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3과
어느 때까지?
김태정 목사약 12분 분량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2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함 같도다(6절)
시인은 이 시에서 두 종류의 말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첨과 칭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아름답고 순수한 것일수록 더 손상되거나 악용되기가 쉽습니다. 사랑도 그렇고 모든 인격적 관계 또한 그러합니다. 지금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내용과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이 시는 개인적인 애가입니다. 여기서 예배자는 “어느 때까지 니이까?”라는 절망적인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서는 희망과 확신의 말로 끝을 맺습니다. 구체적인 내적 증거는 없지만 이 시는 나중에 성전에서 거행된 어떤 의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4절과 5절 사이에서 억양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데, 이것을 예배에서 어떤 종류의 개입에 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입이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고무하는 제사장의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분명치는 않습니다. 이 시가 민족적인 시 또는 회중적인 시라는 견해는 이 시의 최초의 저작 및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약하지만, 나중에 이 시가 예배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는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장” 즉 “음악 지휘자”에 대한 언급은 이 시가 예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시인으로 하여금 탄식하게 만든 고통의 원인은 아마 중병과 그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절망적인 고통으로 시인은 처음에 일련의 탄식과 성가신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고요해지면서 구원과 기쁨의 때를 기대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처음에 파도가 높은 파고(波高)로 몰려오다가 점차 낮아지면서 마침내 거울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되는 바다와도 같습니다(Delitzsch).
배경과 역사. 이 시에는 저작 연대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어떠한 암시나 내용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의 언어와 일반적인 경향으로 볼 때, 적어도 본래의 형태에 있어서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벨론'의 애가 가운데서도 이 시와 유사한 점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형의 시는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가 히브리 왕정 초기에 저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는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탄식(1-2절); (2) 간구(3-4절); (3) 확신(5-6절).
신학과 신앙
1. 탄식(1-2절)
시인은 지금 양 극단 사이에서 찢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그의 탄식을 들어주시는 '야훼' 하나님이 계시고, 다른 한 쪽에는 시인의 고통을 즐기고 있는 그의 원수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고통 가운데서 네 번에 걸쳐, “어느 때까지니이까?”하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처럼 네 번에 걸친 절규는 그만큼 그의 갈등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고통으로부터 얼굴을 돌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원수가 그에 대해서 의기양양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묻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야만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가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이 혹시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것일까요? 그런 암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죄를 고백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절박한 간구는 참회가 아니라 극심한 불안감 가운데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고, 그분의 광채를 보여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민 6:25-26).
시인이 말하는 “원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아마도 죽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3절).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 올수록 하나님은 더욱 멀게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그럴수록 살고 싶다는 욕구는 더욱 강렬하게 솟아나게 마련입니다. 시인은 지금 의기양양한 원수에게 사로잡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원수는 그를 작아먹기 일보 직전에 있으며, 그의 희망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네 번에 걸친 그의 질문, “어느 때까지 니이까?”는 그의 이러한 절망을 반영한 질문인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하며, 자기의 고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게속될 것처럼 보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원히”라는 것은 무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탄식에서 벗어나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 간구(3-4절)
시인은 탄식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얼굴을 돌려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라는 말은 그가 앞에서 네 번이나 물었던 질문, “어느 때까지 니이까?”에 대해서 대답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이처럼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탄식의 주제를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탄식이 기도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어두워진 눈”은 질병에 대한 상징으로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참고. 욥 17:7). 따라서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건강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신 34:7). 그러나 시인의 단순히 신체적 건강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보다 깊은 수준에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의 회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셨을 때, 하나님의 광채는 시인을 비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에는 그는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며, 그의 눈도 밝아질 것입니다.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그의 눈이 밝아질 때, 임박한 죽음의 잠을 자지 않게 될 것입니다.
4절에는 “원수”와 “대적자들”이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원수”는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죽음”을 의인화(擬人化)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대적자들”은 시인의 일반적인 적들로서 시 6편에서 다룬 바 있는 시인의 고통을 고소해 하고 있을 적들이거나 또는 심지어 그의 친구나 친지들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시인이 “사망의 잠”에 떨어진다면, 인류의 최후의 원수인 “죽음”이 “내가 그를 이기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적들은 그의 죽음을 기뻐할 것입니다. 시인은 따라서 죽음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 악인들의 의기양양함으로부터도 구원받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3. 확신(5-6절)
탄식과 간구에 이어 갑자기 확신으로 기도는 끝나고 있습니다. 앞의 두 단락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5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이러한 확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항상 과거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소망 사이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과거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보여주신 '헤세드'를 체험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과거의 경험을 손상시키고도 남을 만큼 고통스럽고 강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경험은 현실의 무게를 변형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아직 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실제 찬양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구원이 오고 있음을 아는 것이 기대에 찬 고요함과 확신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질병과 죽음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고(故) 안 이숙 여사는 또 다른 그분의 저서인 <그럴 수도 있지>에서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나는 좋아요. 해가 지고 캄캄한 밤이 오는 세상에 더 살지 않으니 좋아요. 가을이 되고 겨울이 오는 세상을 떠나니 좋아요. 자동차 열쇠를 잃어버리고 찾아야 하는 세상을 떠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렇게도 사모하고 소망하며 줄달음쳐 온 영광의 나라에 입국하는 황홀한 감격 중에서도 이 세상을 떠나간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아요.
마치 어서 죽지 못해서 안달이라도 난 사람 같습니다. 하기야 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던 그분이고 보면, 죽음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범인(凡人)의 믿음의 경지는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 문인이자 작가인 강 유일 씨는 이런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아, 날이 새면 집지으리라>에서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리 서두를 것이 못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의지,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창조다
그녀의 충고인 즉은, 죽음은 인간이 취해야 할 가장 마지막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이숙 씨와 강 유일 씨, 이 두 사람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이렇게 대조적일 수가 있을까요! 당신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임박한 죽음의 위협 앞에 어떤 모습을 보이리라고 기대합니까? 신실한 '유대'인이라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 같습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유월절이면 꼭 부르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아니마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인데,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입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조금 늦게 오십니다
이 노래가 처음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되어 있던 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즈음 젊고 유능한 한 외과 의사가 같이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인체 실험실을 향해 끌려가는 동료 '유대'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머지않아 가스실에서 죽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강제 노역 시간에 그는 깨진 유리 병 조각 하나를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그 깨진 유리 파편으로 면도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오후에 나치 군인들이 감방으로 와서 가스실에서 처형할 사람들을 골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들 나치 군인들은 유리 조각으로 늘 피가 묻어날 정도로 면도를 하여 파랗게 된 턱을 가진 이 외과 의사를 데리고 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늘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아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보였고, 그를 죽이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가 지니고 있었던 소지품은 깨진 유리 조각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집착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린 덕분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이 외과 의사가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입장은 지금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히브리' 세계관의 전형이기도 합니다(우리는 이에 대해서 시 6편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죽음의 위협 앞에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흔히 고대 헬라 세계에서 믿고 있던 것처럼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의 삶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 활동이 있고, 정신과 마음의 작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각 부분은 각기 별개로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몸이 아픈데 마음이나 정신이 멀쩡하다든지, 정신이 병이 들었는데 육체가 멀쩡하게 따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부분이 아니라,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하나의 통합적인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에서 바라보는 인간관이기도 합니다. 즉 기독교 인간관은 이원론적 인간관이 아니라, 일원론 즉 통합적 인간관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점 시인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고통은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육체는 심하게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육체와 분리 된 생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인격과 내적 심리 상태 또한 극도로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쳐, 하나님과의 교제에 간극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반복해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1-2절). 그러나 그는 육체의 고통 때문에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 외과 의사처럼 말입니다. 만일 그가 체념하였다면, 이 시는 2절에서 끝이 나야 할 것입니다. 그는 위험을 인식하였고, 도움과 구원을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탄식을 그냥 탄식으로 끝내지 않고, 기도로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3-4절).
확신과 회복
기도의 응답이었을까요? 마침내 시인은 확신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5절). 과연 이런 확신이 어디서 온 것일까요? 기도의 응답을 받아 육체가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까? 그런 식의 응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육체가 회복되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변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그의 태도와 마음입니다. 인생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육체나 영혼 모두 바로 이러한 관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인생의 목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가 가장 바라는 바가 있었다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를 아는 것만큼 그도 주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에 대한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구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죽음의 위협에 대응하고 있습니다(5절). 이러한 대응 자체가 몸의 상태를 변화시켜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미래를 기쁨으로 예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야말로 부흥 즉 진정한 회복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이러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지막 확신은 진정으로 마지막이었을까요? 즉 이 깨달음 뒤로 그는 아무 흔들림 없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갔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욥>은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즉 우리의 인생은 매 순간 이런 고난들 때문에 하나님 곁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할 당위성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재창조의 작업 바로 그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시 13편의 장르와 형식적 특징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이 시에서 두드러진 이미지나 상징은 무엇입니까?
3. 이 시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고통의 내용이 무엇이며, 왜 그가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