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8과
갈렙에게 먼저 주어라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4:1-15약 33분 분량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14:14)
제 1부의 주제인 “정복과 전쟁” 이야기는 11장에서 끝이 나고, 제 2부의 주제인 “‘요단’ 서쪽 땅의 분배”에 대한 이야기는 세 장을 건너 뛰어 15장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여호수아가 온 땅을 취하여...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 남단은...(15:1).
그렇다면 중간의 이야기(12-14장)는 문학적인 일탈로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중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유의해서 살펴보면 12장의 기능은, “정복의 희생자”들을 ‘요단’강의 동과 서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제 1부의 절정내지는 결론으로 볼 수 있고, 이어지는 13-14장은 제 2부의 서론 내지는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장이 ‘요단’ 서편 땅을 분배함에 있어 따라야 할 대원칙을 제시하려는 것이라면, 14장에서는 그 원칙을 수행한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 땅을 분배한 자가 누구이며,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를 배제한 것인지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2-14장은 문학적으로 두 단원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책의 전체적인 주제를 일관되게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갈렙’의 주장과 고백을 통해서 땅과, 율법과, 지도자에 대한 “신명기 신학”의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이곳에 이르러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제 2부의 주제인 ‘요단’ 서편 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 아래와 같으니라(1절). 14장도 그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하나의 새로운 단락을 이루고 있으며(1, 15절), 이 두 절은 각각 책의 다른 곳에서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독특한 양식을 취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선 15절이 취하고 있는 결론으로서의 양식,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표현은 11:23하의 그것을 그대로 취함으로써 12-13장의 문학적 일탈을 뛰어넘어 11장의 내용을 계승 및 발전시켜가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두 개의 독특한 양식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14:1하의 시작 절입니다: “...이 아래와 같으니라.” 이와 유사한 양식이 12-13장 사이에서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저편...그 땅에서 쳐죽인 왕들은 이러하니라”(12:1하); (2)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이편...쳐서 멸한 왕들은 이러하니”(12:7); (3)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13:2); (4) “...이상은 르우벤 자손의 기업으로”(13:23하); (5) “이는 갓 자손의 기업으로...”(13:28); (6)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13:32). 다른 하나의 독특한 양식은 역시 11:23과 병행되는 표현으로서 “취하다”라는 동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1) “...모세가 그 땅을...기업으로 주었더라”(12:6); (2) “...그 땅을 여호수아가...기업으로 주었으니”(12:7하); (3)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러하니”(13:8하); (4)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 가족을 따라서 주었으니”(13:15); (5) “모세가...갓 자손에게도 그 가족을 따라 주었으니”(13:24); (6) “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으되...그 가족대로 주었으니”(13:29).
그러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정상적인 흐름에서 일탈하면서, 일견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새로운 두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습니다(실은 이 두 이야기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땅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잊고, 이 이야기를 듣게 위해서는 15장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화자가 들려주는 새로운 두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하나는 ‘레위’ 지파에 관한 것으로서(2-5절), 이미 앞에서 간략하게 두 번에 걸쳐 다룬 바 있습니다(13:14, 33). 이곳에서는 내용을 조금 확대하면서 21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다른 하나는 충성스러운 스파이 ‘갈렙’에 관한 이야기로서(6-15절), <민수기>나 <신명기> 등에서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던 주제입니다(민 13:14; 신 1:21-36). 적어도 ‘갈렙’의 입장에서 볼 때 아직 성취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가 본문을 이루는 구조적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 두 이야기가 이곳에서 필요한 것일까? 두 주제는 상호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본문의 배경과 역사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선 첫 번째 단락에서는 ‘레위’ 인들에 관한 주제와 함께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다른 주제들이 다소 복잡하게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문제; 그 땅을 취하는 문제. 이들 각각의 주제는 나름대로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최종 본문으로 완성되기까지 신학적 편집의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 편 두 번째 단락의 ‘갈렙 이야기’는 외견상 일종의 “원인론적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14절).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 즉 신학적 주제 선언일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사전 배경 설명도 없이 <갈렙 이야기>가 갑자기 등장하고 있긴 하지만(6절), 이야기는 처음부터 ‘여호수아’, ‘갈렙’, ‘유다’ 지파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상존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갈렙’ 자신이 털어놓고 있는 고백을 들어보면 그가 무엇을 주장하려는지 알 수 있습니다(7-12절):
1) 장수와 건강의 비결이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한 것이다(7절상, 10-11절);
2) ‘갈렙’은 ‘모세’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7절상, 8절하, 9절하, 14절);
3) ‘갈렙’은 그 땅을 약속받았다(9, 10절상, 12절).
그런데 바로 이 세 번째 주장이야말로 의미심장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일찍부터 ‘갈렙’이 밟는 모든 땅을 그에게 주기로 약속한 바 있습니다(9절). ‘갈렙’이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가 밟은 모든 땅이 아니라, 산지(山地) 즉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는 여러 성읍을 포함하는 그 산지만입니다(12절).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에게 ‘헤브론’만을 주었을 뿐입니다(13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13절)
이 사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정탐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민수기>(13-14장)에 비추어 볼 때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이야기의 핵심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갈렙’이 야훼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사실과(14:24; 참고, 민 32:11, 12), 또 하나는 다른 스파이들은 반대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입니다(14:4; 민 13:28, 31). 반역의 결과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민 14:39-45). 그런데 ‘갈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슨 보상이라도 받았습니까? <민수기> 화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그렇습니다. 약속만 받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 이야기>(민 13-14)는 일종의 미완성으로 끝난 셈입니다. ‘갈렙’의 영웅적인 행위가 어떻게 보상을 받았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은(14:6-15) 바로 그 빠진 부분을 채워주는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소위 <갈렙 전승> 중에 본문에 소개하고 있는 이러한 이야기가 보존되어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빠진 고리를 연결시키면서 역사적 ‘카텐자’를 도입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갈렙’이 받은 땅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받은 땅은 그가 밟은 모든 땅도 아니고, 먼저 요구한 산지도 아니며, ‘헤브론’이었습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14절)
어떻게 그가 이 도시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영웅 ‘여호수아’가 ‘유다’ 지파의 영웅 ‘갈렙’의 손을 들어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지파 ‘갈렙’이 ‘헤브론’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뜻합니까?
‘유다’ 지파를 대표해서 그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는 ‘갈렙’의 독백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6-12절).
긴장과 갈등이 느껴지는 연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 지파를 대표해서 ‘갈렙’이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의 역사적 상황을 연상해 본다면, 이 장면이 주는 분위기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서>에서 그리고 있는 ‘사울’과 ‘다윗’ 간의 갈등은 실은 두 인물이 속해 있는 ‘벤야민’과 ‘유다’ 지파 간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이런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건국 초기에, ‘갈렙’ 족속이 나서서 남방 ‘느게브’ 땅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분위기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멜 남방을 침로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삼상 30:14).
이와는 반대로 ‘다윗’의 존재 자체를 우습게 알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갈렙’ 족속 ‘나발’의 태도 또한 잘 알려져 있습니다(삼상 25). 물론 ‘나발’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급사를 당하고, ‘다윗’은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과 결혼을 함으로써 법적으로 ‘갈렙’ 족속의 재산을 차지하게 됩니다.
‘헤브론’은 ‘다윗’ 지파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입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곳이기도 하고(삼하 2:1-4), 아들 ‘압살롬’이 스스로 왕이 되어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곳이기도 합니다(삼하 15). 이처럼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건국 초기 정치적으로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바로 그 도시, 즉 ‘다윗’ 이전까지 ‘벤야민’ 지파에게 속해있던 도시가 바야흐로 ‘유다’ 족속 ‘갈렙’의 소유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단락의 신학적 의도는 지파간의 갈등이나 그들의 법적인 권리를 다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누가 이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를 강조함에 있습니다. 누가 그 권리를 획득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단락에서 계속 이어져 오던 주제입니다. 즉 ‘순종과 축복’이라는 “신명기 신학 사상”이 그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자야말로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갈렙’이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먼저 이스라엘의 요충지 ‘헤브론’을 차지할 자격과 권리를 갖춘 자입니다. 편집 비평의 관점에서 보자면, 본문은 결국 <신명기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서 화자는 오래된 <갈렙 전승>을 “인과응보”의 “신명기 사관”에 입각하여 재해석 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모세에게 명한 것처럼(1-5절)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백성이 차지한)기업”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항상 동의어처럼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는데, 그것은 “모세가 그들에게 준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동사로부터 파생되는 명사 형 단어 “기업”은 시적인 유사 반복처럼 책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1:23; 13:6, 7, 8, 14, 23, 28, 33; 14:2, 3, 9, 13, 14; 15:20; 16:5, 8, 9; 17:4, 6, 14; 18:2, 4, 7, 20, 28; 19:1, 2, 8, 9, 10, 16, 23, 31, 39, 41, 48, 49, 51; 21:2; 23:4; 24:28, 30, 32).
1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1-2절)
이들 표현들이 책 전체에 걸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명기 전승>의 손길을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신명기> 화자가 사용하던 이전 자료에는 “정착”이나 “주택” 등과 같은 다른 표현들을 사용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자손 대대로 이스라엘의 소유로 주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화자가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사실은, 그 땅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겨서 얻은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의 대가로 주신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요구할 수 있는 무슨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땅을 나누어 주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의 면면을 보면, 대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그리고 각 지파의 족장들입니다(1절).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신명기 전승>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신 10:6). 대제사장과 각 지파들의 우두머리로 구성된 책임자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 땅을 나누게 될 것인데, 이들의 권위와 책임에 대해서는 <민수기>에서 이미 상세하게 규정해 놓은 바 있습니다(민 34:16-29; 32:28). :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땅을 기업으로 나눌 자의 이름이 이러하니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니라. 너희는 또 기업의 땅을 나누기 위하여 매 지파에 한 족장씩 택하라. 그 사람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시므온 지파에서는 암미훗의 아들 스므엘이요. 베냐민 지파에서는 기슬론의 아들 엘리닷이요. 단 자손 지파의 족장 요글리의 아들 북기요. 요셉 자손 중 므낫세 자손 지파의 족장 에봇의 아들 한니엘이요. 에브라임 자손 지파의 족장 십단의 아들 그므엘이요. 스불론 자손 지파의 족장 바르낙의 아들 엘리사반이요. 잇사갈 자손 지파의 족장 앗산의 아들 발디엘이요. 아셀 자손 지파의 족장 슬로미의 아들 아히훗이요. 납달리 자손 지파의 족장 암미훗의 아들 브다헬이니라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명하사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을 나누게 하신 자들이니라(민 34:16-29)
이에 모세가 그들에게 대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명하니라(민 32:28)
그리고 그 땅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선택하고 있는데(2절), 이 역시 <민수기>에서 이미 규정해 놓은바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참고. 민 26:55-56; 33:54; 34:13). 이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이 자주 사용했던 것 같은데(잠 16:33), 나름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평한 방법으로 이 백성들이 채택한 듯합니다. 물론 정확한 의미나 사용 방법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땅을 분배함에 있어 속았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화자가 계속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한대로”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활 규범과 미래를 결정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적과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런 순종의 모티브가 제비뽑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어서 제비뽑기에 참여한 지파가 왜 아홉 반인지 그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두 지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요셉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오직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만 줄 뿐으로(3-4절)
제비뽑기에 참여한 지파가 아홉 반이라고 했을 때, 계산 상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열두 지파 중에서 동편의 두 지파 반과 ‘레위’ 지파를 빼고 나면 여덟 반 지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화자의 설명에 따라, ‘요셉’으로부터 두 지파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포함시키면 아홉 반 지파가 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포함시키는 것은 ‘야곱’이 그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는 전통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창 48:5-6).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레위’ 지파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민 18; 신 10:9; 12:12; 14:27, 29; 18:1; 수 13:14, 33).
그렇다고 해서 ‘레위’ 지파가 땅의 분배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닌 것이, 그들은 여러 곳에서 자신들이 살 도시와 목축지를 배당받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에 대한 이런 언급은 21장에서 반복해서 다룰 동일한 내용에 대한 예비 진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첫 단락을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예의 친숙한 표현을 통해서 신학적 의도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수미상관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5절)
그 주제란 말할 것도 없이 “순종”입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앞으로 구체적으로 소개할 내용(15장-19장)에 대한 서론적인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2. 갈렙부터 먼저(6-15절)
실제 땅의 분배는 ‘유다’ 지파로부터 시작됩니다(15:1). 그동안 정복 전쟁에서 ‘벤야민’과 ‘에브라임-므낫세’ 두 지파가 주로 조명을 받아왔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유다’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소 이외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승은 아마 ‘벤야민’ 지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성경>의 최종 본문으로 확정될 즈음에는 지파 간 갈등이나 적대감은 상당 부분 해소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Butler, T. C.(참고도서 1, 172쪽).
따라서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도 지파 별로 공평하게 땅을 분배하는 데에 있으며, ‘유다’ 지파는 ‘갈렙’의 특별한 역할로 인하여 가장 먼저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6절)
그런데 6절의 자료와 배경을 놓고 일련의 난제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길갈’이라는 장소에 관한 것으로서, 이곳은 책의 제 1부에서는 무대의 중심이었습니다만(4:19; 5:9; 10:6), 제 2부에 들어서는 단지 이곳에서만 단 한 번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점이 제 2부의 배경과 관련해서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또는 이 이야기에 국한해서 우연히 등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가 ‘길갈’로 나아왔다는 사실과,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땅을 요구하고 있는 사실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때때로 ‘갈렙’과 ‘유다’ 지파를 함께 묶어 언급한 적도 있기는 합니다만(민 13:6; 34:19), 둘 사이에 어떠한 혈연적인 기원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갈렙’은 ‘그니스’ 족속으로서(6, 14절; 민 32:12), 이 족속은 원래 ‘에서’의 족보에 속한 ‘에돔’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창 36:11, 15, 42). 물론 ‘갈렙’과 ‘그니스’ 족속을 함께 ‘유다’ 지파와 연계시키고 있는 곳도 있어(대상 4:11), ‘갈렙’이 ‘유다’의 한 지파의 후손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6절의 자료와 관련해서 소위 <갈렙-그니스 전승>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스라엘의 첫 사사 ‘웃니엘’이 여기에 속한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습니다(삿 3:9-11).
두 번째 단락의 중심인물은 ‘갈렙’입니다(6절). 그가 ‘유다’ 지파를 대표하면서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단락의 핵심 주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실은 이 부분은 독백의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만):
여호와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는 바라(6절하).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전환점을 이룬 사건입니다. 대화의 두 당사자 모두 그 사건의 결과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민 13:16; 14:6, 30, 38; 26:65; 32:12.
‘갈렙’이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회고함에 있어,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라고 말함으로써 ‘여호수아’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의도적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두 사람은 당시 그곳에서 다른 열 명의 스파이와 함께 그 땅을 정탐하러 떠났던 동료였고, 그 결과를 체험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민 13:30-33; 14;24). ‘갈렙’은 자신이 요구하고 있는 바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미 약속은 하셨으나, 아직 성취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을 ‘여호수아’에게 먼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8절)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9절상)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이런 표현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지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어쩌면 <갈렙 전승>으로 분류될 수 있는 <성경> 외의 전승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민 14:24; 32:12; 신 1:36). 그런데 바로 이 선언이야말로 본문의 핵심 주제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른 바 <갈렙 전승> 밖에서 이런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단 한 번 있는데, ‘솔로몬’에게 내린 <신명기>적 심판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왕상 11:6). 이 심판이 있은 후 이스라엘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니까 화자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갈렙 전승>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것에 대한 <신명기>적 보응은 땅을 차지할 권리뿐만 아니라, 육체적 건강과 장수의 축복까지 포함되고 있다고 ‘갈렙’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1-12절)
땅과 건강과 장수의 축복, 이 모두 “신명기 신학”의 핵심적 요소들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아낙 인’들은 거인 ‘네피림’ 족속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두려워 떨며 ‘가나안’ 문턱에서 하나님의 명령마저 무시하고 돌아서게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아낙’ 인들은 고대의 거인으로 불리던 ‘네피림’ 족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으며(민 13:33; 창 6:4),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신 2:10-11, 20-21). 특히 이들은 ‘헤브론’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민 13:22, 28).
따라서 만일 ‘갈렙’이 이들을 몰아낸다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신9:2).
‘여호수아’는 지도자의 권위를 가지고 ‘갈렙’을 축복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13절)
이러한 장면은 구약에서 우리가 자주 발견하는 것으로서, 족장들이 그들의 후손들에게 축복을 전해주고 있는 모습과 유사한 것입니다(참고: 창 27; 24:60; 31:55; 48:9 등등). ‘여호수아’는 ‘갈렙’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전해주었을 것이며, 축복의 내용은 땅과 후손에 관한 이른 바 “신명기적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창 1:28; 28:3, 26:3; 28:4; 시 37:22; 신 15:4, 14; 16, 17.
그러나 ‘갈렙’이 실제 차지한 땅은 ‘헤브론’뿐이었습니다. ‘헤브론’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 이야기가 전하는 바는 ‘갈렙’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먼저 ‘요단’ 서쪽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화자는 이 이야기를 기원론적으로 전함으로써, ‘헤브론’이 당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갈렙’ 후손의 소유로 전해지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14절)
‘헤브론’에 관한 기원론적 설명은 다음 절에서 조금 상세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5절)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인데, 문자적으로 “네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사람에 따라 “네 사람”(‘아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또는 “네 도시 연맹”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화자가 ‘아라바’를 도시가 아닌 사람의 이름, 즉 ‘아낙’ 족속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가장 무섭고 거대한 족속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족속의 이름을 ‘갈렙’이 차지한 ‘헤브론’과 연계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이야기의 결론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교훈과 적용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11-1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상충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두 본문은 인간의 책임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책임과 관련해서 <오경>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 사상이 하나 있는데, 흔히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이 사상은 <신명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신명기 사관> 또는 <신명기 사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서>의 핵심 주제 또한 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본문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개론>에서 진술한 바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갈렙’이라는 믿음의 전형을 통해서 그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 땅의 소유를 주장할 수 있으며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갈렙’은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8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8-9절)
그렇습니다. 화자가 두 번에 걸쳐 반복하고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그가 속한 ‘유다’ 지파는 그래서 ‘요단’ 서쪽 땅을 가장 먼저 차지하게 되고, 가장 끝까지 그 땅에 남아있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갈렙’은 혈통적으로는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에돔’ 족속에 가까운 ‘그니스’ 족속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이방인 혈통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에돔’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시 저주를 받았던 족속이기도 합니다(시 137:7; 렘 49:7-22; 사 63). 이렇게 볼 때 ‘갈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그의 가족이나 혈통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born of God)란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난 자”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되고, 누구나 처음부터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먼 훗날 이스라엘이 그 땅을 잃어버리고 포로로 잡혀간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이 ‘갈렙’의 모범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솔로몬’ 왕의 행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처음에 지녔던 ‘야훼’를 향한 열정과 사랑을 저버리고, 이방신을 쫓아간 자입니다(왕상 11). 그를 쫓아 이스라엘 역시 이후부터 점차 쇠락의 길을 걷다가 멸망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신명기>의 약속이 어김없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신 27-28).
결국 시대를 두고 변하지 않는 교훈을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그 스스로의 계획이나 이기적인 탐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자를 축복해 주십니다. 현실에 있어서 우리가 사는 동안 그분의 축복을 누리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신명기>의 변함없는 충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에게 명한 것처럼
“요단 서편 땅을 나눔에 있어 적용한 원칙과 권위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첫 번째 단락의 핵심적 주제가 될 것입니다. ‘요단’의 동과 서를 막론하고 그 땅을 기업으로 받기 위해서 이 백성이 따라야 할 대원칙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신명기>를 통해서 ‘모세’에게 천명하신 바, 계명과 율법이 바로 그 원칙이 됩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백성이 차지한)기업”이라는 구절이 등장할 때마다 항상 동의어처럼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는데, 그것은 “‘모세가 그들에게 준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시적인 유사 반복처럼 책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1:23; 13:6, 7, 8, 14, 23, 28, 33; 14:2, 3, 9, 13, 14; 15:20; 16:5, 8, 9; 17:4, 6, 14; 18:2, 4, 7, 20, 28; 19:1, 2, 8, 9, 10, 16, 23, 31, 39, 41, 48, 49, 51; 21:2; 23:4; 24:28, 30, 32).
<신명기>의 주제는 한 마디로 언약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대전제는 인과응보입니다. 즉 순종은 축복을 낳고, 불순종은 저주를 부른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한 법칙입니다. 사실 이 지극하고 단순한 원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상 제대로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음을 구약 전체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약 기자들(특히 바울)의 깨달음 인즉,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이 언약을 지킬 것으로 기대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교육적 효과, 즉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은 그들이 전쟁에서 이겨서 얻은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순종의 대가로 주신 선물입니다.
누가 그 땅을 나누어주었습니까? 정당한 권위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대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그리고 각 지파의 족장들이라고 말합니다(1절). 이 역시 <민수기>에서 각각의 권위와 책임에 대해서 규정해 놓은 바 있습니다(민 34:16-29; 32:28). 그리고 그 땅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택했는데(2절), 이 역시 <민수기>에서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은바(민 26:55-56; 33:54; 34:13),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이 자주 사용했던 것 같은데(잠 16:33), 나름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평한 방법으로 이 백성들이 채택한 듯합니다. 더 나아가 백성들이 자신들의 미래와 관련해서 행동을 결정함에 있어 자신들의 뜻대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대로 따라야 한다는 교훈적 메시지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그 교훈을 단락의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수미상관적으로 첨언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렙부터 먼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선발 공모에 이만 명이 넘는 응모자가 몰렸다고 합니다. 성별과 연령은 물론 직업도 아주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누구보다 관심을 끈 응모자가 있었는데, 67세의 모 그룹 명예 회장님이었습니다. 최고령자임에도 불구하고 체력과 어학 실력은 물론 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도전장을 냈다는 것입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는 ‘사무엘 울만’의 말은 이런 분을 두고 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이 노익장의 회장님처럼 인생의 제 1막을 부지런히 살아온 장년층이 또 다른 도전으로 인생의 2막을 여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환갑의 나이에 요트 한 척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며 독도 알리기에 나서는가 하면, 청년기 때보다 더 큰 인기로 승승장구하는 장년층 여배우들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인 ‘레블론’은 60세의 ‘수잔 서랜던’을 모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인식이 변하면서 노년층을 지칭하는 용어도 달라졌습니다. “노인”, “황혼”이라는 말이 흰 머리를 미화시킨 표현인 ‘실버’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연장자 또는 선배라는 의미의 ‘시니어’로 불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마케팅 영역에서는 이런 노익장을 가리켜 에플(APPLE)족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활동적이고”(Active), “자부심이 강하며”(Proud), “안정적이며”(Peace), “고급문화를 즐기는”(Luxury), “경제력”(Economy)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노인들은 더 이상 사회의 주변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련하고,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젊은이들에게 없는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심과 큰 흔들림 없이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회의 중량급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나라의 경우 시니어들은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는 듯합니다. 마흔만 넘어도 밀고 올라오는 부하를 부담스럽게 쳐다보고 명퇴라는 말 앞에서 몸이 뻣뻣해집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하는 조로(早老)를 부추기는 풍토가 나이 먹는 것을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니어가 되려면 용감하게 나이의 벽부터 넘어야 합니다. 미국 UCLA 신경학자 ‘조지 바트조키스’에 의하면, 중년이 되어야 뇌에 들어오는 직접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가공해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주간지 <TIME>은 인간의 인지 기능이 50-60세에 절정에 이른다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현대 여성의 의상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세계적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 역시 71세부터 절정기를 맞았습니다. 나이의 벽을 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외모를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몸이 튼튼해야 마음도 튼튼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기적인 운동으로 체력을 키워서 탄력있고 깨끗한 피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니어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열정이 생깁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시니어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습니다. 균형된 사고와 인식을 심어주는 일은 성숙한 눈이 있어야 하고 그 몫은 시니어의 것입니다. 미국 일리노이 본사가 있는 대형 농기구 제조업체 ‘디어 앤 컴퍼니’의 4만 6000여 근로자 가운데 35% 이상이 50세 이상입니다. 70살이 넘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이곳에 소개한 글은 이미지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하민회 씨가 <조선일보> 시론(時論)에 “아름다운 시니어”라는 제목으로 쓴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 조선일보, 2006년 5월 31일자.
두 번째 단락의 중심인물은 이스라엘의 노익장(老益壯) ‘갈렙’입니다. 과연 그를 “아름다운 시니어”로 부를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유다’ 지파를 대표하면서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있습니다. 85세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아주 당당하며, 요구 사항 또한 질서정연하고 조리가 있어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선 그는 자신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여호수아’에게 먼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데스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는 바라(6절하)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전환점을 이룬 사건입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거부하고 반역한 이스라엘은 결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저주와, 반대로 ‘갈렙’은 그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 그것입니다(민 14:20-24).
40년이 지난 지금 ‘갈렙’은 왜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숙제를 마무리해야겠다. 그가 하신 약속 중 나에 관한 절반의 약속은 아직 이루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가 이 주장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명분이 없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8절)
‘갈렙’은 지금 이 단락의 핵심 주제를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즉 누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자격에 관한 선언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처럼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수 있을까요? ‘갈렙’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자만이나 허세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고백을 통해서 그가 지난 45년을 일관되고 신실하게 ‘모세’의 언약만을 믿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겨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10절).
‘갈렙’이 받은 축복은 단순히 땅만이 아닙니다. 나이 85세가 되었음에도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건하고, 활기 넘친 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청년의 꿈과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11절). 대개 이 나이가 되면 집에 들어앉아 손자나 보며 노인에게 걸 맞는 손쉬운 일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갈렙’의 사전에는 은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비전으로 힘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내가 필경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12절)
‘아낙’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땅에 살던 거인 ‘네피림’ 족속들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이들을 두려워하여 ‘가나안’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명령마저 무시하고 돌아서게 만들었던 그 족속들이 아닙니까? 바로 그들을 정복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새로운 정복을 이루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란 없다고 말입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12절하)
‘갈렙’의 이런 모습은 승리 신학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누구나 이런 믿음의 축복을 받아봤으면 하는 소망을 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지도자의 권위를 가지고 승인과 축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호수아’는 ‘갈렙’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전해주었을 것이며, 축복의 내용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신명기적 축복”으로서, 주로 땅과 후손에 관한 것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준 것은 ‘헤브론’뿐이었습니다. ‘헤브론’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갈렙’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먼저 ‘요단’ 서쪽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화자가 ‘아라바’를 도시가 아닌 사람의 이름, 즉 ‘아낙’ 족속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무섭고 거대한 족속들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이름을 ‘갈렙’이 물려받은 ‘헤브론’과 연계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야기의 결론-“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갈렙’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땅을 나누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믿고 따랐던 ‘갈렙’이 그 모든 축복을 상급으로 받을 수 있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본문은 그 핵심 사상을 전하기 위하여 두 가지의 전승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두 가지 전승이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3. 나는 ‘갈렙’과 어떻게 다릅니까? 다음 한 주 동안에 내가 차지할 땅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기도 제목은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얼마나 구체적이며, 그것을 얼마나 자주 점검하고 지냅니까? 한 주간의 목표는 무엇이며, 그것을 얼마나 성취하며 지냅니까? 이번 한 해의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 시점에 그 목표의 몇 %가 진척되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