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성경>을 흔히 “타낙”(Tanak)이라 부른다. 이는 <오경>(五經; 토라>과 <선지서>(先知書; 느비딤>와 <성문서><聖文書; 케투빔>의 처음 세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선지서>는 다시 <전기 선지서>와 <후기 선지서>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영어성경>의 분류 방식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예컨대, 개신교식 분류 방식에 의하면, <전기 예언서>는 <역사서>로 분류되며, 이 속에는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추가로 포함된다. 이들을 다시 각 종교 별로 분류해 보면 아래 도표와 같다.
<여호수아>는 개신교 <영어성경>의 분류에 따르면 <역사서>의 첫 번째 책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선지서>(또는 <예언서>의 첫 번째 책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이 책을 <선지서>로 불렀으며, 왜 기독교 진영에서는 <역사서>로 간주할까? 흔히 개신교 <정경>의 순서는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서>가 역사적인 성격보다는 예언적인 성격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신학화 된 역사. 사실 역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며,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역사에는 순수한 사실(事實)로서의 역사가 있긴 하지만, 모든 사실을 다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들을 취사선택하고 배열함에 있어 실제 사건과 후대의 독자 사이에는 기록자의 주관적 입장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즉 역사와 역사기록(史記)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 사실적이며,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사기는 주관적이며, 선별적이며, 목적 지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이점에 대해서는 <오경 개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단순한 연대기나 족보를 역사로 규정할 수 없듯이, <전기 예언서>의 책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역사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규정한다 하더라도, 현대의 역사가들을 만족시키는 그러한 종류의 역사는 아니다. 굳이 이들 책의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신학화한 역사”(神學化 한 歷史)로 규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의 경우만 하드라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은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 공평성을 결여하고 있다. 예컨대, 이 책은 “요단강 도하 이야기”나 “길갈의 언약 의식” 및 “여리고와 아이 성 이야기” 등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가나안 남부 지역 정벌”에 관한 기록은 매우 간결하다. “북부 지역 정벌”에 관한 기록은 이보다 더 짧다. 어떤 경우에는 정복된 민족이나 도시의 이름조차 생략하고 있다. <사사기>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야기의 구성이 반드시 연대기적으로 기록된 아니라, 후대 화자의 신학적 의도를 담은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사기> 역시 당대의 정확한 역사를 소개해주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열왕기> 역시 이스라엘의 왕정에 관한 모든 사실(史實)들을 다 기록하고 있지 않다. 남북조 왕국에 얽힌 정치적인 이야기보다 신앙적인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결국 <전기 예언서>는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관점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함직한 그런 종류의 역사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선지자적 관점의 “신학화한 역사”이다. 선지자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수아’를 비롯해서 ‘사무엘’, ‘나단,’ ‘엘리야’, ‘엘리사’ 등과 같은 선지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언약이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다.
역사적 중요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기 예언서>의 역사적인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모든 역사 기록은 선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매우 편향된 시각을 가진 아시리아 왕들의 연보(年譜)나 헤르도투스 및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은 당연히 많은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들의 역사 기록이 역사적인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가는 목적에 따라 자료를 선별할 뿐이다. 그는 역사 기록을 창조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다른 목적을 가진 자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목적에 따라 선별할 뿐이다. <전기 예언서>의 선지자들 역시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역사적 자료들을 선별했던 것이다.
<구약>이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르도투스’ 이전의 어떠한 책보다도 역사적인 기록을 더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고학적 발견들을 통해서 <구약>의 역사적인 정확성은 반감되기보다 오히려 더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예언서>나 <구약> 전체의 역사적인 요소는 종교적인 메시지에 종속 내지 결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 책속에는 예언(預言)과 하나님의 목적이 드러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그 메시지가 인식되고 있다.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 <히브리 성경>이 <선지서>를 이처럼 둘로 구분하는 것은 이 두 예언서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前者)는 주로 가나안 정복 시기와 초기 왕정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루는 내용은 포로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후자(後者)는 두 왕국이 종말을 고하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시간적인 차이가 두 <예언서>의 유일한 차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차이는 각 책의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기 예언서>는 더욱 “역사적”이다. 이 책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비교적 연대기에 맞추어 기술하고 있다. <여호수아>로부터 <열왕기>까지를 통해서 우리는 “가나안 입성”에서부터 “포로시대”까지의 기간, 즉 주전 1250-586년 사이의 역사를 연결해서 재구성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어 성경>에서 이 책들을 <역사서>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후기 예언서>를 통해서는 역사에 대한 희미한 개요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순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전기 예언서>를 통해서 그 순서를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경우에도 <후기 예언서>에 등장하는 내용들을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런 점에서 <후기 예언서>는 그야말로 “예언적”인 성격이 더욱 강하다 할 것이다. 내용적으로도 선지자들이 선포한 메시지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요소는 <전기 예언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여호수아>는 주인공 ‘여호수아’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일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고 있지 않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전한 메시지도 <사무엘>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나단’이 전한 메시지가 <예레미야>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의 예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기 예언서> 중에서 그나마 예언적인 내용으로서 가장 긴 것이 “엘리야 이야기”(왕상 16-왕하1)나 “엘리사 이야기”(왕하 2-9)일 것인데, 이들 선지자들의 예언을 ‘미가’나 ‘스바냐’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기 예언서>가 원래는 예언적(또는 선지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연속적인 기록을 제공해 주긴 하지만 항상 선지자의 눈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역사적 질문들
1. 설화세계
<역사서>들은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서로 보기는 어렵다. 즉 이들은 고대 근동세계의 역사를 드러내주는 창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책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일어났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고대 근동”(古代近東)의 지리와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서>의 “설화세계”(說話世界)는 고대 근동일 것이며, 아래 도표에 도시한 시기 전체를 고대 근동으로 일컫는다. 이중에서 <역사서>의 주 무대는 대략 주전 16-6세기가 된다(도표의 노란 색 부분).
구약 세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는 본 교재의 제 1권에서 개략적으로 다룬 바 있다. 또한 <성경>과 고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룬 바 있어(제 1권, 제 6장), 역사물(歷史物)로서의 <역사서>의 역사적 신뢰성에 관한 문제도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2. 본문의 역사
서론. 지난 한 세대 동안 <오경>에 대한 “역사비평적”(또는 通視批評的) 입장은 <역사서>에 대해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역사비평”의 대 전제는 <오경>을 포함한 <구약>의 대부분의 책들이 단일 저자의 창조적인 활동의 결과로 완성되었다기보다는,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자료들을 후대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수집하고, 편집 및 배열한 채로 자신들의 독창적인 작품 속에 함께 삽입한 결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참고: 오경의 형성 과정 도표). 이 단락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이형원의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을 주로 참고하였다.
이처럼 “역사비평적” 입장을 <역사서>에도 그대로 적용하게 된 이유는 <오경>의 경우와 동일하다. 즉 이른바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비일관성”(非一貫性) 때문이다. 특별히 <역사서>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사례들을 요약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다양한 문학 양식: <역사서> 속에는 한 개인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문학 양식이 혼재(混在)하고 있다. 예컨대, 회고록 양식(느 1-7), 목록(수 13-19), 성전 건축 기사(왕상 6-7), 법률 문서(수 20), 기도문(느 9), 시(사 5) 등이 있다. 책 전체적으로 설화체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여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전쟁 기사(수 6-12), 역사적 조망(삿 1:1-3:6), 개인들의 일상사(룻), 대중 연설문(삼상 12), 사적인 대화(삼하 13:1-20), 기적 이야기(왕하 4-6), 기적 이야기가 전무한 부분(삼하 9-20).
(2) 다양한 문체(style): 또한 <역사서> 안에는 문학적 수준이나 깊이가 다른 문체들이 혼재하고 있다. 때로는 탁월한 문학적 솜씨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문학 작품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조잡함도 부여주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룻기>나 <에스더>는 형식이나 구조에 있어 탁월한 문학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에스라>나 <느헤미야> 등은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고르지 못하고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이점 <여호수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아주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하게 시작하고 있는 처음 몇 장의 긴장감에 비해, 책의 후반에서 지파 별 경계에 관한 기술은 그야말로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뿐이다.
(3) 불규칙적인 사건 전개: 일부 이야기들은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 분명하게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고 있거나(예. 삼상 16-31), 또는 뚜렷한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예. 삿 3:7-16: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곳에서 상호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사건들끼리 나란히 기술하고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본문 중에서 이 같은 사례를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다(참고. 왕상 17-왕하 13).
(4) 상반된 관점들: 더 나아가 <역사서> 안에는 동일한 내용에 대하여 정 반대되는 관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여호수아>에서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드러나고 있다. 즉 한 곳에서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기술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그 땅은 완전히 정복되지 않는 채로 남아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무엘>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술을 볼 수 있는데, “미스바 전쟁”에서 사무엘이 블레셋을 완전히 패배를 시켰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두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참고. 삼상 7과 심상 13). 그리고 일부 본문은 연대기적 순서에서 벗어나 있거나(예. 삿 17-21), 또는 같은 내용의 본문을 다른 곳에서 거듭 반복 기술하고 있다(예. 삿 1:1-2:5/2:6-3:6; 스 2/느 7).
(5) 과도한 반복과 지나친 생략: 과도한 반복이라 함은 한 이야기에서 단어나 어구(語句)나 사상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현상을 말하며(예. 수 3-4), 지나친 생략이라 함은 한 이야기에 대하여 화자의 충분한 설명이나 윤리ㆍ도덕적 평가가 필요한 시점에서 오히려 짧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를 말한다(예. 삿 19:2; 삼하 21:1-14).
따라서 역사비평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성경>이 현재의 본문으로 완성되기까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제반 역사적, 자료적, 구전적, 사회적, 편집적인 의문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사는 원저자나 편집자의 의도와 사상이나 상황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데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기록했을까?” 역사비평은 그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다음 세 분야로 세분할 수 있다: (1) 양식비평(樣式批評); (2) 자료비평(資料批評); (3) 편집비평(編輯批評).
양식비평(Form Criticism): 양식비평의 주된 관심 분야는 크게 두 가지 영역이다: (1) <성경> 본문에서 나타나는 문학 양식을 결정하는 일; (2) 각 양식이 거치고 지나간 역사를 이해하는 일. 이와 같은 일을 연구의 주된 목표로 삼게 된 데에는 이 방법론이 도입하고 있는 일련의 대 전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구약>의 본문에는 구두(口頭)로 된 전 역사(前歷史)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구약> 기자들은 본문을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 기록하면서, 오래된 구두로 된 전 역사를 가진 자료들을 모아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참고. 오경형성과정 도표).
둘째, 양식(genre)은 형성되고 발전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성경> 본문으로 채택된 하나의 본문 양식은 문자화(文字化) 된 이후에도 계속 남아 그 전통을 계승해가면서, 동시에 시대․사회적 상황에 따라 일련의 양식상의 변천을 거쳐 것이다. 결국 양식은 두 가지 상반되는 특성, 즉 “불변성”과 “가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겠다.
셋째, 각 양식은 독특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삶의 자리에 대한 범위를 놓고 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넓게는 사회 및 시대적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좁게는 독특한 종교ㆍ제의적 자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결국 양식비평이란 <성경> 본문에서 채택하고 있는 문학 양식을 규명하고, 각 양식의 역사나 발전 과정 등을 추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동시에 각 문헌의 독특한 양식과 관계되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사회적인 상황이나, 또는 삶의 자리를 유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도나 목적, 기능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역사서>에서 양식비평을 수행한 예는 <사사기>의 세 본문(2:1-5; 6:11-24, 25-32)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들 세 본문은 공히 “제단”(祭壇) 또는 “상수리나무”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 이야기는 원래 <사사기> 본문 내용 중에 포함된 것들이 아니라, 지역 성소(shrine)의 기원에 관한 설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보다 상세한 내용은 <사사기>개론에서 다룰 것이다). 양식비평의 또 다른 실례를 <열왕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료비평(Source Criticism): 양식비평 학자들의 관심사가 주로 본문의 전 역사(前 歷史) 즉 구두(口頭) 전승사(傳承史)에 관한 것이라면, 자료비평의 관심사는 기록된 자료들의 기록 연대, 기록자, 기록 당시의 상황, 기록 목적, 각 자료의 문학 및 신학적인 특징 등을 추정하는 데 있다. 따라서 자료비평의 목적은 이들 자료들에 대한 연구 결과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의 본문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데 있다.
<역사서>에서 특별히 자료비평 연구의 대상이 되는 본문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여호수아>의 “요단 강 도강 이야기”(수 3-4장)에서 도강(渡江)과 관련해서 반복되는 내용이 수차례 등장하고 있는 것은 여러 자료가 혼재해 있다는 증거다; (2) <사사기>가 두 개의 도입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적어도 두 차례의 편집 과정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 자료비평과 양식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구약>의 완성 단계 이전에 국한하고 있다면, 편집비평의 관심사는 정경화(正經化)의 과정, 즉 <성경>이 최종 본문으로 확정되는 과정에 있다. 동시에 그 과정에 참여했던 편집인(들)의 신학적 의도 또한 동일하게 중요시 여긴다. 자료비평과 양식비평의 한계는 <성경> 본문이 형성되는 최종 단계를 등한시 하고 있다는 점인데, 편집비평은 그 한계를 극복하자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편집비평의 기본 전제를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구약> 본문이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기까지 일련의 편집 단계를 거쳤을 것이다. 이 같은 전제는 양식비평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이기도 하다. 다만 편집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원 자료나 구전(口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 편집 단계와 본문의 최종적인 편집 형태에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둘째, 편집자들은 단순히 과거의 전통들을 기록하거나 보존한 필경사들이 아니라, 역사나 전통들을 수정하거나 보충하며, 더 나아가서 재해석까지 시도했던 창조적 저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대의 신앙 공동체가 당면한 제반 신학적이고도 신앙적인 대안이나 교훈을 주고자 했던 자들이었다.
셋째, 이들 편집자들은 대개 특정 전통이나 학파의 구성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 본문들은 이들이 속해있던 공동체나 학파의 사상과 신학, 언어나 문체 등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구약>의 전승이나 학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① 야훼 전통; ② 엘로힘 전통; ③ 신명기적 전통; ④ 예언자적 전통; ⑤ 현인적 전통; ⑥ 사제적 전통; ⑦ 역대기적 전통.
결국 대부분의 <구약> 본문은 위 전통 가운데 하나에 속한 저자나 편집자가 완성한 것이며, 이들이 속한 전통이나 학파가 무엇인지 알아내면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지름길이 될 것이다.
<역사서>에서 양식비평을 수행한 예는 다윗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사무엘>(주로 삼하 11-20장)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사무엘 상ㆍ하>에서 다윗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대목은 포로기 이후의 편집적 작업의 결과로서, 이는 다윗 왕조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알려져 있는 부분을 반박하거나 상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참고. <사무엘>개론). 또 다른 편집비평 작업의 실례로 <신명기>에서 <역사서>는 “신명기적 역사관”을 드러내고 있는 곳으로서, 적어도 한 차례 이상의 신명기적 전통에 입각한 편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역사서>의 문학
1. 문학비평
<구약> 본문에 대한 역사비평적 접근 방식은 나름의 합리성을 지니면서, 신학과 신앙의 영역에서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역사비평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찾으려는 관심사 때문에, <성경>의 대부분을 파편화(破片化)하고 비정경화(非正經化)하는 오류를 일으켰다. 그 결과 오랫동안 신앙 공동체의 삶과 신앙의 표준이 되어 온 <성경>의 권위가 학문적 비판과 해부의 대상이 되어, 그 고유한 권위를 상실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동과 반성으로 20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일련의 움직임들이 태동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공시비평”(公視批評)으로 통칭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말한다. 공시비평의 기본 인식은 <성경>을 하나의 완전한 문학작품으로 간주하고, 관심사를 본문과 독자(또는 해석 공동체)로 국한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공시비평을 흔히 “문학비평”(또는 신문학 비평)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공시비평은 관심의 대상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들이 가능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몇 가지 대표적인 방법론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정경비평(正經批評); (2) 사회학적 비평(社會學的 批評); (3) 구조주의적 비평(構造主義的 批評); (4) 서사비평(徐事批評); (5) 신문학 비평(新文學 批評)(도표). 공시비평의 각 방법론에 대한 개요와 서사비평에 대한 이해는 다음의 저서와 논문들이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대전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 1991; (2) R. Alter, <The Art of Biblical Nattative>. Basic Books, USA (1981); (3) “서사비평과 신약성서 해석”, 『복음과 실천』18(1995), pp.11-30.
여기서 특히 <역사서>의 해석과 관련해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방법론은 “서사비평”(Narrative Criticism)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공시비평의 한 분야로서 포괄적으로 다룰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 고등비평의 두 방향, 즉 역사비평과 문학비평은 각기 주요 관심 분야를 달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상호 배타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들 각 방법이 나름대로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비평의 제 방법들을 수용하고 총괄하는, 이른바 대통합 즉 “종합비평”적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아래 도표 참고).
종합비평적 자세라 함은 위 도표에 따르자면, 역사비평의 연구 결과들을 인정하고 수용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점(傍點)은 문학비평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학비평의 기본적인 대 전제를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완성된 문학작품. <성경>은 하나의 완성된 문학작품으로서, 독자들에게 의미나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본문의 형성 과정과 관련된 제반 역사적 질문들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독자가 현재 접하고 있는 <성경> 본문의 신학적 주제, 신앙적 교훈, 그리고 정서적 감동이다. 그리고 이들은 본문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하나의 완전한 문학작품으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흔히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호소력이 있으며, 현재의 본문들(예: 다양한 번역본들)보다 원 자료가 더 중요하다는 자료비평의 입장보다 더 포괄적이며 융통성을 지니고 있다.
문학화 된 역사. <성경>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해 주는 역사서가 아니라,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교훈을 전해주기 위한 아름다운 문학작품이다. 따라서 <성경>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창문이나 ‘비디오 테이프’가 아니라, ‘스테인 글래스’나 거울처럼 과거의 역사를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것이다.
정서적 감동도 함께. 문학비평은 <성경>을 단순히 신학과 신앙을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해 놓은 조직신학 교과서로 바라보는 것을 지양한다. 신학적 교훈을 찾아냄과 동시에 본문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이를 통한 정서적인 감동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훌륭한 고전은 독자들에게 정서적 즐거움과 지적 교훈을 둘 다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관객들이 단순히 영화의 주제나 결말만을 보기 위해서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님과 같은 이치다.
독자 중심 비평. 본문 자체의 연구와 함께 독자에 대한 연구도 본문의 의미를 산출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떤 문학 작품이든지 그것이 한 번 저자의 손에서 벗어나면 그 작품의 최종적이고 현재적인 의미는 독자들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저자가 본문을 통해서 의도했던 의미는 그 많은 의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특히 <구약>의 경우 대부분 “원 저자”(original author)나 저술 목적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에 의지해서 최종적인 의미를 산출해 낼 수 있을 뿐이다(사실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은 언어 철학자에서부터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독자에 대한 강조는 <성경>의 정경화 과정을 상기해 본다면 충분히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정경화의 주체는 독자, 즉 당대의 신앙 공동체 또는 해석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성경>의 각 책은 신앙 공동체라는 독자가 신앙적인 판단과 필요에 따라 기록했고, 그 책의 가치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공동체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에 <정경> 속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 <성경> 해석에서 독자의 상황 이해가 중요함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결과 각 책의 “처음 독자”(original reader)나 “의도 된 독자”(implied reader)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장려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비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긴장이 없을 수 없다. 즉 독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부여한 <성경> 본문의 의미가 본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성경>의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충돌할 때의 긴장을 말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을 <성경>의 의미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본문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서 현실화 시킬 것인가? 이러한 긴장은 독자비평을 시도하게 될 때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 긴장이자 갈등이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2. 서사비평
위에서 제시한 문학비평의 기본 전제들을 <성경> 속의 산문(散文)들, 예컨대 <역사서>에 적용할 때, 이른바 “서사비평”으로 칭하는 방법론을 만날 수 있다. 서사비평의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양식. 본문의 특정한 문학 양식은 그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의미를 드러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장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듀브로우’(Heather Dubrow)는 「장르」라는 책에서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선 아래 인용문을 <마플토프의 살인>(Murder at Marplethorpe)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읽어보자:
벽로 선반의 시계는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최근에 그 시계가 고장 났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죽은 듯한 여자의 형체가 거실의 침대 위에 드리우자, 그녀만큼 음산한 모습을 지닌 어떤 사람이 재빨리 그 집을 빠져 나갔다. 그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와 어린 아기가 크게 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죽은 여자는 누구이며, 또 어떻게 해서 죽었는가? 그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은 누구인가? 그 어린 아기는 왜 울고 있는가? 그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글의 제목은 이 인용문이 살인 추리 소설에서 발췌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죽은 여인이 살인 피해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또 그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이 살인자일 것이라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아마 그 아이는 갑자기 침입한 살인자 때문에 놀라서 우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살인이 일어난 시간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계의 정확도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플토프의 이력서>(the personal history of Marplethorpe)라는 제목으로 읽어 보자. 그리고 위에서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들을 해보자. 전혀 다른 대답들을 얻게 될 것이다. 영웅전기(英雄傳記)가 흔히 주인공 영웅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아이는 바로 ‘마플토프’일 것이다. 죽은 여인은 애석하게도 아기를 낳다가 죽은 그의 어머니임에 틀림없다. 또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은 아마 산파였을 것이며, 그 시간은 이 아이가 출생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구성(plot)과 수사(discourse). 학자들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이 둘은 이야기를 이루는 핵심 요소이다. 예로써, 서사비평(敍事批評, narrative criticism)에서는 저자가 서사를 통해서 어떻게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거나 영향을 주려고 하는가를 연구하는데, 이 경우 서사를 이루는 두 부분으로 서사의 “이야기”(story, 서사의 내용)와 “담론”(discourse, 서술 방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구약> 문학의 경우 구성상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평행(a-b-c-d)
(2) 대칭 및 교차(a-b-c: a'-b'-c' 또는 a-b-c-c'-b'-a')
(3) 반복(또는 순환)(a-b-c-a-b-c). 고대 근동 언어들은 전형적으로 상형문자의 회화적(繪畵的)이며 시청각적(視聽覺的) 특징을 염두에 두고 감상해야 한다. 근동의 언어는 읽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보고 듣는 대상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저자들은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화자(話者)요 화가(畵家)다. <구약>에서 장과 절은 후대 독자들이 첨가한 것으로서, 고대의 독법(讀法)을 살린 것이 아니다. 고대 사본들은 한 결 같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기록함으로써, 제목이나 부제나 들여쓰기와 같은 어떤 시각적인 구조 표시도 없이,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단순히 열을 채워나갔다. 이것은 저자들이 그들 언어의 회화적이며 시청각적인 특징을 염두에 두고, 이들 특징이 문장의 이면에 강하게 버티고 있는 구조적인 틀을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틀의 특징은 (1) 평행(parallel), (2) 반복(repition), (3) 교차(chiasmus)로 구분할 수 있다. 반복은 다시 역반복(antistrophe), 평행은 (1) 유사평행(synonymus parallel), (2) 대조평행(antithetic parallel), (3)종합평행(synthetic parallel) 등을 포함하며, 교차에는 (1) 역순환(palistrophe)과 원형구성(ring-composition) 등이 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함에 있어, 어느 한 구성의 형식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여러 구성들을 다양하게 혼합시켜 무미건조함으로 피했고, 더 나아가 나름대로 독특한 심층 구조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주제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이러한 원리에 따라 결말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가는가 하면, 때로는 시적인 반복 평행처럼 순환적인 특성을 보이기도 하고, 또는 음악에서처럼 절정(絶頂)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그 절정에서(최고 또는 최저)에서 다시 그동안의 과정과 대칭(對稱)을 이루면서 결말을 향하여 나아가기도 한다. 이 경우 핵심 주제는 그 절정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성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덧붙일 수 있다:
(1) 구성의 원형(原型)은 무엇인가? 즉 비극으로 끝나는가(∩字型 구성), 아니면 희극인가(∪字型 구성)?
(2) 주인공은 누구이며 그는 어떤 인물인가? 주인공과 함께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주인공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3) 반복되는 행동이나 대화 또는 이미지 등을 통해서 형성되는 모티브(motifs)는 무엇인가?
(4) 이야기의 해설자는 누구이며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이야기의 구성에 대한 이들 질문과 더불어 수사적 기법에 대한 질문들 역시 연구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성경>의 화자들이 통상적으로 동원하는 수사적 기법들을 다음과 같다: 비유; 은유; 이미지; 역설; 해학; 침묵; 오해; 과장; 언어의 유희; 등. 설화의 신학적 목적과 관련해서 세 가지의 기법이 있음을 본인의 <창세기> 교재에서 다룬 바 있다: (1) 반복(recursion), (2) 현재화(contemporization), (3) 예시화(foreshadowing).
신학과 신앙. 본문에 대한 이와 같은 문학적 분석 작업이 끝나면, 본문의 신학적 주제가 마치 결론처럼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사건, 문체, 그리고 구조와 배경 등이 함께 어우러져 총체적인 조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본문의 신학적 주제 도출과 관련해서 대상이 되는 본문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는지 여부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훈과 적용. 이 부분은 <성경> 해석의 절정이자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첫 단계로서 본문의 첫 독자 내지는 의도된 독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들 독자들이 처해있던 삶의 자리 또는 실존적 상황에서 주어졌을 것으로 기대되는 지적 교훈, 정서적 감동, 그리고 의지적 결단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나를 위한 적용과 구체적인 행동 지침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질문해 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성경> 본문의 문학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는 <성경> 본문이 해석학에서 갖는 권위를 계속 옹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방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이 단순히 역사나 과학 또는 사회학 교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전해주는 문학적 도구, 즉 성문학(聖文學)으로서의 지위를 갖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문학적 접근 방식은 해석자들로 하여금 상당한 문학적 자질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자질이 결핍된 가운데 해석자들이 자유스러운 해석을 시도할 때, 혼돈과 주관적 독단주의로 흐를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 비평을 시도하는 해석자들은 일반 문학에 대한 이해나, 그 방법론에 대해서 부단하게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건전한 해석 공동체의 역할도 필수적인데, 이를 통해서 각 해석자가 주관에 빠져 해석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사비평의 실례. 다양한 서사비평의 방법론 중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역사서>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반복(repition): <여호수아> 3-4장과 <사사기> 20:29-48의 두 본문은 각기 이스라엘의 요단강 도하에 관한 기사와,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 간의 전쟁에서 베냐민 지파의 패배에 관한 기사를 다루고 있다. 두 기사 모두에서 공통적인 수사적 특징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반복”적 서술에 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하여 역사비평의 접근 방식을 취한다면, 이들 기사는 적어도 둘 이상의 자료가 섞여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사비평은 이 같은 반복을 히브리 문학 특유의 서술 기법으로 인식한다. 즉 이 같은 반복을 통해서 이야기의 진행 속도를 느리게 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사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2) 반복과 변형(variation): <사사기> 3:7-16:31의 구조적 특징은 흔히 “신학적 윤회”(輪回)로 알려진 것으로서, 이 본문 안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동일한 패턴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매번 색다른 변형을 도입하면서 마치 수레바퀴가 굴러가듯 이야기는 앞으로 진행해 간다. 변화에 포함되고 있는 수사적 요소에는 새로운 요소의 첨가, 기존의 요소의 생략, 특정 요소의 확장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등장인물 등에도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3) 대화(dialogue): <성경>의 서사에는 화자의 서술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간의 대화도 중요한 기능을 한다. 대화는 이들 인물의 특징을 드러내는 중요한 창구로서, 이를 통해서 화자의 신학적 의도 내지는 본문의 주제 파악까지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사사기>에서 미가와 단 지파간의 대화나(삿 18:22-26), 아브넬과 발디엘 간의 대화(삼하 3:15-16), 다윗과 미갈의 대화(삼하 6:20-23), 엘리야와 오바댜 간의 대화(왕상 18:7-16)를 들 수 있다.
(4) 침묵(silence)과 생략(ommission): 그러나 <역사서>의 여러 곳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의도 및 동기 등에 대해서 화자는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사사기> 19장에 등장하는 한 레위 인이 자신의 죽은 첩에게 일어나라고 말할 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참고. 삿 19:28). 그리고 다윗이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즉시 보여주고 있는 돌변한 태도에 대해서도 화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참고. 삼하 12:15-24). e 그리고 <열왕기> 1장에서 밧세바가 늙은 다윗의 침실에 들어가는 장면을 언급하면서 수넴 여자 아비삭이 왕을 시중들고 있었다는 언급도 덧붙이고 있는데(왕상 1:15), 화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독자들로 하여금 밧세바의 당시 심정이 어떠했을 지를 추측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일까?
(5) 지연(gapping): 화자는 필요한 정보를 처음이 아니라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자에게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극적 효과를 더하기 위함일 것이다. <여호수아> 22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그 전형이 된다. 여기서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자신들의 제단을 그곳에 세우는데(수 22:10), 그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의 끝 부분에 가서 비로소 밝히고 있다.
(6) 짐짓 객관적 서술(pseudo-objective narration): 때로 화자는 사건을 서술함에 있어 자신의 관점이나 평가를 유보한 채 그렇게 할 수 있다(예. 삿 1; 17:1-5; 왕상 9-10). 이럴 경우 독자들은 나름대로 질문과 해답을 만들어가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나중에 화자 자신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려고 하는 관점들에 대해서 보다 유연(柔軟)하면서도,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7) 유비(analogy): 하나의 이야기가 때로는 기존의 다른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거나, 공명(共鳴)을 이루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기법을 “서사적 유비”(narrative analogy)라 부른다. 예컨대, <열왕기상> 11-12장에 등장하는 “여로보암의 반역”에 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출 1-14)를 연상시켜주고 있다.
<역사서>의 신학
1. 신명기적 역사관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을 하나님의 개입이나 섭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분명 <성경>에만 있는 독특한 개념임에 분명하다. 고대 근동 지방의 문헌들 중에도 어떤 사건들을 특정 신들(gods)의 활동과 연결시킨 경우들이 더러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성경> 이외의 어디에도 이런 개념을 실제 역사 속에서 일관성 있게 전개시킨 경우는 없으며, 모든 사건들을 오직 한 신에게만 연결시키고 있는 경우도 없다. 이처럼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보려는 일체의 시도를 이른바 “신명기적 역사관”(申命記的 歷史觀)으로 부른다.
역사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여호수아>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역사서>의 거의 모든 책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 보는 바를 훨씬 능가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고대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현저하게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이스라엘 특유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이 사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경우는 <사사기>다. 이 책에는 죄와 심판과 회개와 구원에 관한 신명기적 개념이 무려 열두 번에 걸쳐 나타남으로써, 소위 “신학적 윤회”(輪回)를 이루고 있다. 죄는 심판 즉 외국의 침입을 부르고, 회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사를 세워 구원을 가져오게 한다는 내용이다. 역사에 대하여 이와 같은 이해를 갖추기 위해서는 탁월한 종교적 통찰력,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역사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 즉 “신명기적 역사관”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왕국이 종말을 고하던 ‘요시야’ 시절 당시의 한 천재적인 학자(또는 일단의 학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둘의 합작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성경> 본문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서>의 신학과 저자에 관한 상세한 지식은 대부분의 <구약개론>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의 끝 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단의 참고서적들도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학계는 이러한 사상이 주전 7세기 경 “신명기적 역사가”(Deuteronomist)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개 역사철학을 전개시키기에 합당한 시기는 한 시대의 시작보다는 마지막 때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을 목도한 이후라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작의 시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지혜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나 ‘요시야’의 시대야말로 역사철학을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시기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위대한 천재 또는 선지자들의 이름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놀랍기만 하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놀라운 경험을 했던 자이다. <신명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인과응보적(因果應報的) 역사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힐기야’가 ‘요시야’ 시대에 발견한 “율법 책”(왕하 22:8-13)이 바로 <신명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의 최종 단계에만 조명을 비춤으로써, 그 이전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적 뿌리들, 그리고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인과응보적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었는지 등에 관한 과정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군주-봉주(君主-封主) 간의 조약 양식이 ‘시내’ 산에서 계시된 ‘모세’의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언약의 두 얼굴인 축복과 저주 즉 인과응보적 개념은 <신명기>에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사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동일한 사상에 대한 배경 내지는 뿌리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열왕기>의 여러 대화나 화자의 진술 속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판과 은혜의 개념은 원래는 주로 개인에게만 국한되었지만, <아모스>에 이르는 동안 국가에 대해서도 적용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후 “신명기 역사관”은 한동안 잊혀 있다가 ‘요시야’ 시대에 새롭게 조명 받게 된 것 같다. 국가의 종말과 더불어 이 역사관은 최종적인 형태로 “신명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편집되기에 이른 것 같다. 결국 “신명기 역사관”은 ‘모세’ 시대에 배아의 상태로 출발하여, 왕국의 종말의 시대에 최고조로 발달된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연습과 토의
1. <히브리 성경>과 <영어 성경>은 책의 구성과 내용에 있어 어떻게 다른가?
2. <히브리 성경>은 <예언서>를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누고 있다. 두 책의 차이는 무엇인가?
3. 흔히 <역사서>의 신학적 배경을 “신명기적 역사관”으로 칭하고 있다. “신명기적 역사관”이란 무엇인가?
참고한 책들
1. P. E. Satterthwaite and J. G. McConville, Exploring the Old Testment (vol. two).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7.
2. William S. LaSor (박철현 옮김), 구약 개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291-301.
3. 이형원,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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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신명기>가 끝나는 데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지금 ‘모압’ 평원에 주둔해 있으면서, “요단을 건너 그 땅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해 왔던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휘권을 ‘여호수아’에게 넘기라고 명령하신다(3:28). 그가 이 명령을 수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신 34:5). <여호수아>는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다:
1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5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1:1-5)
따라서 이 책의 주 내용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의 주민들을 몰아내고, 열두 지파 사이에 그 땅을 나누는 것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에서 <역사서>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문학적, 역사적, 및 신학적 문제들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의 문학
1. 양식
이 책의 문학 양식과 관련해서 적어도 세 가지 양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이야기; (2) 대화(독백 포함); (3) 목록(패배한 왕들의 목록 및 지파별 땅의 목록). 이 중 처음 두 양식은 1-11장과 22-24장 사이에서 주로 등장하고 있으며, 세 번째 양식은 12-21장 사이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곳에서도 비록 짧기는 하지만 대화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기는 하다(예. 13:1-7; 17:12-18). 장장 열 장에 걸친 목록 안에 이처럼 대화와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이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게 되는 것을 방지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이 목록이 나름대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2. 구조
<여호수아>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그 땅”이며, 따라서 책도 이 주제와 관련해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도표):
그리고 각 단락은 학자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다시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제 1부: 그 땅을 취하라(1-12장)
(1) 하나님의 진군 명령(1:1-9)
(2) 명령의 연쇄 고리(1:10-11)
(3) 리더십에 관해서(1:12-18)
(4) 창기의 고백(2:1-24)
(5) 요단 도강(3:1-5:1)
(6) 예배와 정복(5:2-15)
(7) 언약의 두 얼굴(1): 여리고 이야기(6:1-27)
(8) 언약의 두 얼굴(2): 아이 성 이야기(7:1-8:29)
(9) 모세의 명령을 수행하다(8:30-35)
(10) 언약의 타협(9:1-27)
(11) 남방 정벌(10:1-43)
(12) 북방 정벌(11:1-23)
(13) 승리의 희생자들(12:1-24)
제 2부: 그 땅을 나누어라(13:1-19:51)
(1) 가진 것을 나누라(13:1-7)
(2) 모세를 회상하며(13:8-33)
(3) 갈렙에게 먼저 주어라(14:1-15)
(4) 유다와 요셉(15:1-17:18)
(5) 실로의 선택(18:1-19:51)
제 3부: 그 땅에서 살아라(20-24장)
(1) 성막 건설(20:1-9)
(2) 레위의 도시들(21:2-42)
(3) 은혜의 선물(21:43-45)
(4) 제단: 권위와 목적(22:1-34)
(5) 마지막 권면(23:1-16)
(6) 언약과 헌신(24:1-28)
3. 내용
3-1. 제 1부: 그 땅을 취하라
1. 진군 명령. <신명기>의 구조를 밝히려는 노력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학 장르-설교, 예언, 조약, 시와 노래, 이야기-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는다. 예컨대, 이 책을 ‘모세’의 설교 모음집으로 보게 되면 전체적으로 세 편의 설교가 각각 네 장과, 스물네 장, 그리고 두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위 도표 참고).
<여호수아>의 역사
1. 여호수아
책의 주인공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이다. 책의 명칭도 그의 이름에서 파생했음에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이 책을 썼을 것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책 자체가 그 점을 전혀 암시하고 있지 않으며, 오늘날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반 지파의 아들로서, ‘애굽’에서 태어났으며, 출애굽 당시에는 젊은 청년이었다(출 33:11). 그는 ‘호세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민 13:8), ‘모세’는 그를 ‘여호수아’ 또는 ‘요수아’(‘야훼’는 구원이시다; 16절)로 불렀다. ‘모세’는 그를 수종자(개인 수행원?)로 선택하였으며, ‘시내’ 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갈 때 함께 데리고 갔다(출 24:13). 그는 또한 ‘모세’가 ‘야훼’를 만나는 동안 장막을 지키는 자였다(33:11).
‘여호수아’는 또한 ‘시내’ 광야의 ‘르비딤’에서 ‘아말렉’의 공격을 격퇴시키기 위한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지휘하기도 했으며(출 17:9), 후에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된 열두 명 중의 하나였다(민 13:8). 이 정탐에서 그는 ‘갈렙’과 함께 그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내놓았으며, 이 일로 해서 훗날 그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일 세대의 유일한 인물이 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차세대 지도자로 임명되었다(신 31:14, 15, 23).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길갈’에 주둔지를 두는 작전을 세웠는데, 이 작전은 그 땅을 효과적으로 양분하여 먼저 남쪽을 친 후에 북쪽을 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서, 군사전문가들로부터 탁월한 선택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본문 지도참고.
구체적인 전투에 대해서는 해당 본문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본문 그러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의 전략으로 돌리는 것은 이 책의 핵심 주제를 간과하는 것이다. 이 전쟁이 ‘헤렘’ 즉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사실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는 사실을 본문의 신학에서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호수아’를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의 전형으로 삼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일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행정가, 그리고 사심 없고, 불편부당한 지도자,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남아있다.
2. 정복시기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대두되는 질문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연대에 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설이 있다. 소위 “초기 정착설”(주전 15세기)과 “후기 정착설”(주전 13세기)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 학계의 경향은 “후기 정착설”을 받아들이는 쪽이지만, 일부 보수 신학 진영에서는 “초기 정착설”을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견해는 출애굽의 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서, <오경 개론>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바 있다.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쪽을 받아들이든, 이 책의 신학과 관련해서 특별하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3. 실제적인 승리
책의 곳곳에 산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일부 언급들이나 <사사기>의 기록을 참고하지 않고 이 책만을 있는 그대로 읽어 내려가면, ‘가나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복은 신속하고도 완벽한 것이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호수아가 온 땅을 다 정복하였더라”(10:40); “여호수아가 그 온 땅을 취하였으니”(11:16);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11:16);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한 바 되었으니”(11:19).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아직 얻을 땅이 많도다”하고 언급하고 있으며, 얻을 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는 ‘블레셋’인들의 지역과 ‘팔레스타’인 북부의 일부 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 정복하지 못한 지역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나안’의 집단 거주 지역들이 그러했는데, 이 지역들에 남아 있던 ‘가나안’ 제단(祭壇)들과 성소(聖所)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을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도 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4. 역사적 신빙성
<여호수아>에서 서술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과연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이 같은 질문을 하는 배경에는 책 안에서 발견하는 일견 모순되고 상충되는 진술들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광범위한 고고학적 연구를 수행한 바 있고, 나름대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진술과 고고학적 발견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 교재의 제 1권 서론 부분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5. 태양의 멈춤
‘여호수아’는 과연 태양을 멈추게 했을까? 이 질문은 <여호수아>의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이다:
12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13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수 10:12-13)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태양과 달이 거의 하루 동안 하늘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적을 지지해 주는 것으로 전 세계의 많은 민담 속에 태양이 지지 않았던 날에 대한 전설이 있다. 심지어 일부 근본주의적인 창조론 진영에서도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는 듯이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본문이 이런 기적을 지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기적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과 어떤 <성경> 구절이 정말 기적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지 아닌 지를 해석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제기할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서 의심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결국 <성경>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겠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구절은 시(詩)의 한 구절이다. 시에서 대개 문자적인 의미는 수사적(修辭的) 표현으로 대치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더 나아가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번역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문체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몇 개의 단어가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문자적으로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기브온 위의 태양아, 가만히 있으라,
아얄론 골짜기 달도 가만히 있으라?
그래서 태양이 가만히 있었으며, 달도 가만히 있었다...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가만히 있다”(!m"D, 다맘) 또는 “멈추다”(dm'[, 아마드) 등은 문자적으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조용히 있다”(be still) 또는 “침묵하다”(be quite) 등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이들 천체를 향해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또는 “잠잠하라”(즉 심한 열을 발하지 말고)고 했는지 분명치가 않다. 13절에 따르면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는 의미를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는 “야살의 책”에 관한 언급이다. 이 책이 어떤 책이며, 누가 썼으며,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 책에서 어느 정도의 분량을 인용했는지 알 길이 없다. 만일 이 책을 뒤 구절과 관련해서 인용하고 있다면, “야살의 책”은 “머무르다”라는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자가 이 시를 인용하면서 정확하게 의도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일 길은 없지만, 아마 중요한 사실은 기적과 그 기적의 목적 사이에는 반드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하나님은 그냥 재미로, 또는 아무 이유 없이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적의 규모와 목적 간에도 일말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기적은 적어도 우주적인 기적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지구의 회전이 24시간은 멈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그처럼 거대한 기적이 필요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학자들의 답변은 실로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 전체가 이교도적인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실제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를 다르게 이해하려 한다. 혹자는 ‘여호수아’가 태양의 열기를 다소 완화시켜 줄 것을 간구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대기의 반사력이 변함에 따라 태양과 달의 빛이 굴절되었으며, 그 결과 이들이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기적의 규모가 어떠했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이들의 신앙은 크게 강화되었을 것이다.
6. 자료와 편집
<여호수아>의 역사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제기할 수 있는 관심사는 이 책에 대한 소위 “역사비평적” 질문들이다. 즉 자료와 편집 등에 관한 질문들이다. <역사서> 전반에 관한 “역사비평적” 입장에 대해서는 서론(제 1장)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여호수아>에 국한해서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학자들 사이에서 <여호수아>를 “육경”(六經) 중의 마지막 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즉 <오경>에 이 책이 추가되었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더욱 최근에 와서는 <신명기>를 앞의 네 책과 분리시켜 <전기 예언서>와 연결시켜, <전기 예언서>에 속한 모든 책들을 “신명기적 역사”(the Deutronomic hostory)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여호수아>를 육경으로 부르는 이유도 “신명기적 사관”(史觀)이 책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문서설”에 따르면, 이 책의 제 1부(1-12장)는 대부분 <신명기 전승>과 <야훼/엘로힘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책의 나머지 부분(13-24장)은 거의 전부 <사제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결국 처음 열두 장은 일련의 원인론적 이야기(etiological tales), 즉 “이스라엘은 어디서 왔는가?”, “기브온 노예들을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 등에 관한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이전의 전승들을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명한 역사비평학자 ‘노트’(M. Noth)는 이러한 가설을 배격하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여호수아>를 위시해서 <전기 예언서>는 J, E. P 등의 전승보다는 오히려 “신명기 자료”(D 자료)와 더 공통점이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여호수아> 1-12장은 “신명기적 역사관”에 입각해서 수집 및 편집되었으며, 이들 자료에 후대의 자료들 즉 성읍들의 목록이나 경계에 관한 기록 등이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 후대 자료의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저명한 역사학자 ‘브라이트’(J. Bright)는 그 연대를 주전 10세기의 왕정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 직후에 나머지 “신명기적” 자료들이 첨가되었으며(13-21장), 다른 첨가 자료들은 그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본다.
<여호수아>의 일부 자료, 특히 5-7장은 목격담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머지 장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부 세부적인 기록들은 ‘여호수아’와 동시대이거나 또는 그렇게 많이 늦지 않은 시대의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1) ‘페니키아’의 중심 도시는 시돈(13:4 이하; 19:28)이었는데, 나중에는 ‘두로’가 중심 도시가 되었음; (2) ‘라합’이 그 당시 생존해 있었음; (3) 성소는 아직 고정된 자리가 없었음(9:23); (4) ‘기브온’ 주민들은 그 당시에도 여전히 성소에서 수종드는 노예였음(9:27; 삼하 21:1-6); (5) ‘여부스’ 족속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음(15:8; 참고 삼하 5:6 이하); (6) ‘가나안’인들은 여전히 ‘게셀’에서 살고 있었음(16:10; 참고, 왕상 9:16); (7) 옛 지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반드시 해설이 덧붙여져야 했음(15:9 이하).
그러나 본문 중에 “오늘날까지”라는 문구는 그 사건이 분명 사건의 기록 당시보다 이전에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구절들은 당연히 후대의 편집적인 삽입 내지는 수정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고 있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진 후대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신명기적” 자료의 연대를 상당히 이른 시기-왕정시대나 그 이전-로 잡지 않는 한, 본문이 전적으로 “신명기적 역사관”에 따라 편집되었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의 신학
1. 야훼 하나님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을 하나님의 개입이나 섭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분명 <성경>에만 있는 독특한 개념임에 분명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문헌들 중에는 어떤 사건들을 특정 신들의 활동과 연결시킨 경우들이 더러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경> 이외의 어디에도 이런 개념을 실제 역사 속에서 일관성 있게 전개시킨 경우는 없으며, 모든 사건들이 오직 한 신과만 연결시키고 있는 경우도 없습니다.
이처럼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보려는 시도가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거리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근 학계는 이러한 사상이 주전 7세기 경 “신명기적 역사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경우는 <사사기>입니다. 이 책에는 죄와 심판과 회개와 구원에 관한 신명기적 개념이 무려 열세 번에 걸쳐 나타남으로써 소위 신학적 윤회(輪回)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심판 즉 외국의 침입을 부르고, 회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사를 세워 구원을 가져오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여호수아>나 <열왕기> 등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 보는 바를 훨씬 능가하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과도 완전하게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이스라엘 특유의 것이라 아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탁월한 종교적 통찰력,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종교적 통찰력을 필요로 합니다. 핵심적인 질문은 간단합니다. 즉 “신명기적 역사관”이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왕국이 종말을 고하던 ‘요시야’ 시절 당시의 일단의 학자들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둘의 합작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간단치는 않습니다. 대개 역사철학을 전개시키기에 합당한 시기는 한 시대의 시작보다는 마지막 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하심을 목도한 이후라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의 시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지혜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요시야’ 의 시대야말로 역사철학을 발전시키기에 적합한 시기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위대한 천재 또는 선지자들의 이름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놀랍기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은 놀라운 경험을 했던 자입니다. <신명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역사철학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힐기야’가 ‘요시야’ 시대에 발견한 “율법책”(왕하 22:8-13)이 바로 <신명기>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해 보입니다. 그것은 이 책의 최종 단계에만 조명을 비춤으로써, 그 이전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적 뿌리들, 그리고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인과응보(因果應報)적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었는지 등에 관한 과정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주-본주 간의 조약 양식이 ‘시내’ 산에서 계시된 ‘모세’의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언약의 두 얼굴인 축복과 저주 즉 인과응보적 개념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사사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동일한 사상에 대한 배경 내지는 뿌리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열왕기>의 여러 대화나 화자의 진술 속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판과 은혜의 개념은 원래는 주로 개인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만, <아모스>에 이르는 동안 국가에 대해서도 적용되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후 “신명기 역사관”은 한동안 잊혀 있다가 ‘요시야’ 시대에 새롭게 조명 받게 된 것 같습니다. 국가의 종말과 더불어 이 역사관은 최종적인 형태로 신명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편집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결국 “신명기 역사관”은 ‘모세’ 시대에 배아의 상태로 출발하여, 왕국의 종말의 시대에 최고조로 발달된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2. 언약
역사서의 첫 번째 책 <여호수아>는 <오경>을 관통하는 언약의 주제를 이어받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신명기 역사관”를 담아내고 있다는 전제에 대한 당연할 결과입니다.
수 세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후손들에게 주겠다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은 이후 ‘이삭’과 ‘야곱’을 거쳐 ‘모세’에 이르러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전수되고 갱신되기에 이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 언약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 그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을 끝내고 그 땅을 나누며 각 지파의 경계를 정할 때, 하나님의 언약은 부분적이긴 하나 성취를 맞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의 땅이 미 정복의 상태로 남아있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서 그 땅의 주민들을 쫓아내겠다고 약속하십니다(13:2-6절상). 그리고 이미 취한 땅에 대해서는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약속과 성취의 개념은 <족장 이야기>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를 이루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해내셨으며, 어떻게 광야에서 그들을 보호하셨으며, 그리고 마침내 그 땅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언약 사상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는 점을 화자의 진술이나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바, 예컨대 다음 구절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21:4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5)
이처럼 <여호수아>에서 땅은 언약과 관련해서 불가분의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땅은 불가분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장수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사는 한에 있어서는 시대나 세대를 불문하고 지켜져야 했던 원칙이었으며, 선지자들의 미시지도 바로 이 언약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훗날 우상숭배나 배교가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때, 선지자들은 회개를 촉구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때문에 다시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으며, 그 땅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포로시대 중에 이러한 회복은 소망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3. 헤렘
‘헤렘’(!rej)은 “바쳐진 것”, “봉헌된 것”(devoted thing), “봉헌”, “헌신”(devotion), “금지”, “저주”(ban) 등을 의미하며, <구약> 전체적으로 19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주민과 그 성을 불태웠습니다(수 6:24-25). 그들은 ‘아이’ 성이나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8:24-29). 이처럼 완전한 파괴를 가리키는 말이 궁극적으로 ‘헤렘’(!rej)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헤렘’은 언약 사상과 함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자가 이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적어도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암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물론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것을 원하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만):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10:40)
여호수아가 그 왕들의 모든 성읍과 그 모든 왕을 붙잡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바쳤으니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것과 같이 하였으되(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시켜서 누구를 죽이라고 한다거나, 어떤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완전히 멸절하라고 명령했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구약>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신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만, 아무튼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헤렘’의 주제는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한 가지 대답은 ‘헤렘’을 당시의 역사∙문화적 상황 하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민족들에게 있어서는 사람이나 전리품 또는 포로들을 자신들의 신(들)에게 바치는 행위는 일종의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행위가 완전히 정당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는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당시의 이스라엘은 아직도 계시의 초보 수준으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같은 가르침을 받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그들에게 상응하는 수준의 계시를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해답은 아닙니다. <성경>은 ‘가나안’ 사람들을 단순히 “진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명령은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나안’ 사람들은 극히 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증스러운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유혹해서 그들의 부패한 종교적인 행위에 동참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를 묵인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는 마치 의시가 외과적인 수술을 통해서 환부를 드러냄으로써(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신체의 한 일부라 할지라도), 환자를 살려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요약하자면, ‘헤렘’은 의 입장은 ‘가나안’에 대한 징계와 이스라엘에 대한 보호라는 이중적인 조처로 보자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헤렘’을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명령으로 이해하자는 입장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든 이방인들을 다 멸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나안’ 족속들만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이 명령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때까지만 유효한 한시적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도 이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학살에 염증을 느꼈던지, 아니면 성적인 환락으로 가득 찬 종교 의식들에 유혹을 당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나안’ 종교는 점차 이스라엘 종교 속으로 퍼져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훗날 <선지서> 등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가나안’ 종교는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나중에 <아모스>, <미가>, <이사야> 등에서는 <신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수준의 윤리∙도덕적 가르침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헤렘’을 이런 맥락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헤렘’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그의 적들과 싸우십니다.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온 땅의 만민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언약의 축복을 공급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속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판단이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증오와 반목이 가득 찰 뿐 일 것입니다.
4. 안식
<여호수아>의 또 다른 주제는 “안식”으로서, 이는 본문에서보다는 오히려 찬송가에서 더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 땅에 도착함으로써 광야의 고생과 방랑, 그리고 정복 전쟁의 수고로부터 안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1:13)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
이스라엘은 그 땅에 정착한 뒤에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살아가며,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증인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점에 있어 실패를 해서 결국 다시 그 땅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이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안식은 노동 이후의 안식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미래적인 것이며, 기다림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당연히 미래의 소망과 축복이라는 교리로 발전되었으며(예. 삼하 7:1), 종국에는 지상의 순례를 마지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연결이 됩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안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광야의 경험과 그 땅으로부터 은유를 이끌어오고 있습니다(히 3:7-4:10).
그러나 안식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신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제한적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안식은 미래적이거나 순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된 과거적인 사건이며, 이를 바탕으로 매일 매일의 삶에서 누려야 하는 현재적이며 역동적인 그 무엇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의 안식은 “성령 충만”을 통해서 쟁취하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적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천국에서의 미래의 안식은 우리가 싸워 얻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사역으로 완성된 안식입니다.
5. 지도자
공동체와 지도자에 관한 주제는 <여호수아>의 핵심적인 주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화자는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해서 암시나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얻기 위해서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보이는 지도자의 역할모델과 그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체화 되고,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과 답변이 이점을 잘 드러내 줄 것입니다: “어떻게 그 땅을 정복할 것인가?”; “율법에 순종해라.” “그러면 어떻게 율법에 순종할 것인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순종하라.”
따라서 “땅”과 “율법”과 “지도자”는 <여호수아>를 구성하는 신학적 주제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오늘의 교회를 위해서도 심오한 교훈을 제공해 주는 지극히 현재적인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