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9과
언약의 두 얼굴(2): 아이 성의 패배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7:1-26약 43분 분량
제 9과: 언약의 두 얼굴(2)
9
언약의 두 얼굴(2):
아이 성의 패배
(7:1-26)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7:11-12)
예수님께서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라”(마 24:28)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의 眞意는 물론 그의 마지막 재림사건과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 예언이 아주 묘한 곳에서 성취되는 것을 목도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수 년 전 ‘베트남’ 항공사 소속 여객기(TU 134) 추락 현장인 ‘캄보디아’의 ‘프놈펜’ 근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고현장에는 인근 주민 수백 명이 몰려와 화염에 휩싸인 추락 현장을 헤집고 다니면서 희생자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과 달러화는 물론, 희생자들이 입고 있던 옷과, 화물까지 닥치는 대로 훔쳐가는 모습을 목도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사고현장에 파견된 일부 구조대원까지 구조는 뒤로 하고, 이 추악한 도둑질에 가세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1997.9.12字.
당시 추락현장에 있던 한 자유기고 사진작가는 “당시 현장은 경멸 그 자체였다. 이들은 인간의 탈을 쓴 이리들 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얄궂게도 이 역시 이들 ‘프리렌스’ 사진작가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흔히 ‘파파라치’로 불리는 이들 삼류 사진작가들은, 세계 유명인사가 있다는 곳이면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사생활이나 밀애 장면 등 아주 선정적인 사진들을 찍어 신문사에 팔아 넘겨 수백만 불고의 돈을 챙기기도 합니다. 1997년 ‘파리’ 지하터널에서, ‘다이애나’ 왕 세자 빈과 그의 애인 ‘도디 알 파예드’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도 따지고 보면 이들 ‘파파라치’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태운 운전사가 이들을 피하기 위하여 과속으로 달리다 변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조차도, 두 사람을 구조할 생각은 않고 연신 사진 찍기에만 급급했다 하여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프랑스 법원은 이 사고가 난지 10여 년이 지난 2006년 2월에, 이들 세 명에 대하여 1유로(약 1150원) 씩의 벌금형을 상징적으로 선고했다고 합니다. 사고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돌보지 않고 사고 모습을 필름에 담은 혐의 치고는 말도 안 되는 액수입니다. 그나마 이 재판도 죽은 ‘도디 알 파예드’의 아버지가 항소함에 따라 열린 것이었다고 합니다(조선일보, 2006.2.23日字, A16).
이들은 주검 주변에 있는 독수리처럼, 유명인사 주변에 몰려듭니다. 그러나 ‘파파라치’들의 이러한 목숨을 건 노력 뒤에는, 소위 황색신문(yellow paper)이라 불리는 후견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사진들을 비싼 값을 주고 사들여서, 확대, 과장하여 선정적으로 보도합니다. 그래서 사진 한 번 잘 찍어 평생 팔자 고친 사진작가 많습니다. 이들 신문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진 한 장 잘 구하여 판매부수를 엄청나게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 황색신문은 누가 사줍니까? 독자들입니다. 72년 당시 ‘파파라치’들의 단골 사냥감이었던 그리스 거부 ‘오나시스’와 ‘케네디’ 전 대통령의 망부 ‘재클린’의 반나체 수영 장면을 게재했던 ‘이탈리아’ 포르노 잡지 ‘플레이맨’은 단 하루 만에 75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래저래 그동안 이들 신문 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아가던 모든 독자들은 ‘다이애나’ 세자빈의 죽음에 다 한 몫을 한 셈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파파라치’나 또는 ‘프놈펜’ 주민들과 같은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아간’입니다. 이 사람은 그의 동료 지체들이 여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의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본문은 ‘아간’을 범죄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과연 범죄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의 문제가 자신만의 문제로 끝났습니까?
화자는 이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해학과 역설, <창세기>의 <에덴 이야기>의 모티브 등을 동원하면서 일련의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언약의 저주”라든지 “인류의 결속성”이라든지 ‘헤렘’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도, ‘아이’ 성의 전투는 궁극적으로 실패가 아니라 승리로 끝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대 반전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새로운 단락의 범위를 결정함에 있어 그 시작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결말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직전의 에피소드 <여리고 성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하나의 이야기 단위의 결말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지도자 ‘여호수아’와 관련한 이런 표현은 앞선 <요단 강 이야기>에서도 하나의 결론으로서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7:1)은 <여리고 성 이야기>에서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정보로서, 지난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전체적인 배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그렇다면 새로운 단락의 끝은 어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새 이야기에서 관심의 초점을 ‘아간’에게만 국한시켜 본다면(새 이야기를 그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였으니), 그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7장의 마지막 구절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7:26). 그러나 이 구절은 어디까지나 ‘아간’ 한 개인에 관한 이야기의 결말로 보기에는 적절하지만, 이스라엘과 ‘아이’ 성의 운명에 관한 언급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아이 성 이야기>의 결말로 삼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8:29를 이야기의 전체적인 결론으로 삼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8:29). 다시 요약해 보자면, 7:26과 8:29는 그 기능에 있어, 각기 ‘아간’과 ‘아이’ 성의 운명에 관한 기원론적인 언급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이야기의 결말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학적인 결론으로 삼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결론이라 함은 “길갈 언약”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 언약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길갈 언약”의 시작을 5장으로 볼 때, 6장과 7장은 각기 언약의 “축복”과 “저주”를 다루고 있으며, 신학적 결론으로 당연한 귀결은 언약의 “재계약” 내지는 “갱신”을 담고 있는 본문이 되어야 할 것인즉,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곳은 8장의 마지막 다섯 절입니다(8:30-35). 따라서 5-8장은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의 완전한 문학 및 신학적 단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준비-언약의 체결(5장)
(2) 승리-언약의 축복(6장)
(3) 패배-언약의 저주(7장);
(4) 승리-언약의 갱신(8장)
그러나 편의 상 7장만을 따로 구분해 볼 때, 이야기 제목은 <아간 이야기>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며, 단락 구분 또한 비교적 명확해 집니다. 본문은 네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기 독특한 양식과 전승을 가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1) 배경: 문제 제기(1절)
(2) 정탐: 오만과 패배(2-5절)
(3) 예배: 애도와 간구(6-12절)
(4) 응답: 심판과 제거(13-26절)
양식과 배경. 첫 번째 단락은 이야기의 배경으로써, 신학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간’의 범죄, 즉 언약의 파기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단락은 범죄의 결과, 즉 언약 파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시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아이’ 성에서 이스라엘의 패배를 다루고 있는데, 이야기의 양식은 전쟁 이야기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스파이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양식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형으로서(민 13-14장; 수 2; 삿 18; 민 21:32-35; 신 1:19-25), 대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담고 있습니다: (1) 파송(2절); (2) 임무부여(2절상); (3) 정탐(2절하); (4) 보고(3절); (5) 공격개시(4절).
그런데 <아이 성 이야기>에서는 무언가 석연치 않는, 새로운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정탐꾼들의 이름이나 신분 등에 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민 13:2; 삿 18:2; 신 1:23), 정탐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도 없으며(수 2:9-11; 삿 18:5-6),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투적인 선언, “야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부치셨느니라”(수 2:24; 민 14:8; 21:34; 신 1:25; 삿 18:10)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정탐꾼의 보고에도 이와 같은 확신에 찬 언급은 없고, 오히려 새로운 요소 즉 정탐꾼 자신들의 계획을 대신 추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3절). 당연히 이번 일은 실패로 끝날 운명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4절하-5절상). 그리고 실패를 마감 짓는 해학과 조롱 섞인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이점을 더욱 곤고히 할 뿐입니다: “백성의 마음이 물같이 된지라”(5절하). 이 선언이 갖는 상징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7장은 2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을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마치 피고와 검사 사이에 벌어지는 법정 공방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등장하고 있는 용어들은 대부분 제의적인 것들입니다. 참패를 접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절망과 수치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서 보여주는 모습은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배 시 드리는 “애가와 간구”의 전형(典型)입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6절). 먼저 그는 (1)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로 시작하여, (2) 하나님께서 과거의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언급한 다음, (3) 애가와 간구의 순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애원하는 내용은 그들 자신과, 대적자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한 가지 요소가 새롭게 추가되면서 기존의 예배 양식에서 변화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의 비정상적인 태도가 두드러집니다. 이전의 지도자 ‘모세’의 기도와는 아주 딴 판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나 회개와 간구가 아니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분노와 불평에 가까운 것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7:7-10). 이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오히려 단호하고 명쾌합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7:11상).
바로 이런 차이로 인해서 전형적인 예배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희망의 소식 즉 미래의 구원에 대한 신탁의 메시지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법정공방만이 계속될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최종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도하고 맙니다: “이스라엘도 조차도 바친 것(헤렘)이 되었다”(12절하). 이리하여 예배는 희망은커녕 절망과 저주의 메시지로 끝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단락에 이르러 그 양식은 다시 한 번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배적인 상황이 아니라 마치 예언자의 신탁을 듣고 있는 듯합니다: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13절). 이스라엘은 그들의 원수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 있으며, 그 원수를 제거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이어지는 메시지는 주사위를 던져 범죄자를 적발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며(14-15절), 이스라엘은 절차에 따라 범법자를 가려냅니다(16-18절).
범법자를 가려내기 위한 이 모든 절차와 그에 따른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피고는 자신의 죄를 공동체 앞에서 고백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처벌이 지당함을 인정하게 합니다(19-21절). 사람들이 아간의 처소에서 도적질한 물건들을 가져와 ‘여호수아’에게 보여줌으로써 ‘아간’의 고백은 다시 한 번 확인 작업을 거칩니다(22-23절). ‘아간’ 자신의 고백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물증의 확보로 그를 처벌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이중적으로 확보한 셈입니다. 결국 그는 공동체의 재판을 받고 죽어갑니다(24-25절). 화자는 “아골 골짜기”의 유래에 대해서 원인론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아간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26절).
이어지는 8장은 승리, 즉 “아이 성의 파괴”를 다루고 있으며, 핵심 주제는 언약의 갱신입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아이 성 이야기>의 제 2부 정도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만, 길갈 언약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들 이야기의 전승이나 자료와 편집 등에 관해서는 다음 과에서 다룰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 문제 제기(7:1)
‘여리고’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다음에 취해야 할 성읍은 가까이에 있는 ‘아이’ 성입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정상적인 흐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크게 패하고 맙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화자는 서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특정 범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이 성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접속사 “그러나”가 없습니다.
그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범죄자 ‘아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구체적으로 저지른 범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그는 ‘아간’의 조상을 3대에 걸쳐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미 > 삽디 > 세라. 마지막 인물 ‘세라’는 ‘다말’이 유다를 통해서 낳은 쌍둥이 중의 한 사람입니다(창 38:30). ‘세라’와 ‘라합’ 사이에 한 가지 흥미로운 연결 고리를 찾는다면, ‘붉은 줄’을 들 수 있습니다. ‘세라’가 태어날 때 붉은 줄을 손에 쥐고 있었고, ‘라합’은 그녀의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아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수 2:18, 21).
이스라엘의 행동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마알’(ל)이며, 번역하자면 “믿음을 저버리다” 또는 “불성실하게 행동하다”입니다. ‘마알’(ל)은 성물(聖物)을 착복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속건제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레 5:14-6:7). <레위기>의 법은 희생제사와 함께 20퍼센트를 더한 완전한 배상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마알’의 행동이 용서받게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간’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했음에도 말입니다. 아마도 그 차이는 고의성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아간’은 분명 자신의 탐욕으로 “바친 물건”(헤렘)을 취했으나, <레위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마알’은 부지중에 저지른 범죄로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2. 정탐: 오만과 패배(7:2-5)
아무 것도 알 지 못하는 ‘여호수아’는 ‘아이’ 성으로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본문 이야기의 역사성 여부는 고사하고 아이 성의 위치나 그 존재 여부에 대해서조차 고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은 것이 사실입니다: Butler, T. C., 83-84쪽(참고 도서 1).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2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자들은 ‘아이’ 성을 정복하는 것이 식은 죽 먹기라고 보고합니다. 이전에 ‘여리고’를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참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2:24).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7:3)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러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정탐꾼들이 보고하고 있는 이삼천 명의 숫자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의 조언에 따라 삼천 명의 군사를 보냅니다만(4절), 이 전투에서 3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5절). 나중에 두 번째 공격에서 이보다 열배나 많은 삼만 명을 보내는데, 직접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매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8:3).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단지 오천 명만이 매복에 투입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8:12). 그리고 두 번째 공격에서 죽은 ‘아이’ 성의 주민들은 남녀 모두 일만 이천이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8:25). 이들 수자는 그 자체로서 매우 사실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서로 간에 일관성이 없거나 또는 뚜렷하게 대조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숫자의 등장에 대해서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화자는 이야기의 수사적(修辭的) 목적을 위해서 다른 두 전승들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사적 목적이라 함은 이스라엘의 자만과 교만을 조롱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두 전승이라 함은 <아간 이야기>와 <아이 성 전투>로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처음의 전투에서 삼천 명의 군사를 보내어 36 명의 아군 사상자를 낸 것과, 두 번째 전투에서 순전히 매복을 위해서만 삼만 명의 군사를 보내어 만이천 명의 적군 사상자를 낸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인 즉은 이스라엘이 처음 보였던 교만한 태도를 비웃고 조롱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매복한 군사의 수가 삼만이 아니라 오천 명이었다 해도, 이는 분명 처음 삼천 명의 군사로 전투를 치르려 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조심스럽고 신중한 모습입니다. 믿음의 자세라고 할까요. 그리고 아이 성 주민이 만 이천 이나 죽었다는 화자의 진술(8:25)은 정탐꾼들이 그 성에 소수의 백성만 살고 있다는 보고(7:3)를 비웃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숫자는 이스라엘 전체 군사의 약 사분의 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참고. 4:3). 종합적으로 화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그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과업은 정탐꾼들이 보고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며, 이스라엘 혼자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성전(聖戰)입니다. 성전을 성전으로 보지 않고 동네 싸움 하듯이 달려나갔을 때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5절)
우리는 5절 하반에서 <신명기 전승> 특유의 표현을 만나게 되는데, 다름 아닌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화자는 앞에서 두 번에 걸쳐 이스라엘의 적에 대해서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2:11; 5:1).
3. 애도와 간구(7:6-12)
참담한 패배로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전에 그가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났을 때도 땅에 엎드린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때는 경배를 드리기 위함이었으며(5:14), 이번의 경우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지금의 상황은 치욕과 분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6절)
이 장면은 분명 기도와 예배의 상황인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상적인 예배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기도는 선임자 ‘모세’의 그것에 비하면 수준 미달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V. Hamilton, 「역사서 개론」. 강성열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48쪽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장광설(長廣舌)에 더 가까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셨나이까.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7-8절)
“슬프도소이다”(Hh;a, 아하흐)는 충격과 절망의 탄식입니다(삿 11:35; 왕하 3:10; 6:5, 15).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삿 6:22; 렘 1:6; 4:10; 14:13; 겔 4:14; 9:8; 11:13). 이 장면은 3-5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길갈’의 축제와는 지극히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애도는 광야에서 ‘모세’가 아닌 이스라엘이 내뱉었던 불평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야훼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민 14:3). 같은 지도자로서 ‘여호수아’는 선임 지도자 ‘모세’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지금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이름이 그 땅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9절)
그가 말하는 이름이란 다름 아닌 명성 또는 평판일 것입니다. 이 말속에는 중요한 <신명기 전승> 특유의 중요한 신학 사상이 담겨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즉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나 인격이 아닌 이름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스스로 성전에 자신의 이름이 거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신 12:5-28; 왕상 8; 신 26:15; 4:12; 왕하 23:27). 그런데 이스라엘 편에서 보자면 이 사실을 늘 아전인수(我田引水)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이나, 성전(聖殿)이나 또는 이스라엘의 능력과 동일시하고 싶다는 유혹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전(聖殿) 없으면 하나님도 없고, 이스라엘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는 아전인수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사관”에 따르면, 하나님은 비록 자신의 이름을 성전(聖殿)에 두시겠다고 하셨지만 그 성전이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에 의존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까? 그렇게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됩니다(10-15절):
11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12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1-12절)
자비로운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추상같은 검사의 논고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처음으로 듣게 되는 정보는 “(‘아간’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화자는 이점을 이미 서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1절). 범죄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약을 “어긴”(rb'[;, 아바르) 것입니다. 이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지나치다” 또는 “건너다”(pass over)로서,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널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참고. 3:4; 7:7). 알다시피 “유월절”의 의미도 여기서 파생한 것입니다. 화자의 해학(諧謔)은 이런 것이지요. 즉 ‘요단’을 건너기를 주저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은 너무 쉽게 건너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서> 7장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첫 번째 사례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 곧 죽음으로 나타날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저주받은 대상 즉 ‘헤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2절상)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으며(1:5, 9; 3:7),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1:17). 하나님의 임재는 ‘여호수아’에게도 큰 격려가 되었으며(3:7), 땅의 정복에 대한 희망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3:10). 그러나 이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그냥 “건너버린”(rb'[;, 아바르) 결과, 이 모든 약속과 희망 또한 이스라엘을 “건너가”(rb'[;, 아바르)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물 건너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위대한 기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가지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느냐 아니면 ‘헤렘’과 함께 하느냐 입니다. 선택은 당연히 스스로를 ‘헤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13절)
이로써 이야기의 흐름은 갑작스럽게 외부의 원수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내부의 원수에 대한 언급으로 움직여가고 있습니다(Hamilton). .
4. 심판과 제거(7:13-26)
어떻게 ‘헤렘’을 가려낼 것인가? 이 일마저도 이스라엘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도둑을 집적 가려내실 요량인 것입니다: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14절)
범죄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주사위를 사용하라는 지시가 이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화자는 주사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간’이 범죄하였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자를 가려내는 몇 가지 방법들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들 방법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컨대, 간음죄로 의심을 받는 여인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오염된 물을 그 여인에게 마시게 했습니다(민 5:11-31). 주사위를 던지는 방법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전쟁을 계속 해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에 관해서 묻습니다(삼상 14:37).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자 ‘사울’은 누군가가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주사위를 던져 범죄자를 찾아내고자 합니다(삼상 14:41). 그 결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뽑히게 됩니다(삼상 14:42). 이에 ‘요나단’은 자기가 소량의 꿀을 먹었노라고 대답합니다(삼상 14:43). 이것은 ‘사울’이 이전에 그의 군대를 향하여 한 맹세를 정면으로 위반한 행동입니다(삼상 14:24). 그러나 ‘요나단’이 아버지의 맹세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리가 없었으며(삼상 14:27), 따라서 그를 속량하려는 백성들의 결정(아마 대속의 제사를 통해서)으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요나’의 경우에도 볼 수 있습니다.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가 심한 풍랑을 만나 위기에 처하자, 선원들은 배에 탄 누군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결론을 짓고, 주사위를 던져 범인 색출에 나섭니다(욘 1:7). 이상 세 가지 에피소드들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스라엘이 범죄자를 가려내는 전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수사대가 한 범인 색출을 위해서 수사망을 점점 좁혀가듯 합니다: 지파 > 족속 > 가족 > 아간(16-18절). 결국 범인은 ‘아간’으로 밝혀지며, 그는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서 자백을 요구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19절)
그의 자백은 일견 칭찬할 만합니다(Hamilton):
20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21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20-21절)
우선 그는 공동체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범죄 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20절).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에덴 이야기>에서 화자가 ‘하와’의 범죄를 설명할 때 사용한 언어와 놀랄 정도로 유사한 것입니다: “여자가...본즉...여자가...따먹고”(창 3:6). ‘아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보고...취하였나이다.”
적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고백과 회개는 징계를 피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본문은 정상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Hamilton).
‘아간’이 어떤 종류의 물건을 취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쉐퍼’는 그가 훔친 두 종류의 물건에 대해서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F. Shaeffer, 「기독교 성경관」.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그의 진단에 따르면, ‘아간’은 두 종류의 유혹에 직면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금전적인 유혹입니다: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두 번째 유혹은 보다 은밀하고 교묘한 것으로서, ‘시날’ 산 외투 한 벌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이 옷은 당시 화려한 문명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바벨론’ 산 제품입니다. 그것은 성공과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를 세계인으로 승격시키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옷입니다(Schaeffer). 오늘날로 치자면, 값비싼 외제 자동차나 명품 브랜드를 지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간’은 이 멋진 옷을 입고 유명인사가 되어 교회 안을 거들먹거리며 활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아간’은 이중적인 범죄를 저지른 셈이 됩니다. 첫째, ‘여리고’에 있는 모든 사람과 물건들은 완전히 멸하지 않았습니다(참고. 6:17). 둘째, 은과 금을 ‘야훼’의 창고에 들이지 않았습니다(참고. 6:19). ‘아간’은 외투를 취함으로써 첫 번째 명령을 위반했고, 은과 금을 취함으로써 두 번째 명령을 위반했습니다. 그가 취한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들이므로, 그의 횡령은 용서받을 수 없으며, 여기에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징계가 결정된 다음에 내놓은 처방 즉 “때늦은 고백”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사건이 불가사의한 것은 그의 가족과 재산과 가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이스라엘 모두가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Hamilton, 52-53쪽.
“결속성의 원리”(solidarity)가 가장 근접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원리를 인류 전체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롬 5:12).
이야기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장소를 언급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2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26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24, 26절).
화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아골’과 관련해서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rk'[, 아카르)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rk'[, 아카르)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25절). 즉 ‘아간’(@k;[;,아칸)은 이스라엘을 ‘아카르’한 죄로, 하나님께서 그를 ‘아카르’하셨고, 그와 그의 가족과 그 모든 소유를 불태워 ‘아골’(r/k[,아코르) 골짜기에 묻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지은 지명이 “괴로움의 골짜기” 또는 “폐허의 골짜기”라는 사실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코 상서로운 시작이 아닙니다!
교훈과 적용
1. 배경: 문제 제기(7:1)
‘여리고’의 승리로 ‘여호수아’ 공동체는 축제의 분위기에 싸였습니다. 약속의 땅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의 정상을 향한 교두보를 마련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축제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하였으니... 이는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1절상).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접속사 ‘그러나’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반전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암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이 선언은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한 신학적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 본질적인 문제 한 가지만 다루고 넘어갑시다. 7장 전체의 문제의 핵심이자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간’이 저주받은 물건(하렘)을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아간’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그의 평소 생활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즉 평소 남의 말을 대충대충, 건성으로 듣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시험 문제를 출제하다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학생들은 대개 문제지를 대하면, 출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신중히 파악하려 하지 않고, 언뜻 보고 비슷한 문제다 싶으면 자신이 미리 외워둔 답안을 그대로 적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면 와서 항의를 합니다. 맞게 썼는데 왜 점수를 안주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점수는 출제자의 절대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출제자의 의도를 면밀히 파악하거나, 영 자신이 없으면 직접 재확인하면 됩니다. 설교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아간’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작전”에 대해서 심각하게 설교하고 있는 동안에 여느 때처럼 혼자서 딴 생각을 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리고 작전”의 심각성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문제는 늘 이런 식으로 살다보면 점차 남의 말이 우습게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 늘 ‘람보’로 살면서 교회의 연합기도에는 관심도 없이, 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관심사에만 매달려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공동체의 운명에는 별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교회의 사역보다는 항상 자신의 사역, 즉 직업이나 취미생활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과 돈을 투자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는 도무지 신뢰와 애틋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나라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 1:3)을 이 세상의 복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 모든 것을 먼저 구한 연후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여기서 범죄 하였다는 동사가 바로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경홀히 여기다” 또는 “불성실하다” 등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인류의 범죄가 어떻게 확장되고 심화되어 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롬 1:20-32). 처음에는 지극히 미미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은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감사치도 않게 되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과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 죄는 일종의 직무유기에 해당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죄를 말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인류는 보다 적극적인 죄악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거침없이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인류는 역사를 두고 온갖 종류의 죄악을 다 저질러 왔습니다(롬 1:29-32). ‘아간’ 역시 같은 전철을 밟았으리라 생각됩니다.
2. 오만과 패배(7:2-5)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 첫째 반응이 “그냥 내어 버려두는 것”으로 나타납니다(롬 1:24, 26, 28). “그래 너희들 멋대로 한 번 해 봐라!” 하나님께서 손을 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교만과 방자함입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가련한 ‘여호수아’는 이전처럼 정탐꾼을 보냅니다. 정탐꾼 이야기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만, 이들의 자신만만한 보고를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가 이 전투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평가입니다. 이 정탐꾼 이야기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이들의 자신만만한 보고를 들어 봅시다: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7:3).
사실 ‘아이’ 성의 군사는 이들의 보고처럼 결코 소수는 아닙니다. 적어도 일만 이천은 되었으니(8:25), 잘못된 보고는 아주 교만에 찬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두 번째 공격에서 ‘여호수아’가 3만 명의 군사를 보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8:3). 어쨌든 결과는 대참패였습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쫓겨났으며, 그 와중에 36명이나 사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왜 죽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어, 이게 아닌데... 하나님도 영 별 볼일 없구나.”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들이 왜 이처럼 처참한 패배를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보듯이, 그들의 보고 어디에도 그 유명한 고백, “여호와께서 우리 손에 부쳤더이다”(2:24)가 없습니다. 사실 이 정탐 이야기 어디에도 ‘야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책임질 일은 없습니까? 화자는 이 점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잠언서>는 좋은 지도자의 한 가지 특징이 무엇보다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활용 가능한 모든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잠 20:18; 24:6; 11:14; 15:22). 훌륭한 조언이 승리를 가능하게 한다면, 나쁜 조언은 패배를 불러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책임을 물을 만한 사고는 또 있습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희생된 36명의 이스라엘 사상자들이 바로 그것입니다(7:5).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한 마디!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언약에 충실할 때만 특권과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즉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에만 주어집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그 특권을 잃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의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해설자의 해학적 표현을 들어 봅시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7:5하). 이러한 표현은 그동안 하나님의 대적자들에게 대해서나 쓰던 표현이었습니다(2:11; 5:1).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2,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3. 애도와 간구(7:6-12)
참담한 실패 후에 ‘여호수아’는 비록 늦기는 했지만,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역시 지도자다운 모습입니다. 그는 지난 40년 동안 모든 실패의 원인이 항상 자신들 편에 있었고, 그 점을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면 문제는 즉각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서 터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심정은 정상이 아닌 듯합니다.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기는 하나(6절), 치욕과 분노로 아무 말도 못하고 하루 종일 이런 모습으로 꿇어 앉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간구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기 가장 쉬운 상황은 다름 아닌 환난과 고초가 아니겠습니까?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없습니까? 이렇게 꿇어 엎드려 애도하고 간구해야 할 무슨 문제는 없습니까?
‘여호수아’ 교회의 현재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배 또한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고, 승리는커녕 치욕의 패배를 당했으니 원만과 불평이 앞서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구하고 회개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원성과 불평이 앞서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겉으로는 짐짓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명성을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대적자들의 방자한 태도에 분개하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97-9절). 그의 요점은 이런 것이지요: “주님, 우리 이름이 없어진다면 당신의 이름 역시 사라질 것 아닙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성전에 자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성전에도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논리를 조금 확대해 보자면, 이스라엘의 성전이 사라지거나 이스라엘이 사라진다면 하나님의 이름 또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이처럼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의 착각이고 오만입니다. 그들은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의 이름 속에 가두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나 존재를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모든 원인의 제 일 원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서 이스라엘이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는 분입니다. 천지 창조 이전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4).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하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달처럼 말입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빛이 없다고 해서 해가 빛을 비추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빛을 내는 존재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착각하고 살다가 복음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오순절에 교회가 시작되던 당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언어로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다양한 방언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셨겠습니까? 참된 빛을 거부하고 스스로 빛임을 자부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언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언어)을 선포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 이스라엘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이 만사형통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입니까? 내가 만사형통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손상이 오는 것입니까? ‘여호수아’ 교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만사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는 뜻대로 일이 잘 안 풀릴 때, 하나님의 과거 행적마저 문제를 삼습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7절) 왜 우리를 여기까지 몰고 왔느냐는 것이지요. 나는 어떻습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런 항의 하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기독교인이 되어 이 고생을 하는가?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자비스러운 구원의 메시지를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추상같은 검사의 논고가 있을 뿐입니다(11-12절). 첫째, 놀랍게도 ‘아간’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가 범죄 했다고 말합니다. 즉 ‘아간’이 범죄할 때, 이스라엘 모든 지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이지요. 드디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속성의 원리라 부릅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전 인류에게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롬 5:12). 여기서 모두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각자 나름대로의 죄를 저질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함께 동일한 그 범죄에 동참했고, 그런 의미에서 공범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러나 “결속성의 원리”는 무슨 논리적인 사유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역사적이고도 체험적인 사례를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겠으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인식이자 선포입니다.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추상같은 논고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범죄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깨우침입니다. 범죄란 흔히 생각하듯 무슨 윤리∙도덕적인 잘못을 저지르거나 또는 사회적 계약을 어기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도덕불감증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죄의식이 없기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불감증은 단순한 도덕불감증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감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불감증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 직무유기(職務遺棄)일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나는 지금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까? 제자 삼는 일이 내 인생의 중요한 소명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까? 만일 이들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이 부정적이라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내가 이 문제들에게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범죄 하는 백성을 용서해주실 지는 몰라도 축복해 주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러한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능력과 생동감이 나타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라지는 편이 더 낫습니다. 전 공동체적으로 심각하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4. 심판과 제거(7:13-26)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영원한 특권은 그 사전에 결코 절망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엄청난 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또다시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하나님은 다시 얼굴을 돌이키십니다. 이래서 인간의 존재 방식이 선택이라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 아니면 ‘헤렘’과 함께 하느냐는 순전히 나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타락 이후 인간의 의지나 자유의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영역에 속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침에 너희는 너희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가족은 각 남자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7:14). ‘여호수아’ 교회에서 어떻게 누룩을 찾아내고 제거하는 지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처럼 범죄자를 상세하게 가려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7:14-18). 모두가 “듣고, 보고, 취하도록(깨닫도록) 하려 함일 것입니다.
누가 범죄 하였습니까? 충격적이게도 그는 ‘유다’ 지파에 속한 자입니다. ‘유다’ 지파는 열두 지파 중에서 보통 지파가 아닙니다. ‘요셉’의 유언을 들어 봅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 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8-10). 그렇습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에서 지도자가 될 지파였습니다. 지도자의 범죄는 비단 이스라엘 공동체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교회 내의 분열과 잡음은 초신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이 일으킵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지도자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드디어 ‘아간’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숨김없는 자백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7:19).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이나, 신앙적 어려움에 대해서 최소한 한 사람에게만은 고백하고 상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목자라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긴 해도 우리의 목장 모임에서 이러한 것들이 잘 되지 않으면, 이는 교회전체의 문제로 비화된다는 점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아간’ 자신은 끝까지 침묵하고 있습니다. 중간에라도 뛰쳐나와 그의 죄를 고백할 만한데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간’이 훔친 것이 무엇입니까? ‘쉐퍼’ 박사님의 진단에 따르면, 그는 두 종류의 유혹에 직면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금전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유혹에 빠져 결국 범죄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일련의 연속적인 동사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7:21). 사실 그는 조금만 참았어도 아이 성에서 그가 취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보다 은밀하고 교묘한 것입니다. 그것은 ‘시날’ 산 외투 한 벌입니다. 그게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입니까? 이 옷은 당시 화려한 문명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바벨론 산 옷입니다. 그것은 성공과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 옷은 따라서 그를 세계인으로 승격시키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값비싼 외제 자동차나 수입 옷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간’은 이 멋진 옷을 입고 교회 내의 VIP가 되어 뽑내고,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고 싶었을 것입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신약>의 초대교회에도 이러한 질병을 지닌 한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행 5:1-11). 그들은 괜한 짓을 해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아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그 부질없는 명예와 부를 탐욕스럽게 추구하다가 스스로 ‘헤렘’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디 그들뿐인가요? ‘아간’의 경우를 보면, 그의 아들, 딸, 그리고 그의 모든 소유가 ‘헤렘’이 되어 버렸습니다(7:24). ‘아골’ 골짜기의 돌무덤 속에서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장식한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아간’의 또 다른 이름은 ‘아골’ 입니다. 왜 이들은 회개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까요? ‘여호수아’의 절규를 들어 봅시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7:25상). 그들은 교회의 순결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연합과 일치를 해쳤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마땅히 교회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힌두교 잠언에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간’은 하나님과의 거룩하고도 엄숙한 약속(언약)을 우습게 알고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것이 고의냐 아니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생활방식과 직무유기적인 체질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에 대한 신뢰나 순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공동체의 관심사에는 아랑곳 않고, 오직 혼자만의 기도 방에 틀어 박혀 자신의 세계만을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공동체 전체에 아무런 영향도 줄 것 같지도 않았던 이런 생활 방식이 신기하게도 교회 전체의 문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범죄를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로 간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한 구성원의 잘못은 결국 그 가족 전체의 잘못이 됩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나는 혹시 ‘아간’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숨겨둔 ‘시날’ 산 외투는 없습니까?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십니다(요일 1:9). 그리하여 교회 전체가 건강하고 밝은 토양을 유지해 가도록 합시다.
토의와 연습
1. <여호수아서> 5장에서 8장까지의 네 개의 장은 하나의 주제 “언약”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이루는 한 편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문학과 신학에 대해서 간략하게 논의해 봅시다.
2. <여호수아서> 7장만을 따로 떼어놓는다면, <아간 이야기>로 명명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특히 “헤렘”의 신학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본 교재의 <서론>를 참고합시다.
3. 본문의 교훈과 관련한 나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다음 한 주를 위한 기도 제목으로 삼을 것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