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일본의 참상을 보면서
김태정 목사누가복음 13:1-5약 9분 분량
지진과 해일(海溢)이 일본 동북부 해안지방을 강타하던 지난 주 어느 날, 운전 중에 우연히 극동방송의 주일예배 실황 중개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예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설교의 요지인 즉은 일본 국민은 이때를 놓치지 말고 우상 숭배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명시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일본이 겪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결과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하겠습니다.
이 같은 설교를 이 목사님만 행하신 것이 아니라, 그 주간 우리나라 많은 교회에서 같은 맥락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용기 목사님 역시 한 기독교 인터넷신문 인터뷰에서 비슷한 맥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진으로) 경고한 것 같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옛날 이스라엘의 사고 습관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이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불행은 죄의 결과라는 인식 말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불행이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았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일본이 겪고 있는 대재앙에 대해서도 어쩌면 이들 목사님들의 진단이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은 시간과 장소를 가려 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웅변보다는 침묵이 더 금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웅변을 듣고 듣는 이가 회개가 아니라 분노로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할 경우라면 웅변은 은(銀)은 고사하고 독(毒)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는 “때”에 대해서 지혜의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6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3:6, 8)
우리 기독교인의 고질적인 질병 가운데 하나가 늘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윤리․도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 무엇인가 진단해주고 그 원인을 알려주려 합니다. 한 마디로 한 수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지요. ‘욥’의 세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문제가 없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과연 기독교 국가라 일본보다 윤리․도덕적으로 한 수(手) 위에 있는 것일까?
수년 전 미국 ‘버클랜드’ 교회의 김 금하 전도사님이 대학생 선교 단원을 이끌고 일본 선교 여행을 할 때의 일입니다. 기차 여행 중에 한 학생이 여권을 포함한 모든 소지품이 든 가방을 기차에 두고 내려버렸습니다. 나중에 이 학생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전도사님에게 사실을 알렸고, 전도사님은 당장 역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사무실 직원은 아주 태연하게 웃으면서 다음 정거하는 역 사무실 분실물 보관소에 그 물건이 곧 도착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조금 후 그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승객 중의 한 사람이 그 물건을 맡겨놓고 갔으니, 다음 열차 편으로 물건을 돌려보내겠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은 훗날 이 일을 회고하면서, 그 사건은 충격보다 더한 분노로 다가왔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정직성에 충격을 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역무원의 여유 만만하고 자신 만만한 태도에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기 사회에 대해서 그토록 깊은 신뢰와 자신을 가지며 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지금 세계 사람들은 일본에서 일어난 대 참사에 한 번 놀랐고, 일본 시민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또 한 번의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절제와 질서, 인내와 침착함, 정부를 비롯한 권위에 대한 순종과 신뢰,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 때문입니다. 외신들은 일본인의 인내와 질서를 “인류정신의 진화”라며 극찬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이런 정신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본에서 오래 살다온 한 기자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만물상; 조선일보 2011/3/15 字). 즉 우리말도 제대로 떼지 못한 자기 딸아이가 일본에 살며 세 살 때 배운 말이 “차례” 즉 순서를 뜻하는 “준반(順番)”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가르쳐 준 사람은 보육원 교사가 아니라, 또래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려던 아이들은 다투지 않고 “준반, 준반”을 외치면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먼저 미끄럼을 타려던 자기 딸도 어느새 “준반”을 외치며 줄을 서더라는 것입니다.
일본 엄마들은 “남에게 폐(迷惑; 메이와쿠) 끼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가정교육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지하철에서는 “다리를 꼬거나 뻗으면 남에게 폐가 됩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하루 종일 나옵니다.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민감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자신은 절제하는 “수신(修身)문화”가 바로 이런 것이지요. 일본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에는 “메이와쿠 방지 조례”라 하여 “남에게 현격히 폐를 끼치는 행위”를 법으로 금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지난 2009년 11월 부산 사격장 화재로 10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숨졌을 때도 부산에 온 가족들은 통곡 대신 침통하게 무릎을 꿇은 채 흐느낄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의 장례식은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최근 우리가 TV를 통해 보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다리를 다친 환자는 구조대가 도착하자 미안해하며 “나보다 더 급한 환자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생필품이 부족해도 약탈이 없고, 수퍼마켓 앞에는 수백 미터의 줄이 이어졌지만 새치기가 없습니다. 도쿄전력은 14일부터 지역별로 나눠 강제 정전을 하기로 했지만, 이날 오후까진 그대로 전기를 공급했다. 지하철 회사는 운행을 제한했고, 시민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절전(節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네티즌들은 “파친코와 유흥업소 사장님들. 조금만 참자”는 메시지를 올렸습니다.
“남편과 연락이 안 된다”며 애끊는 구조 요청을 하는 피난소 여인은 절규 대신 고개만 숙입니다. 도로가 망가져 차가 다니지 않는 센다이 도로에선 시민들이 지금도 파란 불을 기다렸다가 길을 건너고 있습니다. 공영방송 NHK는 흥분하지 않고 뉴스와 피난 정보만 신속히 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지금 속에서 터져 나오는 피눈물을 억누르며, 놀라운 의지로 시련을 견뎌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퇴를 불과 육 개월 앞둔 한 원자력발전소 기술자가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대를 자원하고 있는 모습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이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내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자, 그분의 아내는 “온 나라가 당신 손에 달려있으니 최선을 다해 달라”고 화답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원전 발전소 사수 결사대는 이 분 외에 이백여 명의 자원자가 더 있다고 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내 인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우리나라 교인은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사고를 통해 나는 정말 다시 한 번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부자는 돈만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구나. 정신 상태가 부유해야 하는구나. 일본이 세계 일등 경제 대국이 된 것은 그저 돈이 많아서 된 것이 아니었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서 나는 깊은 회의에 잠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일본과 대한민국 중에서 어느 쪽이 기독교 국가이며, 어느 쪽이 우상숭배 국가인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꼽지 않을까요?
기독교국가로 자처하는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인지 맘몬을 섬기고 있는지 구분이 잘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서로 멱살을 움켜지고 주먹질을 해대며, 교단 회장이 되기 위해서 돈으로 선거를 치르며,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식의 반(反) 지성주의에 빠져 지식을 가볍게 여기며, 속성재배에 맛을 들여 연습과 훈련을 게을리 하며, 성령 충만이 사려 깊은 인격 형성과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뺀 나머지 모두를 신봉하고 따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사재기나 품귀 현상이 일본에서나 있을 법 한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중국과 대한민국에서 더 야단들이라고 합니다. 지금 중국 가게에서 소금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소금 속에 든 요오드가 방사능 피해를 완화시켜준다 하여 사람들이 사재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삼등국민의 모습입니다. 졸부의 모습인 것이지요. 돈은 있는데 머리와 정신이 텅 빈 사람 말입니다. 얼마 전 연평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북한군의 폭격으로 온 섬이 난리가 났을 때, 빈집을 골라 약탈과 노략질을 하던 몇 사람이 붙잡혔다고 합니다. 정말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짐승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일본을 향해서 회개를 촉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래도 그렇게 하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본 국민을 부축하고 위로하자는 움직임이 폭넓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난을 겪는 일본 국민을 감싸 안는 첫걸음은 무엇보다 일본의 현 상황을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언론도 일본 대지진을 보도하면서 써야 할 말, 쓰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야 할 것입니다. 한 미디어가 “일본 침몰”이라는 제목을 달자 일본의 네티즌들이 “일본 침몰이 기쁜가?”라고 반응했다 합니다. 상대의 반응이 어떻다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살폈어야 할 대목인 것입니다.
일본에 닥친 재앙과 일본 국민이 당한 현재의 사태를 우리 경제의 손익(損益) 차원에서 다루는 듯한 표현도 삼가는 게 옳다는 생각입니다. 윤리적 판단 이전에 사람의 도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대지진이 터진 날 밤엔 어느 방송이 특집 메인뉴스에서 “지진 때문에 한류 스타들의 일본 공연과 출연 일정을 조정할 수밖에 없어 신 한류 열풍이 위축될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일본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시청자들도 어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대부분은 이웃 일본이 겪고 있는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나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같은 반일(反日)-항일(抗日) 단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들 단체는 지난 19년 동안 해 오던 시위(示威)를 멈추고, “일본이 국가적 재앙을 슬기롭게 극복하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귀국 사할린 동포들도 적은 돈이나마 쪼개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국민은 당장 먹을 것, 마실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생지옥 같은 처지에서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질서정연한 시민의식을 보여 줘 지진에 놀랐던 세계를 다시 한 번 놀라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일본 국민의 등을 감싸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찾았으면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5-16)
더불어 나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실천 사항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첫째, 교통질서를 잘 지키자.
둘째, 길거리에 함부로 쓰레기나 오물을 버리지 말자.
셋째, 사재기를 하지 말자.
넷째, 새치기를 하지 말자.
다섯째, 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니자.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