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8과
서신의 命題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2:15-21약 47분 분량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
본문의 문학적 기능은 무엇이며 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가? 그리고 신학적 주제는 무엇이며 그것을 알 수 있기나 한가? 과연 본문을 <갈라디아서> 전체의 “대명제”(大命題)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즉 “명제”로서 갖추어야 할 수사학적(修辭學的)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본문을 통해서 관찰할 수 있는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의문 내지는 문제점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전후 문맥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즉 이 본문이 직전에 소개하고 있는 “안디옥 에피소드”(2:11-14)와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3장 이후의 본문과는 신학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 내적 일관성 내지는 사상의 흐름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비록 본문이 상호 연관된 일련의 논지(論旨)들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흐름을 쫓아가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유사한 선언들이 필요 이상으로 반복되고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셋째, 본문의 핵심 사상에 관한 질문입니다. 본문이 지극히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문장 구성이 극도로 압축되고 절제되어 있어 정확하게 무엇을 핵심적으로 드러내려 하는지를 가려내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면, 본문의 기능이나 전후문맥과 관련해서 학자들이 오래 동안 확신하지 못했던 점은 두 가지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이 이곳에서 “안디옥 에피소드”(2:11-14)에 대해서 요약을 하고 있는 것인가, 또는 본문을 3:1-4:11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하려고 하는 신학적 논의에 대한 서론으로 도입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이 학자들이 함의(含意)하고 있는 바는, 이 두 입장의 중간을 취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베드로’를 향한 개인적인 ‘메시지’로 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상대로 한 보편적인 ‘메시지’로 보자는 입장입니다. 예컨대, 사도는 이곳에서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하여 보다 보편적인 원리 선언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자면, 본문이 기능하는 바는 <갈라디아서>의 “명제”(proposition)로서, 그동안 “이야기”(narration)로 구성된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서, 동시에 향후 전개될 “검증”(probation) 작업에 대한 논리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단순히 ‘베드로’를 향한 ‘바울’의 개인적인 연설로 보기보다는, 비록 그러한 동기에서 출발했다 하드라도, 사도의 전체적인 간증(1:11-2:14)에 대한 요약으로 보아야 하며, 동시에 다음의 논의(3:1-4:11)를 위한 서론적 전이(轉移)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질문에 관해서입니다. 과연 본문에 내적 일관성이나 사상의 흐름이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명제”로서 본문의 형식과 내용이 과연 고대의 수사학자들이 정의하고 있는바 기능과 특징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즉 하나의 “명제”는 내용상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는 이미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고 논의를 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사학적(修辭學的) 특징으로는 “간결성” 및 “함축성”과 함께 “총괄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본문은 이러한 특징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서신 전체에 대한 “대명제”(大命題)의 기능을 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핵심 주제나 사상에 관한 질문이었는데 문장 구성이 극도로 압축되고 절제되어 있어 핵심 사상을 끄집어내기가 어렵다고 한 바 있습니다. 수사학(修辭學)에 있어서나 법의학(法醫學)에 있어, 하나의 “명제”는 항상 “변론”과 이에 대한 “검증”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3:1-4:11의 본문이 “검증” 부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가 풀리듯, “명제”(2:15-21)에서 전하려고 하는 핵심 사상이 보다 상세하게 그리고 천천히 드러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제 처음 물었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까?
문학과 역사
<갈라디아서>가 문학적 ‘장르’(genre)에 있어 서신임에 분명하지만, 그 의도하는 바에 따라 일종의 “변증서신”(辨證書信)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변증”이라함은 말 그대로 “변론”(argument)과 “증거”(probation)를 포함한다는 것인데, 이 둘은 실은 “법의학”(法醫學)이나 “수사학”(修辭學)에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법의학”에서 전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일련의 수사학적(修辭學的)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머리말(exordium): 피고든 원고든 화자(話者)의 특징과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중심 주제를 드러냄;
(2) 이야기(narration):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사실 설명
(3) 해설(명제)(proposition): 합의점과 미 합의점에 대한 언급과 검증해야 할 중심 주제들에 대해서 언급함;
(4) 검증(확인)(probation): 중심 논지들을 발전시킴;
(5) 반박(refutation): 상대의 논점들을 반박함;
(6) 결론(conclusion): 중심 주제들에 대한 요약과 더불어 동정적 반응을 유도함.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변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사도 직분”과 “그의 복음”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가 피고인의 자격으로 법정에 서있다면, 고소인은 그의 반대자들 즉 “유대주의자”들이며, 서신의 독자들은 배심원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피고소인으로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수사학적(修辭學的) 관행을 따르고 있으며, 본 서신 또한 그 형식이나 구조에 있어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수사학”(修辭學)에서 필요한 제반 요소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본 교재의 <서론>.
(1) 서신의 전문(prescript)1:1-5
(2) 머리말(exordium)1:6-11
(3) 이야기(narration)1:12-2:14
(4) 해설(명제)(proposition)2:15-21
(5) 검증(확인)(probation)3:1-4:31
(6) 권면(exhortation)5:1-6:10
(7) 서신의 후기 및 결론6:11-18
재판에서 고소인이나 피고소인은 재판장이나 배심원 앞에서 자신의 논지(論旨)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재판과 관련된 일련의 사실들을 먼저 “진술”(narration)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 때 진술은 간단하고, 명쾌하며, 사실에 근거한 믿을만한 진술이어야 합니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검증”(probation) 내지는 확인 작업인 만큼, 이곳에서 고소인이나 피고소인은 자신의 정당함을 알리기 위하여 일련의 증거들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두 행위 사이에 “논제”(論題) 또는 “명제”(proposition)가 위치하게 됩니다. 각자는 이곳에서 자신이 주장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간단명료하게, 압축적으로, 그러면서 포괄적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때 설득의 극대화를 위해서 두 가지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상례인데, 우선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명백한 사실들에 대해서 먼저 언급한 다음, 이어서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입니다. 이 때 두 요소가 기능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사실들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일단 기선을 제압해 놓은 다음, 곧바로 논쟁점들을 부각시키고, 이어서 “반박”(refutation) 작업에 들어감으로써 재판에서 승리를 얻어내자는 것입니다. “반박”이 “명제”에 뒤이어 곧바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위에서 구분한 방식에 따르자면, 본문(2:15-21)은 분명 “명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필요한 두 요소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요소, 즉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첫 두절입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15-16절)
두 번째 요소, 즉 아직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네 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다시 각기 두절씩 짝을 이루어 한 번은 부정적인 진술로(17-18절), 또 한 번은 긍정적인 진술로(19-20절) 논쟁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진술에서 그가 부인하고 있는 사실은 (1) 기독교인의 자유가 오히려 방종을 조장한다는 주장과 (2) 기독교 신앙생활을 율법주의에 두려는 일단의 시도에 대해서입니다. 한편 긍정적인 진술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기독교 신앙생활에 관한 대헌장입니다.
세 번째 요소 즉 반박을 통한 명제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쓸데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를 위하여 죽으셨다”(21절).
결국 사도가 이곳에서 제시하고 하고 있는 논점(論點)은, 3:1-4:11 사이에서 보다 상세하게 “검증” 작업을 펼치게 될 것이지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바로서, 율법이 구원에 있어 하는 역할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논제”입니다(15-16절). 우리는 이를 흔히 “반 율법주의”(anti-legalism; 反 律法主義)라 부릅니다. 이 “명제”에 대해서 사도는 3:1-18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검증”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검증” 작업은 삼중적입니다: (1) 역사적 사실(개인적 체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적(논리적) 논쟁을 통한 검증(3:15-18). 사도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논지는 율법이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흔히 “반 명목론”(anti-nomism; 反 名目論)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명제에 대한 검증 작업은 3:19-4:7 사이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비록 보편적인 기독교 진리 선언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안디옥 에피소드”를 계기로 벌어지고 있는 ‘바울’과 ‘베드로’ 간의 개인적인 수준의 논쟁 정도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본문이 기능하는 바는 서신 전체에 대한 “명제” 도입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전후 내용에 대한 연결 고리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논지 1: 우리가 알거니와(15-16절)
“안디옥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사도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만, 그는 이 체험을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두지 않고 배심원 즉 그의 수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논지”로 삼기 위한 소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이슈’는 “율법과 구원과 신앙”입니다. 사도는 먼저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명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유대∙기독교인”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는 것인데, 그야말로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이중적인 자기 인식을 포함하고 있는데, “혈통을 통한 자기 인식”과 “신학적 헌신을 통한 자기 인식”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첫 두절에서 이를 각각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5절)
‘바울’이 여기서 “우리”라고 할 때, 그는 이제 단순히 ‘베드로’만을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명제” 선언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유대’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면서,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관용적으로 사용하던 것으로서, “이방죄인”이라 함은 윤리∙도덕적인 측면을 의미하기보다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에서 요구하는 제의적이고 종교적인 규례들을 지키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조를 위해서 일종의 대조 반복의 수사(修辭)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유대주의자”들을 향한 일종의 역설 내지는 냉소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기독교인”에 대한 두 번째 자기 인식, 즉 “신학적 자기 인식”은 16절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15절과는 등가 접속사(等價 接續詞) “그리고...”로 연결시키는 것이 헬라어 본문에 대한 가장 무난한 번역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번역에서 이런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 옮긴 한글 번역은 <개역 개정>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판> 본문의 의미와 해석에 관해서는 Longeneck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R. N. Longenecker, 83쪽.
a(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b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c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
그러나 이 번역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장의 구성은 다소 산만하며, 그 내용 또한 불필요한 반복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그 내용에 있어 적어도 네 가지 정도의 핵심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 각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 이 단락이 서신 전체에서 신학적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들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바울’은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17절과 21절에서 다섯 번에 걸쳐 동일한 어근(語根)을 갖는 한 단어, “의”(儀; δικαι)를 여러 형태의 품사(品詞)로 바꾸어가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i) 동사형(3회, 16절)-“칭의”(δικαιόω, 디카이오); (ii) 동사형(1회, 17절); (iii) 명사형(1회, 21절)-“의”(δκαιοσύνη, 디카이오수네);
(2) “율법”(νόμος, 노모스)을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 한 사도의 태도;
(3) “율법의 행위”(ἔργων νόμου, 에르곤 노모)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πίστεως Ίησου Χριστο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 믿음인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인가?”
우선 “의”란 과연 무엇입니까? 첫 번째 특징인 “의”에 대해서, 기독교 역사에서 그 해석을 놓고 아주 다양하면서도 복장한 논의가 있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논의의 핵심은 사도가 이들 단어들을 사용할 때, 과연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의”(“의로움”이든 “칭의”이든)가 의미하는 바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윤리∙도덕적인 삶의 질”을 염두에 둔 것인가, 아니면 이와는 별개로 “선언적이고 법적인 관계나 신분”을 염두에 둔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그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로마 카톨릭’ 진영에서는 이 단어의 명사형인 “의로움”이나 형용사형인 “의로운”(정의로운)에 무게를 두면서 전자(前者)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칭의”(δικαιόω)는 최후의 심판 시에 내려지는 최종 판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면 개신교 진영에서는 이 단어의 동사형인 “칭의”에 무게를 두면서 후자(後者)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칭의”는 윤리∙도덕적인 의로운 삶이라기보다는 법적으로 전가되거나 선언된 “올바른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입장을 상호 보완적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즉 “올바른 관계”는 “올바른(의로운) 삶”을 수반하게 된다고 전제하자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도가 “칭의” 즉 “의롭게 되다”라는 동사형을 사용할 때에는 늘 법적이고 관계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고, 반면 이 단어의 명사형이나 형용사형에는 늘 “正義로운 행동”과 연관해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한 단어에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16절의 선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믿다”의 태(態)가 “완료형” 즉 돌이킬 수 없는 행위로서 “의롭게 되는” 것은 그 결과 수반되는 당연한 법적인 신분이나 관계의 변동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나머지 구절에서 동사형으로 네 번(16-17), 그리고 명사형으로 한 번(21절) 등장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경우에서는 신분이나 관계보다는 “행동 방식”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17절상).
이제 16절의 두 번째 특징으로 거론한 바 있는 “율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도가 이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가를 놓고서도 역사적으로 광범위한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그 논의의 바탕에는 “율법”에 대해서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듯한 ‘바울’의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의롭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롬 7:12, 14; 딤전 1:8). 이 때 그가 말하는 율법은 “모세 율법”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여러 곳에서 그는 율법을 “그리스도의 공적(功績)”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비난하며 공격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가 바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모세 율법”을 어떤 형태로든 “의”와 연관되는 하나의 종교 제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결국 ‘바울’과 “율법”에 대한 논의에 있어 분수령이 되는 곳은 사도가 이러한 종교적 제도로서의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핵심 요점은 이것입니다: “사도는 율법 그 자체를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 또는 율법주의 즉 율법을 하나님의 호의(好意)를 얻는 수단으로 보려하는 특정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인가?” ‘알렉산드리아’ 교부들과 ‘안디옥’ 교부들은 바로 이 점에서 완전히 반대편의 입장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입장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위 “율법주의”와 관련해서, 비단 ‘바울’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심지어 ‘유대’교의 ‘랍비’들마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는 단순히 “율법주의” 그 자체를 비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종교 체계” 전체를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율법주의”에 근거한 종교 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새로운 관계를 예비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에 의해서 대체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 점을 이어지는 “검증” 단락에서(3:1-4:11) 보다 상세하게 밝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특징으로 지적한 바 있는 “율법의 행위”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울 만한 어떤 “선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까? 또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를 말합니까? 아니면 보다 제한 적이면서도 덜 편파적이며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할례”나 “안식일 준수”나 “식사 규례” 등과 같은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마지막 행위는 ‘유대’인을 가장 ‘유대’인답게 해주는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이기는 하나, 그 자체로서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명목론”을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행위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목”(名目論, nomism) 또는 “명목주의”(名目主義)는 일명 신율주의(神律主義)로 불리는데, 이와 비슷한 용어인 “율법주의”(律法主義, legalism)와 함께 1 세기 유대∙기독교인들의 신학과 신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바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면, “명목론”은 구원 후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를 얻기 위한 통로 또는 수단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며, 한 편 “명목론”은 기독교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유대인으로서 할례나 안식일 준수나 음식에 관한 규례 등과 같은 최소한의 율법의 요구 조건들은 만족시켜야 한다는 입장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구원을 말하고 있다면, 명목론은 구원 이후의 삶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유대’인이라면 기독교인이 된 이후라도 체질적으로 “명목론자”가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문제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바울’의 복음과는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목론”에 빠진 초대 교회 당시 ‘유대’인들조차도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 공적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보이는 즐겁고도 자발적인 반응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즉 일 세기 경 “유대주의”는 근본적으로 “율법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조차도 “솔로몬의 기도”에 관해서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도 부족한 것도 없고 보상을 필요로 하는 분도 아니므로 인간이 그 행위로써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준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이다”고 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16절에서 선언하고 있는 바도 바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으로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이점 ‘야고보’나 ‘베드로’나 다른 유대∙기독교인들 모두 공유하고 있었던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약속의 ‘메시야’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믿음의 본질에 관한 확신 위에,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대상(또는 내용)에 관한 확신을 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 세기 유대∙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종교적인 “명목론”에 빠져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혈통으로는 ‘유대’인이면서 신학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으니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를 믿되 ‘유대’적인 관습이나 규례들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대’인에게 있어서야 이런 입장이 절묘한 타협일 수도 있겠으나, 이방인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요구하게 되면 “복음”과 “율법”은 대척점에 설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는 “율법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이를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있었다면,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부지불식간에 이를 드러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울’에게 있어 “율법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에게 있어 “율법의 행위”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소위 “명목론”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율법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 준수를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종교 체계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유대’인을 가름하는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사도는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점 동료 유대∙기독교인들도 동의하고 있는 바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제 16절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헬라어 본문 “pivstew" Cristou' jIhsou”(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토스)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본문의 “예수 그리스도”의 품사(品詞)를 목적격 소유 형태로 볼 것인가, 또는 주격 소유 형으로 볼 것인가에 있습니다. 목적격 소유로 변역하게 되면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faith in Jesus Christ)이 될 것이나, 반면 주격 소유로 번역하게 되면 그 의미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faith 또는 faithfulness of Jesus Christ)으로 완전히 달라집니다. 대개의 경우, <개역성경>우리 말 성경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 jIhsou Cristou)를 목적격 소유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그 반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이 헬라어 표현이 <바울 서신>에서 등장하고 있는 빈도는 일곱 번에 불과하여(2:16에서 두 번; 3:22; 롬 3:22, 26; 엡 3:12; 빌 3:9),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pivsti", 피스티스)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단어 ‘에무나’(הנןמא)는 “믿음”(faith)과 “신실함”(faithfulness)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와 비교해 본다면, 두 가지 가능한 경우 중에서 어떤 해석을 취할 것인가는 생각보다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미쁘심”(pivstin tou' qeou)(3:3)이나 “아브라함의 믿음”(pivsti" jAbraa;m)(3:4) 등에서 보듯이, “pivstew" Cristou' jIhsou”(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토스), 또한 주격 소유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는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기독교 복음의 객관적인 근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의 복음의 객관성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순종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그의 삶 전체와 소극적으로는 그의 죽음이 절대적 순종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복음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pivsti" Cristou' jIhsou)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대응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음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서신>에는 기독교 신앙의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근거가 균형 있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기독교 신앙의 객관적 근거와 주관적 체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πίστις Ίησου Χριστου)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함께 등장하고 있는 성경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διά πίστις Ίησου Χριστου;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2)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έπαγγελία έκ πίστεως Ίησου Χριστου;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기초한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함이라”(갈 3:22); (3)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τὴν διά Χριστου;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16절 역시 그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일부를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16절상)
이 번역에 따르면 상호 반명제(反命題)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또는 신실함)”이지,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객관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에 있는 것이지 “율법에 기초한 사람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유대∙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16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를 수사적 반복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왜냐하면) 육체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하)
이 부분에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동사 “믿다”의 시제(時制)는 완료형으로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행위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목적하는 바는 “의롭게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16절의 마지막 문장에서 못 박음으로써,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논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논지 2: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20절)
부정적 진술. 사도는 15-16절에서 유대∙기독교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믿는가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고 합의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 자신의 논지를 요약한 바 있습니다. 논지의 요점은 소위 “율법주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17-20절 사이에서 두 번째 논지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 내용은 피차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사항 즉 “명목론”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논쟁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도 유대∙기독교인처럼 율법이 요구하는 종교∙제의적인 요구조건들을 준수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절)
그러나 이 구절은 보기보다 복잡하며, 그 해석 또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된 바 있습니다. 우선 이 구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의 논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고 있다; (2) 그런데 우리는 지금 죄인으로 몰리고 있다; (3)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죄를 조장하는 자이다. 마치 삼단 논법과도 같은 이들 논점과 관련해서 우리의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여기서 어떤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가 아니면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몰리고 있다는 말은 과연 사실인가? 사도는 지금 반대자들의 공격과 비난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대응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한다는 주장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인가?
우선 첫 번째 논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한 것”은 과연 사실입니까? 이 논점은 조건 절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문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사실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만, 15-16절 사이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바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신자(信者)의 지위나 신분 및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1:22; 2:4; 3:14, 26, 28; 5:6, 10).
보다 중요한 질문은 두 번째 논점, 즉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원문의 의미에 보다 가까운 번역은 “우리 자신조차도 죄인으로 드러난다”가 될 것인데, 이 표현은 15절에서 “우리는 이방 죄인이 아니라”는 선언을 연상시켜 주기도 합니다. 사도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고 결국 죄인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입니까? 또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이방인에 비해서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또는 “율법주의자”들의 다음과 같은 공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당신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살지 않으면 당신의 방종한 생활을 점검할 방법이 없다. 만일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모든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결국 도덕적 파탄의 책임자이고 죄를 짓게 하는 원흉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유의 한계를 넘어 방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이방 죄인들에 비해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수준이다. ‘바울’의 복음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면, 그가 늘 주장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본 교재의 <서론>에서 밝힌 바 있듯이, 사도가 ‘갈라디아’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유대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로서 이방 기독교인도 ‘유대’ 율법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주장; (2) ‘갈라디아’ 교인들 자체의 문제로서 방종을 수용하고 용인하는 태도. 순전히 신앙의 실천적인 면만을 고려해 본다면, 전자의 태도는 후자의 태도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열망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때,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말한 사도의 진의를 추측해 보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는 지금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즉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이 높은 도덕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은 하나 실제로는 죄를 짓고 있다는 시각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비록 “칭의”(稱義)가 순전히 법적인 선언으로서 윤리∙도덕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드라도, 기독교인으로서 높은 윤리∙도덕적 수준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의 반응은 적절한 것이며, 더 나아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죄를 조장하는 자”라는 세 번째 논점까지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는 서신의 후반부에서(5:13-26)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도덕적 방종이나 타락은 더 엄격하고 더 많은 율법을 적용한다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령의 인도에 따름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냥 감정 섞인 결론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왜 그럴 수 없습니까? “왜냐하면..”의 후치사(後置詞)로 시작하는 18절이 그 해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절)
사도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율법과 결별한 후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율법주의”를 거부하면서 “명목론”을 지지하게 되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사도는 지금 일종의 반어법적인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즉 “내가 만일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라는 식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실과 반대되는 가정(假定)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에 대해서 가정을 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아마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베드로’나 다른 유대∙기독교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이 문장에서 마치 자기 자신이 그런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일인칭 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17절에서는 반대로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비난을 자신에게 돌리는 식의 이런 수사적 기법은 상당히 외교적이기까지 합니다.
사도가 “율법을 헐었다”고 할 때, “율법주의”는 물론 “명목론”조차 결별했다는 말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때 동사 “헐었다”의 시제가 “완료형”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적 진술. 이어지는 두 절에서 사도는 유대 “명목론”에 대한 자신의 신학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20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19-20절)
그가 제시하고 있는 논점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 스스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동시에 이를 뛰어넘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데 있다; (2) ‘그리스도’의 죽음과 효력-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확인할 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3) ‘그리스도’ 중심 신앙생활- ‘유대’인이나 유대∙기독교인들이 율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그들 속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삶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하게 된다.
율법이 하는 일이 과연 무엇입니까? 사도는 이 질문과 관련해서 나중에 보다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지만(3:19-4:7), 19절에서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 요약해서 핵심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율법이 하는 일은,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친밀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의 영향력이 더 이상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옮겨놓는 일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이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롬 6:2, 10-11; 7:2-6). 반대로 “...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롬 6:10-11; 14:7-8; 고후 5:15). 율법에 대하여 죽은 목적은 율법을 부정하거나 무효화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는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일인칭 단수롤 사용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삶과 죽음의 체험을 개인화하고 있는데, 그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합니다. 즉 이전에는 타인이 받아야 할 비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강조의 효과가 다소 미약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 다른 모든 신자들과 공유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희망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은 무엇입니까?” 해답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자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체험으로 동일시할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스러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초대 교회의 설교의 핵심이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1:4; 3:1, 13; 6:12, 14).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구원 또는 구속과 관련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만(롬 3:23-26; 5:9-10, 18-19; 6:1-7; 7:14-25), 이곳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1-6에서 이 개념을 예시를 통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는 바로 이런 체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문자적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체험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으로서, 과거에 행위가 단 한 번 이루어졌고, 그 결과가 현재까지 미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선언의 의미는 이 문장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한글 성경을 비록해서 많은 영어 번역본에서는 이 문장을 20절에 두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헬라어 성경에서는 19절의 끝에 두고 있습니다(본 교재에서도 헬라어 역본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럴 경우, 다중적(多重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에 합당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 영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2) 그러한 영향력의 상실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보다 풍성한 관계를 맺는데 필수적이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요구한다; (4)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동일 시 함으로써 그분이 성취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함께 체험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말고 또 다른 체험은 없는가? 20절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20절은 등가접속사 “그리고”(δέ)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19절의 논의에 이은 또 다른 논리를 소개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상). 또 다른 체험이란 나 자신의 “육체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장에서 “나”는 헬라어로 “육체”(σάρξ, 사르케) 또는 “육체의 소욕(所欲)”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령” 또는 “성령의 소욕”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5:13-24).
이런 자유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갈 1:22; 2:4; 3:14, 26, 28; 5:6, 10.
“기독교 신비주의”(Christian mysticism)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비주의”란 대체로 무아지경, 황홀경, 금욕주의적인 명상, 신적인 몰입, 등을 연상시켜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이와는 반대로, 진정한 자아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본래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지, 이를 부인하거나 이로부터 도피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어떤 황홀한 방법으로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와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반응하면서 그분과의 인격적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한 쪽 측면인 “그리스도 안에서”와 유사한 표현으로 “그 안에서”, “주 안에서”, 또는 “성령 안에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만 무려 164회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와 유사한 표현으로서는 내(또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 갈 2:20; 골 1:27, 29; 엡 3:16-17).
“기독교 신비주의”가 개인의 삶속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예로서, “성령 충만”의 삶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갈 5:22-23).
한 개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되므로 자신의 “육체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고 했습니다(20절상). 이제 사도는 20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논지를 계속 이어가면서, “그리스도가 내안에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추가로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하).
즉 기독교 삶은 믿음의 삶이며, 그러한 삶의 토대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16절).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대한 헌신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결론: 폐하지 아니하노니(21절)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수사적(修辭的) 성격 상 반박(refutation)이며, 기능상 그가 펼친 대 논쟁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즉 사도는 이곳에서 반대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논쟁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이 문장은 전체 논제의 마지막 문장으로서, 앞의 문장들과 어떤 구문론적인 연결이 없이 갑자기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21절의 전반부는 반박문에 해당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 하노니”(21절상). 이 문장의 동사 “폐하다”는 일종의 법적인 용어로서, “언약”이나 “유언” 또는 “조약” 등을 무효화 하거나 폐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가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반박문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의 반대자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들 반대자는 ‘바울’이 전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의 복음”이 실은 방종을 조장하므로, 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극히 짧은 한 문장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곧 이어 이에 대해 보다 소상하게 “검증” 작업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3:1-4:11).
반박에 이은 결론이 21절 후반부에 등가 접속사 “왜냐하면...”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반박에 대한 자신의 해설이자 설명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하). 사도는 16절에서 이미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는 “유대주의자”들의 확신이 잘못된 것임을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의 마지막은 수사적(修辭的) 기능상 일종의 귀류법(歸謬法)에 해당합니다. 그 내용은 그동안 사도가 힘써 싸워왔던 복음의 핵심 내용,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한 최종 진술로 볼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믿음)”은 공존할 수 없고, “율법으로 말미암을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에도 아무런 공통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훈과 적용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에서 두 가지 큰 유혹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유혹이고, 다른 하나는 조그만 업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려는 유혹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도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 유혹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두 가지 신학적 오류입니다. 그 첫 번째가 “율법주의”로 불리는 것이고, 두 번째가 “명목론”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길, 즉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율법을 준수하는데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신학에 따르면 율법을 모르는 “이방죄인”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목론”은 보다 은밀하고 그럴 듯한 신학처럼 보입니다. 즉 이방인도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있으나, 계속해서 의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하나님의 호의를 입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요구하는바 일련의 규례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규례는 주로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규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음식규례; 안식일 규례; 할례의 규례; 등). 다시 말하자면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이방인 기독교인이 율법의 규례로 재무장 하지 않으면, 윤리∙도덕적으로 방종으로 흐르게 되며, 율법은 이를 막는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논지입니다.
지금 ‘바울’은 피고소인의 신분으로 법정에 서 있습니다. 그를 고소한 자들은 유대인과 유대∙기독교인들입니다. 피의(被疑) 내용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그가 율법무용론자이며 또한 도덕폐기론자라는 것입니다. 율법무용론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고, 도덕폐기론자로서 자유를 넘어 방종을 조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배심원으로 자격으로 앉아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변론과 검증을 듣고 있습니다.
사도는 피고소인으로서, 그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진술했고(1:13-2:14), 이제 본격적으로 그가 변론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요약해서 설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지는 아주 압축되어 있고, 함축적이며, 그러면서도 서신 전체를 대변하고 망라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물론 배심원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사학적 기법들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지는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첫 단계가 이 재판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관객들이 하나같이 인정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확인된 사실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15-16절). 처음부터 논쟁의 소지가 있는 문제들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재판에서 현명한 일은 못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듣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 후, 비로소 논쟁이 되고 있는 사안들 즉 피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17-20절). 이 부분에서 그는 반복을 통해서 자신의 논지가 정당함을 주장하는데, 한 번은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17-18절), 또 한 번은 긍정적인 진술을 통해서(19-20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고소인들이 반론의 논리를 만들기 전에, 그리고 배심원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긍정과 감동의 물결이 채 사라지기 전에, 최후의 반박 진술로써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21절).
우리가 알거니와(15-16절). 이제 사도의 첫 번째 논지를 살펴봅시다. 피고소인이고 배심원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유대인이며 이방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선언은 특히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들에게 대하여 한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온 자들이며, 율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인 죄인들과는 당연히 구별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할례나 안식일이나 음식 법을 제대로 알 리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 말 속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뽐내는 자들에 대한 냉소와 비아양이 깔려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과연 너희들도 율법을 잘 알고 지키고 있느냐?”
혈통은 그렇다 치고, 기독교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신학적인 입장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16절에서 당장하고 있는데, 이 선언은 다름 아닌 <갈라디아서>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입니다:
a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b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c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
일견 문장의 구성이 다소 산만하며, 그 내용 또한 불필요한 반복의 연속처럼 보입니다만, <신약> 전체를 통해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네 가지 핵심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각각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치명적으로 중요합니다. 우선 이들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의”, “의롭게 됨”(칭의); (2) “율법”; (3) “율법의 행위”;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이들 각각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의”란 “윤리∙도덕적인 삶의 질”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선언적이고 법적인 관계나 신분”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단어는 일종의 법률적인 용어로서, 법정에서 내려지는 최종 판결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칭의”는 구원과 관련하여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로 볼 수 있습니다(죤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유죄 선고가 아니라 무죄 선고 즉 “의인”으로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사도는 이 질문에 대해서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가지 행위를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에게 있어 “율법의 행위”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소위 “명목론”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율법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 준수를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종교 체계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유대’인을 가름하는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사도는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점 동료 유대∙기독교인들도 동의하고 있는 바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그렇다면 해답은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있는 다른 행위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 쯤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헬라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faith 또는 faithfulness of Jesus Christ)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있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 행위를 기독교 복음의 객관적인 근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의 복음의 객관성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순종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그의 삶 전체와 소극적으로는 그의 죽음이 절대적 순종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의 주관적인 대응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6절 일부를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16절상)
이 번역에 따르면 상호 반명제(反命題)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또는 신실함)”이지,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객관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에 있는 것이지 “율법에 기초한 사람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유대∙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16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를 수사적 반복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왜냐하면) 육체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하)
이 부분에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동사 “믿다”의 시제(時制)는 완료형으로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행위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목적하는 바는 “의롭게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16절의 마지막 문장에서 못 박음으로써,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논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20절). 이쯤 해서 사도는 피차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사항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명목론”에 관한 것입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도 유대∙기독교인처럼 율법이 요구하는 종교∙제의적인 요구조건들을 준수해야 하는가?” 그의 대답은 결론적으로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소인들의 주장이 아무 근거도 없고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왜냐하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7-18절)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명목론”의 주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일종의 자기모순이 될 수밖에 없는데, 기독교인이 율법과 결별한 후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율법주의”를 거부하면서 “명목론”을 지지하게 되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사도는 지금 일종의 반어법적인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즉 “내가 만일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라는 식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베드로’나 다른 유대∙기독교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이 문장에서 마치 자기 자신이 그런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일인칭 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17절에서는 반대로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사도가 “율법을 헐었다”고 할 때, “율법주의”는 물론 “명목론”조차 결별했다는 말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 “명목론”에 대한 자신의 신학의 핵심을 19-20절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율법의 목적; (2) ‘그리스도’의 죽음과 효력; (3) ‘그리스도’ 중심 신앙생활.
율법이 하는 일이 과연 무엇입니까? 역설적이긴 하지만 율법이 하는 일은,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친밀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의 영향력이 더 이상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옮겨놓는 일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이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하며, 반대로 “...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목적은 율법을 부정하거나 무효화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는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일인칭 단수롤 사용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삶과 죽음의 체험을 개인화하고 있는데, 자신의 희망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해답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자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체험으로 동일시할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스러워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말고 또 다른 체험은 없는가? 20절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상). 또 다른 체험이란 나 자신의 “육체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장에서 “나”는 헬라어로 “육체” 또는 “육체의 소욕(所欲)”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령” 또는 “성령의 소욕”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5:13-24).
한 개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되므로 자신의 “육체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고 했습니다(20절상). 이제 사도는 20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논지를 계속 이어가면서, “그리스도가 내안에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추가로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하).
즉 기독교 삶은 믿음의 삶이며, 그러한 삶의 토대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16절).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대한 헌신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폐하지 아니하노니(21절). 사도는 마지막으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반박의 핵심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견 느닷없이 보이는 이 선언은 실은 그의 반대자들의 집요한 공세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의 반대자는 ‘바울’이 전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의 복음”이 방종을 조장하므로, 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극히 짧은 한 문장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곧 이어 이에 대해 보다 소상하게 “검증” 작업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3:1-4:11).
반박에 대한 자신의 해설이자 설명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하). 사도는 16절에서 이미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는 “유대주의자”들의 확신이 잘못된 것임을 설파한 바 있습니다. 이 선언은 그동안 사도가 힘써 싸워왔던 복음의 핵심 내용,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한 최종 진술로 볼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믿음)”은 공존할 수 없고, “율법으로 말미암을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에도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토의 문제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본문은 <갈라디아서> 전체에 대한 일종의 <Magna Carta>로 볼 수 있는데, 어째서 그러한지 토의해 봅시다.
3. “율법주의”와 “명목론”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오늘 교회에서 “명목론”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지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