창조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다른 목적을 가진 자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목적에 따라 선별할 뿐입니다. <전기 예언서>의 선지자들 역시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역사적 자료들을 선별했던 것입니다.
<구약>이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르도투스’ 이전의 어떠한 책보다도 역사적인 기록을 더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고고학적 발견들을 통해서 <구약>의 역사적인 정확성은 반감되기보다 오히려 더 인정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예언서>는 그리고 <구약> 전체의 역사적인 요소는 종교적인 메시지에 종속 내지 결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들 책속에는 예언(預言)과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그 메시지가 인식되고 있습니다.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 <히브리 성경>이 <예언서>를 이처럼 구분하는 것은 이 두 예언서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前者)는 주로 ‘가나안’ 정복 시기와 초기 왕정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루는 내용은 포로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후자(後者)는 두 왕국이 종말을 고하는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적인 차이가 두 <예언서>의 유일한 차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각 책의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전기 예언서>는 더욱 “역사적”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비교적 연대기에 맞추어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로부터 <열왕기>까지를 통해서 우리는 “가나안 입성”에서부터 “포로시대”까지의 기간, 즉 주전 1250-586년 사이의 역사를 연결해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어 성경>에서 이 책들을 <역사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후기 예언서>를 통해서는 역사에 대한 희미한 개요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순서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전기 예언서>를 통해서 그 순서를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경우에도 <후기 예언서>에 등장하는 내용들을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후기 예언서>는 그야말로 “예언서적”인 성격이 더욱 강하다 할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도 선지자들이 선포한 메시지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는 <전기 예언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는 주인공 ‘여호수아’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일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전한 메시지도 <사무엘>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단’이 전한 메시지가 <예레미야>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의 예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전기 예언서>에서 중에서 그나마 예언적인 내용으로서 가장 긴 것이 “엘리야 이야기”(왕상 16-왕하1)나 “엘리사 이야기”(왕하 2-9)일 것인데, 이들 선지자들의 예언을 ‘미가’나 ‘스바냐’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기 예언서>가 원래는 예언적(또는 선지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연속적인 기록을 제공해 주긴 하지만 항상 선지자의 눈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2. 구조와 내용
<여호수아>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그 땅”이며, 따라서 책도 이 주제와 관련해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 땅을 차지하라”; (2) “그 땅을 나누어라”; (3) “그 땅에서 살아라.” 이를 다시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1부. 그 땅을 차지하라(1-12장)
(1) 하나님의 진군 명령(1:1-9)
(2) 명령의 연쇄 고리(1:10-11)
(3) 리더십에 관해서(1:12-18)
(4) 창기의 고백(2:1-24)
(5) 요단 도강(3:1-5:1)
(6) 예배와 정복(5:2-15)
(7) 언약의 두 얼굴(1): 여리고 이야기(6:1-27)
(8) 언약의 두 얼굴(2): 아이 성 이야기(7:1-8:29)
(9) 모세의 명령을 수행하다(8:30-35)
(10) 언약의 타협(9:1-27)
(11) 남방 정벌(10:1-43)
(12) 북방 정벌(11:1-23)
(13) 승리의 희생자들(12:1-24)
제 2부. 그 땅을 나누어라(13:1-19:51)
(1) 가진 것을 나누라(13:1-7)
(2) 모세를 회상하며(13:8-33)
(3) 갈렙에게 먼저 주어라(14:1-15)
(4) 유다와 요셉(15:1-17:18)
(5) 실로의 선택(18:1-19:51)
제 3부. 그 땅에서 살아라(20-24장)
(1) 성막 건설(20:1-9)
(2) 레위의 도시들(21:2-42)
(3) 은혜의 선물(21:43-45)
(4) 제단: 권위와 목적(22:1-34)
(5) 마지막 권면(23:1-16)
(6) 언약과 헌신(24:1-28)
<여호수아>의 신학
1. 신명기적 역사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을 하나님의 개입이나 섭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분명 <성경>에만 있는 독특한 개념임에 분명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문헌들 중에는 어떤 사건들을 특정 신들의 활동과 연결시킨 경우들이 더러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경> 이외의 어디에도 이런 개념을 실제 역사 속에서 일관성 있게 전개시킨 경우는 없으며, 모든 사건들이 오직 한 신과만 연결시키고 있는 경우도 없습니다.
이처럼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보려는 시도가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근 학계는 이러한 사상이 주전 7세기 경 “신명기적 역사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경우는 <사사기>입니다. 이 책에는 죄와 심판과 회개와 구원에 관한 신명기적 개념이 무려 열세 번에 걸쳐 나타남으로써 소위 신학적 윤회(輪回)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심판 즉 외국의 침입을 부르고, 회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사를 세워 구원을 가져오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여호수아>나 <열왕기> 등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 보는 바를 훨씬 능가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과도 완전하게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이스라엘 특유의 것이라 아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탁월한 종교적 통찰력,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통찰력을 필요로 합니다. 핵심적인 질문은 간단합니다. 즉 “신명기적 역사관”이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왕국이 종말을 고하던 ‘요시야’ 시절 당시의 일단의 학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둘의 합작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간단치는 않습니다. 대개 역사철학을 전개시키기에 합당한 시기는 한 시대의 시작보다는 마지막 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을 목도한 이후라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의 시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지혜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요시야’ 의 시대야말로 역사철학을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시기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위대한 천재 또는 선지자들의 이름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놀랍기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놀라운 경험을 했던 자입니다. <신명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역사철학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힐기야’가 ‘요시야’ 시대에 발견한 “율법책”(왕하 22:8-13)이 바로 <신명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해 보입니다. 그것은 이 책의 최종 단계에만 조명을 비춤으로써, 그 이전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적 뿌리들, 그리고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인과응보(因果應報)적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었는지 등에 관한 과정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주-본주 간의 조약 양식이 ‘시내’ 산에서 계시된 ‘모세’의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언약의 두 얼굴인 축복과 저주 즉 인과응보적 개념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사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동일한 사상에 대한 배경 내지는 뿌리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열왕기>의 여러 대화나 화자의 진술 속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판과 은혜의 개념은 원래는 주로 개인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만, <아모스>에 이르는 동안 국가에 대해서도 적용되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후 “신명기 역사관”은 한동안 잊혀 있다가 ‘요시야’ 시대에 새롭게 조명 받게 된 것 같습니다. 국가의 종말과 더불어 이 역사관은 최종적인 형태로 신명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편집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결국 “신명기 역사관”은 ‘모세’ 시대에 배아의 상태로 출발하여, 왕국의 종말의 시대에 최고조로 발달된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2. 언약
역사서의 첫 번째 책 <여호수아>는 <오경>을 관통하는 언약의 주제를 이어받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신명기 역사관”를 담아내고 있다는 전제에 대한 당연할 결과입니다.
수 세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후손들에게 주겠다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은 이후 ‘이삭’과 ‘야곱’을 거쳐 ‘모세’에 이르러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전수되고 갱신되기에 이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 언약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 그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을 끝내고 그 땅을 나누며 각 지파의 경계를 정할 때, 하나님의 언약은 부분적이긴 하나 성취를 맞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의 땅이 미 정복의 상태로 남아있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그 땅의 주민들을 쫓아내겠다고 약속하십니다(13:2-6절상). 그리고 이미 취한 땅에 대해서는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약속과 성취의 개념은 <족장 이야기>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를 이루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해내셨으며, 어떻게 광야에서 그들을 보호하셨으며, 그리고 마침내 그 땅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언약 사상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는 점을 화자의 진술이나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바, 예컨대 다음 구절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21:4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5)
이처럼 <여호수아>에서 땅은 언약과 관련해서 불가분의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땅은 불가분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장수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사는 한에 있어서는 시대나 세대를 불문하고 지켜져야 했던 원칙이었으며, 선지자들의 미시지도 바로 이 언약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훗날 우상숭배나 배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때, 선지자들은 회개를 촉구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때문에 다시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으며, 그 땅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포로시대 중에 이러한 회복은 소망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3. 헤렘
‘헤렘’(!rej)은 “바쳐진 것”, “봉헌된 것”(devoted thing), “봉헌”, “헌신”(devotion), “금지”, “저주”(ban) 등을 의미하며, <구약> 전체적으로 19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주민과 그 성을 불태웠습니다(수 6:24-25). 그들은 ‘아이’ 성이나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8:24-29). 이처럼 완전한 파괴를 가리키는 말이 궁극적으로 ‘헤렘’(!rej)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헤렘’은 언약 사상과 함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자가 이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적어도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암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물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것을 원하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만):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10:40)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붙잡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바쳤으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시켜서 누구를 죽이라고 한다거나, 어떤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완전히 멸절하라고 명령했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구약>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신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만, 아무튼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헤렘’의 주제는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한 가지 대답은 ‘헤렘’을 당시의 역사∙문화적 상황 하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민족들에게 있어서는 사람이나 전리품 또는 포로들을 자신들의 신(들)에게 바치는 행위는 일종의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행위가 완전히 정당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는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당시의 이스라엘은 아직도 계시의 초보 수준으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같은 가르침을 받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그들에게 상응하는 수준의 계시를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해답은 아닙니다. <성경>은 ‘가나안’ 사람들을 단순히 “진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명령은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나안’ 사람들은 극히 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증스러운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유혹해서 그들의 부패한 종교적인 행위에 동참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를 묵인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는 마치 의시가 외과적인 수술을 통해서 환부를 드러냄으로써(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신체의 한 일부라 할지라도), 환자를 살려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요약하자면, ‘헤렘’은 의 입장은 ‘가나안’에 대한 징계와 이스라엘에 대한 보호라는 이중적인 조처로 보자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헤렘’을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명령으로 이해하자는 입장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든 이방인들을 다 멸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나안’ 족속들만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이 명령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때까지만 유효한 한시적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도 이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학살에 염증을 느꼈던지, 아니면 성적인 환락으로 가득 찬 종교 의식들에 유혹을 당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나안’ 종교는 점차 이스라엘 종교 속으로 퍼져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훗날 <선지서> 등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가나안’ 종교는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나중에 <아모스>, <미가>, <이사야> 등에서는 <신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수준의 윤리∙도덕적 가르침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헤렘’을 이런 맥락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헤렘’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그의 적들과 싸우십니다.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땅의 만민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언약의 축복을 공급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속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판단이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증오와 반목이 가득 찰 뿐 일 것입니다.
4. 안식
<여호수아>의 또 다른 주제는 “안식”으로서, 이는 본문에서보다는 오히려 찬송가에서 더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 땅에 도착함으로써 광야의 고생과 방랑, 그리고 정복 전쟁의 수고로부터 안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1:1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이스라엘은 그 땅에 정착한 뒤에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살아가며,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증인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점에 있어 실패를 해서 결국 다시 그 땅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이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안식은 노동 이후의 안식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미래적인 것이며, 기다림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당연히 미래의 소망과 축복이라는 교리로 발전되었으며(예. 삼하 7:1), 종국에는 지상의 순례를 마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연결이 됩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안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광야의 경험과 그 땅으로부터 은유를 이끌어오고 있습니다(히 3:7-4:10).
그러나 안식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신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제한적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안식은 미래적이거나 순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된 과거적인 사건이며, 이를 바탕으로 매일 매일의 삶에서 누려야 하는 현재적이며 역동적인 그 무엇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의 안식은 “성령 충만”을 통해서 쟁취하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적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천국에서의 미래의 안식은 우리가 싸워 얻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사역으로 완성된 안식입니다.
5. 지도자
공동체와 지도자에 관한 주제는 <여호수아>의 핵심적인 주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화자는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해서 암시나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기 위해서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보이는 지도자의 역할모델과 그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체화 되고,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과 답변이 이점을 잘 드러내 줄 것입니다: “어떻게 그 땅을 정복할 것인가?”; “율법에 순종해라.” “그러면 어떻게 율법에 순종할 것인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순종하라.”
따라서 “땅”과 “율법”과 “지도자”는 <여호수아>를 구성하는 신학적 주제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오늘의 교회를 위해서도 심오한 교훈을 제공해 주는 지극히 현재적인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