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과
마태복음 개관 (다른 원고)
김태정 목사마태복음 20:1-17약 111분 분량

<구약> 사건의 중심이 되는 “출애굽”은 ‘야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행위로서, 이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이제 ‘시내’산 아래에 진(陳)을 쳤다. 이 백성은 이 산에서 천둥과 번개를 보고 들었으며(출 19:16-19),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계명”을 주셨다(20:1-17). 그리고 선언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황송하게도 스스로를 “언약”(言約)의 틀 속에 자신을 구속(拘束)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이스라엘도(자발적이긴 하지만) 당연히 그 틀 속에 스스로를 묶어야만 할 것이었다. 언약이란 앞에서도 밝혔듯이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영원히 이 산에 머물 수가 없다. 그들의 목적지는 이곳 황야가 아니라 바로 “그 땅”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주변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구별된 삶, 즉 “거룩함”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삶”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즉 거룩한 삶의 가시적인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이 규칙적으로, 그리고 항시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련의 제의(祭儀)를 통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께서 제정(制定)해 주신 제의를 통해서 (1)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방식(the way to God)과 (2)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the walk with God)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었다.
<마태복음>의 문학
<레위기>의 문학적 특징과 관련된 질문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구조와 단락 분석에 관한 것으로서 전체 구조를 여섯 단락으로 볼 것인지 또는 두 개의 단락으로 단순화 시킬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1. 명칭
<오경>의 다른 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헬라’ 식 이름과 ‘히브리’ 식 이름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히브리’ 식 명칭은 책의 첫 문장에서 따온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와이크라)(1:1)이며, 책의 ‘헬라’ 식 명칭 <레위기>는 <칠십인 역>의 제목, “레위 족속에 관한 책”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는 책의 이름으로 적절치 못한 것이, 책의 중심인물이 ‘아론’이지 ‘레위’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론’이 ‘레위’족속에 속하긴 하지만, “제사장”적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은 ‘아론’과 그 후손이지 단순한 ‘레위’의 후손들을 망라한 것은 아니다.
책의 또 다른 이름으로 <모세의 세 번째 책>이 적절하다 할 수 있는데, <오경>을 ‘모세’의 일대기(一代記) 내지는 전기(傳記)라고 전제할 때, <레위기>는 <출애굽>에 이은 세 번째 책이 되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도 이 책은 <출애굽>의 이야기 순서를 잇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출애굽> 25-31장은 이스라엘의 제의(祭儀)에 관한 제반 사항들, 즉 성막(聖幕)과 기구들, 제사장의 의복과 임명에 관한 사항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어지는 35-40장은 성막과 기구들, 제사장의 복장들을 어떻게 만드는 지에 관한 규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제사장들의 안수(按手) 즉 임명에 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바로 이 부분에 관한 내용을 <레위기> 8-10장에서 다루고 있으며, 이곳에서 ‘모세’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레위기>가 단순히 제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예: 10, 24장). 더 나아가 이 책의 매 장(章)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레위기>가 기본적으로 “이야기”(narrative) 형식의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이 점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모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음을 놓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2. 양식과 문체
<레위기>는 문학 양식(樣式)에 있어 “이야기”인가 아니면 “율법”인가?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이 “제의”와 “거룩”에 관한 계명(誡命)과 율법(律法)으로 이루어져 있어, 당연히 후자(後者)를 택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안에서 이야기적 요소를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이야기는 책의 벽두에서부터 등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 에피소드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이스라엘의 성막(聖幕)으로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행동 규범에 대한 지침을 내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1).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비록 짧기는 하지만 8-10장 및 1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 역시 계명이나 율법이 아닌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볼 때, <레위기> 역시 <출애굽>에 이어 <오경>의 기본적인 문학 양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들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율법의 배경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과거사(過去史)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대의 독자들에게 교훈과 경계를 주기 위한 신학적인 목적을 지닌 과거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학 화 된 역사” 내지는 “이야기 화 된 역사”이다. 신학자 Damroschk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역사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율법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레위기>는 계명과 율법을 가장 명료하고 단순하게 제시하면서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일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과 대화하며, 그분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애매모호한 문학적 수사(修辭)를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위기>는 <구약>의 모든 책 가운데 문학성이 가장 결여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책은 <구약>의 다른 책들에 비해, 독자들의 심미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여 정서적인 감동을 유발하는 일에는 다소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구조
<레위기>의 구조는 <오경> 내의 다른 책들에 비해 구조 분석이 비교적 용이한 편이다. 새로운 단락의 시작과 끝이 표제어(標題語)와 그에 상응하는 마무리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웬햄’(G. Wenham)의 구조 분석 방식을 따라 개략적으로 네 개의 단락으로 구분해 보면 아래 도표와 같다: 참고도서 2: ‘트렘퍼 롱맨’(Longman III, Tremper) 역시 기본적으로 유사한 구조 분석을 따르고 있다(참고도서 3,).

4. 이해와 해석
<레위기>는 ‘유대’인 자녀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책으로 중요한 책이긴 하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멀리하고 싶은 책이다. 오늘날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레위기>를 본문으로 설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는 참으로 딱하다 할 것인데, 이 책이야말로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가장 분명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약>에서 등장하는 “구속”(救贖; atonement)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레위기>가 없이는 이 개념을 결코 설명할 수가 없다.
현대 독자들이 <레위기>를 멀리하고, 기피하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할 것이다. 첫째,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일련의 종교적 “제의”(祭儀)가 시청각적인 설명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가시적(可視的)으로 보여주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 이들 제의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전혀 불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셋째, 각종 제의나 의식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즉 과거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들 각종 제의나 행사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내용 분석을 시도하기 전에 먼저 이 문제점들부터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가시적 표현. 현대 독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에 참여하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각종 제사 의식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보기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히브리 성경>이 큰 소리로 회중 가운데서 낭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만큼, 이를 듣고 있는 회중은 각종 제사를 어떻게 드리는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의 전체적인 과정은 물론, 특별히 각 제사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 의식을 어떻게 가시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해보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려보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한다 해도 여전히 고대 이스라엘이 이해하고 있던 것만큼은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레위기>에서는 희생제사에 바칠 짐승을 죽이기 전에 네 발을 묶어야 한다는 언급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했고, <창세기>에서는 이스라엘도 같은 방식을 따랐음을 시사해주고 있다(참고. 창 22:9). 또 하나 <구약>에서 거의 전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무슨 말이 오갔으며,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왜, 그리고 무슨 제사를 드리는지, 제사장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제사장들 역시 제사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과연 그 제사를 받으셨는지 그 사람에게 아무런 확언을 해주지도 않고 돌려보냈을 리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레위기>에서 볼 수 있는 바는 기껏해야 제의에 관한 일련의 규칙 정도이지, 이처럼 상세한 분위기나 절차 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無知)하다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성전 예배에서는 <시편>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인데, 이나마도 <레위기>에서는 아무런 힌트조차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레위기>에서 그리고 있는 각종 제의나 행사의 분위기나 절차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의미와 의의. 현대인들은 <구약>에서 그리고 있는 각종 제사나 제의에 대해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온갖 도살(屠殺) 기구가 널려있고, 살아있는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피를 튀기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예배를 그려보라! 이는 오늘날 많은 <구약> 신학자들의 저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들 책들은 “구약 신학”을 논함에 있어 <레위기>를 <오경>의 핵심에 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즉 이들은 “종교적 제의”야말로 고대 사회의 핵심 가치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한다.
사실 종교적 제의를 포함해서 제반 의식들은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다. 식탁 예절만 하더라도 나라마다 다르다. 한 나라에서 받아들이는 식탁 매너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대 간의 차이도 있다. 젊은 세대의 행동 방식은 노인 세대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예배의 형태 또한 교단에 다라 많은 차이가 나기도 한다. 찬양의 형태도 그렇다. 한 교단에서 허용되는 박수치기나 율동 등이 다른 교단에서는 금기 시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의식(儀式)의 형태나 모습은 관습으로 굳어지고 전래(傳來)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관습은 한 사회의 의무사항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예컨대, 복장(服裝)의 경우만 해도 장례식이나 결혼식에서 각기 달라야 한다. 평소 내가 혐오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내가 그의 죽음을 아무리 고소하게 여길지라도 적어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한다면, 적절한 예복을 갖추고 가야 한다. 교회나 회당 예배 시간 중에는 모자나 선글라스를 벗어야 한다. 북미(北美)에서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 만나 칠면조 고기를 함께 나누어먹는 시간이다. 내가 이를 원하든 않든 사회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종의 규범이나 요구사항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들 관습들을 거부한다면 사회는 나를 무뢰한 취급을 할 것이다.
기념식도 그렇다. 각 나라는 지키고 기념해야 할 국가적 날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3.1절, 4.19, 6.6 현충일, 8.15 광복절, 등등이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 가치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각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조상의 기일(忌日)이 그것이다. 교회라면 부활절을 결코 생략할 수 없다. <레위기>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던 제사나, 정결 의식이나, 종교적 기념일, 절기 등을 다루고 있다. 현대 독자는 이들을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기본적 가치가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해와 해석. 고고학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제의나 절기 등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이해는 별개의 문제이다. 고대 이스라엘 인 중에서 지금도 살아남이 각종 제사의 의미나 차이와, 왜 그러한 차이가 있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레위기>는 여전히 난해한 책이다. 특히 각 제의나 기념식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으므로, 이 책은 오늘날 더욱 어려운 책으로 남아있다: 예컨대, 문둥병 환자가 병이 나았을 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레위기>에 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즉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을 제의들이 오늘날에는 신비나 수수께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나 다른 사회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통해서 일말의 통찰력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난 20여 년 동안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레위기> 등과 같은 <구약>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어졌고, 학자들 사이에 상당 부분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5. 내용
5.1. 제 1부: 제사법
제사장의 임명에 관해서는 <출애굽>에서 이미 다룬 바 있지만, 실제 <레위기>(9-9장)에 이르러서야 임직식이 행해지고 있다. 제사장의 임직과 관련해서 다양한 제사가 필요한데,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 사항은 여태까지 없었다. <레위기>에서 이들 각종 제사들을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책의 구조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책의 제 1부는 이 도표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 1부는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제사를 드리는 자(예배자)의 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러주고 있다: 제물은 어떤 것을 드려야 하며, 예배자가 할 몫은 무엇이며, 제사장이 해야 할 몫은 어떤 것인지 등등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제사장과 관련한 제사의 규정들을 담고 있다. 예컨대, 바쳐진 제물의 부위(部位) 중에서 어떤 부위가 제사장의 몫인지를 구분해주고 있다.
제 1부의 구조를 희생제사의 종류 별로 구분해 보면 아래 여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단락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는 제목과 “누구든지 예물을 드리려거든”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

1. 번제.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태운다는 의미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다른 희생 제사의 경우, 제물의 일부만 제단 위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남기거나 때로는 예배자들과 나누어 가지기도 한다.
번제에 관한 규례는 제 1장의 처음 두 절에서 제사에 관한 일반적인 지침이 있은 후, 세 개의 단락에서 등장하고 있다: (1) 3-9절; (2) 10-13절; (3) 14-17절. 이와 같은 구분 방식은 <레위기>에서 자주 만나는 일반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들 세 단락에서 번제에 합당한 짐승의 종류나 상태,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장의 역할 등을 규정하고 있다. 짐승의 종류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에 한하며, 그 상태는 아무런 흠이 없는 최상의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야생 짐승이나 상처가 난 짐승은 드릴 수가 없다.
예배자는 짐승을 가져와서,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按手)하고, 짐승을 도살하되, 그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아론’의 아들들)은 짐승의 피를 모아, 제단 위에 뿌리고, 각을 뜬 짐승을 모두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운다. 이때 예배자와 제사장의 역할 구분이 중요한데, 제사장만이 짐승의 피를 다룰 수 있으며, 제단에 접근할 수 있다.
번제의 핵심은 짐승을 죽여 제단 위에서 태우는데 있다. 이는 그 짐승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까? 단순히 드리는 자의 너그러움을 드러내는 행위일까? 그러나 그 이상이다. 드려지는 짐승은 드리는 자를 위한 “속죄”(贖罪, atonement)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4절). 즉 예배자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짐승은 곧 나 자신이거나 나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예배자는 하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속죄란 일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은 말하는데, 성경적 의미의 속죄는 인질을 붙들고 있는 납치범에게 지불하는 엄청난 액수의 몸값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피해를 입은 자에게 지불하는 일종의 보상(報償) 같은 것으로서, 보상액도 실제 입은 피해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다(참고. 출 21:30; 잠 6:35). 즉 <구약>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의 기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제사를 드리는 자는 짐승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보상액으로 지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짐승을 대신 받으신다는 것이다.
번제가 갖는 효력에 대해서 <창세기>에서 두 가지 핵심 제사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양을 받으신 경우다(22장). 하나님을 이를 통해서 “아브라함 언약”, 즉 “온 땅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재확인시켜주신 것이다(창 22:8). 또 하나 더욱 인상적인 사례는 대홍수 이후 ‘노아’가 드린 번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비록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의 죄는 상존할 것이지만(창 6:5; 8:2), 그렇다고 그로 인해서 인간을 다시 물로 심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번제가 올리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셨기 때문이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악한 속성을 드러낸 바 있어(출 16-17, 32장), 그 때마다 번제를 드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번제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경우에 해당한다기보다는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의 죄성(罪性)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준종이나 헌신의 의미도 담고 있기도 하다.
2. 소제. 소제(素祭, the cereal offering)란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로서, 종종 가난한 자가 번제(燔祭) 대신에 드릴 수 있는 제사였다. 그러나 대개 짐승을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리는 것이 상례였다. 소제 역시 번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이긴 하지만, 번제와는 달리 제물의 일부만 제단 위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렸다. 그런 점에서 소제는 제사장의 수입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소제는 밀가루나 또는 구워서 만든 빵의 형태로 드릴 수 있었다.
3. 화목제. 화목제(和睦祭, the peace offering)는 번제와 마찬가지로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 다만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는 때로 하나님 앞에서 서원(誓願)을 행할 때이거나, 또는 고기를 겻들인 식사로 무엇인가 기념할 때였다. 서원을 하는 경우는 대개 심한 병을 앓고 있을 때이거나, 또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우일 것이다. ‘한나’의 기도를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1). ‘한나’는 ‘실로’의 성전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으며, 이 때 가족은 희생 제물을 드렸을 것인데, 특히 그녀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제물은 넉넉하게 드렸을 것이다(삼상 1:24).
이 때 드린 제사는 아마 화목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배자가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제사가 바로 화목제이다. 짐승의 일부는 태우되,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었으나, 일부는 예배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그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레 3:3-4; 7:31-35). 이 제사 역시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제사였으나, 제사의 주된 목적은 축하(또는 기념)하기 위한 것이지 죄의 구속이나 속량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제사도 즐거움 가운데 드린 것이었다.
4. 속죄제. 속죄제(贖罪祭, the sin offering)는 <레위기>에서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제사이다. 그리고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아주 다양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저지른 죄나 또는 태만죄(怠慢罪)에 대한 속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외도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경우, 피부병을 앓았을 경우, 또는 제사장으로 임직받았을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제사의 절차는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 예컨대, 다른 제사에서는 짐승의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물로서 제단 사방에 뿌리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속죄제의 경우는 죄인의 직위 여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즉 피의 일부를 번제단이나, 성소 안의 향단(香壇) 뿔에 바르거나,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는 지성소 안의 언약궤에도 바르기도 했다.
피를 바르거나 뿌림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죄로 오염된 제단이나 언약궤를 청결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레위기>에서 죄란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성막을 오염시키는 실존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오염된 장소에서는 머물 수가 없다.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성막은 그 자체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임재하는 가시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막은 그야말로 빈껍데기일 뿐이다.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지속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영적인 세척제(洗滌劑)이다.
그러나 피가 하는 역할은 그 이상이다. 피는 죄 사함을 담부해준다. 속죄제를 다루고 있는 본문 여러 곳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이라는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4:26, 31, 35; 5:10, 13; 4:20). 피를 제단에 뿌리는 일이 어떻게 죄 사함의 효력을 나타내게 되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제단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제사장과 같은 중재(또는 중보)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속건제. 속건제(贖愆祭, the guilt offering)는 다른 제사들에 비해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되어있다. 아마도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가 그렇게 흔치 않았거나, 또는 제사장의 임직과 관련해서는 별 상관이 없는 제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제사에서 드리는 제물은 다른 제사와는 달리 단 한 종류의 짐승 즉 숫양만이 허용되었다. 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는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들을 부지중에 더럽혔거나, 서원을 갚지 못했거나, 거짓 맹세를 했을 때였다. 이 제사를 드린 실제 사례들은 피부병을 앓고 난 사람이나(레 14:12),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이 죽은 사람 곁에 있음으로써 그 서원을 어긴 사람이 드린 경우였다(민 6:9).
6. 제사장을 위한 지침들. 제사장을 위한 이들 지침들은 그 순서가 다소 다르긴 하지만 앞에서 다룬 내용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내용들이 주제별로 등장한 바 있다: 즉 먼저 “향기로운 제사”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1-3장), 다음으로 죄 사함에 관한 제사가 뒤를 잇고 있다(4:1-6:7).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횟수에 따라 순서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즉 가장 빈번하게 드리는 제사인 번제와 소제가 먼저 등장하고, 이어서 속죄제와 속건제 순이다. 다만 의무사항이 아닌 화목제의 경우는 맨 나중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달라진 것은 그 순서만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관심의 대상은 제사를 드리는 자, 즉 일반 회중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제사장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단락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6:9, 14, 20, 25). 그리고 그 내용도 주로 제물의 어떤 부위를 이들 제사장이 가져가야 할지에 관한 것이다(예외. 7:23, 29).
5.2. 제 2부: 제사장 제도
책의 제 2부는 제사장의 임직과 그 제도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도표의 노란 색으로 칠한 부분).

비교적 긴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단락은 규례와 율법을 다루고 있는 그동안의 이야기로부터 일탈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부분이야말로 <레위기>의 핵심을 이루는 곳이다. <오경>을 사실 상 ‘모세’의 전기(일대기)로 본다면, 이 책의 각 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표현, “그리고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는 쓸데없는 반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경>이 ‘모세’의 전기임을 수시로 상기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이 책의 제 2부에서 다루는 내용, 즉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 임직에 관한 내용도 또 다른 관점에서 ‘모세’의 위대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인간 중재자의 역할이 그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출애굽기> 28-29장에서 다룬 바 있는 일련의 지침들을 상세하게 어김없이 수행하고 있다. <출애굽기> 25-31장에서 다룬 바 있는 또 다른 일련의 지침들, 즉 성막 건설이나, 성막 구기들, 그리고 제사장의 복장(服裝)들에 관한 지침들은 이미 수행된 바 있다(출 35-40). 그러나 ‘아론’의 임직에 대해서는 여태 다룬 바 없다. 이 부분을 <출애굽기>가 끝날 때까지 다루지 않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과연 황금 송아지의 제작을 주도한 ‘아론’은 제사장의 직분을 누릴 수 있을까?”
<레위기> 제 2부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해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론’마저도 용서해주셨다. 사실 <레위기> 전체는 ‘아론’의 임직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그동안 소개한 일련의 제사 제도도 결국 ‘아론’의 임직에서 어떻게 수행될 것인지를 사전에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 제사들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제사장의 항시적인 의무 중의 하나인 “규칙적인 제사”를 드리는 일이다. 제사를 드리는 일은 제사장의 주된 임무이며, 그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변하고 대표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책의 제 1부; 참고. 위 도표). 제사장의 또 다른 기능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가르치고 교훈하는 일이다. 제사를 드리는 일이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기능이라고 한다면, 백성을 교훈하는 제사장이 수행하는 수평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번에는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대변한다(책의 제 3부; 참고. 위 도표). 이 책의 10장 이후의 내용은 ‘아론’의 두 번째 기능과 관련한 것들이다. 즉 거룩과 정결 예법에 관한 제반 종교적이고 윤리ㆍ도덕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 두 기능과 관련한 내용 사이에 ‘아론’의 임직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있다(책의 제 2부; 참고. 위 도표).
그리고 ‘아론’의 임직을 다루고 있는 책의 제 2부는 다시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첫째 날의 ‘아론’ 임직(8:1-36)
(2) 여덟째 날의 ‘아론’의 임직: ‘아론’의 첫 번째 제사(9:1-24)
(3) ‘아론’의 아들들의 제사: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1. 첫째 날. ‘아론’의 임직 식은 ‘모세’가 대제사장의 지위와 직분에 걸맞는 화려한 의복을 ‘아론’에게 입혀주는 것으로 시작된다(8:1-13). 그러나 아직은 그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역시 일반 백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을 위한 일련의 제사를 아직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아직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짐승의 피를 다루는 문제라든지, 짐승을 제단 위에 놓고 태우는 일 등이다(8:14-21). 그러나 화목제에서 짐승의 피를 다루는 방식은 아주 유별나다. 즉 피의 일부를 ‘아론’의 귀뿌리와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에 바르고, 나머지는 제단 위에 뿌리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행위는 <출애굽기> 24장에서 그리고 있는 장면과 유사한 것으로, 이 경우에는 짐승의 피를 백성과 제단 위에 뿌리고 있다. 두 경우 모두 이 같은 행동이 상징하는 바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연결시켜주는 것으로서, <출애굽기>의 경우는 이스라엘 전체에 관한 보편적인 행위라면, <레위기> 8장에서는 ‘아론’ 한 사람에게 대한 구체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2. 여덟째 날. 그러나 일주일 후 상황은 달라졌다. ‘모세’가 아니라 ‘아론’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제는 ‘아론’이 그 자신과 백성을 위한 제반 제사를 주도하고 집행한다. ‘모세’는 제사의 끝에 그가 새로운 제사장을 대동하고 성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모세’가 ‘아론’을 성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불이 나와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태움으로써,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허용하신다. 그리고 백성은 이를 보고 소리치며 엎드렸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9:24).
3. 나답과 아비후. 위 두 장면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명령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수행하였으며, 하나님은 이를 인준하셨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 번째 장면은 처음 두 장면과는 완전히 다른, 무시무시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처음 두 장면에서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어조나 어휘는 이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나,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10:1-2). 도대체 이들 두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진노하신 것일까? 이들이 취중에 임무를 수행했던 것일까(참고. 10:9)? “다른 불”이란 과연 어떤 불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같은 질문들은 본질을 흐리게 할 뿐이다. 그 원인이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두 사람의 행동은 ‘모세’나 ‘아론’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수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고 말씀하셨다(10:3).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며(10:11), 따라서 매사에 신중하고 철저해야 하는 각별한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5.3. 제 3부: 정결과 부정에 대한 규례
제사장의 의무 중의 하나는 거룩함과 정결함을 유지하는 것이다(참고. 10:10). 따라서 제 3부에서는 정결함과 부정함의 차이를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아래 도표 참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 속죄일과 같은 날에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16장).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속되는 명령,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제시된 규례들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룩에 관한 원리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현대 독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예컨대, 어째서 독수리나 도마뱀이나 곰팡이나 여인의 월경이 부정한 것으로 분류되는데, 염소나 메뚜기나 대머리는 괜찮은 것일까? 제 3부에서는 이 같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분류 방식에 대해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설명을 하려는 시도가 무수히도 있어왔다. 그러나 이들 설명을 일일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다만 현대적인 관점에서 일련의 결론 정도만 이해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결(淨潔)이란 위생학(衛生學)적인 관점에서 청결(淸潔)과는 거리가 멀다. <레위기>에서의 정결은 종교적인 차원의 것으로서,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상태를 뜻한다. 부정한 사람이나 사물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며, 오직 정결한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한 존재이시므로, 누구든지 정결하지 못한 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왔을 때는 멸망을 면할 수 없다.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이는 누구든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나아올 때,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이다(출 19:21; 28:35; 30:21-21; 레 8:35; 10:7; 16:2, 13). 한 마디로 “정결”이란 “예배에 합당함”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1. 부정한 음식. 이처럼 정결의 의미를 “예배에 합당함”으로 이해한다면, 11장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 짓는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희생 제물로 드릴 짐승은 집에서 기른 가축 중에서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정결하지만 야생 동물은 제물로 드릴 수는 없다(예. 사슴). 그 이유를 ‘다윗’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삼하 24:24). 정결한 야생 동물을 제물로 드릴 수 없는 이유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들은 양이나 염소나 소나 새들이었다. 이들의 공통된 특성은 모두 초식성 동물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특성을 정결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따라서 식용으로 삼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따라서 같은 새라도 육식(肉食)을 하는 일체의 다른 새들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제물은 물론 먹는 것도 삼갔다(레 11:13-19). 정결한 짐승에 대한 정의(定議)는 보다 엄격하다: 이는 양이나 소처럼 갈라진 굽을 가지고 있으면서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낙타나 돼지나 토끼 등은 이 같은 정의의 절반만 만족시키고 있으므로, 정결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1:2-8). 수중(水中) 동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진 것들이 정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물고기를 집에서 기르지는 않았으므로, 물고기는 제물에서 당연히 제외시켰다.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음식과 관련해서 일련의 규율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비단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가령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뱀이나 개구리나 달팽이 같은 것들은 먹지 않지만, 일부 국가들에서는 이들을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이스라엘에 보여주는 음식에 대한 규례들은 단순히 관습이나 호ㆍ불호(好ㆍ不好)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구약>은 이에 관한 나름의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중에서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면, 그들 역시 먹는 음식에서도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기를 먹는 매 식사는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자리가 된다.
둘째, 이들 음식 규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타락 이전에 ‘에덴’ 동산에서의 채식(菜食) 위주의 이상(理想)을 상기시켜준다. 채식이라는 대 원칙은 대홍수 이후에는 고기를 피 채로 먹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육식을 허용함으로써 다소 완화되었다(창 9:3-4). 음식에 관한 <레위기>의 규율은 먹을 수 있는 짐승의 종류에 제한을 두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자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되는 짐승들은 주로 육식을 하는데, 이들 육식 동물은 피에 관한 대 원칙을 알 리가 없을 것인 즉, 당연히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정결과 부정의 차이를 구분하는 성경적 원칙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인 것이다. 가장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죽음으로 야기되는 것이며, 따라서 정결한 짐승이라 할지라도 그 시체는 각별히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레 11:24-40). 한편 하나님은 완벽하고 풍성한 생명의 원천으로서, 죽음을 시사하는 그 어떤 것도 가까이 가져올 수 없다. <레위기> 12-15장의 제반 규례들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가 바로 이 생명과 죽음에 관한 대원칙이다.
2. 출산으로 인한 부정. 피를 생명의 원천이라 할 때, 어떤 형태의 피 흘림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산이나 월경 시에 흘리는 피도 예외일 수 없다. 여인들은 이 기간 동안에는 성소에 출입할 수 없다(12:4). 그러나 이 기간이 끝나면,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과 성소가 깨끗하게 되었음을 확인시킨다.
3. 부정한 피부병.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피부병은 전통적으로 나병으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구약> 시대 근동 지역에 나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오늘날 이 병의 정확한 정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비록 이 병이 습진과 같은 피부병이라 해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함은 물론이다. 피부가 벗겨진 맨 살은 완벽하고도 온전한 생명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마찬가지로 집안에 있는 옷이나 식기 등에 피는 곰팡이 등도 죽음을 연상하는 것들로서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제 13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해서 백성들은 제사장을 불러 정결한지 또는 부정한 지에 대한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제사장은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의사가 아니라 검열관이기 때문이다.
4. 정결 의식. 피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회중으로부터 격리되어 마치 이방인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병으로부터 회복되었을 때, 다시 회중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까다로운 의식을 거쳐야했다. 이 의식은 제사장이 병을 고쳐주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자가 충분히 병으로부터 회복되었다는 만족할 만 한 판단을 받게 되면, 그 자신이 일련의 제사 의식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의식은 제사장을 안수하는 경우처럼 한 주간 지속되었다. 정결 의식에 포함되는 일련의 행위는 예컨대, 부정한 것을 날려 보낸다는 상징으로 새 한 마리를 날려 보내고, 일련의 희생 제사를 수행하고, 이 과정에서 짐승의 피를 그 사람 위에 바르는 절차 등이 있다. 이 모든 절차를 거친 후에 비로소 그는 이스라엘의 회중으로 받아들여진다.
5. 유출병. 유출병은 일종의 성병(性病)으로서, 임질이나 매독 등으로 인하여 성기(性器)로부터 액체나 고름 등이 유출되는 병을 이른다. 이 병은 피부병보다는 덜 심각하지만 어쨌든 부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병 때문에 사람이 부정해진다는 것은 무슨 의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역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성기로부터 액체나 피가 유출된다는 것은 온전한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상징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는 없다. 피부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병이 완치된 후에야 회중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이때에도 일련의 절차를 거쳐야 함은 당연하다.
6. 대 속죄일. 이스라엘의 달력 중에서 가장 거룩한 날이 바로 대 속죄일이다. 이날은 종교 달력으로 7월 10일인데 요즘 달력으로는 10월 초가 된다. 이 날을 제정한 근본 목적은 죄와 부정함으로부터 오염된 성막을 청결하게 하기 위함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처럼, 죄와 부정함은 마치 사악한 증기처럼 거룩한 제단이나 성소 등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성막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희생 제물의 피로 묻히거나 또는 뿌려서 정결하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안에 계실 수가 없다(16:16, 19). 결국 이스라엘은 성막을 오염시킴으로써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15:31), 이는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에서 이미 본 바 있다(16:1; 참고. 10:1-3). 이와 같은 대참사를 피하기 위하여 대 속죄일의 행사가 필요한 것이다.
대 속죄일의 행사에서 주목을 끄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속죄제인데, 대 제사장은 자신과 백성을 위하여 이 제사를 드려야 한다. 속죄제와 관련한 일상적인 절차는 제 4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예컨대, 짐승의 피로써 성막 뜰에 있는 제단이나 성소의 향단에 바르는 절차가 포함된다. 그러나 대 속죄일에는 대 제사장이 그 피를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서 그 안에서 세 번 뿌리는 절차가 추가된다(16:11-19). 이렇게 함으로써, 오염된 성막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다. 지성소는 성막 중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로서,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으며, 따라서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지성소 안에 향을 피우고 특별한 복장을 한 후에 들어가야 한다(16:2-4, 12-13).
두 번째 요소는 소위 희생양이다. 이 경우 양 두 마리가 필요한데, 한 마리는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일반적인 속죄제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마리는 소위 희생양으로 부르는 것으로서, 제사장이 이 염소의 머리 위에 안수하여 진중 밖 광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이다. 즉 희생양은 백성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떠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가 영영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금식이다. 이날은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안식일로서, 이날 온 백성은 금식을 하고,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16:29-31).
7. 요약. 지금까지 소개한 <레위기>의 정결 법에 따르면, <레위기>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세계관의 양상을 띠고 있는 듯하다. 즉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시간과 공간마저)은 정결과 부정의 두 잣대로 구분하고 있으며, 또한 정결에서 부정에 이르는 스펙트럼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아래 도표 참고):


5.4. 제 4부: 거룩의 실천
<레위기>의 나머지 열한 장은 그 내용에 있어 앞선 내용들과는 다소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다룬 내용들이 주로 제사와 정결법이라는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제 4부의 내용은 보다 넓은 주제들, 즉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살인; 간음; 근친상간; 등.

현대독자들에게는 윤리․도덕적 주제들과 종교적 주제들은 상호 무관한 별개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으나,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국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거룩의 문제와 별도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 모두는 한 결 같이 한 개인이나 성소는 물론 그 땅 전체를 오염시키는 심각한 범죄행위로 간주하였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그 땅이 범죄자를 토해내거나(18:18; 20:22) 또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공동체로부터 끊어내 버리는 것이었다(17:9, 14; 20:5). 범법자가 갑자기 또는 원인도 알 수 없이 죽어버리는 경우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부정(不淨)한 것에도 경중(輕重)의 정도에 따라 일종의 스펙트럼이 있었는데, 자연발생적인 피부병과 같은 비교적 가벼운 것에서부터 살인이나 우상 숭배와 같은 심각한 것들이 있다(정결의 정도에 대한 위 도표와 그림 참고).
그렇다면 11-16장에서 다루고 있는 종교적인 정결에 관한 문제와 17장에서 다루고 있는 윤리ㆍ도덕적인 부정(不淨)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까? 두 경우 모두 생명이나 죽음과 상호 얼마만큼의 연관성을 갖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 쪽 극단에 죽음이 있고, 다른 한 쪽 끝에는 생명으로 가득 찬 하나님이 있다(다시 한 번 위 도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표에 따르면, 장애를 가진 제사장은 성소에서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건강한 자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흠이 있는 짐승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할 수 없다(21:17-23; 22:19-25).
또한 살인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한 공격이나 파괴 행위로서, 당연히 부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도 생명의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대체하는 행위로서, 부정한 것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성(性)은 자손 증식을 위한 하나님의 주신 능력으로서, 잘못 사용할 경우 심각한 오염을 가져오는 부정한 행위로 간주된다. 이런 관점에서 제 3부와 제 4부 사이에는 이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큰 간극(間隙)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종교적인 영역과 윤리ㆍ도덕의 영역에서 정결과 부정의 척도가 결국 생명과 죽음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했으므로, 이 두 영역의 관계를 아래 도표로써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제사 장소 및 제물의 피. 성막 밖에서의 제사는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칫 이 제사가 우상 숭배 즉 염소나 귀신 등을 위한 제사로 둔갑할 위험성이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17:7). 이곳에서는 또한 짐승을 피 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참고. 창 9:3-4; 레 11장). 피를 먹는 행위는 생명에 대한 경시로서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2. 부적절한 성 행위. 이는 부정한 행위로서 ‘가나안’ 땅이 그 원주민을 토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면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18:24-28).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적절한 성 행위란 주로 근친상간이다(18:6-17). 하지만 우상 숭배나 동성애나 짐승과의 교합 행위도 모두 저주의 대상이다(18:20-23).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위반하는 반생명적인 행위로서, 그 땅과 성막과 공동체를 오염시킨다.
3.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 구절은 <레위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로 꼽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19장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도덕적 권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도덕적 권고들이 정결이나 거룩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가장 핵심 요체로서 인간이 이를 따라야 할 모범이기도 하다: “거룩하라 이는 내가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완벽한 생명 그 자체이시므로, 인간의 행동도 이를 반영하고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반대의 모든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일련의 목록들이 이 질문과 관련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처벌. 1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련의 죄는 이스라엘이 그 땅으로부터 추방당할 수 있는 심각한 것들이다.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아주 가혹한 형별들은 이 같은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다. 설령 범죄 행위가 동료 인간의 눈길을 피할 수는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20:5-6, 18-21).
5. 제사장의 거룩.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레위기>의 기본 정신이다. 부정한 자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제사장과 같은 거룩한 자는 부정한 대상, 특별히 시체를 멀리해야 한다. 당연히 제사장과 같은 지극히 거룩한 자는 자신의 부모 장례식에도 참석해서는 안 된다(21:11). 일반 제사장의 경우는 대제사장에 비해 그 금기 정도가 다소 낮기는 했으나, 여전히 기본 정신 즉 거룩한 백성은 부정한 것들을 피해야 한다는 대 원칙은 그대로 지켜져야 했다(21:1-9).
6.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례. 거룩한 백성, 예컨대,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 만이 거룩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 즉 제사로 바쳐진 짐승의 일부를 제사장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제사장이 부정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누가 제사장으로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이들 문제를 22장에서 다루고 있다. 다시 한 번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바, 즉 구별되고 정결하며 거룩함의 원칙이 그것이다. 따라서 제사장은 유출 병이나 피부병 또는 사체(死體)와의 접촉 등으로 부정하게 되었을 때,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22:1-9). 일반 백성의 경우는 그가 제사장의 노예로 있거나, 과부로 지내는 제사장의 딸이 경우처럼 제사장의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에만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22:10-16). 고기는 제물로 바쳐진 것에 한해서 먹을 수 있다. 이 장은 따라서 허용되는 음식과 그렇지 않은 짐승에 대한 규례로 마무리하고 있다(22:17-30).
7. 기념일과 축제. 큰 가족의 기념일 외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경우는 국가적인 축제나 기념일이 있을 경우로서, 이때는 모든 남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적절한 희생 제사를 드린다. 이 장에서의 초점은 일반 백성이 이 날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있다. (도표 참고).
8. 성막 안의 빵. 황금 촛대와 그 맞은편에 놓인 테이블을 포함한 성막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출애굽기>(25:23-40)에서 그림으로 보여준 바 있다. 이 테이블 위에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조각의 빵이 있다. 그리고 황금 촛대는 생명나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빵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왜 이곳에 등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소출이나 축제와 연관 있는 23장에서 다루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이스라엘 여인과 이집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한 아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건에 관한 에피소드를 왜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지도 분명하지가 않다(24:1-9).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레위기>은 무슨 규례집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모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의 일대기라는 점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다(참고. 8-10장). 마지막으로 “동태복수법”(24:17-22)에 대해서는 제 4장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9. 거룩한 해. 거룩한 “날”과 거룩한 “주일”에 대해서 다룬 다음(23장), 이어서 거룩한 “해”에 대한 언급이 뒤따르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안식년에 대해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출 23:10-11). 안식년의 정신은 가난한 자나 야생 짐승들을 위하여 농경지를 휴경(休耕)하는 것이다 <레위기> 25장에서는 이 안식년의 정신을 보다 폭넓게 다루고 있다. 즉 매 칠년 마다 안식년 외에, 매 50년마다 희년(禧年)을 제정하였다. 희년에 땅은 또 다른 방식으로 휴경을 맞이하게 되는 바, 이 때 땅은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빚으로 남의 노예가 된 사람은 자유인이 되었다. 희년의 정신은 어느 누구도 영원한 노예로 남아있을 수 없으며, 또한 땅이나 재산이 소수 특정인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은 희년을 기념함으로써, 자신들이 한때 ‘이집트’의 노예였으나 하나님께서 해방시켜주셨음을 기억하고 상기하는 것이다(25:25).
10. 축복과 저주. 고대의 조약문이나 법조문은 대개 일련의 축복과 저주로 마무리하고 있다.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도 이와 같은 패턴을 따르고 있다. 축복의 내용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미래에 무엇을 가장 고대했는지 알 수가 있다: 풍년; 적의 공격으로부터 승리; 하나님의 임재(26:3-13). 그리고 저주 속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질병; 기근; 전쟁에서의 패배; 그 땅으로부터 추방(26:14-39). 아닌 게 아니라,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그 땅으로부터 쫓겨났을 때 그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26:43). 이처럼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내용으로 25장과 26장이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1. 서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위기나 환난에 빠졌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나중에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보답을 해드리겠다는 맹세가 그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서원의 형태는 각양각색이었던데, 자신을 드리거나, 자신의 자녀들이거나, 하나님을 섬기겠다거나, 또는 희생 제사를 드리겠다는 등이다(예. 창 28:20-22; 삿 11:30-31; 삼상 1:11). 이곳에서 다루는 내용은 서원을 바꿀 경우에 관한 지침과 그 대가에 관한 것이다.
<레위기>의 역사
<레위기>에 관한 역사적 질문은 <오경> 전체의 역사적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저작이나 편집 및 역사적 배경과 관련한 것들이다. <오경>에 관한 역사비평적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 책의 저저와 저작 시기와 관련해서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오경>의 역사비평적 연구에 대해서는 본 저서의 제 1부 <총론>에서 다룬 바 있다.
저자와 저작. <레위기>의 기록 연대와 저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모세’ 저작 설; (2) 후기 편집 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이유로 후자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 <레위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배의 규례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의 예배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 둘째, ‘모세’ 시대라고 가정할 때, 희생 제물은 이스라엘이 사막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레위기>는 양이나 염소 등의 가축, 즉 정착 생활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짐승들로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레위기>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각종 규례들을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실은 이 책의 배경(처음 독자의 삶의 자리)은 광야가 아니라, 정착 왕국 이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레위기>의 신학
이 책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책이다. 즉 어떻게 그 관계를 맺으며, 그리고 어떻게 그 관계를 유지시킬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이와 관련하여 적어도 다섯 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1) 거룩(하나님의 초월성); (2) 임재(하나님의 내재성); (3) 언약; (4) 희생제사; (5) <레위기>와 <신약>.
1. 거룩 (Holiness; Transcendence)
<레위기>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어는 “거룩”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9:2). 하나님과 그분에게 속한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것은 결국 그렇지 못한 영역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레위기>는 전 우주에 걸쳐 “성과 속(聖과 俗”)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 하겠다.
거룩의 의미.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구별되어 있음”( 카도쉬)을 뜻하는데, 특히 종교적이고도 제의적인 의미에서의 구별을 뜻한다: 성소; 성막; 제기; 땅; 등. 따라서 어원 상 윤리ㆍ도덕적인 요소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참고로 <성경>은 ‘가나안’ ‘바알’ 종교의 성전 창기(娼妓)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크데쉼”(제의적인 남창)(왕상 15:21); “크데쇼트”(제의적인 창녀)(호 4:1).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성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즉 “거룩”은 그분의 이름인 것이다: “거룩이라는 이름의 야훼”(참고.20:3; 22:32). 따라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근거도 그분의 이름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이 이름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구별되는 “초월적 존재”(transcendent being)가 되. “거룩”이 하나님의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본성이라면, “영광”은 그분의 거룩함이 외부로 드러나는 신비이자 “능력”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거룩함이 드러내는 능력”인 것이다. 이 거룩함이 외부로 드러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삿 4:4-5).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미가 1:3-4)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실 때, 항상 구름과 흑암으로 스스로를 둘러싸신다(시 97:2-3).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타죽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계속 우길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또한 “질투”하시는 분이다(신 4:24‘ 겔 36장). 그분의 투기심은 자신의 독특함에 대한 당연한 요구이며, <십계명>의 제 1계명이 이에 대한 당연한 요구다(출 20:3). 즉 그분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기를 바라며, 다른 어떠한 신들도 그와 동등한 대우를 받거나, 심지어 대우의 일부라도 그와 나누는 것조차 싫어하신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종교 간의 화해라는 명분으로 오늘날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행태는 과연 온당한 것이지 되돌아보게 한다. 예컨대, 신부와 승려가 상호 교환방문하여 설교나 설법을 한다거나, 수녀와 여승들이 함께 찬송가와 찬불가를 부른다든지, 석가탄신일과 부활절에 서로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등의 모습이 그것이다.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방식이 이 길 밖에는 없는지, 행여나 이 같은 모습이 이 책에서 경고하고 있는 혼합주의나 신성모독으로서, 저주나 멸망의 가증스러운 행위는 아닌지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24:10-23).
거룩한 백성과 거룩한 장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당연히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이나 장소 역시 구별된다. 이러한 구별에는 물론 그와 가까운 정도에 따라 거룩함의 정도 또한 달랐다(도표 및 그림).


거룩한 짐승. 짐승 역시 사람이나, 장소처럼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이분법적인 구분이 있다. 그리고 정결한 짐승 중에서 구별하여 제사에 드렸다(1:2; 22:19-29). 이스라엘은 이들 중에서 일부를 먹을 수 있었다. 육식을 하거나, 시체를 먹는 짐승들은 아주 더럽고 가증스러운 것으로 구별되었다.

지금까지 다룬 정결에 관한 규례와 대상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결 기간. 거룩한 ‘야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부정(不淨)한 자는 일정 기간 정결 기간을 거쳐야 했는데, 부정의 정도에 따라 정결의 기간은 달랐다:
(1) 하루: 죽은 시체와의 접촉; 정상적인 성행위(11:27-28, 31; 15:16-18).
(2) 40일: 남아 출산 여인
(3) 80일: 여아 출산 여인
(4) 무제한(完治 時까지): 성병; 피부병, 등등.
이 기간 후에 해당자는 일련의 정결 예식, 즉 “성화”(聖化)의 과정을 거친 후에,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편입되었다(참고. 27:14-27). 이스라엘이 이처럼 거룩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접 국가들이 행하는 일체의 우상숭배나, 부도덕한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시켜야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의 종교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종교와의 혼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룩한 예배. 이스라엘의 예배 형식이나 내용 또한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즉 (1) 모든 형태의 마술, 주문, 점등을 금지해야 하며(19:3, 26; 20:6, 27), (2) ‘몰렉’ 제사 등과 같은 가증스러운 행위를 삼가야 한다.
거룩한 신체. 육체적인 정결과 부정에 대한 규례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참석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에 관한 것으로서, 대표적인 정결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1) 시체는 불결한 것으로(11:24-28, 39-40)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
(2) 제사장은 장례식 참석을 금한다. 그는 가장 가까운 친척 외는 죽은 자와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21:1-4). 대제사장은 그나마도 금지한다(21:10-12).
(3) 거룩한 신체는 거룩한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4) 육체적인 성 행위는 정상적인 부부사이에서만 허용한다.
거룩의 대가(처벌규정). 거룩의 대가는 다음과 같은 “관계의 상실”로 나타난다.
(1) 사형(20:2, 10-16)
(2) 공동체로부터 출교(17:4, 9, 14; 19:8; 20:3, 5, 6, 17, 18)
(3) 無子死亡(20:20-21)
거룩과 하나님의 율법.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은 윤리ㆍ도덕적인 구분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종교적인 영역에 속한 구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며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윤리ㆍ도덕과 무관한 삶을 살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도 거룩한 삶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야훼라” 내지는 “나는 너희 하나님 야훼라”언 언급을 빠뜨리지 않기 때문이다(참고. 18-22장). <레위기>에서 드러나는 율법의 두 정신은 “공의”(예. 24:20)와 “사랑”(참고. 19:18)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인 즉, 결국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념이라 할 것이다.
2. 임재 (Presence; Immanence)
본질적 두 속성-초월성과 내재성. <레위기>의 두 번째 주제는 <출애굽>의 핵심적인 주제인 ‘임마뉴엘’(immanuel), 즉 하나님의 “임재”이다. 이는 장막(帳幕) 건설과 관련한 하나님의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26:11상).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장막에서 이스라엘과 만나겠다고 말씀하셨다(1:1). 장막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를 증명한다(9:23; 16:2).
지성소. 성막 중에서도 특별히 지성소(至聖所)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당연히 아무나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를 어길 경우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제사장들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참고. 10:1-7). 다만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 ‘아론’만이 적절한 절차에 따라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지성소에 들기 전에 향(香)을 피워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16:12-13).
희생제사와 기념일. 희생 제사를 포함한 모든 행위는 “야훼 앞에서” 행해야만 했다. 또한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먹을 때도 항상 거룩한 장소(예: 하나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야 했다.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축일(祝日)이나 기타 기념일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특별히 구별된 날들이다. 그리하여 이 날에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하나님의 성막으로 나아와야 한다(23장).
율법의 낭독. 대제사장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백성은 이를 듣는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3. 언약 (תירב; Berith)
어원. 어원학적인 증거가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 먹다(barah): 계약의 두 당사자가 계약 체결 시에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계약을 먹다”는 의미에 가장 가까운 예를 <신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찬(聖餐)에서 찾을 수 있다.
(2) 자르다(birit): 이 단어를 사용할 경우, “계약을 자르다”(cut the covenant)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계약을 체결하는 다른 방식을 암시하는 것인데, 한 편으로는 동물을 절단하는 저주를 나타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계약에 따르는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참고. 창 17장).
(3) 묶다(baru): 이 단어의 명사형이 ‘비리투’(biritu)인데, 계약의 “구속” 내지는 “속박”(bond)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정의. 이와 같은 어원론적인 접근을 통해서, ‘팔머 로벗슨’(P. Robertson)은 그의 저서「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계약을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는 약정”(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으로 정의하고 있다.
형식. 고대 근동지방에서 군주와 봉신 국가 사이에 맺었던 정치 및 군사적 “종주언약”(從主契約)의 형식과 흡사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총론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의미. 언약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부자지간(父子之間)의 경우처럼 혈연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수립이므로, 그에 따른 의식(儀式)과 지속적인 교제(交際)가 필수적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편에서 볼 때,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臨齋) 속으로 초청을 받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죄로 오염된 인간은 그대로는 거룩한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제사(祭祀)의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거룩을 위한 사전 절차로서, 죄인은 이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위한 “대속”(代贖, atonement)을 치르는 제도이다.
내용. “율법”(the law)과 “땅”(the land)은 언약의 핵심 내용이다. 율법과 땅의 관계는 因果의 관계로 볼 수 있다(참고. <신명기>; <여호수아>). 즉 이스라엘은 “그 땅” 즉 언약의 땅에서 신정국가(神政國家)로서의 탄생을 맞이하였고, 그 땅에서 교회(즉 공동 운명체)를 이루어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은 은혜이자 축복이다. 동시에 위기(危機)와 저주(咀呪)의 통로일 수도 있다. 즉 율법을 준수하면 땅은 이스라엘의 것이고, 이를 어기면 땅이 그들을 버릴 것이다(참고. 레위 26). 이스라엘은 그 땅을 무제한적으로 소유할 수도 없었고, 쉼도 없이 경작해서도 안 된다. 땅도 안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예: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종국이 어떠했는지는 타락 이후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 희생제사: 형식과 내용
위에서 밝힌 바처럼, 언약과 제사는 필수적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제사는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제도라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제사; (2) 제사장; (3) 성막; (4) 성막 기구들; (5) 절기들(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칠칠절; 대 속죄일; 장막절; 안식년; 희년).
4-1. 제사법
일반적인 사항. 일부 예외적인 경우, 즉 이스라엘 모두를 위한 제사(속죄제)나, 가난한 자가 작은 새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단 위에 희생 제물을 몰려놓기까지의 의식은 모든 제사가 다 동일하다.
일반 백성. 첫째, 제물을 성막 문 앞으로 가져옴. 제물은 자신이 직접 기른 동물이나 곡식으로서, 바치는 자의 생명을 상징함. 제물의 가치는 극상품이라야 함(흠 없는 수컷, 또는 고운 가루, 최상의 첫 열매). 둘째, 희생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함. 이 때 죄에 대한 고백 여부는 불확실하나, 속죄일의 의식이 죄의 고백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16:15), 죄에 대한 회개와 고백이 분명히 매일의 희생제사의 한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셋째, 희생 제물이 가축일 경우 짐승을 도살하는데, 피를 받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본인이 직접 이처럼 끔직한 도살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죄의 심각성과 그 결과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사장. 제사장의 역할은 제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존함(1:7; 6:12, 13)과 동시에, 희생제물을 받아들이는 몫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제사 의식에 대한 교육이나 제의를 집전하는 것이다. 특별히 제의 집전과 관련해서는 본문 6:8-7:38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단락에서 보여주는 제사의 종류나 내용은 각 제사의 순서만 달리하고 있을 뿐, 앞선 단락(1-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참고. 1-5장). 앞 단락에서는 제사의 목적에 따라 순서를 정해놓은 것 같다: (1)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서의 제사(1-3장); (2) “죄의 용서”를 대변하는 제사(4:1-6:7). 그러나 이어지는 단락(6:8-7:38)에서는 각 제사의 빈도(頻度)가 순서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인 듯하다. 번제와 소제가 속죄제와 속건제에 앞서 등장하고 있고, 그리고 선택 사항에 드는 화목제가 마지막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른 점은 또 있다. 즉 누구를 위한 제사인가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단락(1:1-6:7)은 일반 백성이 제사를 드릴 경우에 관한 것으로, 희생 제물의 종류나 선택 그리고 제사의 절차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두 번째 단락(6:8-7:38)은 제사장이 관심의 초점이다. 즉 대부분의 지침들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따라야 할 것들이고(예. 6:9, 14, 20, 25), 제사장에게 돌아갈 제물의 몫이 어떤 부위인지에 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4-2. 제사의 종류
크게는 다섯 가지, 작게는 일곱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각 제사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의미 등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각 제사의 절차보다는 의미일 것이며, 다행스럽게도 이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 결과 상당 부분 알려져 있다. 일반 백성을 위한 다섯 가지의 제사는 이 책의 첫 번째 단락에서 등장하고 있다(참고. 1:1-6:7): (1) 번제; (2) 소제; (3) 화목제; (4) 속죄제; (5) 속건제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1:1-17). 희생 제물을 통째로 제단 위에서 태운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다른 제사의 경우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나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누어 가진다. <레위기>는 제 1장에서 번제에 합당한 짐승의 종류와,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의 역할을 세 단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1:3-9, 10-13, 14-17).
첫째, 희생 제물은 가축 중에서 택해야 하며, 아무 흠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야생 동물이나, 또는 가축 중 흠이 있는 것은 바칠 수가 없다. 둘째, 제사를 드리는 자는 짐승을 가져와서, 그 머리 위에 안수를 하고, 도살을 하되,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받아, 제단 위에 뿌리고, 각을 뜬 부위들을 제단 위에 올려 태운다. 셋째, 일부 <번역본>(NIV, NRSV)에서 다소 모호하지만, 번제에서 제사장과 제사 드리는 자의 역할 구분이 분명하다. 즉 제사장만이 짐승의 피(생명을 상징하는 거룩한 대상)를 다룰 수 있고, 제단에 접근할 수 있다.
번제의 핵심은 짐승을 죽이고, 그 전부를 태우는데 있다. 이는 하나님께 그 짐승을 통째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바치는 자를 위한 대속이 되기 때문이다(참고. 1:3, 4). 번제물 머리 위에 손을 얹는 행위도 역시 같은 의미이다. 즉 그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짐승은 나를 대신하고 있다.” 번제에서 희생제물의 효력이나 기능을 예시(例示)해주는 두 대표적인 사례를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참고. 창 9, 22장).
소제(素祭; The cereal offering)(2:1-16). 이 제사는 가난한 자에게 번제 대신에 허용된 제사로서 곡식을 제물로 드릴 수 있으나, 주로 번제와 함께 드리는 제사였다. 이 경우 역시 번제 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만 번제의 경우와 다른 점은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제물은 제사장의 수입원으로 기능하였으며, 곡식은 날 것이든 또는 구운 빵이든 모두 가능하였다.
화목제(和睦祭; The peace offering)(3:1-17). 이 제사는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또 다른 형태의 제사로서, 개인적인 맹세(또는 서원)나 또는 축하할 만 한 일이 있을 경우 드렸다. 누구나 심각한 질병에 걸렸을 때,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대개 다음과 같은 서원(誓願)을 하기 마련이다: “오, 주님. 만일 저에게 ...을 해 주신다면, 저는 ...을 해드리겠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참고. 삼상 1:11).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했으며, 이 때 가족이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을 때, 처음에 드리던 것보다 더 풍성한 제물을 드렸다(삼상 1:24). 이 같은 제사가 바로 화목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화목제는 제사 드리는 자가 제물인 고기의 일부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다. 짐승의 일부는 태우고, 나머지 일부는 제사장의 몫이었으며,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제사 드리는 자와 그의 가족과 때로 그의 친구들도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레 3:3-4; 7:31-35). 이 제사 역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짐승을 태우는 주된 목적은 대속이 아니라 축하이다. 따라서 화목제는 즐거움의 자리이다.
속죄제(贖罪祭; The sin offering)(4:1-5:13).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제사가 바로 이 제사다. 여러 경우에 속죄제를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핵심 관심사는 비고의적인(非故意的)인 범죄나 또는 태만 죄(怠慢罪)에 대한 속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범죄와는 상관없는 경우도 있는데, 예컨대, 출산이나, 피부병이 발생했을 때나, 심지어 제사장 직을 위임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제사는 절차 상 번제나 화목제와 근본적으로 다른데, 짐승의 피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피는 생명의 상징으로서, 이는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를 뿌리는 행위는 그 피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다른 모든 제사에서는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림으로써, 이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속죄제의 경우 죄인의 사회적 신분(예: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일반 평민)에 따라 피를 사용하는 방식이나 장소가 다르다. 예컨대, (1) 피의 일부를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거나, (2) 성소 안 향단 뿔들에 바르거나, (3) 번제단 밑에 쏟거나, 또는 (4) 번제단 뿔에 바르거나 등이 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는 지성소 안 언약궤 위에 뿌리기도 했다.
이처럼 피를 뿌리거나 바르는 행위가 의도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겠다. 첫째, 정결이다. 즉 죄로 오염된 제단이나 언약궤를 청결하게 하려함이다. <레위기>에서 죄란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實在)하는 것으로서 성막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임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없는 성막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둘째, 피는 정결 그 이상의 기능을 한다. 즉 죄의 용서이다. 이 제사와 관련해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급이 이를 증거한다: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4:26, 31, 35; 5:10, 13). 하지만 제단에 피를 뿌리는 행위가 어떻게 죄 사함의 효력을 가져오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추측컨대, 제단이 마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인 제사장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속건제(贖愆祭; The guilt offering)(5:14-6:7).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제사가 바로 이 제사다. 아마 그 빈도가 가장 낮았거나, 또는 제사장의 위임과 관련해서 적절한 용도를 찾기 어려워 다른 제사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제사와 달리 짐승은 “숫양”(ram)만을 허용하였으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보상”(reparation)의 목적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상이나 배상을 해야 할 경우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저지른 신성모독의 행동이나, 서원을 행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거짓 맹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사람은 피부병으로부터 회복한 사람(14:12), 또는 ‘나실’인의 맹세를 어긴 사람(민 6:9) 등이 될 것이다.
요약. 지금까지 설명한 다섯 가지 제사의 특징과 차이들을 정리해 보면 아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4-3. 제사의 의미(목적)
모든 제사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예물(선물)(gift); (2) 속량(대속)(expiation); (3) 하나님과의 교제(화목)(communion).
예물(선물). 제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의식으로서, 제물은 그분에게 드리는 선물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은 “제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ןברק)가 “바침”(presentation) 또는 “바쳐진 물건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예컨대, 본문은 “번제”가 “야훼께 드리는 화제(火祭)” 또는 “야훼께 드리는 선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참고. 1:9).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 왕에게 나아가는 백성은 항상 예물을 준비하고 나아가야 했던 것이고, 왕이 신에게 나아갈 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제” 역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바치는 선물”(창 43:11) 내지는 “조공”(왕상 5:1)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선물은 당연히 일정 가치를 지니는 것이 마땅하며, 특히 드리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정한 대가를 치렀다는 의미가 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짐승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이스라엘이 그들을 사기 위하여 지불했던 금액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속량(대속). 제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이 기능이다. 즉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알게 모르게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처벌을 면제받기 위하여 대속의 제사를 드려야했는데, 대속 제물로 가축용 짐승을 사용했다. 이 같은 제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대속의 상징은 희생제물(양이나 소 등)의 머리 위에 범법자가 손을 얹는 행위가 그것이다.
대속과 관련하여 다양한 제사의 종류가 있다는 사실은 범죄에도 경중(輕重)이 있음을 알려준다(민 15:27-31). 예컨대, 율법은 고의적인 범죄와 우발적인 것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때로는 죄가 너무 중하여 제사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는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나, 또는 죽음의 형벌을 부과했다.
대속의 또 다른 측면은 범법자의 신분에 따라 처벌 정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공동체 내에서의 영적 지위나 신분이 높을수록 당연히 처벌의 수위가 높았는데, 이는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인 듯하다(참고. 4:1-21). 그러나 정치ㆍ사회적인 신분은 크게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참고. 4:22-35). 제사의 방식도 이러한 지위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제사장이나 지도자의 대속을 위한 제사는 성막 안에서 행했으며(참고. 4:5-7a, 16-18a), 이 경우 희생 제물은 아무도 먹을 수 없었던 반면, 일반 회중을 위한 제사는 성막 문 앞에서 행했으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6:19, 22).
교제. 희생제사는 식사이기도 하다. 이는 제사에 짐승과 함께 곡식이나 소금, 기름, 포도주 등을 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참고. 7:12-13).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오셔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제사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견 이방제사에서나 보이는 사상으로서, 일견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 그러나 <구약>은 여러 곳에서 제사를 “하나님의 식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레 21:6, 8, 17, 21; 민 28:2; 겔 44:7).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적인 측면을 주목한다면, 그분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식사로서의 제사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신약>에서 성찬(聖餐)의 의미도 이 같은 교제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5. <레위기>와 신약
<레위기>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는 “거룩”이다: (1) 거룩한 하나님; (2) 거룩한 사람(제사장); (3) 거룩한 장소(성막); (4) 거룩한 행위(희생제사).
이 주제와 관련해서 <신약>이 말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여전히 희생 제사나, 성막이 필요한가? <신약>의 성도 즉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레위기>는 <신약>의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히브리서>는 <레위기>에 대한 주해서로 불릴 만큼 <레위기>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진리들을 선포하고 있다.
제사장. <구약>의 인물 중에서 ‘멜기세덱’만큼 신비스러운 인물도 없을 것이다. <창세기>는 그를 ‘살렘’(훗날의 ‘예루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창 14). ‘아브라함’이 동방 네 왕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며 축복해주며,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친다(창 14:17-20). ‘가나안’ 인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거의 알려주지 않지만,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는 <시편>(110편)에서 하나님께서 “내 주”(누군지 분명치 않지만)에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시 110:1, 4).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르면, 왕과 제사장 직분은 각기 다른 사람이 맡도록 구분되어있었으나, ‘멜기세덱’은 이 두 직책을 통합해서 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말하는 “내 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자, 왕이며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므로 ‘아론’의 제사장 직보다 더 높고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참고. 히 7).
요약하자면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다(히 3:1-2). 그리고 <레위기>레서 규정하고 있는 대제사장 직분의 기능과 역할이 그분 안에서 더욱 확장되고 확대된다. 그분의 과거 지상(地上) 사역뿐만 아니라, 현재 천상(天上)에서의 사역이 한 예가 될 것이다(히 3-5, 7-10).
그렇다면 교회 즉 <신약>의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에게 여전히 제사장이 필요한가?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서열을 잇는 왕이자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성막. 성막은 보이지 않으며, 어느 한 곳에 편재해 계실 수 없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체적 장소이다. 오직 이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구약>에서 이 거룩한 장소는 시대를 따라 변천해왔다. 족장 시대의 단순한 한 “제단”에서, ‘모세’에 이르러는 “성막”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성전”으로, 그리고 마침내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 이름 즉 ‘임마누엘’이 의미하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요한복음>은 이를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고 말하고 있다(요 1:14).
이분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성전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다. 왜 인가?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써, 그분의 임재를 영원히 대신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참고. 요 16-17). 사도 ‘바울’도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요, 성령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희생제사. 희생제사는 삼중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중 한 기능이 “대속”이다. 희생제사에서 드리는 짐승은 대속 제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양과 소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히 10:4). 희생제사는 단지 장차 올 참되고 영원한 제사, 즉 그리스도가 드릴 제사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드릴 제사의 효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의 제사는 필요 없게 되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드린 희생제물은 그 자신으로서, 그는 제사장이자 동시에 희생제물이기도 하다(히 9:11-10:18). 모든 인류는 그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 죄의 용서와 언약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롬 3:23-28; 요 6: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성도는 여전히 거룩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다. 희생 제사가 아닌 영적 제사를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가 제사장이자 동시에 제물이기도 하다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선언이라 하겠다. 비록 <레위기>의 각종 의식법은 <신약>에서 더 이상 적용되지 않지만(마 15:10-20; 막 7:14-23), 성도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는 오히려 강화되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성도로 하여금 이 같은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동기이자 근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연습과 토의
1.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교회를 가장 교회답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2. <레위기>는 어떤 종류의 책인가? 이 책의 문학 양식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이 책에 등장하는 수 없이 많은 규율이나 계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법전”(law code)으로 부르기보다는 “이야기”(narrative)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본문에서 찾을 수 있을까?
3. <레위기>의 구조에 대해서 복습해 보자. 신학적 주제에 따라 크게는 두 부분으로, 작게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4. <레위기>가 <오경> 내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이 책이 다섯 권의 책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보자.
5. <레위기>에 등장하는 모든 제사를 열거해보고, 그 의미와 목적, 그리고 절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모든 제사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삼중적인 의미는 무엇이며, 각 제사의 차이는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자.
6. <레위기> 제 1-7장까지 읽고 제사와 관련하여 아래 도표를 완성해 보자(완성된 도표는 교재 내용 중에 있다).

7. <레위기>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신학적 이상은 철저한 이분법적(二分法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람은 물론 짐승이나, 심지어 시간이나 절기마저 정결(淨潔)하거나 부정(不淨)한 것으로 구분된다. <레위기>의 핵심 주제인 “거룩”의 정도에 따라 아래 도표를 완성해 보자.

8. 교회, 즉 <신약>의 성도와 다음 각 항목들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1) 제사장; (2) 제단, 성막, 성전; (3) 제사.
참고한 책들
1. G. J. Wenham, Exploring the Old Testment (vol. on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2. Temper Longman III and Raymond B. Dillard,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4, pp 81-91.
3. William S. LaSor (박철현 옮김), 구약 개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232-251.
4. Temper Longman III, How to Read Exodus.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9.
5. Temper Longman III, Old Testment Essentials:Creation, Conquest, Exile and Retur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4, pp 91-115.
6. Victor P. Hamilton, Handbook on the Pentateuch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pp 231-300.
제 6장: 민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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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영화 <이집트 왕자>(The Prince of Egypt)의 절정이자 압권은 역시 “홍해탈출”이었다. 이 장면은 “When you believe”라는 주제곡으로 절정의 감동을 더해주었는데, 이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당시 미국에서 현존하는 최고 가수라는 칭송을 듣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휘트니 휴스턴’은 안타깝게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이미 타계하였음.
이 노래는 그 해 제 71회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받아 더욱 유명해 진 바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출애굽> 제 15장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주제곡의 가사는 영화뿐만 아니라 <출애굽>의 신학적 주제와도 잘 어울린다 할 수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셋째 달 1일에 언약백성으로서의 필요한 모든 제도와 의식을 갖춘 한 국가로서 태어나서, 약속의 땅을 향해서 행진한다. 여행의 목적지는 약속의 땅이지, 광야(廣野)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수기>는 “그 땅”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만일 지름길을 택한다면, ‘시내’ 산에서 “그 땅”까지 가는데 불과 며칠, 그리고 ‘에돔’과 ‘모압’ 길로 간다 해도 보름이 채 걸리지 않을 이 거리를 무려 38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다 이스라엘 제 1 세대는 단 두 사람을 빼고 이 기간 동안 모두 죽어갔다.
왜 이처럼 자유를 향한 탈출이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으로 끝이 났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민수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그 주제가의 제목은 어떤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 아마도 “When you do not believe”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제목대로라면 <민수기>는 출애굽을 믿음으로 경험했던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믿지 않을 때는 어떻게 되는 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는 불평과 반역에 관한 이야기이다. 불평과 반역의 대상은 다름 아닌 ‘야훼’ 하나님과 ‘모세’이다. 불평과 반역의 무리 중에 소위 지도층에 속한다는 ‘미리암’과 ‘아론’이 있는가 하면(12장), ‘고라’도 있고(16-17장),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도 있으며(13-14장), 그리고 이제 곧 그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은 이스라엘의 제 2세대조차도 ‘바알-브올’의 우상 숭배에 빠지고 있다(25장).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극적이고도 대표적인 반역은 출애굽 제 1세대의 반역을 꼽아야 할 것이다(참고. 13장). 이들은 “그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거인(巨人)들이 살고 있다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스스로 메뚜기처럼 위축되어, 두려워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자들이다.
결국 이들은 배역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원하던 바대로 광야에서 죽어갔고(단 두 사람만 빼고),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던 그들의 자녀들이 “그 땅”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의 진행 상황을 관찰해 보면, ‘모세’의 언약은 성취를 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뒷걸음질을 해버린 것이다.
과연 이야기의 요지는 무엇일까? <민수기>에 드러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적어도 이 책만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는 분은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민수기>의 독서 포인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문학
1. 제목
그리스 식 이름. <민수기; Numbers>로 알려진 책의 제목은 <칠십인 역>이나 <벌게이트> 번역본에서 그대로 따 온 것이다. 책의 제목이 주는 이미지는 그야말로 숫자나 인구조사에 관한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산문적 형태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의 관심이나 흥미를 끌만 한 특별한 내용은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의 여러 곳에서 인구조사나 숫자와 관련한 일련의 목록들이 잔뜩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참고. 1; 3:15-31; 7:10-83; 26:5-51; 28-29; 31:32-52). 신학자 ‘웬햄’(G. Wenham)도 숫자로 가득한 이 책에서 무슨 유머나, 마술이나, 제사에 관한 계명 등과 같은 요소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 <민수기>라는 이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번의 인구조사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대단한 것이다(<민수기>의 신학에서 이점을 배우게 될 것이다).
히브리 식 이름. 이 책의 ‘히브리’ 식 제목, “광야에서”는 ‘헬라’ 식 제목보다는 더 적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제목 역시 무슨 특별한 정보를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으로 <모세의 네 번째 책>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시내’ 산에서 ‘느보’ 산에 이르는 ‘모세’의 마지막 40년의 여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고별 설교를 마친 다음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설교의 내용은 <오경>의 마지막 책, <신명기>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개의 상이한 제목, “광야에서”와 “민수기”는 실은 전혀 상관없는 제목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얽혀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2. 양식
한 문학 작품의 양식(樣式, form)은 저자의 저작 목적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마태복음>의 독특한 양식은 이 책에서 강조하려는 바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몇 가지 가능한 대답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복음. 복음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해설이자 설명이다. 그런 점에서 <마태복음>은 “복음”으로 불러 마땅하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말하는 전기(傳記)나 일대기(一代記)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고대적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이 책이 그레코-로망 식의 전기라는 인식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태복음>은 나머지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하여 “케리그마”(kerygma)의 형식으로 선포해놓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는 복음의 핵심,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또 다른 양식적 특징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다음에 제시하는 일련의 양식적 특징은 복음의 양식과 반드시 병행한다고 볼 수는 없더라도, 결코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드라쉬(Midrash). <마태복음>의 양식적 특징 중의 하나로 “미드라쉬”를 꼽는다. 이 단어는 “찾다”, “구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שׁ(다라쉬)에서 유래한 명사다. 일단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양식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유대 문헌에서 미드라쉬는 특별히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을 뜻한다. 이 단어의 의미를 <마태복음>에 적용하여 좀 더 확장하자면, “역사 이야기”(historical narrative)의 형식을 취한 예수님에 대한 교육적이고 신학적인 해설로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좁은 의미에서 볼 때, 미드라쉬는 구체적인 <구약> 인용 사례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역사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마태복음>을 <마가복음>에 대한 미드라쉬, 즉 “확장된 설명(해설)”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역대기>가 <열왕기>에 대한 해석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태 화자는 일부 <구약>을 인용하면서 일종의 미드라쉬 즉 해설 내지는 재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태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그 어떠한 역사적 이야기도 화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컨대, 예수님에 관한 <유아 설화, 幼兒說話>에서 화자는 여러 차례 <구약>을 인용하고 있어 이야기의 문체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 자신이 임의로 이야기를 창작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와 해석적 역사 기록은 분명 다른 영역에 속하긴 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소설 내지는 신화에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성구집(聖句集, Lectionary). 혹자는 <마태복음>을 하나의 문학 작품이 아니라 예배 시 사용하는 일종의 독서집(讀書集) 내지는 성구집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 책의 내용은 유대 절기에 따라 예배 시에 낭독할 수 있도록 시기별로 적절한 내용을 편집해 놓은 것이다. 오늘로 치면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독문 모음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교리집(敎理集, Catechesis). <마태복음>을 교리문답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의 문학적 구조와 관련해서 앞에서 소개한 바처럼, 다섯 번에 걸친 예수님의 강론 모음이 책 속에 있기는 하다.
3. 구조
한 마디로, <마태복음>의 문학적 구조에 관한 한 어떠한 일치된 견해나 입장도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만큼 이 책에는 너무나 다양한 구조적 특징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 구조 하나 만으로 책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사실 상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래에 제시하는 몇 가지 구조적 특징들이 바로 그 이유이다.
다섯 번의 강론. 책의 구조를 가장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다섯 번에 걸친 예수님의 강론이다. 각 강론은 한 결 같이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7:28; 11:1; 13:53; 19:1; 26:1). <마태복음>은 <요한복음>에서처럼 (1) 강론(discourse)과 (2) 이야기(narrative)의 두 양식(樣式, form)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다(도표 참고):

그러나 두 복음서에서 차이가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두 양식 간에 어떠한 연결을 시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강론들은 마태 화자 자신의 편집으로 보이며, 그 목적은 교훈이나 교리를 위한 것이다. 다섯 차례의 강론은 각기 그 앞에 선행(先行)하는 다섯 개의 이야기 군(群)들을 두고 있다(예. 3-4장; 8-9장; 11-12장; 14-17장; 19-22장). 이러한 형식이 책의 전체 구조를 결정하고 있다(도표):
혹자는 이 다섯 번의 강론은 <오경>의 다섯 권의 책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을 새로운 율법의 수여자 즉 두 번째 모세로 그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세를 예수님의 예표(豫表, typology)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겠다. 그리고 <시편>도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위 도표에서 보듯이, 다섯 차례의 강론은 다섯 개의 선행하는 이야기 군(群)들을 가지고 있지만(예. 3-4장; 8-9장; 11-12장; 14-17장; 19-22장), 이를 근거로 책이 다섯 개의 기본 골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은 책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일부 내용들은 이 구조 속에 포함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담고 있는 23장은 뒤이어 등장하는 종말에 관한 강론(24-25장)의 일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위 도표를 구성하는 다섯 차례의 강론 외에도 상당한 분량의 강론이 11장에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구조 속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나 수난 이야기가 있을 자리가 없다. 따라서 위 도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조는 책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적 구조이지 기본 구조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두 번의 전환점.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서 두 개의 큰 전환점이 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4:17)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두 구절 모두 “이 때로부터”라는 어구(語句)로 시작하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이 이와 같은 표현이 책 전체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두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전체를 세 개의 설화 모음으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예수 그리스도: 탄생과 준비에 관한 이야기(1:1-4:16)
(2) 예수 그리스도: 말씀과 기적 사역(4:17-16:20)
(3) 예수 그리스도: 수난과 부활 이야기(16:21-28:20)
이들 세 이야기는 책의 전체적인 구조를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접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이 두 구절이 단락 구분을 해주는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인 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두 번째 단락의 시작인 4:17을 첫 번째 단락의 4:12-16에서 별도로 떼어놓는다든지, 또는 16:21을 그 이전의 구절들과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다.
교차대구적 구조. <마태복음>이 다음과 같은 대칭적 교차대구(交叉對句)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화자 자신이 그와 같은 구조를 의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은 없다. 다만 이 같은 주장을 하는 근거는 각 단락의 문학적 양식이 이야기와 강론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상호 대칭관계에 있는 단락끼리 내용이나 분량에 있어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는 부분도 있으나 이 같은 구분은 다분히 작위적(作爲的)이라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자에 따라 대칭의 중심이 되는 본문이나 전체 단락의 숫자도 달라서 어떤 통일된 입장을 찾기가 어렵다. 예컨대, 혹자는 13장이 아니라 11장을 대칭의 중심에 놓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전체를 일곱 개의 단락으로 보고 13:1-16:20의 본문을 그 중심에 놓기도 한다.
다른 요소들. 마태 화자는 책의 중간 중간에 예수님의 사역을 요점 정리하듯 일련의 구절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는 마치 길에 이정표(里程標)을 세워놓은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책 속에 적어도 일곱 개의 그러한 표지판이 등장하고 있다:
(1)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4:23-25)
(2)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9:35)
(3)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11:1)
(4)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14:35-36)
(5)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5:29-31)
(6)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19:1-2)
(7)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21:14)
이들 모든 구절들이 한 결 같이 가리키고 있는 바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관한 것이며, 처음 두 본문은 특별히 천국 복음에 관한 선포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화자가 책 전체의 큰 구조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들 본문을 삽입했는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하겠다.
위의 일곱 개의 표지판에서 보듯, 화자는 유난히 숫자 일곱을 선호하는 듯하다. 예컨대, 그는 일련의 유사성이 있는 내용들을 일곱 개로 모아 한 개의 군으로 만들고 있다. 예컨대, 주기도문이 일곱 개의 기도문(내지는 간청)으로 이루어져 있다든지(6:9-13), 제 13장이 일곱 개의 천국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수님의 족보도 일곱 개의 세대가 두 번 등장하고 있다(1:1-7). 이외에도 화자가 좋아하는 숫자는 3이다. 예수님의 전체 족보를 세 개의 세대로 나눈 것이라든지(1:1-17), 경건의 행태를 세 가지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6:1-18),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도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21:28-22:14).
화자의 뛰어난 수사적(修辭的) 기법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또 있다. 일종의 이중 반복의 기법도 그 중 하나다. 즉 그는 자신이 참고로 한 원래의 자료(예. <마가복음>)에 있는 내용의 일부를 두 배로 수정하여 전하고 있다. 예컨대, 귀신들린 두 사람(8:28-34)이나 두 맹인(20:29-34)에 관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가복음>에는 각기 한 사람씩이다(참고. 막 5:1-20; 10:46-52).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는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의 증거능력을 더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마치 그가 한 사람이 아닌 두세 사람의 증인을 요구하고 있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마태 화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처럼 아주 다양한 수사적 기법을 동원하고 있는바, 교차대구나 반복이나, 수미상관이나, 심지어 시(詩)의 사용 등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분명 다양한 문학적 자질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책의 구조는 역설적으로 더 복잡하고 분석이 어려워진 느낌도 든다. 혹자는 책 속에서 여러 구조적 패턴이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 가지 패턴으로 구조 분석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또 하나 이 책의 구조를 분석함에 있어 유념해야 할 사실은 <마태복음>은 전체적으로 <마가복음>의 개요(槪要)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12장 이후에 그러한 모습을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태 화자는 어쩌면 어떤 통일된 구조적 원칙을 자신의 책 속에 도입할 의도가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있다면 다만 이야기와 강론을 번갈아 전하고 있으며, 그나마 이들이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제 별로 정리해 놓았다는 느낌이다.
이 사실을 토대로 엘리슨(D. A. Allison)은 책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4. 내용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마태복음>의 구조 분석과 관련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 구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앨리슨(D. C. Allison)이 제안한 바 있는 구조, 즉 책 전체를 통해서 이야기(narrative)와 강론(discourse)의 두 양식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는 구조를 바탕으로 내용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4.1. 제 1부-이야기: 서론(1-4장)
제 1부의 문학적 양식은 “이야기”이다. 주 내용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에서의 <공생애>의 시작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은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1) <출생과 유년 이야기>(1:1-2:23); (2) <공생애의 준비>(3:1-4:11); (3) <갈릴리 사역>(4:12-25).
1. <탄생과 유년 이야기>
예수님의 계보(1:1-17).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 이어서 이 계보는 아래에서 보듯 세 개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는데, 각 족보는 14 세대를 포함하고 있다(이 같은 세대 수는 아마 마태 자신의 계산에 따른 것일 것이다):
(1) 아브라함-다윗
(2) 다윗-바벨론 포로
(3) 바벨론 포로-예수님
이 족보에서 가장 특기할 만 한 사항은 그 속에 네 여인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3, 5, 6절).
탄생 이야기(1:18-2:2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성령”에 의한 것으로, 기적적인 사건이라 할 수밖에 없다(18절). 그분의 탄생과 관련한 세 번째 단락은 서술 방식에 있어 앞선 두 개의 단락과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즉 처음 두 단락에서는 무미건조하게 이름들만 등장하고 있는 것에 반해, 마지막 단락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한 일련의 이야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혈연의 아버지가 아니라 법적 아버지이다.
(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들의 탄생을 예고한다.
(다) 하나님의 계시가 꿈의 형태로 나타난다.
(라) 아들의 두 이름: 예수와 임마누엘
(마)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구약>을 인용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절).
(바) 이방인 현자들이 등장하여 예수님을 예배한다.
(사) 새로운 왕의 탄생에 대해서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헤롯 왕.
(아) 예수께서 다윗의 성 베들레헴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2. 공생애 준비
이어지는 두 장(3-4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위한 준비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크게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1) 침례 요한의 사역
(2) 예수님의 침례
(3) 광야의 예수님
침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했던 선지자이다.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푼다. 특기할 만 한 일은 예수님도 그로부터 침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자 말자 성령님께서 그분에게 임하셨으며, 곧바로 그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로 이끌리어 가서 그곳에서 사탄의 유혹에 직면한다.
마태 화자는 침례 요한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가) 요한의 메시지-“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나중에 예수님도 사역의 벽두에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나) 예수님의 침례에 대한 요한 주저함-그는 자신이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우겼으나,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답변하신다.
이들 세 개의 중요한 에피소드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바, 가르치는 일과 기적을 베푸시는 일이다.
4.2. 제 2부-강론: 산상 수훈(5-7장)
두 번째 단락은 그 양식에 있어 강론으로서, 다섯 차례의 강론 중 그 첫 번째이다. 특별히 이 단락의 내용은 이른바 “산상수훈”(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으로 불린다. 이곳에 등장하는 내용은 <누가복음> 제 6장에 등장하는 내용과 대동소이하나, <마태복음>에서 특기할 만 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 단락은 다섯 차례의 강론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2) 강론의 주제는 제자도와 하나님의 나라(천국)이다.
(3) 강론의 초점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성취한 예수님에게 맞추어져 있다.
(4)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가르침은 상호 반명제(反命題; antitheses)의 관계로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예수님은 율법 교사나 바리새인들이 지니고 있는 <구약>의 “의”(義; righteousness)에 대한 이해를 틀린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로 교정해주신다. 그리고는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얻기 위해서 의를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요구하신다(6:1-18).
(5) 강론은 일련의 경고와 도전으로 마무리된다. 경고라 함은 거짓 종교에 대한 것이며, 도전이라 함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하여 듣는 이는 모래 위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7:13-27).
4.3. 제 3부-이야기: 공생애 사역(8-9장)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놀랍고 권위 있는 가르침은 놀랍고도 권위 있는 갈릴리의 기적 사역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8-9장). 기적의 내용은 주로 치유와 축사(逐邪)와 기타 초자연적인 기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4.4. 제 4부-강론: 두 번째 강론(10:1-11:1)
두 번째 강론의 핵심은 단기 선교를 위해 열두 제자를 불러 파송하며 권위와 함께 주신 일련의 선교 지침을 담고 있다. 선교의 대상은 이스라엘 접경 지역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한한다(10:5, 23).
4.5. 제 5부-이야기: 대적자들(11:2-12:50)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분을 의심하거나,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의 정체에 관하여 부정적인 질문들을 하기 시작한다. 먼저 현재 감옥에 갇혀있는 침례 요한에서부터, 바리새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가 하며, 귀신의 우두머리 바알세발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고 험담한다. 예수님은 이들의 비난에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공세에 반응한다.
4.6. 제 6부-강론: 하나님의 나라(13장)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강론은 예수님의 세 번째 강론으로서, 모두 여덟 개의 비유(parable)가 등장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독특한 비유는 다음과 같다:
(1) 가라지 비유
(2) 잃어버린 보화
(3) 진주의 비유
(4) 고기 잡는 그물의 비유
(5) 제자 된 서기관의 비유
4.7. 제 7부-이야기: 공생애 사역(14-17장)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진다. 사역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두 개의 기적, 즉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과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이 마치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루듯 짝을 이루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일련의 에피소드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중 절정을 이루는 순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이에 예수님은 그를 반석으로 칭찬하며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순간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수난에 대해서 예고하시며, 이에 제자들은 당혹하고 실망한다. 이 대목이 공생애의 전환점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전환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후부터 주님의 공생애는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 사역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예컨대, 유대인 예식을 비판하는가 하면, 한 이방인 여인의 놀라운 믿음에 관한 이야기와, 이방 지역에서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으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8. 제 8부-강론: 교회와 하나님 나라(18장)
이 단락은 예수님의 네 번째 강론을 담은 곳이다. 강론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에 관한 것이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인가에 관해서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결국 교회에서 교인 상호 간의 관계나 태도에 관한 강론으로 연결된다. 제자들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실족하는 형제를 대하는 문제, 용서와 화해의 문제 등이 강론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4.9. 제 9부-이야기: 수난의 시작(19-23장)
수난의 시작은 곧 종말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부터 이야기의 배경은 갈릴리에서 유대로 바뀌며, 예수님은 제자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향하여 나아간다. 유대 당국과의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들로 규정하고, 임박한 심판에 대하여 이들에게 경고하신다.
4.10. 제 10부-강론: 임박한 심판과 구원(24-25장)
이 단락은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에 관한 예수님의 강론을 담고 있다. 특기할 만 한 사항은 강론 중에 나타나는 일련의 비유들인데, 현명한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에 대한 비유, 양과 염소에 관한 비유 등이다.
4.11. 제 11부-이야기: 수난과 부활(26-28장)
책의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후의 만찬; 체포; 심판; 죽음; 부활. 마태가 전하는 <수난 이야기>는 몇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1) 가롯 유다에 관한 언급인데,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자책감으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7:3-5).
(2) 로마 총독 빌라도의 아내에 관한 언급으로서, 그녀는 악몽을 꾸어 남편에게 “이 의로운 사람”에 대해서 아무 상관도 말라는 조언을 한다. 과연 빌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도 없음을 확신하고 자신의 손을 씻음으로써, 그의 죽음에 자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27:19-26).
(3) 역설적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소서”(27:25).
(4)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일어난 일련의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27:51-53).
(5) 유대 당국은 예수님의 무덤을 돌로 인봉하고, 경비병을 두어 지키도록 요청한다(27:62-66).
(6) 안식 후 첫날 지진이 나며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자, 경비병들은 놀라 혼비백산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꾄다(28:2-15).
(7)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되돌아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28:9-10), 갈릴리에서도 나타나셔서 그분의 제자들을 만나신다(28:16-20). 이 장면은 아주 결정적인 순간으로서 그 장면을 재현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으며;
(나) 제자들은 그분을 경배하였고;
(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그 유명한 대 위임령 즉 지상선교명령을 말씀하셨다(28:19-20).
(라) 그리고 그분은 세상 끝날 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의 이름, ‘임마누엘’에 걸 맞는 약속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의 역사
저작과 편집. <민수기>는 ‘모세’의 단일 작품일까 또는 후대의 편집의 결과일까? <오경>의 네 번째 책으로서,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잇고 있는 <민수기> 역시 이 질문으로부터 무관할 수가 없다. 즉 이 책이 ‘모세’의 단일 저작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소위 일련의 편집의 산물인지에 관한 것이다. <오경>의 즉 “모세 저작 설”과 “편집 설”이 그것이다. 이 질문에 관해서는 앞선 총론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본문 중의 구절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답하는 것으로 대신할 것이다.
우선 “모세 저작 설”과 관련해서 볼 때, 이를 지지(支持)할만한 내적인 증거는 단 한 곳밖에 없다: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3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수기>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모세’야말로 이 책 전체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유일한 수령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모세’를 일인칭(一人稱)이 아닌 삼인칭(三人稱)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저자를 삼인칭으로 지칭하는 것은 고대 문학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문학적 관습이라고 변론하고 있다. 따라서 ‘모세’를 삼인칭으로 지칭한다 해서 그가 이 책의 실질적인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면 후대의 “편집설”과 관련한 주장은 <민수기> 내에서 ‘모세’ 이후의 글로 인정되는 많은 자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컨대, <여호와의 전쟁기>에서 발췌한 짧은 시가 있는가 하면(21:14-15), ‘요단’ 동편에 정착하게 될 두 지파의 정착 활동에 관한 기사(32:34-42)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은 ‘가나안’ 정복 이후 후대에 삽입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모세’가 책의 직접적인 저자가 아니라는 본문의 근거는 또 있다. 아마도 가장 악명 높은 구절은 ‘모세’를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추켜세우고 있는 구절이다(참고. 12:3). 만일 ‘모세’ 자신이 이 책의 저자라면, 어떻게 자신이 스스로를 추켜세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대의 편집을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다. 즉 인구조사에 관한 1장과 26장의 기사는 분명 <민수기>와는 독립적으로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자료였음에 틀림없으며, ‘모세’는 다만 이들을 활용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발람 이야기> 역시 후대의 편집적 삽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해석적 입장. 하지만 <오경>의 역사와 관련해서 수차례 언급했던 바처럼, 우리의 입장은 “역사비평적”(歷史批評的) 연구 결과를 존중하되, <오경>에 대한 “공시비평적”(共視批評的) 입장과 더 나아가 독자중심 비평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민수기>의 해석에 임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신학
<신약> 전체가 그러하지만, 네 <복음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책의 주제이자 주인공은 다른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마태복음>은 과연 그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마태복음>은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을 <마가복음>으로부터 취하고 있어, 당연히 신학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동시에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각색 및 재편집하고 있는지를 관찰해 봄으로써, <마태복음>의 각별한 신학적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찰해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이 아닌 또 다른 제 삼의 자료를 참고하였을 것이므로, 이를 통해서 <마태복음>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신학적 입장을 엿볼 수도 있다. 이 같은 설명을 바탕으로 <마태복음>의 신학적 주제를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나라(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定意)한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시공(時空)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과연 언제, 어떻게 임할까? 이 질문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한 마디로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중성(또는 양면성)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미”라 함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지금 여기에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책의 곳곳에 등장하고 있는 “천국 복음”(the gospel of kingdom)이라는 표현이 이점을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다(참고. 4:23; 9:35; 24:14). 천국복음이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시작했다는 좋은 소식을 말한다. <마태복음>은 책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현실로 임재 해 있음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화자(話者)는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적 표현으로서 실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대한 완곡적인 표현이다(실제 “하나님의 나라”는 12:28, 19:24, 21:31, 43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마태 화자에게 있어 왕국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그는 이 단어를 어느 다른 <복음서>에서 보다 더 빈번하게 하용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에 비하면 무려 세 배 정도나 더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침례 요한의 경우아 마찬가지로(3:2), 예수님의 메시지도 천국에 관한 것이다(4:17). 이는 또한 후에 제자들의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10:7). 사실상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어떤 형태로든 이 주제와 불가분의 관계 하에 있다. 물론 이 천국이 존재하는 방식이 제 13장의 천국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전혀 예기치 않게 와서 신비한 영역으로 남아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것들 중에서 아직도 미래의 일로 남아있는 것도 있는데, 예컨대 악인에 대한 심판이 그것이다(13:36-42, 47-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13:16-17). 마태 화자도 수시로 이른 바 신조나 신앙고백의 형태로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성취”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여기 이곳에서 성취된 것이 사실이나, 여전히 “아직” 성취될 일로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이는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2. 기독론
“예수는 누구인가?” 앞서 밝힌 바처럼, 마태의 기독론은 다른 그 어떤 신학적 주제보다 더 중요하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여타 주제들, 즉 구약의 성취나, 율법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 제자도,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는 어느 것도 그 의미가 분명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론에 관한 한 마태는 <마가복음>의 이해를 뛰어넘고 있으며,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마가복음>의 고백이<마태복음>에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로 바뀐다(참고. 막 8:29; 마 16:16).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마태복음>의 기독론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가장 핵심이 되는 호칭은 “하나님의 아들”(uiJo;" tou' qeou')이다. 이 호칭은 직접적으로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기도 하지만(예. 8:29; 14:33; 16:16), 그와 같은 의미로 암시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부르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서(1:23), 그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도 <구약>에서 “나는 야훼라”(출 3:14)는 의미의 유명한 헬라어 표현, “에고 에이미”(ejgw eijmiv; It is I)를 자신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으며(14:27),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도 그분의 정체성을 암시해주고 있다(18:20; 28:20).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인가! 마태 화자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대략 23회에 걸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그분의 “아버지”로 지칭하고 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신비한 정체성과 관련해서 가장 놀라운 고백으로 인식되고 있는 대목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것이다(16:16; 11:27). 이와 같은 고백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16:7; 11:27; 13:11).
마태의 기독론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중요한 호칭은 “인자”(人子; Son of Man)이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아들”과는 일종의 대응 관계에 있는 호칭이기도 하다. 즉 전자가 본인이 타인을 향해서 부르는 일종의 공식적인 호칭이라면, 후자는 타인이 그분을 향해서 부르는 개인적인 고백을 담은 호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호칭은 그분의 재림과 종말의 심판과 관련해서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상 마지막 날에는 인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중요한 호칭은 “주님”(kuvrio“; the Lord)은 하나님의 아들과 유사한 이름으로 주로 제자들이 그분을 부를 때 사용하던 이름이다. 또 다른 호칭인 “그리스도”(Cristov”; Christ)와 “다윗의 아들”(Son of David)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호칭인데, 이 둘 모두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다. 하지만 이들 호칭 역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보조적인 호칭임에 분명하다. 그 외의 여러 호칭들, 즉 “아브라함의 아들”, “오실 자”, “랍비”, “목자”, “종” 모두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미들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즉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론의 한 표현이 있는 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 자체이다.
3. 의와 제자도
“의”(義)(dikaiosuvnh, 디카이오수네)는 네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또 다른 핵심 단어 중의 하나이다. 예외적으로 <누가복음>에서 단 한 차례 등장한다(1:75).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태복음>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윤리적 요구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윤리적 요구는 그리스도의 제자도(弟子道)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이 단어가 일곱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중 상당수가 바로 제자도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른 경우에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6:1)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5:10)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리고 일부 몇몇 사례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경우 “의”는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3:1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6)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32)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이 구절은 두 경우 모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연관된 파생어 “의로운”(dikaios, 디 카이오스)은 이 책에서 17회 등장하는데, 이 회수는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는 횟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이 단어의 정의와 기준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율법에 대한 해석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의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능가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결국 의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요청에 준하는 것이다(7:21; 12:50; 21:31).
이 책은 특별히 제자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제자”(maqhthv", 마데테스)는 다른 어느 <공관복음>보다 <마태복음>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으며(73회), 그 동사형 “제자 삼다”(maqhteuvw, 마데튜오)는 네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다(13:52; 27:57; 28:19). 마태 화자는 제자를 “하나님의 아들들”(uiJoi; qeou', 휘오스 데오)로 칭하지만, 때로 겸손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형제들”(ajdelfov", 아델포스)로 더 자주 부르기도 하고(12:49-50; 18:15, 21, 35; 23:8; 25:40; 28:10), 가장 독특한 호칭으로 “작은 자”(mikrov", 미크로스)가 있기도 하다(10:42; 18:6, 10, 14). 제자란 스승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는 자일진대, 당연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며(10:38-39; 16:24-26), 고난을 참고 견디며(5:10-12; 10:16-25; 24:9-13), 종이나 어린아이처럼 겸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20:26-27; 23:11-12; 18:1-4).
4. 율법과 은혜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율법에 충실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7-18). 책 전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의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은 다름 아닌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해설해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대-기독교인 청중을 위해서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하여 <마가복음>보다는 다소 덜 과격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예컨대, 장로들의 유전과 관련한 두 <복음서>의 본문(마 15:1-20; 막 7:1-23)을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에서는 단지 “손 씻는 문제”만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하다”는 결론은 아예 없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칙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입장을 같이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23:2-3), 그들이 모세의 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데의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서조차 예수님은 율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9:10-17; 15:1-20), 율법의 조문(條文)을 뛰어넘고 있다. 그분은 율법의 정신을 꿰뚫어보고 계신 것이다(참고. 5:31-42; 12:1-14; 15:11; 19:3-9). 이와 같이 율법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이 가능한 것은 그분의 정체성과 사역 때문인 것이다. 즉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해석에 관한 한, 그분에 필적할 수 없으며, 동시에 모세의 계승자는 유대 회당이 아니라 유대-기독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울 서신들에서 강조하고 있는 “반 율법주의”와 의도적으로 대척점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태의 성향 즉 그의 유대-기독교적인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새로운 법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의 참된 의미, 내지는 의도된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참고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로운 가르침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전혀 그러한 표현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에서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천국 복음의 맥락 가운데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 다른 의로운 삶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예컨대, <산상수훈>에서 축복이 율법에 앞서 등장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의를 행해야 한다는 준엄한 요구(예. 5:19-20; 7:21-27; 25:31-46) 는 항상 은혜에 대한 강조를 수반하고 있다(예. 5:3-12; 9:12-13; 10:7-8; 11:28-30; 18:23-35; 20:1-16; 22:1-10; 26:26-28). 이처럼 천국의 은혜와 율법의 요구가 역동적인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은혜가 율법에 앞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5. 교회론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ejkklhsiva)는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하고 있다(16:18; 18:17). 제 16장에서 예수님의 신분과 관련해서 베드로의 유명한 고백이 있은 후에, 그 위에 예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는 베드로 한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16:19), 교회 전체의 것이기도 하다(18:18-19). 교회의 권위는 곧 교회의 사역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9). 즉 교회의 특권이자 사역의 본질은 신자들이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태복음>은 한편으로 “교회 복음”으로 불러 마땅하다 하겠다. 이미 책 전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예수님의 주요 강론도 교회 교육을 위한 것이다. 베드로는 기독교 지도자의 전형으로서, 제자들과 그들의 경험은 마태 당시의 공동체를 섬김에 있어 역할 모델이 되었다.
<마태복음> 속에는 당면한 문제에 관한 지시나 교훈도 있다. 이 공동체는 아마 내부 분열이나, 배교나, 기타 불법의 문제를 겪고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화자의 처방은 교회는 참된 교인과 이른바 “쭉정이” 교인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예. 13:29-30, 47-50; 22:11-14). 그는 또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준엄한 경고를 주고 있는데, 이들은 실은 양의 탈을 쓴 이리들로서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치는 일종의 영적 은사주의자들이다(7:15-23). 이들의 특징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악한 행위로 악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참된) 순회 선지자들에게는 친절과 호의를 베풀 것을 권고하고 있다(10:41). 동시에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교만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피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23:8-12), 이들 역시 율법을 지키지 않는 무리들이다. 화자는 반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모두 그가 속한 교회의 필요 때문인 것이다.
4. 종말론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비해 특별히 종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흔히 “감람산 강론”(마 24-25)으로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종말론 강론은 분명 <마가복음>(13장)의 그것에 비해 길고 상세할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에는 없는 새로운 내용을 더하고 있다. 새로운 내용은 주로 종말의 심판에 관한 것들이다: (1) 열 처녀의 비유(25:1-13); (2) 최후의 심판(25:3-46). “감람산 강론” 외에도 마태 특유의 종말론 강론을 발견할 수 있다(예. 13:24-30, 36-43; 20:1-16; 22:1-14). 그러나 마태의 종말론 강론에는 묵시(黙示)적인 색채가 묻어나오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파루시아”(parousiva)가 <마태복음>에만 등장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24:3, 27, 37, 39).
그런데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신약> 전체에 등장하는 종말에 대한 강론은 항상 그 첫 번째 목적이 무슨 미래에 관한 정보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임박한 심판에 대비하여 교회로 하여금 상응하는 행동을 취하도록 권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도 “감람산 강론”은 종말론 그 자체의 신학이 아니라 항상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함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교회는 내일 그곳에서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어떻게 율법의 의를 이루며 살아야 할 것인가?” 미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약속은 그런 점에서 하나의 가능성이자 조건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5. 구속사
<마태복음>은 역사, 특히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가? 학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세대를 구분하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 가능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스라엘-예수 그리스도-교회; (2) 이스라엘-예수 그리스도.
이 같은 차이는 <마태복음>의 구조를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마태복음>에서 교회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면 후자(後者)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교회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한 새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반면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가 교회에 있다고 본다면, 전자(前者)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는 일종의 전환기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면 필수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연습과 토의
<마태복음>을 깊이 있게 공부하기 전에 책 전체에 대한 조망(鳥網)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조망이라 함은 마치 새가 공중에서 숲을 내려다보며 숲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는 일을 말한다. 아래에 제시한 몇 가지 질문은 <마태복음> 전체에 대한 조망을 갖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 복음(福音)은 그리스어로 ‘가스플’(gospel), 즉 “좋은 소식”(the good news)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복음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 친구에게 복음을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복음을 어떻게 정의(定意)내릴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복음을 정의해 보자. 그리고 복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나에게 필요한지 설명해 보자.
2. <신약>에서 복음서로 불리는 네 권의 책이 있다: 흔히 <공관복음>으로 부르는 세 권의 책,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이 있고, 다른 한 권의 책 <요한복음>이 있다.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 나는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과연 복음서란 어떤 성격의 책인가? 일부 학자들은 <신약>에서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역사서로 분류하고 있다. 복음서는 과연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역사책일까?
3. <창세기>와 <마태복음>은 각각 <구약>과 <신약>의 첫 번째 책이다. 이들 두 책이 각기 그와 같은 위치를 지닐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창세기> 제 1장과 <마태복음> 제 1장은 각기 시작에 관한 진술로 책을 열고 있다. 두 곳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 바, “계보”가 그것이다. 이를 영어 번역본에서는 geneology로 번역하고 있다. 이들 두 장은 각기 어떤 계보를 소개하고 있는가(참고. 창 2:4 및 마 1:1)?
4. 침례(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역의 제 일성(一聲)은 모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다. 천국(天國)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의 다른 말로서, 그리스어로 ‘바실레이아’로 부른다. 나 자신의 말로 천국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참고로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일곱 가지 비유(parable)를 들어 “천국”에 관하여 설명하신다.
5. <마태복음>에서 천국과 함께 등장하는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다. 교회(‘바실레이아’)가 그것이다. 나 자신의 말로 교회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특히 천국과 교회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답변은 위하여 <마태복음> 16:17-19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6. 나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두 구절(28:19-20)을 암송할 수 있는가? 이 두 구절을 흔히 “대 위임령”(大 委任令) 또는 “지상 선교명령”(至上宣敎命令; the Greatest Commission)이라 부른다(이를 지상명령과 혼돈하지 말 것). 여기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그 대상은 무엇일까? 참고로 <마태복음>은 제 1장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그 마지막 장에서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하고 있는 세계인으로서의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