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과
제 1부 서론: 역사와 문학과 신학
김태정 목사약 88분 분량

<계시록>은 무엇인가?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로 저자가 살던 당시에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는 책인가? 아니면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예언(豫言)인가? 또는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으로부터 재림(再臨)에 이르기까지 전체 역사를 나타내는 징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언제나 타당한 원리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가? 현대 독자들은 수없이 많은 상징들과 이미지들, 예컨대, 네 생물들, 말과 같은 황충(蝗蟲), 진노의 일곱 대접, 하늘에서의 전쟁, 여러 짐승들 및 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Michael Wilcock
이야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다시 한 번 회고해 보자면, 이야기는 시작과 중간과 결말이 있는 사건의 연속입니다. <성경>을 기승전결(起承轉結)을 갖춘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본다면, 문학적인 관점에서 <창세기>를 시작의 책으로, <계시록>을 그 결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건들은 중간임이 분명합니다. 두 책의 대비(對比)는 아주 극적이고, 심미적이며, <성경>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시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계시록>은 그 시간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두 책은 시간과 영원의 전환점에 서 있다 하겠습니다. 시간과 영원이 접하는 곳에는 우리의 경험이 미치지 못하며 따라서 늘 신비적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계시록>만을 놓고 볼 때, 비록 이 책이 <성경>의 다른 책들에 비해 가장 세심한 구조로 짜여 있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가진 설화적(說話的) 구조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 책은 <성경>에서 가장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L. Ryken).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계시록>에 대한 문학적 연구를 어렵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로서, 학자들 사이에 일치된 견해를 찾기 어려운 악명(惡名) 높은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의 책들 중에 <계시록>만큼 많은 주석이 쓰인 책도 없을 것입니다만, 역설적으로 실제 오늘날 교회의 예배에서 이 책만큼 설교의 본문으로 덜 인용되는 책도 없을 것입니다(당신은 지난 일 년 동안 교회에서 <계시록>으로부터 설교나 강해를 들은 적이 과연 몇 번이나 됩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없는 책으로 인식하고 있든지, 아니면 어떤 특정 해석만을 받아들여 열린 마음으로 이 책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평균적인 지성을 지닌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읽어보고, 그 내용을 파악하고, 적용할 수 있는 책으로 <계시록>만큼 그 사용 빈도가 낮은 책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근접하기 어려운 책을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교회들이 반드시 배우고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을 제외한 나머지 65권의 책으로는 복음이 불완전한 것인가? ‘윌코크’(M. Wilcock)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창세기>에서 <유다서>에 이르는 65권의 책은 세상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복음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계시록>은 상당히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이 없어도 된다. 그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M. Wilcock, 269 쪽 (참고도서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책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윌코크’는 다시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부터 씻음 받았다는 것을 알며, 십자가가 매일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는 데 효력이 있음을 안다. 영생을 가지려면 반드시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성례(成禮)에는 이와 비슷하게 “해야 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런 것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사랑의 보증”, 곧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극적 형태로 실현함으로써 그분이 우리에게 생생한 존재로 다가오게 해주는 이것을 그 누가 무시하려 하겠는가? <계시록>은 그의 사랑의 보증이다. 우리는 그것이 없어도 된다. 그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는 상상의 성례로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너무나 자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복음에 대해 심장이 뛰고 영혼이 불타오르도록 하기 위해서다. M. Wilcock, 269-270 쪽 (참고도서 7).
이 답변이야말로 우리가 <계시록>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배우는 일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는 차가운 머리뿐만 아니라, 뜨거운 가슴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라오디게아’교회는 이 둘 모두 결핍되어있다고 주님의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성례전이 일련의 이미지들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이라면, <계시록> 또한 온갖 상상과 이미지들을 동원해서 자칫 식어지기 쉬운 교회의 신앙을 늘 뜨겁게 불타오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메시지를 초대교회가 읽고, 듣고, 순종으로 반응했다면, 이천년이 지난 지금 현대 교회에서도 그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교재의 목적도 서론에서 밝힌 바처럼, <계시록>을 통하여 본인과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에 담긴 메시지를 파악하고, 오늘날 나의 필요에 그 메시지를 적용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현재 모습이 차지도 덥지도 않다면 그 당위성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계시록>의 역사
1. 저자
<계시록>의 역사와 관련된 첫 번째 질문은 원(原) 저자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각 책의 원 저자를 밝히는 문제는 오늘날 더 이상 성경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아닐 것입니다. 원 저자는 이제 저자/편집자 또는 “내포저자”(implied author)로 대체되었습니다. 내포저자란 원 저자(만약 있기라도 하다면)가 본문 속에 의식적으로나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는 의도된 저자를 말합니다. 다행스럽게 <성경>의 내포저자는 ‘나레이터’(narrator) 즉 화자(話者)와 동일합니다. “내포저자”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내포독자”(implied audience)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본문의 실제 독자가 아니라 저자가 문학적 용어들로 개념화 한 청중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특정 책의 저자를 논할 때, 그는 사실상 익명(匿名)의 저자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내적 증거. <계시록>의 저자는 본문 속에 자신의 이름이 ‘요한’이라고 네 번에 걸쳐 밝히고 있습니다(1:1, 4, 9; 22:8). 이곳 책 속에서 그의 역할은 수시로 일인칭으로 등장하여 계시의 증거자 노릇을 하는 일입니다. 이는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유래를 가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단 7:2, 15; 8:1; 9:2; 10:2). 저자의 이름이 책의 서언 부분에만 등장하고 있고, 나머지 주요 부분에서는 거의 등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이 책의 초판이 무명이었거나 또는 익명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요한’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사실상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유대인들에게는 명예로운 타이틀인 “하나님의 종”(1:1)을 사용하고 있고, 서신의 수신자들을 “형제”로 칭하고 있습니다(1:9).
‘아우네’(D. Aune)는 저자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임을 시사하는 증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그는 <구약>에 매우 정통하고 있어 적어도 100여 차례나 인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헬라어 <구약 역본>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2) 저자는 초기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발생한 묵시문학의 양식 유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학 유형은 팔레스타인 영역 밖으로 이동한 후 초대 기독교에 잔존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 저자는 유대인의 성전과 예루살렘의 제사제도를 익히 알고 있으며(8:3-4; 11:1-2, 9), 아마도 주후 70년 이전의 예루살렘의 지형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4) 이 책의 몇몇 단락들은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이나 성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예. 11:2, 8; 20:9; 3:12; 21:2, 10; 11:5); (5) 저자는 독특한 ‘셈’어식 헬라어 형태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점은 그가 헬라어를 모국어로 하여 자라난 사람이기보다는 아마도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선천적으로 사용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6) 이 사실은 역으로 그가 팔레스타인 유대인으로 아마 주전 66-73년의 제 1차 유대인 반란 직후 팔레스타인을 떠난 피난자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 반란 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났는데, 그들 중 일부는 디아스포라에서 혁명을 퍼뜨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서부 디아스포라 여러 지역에서 노예로 팔렸습니다. 전에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은 강제로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로 떠나야 했고(행 8:1), 후에는 강제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했습니다(행 11:29).
외적 증거. 많은 학자들은 ‘요한’으로 알려진 초대교회 인물들을 이 책의 저자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들 중 몇몇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인 예수님의 제자 ‘요한’; (2) 장로 ‘요한’; (3) ‘세린두스’(Cerinthus); (4) ‘마가 요한’; (5) 침례 ‘요한’. 이들 중 마지막 두 제안은 크게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나머지 제안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아우네’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요한자료>와의 관련성. <요한자료>라 함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알려진 다섯 편의 <신약> 저술을 일컫습니다: <요한복음>; <요한 일서>; <요한 이서>; <요한 삼서>; <요한 계시록>. 많은 비평학자들은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이 언어나 신학적 입장에 있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두 책이 동일 저자의 작품일 수 없다는 데 견해를 같이 해왔습니다.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계시록>을 제외한 나머지 책의 일부도 사도 ‘요한’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자료>의 저자 문제와 관련해서 네 가지 정도의 입장이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저자이기는 하나 <계시록>의 저자는 아니다. 둘째, 사도 ‘요한’은 <계시록>의 저자이기는 하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아니다. 셋째, 두 작품 모두 사도 ‘요한’의 작품은 맞으나, <요한복음>은 <계시록>보다 거의 한 세기 전에 기록되었다. 넷째, 사도 ‘요한’은 팔레스타인에서 ‘에베소’로 이주했는데, ‘에베소’에서 그의 제자들이 두 책을 기록했다. 따라서 <계시록>은 “요한 학파” 내지는 “요한 집단”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들 네 가지 가설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그런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내적 증거는 없는 실정입니다. 저자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오네’(D. Aune)의 저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D. A. Aune (참고도서 1). p. xlvii-lvi
결론. <계시록>의 저자(또는 편집자)는 책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바처럼 ‘요한’이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을 ‘세베대’의 아들이나 장로 ‘요한’과 연결시키는 것은 현재 비평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그럴듯한 추측으로는 주후 66-70년의 첫 번째 유대인 반란과 관련하여 아시아의 로마 속령으로 이루해 간 한 익명의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D. Aune). 그는 자신을 기독교 예언자로, 자신의 작품을 예언서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저서 최종 본을 보내는 아시아의 기독교회 회중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계시록>을 <신약>의 어느 다른 저자와 동일시할 만한 어떤 증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2. 배경과 연대
<계시록>의 배경이나 기록 연대에 관한 질문은 이 책의 저자와 관련된 질문과 함께 이 책의 연구에 있어 치명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이곳에서는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기록연대에 관한 상세한 연구 역시 Aune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도서 1, lvi-lxx.
배경. 본문에 따르면 이 책은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에 있는 교회에 회람용 편지로 보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1세기에 실제로 살고 있던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위한 것이며, 공동체 안에서 큰 소리로 읽었던 것입니다. 교회들이 세워지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으며, 교회들의 영적인 상태는 인내하고 헌신하는 교회에서부터 퇴폐적이고 방종한 교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당연히 메시지는 이중적인 어조(語調)를 띌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묵시적(黙示的) 어조와 예언적(預言的) 어조가 그것입니다. 묵시적 어조는 환란과 핍박을 겪고 있는 교회에 대하여 원수가 결국에는 멸망하고 하나님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과 격려를 주기 위하여 필요했을 것이며, 예언적 어조는 교회로 하여금 교묘한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라고 도전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입니다.
“황제숭배”가 점차 노골화 되던 당시 로마 제국은 교회가 당면한 현실이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와 황제 사이에 운명적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각 시대마다 황제숭배처럼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충성을 시험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그런 시험으로 인해 실제 박해를 당하고 순교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점에서 <계시록>에 등장하는 교회들이 처함 상황을 보면 이 책이 기록된 연대를 가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충분히 자리를 잡을 만큼 시간이 흘렀던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또 그 교회들이 바야흐로 엄습할 박해의 폭풍우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배경과 관련한 설명은 M. Wilcock을 참고하였습니다(참고도서 7, 22-24쪽).
연대. 이와 같은 배경 설명과, <계시록> 13:18이나 17:10의 말씀을 근거로 한 계산을 합해서, 이 책이 기록된 연대를 추론해 보면 대략 두 가지의 다른 견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1) 주후 95년 경(Domitian 통치 시대, 주후 81-96년)
(2) 주전 64년(Nero 통치 시대)-주후 70년 사이
이중 첫 번째 견해는 주후 2세기말부터 현재까지 대다수의 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두 번째 견해는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제시된 바 있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이 두 견해에 대한 절충적인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계시록>의 초판(初版)이 ‘도미티안’ 시대 말경(또는 더 가능한 시기로 Ttajan의 통치 시대인 98-117년)에 완결되었던 반면에, 이 저술의 초기 자료들은 한 세대 정도 이전이 주후 64년대에 문자나 구두 전승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자는 견해를 말합니다. 이어지는 <계시록>에 대한 자료비평 연구는 이 책의 연대와 관련하여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3. <성경> 해석의 역사
서론. <계시록>의 최종 본문이 형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에 대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개괄적으로나마 “성경 해석”(또는 “성경비평”)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관한 연구를 “통시비평”(痛視批評) 또는 “역사비평”(歷史批評)이라 부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인의 <창세기> 교재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바 있습니다만, 여기서 다시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여 아래에 요약해놓았습니다. “성경해석사”에 관한 교재는 다수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이형원의 <구약해석사>는 본인의 여러 교재에서 주요 참고도서로 인용하고 발췌한 저서로서 일독을 권합니다: 참고도서 11.
통시 비평. “역사비평”은 18세기 이후 <성경> 연구에 도입된 새로운 일련의 해석적 방법론들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이들 방법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교회가 기존 사실로 받아들이던 것들-<성경>의 저자나 그 내용 등-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실제 출처를 확인하고, 본문이 말하려는 사건들이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 발생했을 개연성을 평가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구의 일환으로 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 본문 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 동시대 또는 동일한 유형의 다른 문서들과의 비교 연구도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역사비평적 방법이 교회의 문서들을 포함해서 그리스와 로마 문서들, 그리고 고대 문서로 추측되는 모든 자료들에 대해서 적용한 바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던바, 신성한 책 <성경>에 대해서는 감히 적용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경>이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세속적 역사비평의 방법을 <성경> 본문에도 적용하도록 자극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계몽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만개(滿開)하게 되었고,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성경> 연구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역사비평의 대 전제(前提)는 <성경>의 많은 책들이 단일 저자의 창조적인 활동의 결과로 완성되었다기보다는,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자료들을 후대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수집하고, 편집 및 배열한 채로 자신들의 독창적인 작품 속에 함께 삽입한 결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경>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 <창세기>교재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역사비평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성경> 본문이 현재의 본문으로 완성되기까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제반 역사적, 자료적, 구전적(口傳的), 사회적, 편집적인 의문을 해결하여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교훈을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사는 원저자나 편집자의 의도와 사상 및 상황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데 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기록했을까?’
이와 같은 역사비평은 그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1) 양식비평(樣式批評), (2) 자료비평(資料批評), (3) 편집비평(編輯批評)의 세 가지 방법론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그림 참고). 이형원, 제 3-5장(참고 도서 11).
위 그림에서 보듯이 우선 양식비평의 주된 관심 분야를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경> 본문에서 나타나는 문학 양식을 결정하는 일; (2) 각 양식이 거치고 지나간 역사를 이해하는 일. 이러한 작업을 연구의 주된 목표로 삼게 된 데에는 이 방법에서 도입하고 있는 일련의 대 전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 구두(口頭)로 된 전 역사(前歷史)의 존재; (2) 양식(genre)의 형성과 발전; (3) 각 양식의 독특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
이들 전제들을 보충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구약> 저자들은 본문을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 기록하면서 오래된 구두로 된 전 역사를 가진 자료들을 모아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표-오경형성과정 참고). 두 번째로, 이렇게 <성경>의 본문으로 채택된 하나의 본문 양식은 문자화(文字化) 된 이후에도 계속 남아 그 전통을 계승해가면서, 동시에 시대․사회적 상황에 따라 일련의 양식상의 변천을 거쳐 갔을 것이라는 점을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식은 두 가지 상반되는 특성-불변과 변화-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양식은 독특한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 경우 삶의 자리에 대한 범위를 놓고 학자들마다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넓게는 사회 및 시대적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좁게는 독특한 제도적 위치(예: 제사)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양식비평이란 <성경> 본문에서 도입하고 있는 문학 장르를 규명하고, 각 장르의 역사나 발전 과정 등을 추정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동시에 각 문헌의 독특한 장르와 관계되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사회적인 상황이나, 또는 삶의 자리를 유추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나 목적, 기능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업을 포함하게 됩니다.
양식비평 학자들의 관심사가 주로 본문의 전 역사 즉 구두 전승사에 관한 것이라면, 자료비평의 관심사는 기록된 자료들의 기록 연대, 기록자, 기록 당시의 상황, 기록 목적, 각 자료의 문학 및 신학적인 특징 등을 추정하는 데 있습니다. 자료들의 형성 시기나, 각 자료가 <오경>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범위나, 기타 이들 자료들을 구분하여 찾아내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오경> 전체적으로 크게 네 개의 자료가 산재해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없는 듯합니다: (1) 야훼 자료(Y 또는 J); (2) 엘로힘 자료(E); (3) 사제 자료(P); (4) 신명기 자료(D). 각 자료의 형성 시기와 특징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Hamilton이나 Wenhem의 저서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12 & 13). 더 나아가 Wenhem은 자료비평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결과들을 소상하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Wenhem, xxv-xlii.
이처럼 한 책에서 상이하다고 판단되는 자료들을 발견하고 구분해 낼 수 있게 된 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당대의 지적․사상적 영향력도 있었지만, <성경> 자체의 증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오경>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했을 때, 이 책이 동일인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논리적인 의문점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료비평의 목적은 이들 자료들에 대한 연구 결과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의 본문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데 있습니다.
자료비평과 양식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구약>의 완성 단계 이전에 국한한 것이어서 해석학적인 한계가 노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성경> 본문이 형성되는 모든 단계가 최종 단계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방법론적인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는 주장이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제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이루게 한 구두적인 형태나 기록된 원 자료가 중요한 것만큼, 그러한 자료들을 취사선택하고 편집하여 <성경>의 최종 본문으로 정경화 하는 과정과 편집의 과정에 참여했던 자들의 신학적 의도 역시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이 새로운 방법론을 편집비평이라 부릅니다. 편집비평의 기본 전제를 다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일련의 편집 과정; (2) 창조적 저자; (3) 특정 전통(또는 학파)의 신학의 반영. 이들 전제들을 보충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구약> 본문이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기까지 여러 편집 단계를 거쳤을 것이라는 전제는, 양식비평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전제이기도 합니다. 단지 편집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원 자료나 구전 자체라기보다는 각 편집 단계와 본문의 최종적인 편집 형태를 연구하는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두 번째로 편집자들은 단순히 과거의 전통들을 기록하거나 보존한 필경사들이 아니라, 이들 역사나 전통들에 대한 수정 및 보충, 더 나아가서 재해석까지 시도했던 창조적 저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당대의 신앙 공동체가 당면한 제반 신학적이고도 신앙적인 대안이나 교훈을 주고자 했던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 편집자들은 대개 특정 전통이나 학파의 구성원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본문들은 이들이 속해있던 공동체나 학파의 사상과 신학, 언어나 문체 등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전승이나 학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야훼 전통; (2) 엘로힘 전통; (3) 신명기적 전통; (4) 예언자적 전통; (5) 현인적 전통; (6) 사제적 전통; (7) 역대기적 전통.
결국 대부분의 <구약> 본문은 이상의 전통 가운데 하나에 속한 저자나 편집자가 완성한 것이며, 이들이 속한 전통이나 학파가 무엇인지 알아내면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의 주제는 신명기적 역사관을 따른다고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시 비평(共視 批評)-완성된 책. 17세기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성경 해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통시적 비평의 제 방법들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찾으려는 학문적인 관심사 때문에 <성경>의 대부분을 파편화(破片化), 비정경화(非正經化)시키는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신앙 공동체(교회)의 삶과 신앙의 표준이 되어 온 성경의 권위가 학문적 비판과 해부의 대상이 되어 그 고유한 권위를 상실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공시비평은 이에 대한 반동과 반성으로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게 된 비평의 제방법론들을 통칭하는 용어로서, 기본적인 인식은 성경을 하나의 완전한 문학작품으로 간주한 채, 성경 본문 자체 또는 독자 즉 해석 공동체에 대한 연구로 국한하자는 것입니다. 공시 비평의 제 방법에는 정경비평(正經批評), 사회학적 비평(社會學的 批評), 구조주의적 비평(構造主義的’ 批評), 서사비평(徐事批評), 신문학 비평(新文學 批評)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도표). 각 방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참고 도서와(20) 다음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이형원, 6-8장; (2) “서사비평과 신약성서 해석”, 『복음과 실천』18(1995), pp.11-30.
그러나 공시비평의 제 방법들 역시 주된 관심의 대상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었기에, 전인적(全人的)인 의미나 교훈을 이끌어내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종합 비평- 대통합. 여기서 “종합 비평”이란 새로운 하나의 비평 방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올바른 자세나 태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성경> 고등비평의 두 방향-통시적 비평과 공시적 비평-에 대해서 개괄해 보았고, 이들 각 방법들의 주요 관심 분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각 방법은 나름대로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올바른 <성경> 해석이란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비평의 제 방법들을 총괄하면서 동시에 이들 방법들이 소홀히 했던 영역들을 새롭게 포함시키는 접근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도표 참조).
따라서 종합비평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대 전제로서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완성된 문학작품: 그 첫 번째 전제는 다른 공시비평 방법에서처럼 <성경>은 하나의 완성된 문학작품으로서 독자들에게 의미나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형성 과정과 관련된 제반 역사적 질문들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독자가 현재 접하고 있는 <성경> 본문이 전해주는 신학적 주제와 신앙적 교훈, 그리고 정서적 감동은 본문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하나의 완전한 문학작품으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흔히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서 무오설”이나 “영감설”에 입각하여 <성경>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호소력이 있으며, 현재의 본문들(예: 다양한 번역본들)보다 원 자료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자료비평의 입장보다 더욱 포괄적이며 융통성을 지니게 됩니다.
(2) 문학화 된 역사: <성경>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해 주는 역사 서적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교훈을 전해주기 위한 아름다운 문학작품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창문이나 비디오 테이프가 아니라, 스테인 글래스나 거울처럼 과거의 역사를 희미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것입니다.
(3) 정서적 감동도 함께: 종합비평은 <성경>을 단순히 신학과 신앙을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해 놓은 구약신학 내지는 조직신학 교과서로 바라보는 것을 지양합니다. 신학적 교훈을 찾아냄과 동시에 본문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서 정서적인 감동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훌륭한 고전은 독자들에게 정서적 즐거움과 지적 교훈을 둘 다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영화의 주제나 내용만을 알기 위해서 극장을 찾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4) 독자 중심 비평: 본문 자체의 연구와 함께 독자에 대한 연구도 본문의 의미를 산출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어떤 문학 작품이든지 그것이 한 번 저자의 손에서 벗어나면 그 작품의 최종적이고 현재적인 의미는 독자들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자가 본문을 통해서 의도했던 의미는 그 많은 의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특히 <구약>의 경우 대부분 원래의 저자나 저술 목적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에 의지해서 최종적인 의미를 산출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사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은 언어 철학자에서부터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정경화 과정을 회고해 볼 때 충분히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경화의 주체는 당대의 신앙 공동체 또는 해석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성경>의 각 책은 신앙 공동체라는 독자들이 신앙적인 판단과 필요에 따라 기록했고, 그 책의 가치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공동체에서도 그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에 <정경> 속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경> 해석에서 독자의 상황 이해가 중요함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 결과 각 책의 “처음 독자”(original reader)나 “의도 된 독자”(implied reader)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장려하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비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맞게 되는 한 가지 긴장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 독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부여한 의미가 본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성경>의 세계관이나 가치관과 충돌될 때입니다. 이 긴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을 <성경>의 의미에 굴복시킬 것인가 아니면 본문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서 현실화 시킬 것인가? 이러한 긴장은 독자비평을 시도하게 될 때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 긴장이자 갈등이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5) 문학 양식과 의미 전달: 본문의 특정한 문학 양식은 그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의미를 드러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장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듀브로우’(Heather Dubrow)는 「장르」라는 책에서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아래 인용문을 <마플토프의 살인>(Murder at Marplethorpe)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읽어봅시다.
벽로 선반의 시계는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최근에 그 시계가 고장 났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죽은 듯한 여자의 형체가 거실의 침대 위에 드리우자, 그녀만큼 음산한 모습을 지닌 어떤 사람이 재빨리 그 집을 빠져 나갔다. 그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와 어린 아기가 크게 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죽은 여자는 누구이며, 또 어떻게 해서 죽었는가? 그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은 누구인가? 그 어린 아기는 왜 울고 있는가? 그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글의 제목은 이 인용문이 살인 추리 소설에서 발췌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죽은 여인이 살인 피해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또 그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이 살인자일 것이라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아이는 갑자기 침입한 살인자 때문에 놀라서 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살인이 일어난 시간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계의 정확도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플토프의 이력서>(the personal history of Marplethorpe)라는 제목으로 읽어 봅시다. 그리고 위에서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들을 해봅시다. 전혀 다른 대답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전기(傳記)들이 흔히 그 영웅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아이는 바로 ‘마플토프’일 것입니다. 죽은 여인은 애석하게도 아기를 낳다가 죽은 그의 어머니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집을 빠져 나간 사람은 아마 산파였을 것이며, 그 시간은 이 아이가 출생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작업이 끝나고 나면 본문에 대한 신학적 주제가 마치 결론처럼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문학작품의 결론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사건, 문체, 그리고 구조와 배경 등이 함께 어우러져 총체적인 조화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신학적 주제 도출과 관련해서 대상이 되는 본문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는지 여부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종합 비평”을 요약적으로 이해하자면, 이는 <성경> 해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성경 해석자의 태도 등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진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방법론도 이에 걸맞게 본문의 역사와 문학과 신학에 대한 단계적이면서도 통합적인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하지만 이것으로 <성경>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강조하였듯이, <성경>은 “정보”(information)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를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책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성경> 해석의 절정이자 궁극적 목표는 교훈과 적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첫 단계로서, 본문의 첫 독자 내지는 의도된 독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들 독자들이 처해있던 “삶의 자리” 또는 실존적 상황에서 주어졌을 지적 교훈, 정서적 감동, 그리고 의지적 결단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을 위한 적용과 구체적인 행동 지침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질문해 보는 것이 교훈과 적용의 두 번째 단계이자 궁극적 목표가 될 것입니다.
4. <계시록>의 역사
서론. <계시록>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는 <신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당연히 이 책의 역사, 즉 자료나 편집과 관련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견해가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Aune의 “통합적 연구”를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Aune는 그의 저서에서 <계시록>에 대한 비평적 연구의 역사를 광범위하고도 체계적인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통합적 연구 결과도 함께 제시하고 있어(참고도서 1),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계시록>이 크게 아래 세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1) 독립적인 자료(들)의 작성 ⇒ (2) <계시록> 초판(제 1판)의 구성 ⇒ (3) <계시록> 최종본(제 2판) 완성. 그러니까 <계시록>은 두 개의 주요 단계를 거쳐 현재의 문학 형태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세 단계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립적인 자료들. <계시록>의 가장 두드러진 문학적 특징은 이 책의 거시적인 설화와는 거의 무관한 비교적 독립적인 12개의 단락입니다:
(1) 십사만 사천 명을 인침(7:1-17)
(2) 작은 책을 든 천사(10:1-11)
(3) 두 증인(11:1-13)
(4) 여자/아이/용(12:1-18)
(5) 바다와 땅에서 나온 짐승들(13:1-18)
(6) 환상/소리/어린 양과 심사만 사천/세 천사의 계시/음성(14:1-20)
(7) 바벨론의 음녀(17:1-18)
(8) 바벨론의 멸망(18:1-24)
(9) 백마를 탄 자(19:11-16)
(10) 사단의 마지막 패배(20:1-10)
(11) 죽은 자들의 심판(20:11-15)
(12) 새 예루살렘의 환상(21:9-22:5)
이들 열두 개의 단위들이 드러내는 대표적인 특징들이 있는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들 단위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는 연속성이 거의 없습니다. 예컨대, 여자와 아이와 용(龍)이 등장하는 12:1-18의 경우, 용의 형상은 12장과 13장의 두 장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여자와 아이는 13장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로 미루어 이들 두 장은 원래 문학적 관계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각색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들 열두 개의 독립적인 단위들은 각기 개별적으로 뚜렷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단위들은 후대에 삽입되어, <계시록>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2) 각 단위들 간에 문학적 연결성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처음부터 현재의 문맥에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십사만 사천”(7:4; 14:1), “일곱 머리와 열 뿔”(12:3; 13:1; 17:3), “음녀와 큰 성”(17:4; 18:16) 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다른 단위에서 등장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나마도 <계시록> 전체의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위해서 원래의 자료에 대한 이차적인 부연(敷衍)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각 단위들이 보여주는 문학 유형이나 문체가 예상 외로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컨대, <계시록> 7:4-8은 인구조사에 해당하나, 10:1-11의 본문은 예언자의 소명 기사에 해당합니다. 또한 11:1-13의 본문은 환상 기사라기보다는 예언 기사에 더 가깝습니다. 이 예언 기사는 <스가랴> 4:1-14에 대한 묵상으로 시작합니다만, <스가랴>의 구절은 즉각 사라집니다. <계시록> 17:1-18의 본문도 독특합니다. 이 단락은 천사 해석자가 환상의 수수께끼 같은 세부 내용을 우화적(寓話的)으로 설면해 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게다가 이 본문은 책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문학 형태, 즉 미술 작품에 대한 해설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각 단위들이 다른 문학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들이 처해있던 독특한 삶의 자리를 반영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4) 이들 독립 단위들 중에 일부는 강한 유대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이들이 유대 전승에서 <계시록> 속으로 들어오면서 기독교적인 재해석을 거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 안에서 가장 유대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본문은 사실상 <계시록>의 가장 오래된 부분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계시록> 7:1-8의 이스라엘 지파 인구 조사표는 14:1에서 어린 양을 따르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자로 기독교화 됩니다. 그리고 “두 증인”에 관한 본문(11:1-13)은 ‘모세’와 ‘엘리야’와 관련된 유대 종말론 전승에 기반을 둔 예언 기사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내용과의 비교를 통해서 기독교화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열두 개의 단위들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우선 이들의 형성 시기는 이들이 <계시록> 본문에 포함되기 전인 주후 50-60년대 사이에 작성되었습니다(D. Aune). 이들 단위들은 비록 그 자체로서 완전한 묵시록들은 아니지만, 다양한 묵시 유형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 독립 단위는 ‘요한’이 묵시론자로서의 자신의 경력 초기에 저술하였거나, 또는 <계시록>의 편찬과 관련해서 개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단계: 제 1판의 구성. <계시록> 제 1판은 대략 주후 68-74년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묵시 기록의 작성 배경이 되었던 것은 제 1차 유대인 폭동과 그 이후의 일련의 사건들(주후 66-73년)로 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열두 개의 단위들은 동일한 구문론적인 특색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 같은 관찰 사실로 미루어 이들이 모두 동일-편집자의 손길을 거친 것으로 보입니다.
<계시록> 제 1판은 대략 (1) 1:7-12a과 (2) 4:1-22:5로 이루어져 있고, 철저하게 묵시적이었던 같습니다. 그리고 익명이거나 가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은 문학적 형식 요건에 따라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며(① 4:1-16:21; ② 17:1-22:9), 이중 첫 번째 단락은 다시 세 개의 일곱 시리즈가 연대순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 일곱 인(4:1-8:1); ㉯ 일곱 나팔(8:2-11:18); ㉰ 일곱 대접(15:1-16:21). 그리고 저자는 다시 이들 세 개의 단락 안에 위에서 언급한 열두 개의 독립적인 단위(자료)들을 삽입합니다: ⓐ “십사만 사천”명의 인침(7:1-17)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인 사이(6:1-8:1); ⓑ “작은 책을 든 천사”(10:1-11)와 “두 증인”(11:1-13)의 자료는 여섯 번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사이(8:2-11:18); ⓒ 나머지 세 개의 독립 자료들, 즉 “여자와 아이와 용”(12:1-18),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13:1-18), “환상과 음성들의 혼합”(14:1-20)은 일곱 나팔(8:2-11:18)과 일곱 대접(15:1-16:21) 사이. 따라서 세 개의 연속적인 일곱 시리즈를 해석하고자 할 때, 저자의 편집 의도에 따라, 즉 그 안에 삽입된 독립 단위들의 숫자나 순서를 면밀히 주목하면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 단락(17:1-22:9)에서는 저자는 완전히 다른 형식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안에 형식적으로 유사한 두 개의 “천사의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17:1-19:10; ㉯ 21:9-22:9. 이 둘은 그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19:11-21:8의 내용의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19:11-21:8의 부분은 종말론적 사건들을 결말짓는 곳으로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께 대항하는 군대를 타파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심(19:11-21); ⓑ ‘사탄’이 일시적으로 석방됨(20:1-3); ⓒ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동참할 순교자들이 부활함(20:4-6); ⓓ ‘사탄’과 ‘곡’과 ‘마곡’의 군대가 최후로 패배하고 처벌을 당함(20:7-10); ⓔ 죽은 자들의 심판(20:11-15); ⓕ 새 예루살렘의 구원과 은혜의 약속(21:1-8).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만 순서에 따라 정리해 보면 제 1판의 대략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1:7-12a
(2) 4:1-22:5
① 4:1-16:21
㉮ 일곱 인(4:1-8:1)
ⓐ 십사만 사천명의 인침(7:1-17)
㉯ 일곱 나팔(8:2-11:18)
ⓐ 작은 책을 든 천사(10:1-11)
ⓑ 두 증인(11:1-13)
㉰ 막간(12:1-14:20)
ⓐ 여자와 아이와 용(12:1-18)
ⓑ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13:1-18)
ⓒ 환상과 음성들의 혼합(14:1-20)
㉱ 일곱 대접(15:1-16:21)
② 17:1-22:9
㉮ 17:1-19:10
ⓐ 그리스도의 강림(19:11-21)
ⓑ 일시적인 ‘사탄’의 석방(20:1-3)
ⓒ 천년 왕국과 순교자들의 부활(20:4-6)
ⓓ ‘사탄’과 ‘곡’과 ‘마곡’의 군대의 패배(20:7-10)
ⓔ 죽은 자들의 심판(20:11-15)
ⓕ 새 예루살렘의 구원과 은혜의 약속(21:1-8)
㉯ 21:9-22:9
3단계: 제 2판의 구성. <계시록> 제 2판은 주후 1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또는 2세기 초(98-117) 이후에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제 2판에서 새롭게 추가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표제(1:1-3); (2) 1:4-6(서신의 서론과 송영); (3) 1:12b-3:22(영광의 그리스도의 환상과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선언들); (4) 22:6-21(발문과 결론). 여기에 추가로 제 1판의 내용을 부연하거나 또는 추가적인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제 2판은 제 1판과는 현저하게 다른 신학적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Aune는 제 1판과 제 2판을 구별 짓는 주요한 문학적 차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참고 도서 1),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제 2판에서는 기독론이 보다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칭호나 속성들이 제 2판에서는 영광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전에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던, “지금도 계시고 이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든지, “전능자” 등과 같은 호칭들이 그리스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2판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영광의 그리스도의 현현과 일곱 교회에 대한 선언을 담고 있는 2:1-3:22의 내용일 것입니다. 이 단락은 이 책의 서론(1:1-20) 및 결론(22:5-21)과 함께 로마제국의 박해에 관한 내용이나 황제 숭배 사상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다만 일곱 교회 중에서 ‘버가모’ 교회에 대한 선언에서 ‘안디바’의 사형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고(2:13),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지역 유대인들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참고로 2:9와 3:9에서 유대인들을 “사단의 회”로 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머나’에서 투옥이나 죽음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지역 권력이 연루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Aune는 제 2판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른 특징들, 예컨대 문체적(文體的) 특징들이나 새로운 단어들의 사용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이곳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문학
1. 장르
올바른 <성경> 해석의 첫 단계로서 본문의 문학 양식(장르) 구분이 선행되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점은 본인의 <창세기: 문학과 역사와 신학> 교재에서 소개한 바 있는 ‘듀브로우’의 인용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르에 있어 <계시록>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1) 서신; (2) 예언서; (3) 묵시록. 하지만 <계시록> 속에는 이들 세 가지 양식 모두가 혼재해있으므로, 이 책의 양식을 이들 세 가지 중의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서신. 이 책은 분명 스스로를 편지로 규정하고 있으며(2:1-3:22), 형식상 서간적인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참고. 1:4-5; 22:21). 이 같은 사실은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인식은 되고 있었습니다만, 본문의 해석과 관련해서 크게 주목을 받거나,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고대 문학이 그 형식이나 장르에 상관없이 편지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의 관용적인 표현들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서간체로서 <계시록>의 특징이 과연 이 책을 해석하는 일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까 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편지는 편지로서의 기능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저자 ‘요한’은 예배 시에 낭독을 쉽게 하기 위해 <계시록>을 서간체 형태로 배열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바울’의 여러 서신들을 통해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편지가 신탁(神託)이나 예언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예들은 많이 있습니다. <구약>이나 초기 유대 문학에서도 예언 서신들은 간혹 발견됩니다. 예컨대, <역대하>에는 선지가 ‘엘리야’가 썼다는 편지가 나오는데, 이 편지는 심판에 관한 전통적인 관용(慣用)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12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13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14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 15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대하 21:12-15)
이들 예언 서신들은 대부분 ‘예레미야’나 서기관 ‘바룩’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렘 29:4-23, 24-28, 30-32). <예레미야> 29장에 나오는 편지들은 모두 <역대하> 21:12-15에 나오는 ‘엘리야’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서신에서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예언서>에서 관용적으로 도입하는 서신 형태를 갖춘 “예언의 신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밖에 초기 유대문학에서 나타나는 소위 “예언의 신탁”의 예로서 <에녹 1서>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서신 100;6의 헬라어 본문은 이 작품 전체를 “에녹 서신”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이나 유대문학에서 서신 형태를 갖춘 “예언의 신탁”들이 비교적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어, 이들을 별도의 장르 즉 “예언 서신 장르”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계시록>도 그 중의 하나라고 보자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예언. 예언과 묵시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쉬운 일도 아닙니다. 두 문학 양식은 각기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다양한 문서들의 스펙트럼을 총칭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전 200년에서 주후 1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전한 유대 묵시문학은 고대 근동의 이방 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예언문학과 지혜문학에도 명백하게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묵시와 예언의 차이를 명백하게 분리하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둘 사이에 일련의 형식론의 차이를 발견하려했고, 이를 통해서 <계시록>의 예언적 특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묵시와 예언이 그 형식에 있어 정확히 어떤 차이들을 가져야 하는지 딱히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 기능이나 내용면에서 예언(豫言, foretelling)은 예언(預言, forthtelling)으로서의 기능, 즉 현세적 권면이나 충고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묵시와 구분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3장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에 대한 선언은 분명 예언(預言)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계시록>의 저자도 자신을 직접 예언자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기록을 분명히 예언서로 묘사하는가 하면(참고. 1:3; 22:7, 10, 18, 19), 자신의 예언자적 임무를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profhteuvw)하리라 하더라”(10:11).
많은 학자들은 <계시록>이 예언서일 뿐만 아니라, ‘요한’을 <신약>은 물론 <구약>의 예언을 공유하는 특별한 예언자로 추켜세우기도 합니다. 혹자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시록>이 전혀 묵시록이 아니라, 고전적인 <구약>의 예언 작품에 속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계시록>과 <예언서>들은 그 형식이나 내용 및 기능에 있어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인 즉, 한 성경학자는 “고전적 예언”의 장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1) 형식: 소명(召命)(신과의 만남), 서언(序言), 그리고 위임(委任)을 포함한다. 구두 계시는 축복과 저주의 신탁을 모두 포함하는 반면에, 비(非) 언어적 계시는 행동이나 기호(記號) 언어를 수반한다.
(2) 내용: 축복과 저주의 신탁을 포함한 소명과 환상도 함께 포함한다. 단 신탁은 결정적이라기보다는 조건적이며, 예언자는 새 언약 하에서 완전한 회복의 가능성을 를 수신자들에게 제시한다.
(3) 기능: 예언자는 ‘야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백성들에게 신탁을 전한다.
참고로 고전적인 묵시는 그 형식이나 내용 및 기능에 있어 아래와 같은 대조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묵시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상세하게 소개할 것임):
(1) 형식: 익명(匿名)이며 문어체(文語體)이다.
(2) 내용: 역사와 종말에 대한 이원론적(二元論的), 비관적(悲觀的), 결정론적(決定論的) 입장을 나타내며,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한다.
(3) 기능: 종말의 긴박함과 하나님의 결정론적 목적을 알리는 묵시의 기능을 한다.
묵시. 대다수의 학자들이 <계시록>이 묵시 문학 장르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계시록>은 확실히 편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만(참고. 1:4-; 22:21), 이 구조가 작품의 나머지 부분에 뚜렷한 장르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계시록>은 또한 저자가 묵시로 칭하는 최초의 고대 저술이라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ajpokavluyi" jIhsou' cristou)라는 어구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1:1). 독일 학자 ‘니취’(K. I. Nitzsch)는 이 구절에 기초하여 ‘apocalypse’(묵시, 계시)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고안해 내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 용어는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계시록>과 유사한 문학 작품을 총칭하는 장르의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묵시록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은 대개 주전 200년에서 주후 100년 사이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구약>의 일부 <예언서>들에서 묵시적 특성을 드러내는 단락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만(예. 사 24-27; 56-66; 겔 38-39; 욜 3-4; 슥 9-14), 대개 가장 오래된 묵시록으로 간주되는 <다니엘서> 7-12장은 <구약> 원전에 포함된 유일한 묵시록입니다. 이 외에 묵시록으로 간주되는 일련의 작품들이 <외경> 속에 다수 포함되어있습니다.
하나의 장르로서 묵시문학의 특징은 무엇일까? 전통적인 묵시문학의 특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바 있습니다만, 묵시 장르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정의는 ‘콜린스’(J. J. Colins)가 제안한 것일 것입니다:
묵시는 설화 구조의 계시 문학이다. 묵시에서 계시는 내세의 존재에 의해 인간 수령자에게 전달되며, 그 내용은 종말론적 구원을 예견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이며, 또한 다른 초자연적 세상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공간적이기도 한 초월적 사실을 말한다.
이와 같은 ‘콜린스’의 정의(定意)는 묵시 장르에 대한 종합 범례와 같은 것으로, 이 속에 묵시 장르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핵심적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묵시의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는 목록들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도표):
각 목록들은 다시 세부 범주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즉, 이들 각각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도표):
그리고 이 도표에 나오는 목록들에 따라 <계시록>의 여러 측면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계시의 방식
(1) 환상: 형식적으로 볼 때, <계시록> 1:9-22:9의 기록은 단일 환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내세 여행을 다루고 있는 4:1-22:9의 기록이 <계시록>의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세 여행에 대한 언급은 4:1이 유일하며, 계시자가 땅으로 되돌아오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 다른 여행 즉 땅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수평적 여행에 관한 언급이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2) 현현: 그리스도의 현현을 다루고 있는 단락은 1:9-3:22입니다. 이 단락은 다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현 자체를 다루고 있는 1:9-20의 본문으로 이 부분은 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머지 2:1-3:22의 본문은 계시의 수령자인 일곱 교회에 대한 선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3) 청각적 계시: 환상이나 현현 외에 청각적 계시도 시각적 계시와 함께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었다”(11:15-18; 14:2-5; 14:14; 19:1-8). 환상에 나오는 청각적 요소들은 종종 특별한 형태를 나타냅니다: 송영(5:13; 7:12); 환호(4:11; 5:9-10, 12); 승리의 노래(12:10-12; 14:8; 19:1-3); 지복(14:14; 16:15; 19:9; 20:6).
강론(discourse)과 대화도 청각적 계시의 한 부분으로 묵시록에 등장합니다. <계시록>의 강론은 대부분 2:1-3:22 사이에서 이 책의 목적과 기능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릴 수 있는 비교적 짧은 강론이 등장합니다. 반면 대화는 <계시록>에서는 비교적 드물게 나옵니다. 열두 장로 중 한 명과 계시를 보는 자의 짧은 대화(7:13-17)와 대접을 가진 천사들 중의 한 명과 계시를 보는 자와 비교적 긴 대화(17:6-18)가 그 예들이 될 것입니다.
(4) 내세 여행: <계시록>의 주요한 환상 기록 부분인 4:1-22:9는 하늘의 궁전을 향한 내세 여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계시를 보는 자의 시점은 하늘과 땅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즉 4:1부터 9:21까지는 계시자의 시각이 하늘을 보고 있지만, 그 이후의 일련의 장면들에서는 다소 불분명합니다(참고. 11:1-13; 12:1-6, 13-17; 13;1-18; 14:1-5, 6-7, 8, 9-11). 그리고 다시 다른 일련의 장면들에서는 그의 시각은 천국으로 향해 있습니다(참고. 14;14-16, 17-20; 15:1-16:21; 19:1-8, 11-21; 20:1-15; 21:1-8; 21:9-22:9). 그러나 그가 언제 땅으로 되돌아왔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5) 기록: 이 책속에는 두 가지 설화의 중심 부분을 이루는 두 개의 내세 기록이 나옵니다. 첫째는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이고(5:1-8:1), 두 번째는 힘센 천사의 손에 놓인 펼쳐진 두루마리입니다. ‘요한’은 이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10:2, 8-11).
(6) 내세의 중개자: <계시록>은 “해석 천사”라는 전통적인 묵시 인물을 사용합니다(참고. 1:2; 22:8-16).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 내세의 중개자가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대접을 가진 천사 한 명이 해석 천사의 역할을 하는데(18:1-18), 여기서 그는 ‘요한’과 대화를 통해서 해석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 한 명의 대접을 가진 천사는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안내하고 있습니다(21:9-22:6). 그러나 그는 보이는 것에 대해 해설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 천사 중개자는 22:8-18에 등장하는 해석 천사와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의 표제에서(1:1), 그리고 현현에서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가(1:9-3:22) 계시의 중개자 역할을 합니다. ‘요한’을 하늘로 부르는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4:1)은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음성(1:10)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주요 환상기록에서 공식적인 주요 중개자는 그리스도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습니다.
(7) 인간 수령자: 계시의 수령자는 자신을 간단하게 ‘요한’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1, 4, 9; 22:9). 그리고 일인칭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다음에 내가 보았다”), 그가 실제 계시를 경험했음을 청중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유대 묵시문학이 익명을 사용하지만, <계시록>은 익명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이 묵시록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물론 반대 견해들도 있습니다만).
수령자의 성향에 관한 정보는 이 책의 개록 배경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배경은 1:9-10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즉, 여기서 저나는 자신을 독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의 경험에 동참하여 ‘밧모’라 부르는 섬에 있는 ‘요한’으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본 계시는 주의 날에 그가 무아지경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1:10).
그가 그리스도의 현현을 경험했을 때(1:9-20), 그는 죽은 것같이 되었습니다(1:17).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을 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는 크게 울었고(5:4-5), 붉은 빛 짐승을 탄 음녀를 보고 놀라기도 했습니다(17:6). 그리고 천사 중개자를 경배하려다가 두 번씩이나 책망을 받습니다(19:10; 22:8-9).
2) 계시록의 시간 (묵시의 내용)
(1) 기원론: 악의 기원에 관한 언급이 12:7-9 사이에서 나옵니다. 즉 ‘사탄’과 그의 제자들이 모반을 함으로써 하늘에서 쫓겨남으로써 비롯되었다는 언급으로서, 이는 옛 유대신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나오는 12:10-12의 찬송시는 이 기원론적인 사건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2) 천지창조: 이 책에서 세상의 기원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만, 간혹 찬송의 문맥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며(4:11; 10:6; 14:7),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가 존재했다는 선언이 등장하기는 합니다(3:14).
(3) 태초의 사건들: 기원론적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는 하늘의 전쟁은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패배하고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12:7-9).
(4) 역사에 대한 조망: <계시록>에서 역사는 양(兩) 방향으로 조망되고 있는데, 과거에 대한 회고와 미래에 대한 예견이 그것입니다. 일곱 왕들에 대한 언급(17:9-11)이 전자(前者)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여기서 저자는 멸망한 다섯 왕과 현존하고 있는 여섯 번째 왕(“하나는 있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이르지 않은 일곱 번째 왕의 출현에 대해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7장은 예언에 속하는 것으로서, 짐승과 열 왕이 어린 양과 벌이는 전쟁(12-14장)과 짐승과 열 왕이 로마를 공격하는 것(15-18장)에 대한 예언입니다.
(5) 지식: 여기서 지식이라 함은 영적 지식, 특히 묵시에 의해서 제한된 지식으로서, 이를 통해서 현재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6) 종말의 위기: 가장 대표적인 종말의 위기로 박해를 들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겪을 고난에 대해서 언급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박해(2:10), ‘버가모’와 ‘안디바’가 당할 처형 내지는 사적인 폭행(2:13)이 등장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신원(伸寃)을 간청하는 울부짖음(6:9-11), 그리고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음녀”(17:6) 등에 관한 언급 등도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박해에 관한 언급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9; 7:9, 14; 11:3-13; 12;11; 13:7; 14:13; 16:6; 18:24; 20:4.
종말의 위기와 동반하여 나타나는 일련의 격변들도 있는데, “일곱 인을 떼는 일”(6:1-8:1), “일곱 나팔을 부는 일”(8:2-9:21; 11:15-18), “일곱 대접을 쏟는 일”(15:1-16:21) 등이 복잡한 일련의 종말론적 처벌에 대한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격변은 ‘바벨론’의 멸망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18:1-18:10).
(7) 종말의 심판: 악한 세력에 대한 종말의 심판은 삼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바, 악인과 악한 세상과 그리고 악한 내세의 존재들에 대해서입니다. 우선 “짐승과 열 왕의 동맹”은 악인에 대한 상징으로서 이들은 어린 양과 전쟁을 벌이지만 패배를 당합니다(17:12-14. 참고 19:17-21). 로마는 하나님의 신원 활동 가운데 멸망합니다(18:1-24).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지휘를 받는 군대는 백마를 탄 자에 의해 패배를 당하고 죽음을 맞습니다(19:21). 사회 모든 계층의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불 못 속으로 던져질 것입니다(20:11-15). 악인의 범주에는 모든 겁쟁이들, 불신자들, 타락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인즉 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니 이는 곧 둘째 사망입니다(21:8).
‘요한’이 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파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21:1). 또 다른 곳에서는 처음 하늘과 땅이 하나님 앞에서 도망을 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20:11).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백마를 탄 자에 의해 패배를 당하고 불 못 속으로 던져지며(18:20), ‘사탄’도 마침내 패배하여 같은 곳에 던져지는데, 거기에서 ‘사탄’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영원히 괴로움을 당할 것입니다(20:10).
(8) 종말의 구원: 종말의 구원과 관련하여 수반되는 사건은 우주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입니다. 우주적인 사건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입니다(21:1). 이 사건에 대한 상징으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것”입니다(21:2-4; 21:9-22:5).
개인적인 사건으로는 단연 부활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증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첫 번째 부활에서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릴 것입니다(20:4-6). 그리고 일반 부활이 이어질 것입니다(20:11-15).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분”(1:5)은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당연한 것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구원과 함께 내세의 다른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성도들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약속받고(2:7; 22:14), 영생의 흰 옷을 입을 것이며(3:5), 보좌에 앉으신 존귀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위를 얻게 될 것이며(3;22),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입니다(23:14). 의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이고, 하나님은 모든 슬픔과 죽음과 고통이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7:13-17; 21:3-4; 22:3-5).
3) 계시록의 공간(묵시의 내용)
(1) 내세의 요소들: 여기에서 두 가지 요소가 들어있는데, 하나는 공간적인 영역과 다른 하나는 그 안에 거주하는 내세의 존재들입니다. <계시록>은 하늘과 땅과 저승(지하세계)에 대하여 전통적인 유대의 우주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참고. 5:3). 하지만 저자는 하늘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저승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천상 세계는 주로 하늘 궁전으로 그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궁전을 관장하시며, 천상의 존재들은 그분에게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4:1-5:14; 7:9-17; 8:2-5; 11:16-18; 12:10-12; 15:1-16:1; 19:1-8).
저자는 그의 환상 가운데 그리스도 외에 두 무리의 경쟁관계에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들(하나님의 지휘를 받는 존재들과 ‘사탄’의 지휘를 받는 존재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귀한 그리스도는 책 속에서 성부 하나님보다 훨씬 더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으며(1:9-3:22; 22:12-21), 그분의 역할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린 양; 메시야; 백마를 탄 자. 저자는 다른 천상의 존재들에게도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바, 하나님의 일곱 영(4:5), 네 생물(4:6-10; 5:6, 14; 7:11; 14:3), 이십사 장로(4:4, 10; 5:5-14; 7:11; 11:16; 14:3; 19:4) 등입니다. 이들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직분을 감당하는 여러 특별한 천사들(7:1; 8:3-9:21; 10:1-11), 셀 수 없이 많은 천사들(5:11; 7:11)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환상의 또 다른 중심인물들은 ‘사탄’과 그의 지휘를 받는 존재들입니다. ‘사탄’은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마귀, 큰 용, 옛 뱀, 온 천하를 꾀는 자(12:9) 등입니다. 지휘 계통에 있어 ‘사탄’의 2인자는 끔찍한 모습의 짐승으로서(11:7; 13:1-10; 16:13), 이는 로마의 황제나 로마 제국에 대한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참고. 17:7-11). 사악한 삼위일체의 세 번째 존재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서(13:11-17), 때로 거짓 선지자로 불리기도 합니다(16:13; 19:20; 20:10). ‘사탄’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군사를 가지고 있는데(12:9-9), 황충 떼가 그들입니다(9:3-11).
4) 도덕적 권고(묵시의 내용)
전통적인 유대 묵시록에는 도덕적 권고가 비교적 드뭅니다. <계시록>의 경우에도 권고에 해당하는 주요 부분(1:1-3:22; 22:10-21)에서 도덕적 권고는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명령들은 “지키는 것” 또는 “순종하는 것”(1:3; 22:7, 8), “나의 일을 지키는 것”(2:26), 그리고 “나(그리스도)의 말을 지키는 것”(3:8, 10) 정도인데,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른 단락, 즉 4:1-22:5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12:17; 14;12)라는 언급이 나옵니다만, 이는 후대 편집자의 삽입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락은 지켜야 할 만한 권고가 거의 없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권고는 2:1-3:22; 22:10-21의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등장하는 권고의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려움을 이김으로 믿음에 굳게 머물러야 할 필요성(2:7, 11, 17, 26; 3:5, 12); (2) 자신들의 과거의 상태를 기억하거나 학성하는 것의 중요성(2:5; 3:3; 3:2; 16:15); (3) 죽음에 이를지라도 고난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2:10); (4) 인내 또는 굳게 붙잡는 것의 중요성(2:25; 3:11; 13:10; 14:12); (5) 의로운 자는 계속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계속 거룩해야 한다는 교훈(22:11).
5) 종결의 요소들(묵시의 형식)
<계시록> 마지막에 저자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22:10)는 지시를 내리는데, 이는 반대 명령이 나오는 <다니엘서>(12:4, 9)의 인유로 볼 수 있습니다.
예언 묵시. 대다수의 학자들이 <계시록>을 묵시 장르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일부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예컨대, <계시록>이 전통적인 묵시 문서들과는 달리 저자가 익명이 아니라는 점이라든지, 또는 묵시 문학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고난에 대한 입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이스라엘-유대의 견해와는 달리 묵시록의 저자들은 고난은 악의적이고 징벌적이며 전횡적인 것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이유로 <계시록>을 묵시 장르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은 묵시 문학의 성격을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편협하게 규정하는 것으로서, 보편적인 지지를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계시록>을 예언과 묵시가 혼합된 “예언 묵시”로 보자는 입장이 보다 합리적이라 하겠습니다. 즉 <계시록>은 묵시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책 전체를 묵시록으로 분류할 수 없는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계시록>의 초판(初版)(4:1-22:9)은 분명 묵시록인 반면에, 제 2판에 추가된 부분들(1:1-3:22; 22:10-21)은 보다 분명하게 예언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자료비평 부분). ‘아우네’(Aune)는 예언과 묵시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사회론적인 구분이라고 말합니다. 즉 묵시와 달리 예언은 의인과 악인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으며, 악인도 회개하여 지나간 습관을 바꿀 수 있으며, 의인들도 계속 의인으로 남아있기 위해 훈계와 책망과 권고를 필요로 한다고 가정합니다. 이와 반대로 묵시주의는 주로 억압받는 소수의 무리가 지지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이들 소수는 의인들을 악인들과 분명하게 구분하였으며, 의인들이 상을 받고 악인들은 벌을 받는 종말론적 처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우네’(D. Aune)의 견해에 따르면, 저자는 묵시 전승들을 예언의 구조 안에 정리하고(1:3; 22:10-20) 전체 작품 곳곳에 묵시를 예언적인 요소들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초대 기독교에서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았던 묵시 전승들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묵시 전승들이 초대 기독교에서 존속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묵시 전승들은 이스라엘의 왕정 사상과 민족주의 신화들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D. Aune). 앞서 언급하였듯이, 묵시록들은 저자의 이름을 거짓으로 붙이는 특성 때문에 실제 정황들과는 분리될 수밖에 없는 기록이었습니다. 이처럼 초역사적(超歷史的)이거나 탈역사적(脫歷史的)인 묵시록의 성격이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 예언과 혼합됨으로써, <계시록>에서 완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계시록>은 작품 속에 저자와 청중과 배경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묵시록들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중 배경 부분은 작품의 핵심에 해당되는 문학 양식과 관련된 묵시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할 수 있습니다.
2. 구성과 수사
서론. 구성(構成, plot)과 수사(修辭, discourse)는 서사(敍事)나 이야기를 이루는 두 핵심 요소입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학자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예로써, 서사비평(敍事批評, narrative criticism)에서는 저자가 서사를 통해서 어떻게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거나 영향을 주려하는 지를 연구하는데, 이 경우 서사를 이루는 두 부분으로 서사의 “이야기”(story, 서사의 내용)와 “담론”(discourse, 서술 방법)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포함한 히브리 문학의 경우 아래 세 가지 정도의 구성상의 특징이 혼재(混在)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직선형(또는 평행)(a-b-c-d); (2) 반복(또는 순환)(a-b-c-a-b-c); (3) 대칭 및 교차(a-b-c: a'-b'-c' 또는 a-b-c-c'-b'-a').
첫 번째 구성의 원리는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 직선적이며, 결말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갑니다. 구성의 두 번째 원리는 시적인 유사 반복처럼 순환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원리는 음악에서처럼 절정(絶頂)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그 절정에서(최고 또는 최저)에서 다시 그동안의 과정과 대칭(對稱)을 이루면서 결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 세 번째 경우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그 절정(또는 반 절정)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화자(話者)들은 이들 원리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노래나, 시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성상의 특징은 히브리어의 언어적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고대 근동 언어들은 전형적으로 상형문자로서의 회화적(繪畵的)이며 시청각적(視聽覺的)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근동(近東)의 언어는 읽는 대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대상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저자들은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화자(話者)요 화가(畵家)입니다. <구약>의 장과 절의 구분은 현대 독자들이 첨가한 것으로서, 고대의 독법(讀法)을 살린 것이 아닙니다. 고대 사본들은 한 결 같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기록함으로써, 제목이나 부제(副題)나 들여쓰기 등과 같은 어떤 시각적인 구조 표시도 없이,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단순히 열을 채워나갔습니다. 이것은 저자들이 그들 언어의 회화적이며 시청각적인 특징을 염두에 두고, 이들 특징이 문장의 이면에 강하게 버티고 있는 구조적인 틀을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틀의 특징은 (1) 평행(parallel), (2) 반복(repition), (3) 교차(chiasmus)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반복은 다시 역반복(antistrophe), 평행은 (1) 유사평행(synonymus parallel), (2) 대조평행(antithetic parallel), (3)종합평행(synthetic parallel) 등을 포함하며, 교차에는 (1) 역순환(palistrophe)과 원형구성(ring-composition) 등이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함에 있어, 어느 한 구성의 형식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여러 구성들을 다양하게 혼합시켜 무미건조함으로 피했고, 더 나아가 나름대로 독특한 심층 구조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주제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입니다.
문학작품의 구성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추가로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1) 구성의 원형(原型)은 무엇인가? 즉 비극으로 끝나는가(∩字型 구성), 아니면 희극인가(∪字型 구성)?; (2) 주인공은 누구이며 그는 어떤 인물인가? 주인공과 함께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주인공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3) 반복되는 행동이나 대화 또는 이미지 등을 통해서 형성되는 모티브(motifs)는 무엇인가?; (4) 이야기의 화자는 누구이며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구성과 관련한 이들 질문들과 더불어, 수사적 기법에 대한 질문들 역시 <성경> 문학 연구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화자들은 실로 다양한 수사적 기법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유; 은유; 이미지; 역설; 해학; 침묵; 오해; 과장; 언어의 유희; 등.
<계시록>의 구성. ‘라이켄’(L. Ryken)이 지적한 바처럼, <계시록>은 통일성을 지닌 설화적 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하나의 이야기로서 <성경>에서 가장 지리멸렬한 책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성경> 문학 특유의 구조적 원리와 친숙한 수사적 기법들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우선 구조적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대조(또는 대칭)적 구조; (2) 반복(순환)적 구조; (3) 직선적 구조.
(1) 대조와 대칭: 대조나 충돌을 이루고 있는 요소는 아주 다양합니다. 최우선으로 드러나고 있는 대조와 충돌은 선(善)과 악(惡)의 충돌로서,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탄의 충돌, 성도와 짐승을 따르는 자들 간의 충돌, 타락한 바벨론과 순결한 신부 그리스도 간의 충돌, 용과 어린 양의 충돌, 거룩한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와 사악한 삼위일체(용/바다의 짐승/땅의 짐승) 간의 충돌, ‘미가엘’ 천사와 용의 사자(使者) 간의 충돌을 들 수 있습니다. 지리적 대조도 눈에 띄는데, 한 편의 하늘과 다른 한 편의 땅과 끝없는 구덩이 사이의 대조, 두 도시 즉 “새 예루살렘”과 악의 위대한 도시 ‘바벨론’의 대조가 그것입니다. 더 나아가 대조되는 사건들도 있는바, “새 예루살렘”의 확립과 ‘바벨론’의 멸망이라든지, 성도들의 인(印)과 짐승의 표시를 받는 것 등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의 대조를 들 수 있습니다. 영원한 성도의 구원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각종 형태의 일시적 재난들 간의 대조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등장인물이나 사물이나 사건이나 시공(時空) 간의 대조나 대칭 외에도, 일련의 단락들이 상호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 17:1-22:9의 구조가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합니다(아래 단락과 구조 참고). 즉 이 부분은 세 개의 작은 단위로 다시 나누어집니다: ① 바벨론의 심판(17:1-19:10), ② 하나님의 최후 승리(19:11-21:8), ③ 새 예루살렘(21:9-22:9).
여기서 처음과 세 번째 단위(①과 ③)는 천사의 두 가지 계시가 지배하고 있는데, 이들 두 단위는 그 안에 사용하는 어휘나 내용에 있어 마치 시적 유사반복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①과 ③은 ②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짝을 이루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단위는 중간에 있는 단위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다시 정리해 보면 대략 아래 도표에 나타낸 바와 같습니다:
(2) 반복과 순환: 이는 구조상의 두 번째 원리로서, 특히 숫자 “7”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반복을 “요점반복”(recapitulation)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요점반복이론”(recapotulation theory)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Aune의 주석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참고도서 1).
<계시록> 안에는 일관성이나 상호 통일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세부 묘사들이 무수히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면밀히 검토해 보면 단순하면서도 다루기 쉬운 일련의 연속 반복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언(序言)과 결말을 제외한 나머지는 여섯 개의 7중 단위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① 서언(1장)
②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2-4장)
③ 일곱 개의 인(印)
가. 프롤로그(5장)
나. 흰 말을 탄 전사(6:1-2)
다. 붉은 말을 탄 전사(6:3-4)
라. 검은 말을 탄 기수(6:5-6)
마. 청황색 말을 탄 사망(6:7-8)
바. 하늘의 순교자들(6:9-11)
사. 심판과 온 세상의 붕괴(6:12-17)
아. 막간: 144,000명의 인침; 영광스러운 성도들(7:1-17)
자. 고요(8:1)
④ 일곱 나팔
가. 프롤로그(8:2-6)
나. 땅의 재난: 우박, 불, 피(8:7)
다. 바다의 재난: 피로 변하는 바다(8:8-9)
라. 하늘과 바다의 재난: 별이 떨어지고 물이 쓴 물이 됨(8:10-11)
마. 하늘의 재난: 해, 달, 별들이 어두워짐(8:12)
바. 구덩이로부터 재난(9:13-20)
사. 심판의 마병대(9:13-20)
아. 막간: 요한이 두루마리를 먹음; 두 증인들; 처형과 승리(10:1-11:14)
자. 심판과 하늘나라에서의 영광(11:15-19)
⑤ 일곱 개의 위대한 표적
가. 아들, 여자, 여자의 후손과 용의 싸움(12장)
나. 바다에서 나온 짐승(13:1-10)
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13:11-18)
라. 시온 산의 어린 양(14:1-5)
마. 천사의 심판의 메시지(14:6-13)
바. 땅의 수확(14:14-16)
사. 사악한 자의 수확과 심판(14:17-20)
⑥ 진노의 일곱 대접
가. 프롤로그(15장)
나. 사람들의 상처(16:1-2)
다. 바다가 피가 됨(16:3)
라. 강이 피가 됨(16:4-7)
마. 해의 뜨거운 열(16:8-9)
바. 어둠(16:10-11)
사. 아마겟돈을 대비하는 네 영(16:12-16)
아. 지진과 악에 대한 마지막 심판(16:17-21)
⑦ 최후의 심판과 절정의 일곱 사건
가. 바벨론의 심판(17-18장)
나. 어린 양의 혼인 잔치(19:1-10)
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를 패배시키는 그리스도(19:11-21)
라. 사탄의 결박과 그리스도의 천년왕국(20:1-6)
마. 사탄의 풀림과 패배(20:7-10)
바. 최후의 심판(20:11-15)
아. 새 하늘과 새 땅(21:1-22:5)
⑧ 결말(22:6-21)
그리고 각각의 7중 단위는 그 안에 상호 대조되는 두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타락한 인간의 역사와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들의 영광이 그것입니다. 전자(前者)가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다면, 후자(後者)는 역사의 완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두 요소는 또 한편으로 역사의 진행을 보여주고 있는 바, 타락한 인간의 역사로부터 종말의 심판을 거쳐 성도의 영광으로 진행되는 구조적 원리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조의 원리를 인식하면 책 전체를 이해하기 쉽고, 책의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사건 전개의 흐름을 파악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포괄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장면들이 있는바, 천국 보좌와 예배 및 찬송에 대한 장면들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천국 보좌를 그리고 있는 장면은 일곱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① 4:1-5:14; ② 7:9-17; ③ 8:1-4; ④ 11:15-18; ⑤ 14:1-5; ⑥15:2-8; ⑦ 19:1-10. 이중 첫 번째 것이 가장 길며, 이들 장면은 환상 기사의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이야기의 흐름을 일시 중단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와 찬송은 해당되는 그것이 삽입하고 있는 환상을 설명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반복구조와 관련해서 언급을 빠뜨릴 수 없는 두 단락이 있는데, 5장과 10장에서 두 번 등장하고 있는 두루마리의 환상입니다. 두 환상 사이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면, 5장의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한 것이고(5:1), 10장에서는 그냥 “작은 두루마리”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10:2). 과연 이 두 환상 기사가 동일한 두루마리에 대한 반복 기사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해당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3) 직선적 구조: 구조의 세 번째 요소는 환상이나 이미지 그리고 사건들이 직선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직선적이라 해서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나아가는 설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의 내용을 연대기적으로 배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속적이라 함은 환상이나, 묘사, 소리, 이미지나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변화무쌍하게 나아가면서 한 점에 오래 동안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책이 전체적으로 단일 설화에서 보는 지속적인 움직임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규모의 각 단위는 연대기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계시록>의 7중 단위 각각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건들의 순서를 예수님의 감람산 설교(마 24-25)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종말론적 사건들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감람산 설교에서 예수님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다섯 개의 주요 사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 전쟁과 전쟁에 대한 소문, 민족 간의 충돌, 지진과 기근, 거짓 선생들; (2)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심한 박해; (3)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4) 엄청난 자연 재해, 인자의 출현, 지상에서 선민을 뽑기 위한 천사들의 파견; (5) 일곱 비유로 대표되는 최후의 심판.
<계시록>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윤곽을 따르고 있는데, 일곱 개의 각 단위들과 전체 구조가 이 윤곽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곱 겹으로 이루어진 이 단위들을 하나씩 읽을 때 이와 같은 윤곽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은 감람산 설교가 제시하는 이 윤곽에 세부 내용을 덧붙이는데, 특히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단위에서 그러합니다. 예컨대, 감람산 설교에서 예수님은 선과 악의 거대한 마지막 충돌이라든지, 사탄이 결박당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의 수사. <계시록>은 <성경>에서 가장 원형적(原型的)인 문학작품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인간 경험의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단면이라 할 수 있는 말과 이미지의 존재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삶, 죽음, 피, 어린 양, 용, 짐승, 어두움, 땅, 하늘, 물, 바다, 해, 전쟁, 추수, 흰 것, 주홍, 신부, 보좌, 보석, 금.
(1) 상징과 이미지: 이처럼 저자가 <계시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는 수사적 기법은 상징과 이미지들입니다. 그는 어떤 것을 나나태기 위하여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리스도를 영(靈)이나 사람으로 그리는 대신에 사자나 양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법이 문학에서 특별하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경험과 역사에 이처럼 상상력을 부여하는 것은 문자적 사실에만 반응을 보이는 독자에게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사용하는 양식이 상징적이라 해서 <계시록>이 실제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기술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사건들이 역사적인 사건들인가?”가 아니라, 저자가 “그 역사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12장에는 독자들이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곳에서 저자가 역사적 사건들을 기술하는 방식을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습니다. 저자가 12장에서 다루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의 성육신; (2)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저지하려는 ‘사탄’의 방해 공작; (3)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와 승천; (4) 인간의 역사 중에 교회에 대하여 계속되는 ‘사탄’의 공격. 저자는 이들 사건을 문자 그대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아들을 낳는 범상치 않는 여자”, “엄청난 크기의 붉은 용”, “두 그룹의 전쟁 천사들 간에 벌어지는 대규모 전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용”, “여자의 자손을 공격하는 용”에 대하여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심상이 문자적이 아니라 상징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징의 사용은 <예언서>에서 흔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다니엘서> 2장은 다양한 광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본 환상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대신에 그 광물질들은 정치적 제국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8장은 유대를 넘쳐흐를 강(江)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은 ‘아수르’ 군대의 상징입니다. 같은 책에는 천사처럼 날개를 달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데(사 40:31), 이 역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사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13:10-13은 ‘바벨론’의 몰락을 예고하는 가운데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장면을 모여주고 있는데, 이는 ‘바벨론’의 몰락이 우주의 붕괴와도 같을 것임을 시사하는 상징적 장치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해석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미지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지 어떻게 아는가?”일 것입니다. 가장 좋은 도구는 문학 전체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입니다. 문학적 상징은 결국 관례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상 경험을 통해서 분명한 것을 볼 줄 아는 보편적인 눈이 필요할 것입니다. <계시록>의 상징은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형식을 사용해서 쉽게 소통하기 위함입니다. 저자 당시의 독자들은 <구약>에 관한 풍부한 주해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상징이나 내용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계시록>은 <구약>을 수없이 인용하고 있습니다(대략 350회 정도).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이 <구약>의 많은 상징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라 하겠습니다. 이미지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는 분별력과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상징에는 일반적인 의미나 의미들의 관계가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상징은 비밀스러운 역사적인 언급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징의 일반적인 해석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미지와 상징은 명제적 언어에 비해 정밀하지 못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계시록>과 영적 현실을 다루는 작품에 일정 부분 신비감을 유지시켜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2) 비유: <계시록>의 두 번째 수사적 특징은 이 책이 서사시의 문체적 특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빈번한 것으로 직유(直喩)를 들 수 있습니다. 저자는 위대하고 초자연적인 사건을 지상에서 잘 알려진 경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직유는 다른 서사시에서와 같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경험들과의 유사성(類似性)과 상이성(相異性)을 동시에 주장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상이함이 드러나는 경우는 화자가 지상에서 대응이 될 만한 구절을 발견할 수 없을 때나, 또는 유추적으로 상대적인 정확성만을 넌지시 암시할 때입니다: “내가 네 생물 사이에너 나는 듯 하는 음성을 들으니”(6:6);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15:2).
서사시적 문체의 두 번째 특징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통칭(通稱)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중요한 형식 요소로서 세심한 주의를 요합니다. 이들은, 예컨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나 “전능하신 주 하나님” 등으로 부를 때처럼, 말하고 있는 대상의 중요성이나 정도를 환기시키는 방법입니다. 통칭은 또한 성격 묘사의 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리스도를 “사자”로 부를 때는 그의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강조하기 위함이고, 반면에 “어린 양”은 희생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통칭은 전개되고 있는 사건의 어떤 과정에서 한 인물의 성격이나 역할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영원함과 주권을 묘사할 때,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4:8) 부른다든지, 하나님의 왕권을 고려하여,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17:14)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함을 묘사하기 위하여, “거룩하신 이여”(16:5)라고 부릅니다.
<계시록>의 수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들은 각 단락 설명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
3. 구조와 단락
서론. <계시록>의 구조적 원리에 대해서는 앞 단락 “구성과 수사”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본 바 있습니다만, 구체적인 구조 분석이나 단락 구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접근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조분석에 관한 한 어떠한 일치된 견해도 없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이 크게 네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1) 서문(序文)(1:1-8)
(2) 첫 번째 단락(1:9-3:22)
(3) 두 번째 단락(4:1-22:9)
(4) 발문(跋文)(22:10-21)
첫 번째 단락은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현현에 중심을 두고 있고, 두 번째 단락은 하늘 여행을 통하여 등장하고 있는 환상(幻想)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개의 단락은 사실상 하나의 환상 보고로서 서문과 발문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둘을 한 개의 환상 기사(記事)로 보는 이유는 두 번째 단락의 시작인 4:1은 첫 번째 단락에서 이미 시작된 환상 기사를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환상, 즉 저자의 하늘 여행에 관한 기사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능적으로 볼 때, 이 두 개의 단락은 서문과 발문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시록>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이들 두 단락에 대한 세부 구조와 단락 구분에 관한 것으로서, 학자들은 거의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교재에서는 Aune의 입장을 따를 것입니다. D. Aune(참고도서 1).
두 개의 대 단락은 그 분량에 있어 현저하게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이 첫 번째 단락에 비해 훨씬 더 길고 복잡합니다. 첫 번째 단락의 내용은 현현하신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교적 단순하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두 번째 단락은 다시 두 부분의 환상으로 세분될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고(4:1-16:21), 두 번째 부분은 두 천사의 계시(17:1-19와 21:9-22:9)가 통합되어 나타나고 있는 구조입니다.
구조 개요. 다음 구조는 개략적인 것으로서 본문을 크게 구획한 것입니다. 각 단락의 세부적인 개요는 해당하는 단락의 “역사와 문학과 신학”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제명(題名)
1. 서문(1:1-8)
(1) 표제(表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2)
(2) 지복(至福)(1:3)
(3) 서신의 규칙들(1:4-5c)
(4) 송영(送迎)(1:5d-6)
2. 단락 1: ‘요한’의 환상과 위임(1:9-3:22)
(1) “인자 같은 이”의 환상(1:9-20)
(2) 일곱 교회에 대한 선언(2:1-3:22)
① ‘에베소’ 교회에 대한 선언(2:1-7)
②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선언(2:8-11)
③ ‘버가모’ 교회에 대한 선언(2:12-17)
④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선언(2:18-29)
⑤ ‘사데’ 교회에 대한 선언(3:1-6)
⑥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선언(3:7-13)
⑦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선언(3:14-22)
3. 단락 2: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획의 발표(4:1-22:9)
(1) ‘요한’의 승천(昇天)(4:1-2a)
(2) 하나님의 주권, 어린 양의 서임(敍任), 여섯 인(印)들(4:2b-7:17)
① 천국 보좌의 환상(4:2b-5:14)
② 어린 양이 여섯 인들을 뗌(6:1-17)
③ 십사만 사천 명의 보호인(7:1-17)
(3) 일곱째 인과 여섯 나팔들(8:1-11:14)
① 일곱 번째 인(8:1)
② 처음 여섯 나팔들의 환상(8:2-9:21)
③ 천사와 작은 두루마리(10:1-11)
④ 성전과 두 증인(11:1-14)
(4) 일곱 번째 나팔과 일곱 대접들(11:15-16:21)
① 일곱 번째 나팔(11:15-18)
② 여자와 아이와 용(11:19-12:17)
③ 두 짐승(12:18-13:18)
④ 종말의 구원과 심판의 환상(14:1-20)
⑤ 일곱 대접(15:1-16:21)
(5) 바벨론 심판(17:1-19:10)
① 계시의 도입(17:1-2)
② 큰 음녀로 풍유되는 바벨론의 환상(17:3-18)
③ 바벨론의 멸망(18:1-24)
④ 하늘 보좌의 음성들(19:1-8)
⑤ 천사 계시의 결론(19:9-10)
(6) 하나님의 최후 승리(19:11-21:8)
① 하늘의 전사와 그의 정복(19:11-21)
② 사단의 마지막 패배(20:1-10)
③ 죽은 자들의 심판에 대한 환상(20:11-15)
④ 새로운 질서로(21:1-8)
(7) 새 예루살렘(21:9-22:9)
① 환상의 도입(21:9-10b)
② 예언자가 새 예루살렘을 방문함(21:10c-22:5)
③ 전환적인 결론(22:6-9)
4. 발문(22:10-21)
(1) 결론적 교훈(22:10-20)
① 천사 안내자의 권고(22:10-11)
②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말씀(22;12-13)
③ 축복(22:14-15)
④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결론적 증언(22:16)
⑤ 생명수로 초청(22:17)
⑥ 조건적인 저주의 말씀(22:18-19)
⑦ 재림의 약속(20:20a)
⑧ 청중의 응답(22:21)
(2) 편지의 추신(22:21)
서명(署名)
4. 본문 비평
본문 비평에서 다루게 될 내용으로 다양한 사본이나 역본, 그리고 언어와 어휘 및 문법 등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곳에서는 생략합니다. 본문비평과 관련해서 가장 광범위한 연구서로 Aune의 저서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도서 1).
<계시록>의 신학
1. 해석의 원리
종합비평. <계시록>의 해석의 방법이나 신학적 주제 등에 대한 논의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성경종합비평”을 다시 한 번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합니다. 즉 “성경종합비평” 방법은 종교개혁 이후 계몽시대를 거쳐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져 온 통시비평의 학문적 업적과 가치를 인정하며, 이러한 바탕 위에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등장한 공시비평의 제 방법들의 관심사들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역사비평의 주된 관심사가 저자에 대한 것이었다면, 공시비평의 관심사는 주로 <성경> 본문 그 자체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더욱 최근에는 문학비평의 관점이 고조되면서 독자 연구 중심으로 변해왔습니다. 당시의 청중에게 그 본문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지나친 독자 비평의 추세는 본문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소홀히 하거나 부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경종합비평”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 <성경> 본문의 문학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는 본문이 해석학에서 갖는 권위를 계속 옹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방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이 단순히 역사나 과학 또는 사회학 교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전해주는 문학적 도구, 즉 성문학(聖文學)으로서의 지위를 갖도록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봅니다.
종합비평의 관심사가 신학과 신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주는 시청각적(視聽覺的)이고 회화적(繪畵的)인 효과를 통해서 정서적인 감동을 얻는 데에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즉 독자의 전인적인 반응, 즉 정서적, 의지적 반응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종합적 접근 방식을 요한다는 사실은 해석자들로 하여금 상당한 문학적 자질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자질이 결핍된 가운데 해석자들이 자유스러운 해석을 시도할 때 혼돈과 주관적 독단주의로 흐를 위험이 상존합니다. 그러므로 문학 비평을 시도하는 해석자들은 일반 문학에 대한 이해나 그 방법론에 대해서 부단하게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건전한 해석 공동체의 역할도 필수적인데, 이를 통해서 각 해석자가 주관에 빠져 해석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용법. 참고로, ‘윌코크’(M Wilcock)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오늘 우리가 <계시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아주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M. Wilcock, 참고서적 7, 25-26쪽.
<계시록>은 진리를 모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려 하며, 이 책이 지닌 보화는 올바른 빛 속에서 찾기만 한다면 표면에 드러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논리적으로, 정확한 말로 낱낱이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말씀”이라는 이름을 주지 않으셨던가! 하지만 ‘요한’이 ‘밧모’ 섬에서 이끌려 갈 무렵에는 하나님의 말, 선포, 논증, 논의는 모두 이미 말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이 마지막 계시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은 다른 종류의 언어다. 그것은 행동으로 표현된 말, 극으로 표현되고, 색을 입혀지고, 곡조가 붙여진 말이다. 즉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말이다. 사실상 그것은 성례(聖禮)다.
<계시록>을 읽을 때, 마치 그것이 ‘바울’의 글과 같은 신학적 논문인데 표현만 조금 달리 한 것처럼, 또는 ‘누가’의 <누가복음>처럼 역사인데 미래가 투사된 것처럼 읽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성찬식에 사용하는 포도주나, 침례 시에 사용하는 물이나, 또는 무지개의 성분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논리적으로 분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용하고 누리기 위한 것이다.
21세기 독자들은 특히 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문자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 시대는 언어에 식상하여 그림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TV가 라디오를 대신하며,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이미지로 명제적 언어를 대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오래 전부터 아셨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조직신학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하여 멋진 그림책을 보라고 주셨다(본인 주: 예수님의 수 없이 많은 비유들이 바로 그분의 말씀에 대한 그림책이 아니던가!). 그림책은 조금 다른 식이긴 하지만 똑같이 교육적인 것이었다.
기독교 진리를 우리가 성례처럼 사용하도록 그림과 멋진 영상으로 표현한 것, 바로 그것이 <계시록>이다....(중략) 마음에 남는 것은 영상이다. <계시록>에는 그런 영상들이 갈피마다 나온다. 목적은 같다. 지성뿐 아니라 상상으로 신앙의 핵심 개념을 파악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랑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달리 표현하자면, 하늘에서 거룩한 성이 내려오고 혼인 잔치가 시작될 때까지 우리는 그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한다.
2. 신학적 주제들
필요 없는 책. <계시록>의 신학적 주제들을 지배하는 주요 사상은 다양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에서부터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신학과 관련해서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계시록>은 과연 <성경>의 다른 책에는 없는 새로운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소개하고 있는가?”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새로운 조직신학적인 주제들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우리는 굳이 <계시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담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다시 한 번 ‘윌코크’(M. Wilcock)의 입장을 들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M. Wilcock, 참고서적 7, 267-270쪽.
그는 <계시록>에 관한 자신의 주석서 마지막 부분에서, “<계시록>은 없어도 되는 책”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관한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위에서 이 책의 사용법에서 밝힌 자신의 입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즉 그에 따르면, <계시록>은 교회가 행하는 두 가지 중요한 성례전 즉 “침례”와 “주의 만찬”에 비견(比肩)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성례전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기에 교회는 반드시 이를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례전에 대한 명령은 “너는 거듭나야 한다”(요 3:7)는 명령과는 다릅니다. “거듭남”은 필수조건입니다. 우리는 거듭나지 못하면 멸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성례전은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례전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이를 행하지 않는다 해서 멸망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성례전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하지만 “거듭남” 즉 “회개”와 “믿음”은 필요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필요와 의무는 이처럼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성례전이 오직 책임과 의무의 문제뿐이라면,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참으로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의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책임과 의무가 많은 곳에 처벌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무서움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 뻔합니다(어쩌면 오늘날에도 성례전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례전에는 책임과 의무를 뛰어넘는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예컨대,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매번 성찬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희생과 대속의 죽음을 기리게 되고, 덩달아 우리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감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각오와 헌신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의 만찬”은 “침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의 보증”인 셈입니다.
사랑의 보증. 이와 같은 아름다운 성례전의 의미를 <계시록>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 책속에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은 전혀 없습니다. 이 책에서 수미상관(首尾相關)처럼 밝히고 있듯이,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1; 22:20). 따라서 책 전체의 계시의 내용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에게 주신 것이며, 성자께서 그의 천사를 통해서 ‘요한’에게 알려주었으며, ‘요한’은 그것을 교회에 전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밧모’ 섬에서 전혀 새롭고도 위대한 환상을 보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환상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이나 계획에 대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주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소 거친 비유로 말하자면, 동일한 줄거리를 갖는 영화를 이차원적(2D)에서 삼차원(3D)으로 재상영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같은 줄거리라도 보는 감동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밧모’ 섬에 갇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에 대한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이미 그것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다락방 강론에서도 주님은 사도들에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라고 기도한 바 있습니다(요 17:8).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이후 성령님으로부터 배운 것들도 이미 그들이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한 해설에 불과했습니다(참고. 눅 24:44-48; 요 14:26). <신약>에 의하면, 1세기 중엽까지 전 로마 제국에 걸쳐 선포되었던 복음이 어떤 식으로든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암시는 전혀 없습니다. 즉 ‘요한’이 ‘밧모’ 섬에서 듣고 본 것을 더 추가해야 할 공백이 있었다는 암시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계시록>은 상당히 불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유다서>에 이르는 65권의 책은 세상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책은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똑 같은 문구, 즉 “말씀과 증거”라는 문구가 답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요한’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밧모’ 섬에서 다시 한 번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본 위대한 환상을 마지막으로 가장 웅대하게 반복해서 보았을 뿐입니다.
왜 입니까? 왜 마지막으로 또 한 번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다시 성례전의 이야기로 되돌아감으로써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부터 씻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며, 십자가가 매일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는 효력이 있음을 압니다. 영생을 가지려면 반드시 이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례에는 이와 같은 차원에서 “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랑의 보증”, 곧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극적 형태로 실현함으로써, 그분이 우리에게 생생한 존재로 다가오게 해주는 이것은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계시록>은 그분의 “사랑의 보증”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없어도 됩니다. 그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책을 “상상의 성례”로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복음에 대하여 “심장이 뛰고 영혼이 불타오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적 언급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계시록>의 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는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견해가 많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 점에 관한 ‘루터’(M. Luther)의 논평은 냉소적이긴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책에 대하여 각자 자신의 영이 알려주는 대로 생각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견해는 대체적으로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각 입장의 해석적 차이입니다:
(1) 과거주의자(Preterist): “그 사건은 신비에 싸인 언어로 ‘요한’이 살던 시대를 묘사한 것으로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책의 대부분의 예언은 이미 예루살렘의 멸망(AD 70)이나 또는 로마의 멸망(AD 476)과 함께 성취되었다.”
과거주의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1세기 초대교회가 당한 고난을 당시의 로마라는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한 데 있습니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언을 미래에 일어날 일들로 여기지 않고 현재 지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교회에 당면한 위기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실 교회에 대한 격려와 경고로 수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격려는 현실세계의 로마제국주의의 억압과 전횡을 견디고 이기는 자는 장차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 역사주의(Historicist): “그 사건은 에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재림과 그 이후에 이르는 역사 전체를 예고해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주의의 견해는 당연히 이 책의 첫 수신자들인 초대교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인즉, 이 책의 사건들을 서구 역사에서 나타난 일련의 사건이나 인물들(예: 교황들,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세계 대전들, 히틀러, 무솔리니, 등)로 대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초대교회에게 후대의 서구 역사의 진행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더 나아가 주지하다시피, 이들 사건이나 인물들을 책 속의 환상 기사와 일치시킬 수 있는 그 어떠한 일관성 방법이나 규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역사 인식과 <성경> 해석이 지극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라는 점입니다.
(3) 미래주의자(Futurist): “그 사건은 대부분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에 관한 예언(豫言)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흔히 “종말주의론자”로 칭하는 미래주의자는 말 그대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미래주의자들 중에는 소위 “세대주의자”(dispensationalist)도 포함되는데, 이들은 4:1이후부터 나오는 환상의 대부분을 미래의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계시록>은 “휴거” 이전까지 세상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 모든 예언들은 세상의 종말의 날에 성취될 것입니다. 일곱 교회는 휴거에서 절정을 이룰 인류의 역사에서 일곱 세대에 걸쳐 나타날 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교회를 향한 선언 직후에 나타나는 언급이 휴거를 상징하는 선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4:1).
하지만 미래주의의 가장 큰 취약점은 이 책이 일차적인 수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 일곱 세대 이후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궁극적 승리에 관한 것이라면, 1세기 당시 환난을 당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무슨 실질적인 위로가 되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미래주의자라 해서 반드시 세대주의 식의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4;1의 언급은 휴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요한’의 시각이 지상에서 천국의 보좌로 옮겨간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인(印)은 역사 전반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으로서, 그 인이 제거될 때까지는 역사의 성취를 알려줄 두루마리는 개봉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미래주의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해석임이 분명합니다. 미래주의는 극단적인 문자주의를 배격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왕왕 세대주의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4) 이상주의(Idealism): “그 사건은 초시간적이며 초공간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어떤 특정 시대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에서 활동하는 기본 원리들을 상징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상주의에 따르면, 묵시란 일종의 신학적인 서사시로서,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 간의 투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들 사건은 또한 기독교 역사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기독교는 악의 세력과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상주의의 <성경> 해석은 자연스럽게 우화적(allegorical)으로 흐르기 쉬우며, 이 같은 해석은 특히 중세에 매우 활발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문자적인 의미에서 역사의 성취나 종말론적인 의미를 축소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상주의를 지지하는 강력한 근거로 <계시록>의 전달 수단이 거의 대부분 상징이나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주의의 약점은 책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 어떠한 역사적 성취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상주의자들에게 상징은 늘 상존(尙存)하는 현실에 대한 묘사일 뿐입니다. 그 어떠한 역사의 진행이나 성취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각 견해는 나름대로 <계시록>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날 <계시록> 독자들은 이들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적어도 일부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은 희석(稀釋)되어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점 우리가 이 책을 해석할 때나, 혹은 다른 사람의 해석을 대하게 될 때, 탐지하고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천년 왕국. “천년 왕국”(The Millennial Kingdom)은 20장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천 년”에 관한 언급을 통해서 유추한 개념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그 시기나 존재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1) 전(前) 천년설; (2) 후(後) 천년설; (3) 무(無)천년설. 이에 대해서는 해당되는 본문을 다룰 때, 보다 상세하게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