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룻 이야기
김태정 목사약 60분 분량

김 태 정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유치환
우리나라의 소위 전업 주부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물어보면 대개 “집에서 그냥 논다”든지 또는 “얘나 본다”는 등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해서 큰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매일 하고 있는 일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는 고사하고 내 가족들에게조차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 한심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식의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자기 卑下는 주부 스트레스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고 심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 저술가 ‘필립 얀시’(P. Yancy)는 자신도 이러한 스트레스로부터 결코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그의 책을 통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경우는 방금 말한 경우가 역전된 상태입니다. 즉 자신은 전업 작가로서 늘 집에만 박혀 살아야 하는 데 반해서, 그의 아내는 집밖에서 다 방면에 걸쳐 소위 기독교 사역을 활기차게 해나가고 있는데서 오는 스트레스입니다. 자신은 지하실 컴퓨터 앞에서 마음에 꼭 드는 낱말 하나 찾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안, 아내는 아주 사교적이며 외향적으로서 시내 빈민가의 사무실을 혼자 운영하면서, 매일 수십 명의 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가 하면, 상담을 요청해 오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병원을 찾아 죽어가는 환자들의 호스피스 역할도 자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가 자기보다는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사역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삶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크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느낌은 우리 모두가 겪는 것이기도 합니다. 혹시 내 주변에 이처럼 왕성하게 기독교 사역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스트레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필립 얀시’가 그의 아내에 대해서 느꼈을 것과 같은 기분을 가지게 되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부러움과 함께 묘한 질투심 같은 것 말입니다. 이는 마치 가난한 자가 부유한 이웃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감정과도 같은 것이겠지요. 저렇게 활기차고 힘 있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가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내 인생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무슨 가치와 보람이 있는 것일까? 혹시 나는 이와 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까?
<룻 이야기>(더 정확하게는 <나오미 이야기>라고 해야 되겠지만)는 바로 이런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즉 지극히 평범해서 하나님 나라에는 크게 기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필자와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속에는 종교적인 영웅이나 위인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또는 ‘이사야’ 등과 같은 인물들이 없습니다. 두 과부와 한 농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야기의 내용도 그야말로 시시콜콜한 세상적인 이야기들, 즉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출생, 죽음, 의식주, 결혼과 자녀, 및 이들의 사랑 등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출애굽”이나 “시내 산의 계시”나 “오순절의 성령 강림” 등과 같은 초자연적이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사건’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지배적인 분위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질서 정연하고, 승리의 환희나, 희망과는 거리가 먼 무질서와, 패배나 공허나 절망 등이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습니다(적어도 주인공 ‘나오미’를 통해서 바라본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연극의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면 그 색조도 화려한 총천연색이 아니라, 단조롭고 어둠침침한 흑백 일색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색깔이나 분위기는 실은 성도나 교회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한 주간 내내 예배나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구원의 감격을 만끽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즉 매 순간 성령 충만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한 주간의 대부분을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일상의 잡다한 일들 속에 파묻혀 一喜一悲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모르긴 해도 이런 패턴은 죽을 때까지 반복될 것입니다. 한 성도의 인생이 이러하다면 교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기독교 교회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책을 오순절 축제 때 예배의 본문으로 삼아왔습니다. 적어도 주후 8세기 이후부터라는 설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처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책이 오순절의 그 장엄한 역사적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이 임하셨고, 그 자리에 모였던 자들이 교회를 형성하였습니다. 그 사건은 <구약> 시절 같은 절기에 있었던 ‘시내’ 산의 “율법의 계시”만큼이나 초자연적이고, 장엄하고, 극적이고, 또한 공개적이었습니다. 이들 사건을 기념하는 자리에 이 책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더 극적인 책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 해답을 발견하고 깨닫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모든 성경 연구에는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1) 문학과 역사; (2) 신학과 신앙; (3) 교훈과 적용. 그러나 본 강의는 시간과 지면의 제약으로, 첫 두 부분에 대한 연구는 개괄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세 번째 영역인 <교훈과 적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지면 관계상 참고 자료 목록도 생략하였습니다.
개론
<룻 이야기>는 문학적 장르에 있어 전원시적인 짧은 영웅설화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이 어째서 영웅인가?”하고 질문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녀는 분명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보다 더 위대합니다. 우리는 조만간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내용. 이야기의 내용은 가장 세속적이면서 인간적인 것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생; 의식주; 결혼과 자녀; 죽음; 사랑. 이 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부분이 있다면 ‘사랑의 이야기’(love story)입니다. ‘나오미’와 ‘룻’ 사이의 고부간의 사랑, ‘룻’과 ‘보아스’ 사이의 낭만적인 사랑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 사랑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헤세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야말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이기도 합니다.
‘헤세드’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단어이긴 하지만 현대 언어로서 제대로 번역해 내는 데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우리말로 가장 가깝게 번역하자면 “정”(情‘)이 될 것입니다만, 보다 넓은 의미로 정의해 보자면 “신실하고도 변함없는 자비와 긍휼과 인애”가 될 것입니다. 본인은 이 단어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정의로써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바 의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헤세드’의 정의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헤세드’야 말로 모든 가치 판단이나 행동의 동기와 기준이 되어야 함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두 과부 ‘룻’과 ‘나오미’ 그리고 농부인 ‘보아스’가 등장하고, 조연급으로 ‘오르바’와 “기업 무를 자” “무명씨”가 등장합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은 바로 이들 간의 ‘헤세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룻’과의 대조를 위해서, “무명의 기업 무를 자”는 ‘보아스’와의 대조를 위해서 화자가 등장시킨 조연들입니다.
구성.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성은 소위 U 字型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희극적 구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극적 구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는 다름 아닌 주인공들이 상호 간에 보여주고 있는 “수평적 헤세드”입니다. 전체 네 개의 장(章)은 네 개의 무대를 이루며, 각각 기승전결(起承轉結)에 해당합니다. 각 무대를 제목과 함께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 1장: 귀향
(2) 제 2장: 우연
(3) 제 3장: 구혼
(4) 제 4장: 성취
이러한 표면적인 구조를 관통하는 보다 심층적인 구조를 발견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인간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수직적 헤세드”입니다. 이러한 심층 구조를 통해서 알게 되는 사실은 순전히 인간들 사이에서 우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자유의지에 입각해서 내린 선택이나 결정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신비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이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행위(초자연적인 현현)를 한 번도 무대 위에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무대 뒤에서 은은하게 마치 배경 색깔처럼 베어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침묵의 수사”를 통해서 오히려 독자들이 화자를 향하여 항변하게 만듭니다. 화자가 틀렸다는 점을 말입니다. 다만 화자는 책의 서두와 결말에서(1:6; 4:13)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를 수미상관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꼭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만 간혹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독백을 통해서 잠시 내 비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주제를 딱히 정하자면 인간의 우연과 하나님의 필연입니다. 예를 들어, ‘룻’의 개인적인 결정은 결국 ‘다윗’ 왕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룻’의 개인적인 선택이나 결정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피할 수 없는 어떤 숙명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면 피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까?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그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헤세드’ 바로 그것입니다!
1
귀향
(1:1-22)
1. 背景(1:1-5)
화자는 제 1막 1장에서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이 “사사 시대”라고 밝힘으로써,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제 도입을 위한 문제 제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5분의 법칙”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사사 시대는 주전 1,200-1,020 년 사이로서, <사사기>는 책의 말미에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법이 없는 곳에는 불법이 판을 칩니다. 왕이 없는 곳에 내가 왕 노릇 합니다. 모든 선택이나 결정의 기준은 바로 나입니다. 절대적 기준이 없으므로 상대적인 편의주의나 실용주의가 판단의 기준이 되며, 극도의 개인주의가 판을 칩니다. <사사기>의 이 표현은 <잠언서>의 한 구절,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와 같습니다. 한 마디로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한 시대로서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살아갔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나 교인들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역설입니까! ‘베들레헴’은 어원상 “양식의 집” 또는 “빵집”입니다. 그런데 그 빵집에 빵이 없습니다! 우리는 화자가 여기서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이야기가 U 字型의 반 절정(反 絶頂), 즉 어두운 내리막길을 향해서 내려가는 첫 번째 계단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기근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조만간 화자의 설명이나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독백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이 어려운 시기에 또 한 가지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무대의 첫 등장인물 ‘엘리멜렉’에게 닥친 개인적인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무엇일까요?
선택과 관련한 어려움입니다. 기근은 <구약>에서 흔히 있는 일로서, <족장 이야기>의 아주 친숙한 모티브이기도 합니다. 족장들은 그 땅에 기근이 왔을 때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그리고 이제 ‘엘리멜렉’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의 선택은 <룻 이야기>에 등장하는 선택에 관한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는 떠나기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주체는 ‘엘리멜렉’ 자신입니다. 어떠한 초자연적인 계시나 하나님의 음성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운명의 주인공이 되기로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이 의미하는 바는, 그동안 그들을 먹여주고 입혀주던 친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곳을 선택한다는 의미입니다. 주인에서 나그네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어디입니까? ‘모압’입니다. 이곳은 사해(死海) 동쪽에 위치한 고원지로서 소위 “동방의 땅” 즉 “에덴의 동쪽”입니다. 당시 ‘르우벤’ 지파가 살고 있기는 했지만,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던 족속입니다. 바로 그 땅을 ‘갈렙’의 후손 ‘엘리멜렉’이 피난처로 삼고자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엘리멜렉’의 선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장탄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호랑이는 굶어도 풀을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의 선택은 얼마나 수치스럽고 위험한 짓인가!”
화자는 자신의 이런 기분을 반영이라도 하듯, ‘엘리멜렉’ 가족 구성원들의 이름을 조롱하듯 부르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이고, ‘나오미’는 “즐거움”이자 “행복”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가 이방인의 땅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가고 있으며, 그러한 모습은 ‘나오미’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처럼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선택이 될 것임을 예고하려는 것일까요? 두 아들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말론’은 “질병”이라는 어원과 상관이 있고, ‘기룐’은 “멸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의 이름은 그 땅에 들어가서 이들이 맞이하게 될 운명을 미리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복선인 셈이지요.
그러나 정작 무대의 주인공들은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고향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첫 독자들 역시 같은 심정으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 말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설상가상(雪上加霜)입니다. 계속되는 하향 곡선입니다:
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1:3-5)
화자는 이 장면에서 이야기의 초점을 ‘나오미’에게로 옮기면서 그녀에게 닥쳐오는 이중고(二重苦)를 차례로 그리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이 죽었습니다. 객지에서 가정의 생계를 감당할 기둥이 죽은 것입니다. 이 엄청난 비극에 대한 화자의 언급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무뚝뚝합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의 충격이 더욱 크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 대목에서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하나님의 공의나 자비에 대해서 의심과 불만을 갖게 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객지에서 죽어도 괜찮을 것입니까? 도대체 그의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화자는 이들 질문에 답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오미’의 두 번째 고난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두 아들이 죽습니다. 오히려 이 두 번째 비극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는 듯합니다: “이래도 ‘나오미’의 이름을 “행복”이니 “즐거움”이나 하고 부르겠습니까?”
사실 ‘나오미’의 남편이 죽었을 때만 해도 더 이상의 비극은 없을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두 아들과 두 며느리가 남아 있으며, 십여 전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소 혼란스러워집니다. ‘나오미’의 두 아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고 축하해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나 <느헤미야>라면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이들의 결혼 생활 자체는 행복했을 것이며, ‘나오미’역시 만족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4절후).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나오미’의 비극을 더욱 비참하게 돋보이게 하기 위한 부수적인 장치일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구약>에서 결혼 생활 십년의 의미는 자녀 출산을 위한 충분한 기간으로서 만일 이 기간 동안 자녀가 없으면 남편은 다른 아내를 맞이하게 됩니다(예: 창 16:3). 그래서 이 두 쌍의 부부 역시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인지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독자라면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손은커녕 두 아들이 모두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계를 이을 후손 하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가계가 멸절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후손이라 함은 “기업 무를 자”로서 <룻 이야기>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왜 이 두 아들이 죽었을까? 이방 여인과의 결혼 때문이었습니까? 이들이 계속해서 이방인의 땅에 살려 했기 때문이었습니까? 이들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까?” 우리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비련의 여주인공 ‘나오미’가 지난 십여 년 동안 얼마나 깊은 비극의 음침한 골짜기 속으로 한 걸음 씩 내려 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 왕이 없었습니다 ⇒ (2) 양식이 없었습니다 ⇒ (3) 남편이 없었습니다 ⇒ (4) 자식이 없었습니다 ⇒ (5) 후손마저 없었습니다 ⇒ (6) 이제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반 절정을 향해서 내려가고 있는 ‘나오미’의 처지를 아래 그림에서 보다 극적으로 느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나오미’는 객지에서, 빈털터리로, 늙어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옥의 깊은 심연에서 인생의 반전을 위한 시도고 뭐고 해 볼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2. 雪上加霜(1:6-19a)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와 함께 아파하며 의분을 느끼는 독자라면, 이 불쌍한 여인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두 주먹을 휘두르며 필경 다음과 같이 항의하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이 여인이 무엇을 잘 못했기에 이토록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반전을 위한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이 주제 도입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며, 곧바로 이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1:6)
우리는 이 구절에서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야훼’ 하나님입니다! 그는 비록 <룻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한 번도 무대 위에 나타나는 법은 없습니다만, 극중에서 마치 우연처럼 진행되는 모든 인간사를 주도하고 섭리하는 배후 인물로서 화자의 해설을 통해서 처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일어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강한 암시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가 하나님을 ‘야훼’로 부르고 있는 것만 보아서도 그 점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야훼’란 언약의 하나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다시 이 분을 무대 뒤로 숨겨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가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미’와 ‘룻’ 사이의 애절한 ‘헤세드’가 무대 전면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자신이 탈출해 나왔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이번의 귀향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탈출일 수도 있고, 동시에 모험과 위험을 수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6절에서 ‘야훼’ 하나님에 관한 언급은 분명 희망 섞인 기대를 갖게 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오미’가 자기 혼자만 가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세 사람이 어느 정도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이들이 ‘모압’에서 처음부터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무튼 ‘나오미’는 단순히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며느리의 책임을 벗겨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사실 두 사람은 그동안 자신들의 행복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늙은 시어머니를 섬겨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나오미’도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1:8절하-9절상)
‘나오미’의 간절한 기도인 즉은 자신이 도저히 갚아줄 수 없는 두 며느리의 ‘헤세드’를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달라는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헤세드’, 즉 선의와 의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헤세드’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나오미’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며느리들을 향한 헤세드입니다. 너무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이지요. 사랑은 떠나보내는 것이라고 했던가요?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딸들아.” 세 번씩이나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한편 며느리들은 어떻습니까?
9하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9절하-10절)
‘나오미’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완강한 태도에서, 그리고 시어미를 두 번에 걸쳐 “어머니”로 부르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헤어지는 장면은 진정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강하게 결합시켜주었을까요? 우리는 왜 이들이 이처럼 헤어지기 싫어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10 년 동안의 동거였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십년 동안에 온갖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진정한 가족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헤어지기 싫은 지체가 있습니까?
그러나 ‘나오미’는 다시 시도합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돌려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11-13절)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서 아주 필사적입니다: “도대체 너희들이 나를 따라와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 감정만으로 대사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 내가 아들을 다시 두 명씩이나 낳아서 다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겠느냐? 왜 불확실한 미래를 보다 확실하고도 안전한 현재의 행복과 바꾸려 하느냐? 이 어리석은 것들아!” 그리고 ‘나오미’의 절정에 달한 선언을 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나를 원수처럼 치셨다”(13절).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 역시 나를 따라오면 나처럼 될 것이다.”
‘나오미’의 마지막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는 듯합니다. ‘오르바’는 결국 시어머니의 간곡한 권고에 따라 자신의 길을 선택해 갑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14절상)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룻’에게 있습니다. “룻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먼저 놀랄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상식과 기대를 초월하는 너무나 탁월한 ‘룻’의 선택 때문입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4절하). ‘룻’의 선택은 ‘오르바’의 선택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물론 ‘오르바’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거나 비도덕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선택이 지극히 대조적으로 비치는 것은 ‘룻’의 선택이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선택을 비교 분석해 봅시다.
‘오르바’가 상식을 쫓아갔다며 ‘룻’은 비상식을, ‘오르바’가 좋은 것을 택했다면 ‘룻’은 더 좋은 것을, ‘오르바’가 당장의 안녕과 편안함을 택했다면 ‘룻’은 불확실한 미래의 모험과 위험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르바’가 이해를 받아야 할 자라면 ‘룻’은 경탄을 받아야 마땅한 자입니다. ‘룻’은 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룻’의 헌신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나를 더 이상 설득치 마세요. 내가 어머니의 명령을 쫓는 것은 나의 미래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갑니다. 당신의 하나님마저 나의 하나님으로 삼는 일이 있더라도 말입니다(16-17절)
이 별 볼일 없는 늙은 한 시어머니에 대한 정(情) 때문에, 그놈의 정 때문에 시어머니의 신앙마저도 동일시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헤세드’요, ‘헤세드’의 위대함입니다! 혹이라도 ‘룻’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평가하고 싶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와 더 잘 어울립니다. ‘룻’의 선택은 ‘나오미’가 살아 있을 동안에만 유효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어미가 죽고 난 후에도 계속 그 땅에 남아 헌신하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맹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17절).
이 선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고통과 희생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을 때 받게 될 편견과 차별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지로부터 단절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회적인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헤세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 하리라”(마 10:42). 그러나 ‘룻’은 이런 보상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녀의 선택이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룻’이 이스라엘의 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래도 자녀와 땅의 약속은 받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룻’에게 무엇인가 보상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실로 위대한 도박사였고,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인 자였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을 금치산자(禁治産者)로 부릅니다. 아무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를 가키려 “세상이 능히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룻 이야기>의 극적인 반전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한 이방인 과부의 지극히 평범한 한 결정, 늙은 시어머니에 대한 배려가 이야기의 대 반전을 향한 신호탄이 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룻’의 그 결정은 위대한 ‘다윗’ 왕국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룻’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새롭게 써버렸습니다. 결국 ‘룻’의 ‘헤세드’는 마침내 하나님의 ‘헤세드’를 입게 될 것입니다.
3. 空虛(1:19b-22)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바닥을 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에게 더 이상 나빠질 그 무엇이 아직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오미’에게는 아직도 ‘나오미’라는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이제 곧 없어질 참입니다. ‘룻’과 함께 돌아오는 ‘나오미’를 맞이하는 ‘베들레헴’ 주민들의 놀라운 반응을 들어봅시다: “이가 ‘나오미’냐?” ‘나오미’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오미는 무슨...내 이름이 사라진지가 언제인데... 있다면 ‘마라’일뿐이지.” 바로 이 대목에서 이야기는 U字型 구성의 바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마저 사라진, 완전한 공허, 즉 텅 빈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화자는 분명히 ‘베들레헴’에 두 사람이 돌아왔다고 진술하고 있는데도, ‘나오미’의 눈에는 자기 밖에는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만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바닥에 내동이 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불평과 신음 소리를 함께 느껴봅시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1:20하). 그녀의 기분을 대변해 본다면 이런 것이겠지요: “그래, 그 잘난 전능자가 한 일이니 누가 회피할 수 있으랴? 그 전능자가 무슨 할 일이 없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단 말인가!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사실 ‘나오미’와 비슷한 처지에 한 번이라도 있어 본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불평은 약과입니다. ‘나오미’가 경건하지 못하거나 믿음이 없어서 이런 불평을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나오미’는 지금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의 아픔을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 편에 서서 그분을 변호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편에 서서,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서서 우리를 변론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그렇게 했습니다. 고통 받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서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못하다고 따지고 항의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마저 저주하기도 했습니다(렘 20:7-18). ‘욥’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습니다(욥 3). 그리고 자신은 무죄하다고 대들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전도서> 기자도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신지, 계시다면 과연 정의로운 분인지 의심스러울 뿐이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오히려 번창하고 장수하며, 의인은 오히려 고통 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어찌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죽 했으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겠습니까? <시편>의 시인들도 환희와 기쁨보다는 고통과 절망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았습니다. 더 극적인 의심과 불평의 사례를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경우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혹시 나의 생활 가운데 이런 체험은 없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이나 분노로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을 향해서 욕설을 내뱉어 본 적은 없습니까? 우리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평을 너그럽게 봐주신다. 그뿐 아니라 불평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대하는 자의 합당한 자세일 수도 있다...또한 그는 하나님을 재판에 회부하고 싶을 정도로 그 문제와 씨름할 가능성이 높다. 성미 급한 요나, 진지한 예레미야, 끈질긴 욥-나오미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서있다.
내가 늘 만나는 나의 ‘베들레헴’ 성도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나의 구역 식구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귀찮고 힘든 일을 함께 나누기보다는 어떻게 하든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자는 아닙니까? 또는 힘들고 귀찮은 일을 혼자서 처리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든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함께 하려하는 자입니까?: “나는 이것 할 테니 당신은 이것 하세요.” 혹시 그 사람의 좌우명이 이런 것은 아닙니까? “영광은 혼자서, 고통은 다함께.” 이런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도자 되기는 틀린 사람입니다.
실망과 분노와 의심과 수치는 어떻습니까? 이들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성도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내 교회에 있기라도 합니까? 아니면 주변에 보이는 성도라고는 ‘욥’의 세 친구들 같은 자들뿐입니까? 교회가 가정이라고 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룻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헤세드’라 할 수 있습니다. 제 1막 1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나는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러한 ‘헤세드’를 동료 지체들로부터 경험했거나 또는 그들에게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까?
2. 교회의 한 가지 이미지 중에서 ‘가정’을 꼽을 수 있습니다. 가정이 나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극중 ‘나오미’의 상징적인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녀가 쏟아내는 절망과 분노에 대해서 내가 해 줄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내가 ‘나오미’가 되 본적은 없습니까? 있다면 그 분노와 절망을 어떻게 쏟아내고 있습니까?
2
우연
(2:1-23)
1. 行動(2:1-3)
연극의 두 번째 막이 오르기 전에 화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가 바닥을 치고 反轉을 향한 출발을 할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보아스’라 칭하는 새로운 한 인물의 등장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2:1)
그는 ‘룻’의 충성스러운 ‘헤세드’를 보상해 줄 또 다른 ‘헤세드’의 사람입니다. 화자는 이 사람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부유하다는 점과, ‘엘리멜렉’의 친척이라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앞으로 이야기가 극적 대 반전을 가능하게 해 줄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보아스’가 가련한 두 여인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게 될까? 두 가지 요인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효과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첫째, ‘룻’의 주도적이고도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2:2상)
‘헤세드’는 설명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룻’은 낯선 이방인의 땅에 도착하자말자 생계유지를 위해서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곧바로 일터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 추수 기간을 결코 놓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밭에 간다는 것은 떨어진 추수 곡식을 주우러 간다는 말입니다. 밭에 이삭을 일부러 남겨두는 것은 <구약> 사회에서 이스라엘 사회를 위한 일종의 사회보장 장치입니다. 누구든 추수를 할 때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어서는 안 되고, 또한 추수 시 떨어진 곡식은 그대로 두어서 가난한 자들이 와서 거두어 가도록 내버려두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이것을 취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 법이 제정된 동기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이 원체 완악하여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하니, 최소한의 법이라도 만들어 그나마 굶어 죽는 자들이 없도록 하려는 밭의 원래 주인 하나님의 각별한 배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법대로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운이 좋아 마음씨 좋은 주인을 만나게 되면 그마나 다행으로 이삭이라도 제대로 줍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따라서 이삭을 줍는 자는 그날의 일진(日辰)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점, 즉 “우연”이야말로 이들 두 과부의 운명을 바꿔 놓을 두 번째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날 ‘룻’이 찾아간 곳은 우연히도 ‘보아스’의 밭이었다고 화자는 진술하고 있습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2:3)
정말 이 일이 화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우연히 일어난 것일까요? 대부분의 독자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야, 결코 우연일 수가 없어. ‘야훼’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신 것이야!”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점이 화자가 노리는 역설적 효과인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실은 이처럼 독자들로부터 정 반대의 주장을 이끌어내고 싶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화자는 그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결코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나고 있음을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1:6)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1:21)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은 추수법을 제정하신 이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분의 사전에는 결코 우연이란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알려고 피땀 흘려 노력해야만 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왜 소경이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 遭遇(2:4-17a)
그러나 화자는 우리의 반응에는 아랑곳 하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우연의 연속인 것처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4절)
그러면서도 초점을 그들이 만나는 장면으로 서서히 이동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아스’와 그의 사환 간에 오고간 대화의 내용을 곰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사환을 통해서 ‘룻’이 그날 그곳에 와서 일하게 된 경위라든지, 그녀의 성격이 어떠하다든지 등등에 대해서 듣고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5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5-7절)
‘보아스’는 상상해 봅니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충성스러운 사랑의 여인인가. 아침부터 한낮이 되도록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어미를 위해 이 고생을 한다고 온 동네를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고.”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보아스’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어떠한 인격의 소유자일까요? 화자는 여러 각도에서 그를 조명하면서 crescendo의 기법을 동원하여 절정을 향하여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우선 ‘보아스’의 인사법부터 먼저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어쩌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유대’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복주시기를”(4절).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의례적인 인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빨리 다음 장면으로 나아가고 싶어집니다.
드디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과연, 보아스로구나!”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는 단순히 경건한 ‘유대’인 그 이상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8절)
그는 지금 법이 요구하고 있는 그 이상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는 ‘룻’을 향하여 “내 딸아”하고 부릅니다. 은근함과 자비로운 노인을 연상시켜주는 대목입니다. ‘룻’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은 노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움칫 놀라 일어나는 ‘룻’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내 밭에서 계속 이삭을 줍도록 하렴”(8절). 상상을 초월하는 선심(善心)입니다. 자비심에 더하여 상대에 대한 배려도 돋보이고 있습니다. 괜스레 여기저기 다니다가 포악한 인부나 밭주인들을 만나게 되면 횡포를 당할 위험도 피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을 아무리 법이 허용한다 하더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난한 자들은 어디를 가나 천덕꾸러기입니다. 가난하면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친 형제들도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이런 불평등한 처사나 폭력으로부터 ‘룻’을 보호해 주기로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9절)
‘룻’을 더욱 감격시키는 것은 또 있습니다. 물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근동지방에서는 그늘진 곳을 찾기가 힘듭니다. 사막의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일을 하려면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물을 남자들이 밭에서 멀리 떨어진 우물로부터 길어옵니다. 지금 ‘보아스’는 ‘룻’이 그 물을 마셔가면서 충분한 수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습니다:
딸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네 것처럼 쓰라. 그리고 목이 마르거든 여기 내 인부들이 길어다 놓은 물도 마셔가면서 하렴(9절)
더욱 황공하게도 일하는 인부들로 하여금 일부러 곡식 단을 조금씩 흘려 놓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16절). 이것은 ‘룻’에게 직접 한 말이 아니고 인부들에게 한 말입니다. ‘룻’의 자존심을 고려한 것일까요? 우리의 경탄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보아스’의 ‘헤세드’는 아무리 길어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점심 식사에까지 ‘룻’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식탁으로 말입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떡을 먹으라”(14절). 더 이상 무슨 설명이나 검증이 필요하겠습니까? 도대체 ‘보아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사회적으로 유력한 재산가이자 영향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러면서도 ‘룻’만큼이나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같습니다.
잠시 ‘룻’에게로 다시 우리의 관심을 돌려봅시다. 이 책에서 ‘룻’을 부를 때마다 유독 따라붙는 호칭이 하나 있는데, “‘모압’ 여인 ‘룻’”입니다. 우리는 ‘룻’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당시 사회법이 보장하는 당연한 권리의 수혜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 여인은 이 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 개 같은 이방인에게 ‘보아스’는 쓸데없는 짓을 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받을 만한 보장도 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룻’ 자신도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10절)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헤세드’입니다. ‘보아스’가 가진 ‘헤세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헤세드’의 두 가지 측면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보아스’의 ‘헤세드’는 ‘룻’의 ‘헤세드’를 보상해주는 하나님의 ‘헤세드’의 통로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12절상)
‘룻’의 아름다운 향기는 온 동네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룻’이 충성스러운 ‘헤세드’의 사람인 줄은 ‘룻’ 자신 빼고는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서 ‘룻’의 ‘헤세드’를 보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세드’와 하나님에 관한 <룻 이야기>의 신학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명기 사관(史觀)”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보아스’의 ‘헤세드’는 ‘룻’의 믿음에 대한 보상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12절하)
<히브리서>도 이와 동일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심과 그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가련한 ‘룻’은 그의 가족과 친지와 조국을 버리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따라 의지하러 왔습니다. 어찌 이러한 자를 하나님이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3. 反轉(2:17b-23)
제 2막을 끝내면서 화자는 다시 ‘나오미’에게로 초점을 옮기고 있습니다. ‘나오미’야말로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달라진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룻’이 밭에 나가 추수를 줍겠다고 했을 때도 그냥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 외는 달리 할 일도 없었습니다(2:2하). 만사가 귀찮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룻’이 그 날 저녁 추수한 것을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돌아오는 ‘룻’을 바라보는 ‘나오미’의 반응과 함께 어둠침침하던 무대는 갑자기 밝은 빚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공허에서 비로소 다시 무엇 인가 채워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드디어 “나오미 포물선”이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17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17-18절)
‘나오미’는 흥분하여 ‘룻’에게 묻습니다: “오늘 어디에 갔으며 어디서 일을 했느냐? 너를 도운 그 자에게 복이 있기를”(19절). 이어지는 ‘룻’의 대답입니다: “그는 ‘보아스’라는 사람입니다”(19절). 이 대화는 얼마나 즐거운 역설입니까? 두 사람은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룻’은 자기를 도운 사람이 ‘보아스’인 줄은 알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한편 ‘나오미’는 누가 ‘룻’을 도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보아스’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환호합니다: “‘보아스’가 내 며느리를 돕다니,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가 막혀! 전능자 야훼가 그에게 복주시기를. 얘야,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
이제 드디어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제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2:20하). “기업 무를 자”란 ‘히브리’어로 ‘고엘’(לאג), 즉 “구속자”(redeemer)입니다. 우리는 이 구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구속”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면 나는 정말 게으른 자이거나 하나님의 구속에 관심이 없는 자입니다. 게으름은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심각한 질병입니다.
과연 ‘보아스’가 “구속자”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기꺼이 떠맡으려 할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나오미’는 벌써부터 이미 그 일이 다 이루어진 듯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일이 언제 이루어질까요?
그러나 우리는 화자의 대답을 듣기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화자는 우리들의 궁금증에 아랑 곳 함이 없이, 제 1막 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다만 한 줄기 희망의 빛만 비쳐준 채 이야기를 평상의 상태로 되돌려 놓고 있습니다. 그냥 ‘룻’이 추수가 다 끝날 때까지(대략 7주간)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줍기를 계속했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전개될 사태에 대해서 어떠한 암시도 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23절)
이제 이야기의 세 번째 막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흥미진진함 가운데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우리는 간혹 묘한 종교적인 유혹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유명 인사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헌금을 많이 하고 싶다든지,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온 나라를 복음화 하는데 기여하고 싶다든지, 또는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남겨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든지 하는 등의 소망이 그런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종교적 영웅이 되는 것이 큰 도움이 될까요?
2. ‘보아스’의 ‘헤세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나의 삶에서 ‘보아스’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까? 자기 자랑은 “칠 불출”(七 不出)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만, 상호 격려를 위해서 간증을 해봅시다.
3
求婚
(3:1-18)
제 3막은 이야기 전체를 반전시키는 전환점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특히 칠흑 같은 한 밤중에 ‘룻’이 ‘보아스’의 잠자리에 살며시 들어가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되고 스릴이 넘치는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룻’은 ‘나오미’가 그렇게 소망하던 평안과 안녕을 얻어낼 수 있을까?” 이제 이곳에서 일어나게 될 사건은 두 여인의 장래를 바꾸어 놓게 될 것입니다.
3막 전체의 에피소드는 하루 동안에 일어난 것이지만, 핵심 되는 사건은 한 밤중, 특히 자정 녘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음악도 없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등장인물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주인공들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고, 오히려 “그 남자와 그 여자”만이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8, 14, 18절). 이것이 화자의 의도적인 표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마치 이 사건이나 등장인물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대화를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는 듯이 아주 은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동안 한 번씩 언급되던 하나님마저도 이 장면에서는 고개를 돌리고 계신 듯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성적(性的)인 암시를 풍기는 아주 암시적이면서도 애매한 의도를 지닌 단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타작마당”; “그 발치 이불을 듦.” 그러나 우리는 흥미진진함에 더하여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과연 이들이 성적(性的) 유혹을 이기고 그동안 살아왔던 아름다운 ‘헤세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입니다.
1. 計策(3:1-5)
느닷없이 ‘나오미’가 그의 계획을 밝히고 나옵니다. 태도가 완전히 돌변하고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헤세드’를 보여 준 자가 ‘룻’이었다면, 이곳에서는 ‘나오미’의 적극적이며 행동하는 ‘헤세드’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양식이 마련되어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도 했겠지만, 여기서 만족하고 그냥 며느리에게 얹혀 살아갈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1절)
며느리가 혼자 사는 모습을 도저히 안쓰러워 볼 수가 없으니 시집가라는 것이지요. 이런 제안은 시어미가 며느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딸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며느리에 그 시어머니입니다.
2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2-4절)
그러나 ‘나오미’가 ‘룻’을 위하여 꾸미고 있는 계획이라는 것을 보면, 순수한 ‘헤세드’의 동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실망적인 계책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지능적이고 사특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소위 “인간적인 계획”임에 분명합니다. 이런 계획을 기도 제목으로 내놓고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닥친 勿失好機를 하나님의 섭리로 둔갑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우리의 의심에 쐐기라도 박듯이 ‘나오미’의 계획이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고엘)이 아니냐”(2절).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엘’은 “구속자” 즉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는 자”입니다(레 25:25, 26; 민 35:12). 해당되는 본문을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법은 死文化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시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우리는 이야기의 서두에서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종교적 열정이나 헌신이 식어버린 시대라고 했습니다. 누가 자신의 유익을 버리고 종교적 가르침을 따라 순진하게 손해 보는 짓을 하겠습니까?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습니까? 누가 교회를 따라 이사를 다니며,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지체나 지도자가 좋아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을 싫어하겠습니까? 누군가 이 시대를 피상성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진지하고 심각한 관계를 싫어합니다. 인간관계, 경건의 훈련도, 성경 연구도, 그리고 기도도 대충 대충입니다.
‘나오미’ 역시 이러한 시대정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까요? 그가 ‘룻’에게 지시하는 것들이 “비둘기처럼 순결한” 것이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3:3-4). 목욕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잘 차려입어서, 성적인 매력을 갖추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를 유혹하라는 것입니다. 일견 순진하고 늙은 부자를 팔팔한 기생을 시켜 미인계로 그 노인의 혼을 빼놓으라고 지시하는 포주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욱 가관인 것은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누워 잘 때에,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고 지시할 때에는 차라리 역겨움마저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반응은 이런 것이겠지요: “차라리 둘이 그냥 살고 말지.” 아무리 ‘나오미’의 목적이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는 분명 율법에서 엄하게 다루는 범죄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출 4:25; 삿 3:24; 삼상 24:4; 신 28:57; 겔 16:25).
왜 ‘나오미’는 구태여 이러한 방법을 동원해가면서까지 목적을 이루어야만 할까?’ 왜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전례가 없는 이런 치사하고 야비한 방법을 며느리에게 시키고 있는 것일까? 화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대답은커녕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4절). 무슨 말입니까? 과연 ‘보아스’가 성적(性的) 즐거움만을 취하고 ‘룻’을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룻’은 어떻습니까? 시어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는 적극성과 담대함과 뻔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저 시어미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5절). 대단한 헌신이요 순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의 계획이 아니라 시어머니의 계획에 맡겨버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시어미에 대한 불순종을 통해서 이곳까지 시어미와 함께 왔고, 이번에는 순종을 통해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 두 사람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이나(창 16; 17:18) ‘이삭’의 계획(창 17:21)은 성공하였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다음 장면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求婚(3:6-15)
화자는 다시 한 번 ‘룻’의 순종을 격찬하고 있지만, ‘룻’의 순종이 단순히 기계적이지만은 않습니다.
6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7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6-7절)
‘보아스’는 추수를 끝내고 인부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운 축제를 보낸 후 한적한 곳으로 가서 눕습니다. 어디라고 했습니까? “노적가리” 곁입니다(3:7)! 이곳은 낮에 그들이 일하던 타작마당이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곳으로서 아무나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은밀한 곳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룻’과의 숨막히는 장면의 무대가 될 곳입니다. 포만감으로 ‘보아스’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밤은 깊어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정확히 자정입니다. 바로 이 운명의 시점에 ‘보아스’의 이불속으로 ‘룻’이 살그머니 파고들어 옆에 눕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절정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갑니다. 과연 이야기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까? 우리의 궁금증은 더해만 갑니다. ‘보아스’가 벌떡 일어나, “에라 모르겠다. 이게 웬 떡이냐?”하며 ‘룻’을 덥석 껴안을 것인가? 아니면 “아니, 너 이년 요망하도다”하며 그녀를 내팽개쳐 버릴 것인가? 우리의 궁금증을 더하기라도 하듯 화자는 이 장면에서 두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밝히기를 거부하고 삼인칭 대명사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한 여인.”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8절)
이 은밀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먼저 깬 쪽은 추위에 떨며 일어난 ‘보아스’입니다. 그는 엉겁결에 옆에 누운 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누구냐(3:9)?” 그런데 ‘룻’의 대답은 원래 각본에는 없던 대사입니다. 각본이라 함은 시어머니가 만들어 준 각본을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9절하)
‘룻’의 대답은 일종의 문학적인 표현으로, 직역하자면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다”(2:21)는 뜻으로서,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나오미’가 원래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보아스’가 먼저 할 일을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오미’의 계획이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봅니다.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일의 주도를 ‘보아스’가 아니라 ‘룻’이 쥐어버린 셈이기 때문입니다. ‘룻’의 대답은 일종의 명령입니다. 당시 하나님 나라에서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는 한 여인이 이스라엘 남자에게 당당하게 결혼해 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령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보아스’가 ‘고엘’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룻’은 ‘보아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여, 네 책임을 다하라.” 우리는 지난 장면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들려주었던 기도 제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2:12). ‘룻’의 대답인 즉은, “당신이 나를 위하여 기도했던 그것을 당신께서 이제 직접 이루어야 하시지 않겠습니까?”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에게 미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나의 결단과 행동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오자,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 묻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마 14:15). 게으르고 한심한 기독교인의 기도가 늘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제목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였습니다(마 14:16).
‘룻’의 요구는 과연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나오미’를 위한 것입니까? 그리고 ‘보아스’는 이 요구에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보아스’가 ‘룻’에게 들려주는 대답은 절정의 긴장감을 완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보아스’다운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의 대답인 즉은 ‘나오미’의 형편을 구속해 줄 더 가까운 ‘고엘’에게 일차 권해보고, 그가 책임을 회피하면 자신이 대신하겠다는 것입니다.
10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10-12절)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는 꽤나 긴 대화가 오고간 것 같습니다. 어떤 대화들이 오고갔을까요? 과연 두 사람은 잠자리를 같이 했을까요? 이들 질문은 이야기의 핵심에서 다소 벗어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보아스’의 인격입니다. 다음 대화를 통해서 그 증거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3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14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15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13-15절)
반복되는 표현들 즉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까지 누워있을지니라”,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등의 대화가 좋은 증거들이 될 것입니다.
3. 評價(3:16-18)
밤새 잠 한 숨 못자고 초조하게 기다렸을 ‘나오미’는 ‘룻’이 돌아오자 말자 궁금해 하던 모든 질문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가 궁금해 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6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17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16-17절)
그러나 이 장면에서의 강조점은 역시 ‘나오미’가 공허의 심연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가에 있습니다. ‘나오미’는 아직까지 “나오미 포물선”의 가장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1막의 마지막에서 보았듯이 지금 모든 것을 다 상실한 공허 그 자체였습니다. 그 공허가 바야흐로 채워 질 참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주며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고 하는 장면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명사형 “빈손”과 “공허”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보여주고 있는 이 행동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오미’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 또한 그 일을 미리 예측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18절)
연습과 토의
1. 제 3막의 제목을 구혼(求婚)이라고 했습니다만, 실은 적절한 제목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압’의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유력자 ‘보아스’에게 “네 책임을 다하라”고 상기시키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교회)가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법적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혹시 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룻’이 ‘보아스’에게 던진 것과 같은 명령을 받아본 적은 없습니까? 나누어봅시다.
2. 이 장면에서 ‘룻’과 ‘나오미’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4
成就
(4:1-17)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목에 또 하나의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헤세드’가 다시 한 번 운명이라는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불안한 가운데 있습니다. 지난 장면에서 ‘보아스’가 한 말로 미루어 볼 때(3:12-13), 이 두 사람이 어쩌면 결혼을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같아서는 이런 저런 사정 무시하고 그냥 해버리면 될 것 같은데, ‘보아스’가 하는 것이 답답하고 고지식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그리고 공격적으로 이 모든 까다롭고 어려운 법적 절차를 스스로 맞이하러 나아갑니다. 이 점에 있어 ‘보아스’는 ‘룻’과 닮은 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4막의 분위기는 3막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됩니다. 한 밤중이 아닌 백주(白晝)에, 은밀한 노적가리가 아닌 분주한 성문가에서, 단 두 사람만의 사적인 대화가, 아닌 공적이고도 법적인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결말이 우연이 아닌 필연, 즉 의지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현명한 독자라면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지 상상해 봅시다.
1. 節次(4:1-12)
이제 장면은 한 밤중 ‘나오미’의 집에서 성문가로 바뀌면서 ‘보아스’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1절)
그가 성문에 올라간 것은 원하는 사람을 빨리 찾아서, 이 결혼에 필요한 제반 법적 절차를 서둘러 마무리 짓기 위함입니다. 당시에는 모든 법적 행위가 이곳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하여 들로 밭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선지자들이 그 백성들의 타락을 외쳐대던 곳도 바로 이 성문 가입니다(왕상 22:10; 렘 17:19-20; 36:10).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던 곳도 이곳입니다(느 8:13).
이곳에서 ‘보아스’는 다시 한 번 우연히 “무명의 기업 무를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마침”이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보아스’가 이 사람을 부르는 태도입니다: “아무개 씨”(peloni almoni; Mr. so-and-so)입니다. 이 사람이 이름이 없었을 리도 없고, 또 당시 일반적인 호칭인 “형제여”라든지 “친구여” 등으로 부를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은 분명 화자의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자신의 책임도 제대로 떠맡기 싫어하는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그 이름이 기록될 자격조차 없다는 뜻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만일 기록되었다가는 그 후손들이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내리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스스로 이완용의 후손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어쨌든 이 사람은 그날의 할 일을 제치고 ‘보아스’와 마주 앉아,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주위에는 증인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2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2-4절)
‘보아스’는 정말 지략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나오미’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첫 마디는 ‘룻’과 결혼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가 팔려고 내놓은 땅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멜렉’의 소유라고 하는 이 땅의 유래나, ‘나오미’가 어떻게 그 땅을 갖게 되었는지는 이야기의 핵심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추측컨대, ‘나오미’와 그 가족들이 ‘모압’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엘리멜렉’이 이웃이나 친지에게 관리를 부탁했던 것인데, 나중에 ‘나오미’가 귀향하여 그 소유권을 되돌려 받아, 지금 팔려고 내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이 무엇이냐 하면, 이 땅을 현재의 소유주로부터 사들여서 ‘나오미’에게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엘리멜렉’입니다만, 누군가 관리를 위임받았다가 슬그머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엘리멜렉’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 자가 군 말없이 되돌려주었을 텐데, 혼자 사는 과부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무명씨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무르겠다고 합니다(4:5후). 아니, 이거 이야기가 너무 쉽게 풀리는 것 아닙니까? 이처럼 선선히 그 땅을 무르겠다고 하는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이 사람의 의도가 순수하다면,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리 있고, 책임 있는 사람으로 평판이 날 것입니다. 그것도 그렇게 큰 돈 들이지 않고 좋은 일을 하게 되었으니 一石二鳥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혹시 다른 의도는 없을까요? 듣자 하니 ‘나오미’의 후손이 없다던데, 만일 그렇다면 그녀의 死後 이 땅은 저절로 자기 소유가 될 것입니다. 더욱 좋은 것은 희년(禧年)이 돌아와도 되돌려 줄 필요도 없고 영원히 자기 소유가 되는 것이지요(참고. 레 25:13-17). 이 얼마나 멋진 투자입니까? 절대로 손해 나지 않는 사업입니다. 안 하는 사람이 오히려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래서요? 결론이 무엇입니까? ‘나오미’와 ‘룻’은 땅 판 재산으로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 이것입니까? 이것은 너무 무미건조한 결말입니다. 그리고 지난 밤 들녘에서 나누었던 두 사람의 낭만적인 사랑은 “고엘 법”이라는 규정에 묶여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아주 영리하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극적 반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전될 참입니다. 이제 이 남자가 증인들을 향해서 “내가 그 의무를 수행하겠노라”하면 모든 일이 끝날 참인데, ‘보아스’는 “고엘 법”의 교묘한 조건부를 조목조목 제시합니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5절)
그가 제시하는 조건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재산뿐 아니라 한 여인도 사와야 한다; (2) 그 여인은 이방 ‘모압’ 여인이다; (3) 그녀는 과부다; (4) 그 땅과 그 여인과 그리고 장차 낳게 될 아들은 모두 ‘엘리멜렉’의 소유가 된다; (5) 그가 현재 가진 재산마저 장차 ‘룻’에게서 태어날 아들들에게도 균등하게 분배해 주어야 한다. 그뿐이 아닙니다. 키우는 동안 양육비도 지급해야 합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손해밖에는 날 것이 없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이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긴장된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질 순간이기도 합니다. 결단의 순간이 이 남자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과연 이 모든 예상되는 손해를 무릅쓰고 앞에서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뒤로 물러서고 말 것인가. 지금 이 사람의 머리는 손익 계산서를 작성하느라고 굉장히 빨리 돌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계산이 끝났습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4:6)
그의 태도는 너무나 단호합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 무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까? 선택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헤세드’가 아님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을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선택이 ‘보아스’의 선택과 지극히 대조가 될 뿐입니다. 두 사람이 꼭 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동기의 차이는 바로 ‘헤세드’입니다. ‘보아스’는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즐겁게 그 책임을 떠맡았고, 이 “아무개 씨”는 회피했습니다. 한 쪽이 평범하고도 기대할 수 있는 선택을 했다면, 나머지 한 쪽은 전혀 예상 밖의 탁월한 선택을 했습니다. ‘오르바’와 ‘룻’의 대조만큼이나 이 두 사람의 대조 또한 두드러집니다.
이제 무명의 기업 무를 사람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대신 ‘보아스’가 증인들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엄숙하고도 상세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9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4:9-10)
1막 이후 처음으로 ‘엘리멜렉’의 가족 구성원 이름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보아스’ 때문에, 그의 ‘헤세드’ 때문에, 그 가문과 이름을 이어가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즉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태어나는 첫 아이는 ‘엘리멜렉’의 아들로서, ‘보아스’의 모든 재산과 가계를 이어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공증(公證)이라도 하듯 성 내의 모든 백성들과 장로들이 마치 장엄한 축복 송을 부르듯 ‘룻’과 ‘보아스’에게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11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4:11-12).
재미있게도 이 공증은 기원(祈願)과 동시에 명령을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첫 번째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룻’은 이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1절상). ‘룻’을 ‘야곱’의 두 아내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절의 시적 병행은 ‘보아스’의 행복한 결말에 관한 것으로서, 명예와 부에 관한 전통적인 약속입니다(11절후). ‘보아스’는 이제 젊은 아내 ‘룻’으로 인하여 ‘유다’ 집안의 명성과 맞먹는 명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이처럼 행복한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한데, 아직은 끝은 아닙니다. 두 가지 질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결국 후손을 얻게 될까?”; “‘보아스’와 ‘룻’은 진정 큰 왕국을 이루게 될까?”
2. 後孫(4:13-17)
이어지는 장면은 첫 번째 질문에 관한 내용으로서, ‘나오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나오미’가 무대의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계속 강조하거니와,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오미’입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초점도 “나오미 포물선”이 어떻게 완성되는가에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 장면의 분위기는 1막의 그것과는 모든 점에 있어 기막힌 대조를 이루면서 하나의 완벽한 대칭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격스러운 장면을 만나기 전에 13절을 먼저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13절)
사실 이 구절은 ‘나오미’가 아니라 ‘룻’에 관한 진술이라 무대의 중심에 놓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일견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절에서 ‘룻’의 신분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2:10) ⇒ 시녀(2:13) ⇒ 소녀(3:9) ⇒ 아내(4:13).
여기서 ‘룻’의 결혼이나 출산과 관련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룻’은 이전에도 결혼한 사실은 있습니다만 자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의 손길 때문입니다(13절). 바로 이 장면에서 비록 잠간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무대 밖에서 중앙으로 걸어 들어오고 계십니다. 이것은 1:6 이후 처음입니다. 두 경우 모두 화자의 의도적인 진술을 통해서입니다. 아주 멋진 수미상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그동안 마치 우연처럼, 숙명처럼 전개되던 모든 인간적인 이야기들이(2:1-4:12)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필연적인 방법”으로 용해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무대를 가득 메운 여인들의 장엄한 합창도 바로 이 점을 외쳐 노래하고 있습니다.
14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14-17절)
이 장면은 오페라의 절정입니다.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대 중앙에서 한 아이를 안고 서있는 ‘나오미’에게로 여인들이 달려 나오며 외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께서 네게 오늘 아들을 주셨도다.” 갑자기 하나님이 이 모든 연극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이 이 모든 반전의 위대한 원인이요 동기였습니다.
이 장면은 <룻 이야기>의 구성을 희극(戱劇)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극적 요소들을 다 담고 있습니다. 그 모든 비극적 요소들이 모두 반전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완전한 “나오미 포물선”을 쳐다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첫째, 그녀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1막의 비통한 외침, “내 이름을 마라라 하라”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4:17상)는 환희의 노래로 바뀌고 있습니다.
둘째, ‘나오미’에게 잃어버린 두 아들 대신에 기업 무를 아들이 생겼습니다(4:14).
셋째, 먹을 양식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가 자기를 봉양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4:15). ‘나오미’가 이 아들을 성장할 때까지 양육해주면, 그가 ‘오벳’, 즉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 어미를 먹여 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처음(1:1)과 정 반대되는 상황, 즉 왕이 생겼습니다(4:17). 바로 여기서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로 무대가 옮겨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자리는 ‘다윗’ 왕이 직접 통치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요?
3. 結末(4:18-22)
족보의 등장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치고는 진부하기까지 합니다.
18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18-22절)
우리가 이런 족보를 대할 때마다 따분하고 무의미하게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족보에도 신학이 있음을 우리는 또한 모르지 않습니다. <룻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속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와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말했듯이, 족보는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즉 현미경으로 보아야 겨우 보일 정도의 미미한 이야기가 이 족보에 들어옴으로써 마치 우리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듯 하나님의 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족보를 통해서 구원에 관계된 개인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족보 속에 이스라엘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 등을 만날 때마다, 구원이 “시내 산 계시”나 “오순절”과 같은 엄청난 사건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제는 왜 <룻 이야기>가 오순절 예배의 본문으로 채택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습과 토의
1. <룻 이야기>에서 요구하는 삶의 방식은 어떠한 것입니까?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행동을 중심으로 토의해 봅시다.
2. <룻 이야기>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다음의 질문들에 대해서 차례로 대답해 가면서 알아봅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이나 경험하고 있는 사건들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싶어 합니다. 사사건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을 때,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전도서 기자의 고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고민을 해결하고 갔을까요? ‘헤세드’가 이들 질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