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과
즉위식을 위한 시
김태정 목사시편 2약 21분 분량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6절)
시 2편은 그 장르에 있어 “궁중 시”임에 분명합니다만, <신약>에서 <시편>의 시들 중에서 가장 자주 인용하고 있는 이 시를 “메시아 시”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이 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런 해석은 온당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다윗’ 왕가의 이스라엘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유사성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이상과 현실은 무엇이었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과 현실은 또한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순종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험은 무엇입니까? 이 시에 등장하고 있는 주요 화자(話者)들은 누구입니까? 화자들의 대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입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시를 적용했을 때,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양식. 시 2편은 그 장르에 있어 “궁중 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히브리 왕의 “즉위 시”로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 시가 특별히 그 양식에 있어 특징적인 요소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내용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왕의 대관식에서 행하는 일련의 의식들을 몇 가지만 간추려 보자면,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는 의식, 새로운 왕에게 율법 책을 공식적으로 수여하는 일, 그 왕에게 기름을 붓고 그가 왕에 올랐음을 선포하는 의식 등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왕하 11:12).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예를 든다면,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해준 약속들(삼하 7:8-16)과 이 시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과 일련의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형식과 구조. 이 시는 그 형식에 있어 아주 극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민족들, 야훼 하나님,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고 시인 자인으로서, 이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번갈아 무대 위에 등장하여 대사를 외웁니다. 이들이 등장하는 네 개의 장면이 결국 이 시의 단락을 결정해 주고 있습니다. 즉 각 무대는 비슷한 분량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의 또 다른 형식적 특징으로 “동의평행법”과 “교차대구”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이 시의 문학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의 구조 역시 매우 탁월하며 생동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대 1> 장소: 세상; 등장인물(대화자): 세상의 군왕들; 화자: 시인.
시인은 첫 무대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이방 나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이어서 시인은 두 무대에서 하나님과 그가 택하신 왕에게로 차례로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무대 2> 장소: 하늘; 등장인물(대화자): 야훼; 화자: 시인.
4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도다
<무대 3> 장소: 하늘; 등장인물(대화자): 야훼; 화자: 기름부음 받은 왕.
7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게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무대 4> 장소: 땅; 등장인물(대화자): 시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교차대구법”으로 이방 나라들을 무대로 삼고 있는데, 이번에는 소란스럽게 떠들지 않고 오히려 진압된 상태에 있는 이방 나라들을 그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10그런즉 세상의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할지어다
12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러한 구조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시의 진행적 통일성입니다. 산문도 아닌 시가 흐름이나 진행의 구성을 갖는 것이 흔치는 않겠지만, 이 시에는 분명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1절과 2절은 두 종류 사람의 인격적 특징과 행위에 대해서 묘사하며, 3-4절에서는 직유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한 사람은 만족을 얻으나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함)를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가다가, 5-6절에서는 그 최종 운명이 어떻게 판결이 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서 문장의 동사는 현재형에서 미래형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배경. 이 시는 위의 구조에서 보듯이 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시의 각 부분들은 즉위식 때에 각기 다른 사람들이 교대로 낭독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예배를 상상하면서 그 역할을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서두(1-6절): 예배에서 예언적 지도자들
(2) 둘째 부분(7-9절): 왕의 답변
(3) 셋째 부분(10-12절): 회중들 또는 제사장의 맺음말.
신학과 신앙
1. 열방(1-3절)
왕의 즉위란 어떤 사람이 힘과 권위를 가진 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 왕가의 왕들에게 있어 그러한 힘과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지배 하에서 발휘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의 서두는 바로 이러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권위와 인정을 받은 왕권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위에 승복하지 않고 반기를 드는 나라와 민족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 힘을 결집하여 왕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일까요? 역사적으로 볼 때 이들은 ‘블레셋’ 족속일 수도 있고(삼하 5:17 이하), ‘암몬’ 족속이나 ‘아랍’ 족속들일 수도 있으며(삼하 10), 또는 그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방 족속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들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역사적 사건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인의 관심사는 오히려 이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에 있습니다. 즉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 왕의 우월함에 대해서 아무런 존경심도 복종심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보이고 있는 이러한 태도는 이스라엘이 바라는 바 신학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즉 신학적 이상이란 모든 나라와 그 왕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그가 세우신 왕을 인정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즉위할 때마다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 늘 반기를 들고, 공격해 왔으며, 이러한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들은 보좌에 오를 때마다 늘 이웃 나라들의 폭력과 위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 놓인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처음부터 제시함으로써, 이 시에 긴박하고도 극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칭호는 왕이 즉위할 때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왕이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구분됨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식이기도 합니다. ‘메시아’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원래부터 ‘메시아’ 시였을 것이라고 예단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2절)는 원래의 배경에서 볼 때, 왕으로 즉위한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입니다.
2. 하나님(4-6절)
무대는 이제 오만한 지상의 왕들의 소란한 대화로부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두 무대에서 두드러진 대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에 앉으셔서, 땅의 보좌에서 일어나 소란을 떠는 왕들에 대하여 조롱과 분노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시인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러한 기분을 잘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바벨탑 이야기>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웃음”이나 “경멸”이 상징하는 바는, 인간의 행위가 아무리 난폭하고 위협적이라 하드라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서 비웃음거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벼운 비웃음조차도 인간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며, 인간들을 기절초풍시키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인간의 계획을 좌절시켰지만, 이곳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시온’에 왕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지상의 왕들을 두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열방의 왕들이 군집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도날드 케이건’(D. Kagan)은 그의 책 <전쟁과 인간>의 서문에서 인간이 전쟁을 하는 세 가지 동기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이르는 탑을 쌓은 것도 서로 흩어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방의 왕들과 민족들도 이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이 무리들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상상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6절)는 선포는 이 시의 첫 번째 절정을 이루면서, 이 장면을 탈역사화, 탈개인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가 왕의 즉위식에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6절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첫 무대에서(2절) “기름부음”은 이미 이루어졌으며, 두 번째 무대에서(6절) 왕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온’에서 왕으로 세워졌는데, ‘다윗’ 시대에 ‘시온’은 이전에 ‘여부스’ 족속이 자리하고 있던 곳으로서, ‘예루살렘’ 도성의 남동부에 위치한 언덕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시온’은 ‘예루살렘’과 동의어로 취급해도 무방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이 즉위하는 의식이 궁전에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성전에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즉위식의 절차로 볼 때 두 곳에서 일부분씩 나누어서 거행한 것 같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3. 왕(7-9절)
세 번째 무대에서 왕의 말과 그가 인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 왕이 된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고 보좌에 오른 후에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왕이 선포하는 말 중에서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인용한 것이었습니다(7절). 이 계명은 즉위식 때에 왕에게 준 문서로서(참조, 왕하 11:12),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그의 개인적인 언약 문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서의 내용은 새로운 왕의 권위와 책임을 밝혀놓은 것이었습니다.
왕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 언약 안에서 “양자”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즉 그 언약의 대상인 인간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과 왕의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체결한 <시내 산 언약>의 한 부분입니다(신 1:31).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단련시키듯이 이스라엘을 단련시킵니다(신 8:5). <시내 산 언약>의 초점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라면, <다윗 언약>에서는 그 초점이 하나님과 ‘다윗’ 가문의 왕으로 좁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의 개념은 여전히 핵심적인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4)고 말씀하셨으며, ‘다윗’은 하나님에게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시 89:26).
<다윗 언약>의 또 다른 측면은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언약들은 시대에 따라 늘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갱신은 ‘다윗’의 새로운 후손이 왕위에 오를 때마다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너는 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 왕이 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윗 언약>이 갱신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은 그 말씀이 왕의 즉위 일을 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이 그 효력을 발생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낳았다”는 표현은 일종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법적인 양자 입양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의 즉위식 때에 거룩한 본성의 “새로운 출생”이 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가문의 왕들은 고대 근동의 다른 국가들의 왕들과는 달리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왕위에 오르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데에는 많은 특권이 따릅니다. 무엇입니까?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8절)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9절)
그 특권이란 “땅 끝까지 모든 나라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깨뜨리며 쳐부수는” 힘과 권세를 부여받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은 이곳에서 왕의 권세와 세상의 군왕들의 권세를 적절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쇠 지팡이 즉 “철장”이 왕의 권세라면, 세상의 군왕들의 권세는 기껏해야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연약할 뿐입니다. 그러나 왕의 권세와 관련해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긴 해도, 왕은 이를 위하여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4. 시인(10-12절)
무례하고 오만한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은(1-3절), 즉위식 때에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숙고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즉 세상의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할지어다(10-11절)
그들은 “주를 섬기라”는 권면을 받고 있는데, “섬기다”(דבע,아바드)는 정치적인 용어로서 약소국이나 속국의 왕이 강대국의 왕에게 복종하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즉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종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데, “입맞춤”은 경의와 복종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삼상 10:1; 왕상 19:18):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12절상).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재앙을 자초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급한 진노가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일은 오만한 자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들은 하나님께서 봉신으로 삼아줄 뿐만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2절)
교훈과 적용
대통령 취임식은 새로운 정권의 출발이자 때로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서, 국가적 경사이사 경축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국내∙외 귀빈들과 모든 국민들이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새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이러한 기대 덕분에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언론들도 일정 기간 동안 호의를 보이며 비판을 삼가 합니다. 이 기간을 흔히 “밀월기(蜜月期)” 또는 “grace period”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에 져서 야당이 된 정치인들이나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그가 조금이라도 잘못하기만 하면 때를 놓치지 않고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퍼붓습니다. 마치 죽은 짐승에게 몰려드는 ‘하이에나’와 같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이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한국경제신문의 정규재 주필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야당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들은 마치 대통령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봉건적인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가 참으로 걱정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축으로 돌아가는 서구 형 민주정치가 아니라 절대 권력을 놓고 패권을 다투는 동구 형의 투쟁, 전근대적인 정치투쟁의 유혹을 심하게 받고 있는 사실상의 디폴트 상황에 직면했다고 본다.” 정규재. <세상의 거짓말에 웃으면서 답하다>. 배가북스: 서울, 2015.
이점 이스라엘의 왕들도 마찬가지 운명이었습니다. 새롭게 왕위에 즉위하는 왕들은 늘 주변 국가 왕들이나 통치자들의 위협과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1-2절). 역사적으로 볼 때 이들 저항세력은 ‘블레셋’ 족속일 수도 있고(삼하 5:17 이하), ‘암몬’ 족속이나 ‘아랍’ 족속들일 수도 있으며(삼하 10), 또는 그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방 족속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들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역사적 사건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인의 관심사는 오히려 이들이 보이고 있는 태도에 있습니다. 즉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 왕의 우월함에 대해서 아무런 존경심도 복종심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 혈통을 이어받은 이스라엘의 왕들은 단순히 한 나라의 지배자나 통치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신정 국가 곧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합니다. 비록 인간인 왕이 통치하기는 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대리자였을 뿐, 궁극적인 통치자는 하나님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는(4절) 온 우주의 왕이시지만, 지상의 대리자는 그의 “아들” 즉 ‘다윗’ 혈통의 왕입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통치자이시므로, 그의 아들 또한 범세계적인 통치자라야만 합니다(8-9절).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상(理想)이지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즉 신학적 이상이란 모든 나라와 그 왕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그가 세우신 왕을 인정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즉위할 때마다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 늘 반기를 들고, 공격해 왔으며, 이러한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들은 보좌에 오를 때마다 늘 이웃 나라들의 폭력과 위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 놓인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처음부터 제시함으로써, 이 시에 긴박하고도 극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즉 하나님의 아들은 범세계적인 지배자가 되기는커녕 주전 586년에 오히려 그 대(代)가 끊기고 맙니다. 따라서 온 세상의 지배자로서 이스라엘의 왕권은 결국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다윗’ 왕가가 이처럼 그 맥이 끊어져 버리자 고대 ‘유대’교 내에서는 근본적인 사상의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포로기 이후 새로운 사상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새 언약”에 대한 사상이었습니다:
3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4)
“새 언약”에 대한 ‘예레미야’의 이 유명한 노래의 핵심은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 가문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계약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미래에 ‘다윗’ 혈통의 왕들이 다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원래 지상의 왕에게만 적용하였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는(2:2) 이제 종말론적 의미를 더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메시아’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는 구절들은 미래의 사역과 관련된 왕의 직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단 9:25).
<신약>의 화자들은 이 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그분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사실에 유념한 듯합니다: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15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복음서> 기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 선포된 나라의 왕이 분명했습니다. 그분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곧 이스라엘이었고, 그분은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즉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했습니다. <신약>도 여러 곳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7절)는 시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침례에 관한 기사에서(마 3:17), 변화 산 사건에서(마 17:5), 그리고 그분의 부활에 관한 기사에서(행 13:33)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분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입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 1:4).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 역시 호의적인 분위기 가운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화평을 주기위해서가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즉 전쟁과 분열과 갈등과 폭력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즉위를 반대하고 위협하는 무리는 누구이겠습니까? ‘헤롯’ 왕이나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이방인들이 이 무리 속에 포함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도 이 무리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참고. 행 4:24-28).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다윗의 나라” 즉 이스라엘 사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에 가해지는 위협과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입니다. “다윗의 나라”가 취하는 방식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즉 힘과 무력으로 폭도들을 진압하고 제거하는 것입니다(참고. 9절). 그러나 그리스도가 시작하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는 왕의 죽음으로써 힘과 무력을 제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진정한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의 왕들과 구분하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고,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들어 준 것이 다름 아닌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즉위식이었습니다(참고. 히 1:5; 5:5).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 혈통의 왕들이 세운 이스라엘이 한 번도 범세계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듯이, 예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 역시 그렇습니다. 신학적으로나 이상적으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계신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여전히 이 세상은 오만하고도 혼란한 나라들과 반역의 무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왕이 즉위는 했지만 완전한 통치는 아직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시 2편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도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계시록>은 여러 상징과 신비적인 용어들을 동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현실, 그리고 궁극적인 성취에 대해서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7)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계 4:2)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7)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 12: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계 19:5)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현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새 피조물인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유혹과 위협과 폭력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점을 미리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핍박한 것처럼 우리도 역시 핍박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계시록>은 이들의 존재를 “해산하는 여인”을 쫓는 “용”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계 12), <베드로전서>는 “우는 사자”로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벧전 4:8).
이 사자는 다윗 왕가에 대항하여 싸우고 대항했던 열방의 왕이나 통치자들처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장의 권세”로 그의 아들을 보호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冑)를 입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엡 6:13-17).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방어용 무기도 필요하지만, 공격용 무기 또한 필수적입니다. 로마 시대 당시 가장 강력한 공격 무기는 다름 아닌 칼입니다. 그러므로 전장에 나가는 군인은 칼을 들고 적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전쟁이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즉 우리의 싸움이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싸움에 가장 효과적인 공격용 무기, 즉 하나님의 “철장 권세” 또는 “성령의 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엡 6:17).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와 싸울 때에 사용한 무기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다른 무기를 찾기보다는 우리 주님이 사용하셨던 그 동일한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받고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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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장르는 “궁중 시”에 해당합니다. 그렇게 불릴 만 한 요소들이 있는지 시를 통해서 찾아봅시다.
2. ‘이스라엘’ 왕의 즉위와 관련해서 이 시는 첫 행부터 위협과 공포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조되는 두 장면은 이스라엘의 이상과 현실에 대해서 상징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3. 이 시는 역사적으로나 일차적인 의미에 있어 “궁중 시”로 보아야 하나, <신약>의 기자들은 “메시아 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지 설명해 봅시다.
4. 이 시를 나에게 적용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